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작은 꽃 아픔으로 피다, 농성장에서 만난 혁명기도원/우리의 투쟁이 더 풍요롭고 행복하기를(권수정)

 

작은 꽃 아픔으로 피다, 농성장에서 만난 혁명기도원

/ 우리의 투쟁이 더 풍요롭고 행복하기를

 

 

권수정

 

 

현대차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여성노동자가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복직을 요구하며 여성가족부 앞에서 197일의 농성 끝에 사측과 합의하던 12월 14일 저녁, 혁명기도원과 함께하는 스물두번째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하고 다음날 농성장을 철수하여 아산으로 내려왔다.

 

외롭고 고단한 투쟁의 현장에서 혁명기도원은 스물두번의 기도회를 통해 무엇을 하였을까. 작은꽃 아픔으로 피다, 농성장을 지키던 한사람으로서 내가 느낀 혁명기도원의 농성장 기도회에 대하여 쓴다.

 

 

1. 믿음과 기도

 

 

1)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

14년 동안 일하던 현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그것을 말했다고 해고된 피해자가 490일을 싸우고 복직에 합의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당사자인 언니에게 쉽지 않은 투쟁이었는데 어려운 시기마다 언니는 정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수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이유가 뭔가’ 묻는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 포기하면,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지금 포기하면 하청 여성노동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현장에서 성희롱 당하면서 말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 그럴수는 없다.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는다.”

그랬다. 어려운 싸움을 하는 피해자에게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이 든든하게 빽이 되어 주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니의 버팀목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어쨌을 뻔 했나. 힘든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언니가 과연 이 상황을 이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때 마다 하나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언니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삶의 고비 고비 어려울때 마다 지켜주고 위로해준 단 하나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언니는 의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인민에게 언니의 하나님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없는 걸까. 삶의 고단함에 지친 인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착취 없는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속에 나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지치고 각박해지기도 하는데, 해방을 향한 사회주의가 더 넉넉하고 풍요로울 수는 없는 것인지, 지금도 고민한다.

 

 

2) 아름답게 마무리되길 기도하는 목사님

아산공장 앞에서 농성을 하던 지난겨울 언니가 다니던 인주감리교회 목사님은 자주 오셨다. 찬바람 속에 농성하는 언니를 위해 김치찌개와 가스버너를 가지고 오셔서 따뜻한 점심을 나누어 먹던 날 목사님의 기도 마지막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 모든 일이 승리하게 해주시고’ 였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 질수가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두고두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순간마다 기억하며 위로했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초월적인 신을 믿는 이유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해가 바뀌어 국가인권위의 결과가 나온 후에도 언니는 복직되지 않았고 두 달이 넘는 논의 끝에 서울상경투쟁을 결정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을 하며 여름을 났다. 이때도 목사님은 가끔 오셨고 함께 점심을 먹던 날의 기도는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아름답게 마무리되게 하소서!’

어렵고 힘든 순간이란 앞이 잘 안 보이는 순간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길거리에서 2차 가해에 노출된 피해자가 농성을 해야 현대자동차를 이길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러나 질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판단의 근거는 이 싸움의 너무나 명확한 정당성이었다. 사람이 성희롱 당하며 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라니! 아름답게 마무리 되게 해달라는 그 문장이 가슴에 꽂혔다.

우리의 싸움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리의 싸움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일까. 어떻게 해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싸우는 모양이 편협하고 추하다면 이긴다 해도 의미 없을 뿐더러 이길 수 없는 것 아닐까. 반대로 우리 농성장이 아름답다면 설사 싸움에서 실패한다 해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우리 농성장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기는 것을 넘어 우리의 실천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깨달음은 그것으로 참 중요하다. 싸움이 끝나고 평가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의 행위가 아름다웠는지는 자신이 없다. 여러 동지들과 함께 행복했기 때문에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었는지 그 행복중 하나는 혁명기도원의 기도회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2. 기도회의 순서와 방식

 

사족인 것 같지만, 본격적인 감상을 쓰기 전에 어째서 혁명기도원의 기도회가 그토록 좋을수 있었는지 밑바탕이 되는 형식에 대해 먼저 쓴다. 단지 순서와 방식이 아니라 그 형식에는 내용에 걸 맞는 철학이 포함되어 있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집회의 방식이다. 처음에는 예배와 기도회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는데, 우리 농성장에는 기도회의 방식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1) 순서

