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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제 3의길』(요하임 비숖/미하엘 멘아르트, 새물결)에 수록된 협동조합에 관한 레닌의
논쟁이 약간 많이 거슬로 올라갈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다만 “참고”의 차원에서 올리는 것이며 협동조합에 관한 레닌의 이 논문은 스탈린 시대 이후의 구 소련에서 일종의 ‘금서’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맑스 역시 『자본 3권』에서 협동조합적 생산양식을 “자본관계의 적극적 철폐“라는 표현을 쓰는데 구 소련의 페로스트로이카 시절에 협동조합적 소유에 대해서 그 지위를 적극 인정하려는 시도의 맑스-레닌주의적 이론의 근거는 『자본 3권』과 레닌의 다음의 이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에 대하여 (*각주 1)
* 각주 1) N.K.끄루쁘스까야는 이 논문 「협동조합에 대하여」를 논문 우리의 혁명에 대하여(N.수하노프의 기록들을 읽고」와 함께 1923년 5월 당 중앙위원회에 넘겨주었다. 6월 26일에 정치국은 레닌이 새로이 제기하고 있는 관점에 입각하여 협동조합의 문제를 검토하였다. 농민들로 이루어진 협동조합적 결사체에 대한 레닌의 사상은 소련 공산동(볼) 제 8차 전당대회에서 나온 여러 결의문들과 「협동조합에 대하여」와 「농촌에서의 사업에 대하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의 논문 협동조합에 대하여에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변환을 위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여러 원칙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개별적인 농민경제에 기초해서 조직되는 협동조합적 결사체가 농촌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기 위한 최상의 길이라는 사상을 제기하고 있다.
Ⅰ.
우리나라에서의 협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 10월 혁명의 시기이래 또 NEP와는 전혀 상관없이(이와 정반대로,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NEP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협동조합 운동이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 운동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과거의 협동조합 주창자들의 꿈속에는 많은 환상적 요소가 들어 있었다. 때때로 그것들이 환상적이었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는가? 그 이유는 사람들이 착취자들의 지배를 전복시키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이 가지는 근본적이고도 심층적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착취자들이 지배를 뒤짚어 엎었으며, 과거의 협동조합 주창자들의 꿈속에서는 환상적, 심지어는 낭만적이고 진부한 것이기조차 하였던 많은 것들이 지금 아무런 꾸밈도 없는 현실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참으로 이제 정치권력이 노동자 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고 또 이 정치권력이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란 사람들을 협동조합적 결사체로 조직하는 것뿐이다. 만약 인구의 대다수가 협동조합들로 조직된다면 과거에 - 아주 정당하게도- 계급투쟁과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등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주 정당하게도 조롱과 경멸, 멸시를 보냈던 사회주의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 목표를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동지들이 러시아의 인민들을 협동조합적 결사체들로 조직하는 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이루 다 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지는 못하다. NEP를 채택함으로서 우리는 거래자(a trader)로서의 농민들에게, 즉 사적 거래의 원칙에 양보하였다. 협동조합 운동이 그와 같이 막대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NEP하에서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은 충분히 커다란 규모로 러시아의 인민들을 협동조합적 결사체로 조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그런데 과거에 이것은 매우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 사적 이익 및 사적인 상업적 이익과 이러한 이해에 대해 국가의 감독과 통제를 결합시킬 수 있는 바로 그 비율(degree), 이것을 공공의 이익에 복속시킬 수 있는 바로 결합의 수준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정치권력, 이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정치권력, 이 프롤레타리아가 수백만이나 되는 소규모의, 정말 매우 소규모인 소농들과 동맹해 있는 것, 이러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계급에 대해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 - 과거에는 우리가 장사질이나 헤쳐 먹는다(huckstering)고 비웃었던, 그리고 몇몇 측면에서는 현재, 즉 NEP하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다루는 것이 정당하기도 한 협동조합들로부터, 단지 이 협동조합들로부터 완벽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 아닐까? 이것이 완벽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 자체가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인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 자체가 존재한다고 해서 사회주의 사회가 다 건설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필요하며, 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많은 실천적인 일꾼들이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 그들은 첫 번째, 원칙적 관점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에 의해 소유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장 단순하고 손쉬위며, 또 농민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길을 따라 새로운 체제로 이행해 나간다는 관점에서 보아 우리의 협동조합적 결사체들이 이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협동조합적 결사체들을 깔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건데 이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 저러한 형태의 노동자 조직(association)들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할 환상적인 계획들을 입안하는 것과 모든 소농들이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제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현재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단계에 도달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으면서도 이것을 거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NEP를 도입하였을 때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자유로운 기업활동과 거래행위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협동조합들을 시야에서 놓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위와 같은 두 가지의 막대한 중요성을 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독자들에게 ‘협동조합적’ 원칙에 입각하여 지금 당장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토론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도대체 지금 당장 어떤 수단을 통하여 그 사회주의적 의미가 모든 사람들에게 명확해 질 수 있도록 ‘협동조합적’ 원칙을 발전시키는 것을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만 하는가?
