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난장출판사 이재원 대표님이, <푸코 이후>의 역자인 김상운 선생님과 함께 난장출판사 독자와의 대화 행사를 가졌다며 행사 자료집을 메일로 보내주셨다. (오모다 소노에와 사카이 다카시, 이치노카와 야스타카가 "사회적인 것"을 주제로 나눈 대담을 수록한 이 자료집은 난장출판사 블로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투철한 서비스 정신!  '독자와의 대화' 자료집)

 

한 눈에 봐도 흥미로워 보이는 대담이었지만 한동안 바쁜 일이 있어 좀 미뤄놨다가, 일이 대충 마무리된 이번 주말에야 자료집을 읽어봤다. 이 블로그에 띄엄띄엄 올라오는 포스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회적인 것"은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주제 중 하나인데, 대담들을 읽다보니 몇년 전 공부하다 천천히 뜯어보려고 번역해놨던 글이 하나 생각나 이번 기회에 블로그에 옮겨 놓는다.

 

해당 글은 미셸 푸코 및 로베르 카스텔의 제자인 조반나 프로카치의 "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로, 원문은 80년대 중반 폴 라비노우나 조너선 사이먼 등 미국의 (좀 더 정확히는 버클리 대학의) 푸코디언들이 주도해 발간했던 저널 <현재의 역사History of the Present> 1987년 가을호에 실려있다. 이 저널은 현재 폴 라비노우가 주관하고 있는 연구소 <Anthropological Research on the Contemporary> 홈페이지에서 전체를 다운 받을 수 있다. 원문 다운로드

 

원문 자체가 잘 알려진 텍스트가 아닌지라, 글만 덩그러니 남겨놓기 휑하여 몇 마디 덧붙여야만 할 것 같다. 이 글은 노트 형식으로 쓰여진 만큼 글 자체가 복잡한 논의들을 지나치게 단순화-도식화한 면이 있고 이미 푸코의 후기 강의록과 이를 둘러싼 논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딱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내가 볼 때 소위 "통치성 연구"의 관점에서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일반적 관점과 틀을 잘 정리하고 있을 뿐아니라 이를 넘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지점을 가진다.

 

먼저 이 글은 근대 "사회"의 발명과 설립이, 이 대상이 관계맺는 여타의 담론적-실재적 구성물들 간의 다양한 계열들 속에서 가능해진 매우 돌출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근대 "사회"라는 특수한 관념과 상상의 등장과 그 궤적을 추적하는 것(혹은 최근 유행하듯이 그것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거나 부활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에서 보여주듯이 빈곤-노동-권리-의무-발전 간의 특수한 개념적 배치와 이들 요소 간의 논리적 회로에 대한 이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요소들 간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푸코 효과>에 실린 프로카치의 글을 포함한 여러 글들을 참고할 수 있겠다.)

 

