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평론> 2014년 여름호(통권 60호) "고전 다시읽기" 코너에 실린 글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비교한 주제 서평입니다.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들어가며: 선물교환과 순수증여, 사회와 정치적인

 

자신을 탄생시킨 분과학문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인접 학문과 실천 영역에서 끊임없이 다시 읽히는 행운을 누리는 텍스트들이 있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행운을 누려온 텍스트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인류학 현지조사들을 참조하여 쓰여진 이 책은, 이후 인류학 연구자들뿐 아니라 사회학·철학·문학·문화연구 일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실천 영역에서 시장경제를 문제시하고 넘어서고자 시도해 온 많은 활동가들에게도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는 아마도 이 텍스트가 근대사회과학이 직면했던 근본적인 이론적·실천적 질문, 즉 “사회(연대)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뒤르켐의 조카이자 공동 연구자로도 잘 알려진 마르셀 모스는, 이 책에서 시장논리를 넘어선 사회와 사회연대의 토대로 “선물교환”과 그것의 “상호성(호혜성, reciprocity)”을 제시했으며, 이후 이러한 모스의 주장은 시장중심주의와 공리주의를 문제시하는데 있어 반드시 참조해야 할 하나의 출발점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 번 부흥하고 있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표현되는 시장경제의 확장과 사회연대의 해체,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과 대안모색 노력의 증가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1] 특히 최근 한국사회에서 시장경제의 대안을 자임하며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연대경제”, “호혜경제”와 같은 실천적 기획들에서, 모스의 <증여론>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모스 연구자들이 불만을 표하듯이, 이들 기획들이 종종 “선물경제=선(善)”이라는 피상적인 모스 독해에 기반해 시장에 대한 도덕적 대안제시에 과도하게 기대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이러한 우려를 넘어 실천적 운동을 배경으로 진지한 이론적 탐색을 전개하는 작업 역시 하나 둘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종합적으로 이 운동들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연구로는,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작 <트랜스크리틱> 등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과 상호적 증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본인 스스로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주도하기도 했던 가라타니는, 최근 출판된 이 방대한 저서에서 다시 한 번 증여의 논리를 통해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모스의 <증여론>(1925)과 가라타니의 <세계사의 구조>(2010)는 85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환”의 차원에서 사회구성의 문제를 접근하고, 이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도덕”이 현대 사회에 가지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유사함이 눈에 띈다. 동시에 두 저작 모두 기존의 인류학적 연구들을 방대하게 참조하면서, 인류역사의 흐름을 자신의 틀 속에서 재서술하겠다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야심 역시 공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결론 부분에서  “증여”의 문제의식에 기반해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책은 공통점을 가진다. 물론 이러한 유사성과 함께, 두 텍스트는 흥미로운 차이점 역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증여론>이 20세기 초 시장과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사회”와 “사회보험”의 영역을 선물과 증여의 이름으로 마름질하려는 시도였다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미 모스의 이상이 부분적으로 현실화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즉 서구에서의 “사회-국가”와 그 밖의 지역에서 국가사회주의 및 발전주의 국가형태—가 위기에 봉착한 현실 속에서 시작한다. 즉, 가라타니의 논의는 단순히 모스의 <증여론>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을 역사화하고 오늘날 변화된 조건 속에서 “반복하면서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로 읽혀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두 책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두 흥미로운 텍스트들을 비교․검토해보고자 한다. 다만 이들 저작들이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고 그 기획이 야심 찬 만큼, 이 저작들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해설은 이 짧은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행히도 두 저작들에 대해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충실한 해설들이 이미 제출되어 있기에,[2] 여기서는 기존의 논의들을 반복하기보다는 조금 새로운 관점과 개념을 활용해 이 두 텍스트들을 절단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상술하자면, 이 글은 이들이 증여와 그 상호성에 기반한 “사회”의 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한편, 동시에 이들이 선물교환의 상호성을 넘어서는 어떤 단절적 지점으로서 “순수 증여/선물”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에 기반해 이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같이 “선물교환-사회”의 연결쌍에 대비해 “순수증여”를 “정치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일종의 발견론적 아이디어라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일반적인 “선물증여”가 증여자와 수증자 간 상호성과 상호 인정에 기반해 있다면, 순수 증여/선물은 이러한 보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증여”, 즉 상호성을 벗어난 형태의 선물증여를 의미한다. 인류학 및 철학에서 이 “순수증여” 개념이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때로는 이에 대한 입장 차가 학문적․정치적 지향을 나누는 바로미터로 기능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순수증여”의 존재 여부는 선물순환 및 사회의 구성과 관련해 중요한 물음을 야기한다. 즉, 앞으로 살펴볼 모스의 주장처럼 사회라는 것이 일정한 도덕적 규칙과 순환경로에 기반한 상호적 증여와 인정의 산물이라면, 결국 이러한 상호성을 전제하지 않는 “최초의” 증여는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기존 사회의 경계를 벗어나면서 새로운 사회의 경계를 설정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지라는 질문이 “순수증여”의 개념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3] 이러한 관점에서 모스와 가라타니가 이 “순수증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들 저작의 “정치적” 지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증여론>: 신성한 사회와 순수증여의 불가능성