아마도 오랫 동안 성서의 뜻에 맞게 기도회를 진행해온 집단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순서일 터이다. 찬송과 성서구절을 읽고 명상을 하고 기도하는 순서가 길지 않은데도 집중해서 기도하고 나누기에 좋은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 방식

농성장이라는 공간은 사실은 집중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오픈되어 있어 소음이 있을 뿐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가끔은 기도회 도중에 지나가는 행인이 말을 건네기도 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도 농성장에서의 기도회가 집중해서 잘 이루어 질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참가해서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말하며 진행되었다면 오히려 더 산만했을 것이다.

서로 잘 모르고, 어떤 이는 기독교 신자이고, 어떤 이는 신자가 아닌 사람도, 처음 기도회에 참가하는 사람도 모두 쉽게 기도회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참가해서 진행하는 방식 때문이다. 찬송을 다 같이 부르고 기도문을 한 구절씩 소리 내어 읽고 성서를 읽은 후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 오늘의 기도제목을 참석한 모든 사람이 말하고 들으며 나누는 형식이 우리를 집중시킨다.

 

똑같은 성서구절을 읽고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일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참석한 모두에게 재미있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그랬다. 성서가 그렇게 고리타분 한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신의 말씀도 아니라는 것을 서로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서로의 입을 통해 확인 한 것이다. 가만 보니 성서는 읽는 자와 신의 대화더라.

 

 

3. 농성장에서 읽는 성서

 

1) 시편

놀라운 것은 3000년 전에 쓰여진 시가 내 마음을 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잘 표현할 수 없고 말하기 어려운 내 분노와 고통이 모두 시에 있었다. 모든 감동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10월 5일 읽은 시편은 이런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는 말,

젊어서부터 받은 많은 학대에도 나는 꺾이지 않았었지.

밭가는 자들이 땅을 갈아엎듯이 내 등에 고랑 같은 상처를 내었지만

의로우신 주께서는 악인들의 멍에를 박살내셨다.

시온의 원수들아, 모든 망신당하고 물러들 가라.

지붕위의 풀포기처럼 뽑을 새도 없이 시들어 버리리라.

베는 이의 손에도 묶는 이의 아름에도 차지 않으리니

지나가는 이 아무도 ‘주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복을 빈다’ 하는 사람 없구나.

 

시를 읽으며 내 등에 고랑 같은 상처가 있는 것을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내 등의 험한 상처, 그 고통을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이미 3000년 전에 그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반가운 이유는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3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민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인민의 고통을 알았기 때문이구나. 더욱이 나의 원수들에게 소리친다. 망신당하고 물러가라! 지붕위의 풀포기처럼 시들어버려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라.

이 땅에서 살아가며 내가 겪는 고통과 내 가슴에서 넘치는 분노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이미 인간의 삶에서 3000년 전부터 그런 고통을 호소하고 신에게 의지 했다는 것은 나의 고통을 일반화 시킨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선 땅에서 고통스럽다. 자본에 의한 착취의 그늘에 사는 인민들이 모두 고통스럽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고, 나만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산 오늘부터 3000년이 다시 지나기 전에, 원수들에게 어떻게 복수해야 하는 것일까.

이스라일에 꺾이지 않았으니, 많은 학대에도 나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시편은 위로이고 희망이다.

 

 

2) 마르코 복음, 마태오 복음

예수의 삶은 극적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읽기 때문에 한번 읽고 다음 주 수요일이 되면 이미 스토리가 많이 전개되어 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양반의 삶이니 대략의 스토리는 알고 있어 독해의 어려움은 없고, 다만 농성장에서 읽으면 새롭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며 다닌다. 제자들을 만나고 이적을 행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산자들 앞에서 보여준다. 탐욕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 병을 고치고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며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와 함께 착취에 기반하는 인간의 질서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만들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다녔던 제자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고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그리고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알쏭달쏭한 지침도 있다.

 

죽었다 살아날 것을 운명으로 알고 태어난 예수의 삶이 인간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장면들도 나는 좋았다. 그가 번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때 거울을 보듯이 예수를 보며 나를 본다.

