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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포럼 4차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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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복덕방 1호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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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할 땐 책상청소를...

TV에서 '열대야'를 언급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바람이 거의 통하지 않는 내 자취방에서의 취침이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사무실에 새벽같이 나와서 밤늦게 들어가는 것이 생활화되어버린 요즘이다.

 

 

오늘도 7시가 채 되기 전에 사무실에 나와서 별안간 책상청소를 했다. 책상정리하기 전에 사진도 찍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쩝.

 

어쨌든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데 책상청소만큼 좋은 것은 없는 듯...

 

 

잉... 찍어놓고 보니깐 그리 깔끔해보이지도 않구나...ㅠ.ㅠ


 

내 책상에 살고있는 고냥들...과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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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4기 서울시, '민선3+1기'에 그칠 것인가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chobari@gmail.com

 

*참여연대 '참여사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의 선거판이 언제 정책선거였던 적이 있었겠냐마는, 이번 5.31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정책의 실종, 정치의 과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무능에 대한 대중적 심판은 ‘확실했다’. 역대 최저 투표율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날려버리며 5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은 ‘커터칼 테러’의 바람을 타고 ‘부패정당’에 대한 극단적인 몰표로 결과했다. 이제 “2-가 후보 중 떨어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한국 지방선거의 역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충분히 예상되었던 대로, 서울시장 선거의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거 세몰이의 정점이자 지방선거 최대 관심사였던 서울시장 선거에 대비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모두 ‘외부인사’라는 카드를 뽑고 전력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오세훈 후보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한나라당이 25개 기초단체장을 싹쓸이하고 서울시의원 106석 중 102석을 장악하기까지 했으니... 한나라당 스스로에게도 머쓱할 수밖에 없는 선거결과에 대해 ‘일당독재’ 운운하는 세간의 평가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민선4기=‘민선3+1기’?


지방선거에서의 ‘정책의 실종’은, 서울에서는 전임 이명박 시장의 개발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평가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채,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은 선거 시기 ‘뉴타운 50개 건설’, ‘청계천 남북간 4대축 거점지역 특성화’, ‘도심재개발의 본격적 추진’과 같은 본격적인 개발공약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제시하였고, 결국 “3달 준비하고 1달 선거해서 당선됐다”는 급조된 시장에게서 이명박식 개발사업의 ‘재방송’을 감지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발주의에 대한 우려는, 한양주택1)에 대한 오세훈 후보의 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은평뉴타운 개발계획에 포함되면서 전면철거될 위기에 처한 한양주택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선거 기시 각 당 후보들에게 한양주택 재개발계획을 철회할 것을 약속하라는 공개질의서를 발송하였다. 하지만 오세훈 후보는 “...뉴타운지구로 결정된 만큼 일관성을 유지하되, 뉴타운 사업시 생태마을로서의 기능을 보존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며 사실상 한양주택 재개발사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100일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시청 앞에서의 1인 시위, 서울시와 SH공사에 대한 끊임없는 항의, 국가인권위원회, 고충처리위원회 등에 대한 진정, 기자회견, 집회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데 힘겨워하던 주민들의 마지막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오세훈 후보 개발공약의 문제점


이 밖에도 오세훈 후보의 많은 공약들이 ‘개발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뉴타운 50개 건설’ 공약이 대표적이다. 뉴타운 개발은, 강남북균형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강북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부동산 투기만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삶과 권리, 그리고 잘 보존된 자연이 대대적으로 파괴될 위험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의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전면 철거와 아파트 건설만을 강요하면서, 실제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삶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뉴타운 개발 이후 원주민의 재정착률이 채 10%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서울에 뉴타운이 50개 생긴다면, 서울 전역이 공사판이 되고 부동산 투기만 악화시켜 저소득층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국립극장~남대문 수변공원 및 복합문화공간조성’의 경우, 서울에 이미 존재하는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및 구 단위 문예회관 등 기존 공연시설의 활용도가 극히 낮은 상황에서 또 다른 공공공연장을 짓는다는 계획보다는,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고 콘텐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세운상가 재개발도 마찬가지이다. 세운상가 철거를 통해 지하 복합문화공간 및 지상 녹지공원으로 개발하고 남산-도심-종묘로 연결되는 녹지벨트를 조성하겠다고 하였으나, 지하기피현상으로 인하여 현재에도 을지로, 종로3가 등 기간 조성된 서울시내 지하시설에 대한 활용성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한다면, 적절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청계천 주변부에 상품소비형 시장 및 경제활동 활성화를 위한 임대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도시개발 계획이라는 점에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귤맛이 난다”는 오세훈 서울시장. 하지만 후보시절의 공약과 최근의 행보 - 노들섬예술센터 건립 재추진 등 - 를 볼 때, “귤맛은 날지언정 탱자는 탱자일 뿐”이라는 판단이 아직은 옳은 듯하다. 민선4기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이 ‘리틀 이명박’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을 지,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비판과 감시가 필요하다.