 

모스는 <증여론>의 서두에서, 선물을 주제로 한 북유럽의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역설이란, “선물은 이론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의무적으로 주어지거나 답례된다”(47)는 것이다.[4] 다시 말해, 현실에서 선물증여는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며 타산적인”(47)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러한 선물의 역설은 <증여론> 전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면서 반복된다. 예컨대, 우리는 이 자유와 의무, 자발성과 강제 간의 역설이, 선물-증여에 내재한 불확실성과 그 답례에 대한 믿음 간의 역설로 변형되어 <증여론> 곳곳에서 재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모스가 책의 말미에 이야기하듯이, 오직 친구 아니면 적이 있을 뿐 “중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 고대사회에서, 선물-증여는 보답의 불확실성 앞에 창을 내려놓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교역을 개시하려면 먼저 창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었다.”(281)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스의 선물론에서 이러한 불확실성은 빠르게 억압되고, 그의 논의 전반에 걸쳐 “선물은 그것이 답례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순환하는”(136) 것으로 묘사된다.

 

모스의 논의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그가 선물에 내재한 이 역설들—즉 자발성과 의무 간의 역설 혹은 증여의 불확실성과 답례의 확실성 간의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하우hau’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인류학 역사상 가장 많이 논의되고 인용되었을 단락을 예비하면서, 모스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물을 받았을 경우, 의무적으로 답례를 하게 하는 법이나 이해관계의 규칙은 무엇인가? 받은 물건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수증자는 답례를 하는 것인가?”(48) 모스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마오리족 현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선물이 순환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선물에 달라붙어 순환하는 영적인 에너지 ‘하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특정한 물품(타옹가)를 갖고 있어 그것을 나에게 준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이 물품을 제3자에게 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그는 나에게 대가로서 무엇인가를 주려고 마음먹고 나에게 무엇인가(타옹가)를 선물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주는 이 ‘타옹가’는 내가 당신한테서 받았으며 또 내가 그에게 넘겨준 ‘타옹가’의 영(하우)입니다. 나는 (당신한테서 온) ‘타옹가’ 때문에 내가 받은 ‘타옹가’를 당신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준 타옹가의 ‘하우’ 때문입니다.”(66-67)

 

즉, 하우는 증여되어 순환되는 물품(타옹가)에 포함된 증여자의 ‘영혼’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증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일부인 이 영혼을 함께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품에 달라붙은 영혼으로 인해, 수증자는 이를 영혼의 원주인에게 상환해야 할 의무를 진다. “요컨대 하우는 그 탄생지, 숲과 씨족의 성소 그리고 그 소유자에게 돌아오려고 한다.”(70)

 

모스는 이렇듯 신비스런 언어로 제시된 하우를, 선물의 교환을 보장하면서 이를 순환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혹은 “도덕적” 힘으로 해석한다. 즉, 이 하우의 힘에 기반해 선물 교환은 주는 자와 받는 자 간에 “선물을 줄 의무, 받을 의무, 답례해야 할 의무”라는 연쇄적인 도덕적 관계를 탄생시킨다.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증여자의 영혼의 일부로 상상되는 이 하우를 통해, 선물을 주는 이와 받는 이 간의 상호인정과 연합이라는 도덕적 규범이 개인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를 어기는 것, 즉 선물을 주거나 받기를 거부하거나 답례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 즉 “결연과 교제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언하는 행위”로 간주된다(74).

