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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28
    팔이 밖으로 굽는구나... 동국대, 안되겠네~
    too lazy
  2. 2005/12/14
    DOWN DOWN WTO ! JUNK WTO !(2)
    too lazy
  3. 2005/12/02
    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1)
    too lazy
  4. 2005/12/02
    오바하지 말자, 제발
    too lazy
  5. 2005/12/02
    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1)
    too lazy

팔이 밖으로 굽는구나... 동국대, 안되겠네~

 

_최준영 / 문화활동가 ptrevo@jinbo.net


이제는 존경심마저 생기려고 하는 우리의 황우석 선수. 기말을 맞아 네OO 지식검색을 들락거리며 레포트를 베끼고 짜깁기 하는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라’”임를 보여주며 연말 모든 언론의 1면을 특유의 연기력 물씬 풍기는 얼굴로 장식하였다. 덕분에 홍콩에서 1,000여 명이 연행되면서까지 WTO 각료회의 저지를 외쳤던 홍콩민중투쟁도, 집회에서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맞아 두 분이 사망하기까지 한 쌀개방 반대투쟁도 주류언론의 관심에서 비껴났으며, 모든 국민들이 사실은 잘 이해되지도 않는 줄기세포 번호나 ‘스너피’(맞나?)가 복제인지 쌍둥이인지에 대한 얘기만 들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장충동에 조용히 있던 동국대학교가 기어이 ‘일’을 냈다.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라는,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칼럼 때문에 - 그러면 북한이 왜 6.25 전쟁을 시도했을까를 생각해보자. 실수로? 그냥 한 번? 일본으로 가려다보니 지나가던 길이라서?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를 결정한 것이다. 내년 1월 초 이사회에서 직위해제가 확정되면 강정구 교수는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맡을 수 없게 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이놈의 학교는 왜 아직 형이 결정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해 총장까지 참가한 정책회의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일까? 검찰의 기소도 수업내용이 아닌 인터넷 칼럼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수업권을 빼앗는 어이없는 결정을 한 ‘정책회의’가 뭐하는 곳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총장에다 보직 교수 전원이 참가한 회의라... 다시 말해 “배운 만큼 배웠고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일 텐데,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보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면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상․표현․양심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강정구 교수의 사법처리를 주장한 수구꼴통 할아버지 9,000명과 같은 레벨에서 놀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최근 조선일보를 넘어서는 수구꼴통 신문으로 거듭나고자 ‘석간으로’ 고생하는 OO일보가 <강정구 교수 직위해제 늦었지만 당연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진작에 - 소위 만경대 방명록 사건 때 - 직위해제 시켰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고, 조금은 지난 일이지만 경제단체들이 동국대 학생들 취업제한까지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이 어떻게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도 않은 사건, 더군다나 국가보안법이라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된 악법에 의해 기소된 자기 학교의 교수에 대해, 교수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업권을 빼앗겠다고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눈과 귀를 막고, 또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어떤 민주적인 토론과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업권은 ‘수업을 할 권리’임과 동시에 ‘수업을 받을 권리’이기도 하다. 총장과 몇 명의 보직교수들에게 학생들의 수업권을 박탈할 권한은 없다.


‘지식의 상아탑’과 같은 현실에도 맞지 않은 낯간지러운 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대학이 사회의 여론과 특정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자신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수업권 - 이는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해당되는 권리다 - 을 놓아버린다면, 그 대학은 더 이상 존재할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동국대학교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직위해제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수업권을 교수와 학생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것만이 실추된 대학의 명예와 위상을 뒤늦게나마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한참이나 지나간 90년대 말장난으로 글을 맺어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북한산에 ‘어이’ 잡으러 가야겠다!” 장충동에서 잃어버린 ‘어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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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DOWN WTO ! JUNK WTO !

DOWN DOWN WTO ! JUNK WTO !

홍콩 시내에 WTO 해체의 외침이 울려퍼지다

_최준영 /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http://gomediaction.net


지난 12월 13일 제6차 WTO 각료회의가 홍콩에서 개막하였다. 12월 18일까지 계속되는 제6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전 세계의 ‘자유무역화’를 위해 각 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최종적으로 WTO 도하개발의제를 확정, 출범시키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예정이다.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 민중들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WTO가, 그 최종 목적지인 도하개발의제의 출범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WTO가 도하개발의제라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가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괴와 이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식량주권 문제, 빈곤 문제, 아동과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 문제, 교육, 에너지, 물, 문화 등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공공서비스에 대한 사유화 문제, 그리고 에이즈, 말라리아, 조류독감 등의 질병에 대한 저가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는 초국적 제약자본의 횡포 문제 등. 전 세계적인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의 심화가 바로 WTO와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이다.