둘째, 이 글에서 프로카치는 푸코가 후기에 관심을 보인 사목권력으로 대표되는 "전체이자 개별omnes et singulatim"로서의 권력형태를, 근대 "사회적인 것"의 장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특수한 합리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푸코에 의해 일정정도 암시되기는 하지만 상당히 과감한 해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근대 사회학을 사로잡았고 지금도 사로잡고 있을지 모를 핵심 질문(뒤르켐, 타르드, 퇴니스, 베버, 짐멜이 모두 나름의 답을 내놓았던 바로 그 물음), 즉 "점차 개별화되는 혹은 분업화되는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사회라는 공통성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치의 기획이라는 관점에서 문제화하고 여타의 다른 통치 기획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화할 수 있는 관점이 열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끝에서 프로카치는 주권의 논리로서의 "권리"와 시장의 논리로서의 "이해관계"에 대비되는 사회의 논리로서의 "의무"를 제시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온 이 개념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근대 시민 주체성은 언제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음에도, 권리의 정의 및 재구성의 문제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데 반해, 의무의 문제는 그 동안 비판적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이는 위 자료집의 사카이와 이치노카와의 대담이 사회의 구성에 있어 '권리'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이 권리의 대응물로서의 의무,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 상호성, 책임, 더나아가 도덕의 문제를 사고하려 했던 가장 대표적인 시도는 뒤르켐-모스로 이어지는 연대 및 선물교환론의 진영에서 찾을 수 있을텐데, 따라서 프로카치의 도식은 홉스-루소식의 주권론이나 스미스-칸트 식의 시장론과의 관계 속에서 이 "의무"개념과 그 의무의 구체적 대상인 사회 혹은 네이션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도면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 논의나 발리바르의 국민사회국가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리 낯선 도식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거대한 논의들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 글은 위의 대담에서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최근 한국에서도 뒤르켐의 '연대'나 모스의 '선물교환', 폴라니의 '사회의 자기보호운동' 등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사회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들린다)을 둘러싸고, 푸코식 문제의식에 기반한 사카이와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치노카와의 입장차가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이해하고 고민을 발전시키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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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는 몇 년 전 이 글을 처음 읽고 번역할 때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이고, 오늘 번역을 좀 다듬기 위해 글을 다시 보며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내 문제의식은 지금은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와 있다. 최근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굳이 말하자면 사회를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사카이나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는 이치노카와의 입장과는 달리,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와 그것의 질료로서 모럴 혹은 에토스가 과연 어떠한 새로운 상상에 기반한 것인지, 그것이 기존의 사회와 도덕에 대한 관념과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혹은 역으로 말해 이러한 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 혹은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가진 특정한 사회의 상상이 빈곤-노동-의무-도덕-발전과 같은 다른 요소들과의 계열 속에서 형성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특정한 인간학적 전제들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는) 돌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조건들이 상당부분 변화된 상황, 예컨대 빈곤-노동-의무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해체되고 발전과 성장의 전망이 지속가능성과 생존으로 덧칠되는 변화 속에서, 즉 이른바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조건들(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신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화'보다 이 용어를 더 선호하는데) 속에서 돌출되는 사회적 상상은 기존의 사회관념과는 많은 부분에서 구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성은, 이 글에서 프로카치(그리고 푸코)가 통치공간으로서의 사회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참조하는 자유주의 인간학 내의 모순, 즉 주권적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 간의 근본적 갈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기존의 자유주의 논의 속에서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상상되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교환불가능한 것을 소유한) 주권적 주체, (양도가능한 대상의 교환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의 주체, ('주면서 보존하는' 선물교환에 연루된) 사회적 주체 간의 분열과 통합에 기반해 있었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인간학적 전제들은, (굳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이제는 더 이상 '교환'에 기반해 상상되지 않는다는 푸코의 언급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이들과는 다른 지형 속에서 작동한다.

 

예컨대 오늘날 금융화와 발맞추어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행동경제학류의 담론들은, 경제주체를 이해관계의 차갑고 합리적인 계산이 아닌, 감정과 충동, 더 나아가 때로는 공감과 협력에 기반한 주체로까지 사유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논의들은 단일하고 집단적인 권리를 소유한 주권자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 파편화된 여론만을 가진 탈주권적 '다중'과 주권의 문턱에 이르지 못하는 난민 혹은 잉여 인구의 존재로 이분화되고 있다. 이 변화된 논의에서 전제되는 주체성은 당연히 새로운 인간적-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기존의 자유주의 주체가 가진 딜레마와 동일한 방식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따라서 동일한 형태의 사회적 주체성의 구성을 통한 해결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의 인간학적 전제들, 즉 이해관계의 주체-주권적 주체-사회적 주체의 구분과 그 형상들이 모두 변화하고 있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좀 더 과감한 형태의 새로운 지도그리기를 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대체" 혹은 "단절"이라는 표현으로 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예컨대, 노동사회가 탈노동사회로 대체되고 발전주의가 포스트-발전주의로 대체되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조건의 변화에 충분히 천착하지 않은 채 "사회"의 재구성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 대담에서 이치노카와가 그러하듯이) 그 동안 사회학자들이 해온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형식적 주장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면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인간적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설명해내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임박한) '파국'으로 느슨하게 정의하고 그 대안으로 개인의 견유주의적 윤리나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는, 표면적으로만 급진적인 공허한 주장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기 힘들 것이다. (실제 위 대담에서 "사회"를 통한 대안에 거리를 두는 사카이 다카시가 다른 곳에서 견유주의 윤리와 유사한 주장을 전개한 바 있다.)

