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과 사회> 2018년 여름호 (통권 122호)에 기고한 글. 교정전 원고입니다.

 

 

도박자 인류학을 위한 연구노트

 

 

“근대의 경제 발전은 자본주의 사회를 점차 거대한 국제적인 도박판으로 변형시킨다. 그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건들로 인해 자본을 따고 잃는다… ‘불가해함’은 도박장에서만큼이나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추앙받는다… 예상치 못한, 알 수 없는, 그리고 우연에 기반한 원인으로부터 야기되는 성공과 실패를 통해, 부르주아는 점점 더 도박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다… 그의 재산이 주식과 채권에 저당잡혀 있는, 따라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한 시장 가치 변동에 종속된 부르주아는 한 명의 전문 도박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박자는 미신에 홀린 이들이다. 카지노 단골들은 모두 운명에 호소할 마술적 방책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불가해함이 야만인들을 사로잡듯이, 사회의 불가해함이 부르주아들을 사로잡는다.”[1]

 

 

자본주의를 돈이 돈을 낳는 하나의 거대한 도박장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느슨하고 진부하며—가치가 자가증식하는 듯 보이는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현상 구조를 승인하고 심층의 자본운동에 대한 분석을방기하는—게으른 비유일지 모른다.[2] 하지만 이 글은 오늘날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의 맥락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본질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오래된 ‘픽션’과 ‘은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3] 즉, 만약 오늘날 자본주의가 초국적 금융시장을 매개로 한 하나의 거대한 카지노처럼 작동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제 한 명의 ‘도박자(gambler)’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쉬지 않고 돌아가는 오늘날 금융시장의 영향은, 단순히 초국적 기업이나 정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개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부동산 시장의 등락에 영향을 받고, 굳이 펀드나 주식·코인 투자의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새 연기금을 통해 미래가 주식시장에 저당 잡혀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건들에 의해 자본을 따고 잃는” 전지구적 도박장에 이미 한 발을 걸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굳이 최근의 ‘비트코인 열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전엔 부르주아와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금융시장이라는 도박판은 오늘날 ‘금융의 민주화’란 이름으로 그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금융화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노동자’이자, 자신의 인적 자본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창의적 계발의 압력에 시달리는 ‘기업가’적 주체인 동시에, 수시로 부동산·주식·코인 시장의 등락에 맡겨진 자신의 미래를 확인하고 부채에 허덕이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 은밀하게 대박의 꿈을 꾸는 ‘도박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금융자본주의의 새로운 경제적 주체로서 도박자에 대한 이해는—유사한 ‘투자자-주체’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더라도— 많은 부분 공백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일찍이 맑스와 그 계승자들의 작업을 통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체성으로서 노동자의 형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푸코와 통치성 학파의 연구는, 이 노동자와 중첩되면서도 대체관계에 있는 ‘자기의 기업가’라는 새로운 신자유주의 주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이에 비해 금융적 주체성으로서 도박자에 대한 논의는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비판이론의 영역에 걸쳐 매우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파편화된 논의들을 연결시키는 한편, 이를 통해 도박자라는 주체-형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몇가지 쟁점들을 추출하고자 한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오늘날 대표적인 금융적 주체성으로 등장하고 있는 도박자에 대한 종합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무망한 일일 것이다. ‘연구노트’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의 목적은 완결된 형태의 논의보다는, 도박자라는 주체성을 둘러싼 논의의 장소를 마름질하고 차후의 연구를 위한 일종의 개념적·실용적 발판들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장소 I: 도박자, 근대성, 리스크

 

먼저 우리의 손에 주어진 몇 가지 자원을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도박자’를 하나의 인간 유형이자 캐릭터로 파악하려 했던 대표적 시도는, 게오르그 짐멜과 발터 벤야민의 작업에서 발견된다. 1911년 출판된 짧은 에세이에서 짐멜은, 도박자를 예술가, 사랑에 빠진 연인 등과 함께 일상의 연속성에서 벗어난 삶의 경험을 추구하는 “모험가(adventurer)” 타입으로 분류한다.[4] 그에 따르면, 도박자는 과거 및 미래와 단절되어 게임이 제공하는 “절대적 현재성(absolute presentness)”에 몰입하는 자이며, 무의미한 우연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다. 세계와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노동자와는 달리, 모험가와 도박자는 불확실성에 몸을 맡기면서도 기회를 재빠르게 움켜쥐는 정복자의 기질을 가진다.[5]  벤야민은 이러한 짐멜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특유의 섬세한 논의를 통해 그는 도박자를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질서를 넘어서는 잠재적 힘을 가진 양가적 주체로 제시한다.[6] 한편으로, 벤야민은 자동기계 앞에 선 공장노동자와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하는 도박자를 등치 시킨다. 이 둘은 모두 역사와 맥락에서 단절되어 반복적인 작업에 종사한다는 면에서, 종합적 경험(erfahrung)이 불가능해진 자본주의의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증언한다.[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에게 도박자는 이 텅 빈 반복적 시간을 절단하고 지금-시간의 충만성을 도입하는 혁명가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도박자는 우연과 불확정성의 한복판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찰나의 순간에 계시를 통해 운명과 접속한다: “도박은 실험의 형태로 위험의 순간에 발생하는 섬광같은 자극을 만들어낸다. 이는 마음의 현재가 예언(divination)이 되는 주변적인 경우—말하자면, 인생의 가장 지고하고 드문 순간이다.”[8]