한편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탄시키는 WTO 각료회의 때마다 각국의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해왔다. 99년 시애틀을 시작으로 칸쿤을 거쳐 이번 홍콩 각료회의 때까지 수만 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집결하여 ‘NO TO WTO’ 등의 구호를 외쳐왔다. 이번 홍콩 각료회의에서는 특히 한국의 민중투쟁단 1,500여 명이 참가하여 쌀개방 문제, 서비스협정 문제, 지적재산권 문제 등 WTO가 야기하는 민중생존권과 기본권과 관련한 이슈를 중심으로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WTO 저지투쟁과 관련하여 홍콩 경찰과 미디어에서는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선 한국민중투쟁단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제(13일) 있었던 해상시위와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루고 있다. 또한 TV에서도 한국 농민들의 투쟁이나 지난 아펙회의 저지투쟁 장면을 매우 자극적으로 편집하여 계속 방송하면서, 마치 한국의 민중투쟁단이 테러리스트인 양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WTO 저지투쟁에 대한 홍콩 미디어의 왜곡은 지난 APEC 회의 저지투쟁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집회에서의 분신과 농민들의 음독자살 등에 대해 ‘집회에서 감정이 격양되면 종종 일어나는 문제’라고 표현하며, 분신이나 음독으로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민중들의 생존권 등에 대한 언급은 배제한 채 이를 마치 시위문화인 양 다루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왜곡과 홍콩정부의 대응 - 홍콩정부는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저렴한 가격(지하철의 1/3)으로 운행하는 ‘스타페리’를 폐쇄시켜 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 으로 인해 홍콩시민들의 한국민중투쟁단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홍콩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중투쟁단과 전 세계 활동가들의 반WTO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抗議世貿!(꽁 이 싸이 무!, WTO 반대한다!)”와 “JUNK WTO”의 외침은 WTO 각료회의가 끝나는 18일까지 홍콩시내에서 계속 울려퍼질 것이다. 실제로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바라보는 홍콩 시민들의 모습은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과는 달리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와 ‘왜 WTO에 반대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 하는 모습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알려내고 결국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WTO를 해체시키기 위한 투쟁은 이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의 세계화, 대안세계화의 구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WTO, FTA 등 국제무역협정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고 이러한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전 세계 민중들과의 공유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메커니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 제6차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과 관련한 영상과 사진 등의 자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http://gomediaction.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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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APEC, 숫자의 스텍타클


전 세계 GDP의 57% 및 교역량의 46% 점유, 총면적 6,261만 ㎢와 총인구 28.1억 명으로 각각 전 세계 면적의 46.8%와 세계 총인구의 44.8% 차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y Cooperation, 이하 APEC)1)가 가지는 ‘숫자의 스펙타클’은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의 중요성을 대중들에게 홍보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APEC 회의 개최에 따른 관광수입 증가분이 2005년 한 해에만 3천만 달러에 이를 것이며 경제적 파급효과 - 국내총생산이 적게는 1억4천7백9십만 달러에서 많게는 2억5천5백6십만 달러까지 증가 - 또한 상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APEC 회의 개최지인 부산은 생산유발, 부가가치유발, 소득유발 효과가 6천7백억 원 가량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하였다. 경제 발전 논리에 기반한 두 번째 ‘숫자의 스펙타클’은 APEC 회의 성공 개최를 온 국민의 염원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숫자나 규모를 제시함으로써 APEC 회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리는 것은, 현실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일상에서 대중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APEC 회의는 ‘숫자의 스펙타클’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국제회의를 통한 이윤 창출이란게 사실 실제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또 그마저도 부산이라는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미디어의 APEC 회의 광고를 보거나 APEC 로고가 찍힌 산뜻한 색깔의 모자와 옷을 입은 경찰을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것과 같은 간헐적인 시각적 노출 이외에 별다르게 APEC 회의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대중들이 ‘APEC과 나(의 생활, 일상)’를 가장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지점은 테러위협의 일상화, 그리고 테러대비로 인한 일상의 위협 혹은 불편함이 아닐까 싶다. 즉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전후로 고조되었던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미디어를 통해 다시 부활하고 있고, 이에 따른 조치들 - 승용차 2부제, 회의장 주변 야산에 대한 입산금지, 검문검색 강화, 노점상 단속 등 - 이 속속 발표되면서 TV 화면으로만 접했던 테러에 대한 위협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회의장소가 있는 해운대 일대에 대한 교통통제 대책이 발표되었는데, 시내에서 해운대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모두 통제(봉쇄)할 것이라는 계획이 발표되자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APEC 회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이라도 가야겠다”고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한편 APEC 회의 개최에 대해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58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이하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지난 9월 7일 발족 기자회견을 갖고 APEC 회의에 대한 반대 투쟁을 선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APEC에 반대하는 10만 명의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세계화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WTO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국제기구의 회의 때마다 이루어졌던 반세계화 시위가 부산에서 재현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반대/파병반대 운동, 평택에서 진행 중인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쌀 개방 여부를 둘러싼 농민들의 투쟁, 노동시장의 유연화 및 구조조정으로 인해 심화되는 비정규직 문제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확산되면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을 APEC 회의를 계기로 결집시키고 이를 12월에 홍콩에서 있을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까지 연결시키는 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하지만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앞서 언급한 정부나 미디어의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혹은 10만이라는 숫자에 APEC 반대 투쟁이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여겨지는 것은 또 왜일까.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10만’이라는 숫자를 넘어 대중들의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기획된 문화운동 프로젝트이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실험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문화적 실천과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APEC 2005, 무엇을 논의하는가