 

1) 1978년 조성된 한양주택은 도심자락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통일로 입구에 있는 단독주택단지이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한양주택은, 처음 조성되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으로 강제이주된 주민들은, 1996년 서울시가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한양주택을 선정할 정도로 이곳을 변화시켰다. 길 양쪽으로 차를 주차하고도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충분할 정도의 널찍한 골목길, 집집마다 가꾼 자그마한 정원, 담장을 대신하고 있는 낮은 울타리, 마을 곳곳을 빼곡이 채운 꽃과 나무들을 보며, 이제는 많은 전문가들이 한양주택을 ‘생태주거단지’로 평가할 정도가 되었다(http://cafe.naver.com/foreverhy.cafe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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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6동 빈활_빈집꾸미기

2006 빈민현장활동에 참여했다.

 

문화연대에서는, 평택평화행진 등의 일정과 겹치면서, 7월 2일 미아6동 빈활에만 결합하게 되었다. 미아6동에서 문화연대는 12지구 세대위 사무실을 꾸미는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함께 한 7명의 상근활동가+자원활동가들은 옥탑방 청소 및 정리부터 꾸미기까지 진행하였다.

 

 


 

 

옥탑방으로 올라오는 계단 벽에 열심히 '락카질'을 하는 김태희 자원활동가(?). 김정명신 대표 딸 동녘이의 친구. 이름은 김태희지만 외모는 강혜정을 닮았다는 평이...

 

 


 

옥탑방 담벼락에 완성한 페인팅 작품(?) 앞에서... 왼쪽이 김태희, 오른쪽은 동녘.

 

 


 

이른바 '용역3인방'으로 불린 이들... 왼쪽부터 시락, 도끼, 호연. 뒷편에 보이는 건물이 세대위 사무실로 쓰일 옥탑방이다.

 

 


 

총7명 중 나머지 두 명은 나(초이, 왼쪽)와 은희(오른쪽)다. 사진을 찍는 관계로 친한 척...

 

 


 




 

빈 집 꾸미기 전의 옥탑방 내외부. 아래 꾸미기 이후의 사진과 비교해보세요~

 

 


 

작업 중인 도끼. 그물에 꽃(조화)을 달아서 옥탑방 문 위에 달았다. 이 날 빈집 꾸미기의 컨셉은 '재활용'! 3년째 가지고 다니며 많은 문화행사를 누볐던 그물이 이 날 결국 미아6동에 정착하였다. 조화도 여기저기서 줏은 것들...

 

 


 

옥탑방 내부 곰팡이 핀 곳에 그림 그리는 은희. 은희가 밑그림을, 동녘이 색칠을 담당.

 

 


 

채색 중인 동녘.

 

 


 

빨래판을 재활용한 메모꽂이. 도끼는 이 아이디어를 내고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옥탑방으로 올라오는 계단 주위 벽에 락카로 작업한 결과물... 볼만한가요?

 

 


 

물통은 돼지로 변신~

 

 


 

플랭카드를 재활용한 햇빛가리개 차양막. 상당히 어설펐지만, 위원장님은 "남향으로 정확하게 설치했네요"라며 위로해주었다. 초이 제작!!!

 

 


 

정문의 꽃장식이 완성된 모습.

