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2014년 3월 13일자에 실린 글로, 다음 두 책에 대한 서평입니다. 

- 프랭크 비베, 박종대 역,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세계 50대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열린책들, 2014)

- 라젠드라 시소디어 & 존 매키, 유지연 역,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 (흐름출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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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언어, 도덕의 언어

최근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한국 기업들의 노동탄압 문제를 둘러싼 두 개의 흥미로운 분석을 살펴보면서 논의를 시작해볼까 한다. 하나는 이러한 사태를 한국의 아류제국주의적 속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보는 박노자의 분석(“아류제국주의국가, 대한민국”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0735.html)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한국기업들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무시 혹은 무지와 연결시킨 <한겨레 21>의 기사(“CSR는 나무심는 것?”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6259.html)이다.

 

이 두 분석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관점에서 동일한 현상을 “문제화”하고 있다. 먼저 박노자의 분석이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편입된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노동간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정치경제적 분석틀에 기반해 있다면, <한겨레 21>의 기사는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CSR 의식 부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대안으로 국제표준 준수와 윤리의식 향상을 촉구하는 일종의 “도덕적” 분석틀을 따르고 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어떠한 접근이 더 타당한가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이 상이한 분석틀이 드러내는 “시차(parallax)”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만약 한 시대의 지배적 인식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아마도 후자의 도덕적 접근이 좀 더 자명하고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CSR이나 “착한 기업”과 같은 용어가 낯설었던 20년 전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랐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오늘날 기업이나 시장에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 본인들이 앞다투어 “사회책임경영”을 비전으로 내세울 만큼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적 소비”, “사회적 경제”, “사회책임투자” 같은 용어들은 정부문서나 학술서적을 넘어, 일상생활에도 침투하고 있다. 퇴임 전 이명박 전대통령은 “국민모두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갖춘 따뜻한 자본주의”를 우리의 비전으로 선언한 한편, 시장과 기업의 윤리화·도덕화 기획을 시장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들 역시 낯설지 않다. 즉, 오늘날 시장과 도덕의 만남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 입장차를 넘어선 모든 이들의 “공통의 언어”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떤 현상의 진단과 처방이 사전에 자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프레임들을 통해 사후적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늘날 “도덕적” 프레임의 확산을 그 자체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러한 확산이 어떠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이 여타의 다른 언어와 개념이 아닌 기업의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도덕적 틀 속에서 의미화되고 번역될 때, 우리가 새롭게 얻을 수 있는 시각은 무엇이고, 동시에 어떠한 것이 이 틀로부터 배제되는가?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이 “윤리적 자본주의”의 담론적 공간 속에 번역·기입가능한 것과 번역·기입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더 나아가 이러한 도덕적 언어가 자본주의 비판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대적 변화 혹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무엇일까?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모호한 대상

짧은 서평에서 다루기에 버거운 질문들을 제기하며 논의를 시작한 이유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루는 두 책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열린책들, 2014)와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흐름출판, 2014)가 이러한 범람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비전에 목소리를 보태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CSR을 포함한 윤리적 자본주의 기획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무조건적 찬사와 냉소적 비판을 양 극점으로 하는 평면적인 스펙트럼에 갇혀있는데, 이 두 책은 단호히 윤리적 자본주의의 기획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한 극점의 입장을 대변한다.

 