다시 APEC 회의로 돌아와 보자.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통해 창설되었다. APEC은 1993년 1차 정상회의 개최 이래로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즉 APEC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 간 협력체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및 무역장벽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 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2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APEC 내에서의 포괄적이니 자유무역화를 완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회원국 중 선진국의 경우 2010년까지, 개도국의 경우 2020년까지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보고르 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고르 선언>의 실행을 위해 논의된, 3차 APEC 정상회의에서의 <오사카 행동계획>과 4차 및 5차 정상회의를 통해 제기된 15개 조기 자유무역화 분야의 선정 등을 통한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WTO 협상에 대한 지지는 APEC의 핵심활동’임을 선언한 7차 APEC 오클랜드 정상회의에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9년 시애틀에서의 WTO 각료회의가 무산되는 등 WTO를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세 번째 노력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APEC을 통한 무역자유화가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닌데, APEC의 틀 안에서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 싱가포르․뉴질랜드, 일본․싱가포르, 한국․일본, 일본․멕시코, 한국․칠레 등 - 이 계속되어 왔고 금융자유화 조치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2)


무역자유화와 관련한 몇 차례의 시도가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열리는 회의는 ‘WTO 체제의 출범을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APEC의 기본방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번 대회 의장국인 한국이 ‘반부패’ 및 ‘문화간 이해 증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추가하기도 하였지만, 의 역점과제3) 중 첫 번째 과제이자 핵심과제는 ‘무역자유화 증진’이며, 이는 지난 6월의 등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즉 오는 12월에 있을 WTO 홍콩 각료회의를 앞두고 열리는 이번 회의는 전 세계의 무역자유화 실현을 위해 APEC 참가국들의 결의를 모아내는, WTO 체제 출범을 위한 사전 회의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WTO 체제의 출범으로 대변되는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체제의 도입에 대한 문제점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금융세계화로 인한 외환위기의 위협,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과 거대곡물기업의 횡포, 유전자 조작식품의 위협, 제3세계 국가에서의 빈곤문제와 대규모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 생존의 위협,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 등. 이 뿐만이 아니다. 쌀개방 문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문제, 교육개방으로 인한 공교육 붕괴와 교육비 상승의 문제, 그리고 의료시장 개방으로 인한 의료보험체계의 붕괴 등은 당장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이기도 하다. 의 모토인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는, 그 실상을 볼 때 ‘(빈곤, 불평등, 차별이 확대되는) 공동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화영역에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인데,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 GATS)’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영역에 대한 개방화, 시장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GATS는 건설, 유통, 교육, 환경, 보건/사회, 금융, 관광, 운송, 문화 등 12개 분야의 시장개방에 관한 협상으로, 그 범위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공공적인 성격을 가지는 영역에 관한 시장개방 협상이다. 여기에 문화영역에 해당되는 시청각분야(영화, 음반, TV, 라디오 등), 뉴스에이전시를 포함한 오락/문화서비스 분야 등의 개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Protec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Contents, 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틀이 무역질서가 아닌 ‘문화다양성 협약’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국제적인 근거4)를 마련하였지만, 여전히 WTO 체제 출범에 따른 ‘문화의 상품화’ 및 문화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의 위협은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APEC 회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고 대테러 조치를 지지하는 등 미국의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9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이 채택되었고, 2003년 방콕 회의에서는 대테러조치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APEC 주요의제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3년 제11차 APEC 회의에서는 각종 정상회의를 통해 이라크 파병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APEC 회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미국 주도의 군사패권주의의 확산 및 강화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이번 APEC 회의는 WTO 체제 출범을 목전에 두고 열리는 만큼 그 국제적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회의가 실질적인 결정력과 구속력을 가지기는 힘들겠지만, WTO 체제의 출범에 대한 국제적인 흐름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아펙반대 국민행동>을 구성하고, 10만의 아펙반대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목소리가 11월 부산에서 전 세계를 향해 울려퍼질 전망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운동 단체5)가 참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조직된 가장 큰 이유는, 주류 미디어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APEC 회의에 대한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의 필요성6)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현재 주류 미디어 어느 곳에서도 이번 회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않고 있다. 