 

 


 

은희와 꼭 닮은... 유리문 뒤에 서 있게 한 후 실루엣을 '대고 그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있던 탁자에 색칠 중. 마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분위기 연출.

 

 


 

탁자. 완성된 모습. 의자가 없어서 방치된 항아리를 뒤집어 사용하였다.

 

 


 

항아리 의자 윗면.

 

 


 

방 안에 그린 그림. "우린 승리하리!"

 

 


 

드디어 그림 완성! 주거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바라며...

 

 


 

옥탑방 정면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결사투쟁 머리띠를 맨 사람. 모델이 태희였나?

 

 


 

빨래판 메모꽂이 제작 중인 도끼. 왠지 '설정된 듯한' 웃음을 흘리는...ㅋㅋ

 

 

 


 

계단쪽 문에는 도끼를 모델로 한 사람. 지금 주거권 쟁취라는 문구를 새기는 중.

 

 


 

완성된 모습. 닮았나요? 작업 하는 내내 "턱을 깎아달라!", "몸매를 가늘게하라!"고 압력 넣었던 도끼.

 

 


 

세대위 분들과의 단체 사진. 세대위 주민 중 한 분은 나에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주시며 "사진 나오면 꼭 한 장 보내~"라고 말씀하였다. 손에 들고 있는 디카가 무안해지는 순간...

 

 


 

빈집 꾸미기 참여했던 선수들+주민도 한 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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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월드컵과 광장문화

*중대대학원 학보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호혜적, 선순환적 관계성의 복원․생성과 광장문화는 가능한가?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대한민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다. 2002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흥분의 월드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6년의 두 번째 월드컵은 아마도 ‘비장한 월드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가미가제 출정식을 연상시키는” 붉은 응원리본과 락버전으로 되살아난 ‘애국가’, 그리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광장을 찾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응원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 이런 광경을 보며 월드컵과 거리응원에 대한 흥분과 기쁨보다도 오히려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 아니 결승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범국민적 국가주의․애국주의에 기반한 ‘비장함’을 더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월드컵 반(反)광장문화?


한편, 2006년 월드컵 응원문화는 2002년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장문화의 부재’다. 2002년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의 실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이따가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당장에 평가전이 열리는 시청 앞 광장으로 가보자. 2002년 거리응원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겨난 시청 앞 광장. 앉아서 축구보기 딱 좋을 것 같던 잔디광장은 질서 유지를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구획되었고, 음주와 질서문란 등을 막는다는 이유로 배치된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은 정해진 곳으로만 다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을 보며, 정해진 규칙에 맞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더 이상 거리응원의 에너지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장문화가 부재하다”는 말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분할과 그 속에서의 자율성의 침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광장에서의 소통이 일방향으로 또한 위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들은 국가-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에 의해 점령당한 광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록 현란한 스펙타클을 소비하며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무대와 화면에 집중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객체’로 전락하고, 이로 인해 몸은 광장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문제인 것은, 4천만 모두가 ‘붉은악마’가 되고, 붉은 티셔츠를 입어야만 광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정체성으로 인해, 즉 ‘내부성’과 ‘순수성’에 기반한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다른 집단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월드컵 반(反)광장문화’가 만들어진다는데 있다.


광장open space, 열린 공간


‘광장’이란 말 그대로 ‘open space’ 즉 ‘열린 공간’을 말한다. 특히 ‘광장문화’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우리는 ‘광장’을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가 발생하는 곳, 다시 말해 공동체 구성원 간의 ‘관계성’이 발현되는 곳(공간, 지점, 계기)으로 ‘광장’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광장이 없었다”라는 말은 이제 기각시킬 수 있다. 어렸을 적 동네 꼬마들이 뛰놀던 공터, 시장 한 켠 약장수가 약을 팔며 차력을 하던 시장터가 바로 ‘광장’이고, 또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상을 나누던 평상이 바로 ‘광장’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열린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월드컵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과 교류, 선순환적인 관계성이 복원-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회문화 연구자들이 한국 사회 변화의 동력을 읽어내면서, 87년 이후 상실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재현을 꿈꾼 것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했다.