신의 아들이면서도 세속의 재판장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는 초라하다. 내가 재판받을 때도 그랬거든. 분명히 내가 맞는데, 나의 싸움이 올바르고 나의 주장이 정당한대 어깨에 힘주고 높은 자리에서 날 내려다보는 판사들은 늘 힘 있는 자본의 편을 든다. 당장 이기지 못하니 입 닥치고 재판을 당하는 기분을 빌라도의 추궁에 답하지 않으며 예수는 안다. 모욕적인 그 재판장에 당장 번개를 치며 빌라도를 죽여서라도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예수는 억울한 일 당하는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없었을 테지.

 

시몬의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죽음을 예감한 예수는 고민을 한다. 정말 죽어야 하나. 도망가면 안 될까.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여자가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죽은 자에게 하는 장례를 은유한다. ‘당신은 죽는 것이 맞소!’ 냉정한 그 여인의 가르침에 정수리가 뜨끔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그 여자를 나무란다. 예수는 버럭 화가 나지 않았을까. 뭐니, 내가 죽는다는데 니네는 겨우 이깟 향유가 중요하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와 친한 니네는 왜 이 여인만큼도 나의 마음을 모르니.

정말 이런 느낌일 때가 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처럼 엄중한 순간이 있고, 가장 가까운 동지들조차 내 마음을 몰라주니 섭섭할 때가 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울하여 싸우는 자들과 벗하여 사는 우리의 삶이 팍팍할 때 예수의 삶을 보며 나의 선택과 삶의 방식을 본다. 농성장에서 만났으니 더욱 잘 보인다.

 

 

4. 농성장에서 부르는 찬송가와 기도

 

1) 찬송가 ‘뜻없이 무릎 꿇는’

내가 농성장에서 신의 뜻을 만났다면 그것은 이 노래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혁명기도원이 처음 농성장에 왔을 때 이 노래를 불렀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농성하는 내내 부르고 다녔다. 금속노조 조차 힘이 되어주지 않을 때, 승리에 대한 전망이야 알 수가 없고, 다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자며 당장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피곤할 틈이 없을 때, 아무도 없는 농성장에서 무심한 시민들의 발길을 볼 때, 힘들다고 아이처럼 징징대는 언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노래를 불렀다.

 

해아래 압박 있는 곳에 팔을 들어 막아주는 정의의 하나님이 우리 농성장에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내가 약하다면 힘을 주실 것이고, 내가 강하다면 바르게 할 것이며, 내가 추하지 않도록 돌봐주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내 영혼을 편안하게 한다. 내가 선 싸움의 현장이 비탈지고 가파르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두고두고 부를 노래다.

 

 

2) 기도

기도가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절대자, 초월적인 의지의 신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기도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내 삶을 내가 가장 잘 아는데 비굴하게 누구에게 기도를 한단 말인가.

스물두번의 기도회에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었다. 오늘 기도회에서 내가 기도의 제목을 말하는 것은 나의 고통과 상태를 동지들과 나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과정이기도 하고 동지들에 대한 나의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동지의 기도제목을 듣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상태를 내가 이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검증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예를 들어 ‘다음 주에 복직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언니의 마음이 편안하길 기도합니다’, ‘산재신청 했어요.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다 같이 공감하며 함께 기도하는 행위는 쑥대밭처럼 엉클어진 마음을 정돈시키기도 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싸움을 이어나가는데 힘이 되기도 하더라. 서로 걱정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확인하는 좋은 행위로 기도는 힘이 있다.

 

 

5. 혁명기도원이 수요일마다 왔다, 농성장이 풍요롭고 행복하였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닐뿐더러 인간의 의지위에 우뚝 서 만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물며 그 신은 남자가 아닌가.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농성장을 찾아온 혁명기도원이 반가웠던 이유는 다른 연대동지들이 올 때 반가운 것과 똑같다. 어려운 투쟁을 하는 농성장에 연대하러 온다는데 기독교면 어떻고 불교면 어떤가. 힘을 모아 싸우는 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경계는 없다. 매주 찾아오는 동지들이 반가웠다. 물론 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니, 언니를 위해서 더욱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말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농성장을 위해 예비한 것이라면 더 좋은 일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혁명기도원 동지들이 수요일마다 빠짐없이 와서 지친 언니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는 것이다.