노동조합원들이 모두, 그리고 항상 몇몇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이러한 특권들이 순전히 물질적인 성격(예를 들어 유리한 은행이자율 등등)을 가지고 있도록 노동조합이 조직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창출시켜야 한다. 협동조합들은 우리가 사적 기업들, 심지어는 중공업에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 - 매우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 국가 임금을 보장받아야만 한다.
그와 같은 사회체제는 단지 그것이 특정한 계급에 의해 금융상으로 지탱되고 있을 경우에나 나타날 수 있다. ‘자유로운’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수천 수백만이나 되는 루블화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 왔던 것보다는 더 큰 힘을 기울여 협동조합 체제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하며, 또 이러한 인식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지원이어야 한다. 즉 이것을 이러저러한 종류의 협동조합적 거래를 지원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지원이라는 말은 그 과정에 참으로 대규모의 인민대중들이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적 거래를 원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협동조합적 거래에 참여하는 농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은 분명히 정확한 형태의 지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의 성격을 조정하고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의식성향을 검토하며 그 특질을 면면히 조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협동조합원이 마을로 가서 협동조합 소유의 가계를 개업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을 테지만, 이와 동시에 그들은 곧 그들 자신의 이익에 이끌려 곧 거기에 참여하려고 서두르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게몽된’ (무엇보다 읽고 쓸줄 아는) 유럽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능동적으로 협동조합의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고 있는 일은 ‘딱 한가지’뿐인데, 즉 우리의 인민들 누구나가 일상적으로 협동조합의 작업에 참여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이 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그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재 사회주의를 행해 전진해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 ‘단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혁명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 전 인민이 문화적 발전의 한 시기를 관통해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고수해야 할 준칙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한 얕은 꾀를 내지 말고, 또 가능한 한 곡예를 하지 말아라. 이러한 측면에서 NEP는 분명히 전진이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가장 평범한 농민들의 수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으며, 또 그들에게 그들의 수준보다 높은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NEP를 통해 인민 전체를 협동조합들의 사업 속으로 끌어 들이려면 하나의 역사적 시기 전체가 소요될 것이다. 최상의 경우 우리는 이 일을 10년이나 20년안에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나의 뚜렷한 역사적 시기이며 이러한 역사적 시기가 없다면, 전체인민에 대한 의무적인 초등교육을 실시할 수 없다면(천이 주: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80~90% 가까이가 문맹이었음.), 적당한 수준의 효율성을 달성되지 않는다면, 인민들이 항상 책을 사용하는 버릇을 가지도록 충분히 훈련시키지 않고는, 또 이것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지 않고는, 예를 들어 흉작과 기근 등등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갖추어wu 있지 않는 경우 - 이것들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뻗어가고 있는 혁명적 행동, 우리가 이제까지 보여준, 그것도 아주 풍부하게 보여준, 그리고 아주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가져온 혁명적 열정, 바로 이것을 (여기서 나는 거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유능하고 능력있는 거래인 -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협동조합이 되기에 충분하다. - 이 될 수 있는 능력과 결합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거래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은 개화된 문명인이 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말이다. 자신들이 거래를 하는 이상 자신들은 훌륭한 거래자라고 몽상하는 그러한 러시아인들이나 또는 농민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가슴깊이 새길 수 있도록 하자.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이다. 그들은 지금 아시아적 방식으로 거래하고 있는데 훌륭한 거래자가 되려면 유럽적인 방식으로 거래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하나의 완전한 (역사적-역자) 시기만큼 뛰떨어져 있다.