이들 미디어에서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각종 경제수치와 대테러조치들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 이마저도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알려줌으로써7) 최소한의 판단 근거마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어떻게’ APEC 회의가 경제를 살리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APEC 회의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에는 수출이데올로기나 한류열풍과 같이 세계화의 양면성과 관련된 담론의 혼란이라는 측면도 존재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무비판적인 주류 미디어의 역할의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고 있는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운동 내 미디어․문화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제고하는 것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주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회운동 진영 내에서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역할과 위상이 크게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운동 내 미디어 혹은 문화와 관련한 실천은, 선전물 제작이나 문화제 기획, 문화예술인 섭외, 집회 생중계 등 매우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역할로만 인식되고 활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 - 인터넷 환경의 급격한 발달, 캠코더나 디지털카메라의 대중적 보급 등 - 는 더 이상 문화를 도구로서만 바라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사를 ‘직접’ 문화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물을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리는 행위, 직접 제작한 짧은 영상물이나 플래시 등을 유통시키는 행위 등은 이제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대중운동이 ‘대중조직만의 운동’이라는 비판과 오명을 벗고 명실상부한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에 근거한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최근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각종 실험들 -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활용한 ‘모블로깅’, 독립영화 제작 및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인터넷․라디오 방송 등 - 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기회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기간 기능과 수단으로서의 인식되어 왔던 미디어․문화행동이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사회운동 내 필요성과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중장기적으로 진보적인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의 미디어․문화 환경 변화는 수많은 개인들의 직접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활동가들과 잠재적 활동가들이 생산되었으며, 최근에는 부족하나마 공적인 지원을 통한 활동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보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은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이루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별 주체들의 활동이 개인의 실천으로만 머무르고 있고, 이를 공공적이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소통하는 것은 조직된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등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활동은, 진보적 미디어․문화콘텐츠의 공공적 형태의 소통과 이를 통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8)


100만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앞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정부와 미디어가 주도하는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된다는 것은, 제기되는 근본 목적은 다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대중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즉,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 속에서 10만에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이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운동의 목표는 조정될 필요가 있다. ‘열린’ 미디어․문화 공간을 통한 소통과 교류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0만 시위대’ 조직이라는 목표는 ‘10만’을 훌쩍 넘어야 하는 것이다. ‘100만이 참여하는, 그리고 전 세계 민중들이 동참하는’ 대중투쟁을 위해 미디어․문화행동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조직․홍보팀, 문화행동팀, 편성제작팀 등 3개 팀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먼저 조직․홍보팀에서는 전국의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에 대중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활동가 워크숍’, ‘반세계화 투쟁과 미디어․문화행동 토론회(RTV)’ 및 미디어․문화행동의 역사 및 사례에 대한 국제민중포럼에서의 미디어문화행동 포럼 등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결집을 유도하고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미디어․문화행동의 이론적, 실천적 담론을 생산할 것이다. 또한 2006년 1월에는 APEC 반대 투쟁과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 이후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평가와 이후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워크숍을 개최할 예정이다.