 

모스는 더 나아가 이러한 수평적이고 내재적인 선물교환의 연쇄와 그것에 수반되는 상호적/호혜적인 도덕적 관계 맺음을 “우리 사회가 세워져 있는 인간반석의 하나”(49)로 제시한다. 메리 더글라스가 <증여론> 영어판 서문에서 압축적으로 제시하듯이, 모스에게는 “순환하는 선물체제 자체가 사회”이며, 상호 간의 “연대를 강화하지 못하는 증여는 하나의 모순”인 것이다.[5] 이 때 이 선물의 연쇄사슬 속에서 증여 혹은 대항-증여되는 것은, 단순히 물품뿐 아니라 “음식물, 여자, 아이, 재산, 호부, 토지, 노동, 봉사, 종교적인 봉헌, 위계”(76), 더 나아가 춤이나 노래 같은 무형적․상징적 재화까지 다양하며,[6]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상호증여와 상호인정들이 결합되면서 촘촘한 사회적 유대와 연대가 탄생하게 된다.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모스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고 의식적인 증여-교환의 관행”(114)이라 칭한 쿨라(kula) 의례를 통해 이 내재적인 사회 탄생의 과정을 잠시 들여다 보자.[7] 서태평양 트로브리안드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선물교환인 쿨라 시스템은, 일종의 사치품이 특정한 방향을 따라 순환하면서 독립된 섬들 간에 동맹관계를 탄생시킨다. 이 때 ‘음왈리(mwali)’라 불리는 조개 껍질 팔찌는 시계 방향으로, ‘술라바(soulava)’라 불리는 목걸이는 반시계 방향으로 섬들 사이를 순환하면서 증여된다. “원칙적으로 이 부의 상징물들의 순환은 끊임없으면서도 정확하게 행해진다. 그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간직해도 안되며, 그것들을 넘겨주는 데 느려서도 안 되고 인색해서도 안된다.”(105) 이렇게 두 물품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데, 이 교환 과정은 이중적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선물 증여를 통해 선물을 준 자와 받는 자 간의 일시적 채무 관계가 형성되고, 선물을 준 자의 명예가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 때 선물을 받은 자가 선물을 제 때 제대로 된 방법으로 답례하지 않으면, 받은 측에서는 체면을 잃을 뿐 아니라 심할 경우 노예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8] 그러나 다른 한편, 선물을 받은 측에서 대항-증여로 기존의 채무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물-채무 관계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면서, 선물을 준 집단과 받는 집단 간의 일종의 사회 계약이 탄생하고 연속된 사슬처럼 보조적인 선물의 증여 및 답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115).

           

<증여론>에서 모스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선물교환과 상호인정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창출하는 관습이, 고대 사회는 물론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2장에서 그는 멜라네시아의 쿨라 의례와 북서부 아메리카 콰키우틀 족의 포틀래치 의례 등을 통해 이러한 선물교환의 원형적 논리를 확인하며, 3장에서는 이러한 증여의 체계가 어떻게 로마법, 힌두법, 게르만법 등 고대 법체계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었는지를 조명한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 그는 “우리의 도덕과 생활 자체의 상당한 부분은 언제나 의무와 자발성이 혼합된 증여의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다”(249)고 주장하면서, 당대의 사회보험제도가 어떻게 증여의 정신에 기반하며, 이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9]

 

이러한 논의를 통해 모스는 “증여의 정신”에 기반해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모스의 논의에 있어서 “사회”가 가지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위상이다. 모스는 불확실한 선물 증여와 확실한 답례의 역설을 극복하고 선물을 순환시키는 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하우”라는 “사회적” 힘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해결책은 역설을 해결하기보다는 선물교환과 사회의 상호전제라는 좀 더 근본적인 형태로 역설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메리 더글라스가 지적하듯이, 모스에게서 선물교환과 그 상호성은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 “사회의 가능성의 조건”이다.[10] 그러나 동시에 모스의 분석에서, “선물이 목적지 혹은 수신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언제나-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를 가능케 하는 기반을 탐색하겠다던 모스의 논의에서, 정작 사회는 선물-증여의 불확실성과 순환의 확실성 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선험적인 전제로서 소환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논의에서 선물교환과 이로 인해 탄생하는 사회는 어떤 물신화된 대상으로, “문제시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실제 “선물교환”과 사회에 대한 이러한 모스의 관점은 자신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증여론>의 결론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모스는 확산되고 있는 공리주의나 시장주의에 맞서, 고대사회의 선물증여 정신을 되살릴 것을 촉구하면서 증여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연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연대주의”의 주창자인 뒤르켐을 따라, 사회보험, 상호부조조직, 협동조합, 직업단체, 공제조합 등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이들의 성장을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집단도덕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한다(255). 이 과정에서 모스는 “사회”와 “직업집단”을 신의 자리로까지 끌어올리는데, 결론부에서 알라의 힘에 대한 코란의 경구들을 길게 인용한 후 모스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알라라는 말을 사회와 직업단체라는 말로 대체해보라. 혹시 당신에게 신앙심이 있다면, 이 세 단어를 합해 보라… 그러면 지금 등장하고 있는 경제체제에 대해 선명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273)[11] 이러한 일종의 사회신학을 통해 모스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조직의 원리는, 형제애(fraternity)에 기반한 사회연대 혹은 네이션의 구성일 것이다. <증여론>의 마지막에서 그는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아더왕의 원탁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는 사회와 구성원 그리고 개인들이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안정된 관계를 이룰 때 진보한다. 선과 행복은 평화와 잘 조직된 노동과 부의 축적과 재분배, 상호 존경과 관대함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282) 모스에게 있어, 이 “상호성의 도덕”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장 진화한 사회에도, 가까운 장래의 사회에도,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미개한 사회에도 공통된 것이다”(258).  

