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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가

 대형서점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가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이제 “교보 갔다 올게”라는 말만으로는,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을지언정 ‘무엇을 하러 가는지’는 알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음반, 다이어리를 구입하거나 학용품 혹은 생일선물을 사는 것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교보문고에 간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를 교보문고로 잡는 경우도 많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도 않을뿐더러 간단한 스낵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교보문고는 학생들과 연인들의 약속장소로도 활용된다. 책도 사고 음반도 사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결정적으로 서점은 돈 벌어서 좋고...


한편 이러한 대형서점들의 활약(?) 덕분에 동네서점들이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점 자체의 ‘복합문화공간화’에다 주변의 문화시설과의 지리적인 매개까지 가능하게 되면서 동네서점을 찾는 발길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동네서점의 개수는 서울지역만 하더라도 2000년 678개에서 2004년에는 413개로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지난 3월 22일 3000평 규모로 오픈한 잠실 교보문고에 대응하여 인근의 중소서점 상인들이 이익의 80%가 줄어드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20~30%의 책값인하(마일리지 등으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대형서점의 등장이 동네서점에 미치는 파괴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파괴적인 상황이야말로 ‘진실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대형마트에 대한 별다른 규제를 하지 못함으로써 지역의 재래시장이 줄줄이 문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형서점들의 시장 독과점에 대한 규제나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동네서점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대형서점의 입지조건이나 매장크기에 대한 제한 - 실제로 도서정가제 토론회에서 동네서점을 살리는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대안’은 완전한 도서정가제 실현보다는 서점 매장크기의 제한이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 등과 같은 조치들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우리는 대형서점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형서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대형서점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이윤의 사회적 환원 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독과점이란 게 결국 소비자에 대한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형서점의 사회문화적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와 규제를 통해서만이 대형서점과 동네서점이 공존하고 또한 ‘책’과 관련한 대중의 권리 - 접근에 있어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을 권리 등 - 가 증진될 수 있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독서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서점이 잘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책 읽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대형서점이 막대한 시장점유율을 기반으로 얻는 이윤의 상당부분을 독서문화진흥에 투여해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 베스트셀러 중심의 마케팅, 학습지 중심의 도서판매 등은 단기적이니 매출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현상으로 인해 출판문화의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국 중장기적인 매출하락의 위험을 서점 스스로 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도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양질의 도서가 유통될 수 있도록 대형서점 스스로가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책에 대한 접근이 차별받거나 배제된 계층의 사람들 - 저소득층, 도서지역 등 - 에 대한 문화복지 차원의 서비스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이른바 ‘복합문화공간화’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대형서점의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은, 말이 ‘복합문화공간’이지 실상은 상업시설의 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보문고를 비롯한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등 3대 대형서점들 모두 사실상 ‘다종문화상품판매전략’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영업전략을 주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돈 안내고 앉아 있을 공간도 부족한 것이 대형서점들의 현실이다. 따라서 가장 우선적으로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부담없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커다란 수고가 드는 일이 아니다. 책장 간의 간격을 더 넓히는 것만으로, 빈 공간에 의자를 놓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책을 위해 서점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문방구 어음’과 같은 전근대적인 유통 관행에 대한 개선 문제는 대형서점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문방구어음’과 같은 관행이 상존하고, 같은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도매가가 달라지는 불합리한 관행. 그리고 대형서점과 대형출판사에 의한 일방적인 계약이 성립하는 불합리한 거래로 인해 출판시장 자체가 교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형서점 스스로가 출판유통의 투명성, 공정성, 합리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서점은 책을 ‘만나고’ 또 ‘사는’ 공간이다. 이 단순한 정의 가운데 (대형)서점이 나아갈 방향이 있다.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 ‘책’과 ‘독자’를 중심으로 서점 내부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독서문화진흥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대형서점의 운영윤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오프라인 대 온라인, 대형서점 대 동네서점, 도서정가제 문제, 유통구조 합리화 문제 등 산적한 출판유통 관련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도 바로 ‘책’과 ‘독자’에 대한 고려를 전제로 한 출판 관련 주체들의 윤리의 복원과 이 주체들 간의 공존과 선순환을 위한 구조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 그런데 우리에겐 대형서점과 함께하는 미래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대형서점의 독과점적 존재를 전제한 대안 모색과 함께 영국의 헤이온와이(Hay-on-Wye)와 같은 전문화, 특성화, 집중화된 대안적 출판유통 모델을 고민하는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무리일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