문화행동팀은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NO-APEC FESTIVAL’를 개최하였다. 부산영화제의 ‘아펙특별전’ 개최에 맞춰 진행한 행사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한 독립영화 상영, 해변 모래조각 등 전시, 문화공연 등을 진행하였다. 특히 이번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부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기획자, 인디밴드, 퍼포머 등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APEC 기간 중에도 문화공연, 퍼포먼스,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행동이 계획되어 있다.

편성제작팀에서는 10여 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9)를 통한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기획 중이다. 인터넷․라디오 방송은 기존의 집회 생중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운동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장애, 이주노동, 비정규직, 환경, 여성농민, 청소년 등 운동주체들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의 제작․방송과 공동체라디오운동 주체들이 참여하는 라디오방송 등이 준비되고 있으며, 다양한 반세계화 영상물의 인터넷 방송을 기획하고 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모바일 참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모바일 + 블로그 = 모블로깅’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혹은 사진전송 기능을 활용하여 이를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프로젝트로 투쟁 현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를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의 특징은 ‘보다 열린 공간의 구축’에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구축한 공간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들이 소통,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통상적인 홈페이지․게시판 문화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산된 미디어․문화콘텐츠의 홈페이지 게시와 방문자들의 소비라는 구분을 넘어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상호 소통과 교류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아카이브의 기능과 역할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 투쟁의 필요성


그 동안의 반세계화 투쟁의 ‘정형’이 국제회의 저지를 중심으로 한 시위 역량의 집결에 있었다면, 2005년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이를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국제회의’라는 ‘위를 향한’ 투쟁이 지금까지의 반세계화 투쟁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대중들의 ‘삶’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실천, 열린 공간을 통한 대중적 참여를 무기로 한 일상적 실천의 조직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조직을 통한 다양한 실험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이 조직된 대중들의 국제회의 저지투쟁에서 대중들의 삶에 근거한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확대․전화되어야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세계화 반대투쟁이라고 하면, 국제회의장 앞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 반대투쟁은 보다 일상적인 형태, 문화적인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민중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 및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축소, 경제적 삶의 기반 파괴 등 생존권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교육․의료․문화 등 사회공공영역의 축소, 소수 언어의 감소, 문화적 획일화로 인한 다양성 파괴 등 공동체 및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문화적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에까지 침투하는 자본의 논리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제 저항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저작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시스템 구축, 웰빙담론이나 한류열풍에 대한 비판적 이해, 생태적인 생활을 위한 삶의 방식의 재구축,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을 구축하는 문제로까지 반세계화 투쟁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대안세계화 운동을 고민하는데 있어 문화적 실천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화를 삶의 양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안세계화 운동은 곧 문화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말해,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인 담론․운동․콘텐츠의 생산과 소통이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당면 과제가 문화운동 진영의 주요 운동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이 끊임없이 기획되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생산과 소비의 확대 메커니즘의 굴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과학>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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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하지 말자, 제발

 

오바하지 말자, 제발

_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당황스런 시츄에이션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둘러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에 대해 검찰총장은 사퇴로 대응하고 9,000명 원로의 시국선언에다 박근혜 대표와 청와대의 팽팽한 말싸움까지. 한 마디로 당황스런 시츄에이션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 검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에다 재보선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힘겨루기까지 더해져 앞뒤를 재기가 힘들 정도의 판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들은 동국대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지 않은 학생이 대부분일 테고 강정구 교수의 수업을 듣기는커녕 강정구 교수가 자기 학교의 교수인지도 모르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인데, 느닷없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취업을 제한하겠다고 까지 나서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청년 실업 60만 시대인 지금인데...


이제야 칼럼을 읽다


평소 낮은 역사의식을 자랑하며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던 나에게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한국사에 대한 과격할 정도의 적극적인 관심은 당황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득불 ‘이제야’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찾아 읽어보았다. 문제의 칼럼의 제목은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로, 칼럼을 쓴 배경은 맥아더 동상허물기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통일전쟁 관련 부분은 미국와 맥아더에 대한 ‘보은론’을 비판하는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제 보은론을 본질적으로 따져보자. 만약 미국과 맥아더가 자기들 멋대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두 동강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과 형극을 겪었을까? 만약 6.25라는 통일내전에 외국군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전쟁피해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분단되는 비극이 지속될까?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물론 외세가 기원한 내전). 곧 당시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집안싸움이었다. 곧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 中(중)


한국사에 대한 내공의 부족으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평가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이 ‘구국의 세력’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는 판단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등. 이미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알아서 처신하지 못한’ 강정구 교수의 이러한 글은 경찰과 검찰을 자극했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논란은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를 넘어서 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칼럼 내용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닌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을 거쳐 체제 수호의 문제로까지 번진 지금의 상황은,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 9,000명의 원로 등 이른바 ‘구국의 세력’의 정치적 결집과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되고 있다.


