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가 무엇인지 이해하다 (Verstehen, was Geld ist)

 

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는 『자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발전시켰는데, 그 해석은 고전적 맑스주의와 부르주아 경제학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었다. 추모글. (Hans-Georg Backhaus entwickelte eine Lesart des »Kapital«, die den klassischen Marxismus ebenso wie die bürgerliche Ökonomie kritisierte. Ein Nachruf)

 

2026년 3월 12일 

작성: Nadja Rakowitz, Frank Engster

번역: ChatGPT / 교정: 나

원문: nd (https://zrr.kr/all2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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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 (Hans-Georg Backhaus)는 헬무트 라이헬트 (Helmut Reihelt)와 함께 이른바 새로운 맑스-독해 (Neue Marx-Lektüre)의 선구자이자 창시자로 여겨지며, 오늘날 이 흐름에는 서로 상당히 다른 다양한 맑스 해석자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새로웠던 것은, 맑스의 가치형태 분석에 대한 그들의 논리적-범주적(logisch-kategorial), 또는 형태-분석적(form-analytisch)이라고 불리는 독해 방식이었다. 이는 『자본』의 서두를 역사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사회학적으로 축소하는 해석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적-범주적 독해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이른바 서구 맑스주의, 그리고 비판이론 안에서도 선구적인 전례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오직 바크하우스만이 거기서 다음과 같은 급진적인 결론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맑스에 입각한 가치비판과 화폐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前)화폐적 가치이론 (prämonetäre Werttheorie)에 대한 비판이다. 즉, 가치를 노동에서 또는 상품교환에서 도출하고, 그로부터 하나의 긍정적 가치이론을 구성하려는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다. 바크하우스에 따르면 화폐가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이다 — 화폐 없는 가치는 없다!

 

비판으로서의 『자본』

 

이것은 광범위한 이론적·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바크하우스가 『자본』의 부제를 철저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맑스에게서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이지, 더 나은 경제학이 아니다. 맑스는 그 이론 위에 사회주의 경제학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더 뛰어난 리카도 (Ricardo)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의 총체성과 그것의 정치경제학 전체에 대한 비판을 의도했으며,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폐지의 차원들이 비로소 파악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자본』 전 3권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는 『자본』을 하나의 비판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해석을 위해 이론적 기초를 정식화했으며, 그것을 화폐와 가치의 내적 연관 속에서 전개했다. 화폐비판과 가치비판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그의 중요한 통찰은 여러 편의 논문들에서 반복해서 제시되었지만, 그는 독립적인 단행본을 쓰지는 않았고, 『자본』 전 3권에 대한 자신의 접근의 결과와 함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몇몇 논문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바크하우스는 오늘날 유럽과 영미권뿐 아니라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글들은 1997년에 『Dialektik der Wertform』이라는 제목의 논문집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는 1970년대에 작성된 『Materialien zur Rekonstruktion der Marx’schen Werttheorie I–IV』도 포함되어 있다.

 

 『Dialektik der Wertform』과 『Materialien zur Rekonstruktion der Marx’schen Werttheorie I–IV』의 제목은 바크하우스가 평생동안 몰두해 온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 ‘그들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대상인 화폐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무능력은 경제적 대상 자체의 〈기괴성〉 (Monstrosität)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는 화폐와 가치 개념에서의 이러한 무능력을 부르주아 경제학의 대립자인 ‘고전적 맑스주의’에게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항상 아도르노 (Adorno)의 제자라고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이론’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축소되어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가치와 화폐 개념, 그리고 그것들을 전개하는 방법에서 맑스 자신에게도 〈양가성〉 (Ambivalenzen)이 존재함을 지적했는데, 이러한 양가성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사태 자체에 속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문제, 어쩌면 그 한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변증법이 무엇인지 알아보다

 

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는 2026년 3월 8일, 향년 96세로 자신의 제2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Frankfurt am Main)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했으며,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채 혼란스럽게 쌓여 있는 자신의 도서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을 그는 많은 형식적인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자신이 방금 읽고 있던 것에서 얻은 어떤 새로운 통찰’로 맞이하곤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자주 역사책을 읽고 있었는데, 프랑스혁명, 특히 그 안에서도 좌파 분파들에 깊이 몰두했다. 또한 그는 튀링엔 (Thüringen)의 나치 시대 역사에도 강한 관심을 가졌으며, 그 역사 속에서 오늘날의 전개와의 유사성을 보았고, 그것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튀링엔을 연구했는데, 1929년에 태어난 그는 그곳 루돌슈타트 (Rudolstadt) 근처의 작은 도시 렘다 (Remda)에서 성장했으며, 튀빙엔의 파시즘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쟁 후에도 그는 한동안 튀링엔에 머물렀고, 동독에서 일종의 야간 김나지움 (Abendgymnasium) 과 같은 학교를 통해 아비투어 (Abitur)를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50년대에 서독의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 시기에 그러한 교육 기회가 이미 가능했다는 점 [즉 이동이 자유로웠다는 점 – 역자]을 동독의 공로로 높이 평가했으며, 1989년 이후에도 좌파 내부에까지 널리 퍼져 있던 동독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다.

