[기자회견문]

 

피임약 재분류 결정은 여성의 결정권과 의료접근권을 중심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경구피임약과 사후 응급피임약 모두를 일반의약품으로 허용하고

 

여성의 의료 접근권을 확대하라

 

지 난 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이 피임약에 대한 재분류 안을 발표한 이후 이에 대한 논쟁과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안을 둘러싼 의사-약사 간 논쟁과 식약청의 해명, 미디어에서 양산해내고 있는 논조들은 그 어디에서도 진정 여성의 삶과 건강을 위한 의료 체계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신체와 생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에 이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성은 자신의 삶을 고려하여 임신과 출산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선택의 내용에 상관없이 그 과정에서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충분한 의학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피임약의 보급과 이용에 대한 정책적 결정은 여성들에게 임신, 출산에 관련된 의학적 정보와 의료 접근권, 의학적 조치에 대한 선택권 그리고 이를 위한 제반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약의 부작용 정도만을 근거로 의-약사 간 이권 경쟁에 둘러싸여 피임약에 대한 현실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여성들의 삶과 건강을 더욱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피임약의 부작용은 재분류 안의 납득할만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식 약청은 이번 재분류 안에 대해 경구피임약이 지닌 부작용으로 인한 장기 복용 시의 위험성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경구피임약은 이미 지난 40여 년간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어 왔고 6,70년대에는 심지어 정부가 가족계획정책을 통해 경구피임약을 적극 권장하고 보급해 왔다. 식약청은 의약품 재분류 심사가 도입된 시기가 85년이라 그 이전에 승인된 약들에 대해 분류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경구피임약의 안전성을 강조하며 복용을 적극적으로 권장, 홍보해 온 정부와 의사, 약사, 제약회사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의사들은 그 동안 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처방전을 발행해 왔던가.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고, 개인의 건강 상태나 연령, 병력, 장애 등에 따라 부작용이 미치는 영향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심각한 건강상의 위협을 미칠 수 있는 약제가 아니라면 결국 문제는 피임약의 부작용 위험성이 아니라 약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개개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약을 이용하게 만들고 있는 의약계의 현 관행과 의료 시스템에 있는 것이다.

 

게 다가 우리나라 여성들의 경구피임약 이용률은 겨우 2%가 채 되지 않는 수준에 불과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지속적인 피임을 위한 장기복용 보다는 단기적인 생리 조절과 휴가철 일시적 피임 등을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다양한 용도로 피임약이 처방되고 있지만 약의 성분과 부작용 등에 관한 충분한 안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들의 장기복용에 따른 부작용과 오남용을 우려하여 경구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복용의 목적과 사용 기간 등 여성들의 피임약 이용 현황에 대한 사회, 문화적 차원의 분석 없이 피임약의 부작용만을 강조하며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피임약에 대한 제한 대신 의료 접근성 확대와 사회 인식 개선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라

 

피 임약은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청소년과 저소득층, 비혼/미혼의 여성, 장애여성이나 만성질환을 가진 여성 등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로 인해 일일이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기 어려운 여성들에게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정부가 진정 여성들의 건강을 우려한다면 모든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스스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경구피임약과 사후 응급피임약을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허용하여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되, 약제의 특성과 부작용, 개인별 특성에 따른 위험요소 등에 대한 철저한 복약 안내를 의무화하여 여성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관행대로 단순히 출산력 연구만을 목적으로 피임약 복용 실태를 조사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의 피임약 이용 현황을 조사, 연구하여 여성들이 안전하게 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는 제반의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의약품의 부작용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여성들이 산부인과에서 자유롭고 편하게 건강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개선과 함께 주치의 제도 도입, 의료 복지 확대 등 공공 의료 시스템의 개편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임과 임신, 출산에 대한 책임이 더 이상 여성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다양한 피임 실천에 대한 홍보와 성교육 대중화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피임약의 부작용만을 근거로 한 제한 조치들은 의사와 약사, 제약회사들의 이권 경쟁에만 휘둘릴 뿐 여성들의 건강과 삶에는 도리어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와 식약청은 피임약 재분류 안을 다시 논의하고 여성의 임신 출산 결정권과 의료접근권 확대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제반의 정책들을 마련하라!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요구가 충실히 반영되고, 정책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여성들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나갈 것이다.