통일전쟁, 그래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은 간단한 검색으로 ‘아직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음으로써 국가의 혼란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박근혜 대표와 9,000명의 원로뿐이다. 아직까지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고 좌경화되었다거나 좌경세력이 결집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고, 또한 강정구 교수 칼럼의 내용은 그 동안 진보적인 사학자들, 혹은 운동세력 내에서 일관되게 언급했던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강정구 교수 관련 논란을 활용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다시 칼럼을 보자.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이 논쟁의 출발점인 그 칼럼으로. 칼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먼저이지, 구속하고 구국의 결단 운운하는게 먼저일 수 있겠는가. 사회 분열과 체제 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의 눈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것들이 분열과 위기로 보일 뿐이다. 분단 이후 50년이 넘게 강요해 온 미국과 이승만에 대한 보은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신체를 구속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국전쟁이 북한의 통일전쟁이라고 말하면 어떻나. 아니라고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같이 말하면 그만이지. 광화문 사거리를 인공기 들고 뛰어다니면 또 어떻나. 무단횡단으로 벌금때리면 그만이지. 오바하지 말자, 제발.

 

*문화연대 <문화사회>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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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 노숙인 문화권 운동을 시작하며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들어가며 : 노숙, 해방, 문화


정의와 당위의 문제를 넘어서는 노숙인 문화운동의 실천이 무엇일까. 지난 1월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 이후 처음으로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고민했던 지점이다. 유목, 방랑, 자유 혹은 불결, 주정, 공포. 노숙과 노숙인에 대한 기존의 사회 관념은 어느 것 하나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힌트조차 주지 못했다.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노숙인 개개인을 분리 - 기존의 사회 질서로부터 노숙인 ‘집단’을 분리, 또한 노숙인 개개인을 서로에게서 분리 - 하여 고립시키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행동은, 주체로서의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그로부터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의 고민과 실천을 확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주체, 운동의 주체로서 노숙인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노숙인 운동을 이제는 ‘해방운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숙인 문제가 ‘재활’이나 ‘사회복귀’를 전제로 한, 이른바 평균적인 경제․사회․문화적 지표를 따라잡는 것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질서의 창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이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른바 ‘정상 이데올로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노숙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게 하는 ‘해방운동’의 운영원리와 실천을 문화와 문화운동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권, 노숙인 문화권


문화권 혹은 문화적 권리는, 사실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워낙에 ‘소비’를 통해 문화적 행위를 하는데 익숙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문화생활을 경제적 문제 해결 이후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여기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웰빙’ 담론이 몸과 건강 그리고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이러한 관심은 경제적․공간적․신체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공적인 문화생활의 향유가 아니라 수십만원 대의 용품을 사야지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노숙인 문화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일 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화권은 문화(생활)에 대한 자유권, 평등권, 참여권 등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문화생활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주거가 일정치 않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빈곤하다는 이유로 최고한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기본권으로서 문화권의 위배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공공영역의 확대를 통해 노숙인의 기본적인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 - 공공문화기반시설 문화프로그램에의 참여 보장 및 유도, 문화바우처제도의 확대, 사회교육의 확대 등 - 이 적극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문화권을 정의하고 문화운동의 실천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국가정책적 차원 혹은 문화복지적 차원의 실천을 전제로 하되, 이를 넘어서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실천이 고민되어야만 한다. 노숙인의 정체성에 기반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문화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 참여나 교육, 관람이 아닌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문화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그것이다. 요구나 당위의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획득하는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가야 한다.


노숙인 문화행동의 시작과 평가, 이후 계획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가칭)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이, 앞서 언급한대로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문화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취지에 전적으로 부합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해방운동’으로서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다짐하면서 지난 활동을 돌아보자.