 

1961년에 그는 프랑크푸르트로 갔는데, 그가 늘 이야기하곤 했듯이, “마침내 변증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의 강의를 들었고, 카를 하인츠 하크 (Karl Heinz Haag)의 강의도 들었으며, 1962년부터는 테오도어 W.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의 강의를 들었다. 그보다 이전부터 그는 하인츠 브라케마이어 (Heinz Brakemeier)와 레오 코플러 (Leo Kofler) 등과 접촉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반스탈린주의적 맑스 해석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는 코플러의 주말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이 시기 이후 그는 맑스의 가치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그가 연구하고 있던 저항운동가 헤르만 브릴 (Hermann Brill)의 유고에서 ‘1867년 『자본』 초판’ 한 권을 우연히 발견했다. 『맑스-엥엘스 저작집』 (Marx-Engels Werke, MEW) 23권 [여기에 『자본』 독일어 4판이 실려 있다 - 역자]에 실린 가치형태 분석의 텍스트를 이 초판과 비교한 것이 바크하우스의 새로운 맑스 해석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특히 ‘가치에서 화폐로의 “이행”’과 ‘방법론적 언급들’이 『자본』의 이후 판본에는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그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을 읽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성과는 아도르노의 세미나에서 한 발표에서 제시되었지만, 바크하우스가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는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바크하우스는 한편으로 아도르노가 맑스와 『자본』에 관해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천재적인 직관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끝까지 아도르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후 바크하우스의 통찰은 - 때로는 바크하우스가 충분히 언급되지 않은 채 - 헬무트 라이헬트와 한스-위르겐 크랄 (Hans-Jürgen Krahl)에 의해 이어졌다. 또한 디트하르트 베렌스 (Diethard Behrens)와 코르넬리아 하프너 (Kornelia Hafner) 역시 바크하우스의 테제를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그리고 곧 다른 곳들에서도)에서 바크하우스와 베렌스의 맑스 해석을 발전시키고 그것에 대해 출판을 하던 소규모 학생 그룹이 있었으며, 그 성과들 가운데에는 박사논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설적인 등장들

 

프랑크푸르트를 넘어 그의 테제들은 1994년에 그와 디트하르트 베렌스, 하인츠 브라케마이어, 한스-요아힘 블랑크 (Hans-Joachim Blank), 미하엘 하인리히 (Michael Heinrich) 등과 함께 그가 창립한 “맑스 학회” (Marx-Gesellschaft)의 학술대회들에서도 논의되었다. 대학 세미나에서의 바크하우스의 모습뿐 아니라 맑스 학회의 학술대회에서의 그의 등장은 전설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제들과 이론들에 대해 너무나도 강하게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격렬하게 흥분하기도 했고, 토론 상대를 꾸짖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으며, 때로는 즉석에서 행사를 끝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30분쯤 지나 다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근하게 토론을 계속하곤 했다.

 

이러한 기질은 그는 마지막까지 유지했다. 오늘날 정치인들뿐 아니라 학자들의 어리석음과 뻔뻔함에 대한 그의 분노는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예를 들어 자스키아 에스켄 (Saskia Esken)이나 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같은 이름만 언급해도 그를 금세 격분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격정은 그의 친구들, 간병인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헛소리를 하지 않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보여 주던 그의 깊은 친절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의 격렬한 비판과 경멸에도 불구하고, 한스-게오르크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는 타협하며 살아갔고,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냥고기 (야생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했고, 케이크를 즐거워했으며, 폴란드인 간병인이 만들어 주는 수프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큰 소리로 자주 웃었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지냈다.

 

우리는 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에게서 단지 맑스를 읽는 법만 배운 것이 아니라, 바람이 역방향에서 불어올 때에도 어떻게 굽히지 않는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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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13 21:38 2026/03/1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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