 

그러나 이러한 모스의 주장에 “선물은 반드시 답례되는가” 혹은 “선물은 항상 수신자에 도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모스 이후의 많은 이들이 상호성이 전제되지 않은 증여 관계, 즉 주기는 하되 되돌려 받지 않거나 특정한 수신자 없이 제공되는 “순수증여”의 개념을 통해 모스의 사회이론을 문제화하려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증여론>에서 모스 본인은, 일관되게 “순수증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단호히 그 가능성을 일축한다. 모스는 부부 간의 증여를 순수증여로 파악한 말리노프스키를 비판하면서, 순수증여의 형태로 등장하는 모든 증여들이 실제로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완전히 탈이해관계적인 것이 아님”(265)을 역설한다. 따라서 메리 더글라스가 <증여론> 영어판 서문에 붙인 제목처럼, “공짜선물은 없다.” 순수증여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용어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스의 입장은 끝없는 상호적 도덕과 의무의 연쇄로 결합되어 있는 사회상을 가정하며, 이 사회의 구성을 문제화하는 정치적 공간을 상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사회연대는 사회에 내재한 화해불가능한 적대와 관련되기보다는 자발적인 상호부조집단들의 수평적 연대로 축소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증여론>의 마지막 문장은 모스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의 정의를 담고 있지만, 이 때 정치는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사고되기보다는 사회의 “관리” 혹은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정치로 환원되고 만다: “다양한 동기와 요인들의 합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기와 요인들의 의식적인 관리가 최고의 기술, 즉 그 말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이다.”(283)

 

모스 이후 <증여론>의 논의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상호성을 넘어선 “순수증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나간 철학적·인류학적 논의들을 상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12] 다만 여기서는 이러한 시도들이 공통적으로 모스의 사회관념과 선물론이 가질 수 있는 “폐쇄성”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순환 자체를 위협하고 단절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 선물순환의 근본적 가능성을 조건 짓는 것의 이름으로 “순수증여”를 사유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크게 보자면, 모스의 선물교환과 사회에 대한 분석을 자본=네이션=스테이트로 이루어진 사회구성체의 한축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순수증여의 차원으로 교환양식 X를 제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는, 모스 식의 폐쇄적 사회신학을 극복하려는 가장 최신의 시도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과 순수증여의 정치학

 