 

그러나 ‘도박자’라는 형상을 중심으로 찰나와 같은 근대적 시간성과 혁명적 행위의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이러한 시도의 반대편에는, 근대사회에서 도박과 우연의 요소는 주변화되어야 한다는—좀 더 지배적인—입장이 존재한다 (아마도 도박자에 대한 논의의 희소성은 바로 이러한 지배적 입장의 결과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근대성은 합리화와 탈-주술-화 과정을 통해 불확실성을 계산가능한 리스크로 번역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 관리를 확장하는 과정이기에, 우연에 기반한 도박과 같은 행위는 이같은 ‘합리적’ 조직 속에서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초창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종 발견되는 도박의 인기에 대한 로제 카이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과도기 사회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사회란 가면과 홀림의 결합된 힘에 의해 더 이상 지배되지 않지만, 규칙있는 경합과 조직화된 경쟁이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집단생활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 사회이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기본적인 가치들은 더 이상 시민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의 결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그들의 게으름과 초조함에 더 잘 들어맞는다.[9]

 

카이와에 따르면, 사회가 ‘진보’해 나갈수록 우연과 불확실성이 작용하는 범위와 영향력은 제한되는 대신, 경쟁과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체계가 시스템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보상체계가 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노동, 능력, 재능”에 기반해야 한다는 데 대한 일반적 합의가 이루어지며, 그 중 “노동”은 가장 “명예로운 소득원”으로 간주되곤 한다.[10] 따라서 복권 등 우연에 기반한 부의 획득은 원칙적으로 임금에 덧붙여지는 보충 혹은 여분에 머물러야 하며, 노동을 통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자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논의는, 근대성 속에서 도박자가 겪게 될 이같은 운명을 보여주는 한 편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베버는 부에 대한 욕망 자체보다는 이 욕망을 노동윤리와 그 합리적 조직이라는 정당화된 기반에 정초하는 것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을 찾는다.[11] 그는 이 정신의 등장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류로 제시하는 칼뱅주의 예정론에서 구원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되었고 개인은 여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기에, 이들은 지속적인 불안 속에서 자신이 선택되었음을 ‘믿고’ 고독하게 자신의 길—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12] 여기서 도박의 논리와 노동의 논리 간의 기묘한 착종이 발견되는데, 즉,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믿음에 의존하는 자들—이는 ‘주술적인’ 도박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에게 노동은 구원으로 제시되며, 도박자의 불안은 노동의 강박증적 조직으로 억압되고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박의 논리와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근대성의 노동윤리를 탄생시키지만, 안정적 기반으로서 노동윤리가 정초되는 순간, 무대 뒤로 사라지거나 존재하더라도 기존 체계를 강화하는 동력으로 기능할 뿐이다.[13]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비되는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각각 노동자와 도박자라는 주체-형상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 더 나아가 두 가지 근대성—흔히 계몽주의적 근대성과 문화적·미학적 근대성의 구도로 이해되는—간의 대립을 발견한다.[14] 카이와와 베버의 근대성이 진보의 시간 속에 우연을 포섭해 ‘길들이고’ 불확실성을 노동이라는 안정적 기반과 연결시켜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모델을 제시한다면, 도박자의 형상은 ‘지금-순간’에 충실한 카이로스의 시간성, 매순간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우발적 시간들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근대 자본주의 하에서 공존해 온 이 대립되는 근대성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룰 여유는 없으나, 이들이 각각 자본주의의 산업적 논리, 금융적 논리와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은 간단히 언급해 두도록 하자.[15]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오늘날 ‘도박자’라는 형상의 귀환이 기존의 노동체제에 대한 기이한 사후복수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의 근대성의 이상이 지속적 노동에 안정적 보상을 지급하고 조직된 노동 위에서 여타의 사회적 리스크를 보장해주는 사회보험 체계였다면, 이러한 ‘이상’이 기능부전에 빠진 오늘날 금융화된 신자유주의는 삶의 리스크를 개개인이 감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모두가 도박자가 될 것을 종용한다. 베버의 알레고리는 정반대로 뒤집혀져, 이제 노동의 절망이 도박자로의 탈주 혹은 추방의 유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귀환은 짐멜과 벤야민이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오늘날 귀환하고 있는 도박자적 주체는 짐멜과 벤야민이 파악한 도박자의 성격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성이 발휘하는 사회적·정치적 효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기입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한 금융적 해결책 속에서 금융시장과 접속하게 된 개인들은, 진보의 시간에 맞서 절대적 불확실성을 실험하기보다는 ‘지금-시간’의 논리를 현실화한 듯 보이는 가속화된 금융시장—찰나의 순간에도 무수한 거래와 가치의 등락이 이뤄지는—속에서 치밀하게 이윤의 기회를 엿보며 자신의 운을 실험할 것을 요구 받게 된다.