결론을 내려보기로 하자. 일련의 경제적.금융적.은행 업무상의 특권이 협동조합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 - 우리 사회주의 국가는 바로 이러한 식으로 나라의 인민들이 그에 따라 조직되어야 할 새로운 원칙을 촉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과제의 일반적인 개요만을 제시한데 불과하다. 우리는 실천적 과제의 전체 내용을 세부적으로 규정하거나 묘사하지는 않았다. 즉 우리는 협동조합적 결사체들에게 줄 ‘보너스’의 형태를,즉 어떤 형태의 보너스가 협동조합들을 가장 잘 지원할 수 있으며 개화된 협동조합원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찾아내야만 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가 되어 있고 또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에 대해 계급적 승리를 거둔 경우 문명화된 협동조합원들로 이루어진 체계는 사회주의 체제이다.
- 1923년 1월 4일 -
Ⅱ.
NEP에 관하여 쓸 때마다 나는 항상 내가 1918년에 쓴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논문을 인용하곤 하였다. 이것은 여러 차례 몇몇 젊은 동지들의 가슴속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구심은 주로 추상적인 정치적 측면에 관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노동자 계급, 그것도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체제에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현재의 입장과 내가 소위 좌익 공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취한 입장을 역사적으로 결부시키기 위해 - 이미 그 당시에 나는 국가자본주의가 당시의 우리경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 사용하였다는 것은 간파하지 못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상적인 국가자본주의와 예외적이며, 심지어는 매우 예외적인 국가자본주의, 즉 내가 독자들에게 NEP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는 그러한 자본주의 간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 나에게로는 항상 실천적인 목표가 중요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NEP의 실천적 목표는 양보조치들을 성공적으로 취하는데 있었다. 현재의 여러 상황으로 보건데 우리나라에서는 양보조치들은 의심할 바 없이 순수한 유형의 국가자본주의였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자본주의를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국가자본주의를 필요로 하게되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과의 비교를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협동조합에 관한 문제이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협동조합이 자본가들의 집단시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또 우리의 현재의 경제적 제조건 속에서 기업들은 -- 하지만 다른 방식이 아니라 국유화된 토지 위에 기업을 세우고 그것을 노동자계급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가운데 -- 철저한 사회주의적 유형의 기업들(즉 이 경우에 생산수단과 기업이 세워져 있는 토지 및 기업들 전체는 국가에 속한다)과 결합시키게 될 때 제3의 유형의 기업, 즉 이전에는 위의 두 형태의 기업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독자적인 유형으로는 간주되어 오지는 않은 협동조합들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리라는 것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적 자본주의 하에서 협동조합적 기업들은 서로 다르다. 국가자본주의 하에서 협동조합적 기업들은 국가의 자본주의적 기업들과 다른데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은 사적인 기업들이기 때문이며 둘째, 집단적인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체제 하에서 협동조합적 기업들은 사적인 자본주의적 기업들과는 구분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집단적인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기업들의 토지와 생산수단이 국가, 즉 노동자 계급에 속할 경우 그것은 사회주의적 기업과 다르지 않다.