 

*출판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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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를 위한 과제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를 위한 과제들

: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필요성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2005년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채용관련 금품수수 사건과 이에 뒤이어 터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뇌물수수 사건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의 위기와 한계에 대한 논쟁을 가속화시켰다. 민주성, 투명성, 도덕성이라는, 정권과 자본에 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무기가 되었던 가치들을 스스로 저버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현장 조합원을 포함한 대중들은 허탈과 냉소로 대응하였다. 또한 이로 인해 그 동안 노동운동 내부에 지속되었던 문제들 - 사회적 교섭 논란, 대기업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정파 간의 갈등문제 등 - 까지를 포함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한 전투적 노동운동의 성과가 96년 민주노총의 출범이라는 계기를 맞게 된 지 10년 만에 노동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10년 만에.


가히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할만한 지금의 위기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이 있다. 우선 현재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라는 점이다. 사실 이전에도 노동운동 위기론이 사회변동의 중요 고비마다 제기되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1991년~1992년 시기에 정치민주화와 경제 불황, 그리고 동구 사회주의 체제 몰락과 공안정국 등을 배경으로 노동운동 위기논쟁이 전개되었으며, 또한 1998년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심각한 위기진단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진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은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사회민주화의 핵심 추동주체로 인정받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 꿋꿋하게 노동정치로의 시민권을 확장해왔다.1)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노동 양극화’라고 이야기되는 대기업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격차 확대, 이주노동자 문제 등 새롭게 제기되는 노동 현안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임금투쟁을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 부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급격한 확대 등 민주노조운동 내․외부를 둘러싼 문제들로 인해 ‘과연 노동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핵심주체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위기 논의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해법 또한 사회운동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 - 사회운동 간 새로운 연대의 복원 및 형성 - 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급한대로 지금의 위기는 ‘사회변혁운동의 위기’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새로운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와 구심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운동 차원에서 위기에 대한 논의와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이는 새로운 사회운동 간 연대의 복원 및 형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사회변화의 흐름, 90년대 이후 성장한 시민운동의 역량, ‘작업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형성과정, 지속가능한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구축 등을 고려한 사회운동의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역’이라는 공간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기반 하에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통합적 사회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이는 노동문화운동의 변화, 혹은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연대 등과는 구분되는 문제의식이다(물론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를 기본적인 전제로 포함해야 하는 문제다). 즉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전략을 형성하기 위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요구하는 조건들을 검토하고, 이어서 재구조화의 방향과 원칙 그리고 구체적인 방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노동운동의 위기,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


작년의 비리사건으로 촉발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2)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현상적인) 접근으로는, 우선 노동조합의 조직률에서 확인 가능하다. 2002년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이 전체 임노동자의 11.6%에 그치는 가운데, 그 대다수가 300인 이상의 대기업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300인 미만의 노조 조직이 조합수로는 5,813개(89.3%)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조합원수의 22.0%에 그치고 있는 반면, 300인 이상의 대공장 노조는 그 수로는 10.7%밖에 안되지만 조합원수로는 78.0%를 차지하고 있다. 해당 사업체 규모별 노조조직 현황을 살펴보면, 300인 미만 사업체에 종사하는 전체 노동자의 2.8%만이 노조가 조직화되어 있는 반면, 300인 이상 대기업의 69%에 노조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임시․일용직의 경우 노조 가입률이 1.23%로 집계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률은 2.4%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조합의 조직적 보호는 매우 미흡한 가운데, 대공장 중심으로 기업별 노조활동이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3)


[표] 조직 규모별 노동조합 현황(단위 : 개소, 명, %)4)