먼저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부제인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가 보여주듯이, 이 책은 나이키와 삼성 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다소 딱딱한 보고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독일의 경제전문기자 프랭크 비베는 책의 1부에서 지난 10년 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게 부각된 배경과 기업의 윤리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중요성을 짤막하게 설명한 후, 2부에서 이들 기업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평가와 함께 각 기업에 별 다섯 개 만점 방식으로 점수를 매기고 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구글은 별 네 개, 애플과 삼성은 별 세 개, 이케아와 H&M은 별 두 개를 받았다.) 책 자체가 특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거나 학술적 의의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 말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나 기업의 윤리적 프로필이 궁금하거나 이러한 평가에 기반해 윤리적 소비와 투자를 실천하기 원하는 독자들은 한 번쯤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기업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도덕적 가치와 실제 기업의 활동 간에는 괴리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오늘날 초국적 기업들이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객관적·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책의 목표로 제시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비판적 의도를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업이 얼마나 공정할 수 있는가, 윤리적일 수 있는가라는 이 책의 물음 자체에는, 이미 기업이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근본적 믿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과 관련해 한 번 검토해봐야 할 것은, 이 책이 반복적으로 던지는 기업이 “얼마나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반영된 믿음들—즉 기본적으로 기업은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공정성이나 윤리성은 양적으로 측정·평가·반성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먼저 기업이 사회에 대해 어떤 적극적인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첫 번째 가정부터 살펴보자. 이러한 논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밀튼 프리드먼은, 일찍이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이윤증대에 있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윤을 증대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며 그에 따른 세금을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회적 기여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그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기업은 시장 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윤리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9). “시장경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30)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프리드먼 류의 입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한다 (38).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는 초국적 기업들이 시장이나 공공서비스, 조세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기업이 이 사회시스템을 주도적으로 구성해나가는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8-39). 동시에 오늘날 깨어있는 시민과 소비자들은 기업에 윤리적 덕목을 요구하기에, 기업들은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27-28). 오늘날 혹자는 이렇듯 기업이 자신과 관계된 지역사회에 학교·병원 등 공공서비스를 공급하고 생태·인권 이슈를 감독하는 주도적인 시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업을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라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전환을 저자처럼 국가와 시스템의 빈 곳을 기업이 자발적으로 보충하는 긍정적인 실천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책임”을 명분으로 공공서비스 분야 및 전통적인 국가영역까지 비즈니스 논리를 통해 잠식해가는 기업의 영향력 확대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프리드먼 류의 시장논리로부터의 결정적 진보로 이해하겠지만, 실제 많은 연구들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명분하에 초국적 기업들이 지역공동체에서 교육·의료 등의 서비스를 공급하는 주체로 정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에 따라, 지역주민들의 정치적 조직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새로운 포섭과 배제의 선이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초국적 광산기업 <앵글로 아메리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CSR 활동에 대한 한 꼼꼼한 인류학적 연구는, 이 기업이 정부를 대신해 수행하는 광산지역에서의 에이즈 예방 및 치료 활동이, 어떻게 노동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치료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지역사회의 반기업 활동을 억제하는 도구로 활용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Dinah Rajak, In Good Company: An Anatomy of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Stanford Univ. Press, 2011)

 

한편 기업 윤리성의 측정 가능성이라는 두 번째 전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야기한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각각의 기업에 별점을 매기고 있지만, 과연 특정 기업의 윤리성이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일까?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기업과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의 “비도덕성”은 어떠한 기준으로 비교가능한가? 어떤 가치에 기반해 이 도덕성을 지표화할 것인가는, 그 자체로 논쟁적인 도덕적 선택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책의 경우만 하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해 신뢰도를 높였다는 저자의 주장과는 별도로, 평가과정 곳곳에서 저자의 강한 가치판단이 발견된다.

 

예컨대, 리스크를 파생상품화하는 금융부분의 사업방식은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며 도이치방크에 별 한 개를 준 대목은, 평가의 적절성을 떠나 저자 본인이 “탐욕스런 금융자본 대 건전한 산업자본”이라는 의심스런 이분법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주며, 유럽의 통신회사 보다폰(Vodafone)이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은행접근성을 높여줘 이들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별 네 개를 받은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아마존이 나치를 긍정적으로 다룬 책의 판매를 금지하지 않았다며 윤리점수를 깎은 부분이나, 비싼 시계나 보석만큼 수명이 길고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며 사치품 생산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항목은 가벼운 실소마저 자아낸다.

 

실제로 오늘날 기업의 윤리성을 측정하는 독립적 국제기구만 60여 개에 이르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가이드라인과 지표들이 개발되어 있음에도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 들자면, <지역사회 속의 기업>에서 만든 기업책임지수나 GRI의 지속가능성 보고서 가이드라인, <국제표준기구>가 2010년 발효한 ISO 26000 등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 기반한 평가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예컨대, 작년 <한겨레 경제연구소>가 삼성전자를 CSR 우수기업으로 선정해 논란을 일으켰는가 하면, 포스코의 경우 인도에서의 무리한 사업추진과 산업재해, 입찰담합 등의 문제로 비판받는 와중에도 <포춘>지에서 선정하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평가 기준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도, 기업에 수여되는 각종 타이틀들은 소위 “도덕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장을 기업에게 부과하며, 그 기업의 “착한”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널리 활용되곤 한다.

 

 

깨어있는 자본주의: 착취와 적대없는 자본주의라는 환상?