 

 

장소 II. 도박자, 주술, 선망

 

오늘날 금융적 주체성의 형상인 도박자가 이같이 합리적 계산과 우연의 교차점 위에 존재한다면, 이 합리성과 우연은 어떻게 결합하는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제기될 것이다. 그 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어왔던 우연과 불확실성이 후기자본주의에서 다시 ‘귀환’했다면, 요점은 그 귀환의 형태와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들이 “야만인들이 자연의 불가해함에 사로잡히듯이 사회의 불가해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라파르그의 제사는, 다시 한 번 논의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예컨대, 인류학에서 오랜기간 축적되어 온 주술(witchcraft)에 관한 연구들에서논의를 시작해보자.

 

아프리카 남수단 지역 아잔데족의 주술 관습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에반스-프리차드는 잘 알려진 곡물창고 붕괴사고의 예를 통해 합리성과 우연, 주술의 관계를 설명한다. 아잔데 족은 해충과 지열을 피해 나무 기둥을 받쳐 지상에서 떨어진 곡물 창고를 짓곤 하는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 곡물 창고를 받치던 기둥이 무너져 창고 밑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던 일군의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이 갑작스런 사고를 맞아, 아잔데인들은 이 사고가 누군가의 주술에 의한 것으로 규정짓고 그 주술을 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얼핏 합리성이 결여된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듯한 이 사례에 대해, 에반스-프리차드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지적한다.

 

아잔데인들이 이 붕괴를 주술탓으로만 돌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아잔데인들은 종종 흰개미들이 기둥을 갉아먹는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단단한 나무라도 시간이 흐르면 썩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또 사람들이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려 창고 밑 그늘에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각종 노동을 한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왜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창고 밑에, 그 창고가 무너지는 특정한 순간에 앉아있었던 것일까? 창고가 무너지곤 한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이 특정한 사람들이 창고 밑에 앉아있던 특정한 순간에 창고는 무너져야만 했던 것일까?[16]    

 