구분

총계

49인 미만

50~299인

300~999인

1,000인 이상

조합수

6,506(100)

3,079(47.3)

2,734(42.0)

485(7.5)

208(3.2)

조합원수

1,605,972

(100)

52,895

(3.3)

299,803

(18.7)

219,557

(13.7)

1,033,717

(64.3)

*출처 : 노동부(2003)


비정규직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IMF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갈수록 늘어났고, 현재는 절반이 넘는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등의 노동조건에서 크게 차별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노동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동조합운동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이다. 특히 2004년 초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투쟁과 관련하여 결국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금속연맹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받게 되는 일련의 과정5)들은, 현재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가속화된 이른바 ‘사회적 교섭’ 논란 또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사회적 교섭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는데 있다. 즉 ‘사회적 교섭’을 제안하며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 자체에 대한 논의는 부재한 채, 노사정위 참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갈렸다. 그리고 이는 결국 2005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폭력사태6)로 결과하였다. 이는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민주적인 논의구조와 합의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밖에도 적절한 긴장과 상호 비판을 넘어서는 대립과 갈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내부의 정파문제나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부족한 대응, 앞서 언급한 노동조합의 비리문제, 그리고 임금투쟁을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노동조합의 활동의 부족 등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노동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전략 변화를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자와 노동자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들(작업장 안팎을 포함시키는)로까지 확장시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어떻게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에 대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는, 비단 WTO나 FTA의 문제 혹은 시장개방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신체, 의식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을 ‘경쟁’과 ‘효율’과 같은 자본의 논리로 지배하려 한다.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는 자본의 논리에 노동자의 일상이 구조화되면서 노동자 스스로 자본에 대항하는 저항주체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노동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절대적인 착취와 배제, 차별에 직면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부정해서도 안 될 문제이다. 하지만 주거, 교육, 의료 등의 영역에서 노동운동 스스로가 공공성의 확대 나아가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생활에서는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둔 채 자본의 일방적인 지배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며, 휴가 때는 스키와 골프를 즐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는 가운데 노동자의 일상과 의식의 자본의 소비패턴으로 조직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건강한 집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며 남녀노소 등 아무런 차별 없이 여유와 문화를 즐기고 창조하면서 사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며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20%만 잘 살고 80%는 불안해지는 그런 구조 속에서 잘 사는 20%에 진입하는 것도 아니다. 또 ‘똑똑하고 잘난’ 지배 엘리트들이 하자는 식으로만 끌려가는 삶도 아니다. 온갖 제도와 규칙들은 ‘공동체적 삶의 질’ 차원에서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논해서 바꿀 수 있어야 한다.7)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연대 혹은 연계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제안하는 문제의식은,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현상적인 대응을 넘어 노동자의 일상까지를 포함하는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데서 출발한다.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이 이제는 더 이상 상층에서의 선거나 합의, 현장과 동떨어진 총파업 투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현상적인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일상에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결연하게 맞서 비자본주의적인,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대안적 삶의 방식을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노동운동의 강화에도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공동체 마을을 이룬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다보니 자연스레 생태친화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반대로 생태친화적인 삶을 구성하려면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게 된다고도 한다. 공동체성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기초조직부터 튼튼하게 만들 것이다. 주요 공공영역에서 자본의 소비패턴이 아닌 공동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 상품 소비가 아닌 방식의 문화생활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 화석연료의 지속적인 소모가 아닌 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 등 더 많은 상품의 소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의 질 향상을 공동으로 상상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비단 노동운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노동운동에만 한정되는 문제는 아니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비자본주의적인 대안적 삶을 구축하는 문제는, 전환기를 맞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함께 논의해야할 문제이다. WTO 협상 체결이 눈앞에 닥쳐왔고, 한미FTA 체결이 2007년 상반기까지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 지역의 풀뿌리운동까지를 포함하는 사회운동의 전략이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질적, 양적 성장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생활체육, 문화생활, 생협 등 흔히 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사회운동의 전략 수립을 통해 사회운동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안세계화운동과도 연결되는 전략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 원칙과 방향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원칙과 방향을 대략 다음의 여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사회변혁운동 주체의 확장이다. ‘대기업 남성 정규직노동자’로 표현되는 노동운동의 주체를 노동자 ‘민중’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및 노동자 가족까지도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운동의 성격과 구체적인 실천도 상당부분 달라질 수 있다.