 

결국 개인적으로 오늘날 좌파 담론의 중요한 판돈 중 하나가 여기에 걸려있다고 보는 셈이지만, 이 새로운 지도그리기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며, 푸코를 포함한 몇몇 이들의 단편적이고 단절적인 실마리들과 몇 가지 성급히 제기된 가설들만이 눈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큰 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수렴되는 주제의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후, 내 삶의 질과 스트레스 수치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부족한 작업 도구를 보충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기존의 자유주의에서의 사회에 대한 상상과 그것의 작동을 가능케했던 조건들, 그리고 그 실제 작동 양식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참고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검토 작업을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출발점과 간단한 안내도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카치의 논의는 그 도식성과 프랑스 사례에 한정된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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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 프라카치_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pdf (427.47 KB) 다운받기]

 

 

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 (Notes on the Government of the Social)

 

 

조반나 프로카치(Giovanna Procacci)

 

 

“통치”라는 개념과 이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영역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각종 논점들을 다음의 노트를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1.

“통치”라는 개념은, 주권의 법철학에 기반한 권력론이나 제도에 초점을 맞춘 권력분석의 대안으로, 새로운 관점의 권력분석을 도입한다. 이 새로운 관점은 지배적인 기존의 두 권력분석과는 달리, 16세기 이후 발달해 온 “통치술”에 대한 분석에 의거한다. 통치는 개인 및 집단행위의 “지도”를 의미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을 따로 떼어내 설명하려는 주권이론과 달리 권력관계가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들—즉 정신의 통치, 가정의 통치, 국가의 통치 등—을 상호 연결시킨다. 또한 통치라는 개념은, 정치체제나 제도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권력의 요소들, 형식들, 목표들에 관심을 가진다. 통치는 통치의 선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략적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2.

이 새로운 관점은 한편으로는 권력관계에서 주체가 점하는 위치와 관련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관계 자체의 이질적 질서가 낳은 틈새들을 권력분석에 재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미셸 푸코에게 통치한다는 것은 “타인의 행위의 가능한 장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i] 통치의 관점에서 권력관계는, 주체가 스스로를 경험하는 행위의 형식들을 부과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성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 행위형식의 부과는, 이 권력관계의 반대쪽 끝에 요소들의 이질성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즉, 주체의 행위 앞에 놓인 가능성들의 장에서 발견되는 주체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행위에 대한 행위로서의 통치는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작동하며, 주체의 가능성의 측면에서 항상 통치를 벗어난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 “잠재적인 거부나 저항이 없이는 권력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ii]

 

통치관계가 구조상 항상 그것을 넘쳐흐르는 가능성의 장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면, 통치분석은 (앨버트 허쉬먼의 적절한 정식화를 빌리자면[iii]) “실현된 결과들”만을 평가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되며, 그 과정에서 회피된 것이나 소멸된 것들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가야 한다. 통치관계는 그 관계의 상이한 질서들—즉, 담론의 질서, 실천의 질서, 그리고 그 효과의 질서—간에 완벽한 조응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서로 완전히 조응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질문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이들의 작동에 어떤 합리성도 존재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통치합리성들은 그것의 내용과 한계의 범위를 결정하는 가능성들의 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통치합리성들은 여타의 다른 가능한 선택지를 배제하는 하나의 선택이며, 결과적으로 그 선택을 만들어낸 전략들간의 대립관계의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전략들이 통치의 가능성들의 윤곽을 결정하며, 바로 이 윤곽은 그 관계와 분석 모두에 있어서 주체의 가능성에 상응한다. 