에반스-프리차드에 따르면, ‘주술’은 이러한 질문—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러한 사고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로 그 창고 밑에 모여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주술 때문이다! 이 때 ‘주술’은 불운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인과관계적 설명이 미처 가닿지 못한 영역, 사건의 독특성(singularity)이 자연법칙적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영역에—근대 사회에서 우리가 종종 마지못해 ‘운’이나 ‘우연’의 이름으로 남겨놓는 텅 빈 공백에—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불운과 마찬가지로 행운 역시 일반적인 인과관계적 설명과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며 그 ‘의미’를 묻게 만드는 갑작스레 도착한 ‘선물’같은 것이기에, 불운을 설명하는 주술의 논리는 반대로 행운을 좇는 도박자의 믿음 속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데 있다.[17] 짐멜이 말했듯이, 도박자는 “우연 속에 의미가, 합리적 논리에는 맞지 않더라도 무언가 필연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다고 믿는 자”이다.[18] 오늘날 도박자는 주사위의 숫자가 이미 정해진 확률에 따라 매번 독립적인 확률로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돈을 따는 것은 언제나 카지노(혹은 기관투자자나 작전세력)뿐이라는 현실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벤야민이 말하듯이 어떠한 행운이 ‘특정한’ 순간 자신에게 닥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운명과 은밀히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자이다. 이런 면에서, 도박자는 자기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자이며, 인과관계적 설명이 우연에 맡겨둔 공백을 채우는 주술적 사유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일련의 인류학자들은 금융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주술적 사고의 귀환, 즉 “오컬트 경제” 혹은 “오컬트 자본주의”라부를 수 있는 현상들에 주목해왔다.[19] 국제적 금융시장과 자본의 운동이 개개인의 삶에 더 깊이 침투할수록, 사실상 도박자가 되도록 내몰린 이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이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느낌을 받을수록, 주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형태로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의 곳곳에서 귀환한다: 인도네시아와 남아프리카에서는 갑작스레 부자가 된 이들을 주술사로 몰아 살해하는 주술사 사냥이 벌어지고, 인도의 농촌에서는 어린아이의 내장을 먹으면 땅 속에 묻힌 재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유아살인이 반복되며, 뉴욕에서는 투자은행직원들이 코카인에 취해 사탄숭배에 몰입한다. 사실 굳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들이 아니더라도, ‘주술사’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시장의 탄생이 “대박”이라 외쳤던 전-대통령의 말에서, 무속인의 말에 따라 선물·옵션에 투자해 천문학적 돈을 벌었다는 재벌총수에 대한 소문에서, 신년이 되면 은행 사이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사주팔자를 통해 올해의 돈벌이 운세를 확인하고, 코인가격의 상승을 갈구하며 “가즈아!”를 주문(chant)처럼 외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술이 전근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귀환한 매우 동시대적인 현상임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풍경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류학 연구들에서 주술은 우연적 선물과 연결된 자리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소에는 잠재되어 있다가 ‘사건’으로 표면화되는 그 사회의 ‘적대’가 재현되는 장소라는 점이다. 예컨대, 앞서 아잔데의 창고 붕괴 사고로 돌아가보자. 그 사고의 ‘기원’으로서 주술을 건 범인을 찾아내고 (사고로 죽은 이들과 갈등관계에 있던 이는 누구인가? 누가 주술사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 내에서 억압되었던 적대들은 표면화되고 동시에 조정된다.[20] 하지만 앞서의 논의처럼 현대의 도박자가 자기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자라면, 이제 이 적대는 어디로 회귀하게 되는가? 도박자가 노리는 행운과 은총은, 사회적 재화의 규범적 순환을 벗어나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기에, 타인의 선망과 비난을 불러들이는 입구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겨지던 이웃의 갑작스런 성공, 선물에 기반한 부는 언제나 선망(envy)과 질시를 동반하는 위험한 반-폴리스적 요소이다.[21] 이 부유하는 적대적 감정은 어느 순간 자신의 대상과 언어를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998년 12월부터 3개월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한 지역에서 약 120명이 살해당한 주술사 사냥에 대해 논하면서, 제임스 시겔은 ‘주술’과 ‘주술사’가 온당한(due) 자리와 몫에 기반한 사회적 인정구조가 깨어진공백에서 등장하는 이름임을 지적한다.[22]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지탱되던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급격한 도시화와 금융화로 인해 오랜 이웃이 기원이 모호한 갑작스런 부를 축적할 때, 이러한 변화는 ‘주술’의 결과로 설명되며, 주술사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시겔에 따르면, 이러한 폭력은 온당한 몫과 자리의 질서를 갈구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동시에 사회 속에서 억압되었던 적대가 주술사 사냥의 형태로 귀환한 원초적 형태의 혁명적 폭력이기도 하다.[23] 이러한 평가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서, 이는 우리 모두가 도박자가 되어 ‘온당치 못한(undue)’ 부를 갈구하는 세상의 이면은, 증폭된 선망과 질시, 주술과 비난의 세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이들의 욕망 때문이건, 이 주술을 둘러싼 비난의 증식 때문이건, 온당함의 범위를 넘어선 막대한 부의 축적과 그 전시 때문이건, 이 증식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언제나 수반할 것이다.  

 

 

장소 III: 도박자를 통치하기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감정과 비합리성의 문제가 오늘날 통치담론 및 프로그램의 새로운 대상이자 영역으로 부상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좀 더 과감히 말하자면, 합리적으로 리스크를 계산하지만 동시에주술적 믿음에 기대고 주위 사람들에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도박자’의 형상은, 최근의 통치담론 및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푸코는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상관물로,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인 ‘자기-기업가적 주체’를 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교환하는 인간도 소비하는 인간도 아닌 이 “기업과 생산의 인간”은, 비경제적 영역에까지 확장된 경쟁적 시장원리에 따라 자기 자신의 인적자본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관리하고 계발하는 주체이다.[24] 신자유주의 초창기에 제시된 푸코의 이러한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신자유주의 분석이 그의 논의에 기대고 있지만, 최근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금융화로 대변되는 현재의 변화까지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25]

 

