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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자본주의라는 이상 혹은..

1.
2011년의 마지막 밤은, 주코티 파크(혹은 리버티 스퀘어)에서 보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에>를 꼭 봐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룸메이트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난 후, 공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경찰과의 충돌이 대충 정리되고 난 후.. 바로 옆 동네 타임스스퀘어에는 백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는데, OWS 신년맞이 행사에는 넉넉히 잡아도 이백명 남짓해 보이는 숫자만 옹기종기 모여있다.(나중에 알고보니 경찰과의 충돌 이후에 많이들 돌아갔다고 한다.) 한 해를 달궜던 이슈였던 것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한 마무리란 서운함에 할일 없이 공원 주위를 서성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밤바다나 보자며 가까운 부두로 향한다.    

 

2.

뉴욕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평소 연락 없던 지인들에게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몇 통 받았다. (뭐 사실은 고맙게도 그걸 핑계 삼아 안부를 전한 거겠지만 :)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한테나 미디어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집회에 몇 번 참여한 게 전부인데다 미국의 정치 운동 지형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는 나로서는 자연스레 말을 아끼게 된다. 다만 (미국) 좌파 학자들의 (반쯤은 호들갑 섞인) 반응을 알고 싶다면 Theory and Event 특집호에 실린 논문들을 참고하라는 답변 정도는 드릴 수 있겠다. 아마도 2-3개월 간은 open access일테니 천천히 다운받아 보시길.

 

3.
하지만 그 동안 이 운동에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이 난 지도교수부터 시작해서 주변에서 온통 그 얘기 뿐이니 사실 관심을 안 갖기도 힘든 일이지만, 이 운동의 어떤 면들은 사실 흥미롭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이미 "소리통"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었던 human microphone에 쏟아진 찬양들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분절articulate하고 번역해내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 운동이 일차적으로, 99%를 자임하는 이들(개인적으로는 이 구호의 긍정적 힘과는 별도로, 이 구호 속에서 언제나 보편계급임을 자임해온 미 백인 중산층들의 환상을 엿볼 수 있음을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 그들의 불만을 "탐욕greed"에 가득찬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가들의 "책임responsibility"를 요구하는 것으로 표출한 것은, 한 마디로 "징후적"이다.

 

혹시 이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가들과 옹호자들이 드디어 같은 언어, 즉 "윤리"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이들이 이야기하는 "탐욕"에 대한 비판과 자본가의 "책임"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경제위기의 대안이라며 열렬히 선전되고 있는 "윤리적 자본주의ethical capitalism" (한국에는 "자본주의 4.0"으로 소개된)의 기획, 즉 투명성과 책임accountability, 공정 거래와 착한 자본가라는 "윤리적" 이상에 기반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획과 얼마나 떨어져있는 것일까?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전사前史였던 반지구화 운동과 반전집회에는 지구화 대 반지구화, 테러와의 전쟁 대 반전이라는 다른 "슬로건들"이 있었지만, "슬로건 없음"을 내세우는 이 새로운 운동 속에서는 1%와 99%라는 표면적 대립 속에 사실 동일한 윤리적 자본주의의 언어들이 은밀히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운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목소리들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즉 많이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 운동은 사실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획이 일정한 헤게모니를 획득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전해진 그 날 점거자들의 트위터와 블로그에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다양한 반응들이었다. 그도 1%의 일부일 뿐이라는 냉소적 반응에서, 잡스는 경제위기 주범인 금융자본가들과 다르다는 변호, 애플의 폐쇄성과 기부에 대한 잡스의 무관심을 지적하며 애플이 생각보다 "착한" 기업이 아니라는 지적과, 잡스가 주도한 네트워크 혁명이 이 운동을 가능케 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주장, 잡스가 중국에 아웃소싱을 하여 미국의 일자리를 없앴다는 비판에서부터, 그의 "혁신" 정신은 이 운동과 맞닿아 있다며 시위대에서 공식적으로 그를 애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 기업가의 죽음에 쏟아진 이처럼 혼란스러운 반응들(만약 도날드 트럼프의 부음이었다면, 시위대의 반응은 어땠을까?)은 그 자체로, 잡스라는 대표적인 "윤리적" 자본가의 기표가, 사실 1%와 99%라는 표면적 선명함 이면의 어떤 은폐된 지점을 건드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다소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보이는 지적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 냉소적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할 말 많고 중요한 이 운동에서 굳이 이러한 부분을 끄집어내는 것은, 무엇보다 오늘날 이러한 "윤리"와 자본주의의 만남이 꼭 지적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얼마 전부터 (사실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고민해오고 있는 "통치"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이 언어의 합치를 눈 앞에 두고 또 다른 형태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우리는 이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는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언어의 합치 속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을,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정치의 죽음을 보아야하는 것일까? 즉 "정치"를 새롭게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통치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즉 보편적 적대를 표현하는 언어를 재발명 해야한다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통치성 연구자들이 조금은 주저하며 인정하듯이) 통치가 끝나고 저항이 시작되는 명확한 지점같은 것은 없다고, 다만 우리는 그 사이의 미세한 선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 공통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통치의 기반과 정치의 가능성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걸까?

 

예컨대, 나는 후자의 예를 (그 자신은 사실 저 두 입장 사이에 미묘하게 걸쳐있는) 삐에르 로장발롱이 복지국가에 대한 좌우파의 비판들을 검토하면서 끌어낸 투명성transparency과 가시성visibility의 구별에서 발견한다. 유사해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투명성이 복지국가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절차적 개편 혹은 제도의 해체를 요구하는 우파의 언어라면, 가시성은 복지국가의 작동을 정치화할 것을 요구하는 좌파의 언어이다. 즉, 좌파와 우파는 복지 국가의 관료제 비판을 공유하면서도 그 목적에 있어 상이한 전망을 갖는다. 예컨대, 좌파는 복지국가의 재정개편을 요구할 때, 소비세를 약간 올리는 것이 좀 더 수월한 복지 재정확충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 비가시적인 방식 대신에 부유세를 책정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이 부유세의 도입 과정은 그 자체로 사회적 불평등을 가시화하며, 이를 둘러싼 갈등과 "정치"를 촉발시킴으로써 복지를 순전한 통치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비판했던 겉보기에 동일해보이는 언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차이들을 구분해 내야한다..... 혹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이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공통의 언어 속에서 "공정 사회"와 "공정 무역" 간의 차이를, accountability와 responsibility 간의 차이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가의 책임"간의 차이를 판별해내는 미묘한 작업을 전개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복지국가를 공통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러한 언어들이 실제로 어떠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는가라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 사실 이러한 미세한 선긋기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정치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즉, (조금은 철지난 유행어들을 쓰자면) 이러한 "최소차이"는 사실 얼마나 거대한 "배치"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이 유사한 언어들이, 사실 다른 맥락 속에서 순환하며 다른 정치적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다른 사회적-정치적 환경이 요구되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부자에게 세금을"이라는 온건한 구호에서 "연준해체, 정부해체"라는 유사-급진적인 아니키적 요구까지 뒤엉켜있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목소리들이, 사실상 금융기관의 사회화나 재산 몰수와 같은 기초적인 이행기적 요구들의 철저한 폐제foreclosure에 기반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과 도덕, 권력과 힘의 문제로 철저히 환원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담론은 이러한 폐제를 정당화하고, 역으로 이러한 폐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기보다는 "탐욕"과 "책임", "나눔"이라는 기존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언어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착deadlock을 뚫고 이 운동이 정말 다른 "배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언어의 최소 차이를 실제적인 정치적 차이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반복될 이 운동에 걸려있는 진짜 판돈은 오히려 이 같은 질문이 아닐까 싶다.