 

 

3.

따라서 통치관계에서는 주체의 행위가 자유롭다는 전제하에서만 주체성의 생산이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과 자유는 상호 연결되며, 자유는 통치와 피통치자 간의 현존하는 관계이지, 자유주의 체제에 보존된 어떤 전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자유와 권력의 관계 때문에, 자유의 생산과 제한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로, 특히 자유의 정치적 사용을 전제하는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들 체제에서 자유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로 인해, 자유는 이질적 모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점점 복잡한 것이 되어간다. 

 

자유주의를 논하면서, 푸코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주권적 개인(법적 주체) 간의 모순에 관해 분석한다.[iv] 이 모순은 두 모델이 주체의 자유를 구조화하는 서로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원리를 각각의 사회화 양식 속에서 상이하게 사회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푸코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이 두 주체들[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주권적 개인] 사이에 공통적인 하나의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 통치테크닉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립적이지 않으며, 국가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에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시민사회는 단순한 정치사회[국가]와는 구별되며, 특정한 통치의 테크놀로지와 관계하면서 하나의 통치관계를 그려낸다. 즉,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생산하는 동시에,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민사회”라는 관념은 법이나 경제에서 빌려온 방식(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진 방식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와 권위의 문제를 조절할 수 있는 참조점을 제공한다. 시장으로부터 추출된 “이해관계”라는 기준과 주권적 개인 개념의 핵심인 “권리”라는 기준 사이에, 시민사회에 의거한 테크놀로지는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disinterested interest”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이해관계를 통합하려는 사회적 실천들을 끼워 넣는다. 이로써 시민사회는 비-법률적, 비-경제적 사회관계의 새로운 영역을 개방하며, 이러한 경향은 개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구체적 질료를 제공하면서 근대사회의 형성과정 전체를 통해 점차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시민사회”를 자신의 참조점으로 삼는 이 통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형제애fraternity”를 조직할 것인가라고 하는 혁명적 질문, 즉 자유의 생산과 제한간의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긴장 사이에서 자유의 테마를 형성해온 바로 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시민사회”를 참조하는 통치술을 그것이 정치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영역—말하자면 빈곤을 하나의 “사회문제social question”로 정의하는 새로운 합리성의 영역—과 관련해 살펴보고자 한다.

 

 

4.

앙시앵 레짐 시기에, 빈곤은 구걸행위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빈곤은 개인의 다양한 운명의 영역, 즉 승자와 패자, 운명의 혜택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나뉘는 질서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고, 이런 식으로 이해된 빈곤은 오직 공적 질서의 [유지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하나의 문제로 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빈곤이 “사회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새롭게 인식되고, 빈곤을 둘러싼 새로운 합리성, 즉 빈곤의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 속에서 찾으며 빈곤의 존재와 사회 자체의 운명을 결합시키는 합리성이 등장해야만 한다. 이 빈곤의 합리성 내부에서의 변화, 즉 기존의 걸인의 형상을 벗어나 근대적 빈곤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사회적 상상과 결부시키기 위한 변화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변화는 어떤 효과를 낳았는가?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상황 하에서, 빈민은 민중주권 개념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대의제 사회나 부의 확장이라는 목표에 기반한 [시장] 사회의 공통된 반대항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빈곤은 법적 평등으로 덧칠된 [혁명 후] 정치적 풍경에 사회적 불평등의 측면을 재도입했는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불평등 자체보다는 이 새로운 정치체제가 기반한 평등의 성격에 있었다. 즉, 법적 평등은 보편성에 대한 호소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보편적 평등의 전제 하에 [빈곤이라는] 불평등을 정당화해야만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혁명 이후 모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었던 시민권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한편으로, 이는 실제 법적, 보편적 평등이 사유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으로서 구체제 질서 사이에서 자라난 평등의 관념을 표현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민권 개념이 정치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권으로서의 시민권과 각종 실정적 권리들에 대한 접근권으로서의 시민권을 분리시키기 위한 [사회구성원 간의] 일종의 “기능적” 구분들—물론 이 기능적 구분이 과거처럼 본질적인 구분의 생산으로 연결되지는 않아야 했지만—을 도입해야만 했다.   