가라타니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전개하고 있는 작업은,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증여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라타니 본인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세계사의 구조>는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교환양식’에서 다시 보려는 시도이다”(5). 그에 따르면, 경제적 하부구조를 생산양식으로 접근할 경우, 자본제 이전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에서의 화폐와 신용 등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35). 이 같은 문제의식이 선물교환과 그것이 생산하는 신용-부채 관계에 오랫동안 주목해 온 모스주의 인류학의 문제의식과 깊게 공명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가라타니의 작업은, 국가와 시장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사회연대와 사회보험의 확립을 자신의 정치적 대안으로 삼았던 모스와는 달리, 이러한 사회보험의 확립과 위기 “이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가라타니는 도덕적 형제애에 기반한 네이션의 구성이라는 모스의 대안에 동의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한 축으로 파악하고,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에 기반해 이들 전체를 넘어서기 위한 자신만의 기획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가라타니는 우선 네 가지 상이한 형태의 교환양식을 구분하고, 이들을 경제적 하부구조로 재설정한다. 이 네 가지 구분되는 교환양식은, 선물의 증여-답례라는 호수성/상호성에 기반한 교환양식 A, 폭력에 의한 약탈 및 재분배를 의미하는 교환양식 B, 상호간의 합의에 근거한 상품교환을 의미하는 교환양식 C,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상호적인,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순수증여”로서의 교환양식 D 혹은 교환양식 X이다. 이 때 경제적 하부구조로서 교환양식 A, B, C는 각각의 역사적 상부구조를 가진다. 교환양식 A가 상호성이 지배하는 공동체, B는 과세와 재분배를 통해 존재해온 국가, C는 화폐경제로 구성되는 시장의 토대를 이루는데, 가라타니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으로 이들이 서로 긴밀히 맞물려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구성해왔으며, 특히 오늘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고한 시스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들과는 상이한 교환원리에 기반한 교환양식 D의 확장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교환양식 D”가 일종의 순수증여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는 구체적 실체를 가진 다른 교환양식들과는 달리, 교환양식 D는 확고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39)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 이념 혹은 초월론적 가상 같은 것으로, 하나의 지향점일 뿐 현실적인 제도로서 존재하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도 보편종교나 공산주의, 어소시에이셔니즘과 같은 유토피아적 이념이나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해왔다(198). 충분히 이해가능하게도, 가라타니는 이러한 교환양식 D를 교환양식 A와 구별하는데 공을 들인다. 그는 완전한 “공동기탁”의 유동민 사회에서 “상호적 선물교환”에 기반한 씨족사회로의 이행을 가져온 “정주혁명”을 강조하면서, 교환양식 A도 그 이전에 존재했던 “유동민의 코뮤니즘”을 “억압”한 결과로 수립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교환양식 D는 이러한 교환양식 A를 다시 한 번 “부정”함으로써 등장하는데, 이에 따라 이것은 교환양식 A에서 억압된 것의 귀환, 즉 유동민의 “공동기탁적” 삶의 방식이 이중으로 회귀하는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221). 이것은 모스의 선물교환에 관한 논의가 순수증여를 부정하고 있다는 앞서의 논의를 상기할 때 매우 날카로운 지적으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D의 회귀를 네이션으로 손쉽게 회수되어버리는 “노스탤지어에 기반한” 선물경제(교환양식 A)의 회귀와 구분되는, 선물경제에서도 원초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것의 “무의식적 반복”으로 묘사한다 (215).

 

 

<표 1>[13]

교환양식 B.

약탈과 재분배 (지배와 보호)

국가

세계=제국

교환양식 A.

호수 (증여와 답례)

네이션

미니세계시스템

교환양식 C.

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자본

세계=경제(근대세계시스템)

교환양식 D.

X (순수증여)

어소시에이셔니즘

세계공화국

 

 

이어서 가라타니는 인류역사에서 이들 교환양식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 결합했으며, 그 결합형태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추적한다. 책의 1부에서 서술되는 미니세계시스템이 호수원리에 기반한 교환양식 A의 헤게모니 하에 다른 교환양식들이 접합된 형태라면, 2부에서 다루는 세계=제국은 국가중심의 교환양식 B, 3부의 근대세계시스템은 시장경제인 교환양식 C가 중심이 되는 사회구성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는 이들 상이한 세계시스템 간의 이행의 계기들로, 미니세계시스템을 낳은 정주혁명, 세계=제국으로의 이행의 근간이 된 국가사회의 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대세계시스템을 탄생시킨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을 각각 제시한다.

 

이렇듯 교환양식 간 헤게모니의 교체로 세계사의 전체구조를 파악하는 가라타니의 도식적인 논의는, 마지막 4부에서 교환양식 D가 중심이 되는 사회시스템으로서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가라타니는 이 교환양식 D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형태이자 이행의 계기로 두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데, 하나가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고자 하는 어소시에이션 운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UN에로의 증여를 통해 군사주권을 방기하는 평화-반전운동이다. 전자는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후자는 보다 최근의 <세계공화국으로>(2006)에서 제기된 아이디어인데, <세계사의 구조>에서 이들은 교환양식 D, 즉 고차원적인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되살리는 두 흐름으로 종합되고 있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두 운동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하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으나 맑스주의에서는 주변화되었던 협동조합 어소시에이션 운동을 재평가한다. 그는 선물교환의 상호성에 기반한 소비자=생산협동조합, 보이콧 운동 및 지역통화․신용시스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자본제 내부에서 자본과 투쟁하는” 노동조합과는 달리 이러한 윤리적 협동조합 운동들은 국가와 “자본제 바깥으로 나가려는”(350) 시도임을 역설한다. 비록 여기서 가라타니의 초점은 형제애에 기반한 네이션의 구축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사회시스템의 추구라 할지라도, 이러한 그의 정치적 대안은 각종 공제조합과 상호부조조직들을 높이 평가했던 모스의 입장과 실천적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하고자 하는 시도에 덧붙여, 가라타니는 두 번째 차원의 “증여”를 덧붙인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국가는 항상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기존의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을 넘어서는 운동은 일국적 차원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 등의 예에서 보듯이, 일국적 실천은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다른 국가들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려는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위로부터의 주권의 방기, 즉 국가 간 시스템의 약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가라타니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각국이 자신들의 군사적 주권을 유엔에 “증여”하는 “세계혁명”을 제안한다. “어떤 무력도 증여의 힘에 대항할 수 없기에”, 이러한 주권의 방기는 국가간 증여의 호수성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시스템”, 즉 세계공화국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430). 요컨대,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면서도 네이션에 포획되지 않는 어소시에이션 운동과 국가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주권의 증여가 교환양식 D에 기반한 두 가지 운동형태로 제안되는 것이다.