둘째, 확장된 현장성의 구축이다. ‘현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 노동운동의 현장을 ‘작업장 내’로만 한정하지 말고 ‘작업장 안팎’으로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노동자의 일상생활, 취미활동 등의 영역까지도 정치의 영역으로 포함시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모순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일상에서의 문화활동은 대부분 문화상품의 소비로만 한정되어 있고, 또한 주류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독해능력을 길러내고 대안적 문화활동을 조직하는 것 또한 노동운동의 ‘현장활동’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셋째, 새로운 사회운동 간 연대성의 강화와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이다. 주체의 확장, 확장된 현장성을 기반으로 사회운동 간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한 시민운동의 다양한 의제들을 노동운동에 반영하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통합적 사회운동을 실현해야 한다. 다만 ‘통합적’ 사회운동이라는 말이 조직의 통합, 혹은 이념의 통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 사안에 대한 형식적 연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연대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자기 운동의제가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형식으로는 오히려 수평적 네트워크의 구조가 적합할 것이다.


넷째, 지역성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연대성의 강화와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은 자연스레 ‘지역’이라는 공간과 사회문화적 관계망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현재 기업별 노동조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의 노력이 현실에서는 상층 중심의 협상이나 혹은 오히려 개별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반감시키는 경우도 있다. 종적인 노동운동의 질서 구축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횡적인 운동질서의 구축이라는 전제 하에 추진될 필요가 있다. 지역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연대운동의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의 운동의제를 자기운동의 과제로 삼고 실천적인 연대성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대한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산성 향상’의 파괴적 성격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노동운동 내부의 반생태주의를 극복하려는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삶의 질’,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문제가 상품의 소비가 아닌 스스로의 삶의 생태친화적으로 재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의 실천으로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여섯째, 노동운동의 공동체성을 복원해야 한다. 정권과 자본의 노동통제 전략에 의해 파편화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공동체성을 복원하여 노동운동의 기초를 탄탄하게 만들고, 지역의 공동체운동 또한 강화시켜내야 한다. 노동자 개개인이 분절화, 파편화되는 것에 맞서 동아리, 스터디모임, 써클, 동호회 등 작업장 안팎에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운동의 공동체성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들이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고, 이를 통해 지역의 주요한 현안에 대하여 발언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위한 방안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라는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읽혀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실의 투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의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전략적인 대안 모색을 강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라도 가능한 방안을 상상해낼 필요가 있다. 아래의 방안들은 현재 수준에서 상상 가능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 관련 고민들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실천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제안임이 사실이지만, 부족한 부분은 이후 사회운동 차원의 적극적인 논의와 실천을 통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상력과 함께 현장에서의 실천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사회운동진영 내부의 활발한 논의와 공감대의 형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재 제기되고 있는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성격 규정, 자본의 논리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자 주체 형성과정에 대한 평가 등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문화생활 패턴에 대한 조사 등 기초적인 연구 작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사회문화적 관계망까지를 포함한 연구 조사를 통해 이후 지역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실현이라는 과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연대성에 기반한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이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기존 연대활동의 관성에 대한 평가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생태적이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의 재구축을 위해 운동의제를 확장시켜내고 사회운동 간 연대활동을 강화시켜내야 한다.