무엇보다도 부침을 반복하는 최근 금융시장의 움직임은, 기존 경제학의 시장과 경제적 주체에 대한 가정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학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시도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기존 경제학과 상이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델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행동경제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6] 행동경제학 내부의 여러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에 참여하는 행위자는 이용가능한 정보들을 종합해 온전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아닌, 합리성과 감정, 이성과 직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표준적이지 않은 선호와 편향된 믿음, 일관되지 않은 결정-과정을 가진 존재라고 가정한다.[27] 예를 들어, 애커로프와 쉴러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서, 경제적 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경제적 행위자들이 보이는 비이성적인 선호, 즉 “야성적 충동”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이 충동의 요소로, 좋은 경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속임수에 당하거나 맹목적 믿음의 유혹에 빠져버리는 ‘부패와 악의’, 미래의 화폐 가치변동에 무감각하고 오직 현재에만 관심을 갖는 ‘화폐환상’, 풍문에 휩쓸려 결정을 내리는 ‘이야기선호’ 등을 제시하고, 이러한 비합리적 혹은 감정적 요소들이 실제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경기과열과 붕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델에서 앞서 논의되었던 도박자의 특징들—자신의 미래를 근거없이 낙관하고 현재-시간에 충실하며 각종 주술적 사유에 의존하는—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쉴러가 인정하듯이, “비이성적 과열”이 지배하는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투자와 도박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28]

 

이러한 새로운 경제인에 기반한 논의들은, 이를 둘러싼 통치 공간이자 주체로서 시장과 정부의 모델 역시 바꾸어 놓는다. 이제 시장은 투명한 정보공유와 합리적 판단에 기반한 교환 혹은 경쟁으로 운영되는 공간이 아니라, 비합리적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는 불안정성과 불균형—그리고 이로 인한 기회—를 내재하고 있는 역동적 공간으로 가정되며, 이 불안정성 속에서 행위자들의 비합리적 선호가 버블이나 붕괴의 형태로 재귀적 혹은 자기-예언적으로 실현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공공연히 인정된다.[29] 더 나아가, 시장은 여전히 진리의 장소로 기능하지만 행위자들의 심리적·감정적 요소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기에, 이러한 정념적 요소들이 야기하는 과잉을 통제하고 경제인이 가진 ‘정념의 올바른 사용’을 이끄는 역할은 정부의 과제로 주어진다.[30] 즉, 이 새로운 모델에서 정부의 개입은 필수적인 조건으로 인정되지만, 이 때의 개입은 시장 자체에 대한 개입이라기보다는 이 시장을 형성하는 개개인과 그들의 비합리성에 대한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31] 예컨대, 또 다른 행동경제학자 탈러와 선스타인이 제안하는 ‘넛지’와 ‘자유주의적 온정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는, 어떻게 시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경제인을 통치하고 그들의 비합리적 측면을 복지 및 사회정책 영역에서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32]

 

통치의 ‘감정적’ 혹은 ‘금융적’ 전환이라 불릴 만한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편으로는 정부의 통치 프로그램에 사회투자채권, 인센티브, 매칭 통장 등 개개인의 투자욕을 자극하는 형태의 금융적 기법이 적극 동원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감정적·비합리적 경제인을 ‘책임성’있는 주체들로 선별·생산하고 ‘과도하게’ 편향된 경제인들을 시장에서 배제하기 위한 각종 신용등급 시스템이 운영된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해 관계의 영역을 가지화하는 네트워크 분석이나 감정의 영역까지 수량화하는 빅데이터가 통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식형태로 적극 활용된다.[33] 물론 이러한 새로운 통치 프로그램들은 개인들이 리스크를 감당하도록 요구되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개인의 비이성적 ‘과잉’을 제어하고 조정할 것인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중첩되며 이를 보충·강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논의된 것처럼 이 감정적·정념적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등장은 통치 대상과 언어, 프로그램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 도박자적 주체들의 정념을 통치하려는 시도들이 기존의 기업가적 주체에 대한 통치 프로그램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면서 어떤 형태로 발전·변형되어 갈 것인가는 앞으로 흥미로운 논의지점을 형성할 것이다.  