4.
야경을 즐긴 후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언제나 나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인) 룸메이트가 훗날 2011년이 1848이나 1968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묻는다. 아랍의 봄에서 런던 봉기와 아테네의 여름을 거쳐 뉴욕의 가을까지.. 사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고 어떤 새로운 순환의 실마리가 보이는 한 해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 예멘, 그리스는 여전히 투쟁중이고, 런던 봉기는 오히려 보수 정권의 역공에 길을 내 준 것 같으며, 뉴욕의 가을은... 갈 길이 너무 멀다. 오히려 2012년이, 그리고 다가오는 날들이 1848이나 1968이 될 수 있을 것 같냐고, 아니 어떻게 하면 될 수 있겠냐고 묻는 게 현명한 질문이 아닐까? 진부한 말이지만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기에, 작년 한 해 반동의 회귀만을 경험했던 한국이 부디 이 새로운 순환에 낙오(?)되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이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 모두 2012년 복 많이 받으시길, 아니 복 많이 만드시길..

 

 

 

 

그냥 끝내기 섭섭하여 democracy now의 깔끔한 2011년 정리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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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12/01/02 04:51 2012/01/02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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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이소선을 보내며

1.
개강 전에 이삿짐 정리를 마무리 짓느라 분주하던 터에, 뒤늦게 이소선 여사의 영면소식을 접했다. '그래, 이렇게 가시는 구나..'라는 담담한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 켠이 허하다. 무언가라도 적어야 겠다는 생각에 블로그에 들어와 아직 박스도 채 풀지 않은 방 안에서 근 1년만에 포스팅을 한다. (내가 한글로 긴 글을 쓸 만한 공간은 이제 이 곳 밖에 남아있지 않다.)

2.
그러고보면 지난 시절 이소선씨와는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집회 현장에서 멀리서 뵌 거야 어디 한두 번이겠냐마는.) 한 번은 대학 신입생 때 참석한 집회에서 우연히 친척 어른 중 한분을 만났고, 그 친척분의 동행이 이소선씨여서 잠깐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두 번째는 졸업할 때 즈음 고 김진균 선생님 수업 시간에 어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잠시 찾아뵜었다. 처음 만났을 때나 두 번째 뵜을 때나 너무 자연스레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는데 대화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도 그 손의 감촉은 왠지 모르게 계속 기억에 남는다.  

3.
이소선씨의 삶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문구는, 이미 여러 신문들이 부음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민중의 어머니로"일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운동의 길에 접어든 이소선의 삶에 이 문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따라붙는 것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문구에서 읽어낼 수 있는 상징정치의 두께는 그리 만만치 않다. 사실 주변부 국가들의 사회운동에서 아들이나 남편을 잃은 어머니나 미망인 같은 "여성 유가족들"이 투쟁의 중심으로 재현-상징화되는 것은 그리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오래 전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위 "정치적 과부들political widows" 같은 경우 그 대표적인 예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여성유가족을 둘러싼 담론과 상징화에는 어떤 함정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행위성agency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들을 누군가의 "어머니"나 "미망인"으로 호출하고 그 속에 가두는 이 구도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민족적 고통의 메타포이자, 모성신화나 정절신화를 은밀히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기능하곤 한다. 특히 매판 자본가 "아버지"밑에서 고통받는 "어머니"로서 민족과 민중, 그리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투쟁하는 애국 열혈 "청년들"이라는 상징적 대립구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소선을 둘러싼 담론과 재현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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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지만 개인적으로 언제부턴가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된다. 그건 이 설명이 틀렸다고 믿어서가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이러한 설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어서이다. 이소선의 삶이 주는 어떤 울림이 이러한 상징정치의 효과로 온전히 환원될 수 있을까?

어느 인터뷰에선가 바디우는 정치적 주체는, 비동일성에의 동일시라는 역설적 동일시를 통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역설적 동일시는 개인의 특이한singular 경험을 직접적으로 보편적인 것과 연결시킬 때, 즉 개인의 특이한 위치를 곧바로 사회의 보편적 적대의 징후적 비틂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이데올로기가 보편적 적대를 국지화-특정화하는 제유metonymy의 매커니즘에 기반해 있다면, 정치적 주체는 이와는 정반대로 징후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나아가는 정신분석의 경로를 따를 때 도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민중의 어머니로" 요약되는 이소선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어머니"라는 기표 앞에 붙은 수식어의 변화, 즉 한 개인으로서의 "전태일"에서 전체 "노동자민중"으로의 가파른 도약일 것이다. 이소선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움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전체 노동자들의 징후적 비틀림의 지점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개입하여 이 도약을 현실화시켰다는 데 있다. "전체 노동자민중의 어머니"라는 무시무시한 호명을 말그대로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내는" 불가능해보이기만 하는 작업.. 이 특이성에서 보편성으로의 기적같은 도약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끈질긴 충실성 속에서, 우리는 누구누구의 어머니가 아닌 윤리적-정치적 주체로서의 "투사" 이소선을 만난다. 아마도 그녀의 삶은 이미, (그녀의 죽음을 맞아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어머니"라는 기표를 둘러싼 상징정치의 틀 속에 가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리라. 그녀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그녀가 "어머니"여서, "모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여서, 민족적 고통의 메타포여서가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가 오늘날 불가능해보이기만 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삶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5.
나중에 아들한테 가 할 말이 없을까 살아생전 노심초사했다는 이소선씨가, 2011년 한국사회의 엄혹한 정세 속에서 편히 눈을 감으셨을지 걱정이다. 부디 지금쯤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아들을 만나 오래 못나눈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길 바랄 뿐이다. 아마도 모란 공원에 묻히실텐데, 다음 귀국길에는 잠시 들러 늦은 인사라도 드리고 와야겠다. 삼가 이렇게나마 멀리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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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11/09/05 12:46 2011/09/0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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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것" 기획기사 소개

블로그를 만든 이후 지금까지 외부 링크는 최대한 자제한다는 주의였는데, 오랜만에 좋은 글과 기획을 발견해서 슬며시 옮겨놓는다. 방학 전까지는 당분간 블로그에 긴 글을 쓸 시간은 곧 죽어도 없을 것 같고, 그래도 가끔이나마 방문하시는 분들께는 참고할 만한 글이 될 것 같다.

 

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8843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주제로 한 학술연재인데, 주제가 주제인만큼 앞으로 어떤 논조로 쓰여지는가에 따라 기획에 대한 평가가 갈리겠지만, 첫번째 글과 목차만 봐서는 꽤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사회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는 최근 들어 고민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우연찮게 뒤르켐과 모스, 동즐로를 같이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져서.) 이 기획에서도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기는 하지만, 이 외에도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보장소득이나 애국주의 논쟁 같은 현실적 논쟁에서부터, 사회학-비판이라는 개인적인 숙원 사업(?), 그리고 네이션과 the social의 중첩 및 분기에 기반한 내셔널리즘론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논의들과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이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부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어느정도 분위기는 느껴지지만.)

 

조만간 시간이 되면 블로그를 통해서든지 다른 방식을 통해서든지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만,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가진 원칙적인 입장은 기사에도 잠깐 언급되는 동즐로의 입장 -신자유주의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사회의 위기가 아닌 정치의 위기이며, 우리가 물어야할 것은 사회의 새로운 위상과 그 표상이 이러한 통치의 기획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는-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물론 이것은 아주 큰 틀에서의 주장일 뿐이고, 세부적인 지점들로 들어가면 다양한 논점들이 제출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동안 기획연재 같은 경우 첫주만 읽고 잊어버려 나머지 부분을 못보는 경우가 많은데, 블로그에 올려놨으니 잊어버리진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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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10/09/28 11:25 2010/09/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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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근황

1.