 

가라타니의 이러한 과감한 제안은 이미 다양한 논의들을 낳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14] 여기서는 <세계사의 구조> 논의 전반보다는, “순수증여”의 위상과 관련하여 가라타니의 논의가 가질 수 있는 문제점만을 짤막하게 검토해보고자 한다. 아마도 <세계사의 구조>가 <증여론>보다 결정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을 꼽자면, 순수증여를 부정한 채 선물교환의 논리에 주목한 모스의 정치적 대안이 사실상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보로미안 링의 한 고리로 기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되살려 교환양식 D를 구체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사의 구조> 이전에도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X를 종종 암시한 바 있으나, 이는 오사와 마사치가 지적하듯이 주로 실정적 내용을 결여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즉 “교환양식 A도, B도, C도 아닌 어떤 것”으로 제시되곤 했다.[15] 그러나 <세계사의 구조>에서 가라타니는 이러한 순수증여의 차원을 구체적 프로그램들로 실정화 혹은 실체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입장변화는 그가 각종 대담에서 여러 차례 밝혔던 문제의식—즉 사회주의의 해체 이후 탈구축의 부정적인 움직임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발전시킨 결과물일 것이다.[16] 물론 노학자의 이러한 이론적 전회는 충분히 이해가능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의 “부정성”으로 존재했던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이, 독립적인 교환양식이자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실체화”될 때 야기되는 문제들은 없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순수증여의 실체화 결과 무대 뒤로 물러나 비가시화되는 것은, 각 교환들에 내재한 모순과 “부정적 계기들”일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는 선물교환, 수탈 및 재분배, 시장교환 각각의 내부에 이를 위협하는 부정적 계기들이 존재하며, 이 계기들이 교환과정을 교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분석틀에서 이러한 각 교환양식들의 한계와 모순은 다른 교환양식들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해소된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교환의 한계로서 노동력의 (재)생산 문제는, 국가와 사회의 개입을 통해 보충되는 것이다 (pp.291-296). 이러한 설명은 한 사회구성체 내 각종 심급들의 능동적 상호작용을 조명하는 장점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각 교환영역 내 모순들의 “과잉결정”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형식주의적 사유에 빠질 위험을 가진다. 특히 이러한 위험은 “교환양식 X”가 실체화되어 이 운동과 기존 교환양식들 간의 관계가 일종의 “외재적인” 대립항처럼 제시될 때 더 커진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이 실체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연대 형태들에 대한 다소 성급한 과대평가이다. 이는 가라타니가 교환양식 D의 실현 방안으로 제시하는 어소시에이션 운동과 유엔의 결합이, 실제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는 대안적 위상을 가질 수 있느냐라는 질문과 연결될 것이다. 사실 시장=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관계로 (근대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추적하는 것은, 가라타니 본인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아니다. 오히려 푸코가 지적하듯이, 내재적 시장과 초월적 국가 간의 사이 공간에 이들을 연결시키는 매개들과 장치들을 설치하고 작동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자유주의적 통치기획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었다.[17] 흔히 “사회” 혹은 “네이션”이라 불리어 온 이 같은 매개 공간의 통치는, 각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연대(뒤르켐, 모스), 헤게모니(그람시), 운동(슈미트) 같은 경쟁적 대안들을 낳았으며, 몇 차례의 위기를 거쳐 전후 유럽에서의 사회-국가, 그 밖의 지역에서의 국가사회주의 및 발전주의 국가형태로 안정화되었다. 문제는 오늘날 한 때 안정적이었던 일국 내에서의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이 해체되면서, 이러한 국가적 차원에 “미치지 못하는” 공동체들과 그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연대 형태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보여주듯이, 이 새로운 공동체들과 초국가기구들은 가능성의 공간만은 아니며, 오히려 더 촘촘히 지역화되고 세계화된 시장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면서, “국가 혹은 사회 없는 통치”라는 새로운 통치형태를 실험하고 생산해내는 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해체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와 국제연대를 “순수증여”의 실험장으로 “실체화”하는 가라타니의 논의는 지나치게 일면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낳는다.  