 

 

장소 IV: 도박자와 혁명

 

“프롤레타리아가 잃을(lose)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win) 것은 전세계이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비르투(virtu)로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를 유혹해 길들일 것을 군주에게 간언했던 마키아벨리 이래로, 근대 사상 속에서 혁명과 저항은 종종 도박의 은유를 통해 사유되어 왔다.[34] 혁명은 연속성과 반복에 의해 지배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카이로스의 순간을 도입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도박의 성패가 손에 쥔 카드패와 전략, 행운에 기인하듯이, 혁명은 주어진 정세와 역량, 우연적 계기의 마주침에 기반한 순간의 기예(art)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혁명=도박’의 은유는 최근의 급진 정치사상들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벤야민의 지금-시간에 기반한 메시아적 혁명론, 편지(혹은 선물)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리다의 탈구축 정치론, 목적론을 부정하는 후기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등은 모두 필연성과 법칙보다는 우연과 도박의 관점에서 급진 정치를 재-사유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더 나아가,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들”의 정치는 판돈 없이 대박을 꿈꾸는 ‘불량한’ 도박자와 닮은 꼴이라는, 혹은 바디우가 내세우는 진리-사건에 충실한 정치적 주체는, 자기에게 우연처럼 닥친 사건 속에서 운명을 읽어내려는 주술자-도박자의 이미지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가능할 것이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이같은 혁명=도박의 인기는 오늘날 자본주의에서의 혁명의 가능성과 어려움을 묘사하는 한편, 우리의 정치적 언어와 상상력이 이미 어느정도 금융화라는 풍경과의 선택적 친화성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도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은, 이 오래된 은유에 보다 흥미로운 변형을 가한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스위스의 한 투자은행에서 현장연구 중이던 인류학자 스테판 레인스는, 1월 25일 타흐리히 광장에서의 봉기 직후 이 투자은행에서 펼쳐진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35] 봉기 후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이집트 주식시장은 폭락을 경험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떠오르던 아랍지역의 주식시장에 많은 투자를 했던 이 은행의 애널리스트들은 곧바로 이 봉기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 결과가 어떤 경제적 리스크를 가질지, 궁극적으로 어떠한 주식을 더 사고 팔아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레인스가 강조하듯이, 이러한 혁명적 사태는 부정적 위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균형을 흔들어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수익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회’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혁명의 정치적 의미나 내용, 애널리스트 본인들이 믿고 있는 봉기의 성공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이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이며, 이 추론에 기반해 이들은 이집트에 투자를 늘릴지 줄일지를 베팅하고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을 권유한다.[36]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혁명에 가격을 매긴 애널리스트들의 도박은 재귀적 과정을 통해 일정부분 현실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타인들이 이집트 혁명의 경제적 영향에 대해 부정적일 것’이라는 입장에 베팅한 이들이 기존의 투자를 다른 지역의 주식시장으로 옮긴다면, 이 결과 혁명은 ‘실제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이는 사후적으로 이들의 베팅을 정당화한다!

 

사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오늘날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은 무엇보다도 투자/도박의 기회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번역된다. 2017년 초 탄핵정국 당시, 탄핵 가결/부결시 주목해야 할 각각의 테마주들에 관한 정보가 시중에 돌아다니고, 헌법재판관의 입에서 “파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치솟았던 주식시장의 그래프가 탄핵 결정에 환호하는 시위대의 모습과 한 화면에 나란히 담겼던 것은, 가장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대중의 감정·믿음과 긴밀하게 동기화된 금융시장은 특정한 ‘사건’의 파급력과 영향력을 판별해주는 ‘객관적’ 믿음의 지표로 기능한다. 북한과의 전쟁위험이 증가할 때마다 사람들은 주가 동향을 참조해 이 위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들이 이 위기를 진짜라고 ‘믿는지’를 판별한다. 이 ‘객관적’ 믿음의 지표가 개개인과 기관들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놓고 벌인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도박의 종합적 결과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 도박을 통한 믿음의 구성에 연루되며,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과 변화도 이 ‘믿음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금융시장의 구조에 포섭되며, 이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날 세계의 ‘사건없음’과 궁극적인 변화의 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은 지루한 대의민주주의나 과도한 관료제에 있기 보다는, 역설적으로 흥분과 열광에 기반한 금융자본주의와 도박판의 확대, 모두가 도박자가 되어버린 이 구조에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건들을 투자의 기회로 번역해내고 각종 지표의 등락 속에 포섭함으로써 이 금융적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사건’의 불가능성을 증언하고 상연한다. 따라서 오늘날 도박과 혁명에 대한 은유는 더욱 정교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혁명이 도박이 된 세계를 넘어, 혁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세계이자 궁극적으로는 도박이 혁명을 관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37] 이는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전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급진적 정치를 논하고 기획하기 위해서는 이 금융적 장치와 믿음의 구조들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적이며, 새로운 도박으로서의 혁명은 모두가 도박자가 된 조건과 그 결과에 대한 고민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도박도, 이 전 세계화된 도박판의 구조에 새로운 판돈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한계 내에서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에서 나는 도박자라는 형상을 근대성, 주술, 통치, 혁명 등의 키워드와 연결시키면서 이 오래되고도 새로운 금융주체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소들을 제시하였다. ‘연구노트’라는 사전경고를 달기는 했으나, 이 느슨하고 자의적인 지도 그리기는 여전히 많은 영역들—예컨대, 도박자의 물신주의나 도박과 테크놀로지의 문제—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도박자의 주체성이 어떻게 기존의 노동자, 기업가 주체와 충돌하고 중첩되는지 그에 따라 오늘날 통치와 정치의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작업은,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논리를 ‘아래로부터’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한 핵심적 입구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말라르메의 유명한 시구처럼 모든 사유가 하나의 주사위 던지기를 요청한다면, 거대한 카지노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세계는 도박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또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라는 역설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1] Paul Lafargue, “Die Ursachen des Gottesglaubens,” Die neue Zeit, 24 (1), 1906. 이 제사(題詞)는 Walter Benjamin, The Arcade Projec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 49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2]  요하임 비숍, 김성구 역,“카지노 자본주의”<이론> 12호, 1995. 하지만 이 은유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가 순전히 운에 좌우되는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웨닝이 지적하듯이, 이 대중적 은유에서 종종 간과되는 이면은 많은 카지노 도박장들이 국가기구나 사적집단의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카지노화된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이 정당화하기 힘든 부의 축적, 손실, 이동을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폭력의 구조가 존재한다. Mario Wenning, “On Gambling” Thesis Eleven 143 (1), 2017. 확대된 금융화의 이면으로서 더욱 전면화되는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 최병두 역, <신제국주의>, 한울, 2016. 