두 번째로, 노동현장에서의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천해야 한다. 기존 투쟁의 보조적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향상과 새로운 공동체의식의 형성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기존 문예패 활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문화운동이 유의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능하였다면, 이제는 노동시간을 줄여내는 것 그리고 특근이나 야근이 아닌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동체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지역 차원에서의 사회운동 간 공동의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및 가족, 실업자 등 확장된 사회운동 주체형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여기에 지역의 사회운동 자원을 결합시킴으로써 대안적인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여성, 환경, 문화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흐름에 대한 교육,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프로그램,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길러내기 위한 문화강좌 등에 지역의 사회운동단체와 노동조합, 전교조, 문화활동가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통합적 사회운동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문화센터는 이를 위한 유효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역의 관련 시설 등을 활용한다면, 노동자문화센터를 당장에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즉 노동조합은 사람들이 밤늦게 찾아갈 수 있는 ‘개방선터’를 만들어서 모임장소를 제공하고, 서비스와 상품을 소개하며, ‘민중대학’이나 영국의 ‘지역사회센터’ 혹은 덴마크의 ‘생산학교’ 등을 본따 노동자들과 실업자들(과 그 가족들), 퇴직자들, 연금수혜자들, 사춘기 연령의 젊은 부모들을 위해서 교육과정이나 주제토론회, 영화클럽, 수리점들을 제공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보수를 받는 노동시간 이외에는 오직 소극적이고 지루함만이 있을 뿐이라는 낡은 관습적 생각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반박해야 한다. 또 노동조합은 상업적 소비문화와 오락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즉 노동조합은 애초에 자신들이 발생하게 되었던 협동조합과 결사의 전통과 노동자계급문화 서클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고, 또 자발적인 조직활동과 협동적 서비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수행할 공통적 이해가 걸린 작업계획에 대해서 시민이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광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8)


실제로 노동자문화센터와 같은 공간을 통해 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프로그램은 많다. 대구 성서지역의 경우, 이주노동자라디오방송과 같은 계기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발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철학강좌, 아줌마문화강좌, 지역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답사프로그램 등도 당장에 있는 사회운동 역량으로 충분히 시행 가능한 프로그램들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이나 미디어 기술의 대중적 보급은 좋은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노숙인 미디어교육과 같이 지금도 간간히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프로그램들이 노동자문화센터와 같은 계기를 통해 더욱 확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협과 같은 공동체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지역의 농민운동과도 직접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운동 간 접촉면을 넓힘으로써 통합적 사회운동을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이 밖에도 지역에서 가능한 많은 방안들을 상상해 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 문화권, 문화생활비, 그리고 문화센터 건립과 같은 문화적 요구를 담은 임단협 요구를 내걸고, 이에 대해 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캠페인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공공문화기반시설-학교 등을 연계한 공공문화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할 수도 있다. 또 지역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노동운동을 포함한 지역사회운동 차원의 공동대응을 확산시킬 필요도 있다. 노동운동의 경우, 기업별 혹은 산별 운동과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운동의제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회운동 또한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간 단축문제, 일자리 확충 문제 등을 연계한 적극적인 활동을 조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지역에서 노동조합, 진보정당 및 각 영역의 사회운동 주체들이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조직하는 일이다.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구체적인 프로그램까지 실험하고, 그 경험을 다른 지역으로 유통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에 대한 고민을 서술하였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문제의식은, 지금의 위기에 대한 ‘기술적인’ 대응이라기보다는 운동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다. 다만 충분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실천의 부족으로 인해 피상적 수준의 대안제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한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우리의 삶의 조건 전반을 자본의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단지 국제협약 문제이거나 혹은 작업장 내로 한정된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의식까지 해당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또한 삶 자체를 변화시켜내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안적인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함께 실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동자’, ‘지역’, ‘연대성’은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다. 종적이며, 또한 상층지향적인 운동의 패러다임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횡적이며, 동시에 현장지향적인 운동을 통한 근본적인 변화만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다.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 새로운 연대성에 기반한 사회변혁운동의 실천이 필요하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자세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실천이 요구된다.