 

<세계사의 구조>의 출간 이후 가진 대담에서, 가라타니는 오늘날 어소시에이셔니즘에 기반한 세계혁명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모든 국가를 뛰어넘은 인터내셔널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동시혁명의 조건은 이미 충족된 상태”라고 주장하는가 하면,[18] UN 개혁을 통한 세계동시혁명의 기대감을 피력한다: “유엔 안에 전혀 어소시에이션 같지 않은 두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와 국제통화기금을 어소시에이션 같은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국가와 자본은 지양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엔의 개혁은 ‘세계동시혁명’입니다.”[19] 비록 글보다는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는 대담에서 제기된 주장이라 할지라도, 가라타니의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과거 일국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위일체를 폭로하는 것만큼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가 기존 시스템의 해체로 열리게 된 공간을 성급히 체제의 “외부”로 번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러한 문제의 부분적 원인이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순수증여”의 부정성을 하나의 실정적 정치프로그램으로 성급히 실체화하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음은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나가며: 순수증여의 정치학을 위하여

 

이 글은 선물교환을 사회의 토대로 보는 입장에 기반해 “순수증여”를 이 선물교환에 “내재하는 외부”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이름으로 파악하고, 이 같은 틀을 통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 선물과 순수증여, 사회와 정치가 각각 어떻게 사고되는지 살펴보았다. 선물이 평등한 개인들 간의 상호적 인정과 유대 관계를 생산한다면, 순수증여란 (최초의 증여는 항상 답례를 확신할 수 없는 증여이기에) 상호적인 사회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반인 동시에, (기존의 상호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인정관계를 도입하기에)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완결을 방해하는, 사회 혹은 선물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사고될 수 있다. 모스와 가라타니는 증여와 교환양식에 기반해 사회의 구성원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각자 상이한 이유로 이 순수증여의 논리, 즉 “정치적인 것”의 논리를 조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모스는 선물교환이 어떻게 내재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 국가주의와 시장주의 양자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연대”라는 그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처음부터 자신의 논의에서 배제하도록 만든다. 가라타니는 모스의 선물론과 사회적 연대론이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등식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대안으로서 “순수증여”를 성급히 독립적 교환양식으로 “실체화”하면서,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한 탈정치적 분석으로 귀결되고 만다.[20]

 

물론 이러한 한계를 이들 저작의 의미 없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글은 다층적인 함의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읽혀왔으며 앞으로도 읽힐 것이 확실한 한 편의 고전과 앞으로 고전이 될 또 한 편의 저작을, 순수증여와 정치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재검토해 본 실험적 시도일 뿐이다. 또한 증여나 교환양식에 기반해 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의 존재양식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중요한 영감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모스와 가라타니의 논의가 가진 의의와 한계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경제”, “연대경제”, “호혜경제” 영역을 분석하는데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들 속에서, 사회는, 연대는, 정치는 각각 어떻게 상상되는가? 이들이 가정하는 선물교환은 모스가 분석한 선물교환이나 가라타니가 제안하는 교환양식 D와 어떤 부분에서 유사하고 어떤 부분에서 상이한가?[21]

 

마지막으로 “순수증여”가 결국 “증여”의 영역과 연루되어 있으며 선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수증여의 논리를 묻는 질문은 언제나 선물과 교환에 대한 논의를 불가피하게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오늘날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경유해서만 제기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이런 면에서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사회가 적대로 분열되는 지점, 즉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사유하기 위한 반복적 시도 속에서, 더 나은 실패를 위해 이 두 저작들로 끊임없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1]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데이비드 그레이버, 서정은 역,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9; Jacques Godbout & Alain Caillé, The World of the Gift,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0; Marcel Hénaff, The Price of Truth: Gift, Money, and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0.