[3] ‘의제(fictitious)’자본으로서의 금융자본의 동학을 분석할 때 픽션과 은유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Max Haiven, Cultures of Financialization, Palgrave McMillan, 2014, 1장.

[4] Georg Simmel, “The Adventure,” Simmel on Culture: Selected Writings, SAGE, 1998. 

[5] Georg Simmel, 앞의 글, p. 230.

[6] ‘도박’은 벤야민의 사상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주제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에 대한 개략적 설명으로는, Michael A. Rosenthal, “Benjamin’s Wager on Modernity: Gambling and the Arcades Project” The Germanic Review 87 (3), 2012. 

[7] Walter Benjamin, “On Some Motifs in Baudelaire,” Selected Writings Vol. 4,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 329.

[8] Walter Benjamin, “Notes on a Theory of Gambling,” Selected Writings Vol.2,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 298.

[9] 로제 카이와, 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p. 212-3.

[10] 로제 카이와, 같은 책, p. 229.

[11] 막스 베버, 김덕영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2010.

[12] 막스 베버, 같은 책, p. 182.

[13] 베버의 이론 체계에 있어서 “사라지는 매개자”의 개념과 기능에 대해서는,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Narrative Structure in Max Weber” New German Critique 1 (1), 1973.

[14] 이 두 근대성의 구분에 대해서는, Hans Robert Jauss, Toward an Aesthetic of Recep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김홍중,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시학,”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5] Peter J. Taylor, Modernities, Polity, 1999; 조반니 아리기, 백승욱 역, <장기 20세기>, 그린비, 2014.

[16] E.E. Evans-Pritchard, Witchcraft, Oracles, and Magic among the Aznade, Clarendon Press, 1976, p. 22.

[17] 유럽의 중세 도상학에서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종종 야누스와 같이 한 쪽 얼굴은 웃고, 한 쪽 얼굴은 찡그린 것으로 묘사된다. Wenning, 앞의 글, p. 86. 이는 규범적인 경로를 따르는 재화와 상징의 순환을 넘어선 수직적 개입으로서 ‘운’이라는 것이 가지는 양가적 성격을 표현한 것이다. 인류학 논의에서 ‘운’과 유사한 위상학적 지위를 가지는 ‘선물’ 역시 ‘부채’라는 이면을 가지며, 마르셀 모스가 지적하듯이 ‘선물=독(poison)’이라는 등식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Marcel Mauss, “Gift, Gift,” The Logic of the Gift, Alan Schrift ed., Routledge, 1997.  

[18] Georg Simmel, “The Adventurer,” Simmel on Culture: Selected Writings, SAGE, 1998, p. 224. 

[19] 예를 들자면, Jean Comaroff and John Comaroff, “Occult Economies and the Violence of Abstraction,” American Ethnologist 26 (2), 1999; Jane Parish, “Beyond Occult Economies: Akan sprits, New York idols, and Detroit automobiles” HAU 5 (2), 2015; Aarti Sethi, “The Life of Debt in Rural India,” Ph.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2017. 