그러고보니 근 1년 만의 포스팅. 하지만 불로그질을 재개하는 글이 될 지, 불로그를 접는 인사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사람들의 연락처를 한국에 두고 오는 바람에, 싸이도 트위터도 하지 않는 내게 이 공간은 이메일 답장을 제외하면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 버렸다. 포스팅을 자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댓글이나 방명록 확인은 꾸준히 할 생각이니 혹시 전할 말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거나 이 곳에 남겨주시길..

 

2.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올해 내 신상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거의 3년 반 만에 full-time student(라 쓰고 "백수"라 읽는)로 복귀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를 태평양 건너 뉴욕으로 옮긴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이 반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연이어 벌어진 일이라, 사실 지금도 적응기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앞으로 불로그질을 할 수 있는 심적 혹은 물리적 여유가 생길지도 지금으로선 불투명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있다. 요즘 나의 일상은 아침에 눈이 떠질 때 일어나 도서관에서 그 동안 보고 싶었던 책들을 읽다가, 오후에 영어 강의를 2-3시간 듣고 카페나 도서관에 가 책을 보거나 마음이 동하면 다운타운으로 놀러나가는 일의 반복이다. 주말에는 관광객 모드로 변신해 미술관에 놀러가거나 양키 스타디움을 찾기도 한다. 지난 3년 동안 어디론가 도망가버린 집중력이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그대로 신선 놀음이라 할 수 있는데, 9월에 학기가 시작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될 것이다. 말그대로 30대 초엽에 맞게된 그리 길지 않은 휴가인 셈이다.   

 

3.

유학을 결정한 이후, 종종 유학, 특히 미국 유학을 가는 이유에 대한 (절반은 비난조의) 질문을 받았다. 처음 유학 이야기를 꺼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역시, (약간의 실망을 담은) 의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유학이 흔하디 흔해진 세상이라지만, 내가 갈지는 몰랐다는 식의..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 되기"같은 얄팍한 윤리가 아니라, "돌아가야 한다"를 외쳤던 바보같은(괴물같은) 뿌리박힌 윤리를 지지한다고 이야기해왔다. 누군가 거리를 두어야 넓게 보인다는 지식 사회학의 공리를 들이밀 때, 나는 넓게 보기보다는 깊게 보고 싶으며 거리를 두기보단 그 속에 있을 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반응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미국이라는 동네에서 한국사회를 공부하는 것이, 좀 더 큰 세상을 보여줄 것이라던가 한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줄 거라는 환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한국 사회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이 나의 기존 이야기들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될 현실적 조건들-같이 공부할 수 있는 교수진과 장학금의 문제에서부터 앞으로 가지게 될지도 모를 기회의 문제까지-을 제외한다면,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단절과 도피의 필요성이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내 기억이 맞다면 <일방통행로>에서 일텐데) 벤야민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인들이 "갑자기 공기의 무게를 느끼게 된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내가 받은 느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부터 삶의 무게에 조금씩 짜부라져가는 상황이었다. 몇 가지 개인적인 문제와 사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남은 것은 한국에서 이 무게를 그대로 지고 살아갈 것인가, 잠깐이라도 이 곳을 벗어나 더 늦기 전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였고, 결국 내 선택은 후자였던 셈이다.

 

물론 여기라고 삶이 고단하고 무거운 곳이 아니겠냐마는, 최소한 나에게 이 곳의 공기는 한결 가볍다. 여기에서는 나의 예전 실수들이 가져온 결과에 부끄러워할 일도, 변해버린 누군가의 모습에 실망할 일도, 가끔씩 솟구치는 울분에 잠 못 이룰 일도 없다. 종종 창처럼 나를 찔러대던 한국의 소식들은, 딱 그 물리적 거리만큼 무뎌져 도착한다. 지금 내 앞에는 그저 읽어야 될 책들과 써야 할 글들, 그리고 어떻게든 통하게 만들어야 할(!) 말들이 놓여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절과 도피가 앞으로의 내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 삶의 무거움이 나를 짓누를 것 같아 두려웠다면, 여기서는 이 가벼움이 나를 망가뜨릴 거라는 공포와 싸워야 하리라.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몇 년째 붙자고 있는 화두들에 새로운 질문이 더 얹혀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어로 한국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 중심(혹은 제국)에서 그 언어로 주변(혹은 식민지)를 연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고민. 요즘 틈틈이 스피박과 레이 초우를 다시 집어드는 이유다. 

 

4.

내가 다니게 될 컬럼비아 대학교 앞 골목에는 Book Culture(예전 이름은 Labyrinth)라는 나름 유명한, 서울대 앞의 <그날이 오면> 같은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 있다. 주로 맑시즘이나 문화연구, 문학 관련 책들을 비치해놓고 몇몇 책들은 매우 싼 가격에 내놓기도 하는데, 오늘 가니 알튀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단돈 4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뒤적이다 보니, 손님없는 가게를 홀로 지키던 점원이 심심했는지 말을 걸어온다. 알튀세르 좋아하냐고... 한국에서 번역본으로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정치학과 학부생이라는 그 점원이 또 묻는다. 한국에서 알튀세가 많이 읽히나요? 90년대 이후 한국 운동권들에게 알튀세라는 이름이 안겨주는 그 복잡미묘한 끈적함을 이 사람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냥 sure라고 짧게 대답하고 나니, 문득 10여년 전 TS라는 명목하에 녹두거리 골방에 갇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아리송한 말들을 억지로 주워삼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뉴욕에 온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떠올린 한국 풍경이 담배 연기 자욱한 더러운 자취방에서 알튀세를 읽던 기억이라니... 스스로에 대한 어이없음과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기억에 자꾸 웃음이 나온다.

 

5.

몇몇 분들이 메일로 물어온 <푸코 이펙트: 통치성 연구> 번역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질 것 같다.(그래도 이 오래된 책이 이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내가 맡은 부분은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럭저럭 마무리한 셈이지만 (아직 <말과 사물>을 다시 보면서 역주를 달아야하는 작업은 남아있다), 다른 역자분들과 한국에 남아 작업하시는 분들이 다들 바쁘신 분들인지라 작업이 예정보다 길어지고 있다. 거기에다 편집자인 Colin Gordon 선생이 써주기로 한 한국어판 후기는 이미 60페이지 가까이 되었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후기 번역까지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책 자체는 내년은 돼야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있게 좀만 기다리라고 말씀드린 분들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푸코 이펙트>를 끝으로 당분간 번역 작업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정말 널리 읽혔으면 하는 글이 나타나고 혹시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주변의 타고난 번역가 분들과 비교하면 난 아무래도 번역 작업에서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더 느끼는 타입인 듯 하다. 예상했던 바긴 하지만,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의욕만 앞세워 번역서랍시고 책들을 낸 것도 시간이 갈수록 더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지난 세 번의 번역 작업을 통해 이론적 자원(<푸코의 맑스>), 자유주의와 탈정치화라는 이론적-정세적 지형(<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 통치성 분석이라는 방법론(<푸코 이펙트: 통치성 연구>)을 다룬 셈이 됐다. 한 편의 논문에서, 학문 지형과 이론적 자원, 방법론을 밝히면 보통 서론이 완성됐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얼마가 걸릴진 모르지만 그럭저럭 읽을만한 본론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주 잠깐만 더 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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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10/08/12 09:29 2010/08/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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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덧붙임

앞의 글에 달린 게슴츠레님의 댓글에 답하려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따로 글로 남깁니다. 다시 읽어보니 앞의 글이 너무 압축적이어서(제 나쁜 버릇 중 하나입니다;;), 조금은 더 자세히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먼저 기우이긴 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밝히자면 저는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의견을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애도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특정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비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본질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노무현을 애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개개인에 따라 다층적일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 개인의 상태에 따라 노무현이라는 대상과는 별개로 죽음 자체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이억만리 떨어진 생면부지 인간의 죽음도 무언지 모를 나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를 지지했건 그렇지 않던 간에 매일 뉴스 화면을 통해 보고 수없이 입에 올렸던 인물의 죽음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아마 자신조차도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러한 감정을 둘러싸고, 노무현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논의를 벌이는 건 무언가 초점이 엇나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오히려 제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양한 (비-)애도의 "형식"과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건, 게슴츠레님 말처럼, 노무현의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누군가가 그의 죽음 앞에서 드는 애도의 감정을 "일관성있게" 설명하려 들 때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담론의 형식이군요. 정작 분석이 필요한 대상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라는 말이 맞다면, 이러한 담론의 형식은 분명 그 주체가 가진 인식의 한 측면, 더 나아가 그 속에 투영된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겠죠. 