협동조합에 관해 토의할 때 이러한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정치체제의 특수한 면모들 때문에 우리의 협동조합들이 완전히 예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 사실은 완전히 잊혀지고 있다. 지나가는 김에 하는 말이지만 만약 우리가 아직 결코 충분한 정도로 전개되었다고는 보기 힘든 양보 조치들을 취하는 것을 배제해 버린다면 우리의 현재의 조건하에서 협동조합 제도는 거의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의 현재의 조건하에서는 협동조합은 거의 단 한번도 사회주의와 완전히 부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로버트 오웬부터 시작하여 왜 구식의 협동조합론자들의 계획들을 환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은 계급투쟁, 노동자 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 착취계급의 지배와 전복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으면서 당대 사회를 사회주의로 개조시키려고 몽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협동조합적’ 사회주의, 단지 국민들을 협동조합적 결사체로 묶어냄으로써 계급의 적을 계급의 협력자로, 계급간의 전쟁을 계급간의 평화(소위 계급간 화해)로 뒤바꿔 놓으려는 이와 같은 꿈을 완전히 공상적인 것, 낭만적인 것, 심지어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이다.
의시할 여지없이 오늘날의 기본적인 과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는 우리가 분명히 옳았는데, 왜냐하면 국가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없이 사회주의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정치권력이 노동자 계급의 수중에 놓여 있고 또 착취자들의 정치권력은 타도되었으며 (노동자 정부가 자발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또 양보조치라는 형태로 착취자들에게 양도해준 것을 제외한)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지금 상황은 또 얼마나 변했는지를 한번 보라.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위에서 언급된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나) 협동조합의 단순한 성장은 사회주의 성장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이와 동시에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시각들의 근본적인 전환(a radical modification in our whole outlood on socialism)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근본적인 전환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전에는 정치투쟁에, 혁명에,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 등등에 중점을 두어 왔으며,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강조점이 바뀌어 평화롭고 조직적인, ‘문화’사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나는 만약 국제적 규모에 걸쳐 우리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투쟁할 필요만 없더라도 강조점은 교육작업으로 옮겨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문제를 다른 한켠으로 제쳐두고 국내의 경제관계들에만 전념한다면 우리의 강조점은 분명히 교육쪽으로 옮겨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한 (역사적-역주) 시기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의 주요 과제에 직면해 있다. --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그리고 또 우리가 앞선 시기로부터 통째로 그대로 물려 받은 우리의 국가기구를 재조직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다. 지난 2년 동안의 투쟁기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철저하게 재조직하지 못했으며, 또 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두 번째 과제는 농민들 사이에서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 사이에서 교육사업의 경제적 목표는 농민들을 협동조합적 결사체들로 조직하는데 있다. 만약 농민들 전체가 협동조합들로 조직되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사회주의의 토양 위에 두발을 딛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 전체를 협동조합적 결사체들로 묶어 세우기 위해서는 사실상 문화혁명 없이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수준의 문화가 농민들 사이에(압도적인 다수의 대중인 농민들 사이에서) 존재할 것이 전제된다.
우리의 적대자들은 우리가 충분히 개화되어 있지 못한 나라에 사회주의를 이식시키기 위해 너무 서두르고 있다고 계속하여 말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이론(모든 종류의 현학적인 이론들)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 편에서 출발한 것 때문에 헷갈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사회적 혁명이 문화혁명에 선행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바로 이 문화혁명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러한 문화혁명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나라를 완벽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문화적인 성격(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문맹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이註>당시 러시아 인민의 80~90% 가까이가 문맹이었다고 함)과 물질적인 성격(왜냐하면 문명화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물질적 생산수단의` 발전에 있어 일정한 사준에 도달해야 하며, 또 일정한 물질적 기초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의 지대한 난제들을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1923년 1월 6일
「쁘라브다」, 1923년 5월 26일 및 27일자 116호에 처음 발표됨
사인 ; N,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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