이쯤 되면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가 초국적 기업들의 윤리적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 전제한 명제들이 그리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오히려 기업의 윤리적 역할 확대와 그 효과 측정에 관련한 문제는, 다양한 전략과 권력게임이 개입할 수 있는 불투명한 장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곧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무의미하다거나 CSR을 비롯한 기업의 실천은 단순한 기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좀 더 흥미로운 질문은, “착한 기업”과 “윤리적 자본주의”에 대한 요구가 이러한 근본적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지배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면, 이러한 현상에서 엿볼 수 있는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 깨어있는 자본주의에서 답을 찾다>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자본주의” 담론의 기저에 놓인 환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 번 훑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미국의 유기농 식품 대형판매점 <홀푸드마켓>의 공동설립자 존 매키와 벤틀리대 마켓팅과 교수인 라젠드라 시소디어가 공저한 이 책은, <의식있는/깨어있는 자본주의(Conscious Capitalism)>란 제목으로 2013년 출판되어 미국 현지에서도 꽤 화제를 모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제시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비전은 그리 새롭지 않다. 오히려 지난 몇 년 간 다양한 이름으로 제기됐던 도덕과 시장의 접붙임 기획들—예컨대, “박애 자본주의”, “창조적 자본주의”, 두어 해 전 한 보수언론이 소개해 유명해진 “자본주의 4.0” 등—의 또 다른 변종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이 저자들 역시, 비베와 마찬가지로 기업과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전제 하에 자신들의 논의를 시작한다 (27). 저자들에 따르면, 기업과 자본주의(이런 종류의 책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저자들은 기업활동의 집적을 자본주의 자체와 등치시키고 있다)는, “협력과 자발적 교환”에 기반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혁신을 가져옴으로써 유익할 뿐 아니라 도덕적이다 (54). 초창기 시장경제 옹호자들은 기업과 자본주의에 내재한 이러한 도덕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는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가 동정과 공감 같은 사회연대의 감정들을 분석한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8). 그러나 저자들은 이후 경제학자들이 기업과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무시하고, 이윤극대화만이 기업의 목표라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비인간적 체제로 만드는데 일조해 왔다고 개탄한다 (48). 

 

매키와 시소디어는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가정에 기반한 시장주의를 질타하고,  “우리 삶을 개선하고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기업과 자본주의의 목표로 재설정한다 (53). 즉, 기업은 이제 “창조와 협력에 기반해”, 단순히 “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훌륭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61). 이러한 “깨어있는” 기업/자본주의를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네 가지 방안은, 사회적 차원의 기업 목표 설정, 사회적 가치 공유를 통한 이해관계자들 간의 통합과 조정, 깨어있는 리더쉽의 함양, 평등하고 협력적인 조직 문화 창출이다 (72). 4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네 가지 방안의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논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사실 윤리경영에 관한 책을 한 두 권 읽어본 독자라면 이미 익숙할 듯한 이 책의 세부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사용하는 모든 “도덕적” 용어들이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직접 재현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완곡어법(euphemism)의 모음집 같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들의 설명 속에서 노동은 기업을 통해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회공헌활동”이 되고, 자본가의 역할은 이러한 공헌활동을 지원하고 보장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이해된다. 노동과 자본이 재현되지 않기에 당연히 이들 간의 착취와 적대도 재현불가능한데, 저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둘러싼 각종 갈등 및 적대는 상이한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 저자들은 환경과 지역공동체도 이해관계자들에 포함시킨다)이 공통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일시적 커뮤니케이션 장애로 이해될 뿐이다. (실제로 저자인 존 매키는 자신이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효율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어떻게 <홀푸드마켓> 노조를 붕괴시킬 수 있었는가를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253-255)

 

따라서 이 도덕적 수사들의 이면에서 발견되는 것은, “착취없는 자본주의” 혹은 “적대없는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조디 딘(Jodi Dean)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내밀한 환상”이라고 부른 관념이다. 딘에 따르면, 이러한 환상 속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노동자-자본가 간의 착취관계가 아니라, 창의적 기업가로 변모한 수평적 개인들의 협력적·경쟁적 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상상된다. 매키와 시소도어의 깨어있는 기업, 깨어있는 자본주의가 노골적으로 전파하는 것은, 그 최종 목표를 경제적 가치추구에서 도덕적·사회적 가치추구로 바꾸었을 뿐, 동일한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무적대적 공간에 대한 환상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환상에 기반해, 비베가 왜 50개 기업 중 “애플”을 콕 집어 제목으로 사용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착한 기업” 애플은 오늘날 “착취없는 자본주의”라는 환상을 대변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에서의 노동은 창조적 혁신이나 유희적·미학적 활동, 심지어 자기계발의 과정으로 표상되고, 이제는 신화적 인물이 된 스티브 잡스는 “사회적 기업가”의 대표적인 예이자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기획자, 디자이너, 심지어 혁명가로 묘사된다. 다른 기업이라면 상식이었을 법한 사실, 즉 애플의 하드웨어가 열악한 환경의 중국 폭스콘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뉴스가 그토록 큰 스캔들이 되고, 애플 최고 경영자가 현지 공장을 방문해 자살 방지용 그물을 설치할 것을 권유하고 폭스콘의 자살률이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지 않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장면은, 애플이 대변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환상과 실재의 괴리를 드러냈던 웃지 못할 소극(笑劇)이 아니었을까?

