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촛불 집회에 관한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블로그에 다른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아(지난 2달 동안 블로그에 새 글을 쓰지 않고 미뤄왔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빠서이지만..) 떠오르는 단상을 거칠고 도식적으로 정리해 놓는다. 상황이 정리된 후 어떤 식으로든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

좀 거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 광우병 촛불 집회가 post-97 체제의 궁극적 완성이자 동시에 변화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 post-97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담론이 정치 영역의 민주화담론과 경제 영역의 신자유주의 담론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담론들은 특정한 주체성의 모델과 그 모델에 기반한 주체들의 호명 과정을 수반한다. 지난 10년 간 정치적 영역에서 민주화 담론이 시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국민"으로서 "민주-시민"을 그 모델로 삼아왔다면, 경제 영역에서 신자유주의 담론은 자기 계발과 커리어 관리에 집중하면서 각종 제도의 피규율자에서 벗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한 명의 소비자로서 empowering된 "소비자-시민"을 그 모델로 삼아왔다. 그리고 이 두 담론과 두 주체성의 계열은 지난 10년 간 개혁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두 기둥으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두 주체성 간의 관계만으로 보자면,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결합된 동일한 것의 서로 다른 면이라기보다는, 일정정도 서로 간에 독립성을 가진 채 평행적으로 발전해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주체성의 근저에 공통으로 놓인 욕망의 도식에 더 관심이 가지만, 그럼에도 이 두 주체성은 일정 부분 상호 환원 불가능한, 독립적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민주-시민 주체성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슬로건 아래 미군 장갑차 촛불 시위, 탄핵 반대 시위 및 각종 시민운동 등에서 가시적으로 표출되었다면, 소비자-시민 담론은 교육 개혁, 공기업 개혁같은 제도적 뒷받침과 더불어 웰빙 문화, 자기 계발 문화의 확산을 통해 일상 생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해 왔다. 97년 이후 이 두 주체성 계열은, 적극적으로 상호 교차하거나 결합하기보다는 각기 다른 부분에서 평행(혹은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그리고 모든 지배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이 상호 긴장이야말로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유지에 기능적이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올해 광우병 촛불집회(와 그 참가자)에서 진정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주저없이 이 소비자-시민 주체성과 민주-시민 주체성, 두 주체성 계열의 상호 교차와 결합을 꼽고 싶다. 지난 10여년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발전해 온 두 주체성의 계열(그리고 이 주체성들을 호명하는 두 계열의 담론)은 광우병 촛불집회 속에서 완전히 상호교차하고 있으며, 소비자-민주-시민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광우병 촛불 집회는, 웰빙 문화, 자기 계발 문화, 나르시시즘의 문화의 수혜자들인 소비자-시민을 거리로 불러낸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초창기 촛불 집회를 주도하고 가장 열심히 결합했던 집단들이 <화장빨>이나 <소울 드레서> 같은 인터넷 소비자 커뮤니티들이라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거리로 쏟아져나온 중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은, 정치적 투사나 이익집단의 모습보다는 더 나은 행정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시민의 당당한 권리 요구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은가? 혹은 겨우 네 달 만에 돌아선 이명박 정권에 대한 민심 속에서, 어떤 정치적 가치에 기반한 분노보다는 불량제품 구매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를 읽어내는 것은 과연 지나친 생각일까?(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특정한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소비자-시민의 분노 위에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어색함없이 덧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 집회의 참여자들에 대한 이른바 '진보' 언론의 표상은, 이들이 합리적이며 자신의 안전과 경력 관리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이들(소비자-시민)이면서, 동시에 참여적이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화한 이들(민주-시민)이라는 것이다.(불과 지난 대선만 돌이켜보더라도, '청년 보수층' 등의 용어을 통해 후자와 전자의 간극을 지적하는 것이, 이들 '진보' 언론의 주된 담론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본다면,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비록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소비자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담론이 조금씩 논의되어왔다 하더라도 비교적 어색한 거리를 유지했던 이러한 두 상이한 계열의 담론(소비자-시민과 민주-시민)이 아무런 솔기없이 매끄럽게 결합되는 것은, 단지 광우병 촛불집회가 6월을 관통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일까? 

 

촛불 집회를 둘러싼 담론들 속에서, 더 나은 행정 서비스에 대한 요구들과 민주주의적 요구의 경계는 불투명해짐과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소비자로서의 권리 행사와 완전히 겹쳐지는 것으로 이해된다.(조중동 불매운동에 쏟아지는 "소비자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찬사들을 보라. 나로서는 이러한 운동의 목적에 동의하지만, 보수 언론에 대한 불만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가 이러한 상상적 틀 속에서 표출되는 것 자체는 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되어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실제로 촛불 집회의 참여자들 속에서도, 우리는 이들을 어디까지 소비자-시민으로, 어디까지를 민주-시민으로 규정지어야할지 모르겠는 약간의 낭패감, 그리고 부분적으로 재확인되는 동시에 어느새 지워지는 이 둘 간의 경계선을 만난다.(이것이 전통적인 소비자-시민과 전통적인 민주-시민 양자 모두에게, 광우병 촛불 집회와 그 참가자들의 성격을 그토록 모호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주된 이유일 것이다.)  광우병 촛불 집회를 매개로 이루어진 이 두 주체성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소위 생활 영역과 공공 영역을 자유롭게 결합시키고 가로지르는 꽤나 통치 까다로운 소비자-민주-시민 주체들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 두 계열의 결합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이 (지금의 국면을 민주주의의 귀환이나 생활정치의 확산 혹은 다중적 역능의 폭발로 묘사하는 이들처럼) 환영할 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이 두 주체성의 구성이 그동안 자유주의적 담론과 장치들을 통해 이루어져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소비자-시민과 민주주의라는 기표의 기묘한 결합 혹은 이러한 결합에 기반한 담론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소비자 운동으로의 환원 혹은 지난 대선에서 드러났던 "경제(oikos)화된 정치"의 완성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이 두 계열의 주체성이 계속 결합될지, 아니면 다시 분리되어 일정한 평행 관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다른 한쪽이 또 다른 한 축을 흡수할지 역시 현재로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두 계열의 담론과 두 계열의 주체성의 혼합이 가져온 촛불 집회의 폭발력은, 97년 이후 확장되어 온 개혁적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의 결과물이자, 그 헤게모니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비가역점을 통과했으며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아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이명박 정권 뿐인 듯 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난 10년간 자유주의 헤게모니와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과거 반공-규율 사회의 유령과 싸우면서 이 헤게모니와 암묵적으로 공모 혹은 묵인해온 소위 "진보" 혹은 "좌파" 진영의 담론들이,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들의 등장에 과도한 찬사와, 이에 대비되는 빈약한 분석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무능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이 새로운 국면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앞으로 대중 정치에 대한 사고가 이 소비자-민주-시민 주체성의 형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묘한 결합관계와는 또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까? 혹은 상상해야만 할까? 이 새로운 소비자-민주-시민과의 형상과는 또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우리는 이 결합을 환영해야만 할까? 나 역시 촛불집회의 참가자로서 촛불집회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성장의 조짐들에 진정으로 기뻐하는 바이지만, 이러한 물음들과 관련하여 촛불집회가 던져주고 있는 것은 하나의 답이라기보다는 질문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한 답은 촛불집회 그 자체의 귀결 그리고 그것이 남길 효과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분명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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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1 00:39 2008/07/01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