 

그런데 빈민이 재현하는 불평등은 이러한 기능적 차이의 문제로 이해될 수 없었다. 문제는 [기능적 차이에 기반해] 실정적 권리들에 대한 접근권을 조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빈민을 법적 공간에 삽입하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혁명 이후 빈민이 법적인 사회관계의 틀 속에 통합되고 권리의 주체가 되면서, 공적 부조assistance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새로운 빈곤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를 다뤄야 했다. [법적 평등의 영역에] 불평등을 재도입하면서, 빈민은 실제 그들이 평등해질 수 있는 정도 혹은 그들이 “불행에 고통받는” 자들로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범위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같이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 빈민의 법적 영역으로의 접근 그 자체였다면, 기능적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즉, 대체 무엇이 빈곤의 사회적 기능이 될 수 있었겠는가? 기능주의적 접근은 해답을 제공할 수 없었는데, 빈곤은 오직 소멸됨으로써만 사회체에 대해 하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계급 시민들, 소위 능력을 가진 시민들은 개별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실정적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면, 빈민들은 법적 영역에 반사회성의 기반으로 등록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빈민의 [법적] 통합은 빈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빈민의 법적 영역으로의 통합은, 권리와 의무의 상호성을 도입함으로써 빈곤에 침투해 그것을 박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자선사업이 사회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낳지 못하며 사회적 변혁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 이익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의 중심에는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이 바로 이 같은 상호적 권리와 의무를 조직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오직 노동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만, 빈민은 사회가 그에게 권리의 형태로 증여한 것을 되갚을만한 수단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노동만이 빈민을 사회적 교환의 장에 통합시킬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기서 권리는 더 이상 주권에 기대지 않고 노동으로 보상되었다.

 

하지만 공적 부조를 국가에 의해 보장된 노동정책과 결부시키는 것은, 곧 쉽지 않은 일로 판명되었다. 이를 위해선 국가가 하나의 경제적 행위자가 되어야 했는데, 이는 자유시장 경제학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 것이었다. 게다가 이 경우 국가는 그 시민들에게 물질적 생존의 수단을 공급해야 하며, 이러한 수단이 부족할 경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빈곤분석과 연결된 핵심 요소들은 또 다른 합리성의 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 새로운 합리성의 축은 점차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종속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빈곤의 통치는 사회 속에서 경제적 주체도 법적 주체도 아닌 “시민사회”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개입이 가능한 이론적·실천적 공간을 열었다.

 

 

5.

따라서 한편으로는 주권이라는 법적-정치적 모델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적 모델과 점차 거리를 두고 자율성을 획득한 새로운 권력의 문제틀이, 19세기 도시빈곤의 비극 속에서 등장한 사회적인 것의 공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것의 탄생은 궁극적으로 권리의 부과와 연결되는 주권의 논리적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는 실정적 권리를 도덕 주체의 주권(자연권)에 대한 참조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를 권리와 의무의 상호성을 도입하는데 활용하는 이론적·실천적 작업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또한 사회적인 것의 탄생은 국가와 시장의 제도적 모델에 기반해 분석될 수도 없다. 사실 이 두 모델은 모두 사회적인 것의 전략적 필요성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대신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법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에 공통적으로 관여하는 통치테크닉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것의 고유한 통치형태는 재분배의 원칙에 기반해 작동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정체성의 재분배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경제적 부의 재분배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것의 통치의 중심에는, “사회적 유대” —즉, 개인이 기입되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결정하는 상호작용의 표면—의 지속적 생산이 존재한다. 개인은 직접적으로 사회화시키고 사회화되는 행위모델들을 함축한 여러 실천들에 점차 통합되며, 이로써 “통치가능한” 형태의 사회적 주체성들이 생산된다.  