 

* 이 글은 문화과학 45호(2006년 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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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밖으로 굽는구나... 동국대, 안되겠네~

 

_최준영 / 문화활동가 ptrevo@jinbo.net


이제는 존경심마저 생기려고 하는 우리의 황우석 선수. 기말을 맞아 네OO 지식검색을 들락거리며 레포트를 베끼고 짜깁기 하는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라’”임를 보여주며 연말 모든 언론의 1면을 특유의 연기력 물씬 풍기는 얼굴로 장식하였다. 덕분에 홍콩에서 1,000여 명이 연행되면서까지 WTO 각료회의 저지를 외쳤던 홍콩민중투쟁도, 집회에서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맞아 두 분이 사망하기까지 한 쌀개방 반대투쟁도 주류언론의 관심에서 비껴났으며, 모든 국민들이 사실은 잘 이해되지도 않는 줄기세포 번호나 ‘스너피’(맞나?)가 복제인지 쌍둥이인지에 대한 얘기만 들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장충동에 조용히 있던 동국대학교가 기어이 ‘일’을 냈다.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라는,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칼럼 때문에 - 그러면 북한이 왜 6.25 전쟁을 시도했을까를 생각해보자. 실수로? 그냥 한 번? 일본으로 가려다보니 지나가던 길이라서?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를 결정한 것이다. 내년 1월 초 이사회에서 직위해제가 확정되면 강정구 교수는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맡을 수 없게 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이놈의 학교는 왜 아직 형이 결정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해 총장까지 참가한 정책회의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일까? 검찰의 기소도 수업내용이 아닌 인터넷 칼럼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수업권을 빼앗는 어이없는 결정을 한 ‘정책회의’가 뭐하는 곳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총장에다 보직 교수 전원이 참가한 회의라... 다시 말해 “배운 만큼 배웠고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일 텐데,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보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면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상․표현․양심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강정구 교수의 사법처리를 주장한 수구꼴통 할아버지 9,000명과 같은 레벨에서 놀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최근 조선일보를 넘어서는 수구꼴통 신문으로 거듭나고자 ‘석간으로’ 고생하는 OO일보가 <강정구 교수 직위해제 늦었지만 당연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진작에 - 소위 만경대 방명록 사건 때 - 직위해제 시켰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고, 조금은 지난 일이지만 경제단체들이 동국대 학생들 취업제한까지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이 어떻게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도 않은 사건, 더군다나 국가보안법이라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된 악법에 의해 기소된 자기 학교의 교수에 대해, 교수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업권을 빼앗겠다고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눈과 귀를 막고, 또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어떤 민주적인 토론과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업권은 ‘수업을 할 권리’임과 동시에 ‘수업을 받을 권리’이기도 하다. 총장과 몇 명의 보직교수들에게 학생들의 수업권을 박탈할 권한은 없다.


‘지식의 상아탑’과 같은 현실에도 맞지 않은 낯간지러운 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대학이 사회의 여론과 특정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자신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수업권 - 이는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해당되는 권리다 - 을 놓아버린다면, 그 대학은 더 이상 존재할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동국대학교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직위해제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수업권을 교수와 학생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것만이 실추된 대학의 명예와 위상을 뒤늦게나마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한참이나 지나간 90년대 말장난으로 글을 맺어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북한산에 ‘어이’ 잡으러 가야겠다!” 장충동에서 잃어버린 ‘어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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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DOWN WTO ! JUNK WTO !

DOWN DOWN WTO ! JUNK WTO !

홍콩 시내에 WTO 해체의 외침이 울려퍼지다

_최준영 /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http://gomediaction.net


지난 12월 13일 제6차 WTO 각료회의가 홍콩에서 개막하였다. 12월 18일까지 계속되는 제6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전 세계의 ‘자유무역화’를 위해 각 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최종적으로 WTO 도하개발의제를 확정, 출범시키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예정이다.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 민중들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WTO가, 그 최종 목적지인 도하개발의제의 출범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WTO가 도하개발의제라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가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괴와 이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식량주권 문제, 빈곤 문제, 아동과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 문제, 교육, 에너지, 물, 문화 등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공공서비스에 대한 사유화 문제, 그리고 에이즈, 말라리아, 조류독감 등의 질병에 대한 저가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는 초국적 제약자본의 횡포 문제 등. 전 세계적인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의 심화가 바로 WTO와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이다.