 

지금까지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애도의 감정을 표하기 위해 사용하는 담론은, 크게 보아 두가지 형태인 것 같습니다. (1)집권자로서의 노무현과 구분되는 "원형"의 노무현을 거슬러올라가 "발굴"하여, 후자를 애도하기. (2)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구분하고 역시나 후자를 애도하기. 

 

제가 "정치적 도덕주의" 혹은 "고유한 속물적 입장"이라는 말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두 형태 모두에서 나타나는 어떤 "분리" 자체가 탈역사화와 탈정치화의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담론에서는, 집권자 노무현이 바로 그 이미지를 활용해 집권했으며, 집권 기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은폐됩니다. 따라서 87년 이후 민주화 세력과 그 담론이 걸어온 역사적 경로는, 그저 "개인" 노무현의 변화 혹은 한계로 "개인화"될 수밖에 없죠. 두 번째 경우는 앞선 글에서 밝혔지만, 진정성과 인간성의 위치를 정치와 역사 외부에 둠으로써 좀 더 노골적으로 노무현을 텅 빈 형식적 가치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따라서 누군가가 만약 일관되고 진정한 노무현 지지자라면, "바보 노무현" 같은 애도 담론에 대해서 오히려 분노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애도사에는 노무현이 정치인이자 집권자로 추구했던 가치는 은밀히 부정되고, "사람좋음" 혹은 "열정"이라는 텅 빈 형식적 가치만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노무현이 형상화하는 가치가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텅 빈 것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게슴츠레님의 말에 냉소주의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로서는 그 동안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 비판했던 "좌파"인사들이 이러한 탈역사적-정치적 담론을 통해 그를 공식적으로 애도할 때, 그래서 이 죽음에서 최소한의 "사람좋음"과 "민주화의 열정"정도는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때, 이 담론이 바로 전형적인 냉소주의 담론이고 이들이 바로 냉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확한 판본은, 이렇게 되겠죠. "나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그걸 알고 있을까?)" 여기서 대중은 "믿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속고 있는 것은 주체 자신일 뿐이죠. 지젝이 슬로터다이크로부터 차용한 "알면서 속는자"라는 냉소주의자의 정의에 이보다 잘 들어맞는 예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게슴츠레님이 언급하신 두려움-정치와 무관한 관조적 분석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냉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그 지젝은,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성급한 행동의 촉구가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이는 전혀 모순되는 입장이 아닙니다. 지젝의 틀에서 냉소주의는 "실천"과 대립적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 냉소주의와 대립적 위치를 가지는 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분석"이죠.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분석은 또한 "행위(act)"와 대립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건,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분석일 것이고, 그에 기반한 우리의 (비-)애도의 방식을 둘러싼 논의일 것입니다. 진보네 블로그들에서만도 훌륭한 (비-)애도의 방식을 몇 군데서 본 것 같은데, 밤이 깊어 가니, 그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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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1:33 2009/05/29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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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교수신문>에 실린 아즈마 히로키의 인터뷰를 며칠 전에야 발견하곤, 예전 기억을 떠올려 1년 전 쯤 썼던 글 하나를 링크해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약간은 두서없이 정리해본다. 요즘 여러가지 일로 폭주 중이라 긴 포스팅을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한 해가 거의 절반 가까이 넘어가고 있는데, 올해들어 세 번째 포스팅이니 이건 블로그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지만, 조만간 여유가 좀 생기면 EM님처럼 블로그를 한 번 손 봤으면 싶다. 특히 이 어중간한 폰트부터...

 

링크를 거는 글은 재작년에 창간호 0호(혹시 누런 표지와 빽빽한 편집의 이상한(?) 책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를 낸 ACT 1호에 보낸 글인데, 현재 ACT는 재정난 등의 이유로 웹진으로 방향을 바꾼 상태이다.(올해부턴 1년에 한 번 정도 웹진에 실린 글들을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웹진 홈페이지 오픈은 올해 초에 이뤄졌음에도, 아직 이래저래 정돈이 안된 듯한 느낌 때문인지 방문자수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갤러리에서 내는 문화예술비평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전적인(?) 웹디자인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만간 새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들었는데, 오프라인으로 발간될 글들을 모아놓는 半-아카이브 형태의 잡지가 될지, 예전 컬티즌 같은 짧은 평론 위주의 웹진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다른 건 몰라도, 범죄소설의 팬으로서 조영일씨의 탐정론은 계속 연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http://www.a-act.net/act/act.html

 

위 링크의 목차 중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이 작년에 기고한 글이다. 당시에는 오프라인 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 분량이 많아 온라인 상에서는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다.(PDF 파일을 요청하신 분이 있기에 혹시 다른 분들도 관심이 있을까 싶어, 초고의 PDF 파일도 같이 올려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첨부파일을 올리는 방법을 시험하다, 그냥 예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 해 링크 걸어 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파일 올리는 방법을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

 

사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이 블로그의 예전 글들에서 한 번 정도 언급되었던 내용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와 동물-속물적 주체성]  [책 두 권] , [코제브의 동물/속물론] 의 확장증보판인 셈이다. 

 

글을 쓸 당시에는 미처 참고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두 권의 책,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김항 역, 새물결, 2006)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Princeton Univ Press, 2001)도 이번 기회에 짧게 정리해놓는다.(최근 포스트 히스토리라는 조건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김항씨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 정리할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먼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 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역사의 종결 이후에 "정치"라는 것이 사유되는 방식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에서 Brown이 던지는 질문은, 기존의 정치적 행위들을 지탱해주던 기반으로서의 공통의 큰 이야기가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는 어떤 것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역사의 종결 이후 "최후의 인간"들의 도덕에 대한 집착을 조롱한 니체를 따라, Brown은 포스트 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의 형태를 역사와 적대에 대한 분석을, 개인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도덕주의(moralism)"의 범람으로 진단한다. 

 

Brown에 따르면, 이 정치적 도덕주의는 총체적인 역사적 내러티브가 붕괴했으나, 여전히 새로운 대안적 담론들을 찾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정치적 도덕주의에서 정치에 대한 상상은, 역사적-총체적인 현실 분석을 상실한 채 개인의 선택과 그가 행한 도덕적 실천의 결과로 협소화된다. 즉, 정치적 행위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실천으로 이해되며,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탈정치화-역사화되어 선한 개인의 행위와 악한 개인 행위 간의 대립으로 평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상상틀의 변화 속에서, 정치는 공통의 이야기 속에서 현존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연대의 기획이라기 보다는, 현존하는 차이들 간의 본질화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임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Brown이 정치적 도덕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녀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치적 공정함과 증오 발화를 둘러싼 정치적 담론들이지만, 조금 비약해 말하자면, 오늘날 정치에 대한 담론들 전반이 이러한 도덕주의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크게는 제국주의적 전쟁의 문제를 개인의 전쟁 선호증으로 돌리는 담론에서부터, 작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착한 소비"와 "착한 기업" 같은 담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담론들의 핵심적 특징은 그 분석에서 문제가 발생한 역사적-총체적 분석을 삭제한다는데 있다. 대신 이 분석의 공백을 메꾸는 것은, 어떤 선한 혹은 악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며, 결국 이러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행위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협소화된다. 