이는 한편으로 구체적인 공간에 대한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공간이 사회마다 다르며 또 이질적”이라며 공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고 했던 뒤르켐의 말처럼, 한국 사회 토건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며 도시민의 삶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형태로 조직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재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한 계획이 제출되었다. 권력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세종로 일대에 문화시설을 배치하고 광장을 조성하자는 계획은, 2002년 당시 확산되었던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공간-문화 전략으로 자본주의 하 도시공간에서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한 기획이었다.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


하지만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출발한 문화적, 미학적 상상력은, 결국 정치-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이라는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의 프리즘에 굴절되고 말았다. 효순, 미선이의 죽음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다시 한 번 광장문화가 소생하고, 이후 대선과 파병, 탄핵 등 주요 정치적 계기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광장)로 모였지만 결국에는 정치, 자본, 미디어의 힘 앞에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청 앞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잔디광장과 촛불의 힘으로 당선되었다는 노무현 정권의 실망스런 모습뿐”이라는 자조섞인 한숨이 결코 과장은 아닌 듯하다.


시청 앞 광장을 잔디로 만들어 자유로운 출입을 막고(“잔디를 보호합시다!”), 광장 사용 ‘허가제’를 도입하여 진보진영의 집회를 원천봉쇄한 정치-권력. 2006년 월드컵 자본-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SKT가 150여억 원으로 월드컵 기간 내내 광장 사용권을 독점한 채, 경비용역업체까지 동원하여 광장을 구획, 관리하며 거리응원을 쇼케이스로 만들고 있는 상황. 그리고 3․1절을 ‘축구절’로 만들며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월드컵 보도로 막아버린 미디어-권력. 이들 3주체가 장악한 광장문화로 인해, 오히려 월드컵 거리응원과 광장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할 ‘시민/다중/인민의 권력’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광장, 2006년 월드컵과 광장문화 재현의 가능성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소실되었던 광장문화를 복원․생성할 수는 없을까? 2006년, ‘open space’에 걸맞는 ‘open mind’의 재현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치, 자본, 미디어 등 월드컵을 장악한 반(反)광장문화-권력에 맞선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광장문화의 복원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다분히 상상불가능한 기획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3패로 예선탈락했으면 좋겠다”는 류의 부정과 무시의 전략으로는, 이주노동자들마저도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폭주와 국가주의․애국주의의 문화적 영향력과 위험을 감당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문화’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행동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광장문화’의 민주주의적 전유의 가능성이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관계성의 복원에 있다고 할 때, 월드컵이라는 ‘광장’에서 닫히지 않은, 배타적이지 않은, 타인과의 호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건과 계기, 소통을 만들어야 한다. 월드컵에 대한 탈근대적, 탈자본주의적 문제제기와 함께 한미FTA와 평택평화항쟁, 비정규직과 사회양극화, 이주노동자,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소통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찾을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광장의 복원, 즉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복원(잔디광장 리모델링, 세종로 문화광장화 등)과 민주적 소통을 위한 광장 운영의 복원, 그리고 자본에 의해 장악된 광장의 시민적 재전유에 대한 실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FTA반대 골세레머니’를 기대할 수 없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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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로사진2

돼지고양이라고 놀림을 받기는 하지만, 인물 하나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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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고양이_리베로ㅋㅋ

우리집에서 함께 거주하는 고양이... 이름은 '리베로'임다.

 

현재 몸무게가 10키로에 육박하고 있는 리베로. 하지만 다이어트 사료마저 '과식'하는데는 어쩔 수가 없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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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주택, 공간에 대한 변혁적 상상력의 시작?

 

한양주택, 공간에 대한 변혁적 상상력의 시작?