 

<우리의 요구>

-경구피임약과 사후 응급피임약을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허용하여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라!

-여성들이 피임약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피임약에 대한 정보와 복약 안내를 의무화하라!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자유롭게 이용하며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개선과 의료복지 확대, 의료시스템 개편방안을 마련하라!

-피임과 임신, 출산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성교육 대중화 정책을 마련하라!

 

2012년 6월 15일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건강과 대안 젠더와 건강팀, 노동자연대 다함께,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붉은몫소리, 사회진보연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 전국여성연대, 전국학생행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진보신당 여성위원회/성정치위원회, 통합진보당 여성위원회/성소수자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사)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언니네트워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장애여성공감, 피자매연대,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

 

대학 단위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다함께 연세대 모임, 동국대학교 총학생회, 서울대학교 사회대 학생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 OBJECTION, 연세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앨리스’, 연세대학교 학생행진, 이화여자대학교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위원회, 이화여자대학교 총학생회,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 차별 없는 사회를 실현하는 대학생 네트워크 ‘결’, 한신대학교 총학생회, 한양대학교 반성폭력․반성차별 모임 ‘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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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7:27 2012/06/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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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12/06/17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유럽의 여러 나라는 의료적 이유로 경구피임약을 의사의 진단을 통해서만 살 수 없습니다. 피임약에 대한 접근권의 확대는 일반의약품화가 아니라, 관련 의사, 상담원 양성 등 병원, 보건체계의 구조개혁(혹은 산부인과에 대한 접근권 확대)을 통해 달성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 "개인"의 결정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듯 싶네요.

  2. 다함께 연세대모임 2012/06/18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지정에 반대하고 나선 연세대 총여 '연세好talk' 입장에 대한 다함께 연세대모임의 반박 성명입니다.

    총여학생회의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 반대 입장’에 대해 -
    여성들이 스스로 피임을 선택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지난 11일 연세대와 한양대 총여학생회는, 사후피임약을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동안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에게 성관계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약값과 무관한 '진료비'까지 지불해야 했었다. 이 때문에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지정은 여성계의 오래된 요구였는데, 두 대학의 총여학생회는 오히려 앞장서서 이를 비난한 것이다.

    총여학생회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사후피임약을 맹신한 나머지 사전피임을 소홀히 하게 되어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가 증가”할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사전피임 역시 실패하는 경우도 많으며, 성관계 전에 미처 피임을 할 수 없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후 3일 안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는데, 의사 처방을 받도록 절차를 번거롭게 하면 시기를 놓쳐 피임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사후피임약은 의사 처방 없이도 복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총여학생회는 “피임 상식이 낮은 이 나라에서, 대다수의 여성들은 이용이 편하다는 이유로 사후피임약을 일반 피임법으로 오인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데, 호르몬 조절로 인한 신체적 스트레스를 느끼는 당사자인 여성들의 판단력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발언이다. 또한 “피임에 대한 전국민적 인식이 지금보다 개선”되기를 바라는 총여학생회가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여성은 스스로 임신과 피임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 성관계 사실을 털어놓는 일은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든 불쾌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 중에는 성폭행 피해자인 경우도 있어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불평등한 남녀 관계, 남성들의 콘돔 사용 거부 등의 이유로 피임약을 복용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여성의 낙태권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성관계에 더 큰 부담을 느끼고 피임을 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남녀 간의 불평등이 해소돼야 하고, 성관계에서 피임의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현실, 낙태 처벌 등의 현실이 개선돼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전피임약이든 사후피임약이든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을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두 총여학생회는 "오∙남용을 줄일 수 있다"며 지금까지는 일반의약품이었던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에는 찬성하고 있다(<조선일보> 6월 9일자). 대다수의 여성들이 "성관계 허락 받으러 산부인과 가는 기분"이라며 사전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지정에 반발하고 있는데 또 한번 그와는 정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연세대 총여학생회는 결국 사전피임약이든 사후피임약이든 여성들이 쉽게 피임할 수 있는 수단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해 그 동안 피임약을 사용해 온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연세대 총여학생회가 진정으로 여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가에 의문을 품게 한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보장은 여성들의 매우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총여학생회가 잘못된 입장을 철회하고 진정으로 여성들의 현실과 처지에서 여성들의 권리와 이익을 방어하는 데 나서길 바란다.

    2012. 06. 13
    다함께 연세대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