[20]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과정이 가장 극적으로 재현된 사례는 아마도 세월호 ‘사건’(event)일 것이다. 세월호를 교통‘사고’에 비교하는 것은 사회’과학’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설명일지 모르지만, 사고의 통계적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그 사건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이 표면화되고 심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공백 속에서 였다. 사회적 적대를 재현하는 이러한 질문들은, 놀랍게도 최고 권력자의 배후에서 실제로 ‘주술사’를 발견함으로써 극적으로 종결되고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21] Aristotle, On Rhetoric,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 145. 아리스토텔레스는 선망과 질시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감정임을 강조하는데, 이 점은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의 주술사 사냥이 어째서 민주화 과정 이후에 등장하였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22] James Siegel, Naming the Witch,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23] Siegel, 같은 책, p. 161.

[24]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Picador, 2008, p. 147.

[25] 예컨대, Wendy Brown, Undoing the Demos, Zone Book, 2014; Maurizio Lazzarato, Experimental Politics, The MIT Press, 2017; Michel Feher, Rated Agency, forthcoming 등의 논의를 참고하라.

[26] 물론 행동경제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행동주의는 푸코도 강의 중에 언급하고 있는 스키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행동경제학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대한 소수 비판 그룹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경제학 패러다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90-2000년대를 거치면서라고 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 설명으로는, Floris Heukelom, Behavioral Economic: A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27] 도모도 노리오, 이명희 역, <행동경제학>, 지형, 2007; 박대민, “시장자유주의 통치성의 계보학: 1980년대 이후 선호하는 인간의 통치로서 금융통치성의 대두” <커뮤니케이션 이론> 10 (4), 2014.

[28] 로버트 쉴러, 이강국 역, <비이성적 과열>, 알에치코리아, 2014.

[29] 헷지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실제 금융시장의 흐름이 사람들이 금융시장에 가진 인식과 느낌, 실천에 영향을 받는다는 본인의 ‘재귀성(reflexivity)’ 개념을 통해, 이러한 시장의 자기-예언적 속성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George Soros, The Alchemy of Finance, Wiley, 1987. 사실 이러한 재귀성의 논리는, 이후 살펴볼 애널리스트들의 분석 활동이나 인플레이션 타겟팅 등의 형태로 이미 금융시장의 실천 속에 깊이 들어 와 있다.

[30] 이러한 논의구도는 허쉬먼이 분석했던 개인의 파괴적인 열정과 무해한 열정의 구분을 둘러싼 17세기 자유주의 논의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Albert Hirschma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당시 이 논쟁은 ‘이해관계’라는 개념의 탄생과 이를 통한 파괴적인 열정의 통제라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부상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정념적 경제인의 통치는 이러한 이해관계와 정념의 경계선을 지우는 동시에 다시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1] Christian Berndt, “Behavioral Economics, Experimentalism and the Marketization of Development” Economy and Society 44 (4), 2015.

[32]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넛지>, 리더스북, 2009. ‘넛지’ 담론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John McMahon, “Behavioral Economics as Neoliberalism: Producing and Governing Homo economicus” Contemporary Political Theory 14 (2), 2015.

[33] 윌리엄 데이비스, 황성원 역, <행복산업>, 동녘, 2015.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SNS 사용 기록에 기반한 심리·감정 분석을 통해 개인의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알고리듬은 점차 많은 신용 등급 회사들에서 활용되고 있다.     

[34] 마키아벨리 사상에 있어서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중요성에 대한 탁월한 설명으로는, 존 포칵, 곽차섭 역,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나남, 2011을 참조할 것.

[35] Stefan Leins, Stories of Capital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또한 같은 저자의 “Pricing the Revolution” Anthropology Today 27 (4), 2011도 참고하라.

[36] 이는 주식시장에서의 투자 전략을 미인대회 수상자를 예측하는 게임에 비유한 케인즈의 유명한 논의를 연상시킨다. 케인즈에 따르면, 이 때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사람을 수상자로 베팅해야 한다는 점이다. John Maynard Keynes,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 156.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타인의 믿음에 대한 믿음은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냉소주의적 이성과 물신주의의 기본구조를 형성한다.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1997.

[37] 프랑스와 에발드는 사회보험은 “혁명에 대한 보험”이기도 하며, 역사상 사회보험이 발달한 나라에서 전면적인 사회혁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보험과 리스크”, 이승철 외 역, <푸코 효과> 난장, 2013. 이는 사실일지 모르나,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보험에 기반했던 “복지국가 (섭리국가)”의 사회신학이 붕괴한 이후 어떠한 새로운 믿음의 구조가 이 “혁명에 대한 보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시장은 사회보험의 훌륭한 대체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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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1 16:03 2019/01/21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