 

Wendy Brown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도덕주의의 궁극적 효과 중 하나는, 주체를 정치적 책임과는 무관한 "순수한" 주체로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치는 나의 존재 형식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선택에 한정된 것이기에, 개인은 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는 것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Brown이 보기에, 오늘날 정치적 도덕주의에 공모하는 주체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본적인 자화상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국가)를 비난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내가 아닌 부모이기에, 이 주체들은 이러한 제한된 상상의 틀을 넘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거나 직접 부모가 되는 어려운 책임을 방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국가를 (원래 공정해야 할) 부모로 "구성하고", 자신들의 역능을 투정부리는 아이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나 자신이 부모가 되기 위한 조직의 구성이나 이에 대한 고민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순수한 목적을 가진 존재들이고, 따라서 남은 문제는 우리의 부모가 이러한 순수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Brown의 말처럼, 바로 이러한 "순수한" 도덕적 정치주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책임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는 될 수도 없고, 되기로 싫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통해 정치의 실천을 재전유하려는 어떤 부인의 매커니즘이다.(그리고 아즈마 히로키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러한 부인의 매커니즘이야말로 "속물적 주체성"의 기본적인 존재 형식이다.)     

 

Wendy Brown의 책이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속물의 정치"의 최신 판본을 그려내고 있다면,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은 김항 씨가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어떻게 새로운 초월성과 그것에 기반한 새로운 "인간의 정치"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도, 진리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이에 대한 극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는, 즉  "끝까지 가지 않는" 전후 일본 사회에 분노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신화"와 초월성을 복원하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미묘하게 정반대를 향해 있다. 

 

즉,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 사회에서 현존해온 초월성의 형태인 천황을 복구하여 굳건히하는 것을 꾀한다면, 전공투는 현질서의 "부정"을 통한 무(無)의 초월성을 구성하기를 꿈꾼다. 어색한 운동권 어투가 난무하는:-) 이들 사이의 격한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점들, 즉 게임과 유희의 차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강조와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에 대항 강조의 차이, 현존하는 관계의 존중과 이 관계에 대한 거부 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초월성의 구성 방식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 둘러싸고 순환하는 쟁점들이다.

 

김홍중의 표현을 빌려와, 미시마 유키오가 과거로부터 발견된 초월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속물의 정치"를 꿈꾼다면, 전공투는 자기-부정의 폭력 자체를 새로운 신화로 구성하려는 "구원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미시마 유키오가 전공투에게 연대투쟁을 제안하며, "그래서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을 때, 그는 전공투와 자신의 논쟁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카롭지만, 두 입장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뭉개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뭉스럽다. 이 절대적 부정성의 추구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리 없으리라. 

 

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간의 입장차는,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동요하며 오가는 양 극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이 두 입장차는 우파 슈미트와 좌파 벤야민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상반된 입장차가 한 인물의 삶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뒤섞인 예는, 아마도 혁명적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의 대표적 이론가인 동시에 파시즘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리고 슈미트와 벤야민 모두가 참고하고 있는) 조르쥬 소렐(Georges Sorel)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정치 공간 속에서, 폭력과 총파업을 통한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신화 구성을 주장했던 소렐은, 이후 "위대한 프랑스 골(gaul)족의 신화"에 기반한 민족 통일성의 구축을 강조하는 열렬한, (그에게 좌우파란 전통적인 잣대의 적용이 가능하다면) 우파 민족주의자로 입장을 바꾼다.

 

충분히 이해가능하지만, 소렐 자신은 변절자라는 주위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의 일관성을 변호했다고 한다. 아마도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구성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소렐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새로운 초월성의 구성에 있어 존재하는 두 벡터의 차이, 즉 과거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 "속물의 정치"의 벡터와 새로운 "구원의 정치"의 벡터 간의 차이였으리라.  그리고, 따라서 오늘날 포스트-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사고 역시, 바로 이 구분의 정교화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따로 글을 쓰려다가.. 그냥 덧붙임.

 

도덕주의와 신화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한국 정치에서의 탈역사적 도덕주의의 형태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쏟아진 수많은 애도의 말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애도의 형태는,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 만은 존경한다"는 입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애도사에서 표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성과 인간성이라는 가치에 여전히 목말라 있다는 단순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애도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고인의 진정성을 기리는 이 평범한 애도사의 레토릭이, 역설적이게도 고전적인 "진정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에게 "진정성" 혹은 "인간성"의 자리는, 정치적 입장을 뺀 나머지 "인간" 쪽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성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수영이 자신의 속물성을 탓하며, "진정성"의 가치를 통해 정치적 주체 혹은 예술적 주체로서의 김수영과 생활인 김수영 간의 불가피한 간극을 메우려 할 때, 부정되어야 할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김수영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김수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적인 죽음을 앞에 두고, 정치적 주체와 분리된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을 말하는 것은, 그것의 정당성을 떠나서, 인간성과 진정성에 대한 어떤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애도사에서 말하는 "인간성"과 "진정성"이란, 아마도 정치적 내용이나 역사성과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혹은 이해되어야만 하는) 어떤 형식적 가치일 것이다. 고인의 인간성과 진정성을 기리기 위해 부정되어야 할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노무현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추구했던 정치적-역사적 주체로서의 노무현이고, 진정성과 인간성의 자리는 이제 정치와 역사 "외부"의 자리로 전치된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형식적 가치가 되어버린 인간성과 진정성은, 그 정치-윤리적 의미가 탈색되어 "청렴성", "사람좋음", "열정" 등으로 치환가능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이러한 전치와 형식화를 통해서만, 그는 가장 "인간다운" 혹은 "진정성을 가진" 대통령으로 추모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자살로 "진정성과 인간성의 신화"가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 진정성과 인간성 자체가 아무런 역사적 내용없는 텅 빈 형식적 가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텅 빈 형식의 제시는, 노무현이라는 아이콘과 이 아이콘이 상징하는 "민주화"라는 텅 빈 내러티브(그래서 모든 적대와 투쟁들이 수렴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기능해온 역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담론은 민주화의 시간을 지속시킴으로써 역사의 종결을 지연시키는 "커다란 비이야기"로 기능해왔고,  이 담론이 작동하는 한에서만, 소위 민주화 세대는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다시 역사의 인간이 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믿음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 "텅 빈 것이라도 어떤 형식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고유한 "속물적" 주체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죽음으로 강화된 텅 빈 노무현의 신화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 죽음이 끊어질 뻔 했던 텅 빈 형식과 가치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영양제가 될 지, EM님의 말처럼 지난시기 퇴화된 꼬리뼈처럼 번거롭게 남아있던 텅 빈 가치를 "애도"로써 청산하는 기제가 될지는,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비)애도하는 방식을 둘러싼 다층적인 투쟁과 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면, 두 경우 모두 새로운 역사와 고유한 "인간"의 정치를 꿈꾸는 "우리"(혹은 "누군가")에게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것 같다는 명확한 사실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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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09/05/28 00:30 2009/05/2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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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론과 장기하라는 아이콘

 

1.

"88만원 세대"론 이후, 세대론이 다시 붐이긴 붐인가 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세대론이 언제 붐이 아니었던 때가 있어나 싶기도 하다.) 오늘자 중앙Sunday에서 80년대생 0x학번으로 현재 20대인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세대론을 야심차게 내놨다. 이른바 "C세대론"이다.