외롭고 초라한 우리 농성장이 풍요로웠던 것은 많은 동지들의 연대의 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고 음식이 떨어져 배고플 때가 없었다. 그와 함께 서로서로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을 하며 더불어 나누는 것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농성장에 혁명기도원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혁명기도원이 없어도 우리 농성장은 부족하거나 궁핍하지는 안았을 것 같다. 그런데 혁명기도원이 있어서 그만큼 더 풍요롭고 따듯해 진 것은 사실이다. 고통의 현장에서 더불어 나누어 위로하며 사는 것은 사회주의자에게도 기독교인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스물 두번 혁명기도원이 우리 농성장으로 와서 197일의 농성투쟁이 풍요롭고 행복하였다.

 

다른 많은 농성장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의 마음과 영혼을 아울러 위로하는 혁명기도원의 기도회가 따듯하길 바란다. 나의 행복을 동지들과 나눌 수 있으면 더 좋을 터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투쟁 현장에서 ‘이야기’가 갖는 의미에 대하여- 여정훈(혁명기도원)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

-투쟁 현장에서 ‘이야기’가 갖는 의미에 대하여-

 

 

여정훈(혁명기도원)

 

 

1. 들어가며

 

혁명기도원은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에서 2011년 7월 7일 금요일부터 시작하여 12월 14일 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20주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매주 수요일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이전까지 명동 3구역 카페마리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있던 저희는 그 곳에서 현대차 해직자 농성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향린교회에서 명동 3구역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예배를 함께하러 오고 계셨고, 여가부 앞 현장에 계신 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혹시나 현장에 도움이 될 까 하는 생각으로 연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식상한 표현처럼 되어 버린 말입니다만, 농성장에서의 수요일 저녁기도를 시작한 후 도움을 얻은 쪽은 저희들 이었습니다. 모임에서 읽었던 시편과 복음서, 전통적인 기도문들은 매 시간 새로운 의미로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매주 읽어내려 간 성서 구절들과 매주 변화하는 농성장의 환경과 맞물릴 때에, 저희는 기독교 전통의 봉인되었던 층들을 하나씩 재발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 드릴 이야기는 22주간의 저녁기도를 통해 다시 발견하게 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산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네 살 때쯤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잘 기억 나지 않으신다면,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아이가 네 살 때쯤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기엔 지겨울 정도로 "왜? 왜?" 하고 묻습니다. 하나 예로 들어 볼까요?

 

"엄마 왜 달이 우리 따라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달이 우리 수정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 라는 식의 대답을 하지, 천문학적 대답을 들려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천문학적 답이 뭔지도 잘 모릅니다. 제 변명같이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천문학, 물리학, 열역학 등에 대해 몰라도, 심지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리 없이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황, 등장인물, 시간과 그에 따른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예측하고, 자신의 역할을 인식합니다.

 

앞의 상황에서 주어진 대답 또한 일종의 이야기 입니다. 거기엔 ‘달’과 ‘수정이’라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두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른 상호작용을 갖습니다. 나아가 '달이 수정이를 좋아한다'는 짧은 문장은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구조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식간에 저 짧은 이야기를 과거와 미래까지 가진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정한 단위를 가진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 이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매우 쉽게 자리 잡고, 아주 빠르게 소환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 또한 규정합니다. 앞의 수정이 이야기를 생각 해 봅시다. 엄마의 대답이 위의 것이 아니라 “수정이 못된 짓 하나 지켜보려고 따라온다" 였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그 아이는 자기를 따라오는 달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감정은 상황에 대한 대응 방식과 연결됩니다. 좋은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는 가까이 다다가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멀리 하거나 제거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할 만한 과정입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상황에 대한 이해부터 그에 대한 대응까지의 과정을 인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함께 기도 하면서 저희가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성서 또한 그러한 종류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은 억울한 처우를 당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고, 복음서는 새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던 예수와 그 제자들의 꿈, 성공, 실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성서가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것은 그 책이 더이상 구원을 위해 믿어야 하는 교리들의 목록도, 지켜야 하는 법규들의 목록도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며,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방식까지 변화 시키기 위해 우리 앞에 던져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3. 이야기와 기독교 신앙

 

처음 농성장을 찾았던 7월 7일에 권수정 동지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니는 하느님이 이 싸움을 꼭 이기게 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싸움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박사랑 집사가 농성장에서의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이 힘을 얻게 한 신앙 역시 이야기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선하신 하느님이 있고, 그 하느님은 정의를 추구하신다.

