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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을 비판한다

 

정희진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될 때 한겨레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매매, 생존권 투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매매가 ‘직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과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에게 성 판매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매매의 폐해는 매매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본인의 선택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정희진은 참으로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직업’으로서의 성매매를 분석하는 것과 ‘매매 행위’ 자체에서 오는 성매매의 폐해를 논리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둘을 동일시한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과 성노동에 따르는 어떤 폐해가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런 구분은 비단 성노동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서 행해지는 구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정희진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이라고 할 때의 그 ‘노동’도 문제인 것이다. 그 ‘노동’이 뭔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노동에 착취와 폐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성매매의 폐해가 뭔지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성노동이 아닌 KTX 여승무원의 노동이나 방직공장 여공의 노동을 보자. 정희진의 말처럼 우리가 그녀들이 그 노동을 택한 것이 개개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 노동에 따르는 폐해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도 성노동처럼 성별 권력관계의 문제이고 그 노동에 폐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므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논법을 구사하던 정희진은 매춘여성들이 성노동자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자, 다시 한겨레 지면을 빌어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동안 여성들은 승진, 고용, 숙련, 위험도, 산재 등 노동 시장에 전제된 남성 기준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공적 영역 중심의 기존 노동 개념을 확장, 재구성해 왔다. ‘감정 노동’이나 ‘성 노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성과 사랑은 노동이고, 노동이어야 한다. ‘가사노동’, ‘성 노동’의 정치적 의미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처럼, ‘사적’ 영역의 노동에 남성들도 진출하여 남녀가 함께 성별 분업을 극복하자는 것이지, 여성이 계속 ‘성 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이고 몸은 자원이라는 주장이 전혀 아닌 것이다.”

<성매매, 생존권투쟁?>에서의 주장보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 대해서 유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이번에도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성노동은 노동이고 심지어 ‘노동이어야’하는데 그것이 단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과 성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대립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는(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논리적 맥락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언급은 왜 삽입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게 물론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계속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결국 정희진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성노동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때 도대체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이 무슨 현실적 의미를 갖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성매매, 생존권 투쟁?>과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 내내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 노력”을 강조했으며,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했다. 이런 정희진의 주장에 공감 못하거나 동의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희진의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 정희진 스스로의 개념 속에서 어떻게 항상 성노동자 운동과 대립되는 것으로 등장하는지 그게 의문일 뿐이다.
우리는 정희진이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할 때 그것의 의미가 설마 성노동이 아닌 다른 노동을 통해 생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마도 모두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생존의 토대를 만들자는 얘기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 유독 성노동만이 범죄화되어야 하는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노동이 아니면 당장 생존을 해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 생존권 투쟁의 문제이고,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투쟁일 수 있는 것이다.

정희진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는, 성노동이라고 하는 이 부문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정희진 자신도 노동을 하지 않고(정희진이 무슨 구체적 노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 할 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고 투쟁할 때 성노동자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정희진의 주장은 현실도피성 발언에 불과할 뿐이다.
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은 뿌리깊은 ‘성매매=성폭력’ 본질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실제로 성매매를 성폭력과 동일시하는 담론을 다음과 같이 구사하고 있다.

“성매매는 도덕이나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남성 중심 정치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안이다. 만일, 여성의 성이 판매된 시간과 그 수치만큼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몸을 판다면, ‘매춘’이 가난과 상관없이 백인 중산층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도 ‘자유로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면, 연쇄 살인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성을 파는 여성이 아니라) 성을 사는 남성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런 상황 이후에야,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와 관련 없는 문제가 된다. 그전까지, 성매매의 본질은 성 상품화도 아니고, 성 보수주의와 성 자유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성매매는 가장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일 뿐이다...(중략)...성매매 반대가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제도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들과 모든 남성들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매매와 성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은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남성의 성이 인간의 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와 인격은 신체로 환원되고, 여성의 외모와 성은 ‘자원’이 된다.”(<성매매, 생존권 투쟁?>)

이 대목에서 정희진은 성매매에 대한 논쟁에 ‘성폭력’의 문제를 슬쩍 끼워 넣는 센스를 발휘한다. 이것이 성노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의도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식의 무차별적 언급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된다.
물론 정희진은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 종사자들의 권리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즉, 정희진은 성노동자를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여성’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또한 인용문에서는 남성에 대해서도 마치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글에서 성을 구매하는 남성은 지극히 혐오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정희진이 주장하듯 성매매가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 전혀 아니다. 정희진의 이런 논법 자체가 사실은 지독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회는 성매매를 불가피하게 채택할 필요도, 남성 성욕만이 아니라 모든 성욕을 반드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길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불가피하건 하지 않건, 억제하건 하지 않건 문제는 할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적 제도에 의해 미리 규정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욕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강간과 같은 성폭력으로 귀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욕에 대한 지나친 희화화다. 그리고 신체와 성이 자원이 되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남성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 점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논점 자체가 현실에서의 성노동과 성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한 투쟁의 쟁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성노동을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런 규정을 내릴 때에야 그 함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성노동만이 갖고 있는 무슨 특수한 신비적 개념에 의해서만 폭력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을 사회적으로 부과된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때 조차도 노동과 노동자를 ‘피해자’로만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 그리고 노동자들 또한 피해자 일 텐데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이 넘쳐나는 ‘피해자’들을 누가 어떻게 ‘구제’해주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노동자가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정치로 귀결될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그 노동 속에서 세상과 사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려는 주체성을 확장하기 마련이다. 성노동과 성노동자들에게 이런 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뜯어고쳐야 할 사회적 편견이자, 소수자적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 진보넷에 만든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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