 

한국 정치사회학회와 합동으로 구성된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이들 C세대는 청소년 시기와 청년 시기에 두 번의 경제 위기(Crisis)를 겪으면서, 격심한 경쟁(Competition)을 체화하고 있으며, 소비자(Customer)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세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종종 느끼지만, 세대론자들의 네이밍 솜씨는 뭐랄까.. 참으로 "애썼다" 싶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기사를 쭉 훑어보면서, 네이밍 과정에서 사회학자와 기자들이 "C세대론"을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 줄만한 중요한 키워드 몇 개를 빼먹었구나 싶었다. 바로 Commodity와 Commercial 그리고 C가 무려 두개나 붙은 Consumer Citizenship. 개인적으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세대의 구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굳이 오늘날의 (상층부) 20대를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계발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상품(commodity)로 구성하는데 익숙하고, 자기표현 및 자기PR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판매(commercial)에도 익숙하며, 정치와 경제의 단락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consumer citizenship)을 체화하고 있는 이들.

 

 

2.

그런데 중앙Sunday가 C세대 감성의 대변자로 꼽은 이는, 조금 놀랍게도 "장기하"다.( X세대의 아이콘이 한국에서는 서태지, 미국에서는 제임스 딘이었듯이, 세대론과 아이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아마도 아이콘없는 세대론은 "88만원 세대론"이 거의 유일할텐데, 이건 88만원 세대 규정이 가진 비판적 성격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그래도 최근의 일명 "장기하 신드롬"이라 할 만한 현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많이 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하는 한 학번 차이의 과후배다.) 사실 음악 자체를 그다지 즐겨듣지 않는 나로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성을 평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그 음악적 새로움과 지금의 인기 간의 관계는 내 능력과 관심 밖의 문제다. 오히려 내게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음악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인기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적 의미층들, 혹은 장기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의미이다. 중앙 Sunday의 선정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이 아이콘의 순환에는 확실히 최근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함께 등장하는 두 가지 의미소, 즉 그 노래가 반영한다는 "루저 감성"과, 장기하 본인의 배경인 "서울대 출신"이라는 과잉 제공된 정보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 루저와 명문대생이라는 이 모순적인 기표의 결합을 통해, "장기하"라는 아이콘은 지금 20대 상층부들의 모순된 욕망을 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욕망 말이다. 사회 전반에 강화되는 경쟁의 논리 속에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거나 경쟁에 목매달지 않겠다는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하는 행위는, 경쟁의 압박을 잠시 완화시켜주며 심지어 "쿨"하다는 평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루저가 되어 경쟁의 장 자체에 참여도 하지 못해서는 "찌질하다."(혹은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실제 루저가 아닌 한에서만, 루저의 감성을 소비할 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벌이는 코믹 퍼포먼스는, 혹은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제공되는 명문대 출신이라는 (음악과는 하등 상관없는) 과잉 정보는, 우리가 안전하고 무난하게 이 루저의 감수성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이것이 장기하 이전 또 하나의 루저 아이콘이었던 "달빛요정"과 장기하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달빛요정에게서는 루저에 따라붙는 어떤 찌질함과 "사시미가 되고 싶다"는 비루한 욕망의 적나라한 표출이 있었지만, 장기하에게는 그 대신 "별일 없이 산다"는 당당한 선언이 있다. 물론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인기를 이러한 요소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겠지만, 그 신드롬이 보여주는 다층적 의미들 한 켠에서, 이러한 은밀한 욕망의 반영을 읽어내는 것이 무리한 분석은 아닌 것 같다. 

 

 

3.

그런데 흥미롭게도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반영된 이러한 모순된 욕망은, 사실상 오늘날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의 상품 논리와 동형적인 것이다. 아니,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한 신세대들이, 자신의 취향의 구성에 있어서까지 상품 논리를 완벽히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끊임없이 작은 차이의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에서, 조악한 키치는 하나의 쿨하고 독특한 상품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조악해서는 안된다. 혹은 촌스러운 복고를 재현하는 것은 패션이지만, "실제로" 취향이 촌스러워서는 곤란하다. 같은 논리 하에서, 다시 말하지만, 루저의 감성이나 취향을 가지는 것은 쿨하지만, "실제로" 루저여서는 찌질하다....

 

이와 같이 주체의 (루저) 취향이 상품 논리를 따라 구성되는 한, 여타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취향은 누군가에게 전시되어야만 한다. (혹은 이러한 취향은 언제나 잠재적 소비자 혹은 감상자를 전제로 한 채 구성된다.) 오직 이 전시의 몸짓 만이 그 취향을 "실제의" 조악함, 촌스러움, 루저와 구별시켜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곡은, 앨범 전체의 타이틀이기도 한 "별일 없이 산다"이다. 물론 앞서도 밝혔듯이, 이 흥미는 음악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별일 없이 산다"가 독백이나 성찰의 형태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선언과 도발의 형태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별일 없이 그리고 별다른 걱정이나 고민 없이" 사는 것은, 누군가의 "불쾌"(혹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시되거나 선언되어야할 어떤 것이다. 사실 이 선언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그저 도발과 전시의 몸짓만 존재하기에, 이 노래의 가사는 하나의 역설인데,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이나 별일 없이 하루하루 즐겁지만, 아무튼 내가 도발할 누군가의 "시선"에는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루저의 취향을 안전하게 소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언과 그로인해 야기되는 타자의 "불쾌함"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인데, 앞서 말했듯이 바로 이러한 공개적 선언과 타자의 질투만이 "실제" 루저와 그저 루저의 취향만을 소비할 뿐인 나를 구분시켜주는 지점이기 때문이다.(나르시스트가 가장 자아가 빈곤한 자이며, 도착증자가 가장 상징적 부권을 갈구하는 주체라는 정신분석의 역설은 이런 식으로도 확인된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루저 취향의 "선언"은, 아마도 자신의 내면을 쇼윈도의 전시물처럼 투명하게 전시하는데 익숙한 오늘날 후기자본주의 주체성들의 감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이 새로운 주체성들은 자신을 일종의 "스펙" 리스트로 환원하여 상품(commodity)화하는데 익숙하고, 과거의 불투명한 영역이었던 자신의 내면과 취향 혹은 심지어 진정성까지도 투명하게 전시하고 광고(commercial)하는데 친숙하다.(혹은 이러한 내면과 취향 혹은 진정성은 이러한 전시와 광고를 전제로 구성된다.) 시청률과 이미지 재고를 위해 고민과 진정성을 투명하게 전시해내는 스타 고민 상담 프로그램처럼, 주체의 내면은 이제 블로그와 싸이월드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투명하게 전시되고 고백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백되어야하는 "나"의 이러한 내면에 담긴 어떤 고민과 회환은, 초월과 자기-부정의 원동력이라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투명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타자와의 작은 차이의 게임을 보장하는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예컨대 전시되(어야만 하)는 나의 루저로서의 자괴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나와 너의 차이를 확인하는 작은 지표일 뿐이다.(그러니 "고민없음이 자랑이냐"는 질문은 내게 하지 말기를...) 

 

 

4.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러한 "상품-인간"의 논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그리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의 형태들을 과연 "어떤 논리"로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볼프강 하우그는 <상품 미학 비판>에서 일찌감치 인간의 주체성까지 일종의 상품 논리를 따라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파했지만, 사실 이에 대한 비판 논리는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별다르게 발전한 것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가장 진부한 비판은,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의 틀을 조야하게 차용한 비판들,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고, 사용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입장일 것이다. 즉, 우리는 단순히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상호부조하는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 혹은 (최근에 가장 강력하게 부흥하고 있는 방식으로)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정치적"인간 같은 측면들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용가치는 "이미" 교환가치 속에 완전히 포섭되었으며, 교환가치의 알리바이로 생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기 드보르의 주장이 "상품-인간"에게도 적용된다면 어떨까? 즉, 이제 상품 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정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상을 상상하는 것은 순진한 사고라면 어떨까? 지난 해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소비자-시민들(consumer-citizen)에게 쏟아진 진보진영의 각종 찬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새로운 형상에서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혹시 이 소비자-시민 쌍의 전면화는, 이제 정치마저 소비자와 상품의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사고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갓 들어선 정부에 대한 이들의 분노를 "잘못 구매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에 유비한 누군가의 분석은, 당연히 일면적이고 편파적이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비자-정치는 하나의 정치 형태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들 주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외부가 아니라 소위 "C세대"의 감각에 걸맞는 그들 정체성의 일부인 것은 아닐까?