그 하느님은 자신을 믿는 이들을 사랑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결국 하느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정의에서 어긋난 상황을 바로잡으신다.

 

이것은 우주적 스케일의 거시적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인이 자신의 삶이라는 미시적 영역을 이해하는 틀 이기도 합니다. 혁명기도원의 성서 읽기가 새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큰 이야기가 성서의 개별적 구절들을 읽는 해석학적 틀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전까지 막연히 ‘이스라엘 찬양 시들의 집대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시편이 죄 없이 고통당하는 이들의 탄원으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요 기도회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시편 중 하나인 119편의 경우 “주님의 법”을 찬양하는 구절들과 “나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구절들이 교차해서 나타나는데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저희는 시편 저자의 이야기를 재구성 해 내고(삼천년 전의 그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것을 통해 성서 화자와의 동질감을 얻고, 저자와 함께 “나를 붙들어 살려 주시고, 내 소망을 무색하게 만들기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116)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저희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과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읽기는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장로대통령” 께서는 모세나 요셉의 이야기에 비추어 자신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한창일 때에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것이 여호수아의 ‘거룩한 전쟁(聖戰)’과 같은 것이라고 말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어쩌면 그것은 논리적 명제들로 구성된 교리들보다 더 실제적으로 개인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이야기와 투쟁

 

저는 22주간의 기도모임 끝에 기독교 신앙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투쟁의 현장에서도 이야기가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맑스의 사상에서 자본의 증식 과정에 대한 논리적 이해는 상당이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한 상태로 사회주의적 실천에 뛰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 쉽게 이해되고, 투쟁의 실천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종의 이야기 아닐까요? 맑스주의 역시 일종의 큰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 대한 서술로부터 시작됩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자신이 누리는 평등한 사회가 존재했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의 등장으로 최초의 사회는 파괴되었다.

실제로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세상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바로잡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처럼 이 이야기 역시 우리의 정체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마땅한 대응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여러 종류의 투쟁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어떨 때는 문자화된 상태로, 어떨 때는 무의식적인 층위에 문자화되지는 않은 상태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바보 노무현”의 이야기가 그것 입니다. 그들은 노무현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규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설정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의 이야기가 중요할 것입니다. 노무현, 김진숙, 정봉주 등의 영웅과 그의 독재정권, 한나라당, 이명박 등 구체적 적대자를 가진 이야기 형태의 담론이 수치와 이론으로 이루어진 것들보다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고, 더 오래 기억되며,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으로 연결되기도 더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점 또한 있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한 종류의 이야기만이 현실을 바르게 반영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면, 이야기는 독선으로, 투쟁은 동지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5. 투쟁을 위한 이야기 만들기

 

앞에서 쓴 것 들을 요약하자면, ‘혁명기도원은 여가부 앞에서 보낸 시간들을 통해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고, 목적지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깨달음에 덧붙여, 종교색을 띠지 않는 투쟁에서도 이야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통계와 같은 객관적이고 수치적인 자료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 없이는 어떤 싸움도 승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이 적절한 이야기 구조 속에 들어 있지 않다면, 아무도 자료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발언이나 선전 문구 역시 그것의 맥락이 되는 큰 이야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두 여성이 들려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고, 그 이야기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새로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 많은 싸움들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노동, 환경, 이주, 주거 등의 영역에서 여전히 우리는 남은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 우리가 보통 “수구세력"이라 부르는 이들은 나름의 일관적인 이야기 체계 - 대한민국이라는 가정, 아버지인 이승만, 적대자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다시 쓰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것,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것,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공명하여 세계의 현실을 바꿔 놓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알림]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 평가토론회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 평가토론회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에 맞선 끈질긴 투쟁,

여러분들의 연대 끝에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어떤 의미와 과제들을 남겼는지

연대의 마음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

꼭 참여해주세요!

 

2012년 1월 13일(금) 오후 2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