 

실제 사회적인 것의 통치가 가진 특성은, 사회적 주체는 사전에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조건 역시 생산되어야만 하는 지속적 훈련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사회적] 주체는, 권리나 이해관계의 연장과 같은 형태로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 [권리의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 사이에는 단절 지점이 있으며, 오직 사회만이 개인이 속한 사회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산함으로써 이 단절을 메꿀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같이 사회적 주체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앞서의 상이한 주체성들 간의 모순 역시 부차적인 것이 되며 사회성이 생산되는 공통의 실천영역에 모두 결합되게 된다.   

 

이제 이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 테크닉들을 살펴보자. 이들이 공공부조, 상호부조, 위생학, 교육, 연합 등 어떠한 형태를 가지든 간에, 이들은 모두 주권의 행사나 이해관계의 자연적 작동과는 상이한 영역에 연루된다. 사실 이 모든 테크닉들은, 사회체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서 경제적 평화나 대의representation의 매커니즘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테크닉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방식으로는 조정하기 어려운 개인과 사회 간의 규제적 아이디어들을 상호의존성의 조직된 형태 속에서 균형을 맞추려 한다. 그 목적은 평등한 자들의 사회를 가로지르는 분할선을, 사회체에 대한 귀속의 형태—혹은 사람들이 곧 “연대”라고 부르게 될 형태—로 재정위하는 것이다.

 

상호부조의 예를 들어보자. 뒤팽이 말했듯이, 저축은 그것이 민중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대중적 실천이 될 때에만 그 효과를 발휘한다.[v] 그러나 이 저축기금[caisses] 자체가, 대중적 저축활동을 위해 필요한 행위들을 사회 말단까지 전파시킬 수는 없었다. 이러한 행위의 확산은 오히려 개인을 목표로 삼는 일련의 실천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는데, “노동자 현금출납부”를 만들고 고용주들이 이를 관리하는 방식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통치 속에서 개별화하고 사회화하는 실천을 낳는 상호부조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이러한 실천들의 목표는 상호의존성의 조직이다. 대중저축을 통한 저축기금과 같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큰 규모의 사회적 실천을 구성한다면, “현금출납부”와 같은 실천은 개인화 방향의 말단에 위치하며, 이들은 각각 사회적 품행을 변화시키는 다른 실천들을 뒷받침하게 된다.

 

 

6.

요약하자면,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비-법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수렴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 요소들은 이해관계와 권리라는 개념에 대안이 되는 이론적 시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이 새 대안은 자유와 권위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적·법적 기준과 상이한 기준을 제공한다.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이해관계라는 개념에 기대어 구성될 수 없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면, “사회문제”는 진정 통치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속성은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빈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전체 사회의 문제이며, 빈곤의 분석은 우리가 앞서 말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 즉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따라서 개별적인 것과 관련해 “탈이해관계적인” 속성을 가진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가 그 자체로 규제의 내적인 기준을 제공해줄 수는 없다. 누가 이러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탈이해관계가 필요한 정도는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 우리는 기껏해야 하나의 제도적 속성으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를 책임질 집단적 관점을 정하는 외부적 원칙에 기댈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라는 개념은 자유와 권위의 범위결정 문제를 다른 영역으로 전치시킬 뿐이다.