 

논의가 지나치게 커졌기에, 다시 애초의 출발지점이었던 "C세대"와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앞서의 논의에서 간과했던 것 중 하나는, 이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둘러싼 모순된 욕망, 즉 "루저의 스타일은 소비하고 싶지만, 루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욕망 속에서, 지우려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어떤 근원적인 공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공포란 혹시라도 내가 언제가 경쟁 구도에서 실제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즉 실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혹은 역으로 이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 새로운 주체성들은 루저 감수성을 소비하고 루저의 취향을 전시함으로써 자신이 루저가 아님을 재확인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는 오늘날의 새로운 주체성들에게, 이 탈락의 공포는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바우만의 말처럼, "상품-인간"은 결국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쓰레기-인간"의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상품-인간"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논리는, 어설픈 사용가치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 "공포"와 직면하고 이것을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너무 안전하고 댄디한 루저 아이콘인 "장기하"가 은폐하는 형태로만 반영하고 있는 그 공포,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부인하고 싶은 그 공포에서부터 말이다...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사회학과 문화부의 쾌거로세~ 장하다 이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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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09/03/16 02:10 2009/03/16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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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혹은...

 

 

 

"너는 괴롭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걸세"

 

 

 

언제였던가.. 일기장에 꾹꾹 옮겨적은 열사의 말이 또 한 번 아린 밤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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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09/01/21 03:12 2009/01/21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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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제안

 

갑작스레 공지글을 하나 남깁니다.

 

아는 선배 한 분과 함께, "(유럽)현대정치철학"을 주제로 평소 보고 싶었던 책들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관심있는 분이 있으면 함께 할까해서 글 남깁니다. 모임은 격주로 진행될 예정이고, 격주에 한 권 정도의 속도로,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읽어나갈 계획입니다.

 

읽을 책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정치철학** 

 

 

Claude Lefort
1) ________,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 의암, 1992
     ________, The Political Forms of Modern Society, Polity, 1986 3부
2)  ________, Democracy and Political Theory, Polity Press, 1988 1부, 2부
3) ________, Complications: Communism and the Dilemmas of Democracy, Columbia Univ Press, 2007

 

 

참고
* _________,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김재한 외, <한국정치외교의 이념과 논제>, 소화, 1995
* Oliver Marchart, 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 Political Difference in Nancy, Lefort, Badiou and Laclau, Edinburg Univ. Press, 2007
* Bernard Flynn, The Philosophy of Claude Lefort: Interpreting the Political, North Western Univ Press, 2006

 

 

Carl Schmitt
4) ______, 김효전 역, <정치적인 것의 개념>, 법문사, 1992
5) ______, 김효전 역, <파르티잔: 그 존재와 의미>, 문학과 지성사, 1998
6) ______, 김효전 역, <정치신학 外>, 법문사, 1988
7) Chantal Mouffe(ed.), The Challenge of Carl Schmitt, Verso, 1999

 

참고
* Carl Schmitt, 김효전 역,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 관악사, 2007
* Louiza Odysseos, The International Political Thought of Carl Schmitt: Terror, Liberal War and the Crisis of Global Order, Routledge, 2008

 


Ernesto Laclau and/or Chantal Mouffe
8) Laclau&Mouffe, 김성기 외 역,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터, 1990
9) Ernesto Laclau, Emancipation(s), Verso, 2005
10) Chantal Mouffe, 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 후마니타스, 2007

 

참고
* Chantal Mouffe, 이행 역, <민주주의의 역설>, 인간사랑, 2006
* Ernesto Laclau et al., 이경숙, 전효관 (역), <포스트 맑스주의?>, 민맥, 1992, 2부
* Anna Smith, Laclau and Mouffe: the Radical Democratic Imaginary, Routledge, 1998

 


Intermezzo
11) Jacques-Alain Miller, "Suture: Elements of the Logic of the Signifier", Screen 18, 1978
       __________________, "Matrix", Lacanian Ink 12, 1997
12) Lacoue-Labarthe&Nancy, The title of the letter : a reading of Lacan, SUNY Press, 1992

 

참고
* Yannis Stravrakakis, 이병주 역, <라캉과 정치>, 은행나무, 2006

 


Slavoj Žižek
13) _________, 이성민 역,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 b, 2005
14) Žižek&Laclau&Butler,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Verso, 2000

 

참고
* Slavoj Žižek, 이서원 역, <혁명이 다가온다>, 도서출판 길, 2006
* Ian Parker, 이성민 역, <지젝>, 도서출판b, 2008, 4장, 5장

 


Jacques Rancière
15) _______, On the Shores of Politics, Verso, 2007
16) _______,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Minnesota Univ Press, 1998
17) _______,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참고
* Nick Hewlett, Badiou, Balibar, Rancière : rethinking emancipation, Continuum, 2007
* Todd May, The Political Thought of Jacques Ranciere, Edinburg Univ Press, 2008

 

 

Alain Badiou
18) _______, Metapoitics, Verso, 2006
19) _______, Theoretical Writings, Continuum, 2003 2부
20) _______, Polemics, Verso, 2007 부분
       _______, "The Question of Democracy", Lacanian Ink 28, 2006
       _______, "Democratic Materialism and the Materialistic Dialectic", Radical Philosophy 130, 2005

 

참고
* _______, 이종영 역, <윤리학>, 동문선, 2001
* _______, 현성환 역,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 _______, 이종영 역, <조건들>, 새물결, 2006 4장
* _______, “Ours is not a terrible situation - Alain Badiou and Simon Critchley", 대담 영문 녹취, 2006

 


Giorgio Agamben
21) _______, Means Without Ends, Minnesota Univ Press, 2000
22) _______, State of Exception, Chicago Univ Press, 2005
23) _______, The Comming Community, Minnesota Univ Press, 1993

 

참고
* Matthew Calarco(ed.), Giorgio Agamben, Sovereignty and Life, Stanford Univ Press, 2007
* Norris, Andrew, Politics, metaphysics, and death :essays on Giorgio Agamben's Homo sacer, Duke Univ. Press, 2005

 


Lacoue-Labarthe and/or Nancy
24) Philippe Lacoue-Labarthe, Heidegger, art, and politics: the fiction of the political, Blackwell, 1990
25) Lacoue-Labarthe&Nancy, Retreating the political, Routledge, 1997

 

참고
* Nancy, Jean-Luc,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 _________________, The Inoperative community, Minnesota Univ. Press, 1991
* _________________, 박준상 역,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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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붙은 책들이 차례대로 같이 볼 책들이고, *가 된 책들은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부분적으로 참고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소화할 책들입니다. 모임 중간중간에 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알튀세르, 발리바르나 데리다의 짧은 글 몇 개를 추가할 계획도 가지고 있구요.

 

책들이 밀도가 높긴 하지만, 다행히 대부분 그리 두꺼운 책들이 아니어서 속도를 조절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서모임인 만큼 자세한 발제는 지양하고, 짧은(!) 주관적 요약과 토론 위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번 모임은 말그대로 유럽 현대정치철학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유명 저자들의 1차 저작들 중심으로 파악하는 수준의 독서 모임이니, 열심히 책을 보시려는 열정만 있다면 큰 부담은 가지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차후에 하이데거나 바따이유, 라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미나나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운동 논쟁들을 새로운 시각틀로 재조명해보는 세미나를 연계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아직은 생각일 뿐이구요. 