[2] <증여론>에 대한 상세한 해설로는, 모리스 고들리에, 오창현 역, <증여의 수수께끼>, 문학동네, 2011;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6장, 오명석, “선물의 혼과 신화적 상상력”, <한국문화인류학> 43(1), 2010; 박정호,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문화와 사회> 7, 2009를 참고할 것. <세계사의 구조>에 대한 해설로는, 가라타니 본인의 대담집인 가라타니 고진, 최혜수 역,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도서출판b, 2014;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자음과 모음, 2014, 3장 참고. 

[3] 이렇게 볼 때, 인류학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순수증여와 관련한 논의는, 오늘날 사회를 결정하는 토대이자 동시에 사회의 궁극적인 완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즉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최근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어느 정도 선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로는, 샹탈 무페, 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 후마니타스, 2007; Ernesto Laclau, Emacipation(s), Verso, 1996; Oliver Marchart, 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참고.

[4] 이 글에서 인용되는 문구들과 페이지 표기는 모두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의 한글 번역본을 따른다. 마르셀 모스, 이상률 역, <증여론>, 한길사, 200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세계사의 구조>, 도서출판b, 2012. 다만 번역은 필요할 경우 다소 수정하였다. 

[5] Mary Douglas, “Foreword: No Free Gifts” in Marcel Mauss, The Gift, W. W. Norton, 1990, ix.

[6]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후 이러한 모스의 논의를 발전시켜, 여성, 재화, 언어의 일반화된 교환을 사회구조의 기반으로 제시한다. Claude Lévi-Strauss,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Beacon Press, 1969.

[7] 여기서 모스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에 대한 말리노프스키의 현지연구 자료를 참조하고 있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최협 역,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8] 여기서 선물의 양가적 속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선물이지만 받는 입장에서 그것은 언젠가 되갚아야 할 치명적인 ‘빚’이기도 하다. 모스는 선물의 독일어 어원에 기대어, 선물에는 ‘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Marcel Mauss, “Gift, Gift” in Alan Schrift ed., The Logic of the Gift, Routledge, 1997.

[9] 모스는 증여의 상호성에 기반해 사회보험제도를 정당화한다. 즉, 오늘날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용주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이중적 기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증여의 수혜자 중 하나로서 “공동체의 대표자인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생활보장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53).

[10] Mary Douglas, 앞의 글, xiv.

[11] 이러한 모스의 사회신학적 입장은, 뒤르켐의 영향을 고려했을 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복지국가를 뜻하는 프랑스어인 섭리국가(État providence)가 그 자체로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2] 예컨대, 수평적 상징교환이 아닌 수직적․일방향적 교환을 강조하며 희생의 문제를 재조명한 고들리에나, “태양은 받는 것 없이 준다”는 테제에 기반해 순수증여와 비상호적 소모, 희생제의를 강조한 바따이유, 모든 사람이 빚진 자가 되는 상태를 예외상태로 규정하고 진정한 예외상태로서의 “구원”의 문제를 사유했던 벤야민, 순수증여의 아포리아를 통해 선물교환의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데리다 등은, 이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상호성”과 “순수증여”에 대한 사유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흐름 속에 위치지을 수 있을 것이다.

[13] <세계사의 구조> p.41;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11의 표를 토대로 재작성

[14] 예컨대,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에 실린 대담들을 참고할 수 있다.

[15]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47. 2000년대 초반에 행해진 아사다 아키라와의 대담에서는 가라타니 고진 본인도 이 교환양식 X를 포지티브한 것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X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것은 히피의 코뮌과 동일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와야 할 어소시에이셔니즘”,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b, p. 235.

[16] 예컨대,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 260.

[17]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2011. 특히 12강; 자끄 동즐로, 주형일 역,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2005 참고.

[18]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94

[19] 같은 책, p.34.

[20] 아마도 이렇게 하나의 교환양식으로 실체화되지 않고 여전히 부정적인 계기로 작동하는 순수증여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존재를 선물로 규정한 하이데거와, 순수증여의 아포리아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남긴 데리다, 상징적 교환의 실패 지점으로서 실재를 사고했던 라캉, 선물의 경로 이탈가능성에 대해 사유했던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등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이 글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러한 사유들에 대한 선물론적 분석의 단초들은, Gerald Moore, Politics of the Gift,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역, <권력과 저항>, 난장, 2012에서 발견할 수 있다.  

[21] 오늘날 이러한 영역들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화된 선물교환”에 대한 분석으로는, 이승철, “얼굴의 도덕경제: 선물교환, 인정, 코스모폴리탄 연대”, 2013 문화인류학회 하반기 학술대회 발표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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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1 16:01 2019/01/21 1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