 

또한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권리의 용어로 사회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진 위험성을 폭로한다. 노동에 대한 권리나 공적 부조에 대한 권리에 기반해 “사회문제”를 논한다면, 국가는 사회에 대해 빚진 존재가 되며 개인이 가진 주권의 범위는 크게 확대된다. 이것이 노동권 이론에서 발견되는 “빈민의 은행”으로서의 국가, 시민들이 처한 사회적 불평등에 책임을 지는 보호자-국가의 표상이다.[vi] 하지만 노동권 이론이 효과적으로 보여주듯이, 일단 불평등이 분석에 재도입되면, 권리의 문제를 “실정적 권리를 행사할 능력”의 문제로 전치시키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다.[vii]

 

 

7.

따라서 사회적인 것의 통치라는 과제는, 하나의 새로운 통념, 즉 의무duty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새로운 관념은 이해관계와 탈이해관계간의 경계를 조절하고, 권리를 대체하여 사회적 상호성의 기반이 된다. 의무는 “사회적 유대”의 생산에 관여할 때에도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콩트에서 뒤르켐에 이르는 사회학자들은 이 개념을 정교화하여 사회적 연대의 핵심원리로 삼을 것이다.

 

사실 의무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념으로, 개인의 자유나 주권의 영역을 확대하기보다는 집합체에의 소속과 관련해 상호의존성을 조직하는 개념이다. 의무는 개인적인 특질을 증진시키지 않으며, 어떤 “우월한 자질”을 부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의무는 개인을 일련의 주관적 경험들로 분해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본인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형식과 의미를 지닌 집단적 경험의 개별적 대응물로서만 등장하게 된다. 동시에 주체의 경험은 의무가 그/그녀에게 부과하는 매 순간의 숫자들만큼 파편화되는데, 이 순간들은 모두 부분적인 계기로서 주체의 형식도 의미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의무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무는 권리처럼 개인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의무는 사회적인 것의 통치라는 특정한 합리성이 작동하는 방대한 교육적 기획의 모체matrix가 된다. “시민교육”은 “시민사회”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무는 사회적 집합체의 추상적 매커니즘을 통해서 각각의(each) 개인을 모든(all) 타인들과 연결시키며, 이를 통해 권리개념이 함축하는 개인과 국가간의 직접적 대립구도를 붕괴시킨다.

 

마지막으로 의무는 푸코가 이야기했던 전체와 개별omnes et singulatim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근대 정치합리성의 특징을 전체화하는 동시에 개별화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면,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의무의 개념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생산함과 동시에 개별화된 교육방식을 생산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 절합의 결과,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개인의 권리에 기반한 민주주의로부터 모두를 향한 모두의 의무에 기반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끝].    

 

 


[i] “The Subject and Power” in Hubert L. Dreyfus and Paul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p.221 [국역: "주체와 권력", 정일준 편역,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을 보라. 여기서 푸코는 통치관계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기본적으로 권력이란, 두 적대자 간의 대립이나 하나를 다른 하나에 복속시키는 문제라기보다는 통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ii] Michel Foucault, “Omnes et Singulatim: Towards a Criticism of ‘Political Reason’” in The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 vol. II, ed. Sterling M. McMurrin (Salt Lake City: University of Utah Press, 1981), p. 253 [국역: "정치와 이성", 정일준 편역, 앞의 책].

[iii] The Passion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p. 131 [국역: 김승현 역, <열정과 이해관계>, 나남, 1994]. 허쉬먼은 사회적 결정에 있어, “실현된 결과”와 의도되었지만 실현되지는 않은 것, 그럼에도 여전히 활동적이거나 “활동적으로 억압된 것” 간의 불일치를 분석한다.

[iv] Colin Gordon, “Foucault en Angleterre” Critique 471-472 (1986): 831.

[v] Charles Dupin, Progrès moraux de la population parisienne depuis l’éstablissmement des Caisses d’Epargne (Paris, 1842).

[vi] Louis Blanc, L’organisation du travail (Paris, 1848).

[vii] 이러한 전환과 그 결과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는, Giovanna Procacci, Le government de la misère, Doctoral Thesis, Pari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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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15/06/01 09:53 2015/06/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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