_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chobari@gmail.com



뒤르켐은 “공간이 사회마다 다르며 또 이질적”이라고 했다. 공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주니족’이라는 인디언 부족의 예를 든다. 뒤르켐에 따르면, ‘주니족’은 공간을 동서남북과 천정, 천저, 중앙 등 7개 지역으로 나누고 그들의 사회적 관계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7개 공간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람과 공기는 북쪽, 물과 봄은 서쪽과 같은 식으로. 여기에는 새나 식물, 혹은 생명의 에너지도 포함되는데, 즉 북쪽은 펠리컨과 두루미, 파괴의 지역이라는 식이다. ‘주니족’에게 공간은 현실의 경계와 상관없이 무한하게 확장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뒤르켐이 말한 공간에 대한 사회적 관계의 우위가 ‘2006년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에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서울은 공간에 대한 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공간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토건자본주의’라고도 말해지는, 개발자본과 관의 결탁을 통한 이윤창출의 메커니즘은 이명박 시장의 뉴타운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재현으로서의 ‘신개발주의’로.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도시공간’ 속에서 그 구조적 모순에 대한 각성 혹은 계급실천은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한양주택이라는 공간과 이를 둘러싼 싸움을 통해 공간에 대한 미학적, 대안적 상상력이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한양주택은 어떠한 곳인가. 은평구 진관내동 440번지 도심자락의 끝 통일로 입구, 북한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방호벽’보다도 북쪽에 한양주택 220여 가구가 들어서 있다. 똑같은 모양으로 생긴 단층 양옥단지인 한양주택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관계 속에서,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북의 대표단이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에다 ‘보여주기식’ 주택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탄생하게 된 한양주택단지를 정작 지금과 같이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주거단지로 조성한 것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한양주택으로 강제이주된 주민들은, 박정희식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도 말해지는 똑같은 지붕의 양옥집들에 개성을 불어넣어 ‘사람이 사는 동네’로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 1996년에는 서울시가 선정한 제1호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덩그러니 존재하던 시멘트 건물이 부족하나마 많은 사람들이 ‘생태주거단지’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2003년, 서울시와 SH공사가 한양주택 지역을 포함하는 은평뉴타운 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양주택 주민들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시와 SH공사에 대한 진정과 항의, 100일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1인 시위와 집회 등. 이명박식 ‘신개발주의’에 맞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주민들 간의 커뮤니티가 강화되고 있으며, 또한 주민들이 개발을 통한 자본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을 자발적으로 체득하고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생산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성격과 잠재력이 한양주택 재개발반대 싸움으로 점차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양주택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양주택 자체의 문제를 넘어 확장된 시민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하는 등 정치적으로 그 관심과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 하 도시공간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형태로 조직된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의식 또한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공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한양주택 싸움은 단순히 재개발과 연관된 싸움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양주택에서 새로운 방식의 비자본주의적 삶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고,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적인 사회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운동 차원의 기획이 요구된다.

 

*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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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월드컵이 ... ... 우리를 부른다.” 2002년 ‘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되찾아주었던(?) 월드컵이 2006년 다시 우리를 TV 앞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2006년의 월드컵은 2002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오대영’이라는 오명과 함께 기대반 의심반으로 시작된 2002년 월드컵이 결국 자발적인 광장문화의 형성이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으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냈다면, 2006년의 월드컵 광풍은 온 국민을 붉은악마로 호명하면서 국가적인 동원체계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에서의 ‘꼭짓점 댄스’나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팀의 4강 진입은, 이러한 월드컵 광풍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자, 다시 첫 번째 문장을 보자. “월드컵이 (자본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른다.” SKT는 145억원을 들여 월드컵 기간 동안 시청 앞 광장의 독점적 사용권을 획득하였다. 2002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점유하였던 시청 앞 광장을, 이제는 SKT의 허용방침 아래 ‘사용’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3.1절에 보여주었던 미디어의 광분 - 지상파 방송 3사가 몽땅 앙골라와의 시합을 중계 방송한 것은 관두고라도, 그에 앞서 거의 하루 종일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었다 - 은 2006년 월드컵 시기에 국가와 자본, 미디어가 보여줄 모습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애써 기억해 내야 한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수많은 사회적 현안들과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언론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아래 뭉쳤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월드컵에 의해 배제되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 아직 3달이나 남은 월드컵을 가지고 광분하는 미디어와 자발적이었던 응원문화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의 발빠른 움직임을 보면서, 아직도 해결 안 된 비정규직 법안과 사회양극화 문제 그리고 한미FTA가 또 어떤 식으로 묻혀버릴 지를 상상해본다. 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한국노총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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