 

모임 시간은 격주 토요일 오후 3시, 장소는 아마도 서울대(혹은 그 주변)가 될 것 같습니다.(장소는 함께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경우 조정가능합니다만, 요일은 참가자들의 사정상 조정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시간은 한 두 시간 정도 조정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는 11월 1일(토) 첫 모임을 가지고, 11월 15일(토)부터 세미나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chasm99@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성격상 따뜻한 환대에는 능하지 못하지만, 절대 박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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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08/10/16 01:06 2008/10/16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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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ek for Obama?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 들르는 미국쪽 인사들 블로그에는 요즘 대선 논쟁이 한창이다. 공화당-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박빙인데다가, 최근 미국 경제의 붕괴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하면서, 미국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 대선에 대한 관심이 4년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물론 여기에는 오바마라는 대항마가 가진 개인적인 매력과 배경이 한 요인을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4년 전에는 부시-케리 모두에 반대하던 이들이 이번 대선에서는 오바마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부쩍 눈에 자주 띤다.(한참 앞서 나간 걱정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도 다음 대선 때 '비판적 지지'의 악령이 슬그머니 되살아나지 않을까란 걱정마저 든다.)  

 

아무튼 최근 이쪽 블로그들에서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젝의 오바마 지지 비스무레한 선언이다. 9월 초 그러니까 페일린 효과가 본격화되기 전 지젝이 "In These Times"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인데, 지젝은 이 글 이후에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설왕설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자체로도 재밌는 글이어서 약속이 펑크난 할일없는 주말 오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옮겨놓는다.

 

 

 

 

담대한 레토릭(The Audacity of Rhetoric)

 

 

translated by 캐즘

 

지난 1월, 미국 전체가 마틴 루터킹 목사의 비극적 죽음을 추도하고 있을 때, 도시사학자 헨리 루이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냉소한 바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여기서 테일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63년 워싱턴에서의 행진 이후(이 행진에서 킹의 그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가 행해진다-역주)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망각, 즉 그가  “우리나라의 도덕적 지도자”라고 추앙받은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한 기억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암살당하기 몇 년 전부터, 킹은 빈곤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종적 화합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평등의 실현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당연히 그는 점점 더 공식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갔다. 

 

바락 오바마의 위험은, 그가 킹의 죽음 이후 킹에게 행해졌던 역사적 검열 작업을 이미 스스로 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그는 표심을 얻기 위해 논쟁이 될 만한 주장들을 스스로 삭제하고 있다. 

 

예수 탄생기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몬티 파일론의 코믹 영화 <브라이언의 삶(The Life of Brian)>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가 나온다.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혁명적 저항 집단의 리더는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안겨준건 오직 비참함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부하 하나가 로마인들이 교육을 도입하고,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 시설도 확충해주지 않았냐고 반박하자, 이 리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맞아. 하지만 위생과 교육, 포도주와 공공질서, 관개 시설과 도로 그리고 상수도 시설과 보건 제도 외에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오바마의 최근 주장들은 이와 동일한 것 아닌가? “나는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한다”, 즉 “좋아,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을 약속하고, 쿠바에 대한 보이콧을 지속할 것이며, 법을 위반한 통신업체를 눈감아줄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해!”

 

오바마가 “담대한 희망”과 “변화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는 구체적인 내용없이 변화의 레토릭만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희망이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가 위선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미국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경제적 붕괴나 정치적 반발 없이 실제적인 변화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러한 비관적인 관점 또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지구화된 상황을 그저 단단한 현실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이데올로기 틀에 의해 정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상황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분할에 기반해 있다.

 

십 여년 전에, 이스라엘 신문 "Ha'aretz"가 당시 이스라엘 노동당수 에우드 바락에게 “당신이 팔레스타인에 태어났으면 무엇을 했겠냐?”고 물은 바 있다. 이에 바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입했을 겁니다.”

 

이 말은 테러리즘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다만 이는 팔레스타인과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공간을 여는 행위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고르바초프가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의도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바로 말 자체가 널리퍼져 세상을 바꾸는 사태를 가져왔다.

 

또 다른 예. 오늘날 고문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것을 대중적 논쟁의 대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것은 누렘베르그 전범재판이나 제네바 협정에 비하면, 엄청난 퇴보이다.

 

말은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골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오바마는 이미 우리가 공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말의 경계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그가 이룬 위대한 성취는, 지금까지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을 공공의 논의 주제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즉, 정치에서 인종이 가지는 여전한 중요성과 공적 삶에서의 무신론의 긍정적 역할 그리고 이란과 같은 “적”과 대화할 필요성같은 주제들 말이다.

 

이것은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이다. 처음에는 오바마의 이러한 제안을 비판했던 부시 행정부조차, 이제 이란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가 현재의 정체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말들이 필요하다.

 

관습적 지혜가 보통 그렇다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오래된 속담인 “말만하지 말고, 행동을 해!”는 가장 멍청한 충고임에 틀림없다.

 

최근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한다. 외국의 문제에 개입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잠시 물러서서, 똑바로 생각하고 말할 때이다. <끝>

 

 

 

 

 

이 글을 둘러싼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지젝의 이 글을 오바마에 대한 지지(비스무레한 것)으로 읽어도 되겠냐는 것. 이는 사실 좀 미묘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젝 글의 초점이 오바마 지지 선언에 맞춰져 있지 않을 뿐더러, 큰 그림 속에서 특정한 인물의 의의를 평가하는 것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지젝은 이미 4년 전에 부시의 재집권이 가져올 "효과"에 주목하면서 그의 집권에 대한 환영 비스무레한 글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손호철 교수가 한나라당 지지자가 아닌 것처럼, 지젝 역시 부시 지지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이 오바마와 그가 전개한 담론 투쟁에 대해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라고 평가한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록 형식과 말, 외양의 중요성에 강조는 그의 글 속에서 여러번 반복된 테마이지만, 오바마의 담론이 좌표를 바꾸는 효과를 낳았다는 놀라운 평가는, "담론 분석"을 넘어서 "행위(act)"의 강조로 나아간 그의 지난 행보에 비추어 하나의 일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젝의 정치학의 틀내에서 이러한 지젝의 일탈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동안 지젝은 암묵적 혹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전략이 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 헤게모니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왔고, 그런 점에서 오바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최근 들어 이러한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그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지젝이 종종 보여주는 이러한 "뜬금없는 논평"들이, 어떤 특정한 정치 세력 혹은 입장과도 동일시하지 않는 그의 정치적 사유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전에 <300>에 대한 그의 비평을 소개하면서 던졌던 질문이지만, 지젝은 과연 현실 정치(혹은 도래할 미래의 정치) 속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이러한 동일시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래야만 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 갖춰진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란 오히려 보수적인 것이리라.) 다만 나로서는 이러한 동일시가 정치를 스펙타클한 게임의 장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와 정세("분석"이 아닌) "구성"의 문제의식을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강제적으로 삽입하는 일종의 전제 조건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 채, 현실의 정치적 입장들 "사이" 속으로 빠져나가는(elusive) 존재로 스스로 위치지을 때, 지젝은 그 입장의 급진성과는 별도로, 이 시대 스펙타클화된 정치가 생산해낸 수다한 정치 평론가 중 한명이 되어 버리는 자기-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물론 그는 여타의 사이비 정치평론가들과는 달리 훌륭한 A급 평론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묘한 사상가의 차후 행보가, (그 이론이 가진 의의와는 별도로) 현대의 정치적 조건 그리고 이론가와 정치의 관계 등과 관련해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의 다음 행보를 기다려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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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즘

2008/09/21 16:33 2008/09/2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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