3월 문화행동.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진행하기로 한 문화행동의 첫 시작이었다. 서울역에서의 간단한 공연과 영화상영으로 기획된 첫 번째 문화행동은, 말 그대로 조금 ‘서툴렀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서울역 등에서 문화행동을 진행해 온 노숙운동단체에 비해, 문화연대의 경우 처음으로 노숙인들과 대면하는 자리여서 긴장했던 탓일까. 준비부족으로 행사가 지연되기도 했고, 영화선정의 문제 - <슈퍼스타 감사용>의 선정과정과 내용에 대한 문제 - 가 평가되기도 했다. 주되게는 결국 노숙인 당사자들을 ‘행사참여자(객체)’로 만드는 형식의 행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4월. 이번에는 영등포공원에서의 공연이었다. 장소대여와 관련하여 시설관리공단에서는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소를 불허하였고, 행사는 강행되었다. 전기 사용을 위해 벌어졌던 해프닝 - 결국 발전기를 급하게 대여하면서 마무리 - 과 시설관리공단의 ‘고발’ 운운에도 불구하고, 노숙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참여로 빛난 공연이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춤 공연, 당사자모임의 노래공연, 그리고 참가자 모두가 함께 진행한 타악퍼포먼스는 행사기획자, 참가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5월에는 감리교신학대에서 감신대 노래패의 노래공연과 함께 독립영화를 상영했다.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 <상암동 월드컵, ‘사람은 철거되지 않는다’>라는 두 편의 독립영화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했다.


지난 세 차례의 문화행동을 그 자체로만 평가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개별 행사의 규모, 예산, 기획과 집행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동의에서 출발한 만큼 준비부족으로 인한 평가의 지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 4, 5월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정말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중장기적인 문화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 삶의 주체로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화행동의 목적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숙인 문화행동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 게스트로 참여한 사람 모두 매우 만족해하는 행사라는 점이다.


‘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의 이후 계획은, 노숙인 농활지역에서의 영화상영(6월)과 이후 <문화워크샵>을 통한 문화행동으로 잡혀있다. <문화워크샵>은 지난 활동 평가를 통해 노숙인 스스로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중장기적으로 노숙인 스스로가 조직화되는 것이 노숙인 운동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획되었다. <문화워크샵>의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7, 8월 - 9월부터는 미디액트의 지원으로 <노숙인 영상활동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계획 - 두 달의 기간 동안 마술, 미술(치료), 음악, 요리, 사진 등의 워크샵이 진행될 예정이며, 두 달 동안의 ‘야심만만한’ 워크샵 이후에는 발표회, 전시 등의 문화행동 또한 기획 중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조금 앞서가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민해보자. 아니 이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노숙인 재활 혹은 자활의 목적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에 있는지. 그래서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 질서로 편입되는 것에 있는지를. 물론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노숙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구축마저 미흡한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동시에’ 고민되어야 하는 문제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은 이러한 자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집을 구하고 취직을 하라!”라는 구호에 대해 왠지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노숙인의 존재적 특성, 정체성은 주거의 불안정성과 함께 스스로 조직해야 할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노숙인은 일상적으로 적게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적 특성에 기반한 운동도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정부, 기업, 언론이 자극하는 소비자본주의적 삶의 지표를 거부하면서도 더 건강하게, 더 의미있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공동체운동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거, 생활, 교육 등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집단과 공동체의 역능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많은 실험적인 공동체운동이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운동은 개인, 가족단위로 분화된 주거, 모든 생활의 영역이 시장질서에 편입되면서 악화되는 생활․환경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주거, 육아, 교육 등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나가는 대안적 삶의 운동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라는 표현은, 이러한 공동체운동에 착안하여 노숙인 스스로가 공동으로 주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또한 함께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도달 불가능한 ‘이론적인’ 목표라고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교육 등과 관련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적극적인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화공동체운동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실시 예정인 매입임대주택 사업을 통해 노숙인 문화공동체운동의 모델을 고민할 수 있다. 즉 매입임대주택 입주자들의 문화공동체운동을 통해 문화예술프로그램, 교육프로그램, 공동육아 등을 관련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연계하여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을 거점으로 학교,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문화의 집 등과 연계한 프로그램도 기획할 수 있겠다.


글을 쓰고 보니 겨우 몇 차례 문화행사의 경험으로, 그리고 아직 운동의 현장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해 상상해 본 것이라 매우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리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모쪼록 지속적인 문화행동이 노숙인 당사자 분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나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를 통해 나 자신의 고민 또한 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실노협 기관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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