 

 

도덕적 신자유주의”넘어서

결국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그려내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정치적 속성은 제거되고 투명성과 책임, 공정성과 윤리경영이라는 용어들로 묘사되는 “착한” 기업·시민과 “탐욕스런” 기업·시민 간의 도덕적 대결만 전면화된 앙상한 공간이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가 NGO와 시민들이 윤리적 소비와 투자를 통해 탐욕스런 기업들을 제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가 기업의 자기 반성과 교정 노력을 강조한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이들이 의지하는 것은 공정성/불공정성, 착함/나쁨, 책임/탐욕 같은 탈정치화된 도덕적 언어들과,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이를 교정할 “의식있는” 기업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상에는 권력과 정치, 적대의 언어가 들어설 공간이 처음부터 폐제되어 있는데, 이데올로기가 실재의 분석을 가로막고 정치적 적대를 자리바꿈하는 지배적 언어라면, 윤리적 자본주의에 대한 이들의 호소야말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골적인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자본주의나 시장에 대한 도덕적 교정을 시도하는 흐름 일반을 뭉뚱그려 비판하는 것은, 아마 “공정치 못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도덕과 시장이 만나는 영역에는 다양한 이질적 흐름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입장차와 긴장이 존재한다. 아마도 협동조합 운동처럼 시장경제의 지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제어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이 두 책이 보여주는 시장의 근본적 윤리성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또한 이 공통적인 “도덕의 언어”가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협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도덕적 비판을 간단히 기만적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예컨대, 국제표준 ISO 26000을 준수하라며 노동조합과 NGO, 소비자들이 함께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연대의 탄생을 상상해보는 것은 충분히 현실적인 가능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덕의 언어에 기반해 시장을 비판하고 기업에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묻는 이러한 담론과 실천이, 그 온도 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담론적·통치적 공간의 특성은 무엇인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잠시 한국사회의 경우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한국은 기업과 사회적 가치, 시장과 도덕의 만남이 가장 역동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공간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이후 정부는 <사회적기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해 “착한” 기업들을 “인증”하고 지원해주는 작업을 전개하는 한편, 재작년 제정된 <협동조합 특별법>을 통해 도덕과 시장이 만나는 영역 자체를 키워나가고 있다. 각종 캠페인을 통해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확산되고 있는 동시에, 기존 기업들의 CSR과 사회책임투자(SRI)의 규모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민연금기금의 투자결정에 있어 기업들의 윤리지표 반영을 확대하는 방안에 이어, 공공기관 사업입찰에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 여부를 고려하는 <사회적 가치 기본법> 등이 활발히 제안·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도덕화된 시장”의 영역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도덕적 이상(理想)과 신자유주의의 시장 유토피아가 만나는 기묘한 접면이다. 한편에 사회서비스와 자원봉사 영역에 사회적 기업 혹은 협동조합 “사업자”의 형태로 뛰어든 운동단체, 비영리단체, 복지기관들의 도덕적 이상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사회연대의 구성 및 사회서비스 제공이라는 전통적인 국가의 임무를 기업시민과 윤리화된 시민에 권한이임하고, 이 “착한” 주체들을 감사(audit)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자 하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필요가 존재한다. 즉, 현상적으로 보자면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영역들을, “나눔과 공유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윤리적 기업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메꾸면서 이 영역에 비즈니스 논리에 기반한 새로운 시장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혹은 “도덕화된 시장”의 영역은, 시장경제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욕망이 조우하여 탄생시킨 하이브리드한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민한 인류학자가 “도덕적 신자유주의”라 이름 붙인 이러한 시장의 도덕적 자기-비판을 통한 확장 매커니즘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도덕적 비판이 가진 정치적 효과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 같다. 시장과 사회, 이윤추구와 호혜성, 경제논리와 도덕, 경제적 인간과 협동적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후자의 계열에 대안적 위상을 부여해온 기존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오늘날 CSR, 윤리적 소비, 사회적 경제 영역 등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신자유주의”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체제의 팽창에 기여할 위험성마저 지니는 것이다.

 

예컨대, 많은 이들이 지난 몇 년간 신자유주의적 보수정권 하에서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영역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을 하나의 “역설적 현상”이라 지적하지만, 실은 이러한 현상이 역설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도덕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어떨까?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 자체가 그 내부에 국가의 후퇴를 자발적으로 대리보충하며 사회적 책임을 떠맡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들의 동원을 포함하고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시장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그것이 기반한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도덕적 신자유주의” 비판의 언어들을 창안해내야만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기업이 얼마나 공정할 수 있는지 혹은 돈을 착하게 벌 수는 없는지를 묻는 이 두 책의 익숙한 도덕적 프레임 속에선 결코 제기될 수도, 답해질 수도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시장과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시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씨름해야 할 과제 역시, 바로 이러한 질문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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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1 16:00 2019/01/21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