한편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탄시키는 WTO 각료회의 때마다 각국의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해왔다. 99년 시애틀을 시작으로 칸쿤을 거쳐 이번 홍콩 각료회의 때까지 수만 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집결하여 ‘NO TO WTO’ 등의 구호를 외쳐왔다. 이번 홍콩 각료회의에서는 특히 한국의 민중투쟁단 1,500여 명이 참가하여 쌀개방 문제, 서비스협정 문제, 지적재산권 문제 등 WTO가 야기하는 민중생존권과 기본권과 관련한 이슈를 중심으로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WTO 저지투쟁과 관련하여 홍콩 경찰과 미디어에서는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선 한국민중투쟁단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제(13일) 있었던 해상시위와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루고 있다. 또한 TV에서도 한국 농민들의 투쟁이나 지난 아펙회의 저지투쟁 장면을 매우 자극적으로 편집하여 계속 방송하면서, 마치 한국의 민중투쟁단이 테러리스트인 양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WTO 저지투쟁에 대한 홍콩 미디어의 왜곡은 지난 APEC 회의 저지투쟁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집회에서의 분신과 농민들의 음독자살 등에 대해 ‘집회에서 감정이 격양되면 종종 일어나는 문제’라고 표현하며, 분신이나 음독으로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민중들의 생존권 등에 대한 언급은 배제한 채 이를 마치 시위문화인 양 다루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왜곡과 홍콩정부의 대응 - 홍콩정부는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저렴한 가격(지하철의 1/3)으로 운행하는 ‘스타페리’를 폐쇄시켜 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 으로 인해 홍콩시민들의 한국민중투쟁단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홍콩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중투쟁단과 전 세계 활동가들의 반WTO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抗議世貿!(꽁 이 싸이 무!, WTO 반대한다!)”와 “JUNK WTO”의 외침은 WTO 각료회의가 끝나는 18일까지 홍콩시내에서 계속 울려퍼질 것이다. 실제로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바라보는 홍콩 시민들의 모습은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과는 달리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와 ‘왜 WTO에 반대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 하는 모습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알려내고 결국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WTO를 해체시키기 위한 투쟁은 이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의 세계화, 대안세계화의 구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WTO, FTA 등 국제무역협정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고 이러한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전 세계 민중들과의 공유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메커니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 제6차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과 관련한 영상과 사진 등의 자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http://gomediaction.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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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APEC, 숫자의 스텍타클


전 세계 GDP의 57% 및 교역량의 46% 점유, 총면적 6,261만 ㎢와 총인구 28.1억 명으로 각각 전 세계 면적의 46.8%와 세계 총인구의 44.8% 차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y Cooperation, 이하 APEC)1)가 가지는 ‘숫자의 스펙타클’은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의 중요성을 대중들에게 홍보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APEC 회의 개최에 따른 관광수입 증가분이 2005년 한 해에만 3천만 달러에 이를 것이며 경제적 파급효과 - 국내총생산이 적게는 1억4천7백9십만 달러에서 많게는 2억5천5백6십만 달러까지 증가 - 또한 상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APEC 회의 개최지인 부산은 생산유발, 부가가치유발, 소득유발 효과가 6천7백억 원 가량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하였다. 경제 발전 논리에 기반한 두 번째 ‘숫자의 스펙타클’은 APEC 회의 성공 개최를 온 국민의 염원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숫자나 규모를 제시함으로써 APEC 회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리는 것은, 현실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일상에서 대중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APEC 회의는 ‘숫자의 스펙타클’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국제회의를 통한 이윤 창출이란게 사실 실제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또 그마저도 부산이라는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미디어의 APEC 회의 광고를 보거나 APEC 로고가 찍힌 산뜻한 색깔의 모자와 옷을 입은 경찰을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것과 같은 간헐적인 시각적 노출 이외에 별다르게 APEC 회의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대중들이 ‘APEC과 나(의 생활, 일상)’를 가장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지점은 테러위협의 일상화, 그리고 테러대비로 인한 일상의 위협 혹은 불편함이 아닐까 싶다. 즉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전후로 고조되었던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미디어를 통해 다시 부활하고 있고, 이에 따른 조치들 - 승용차 2부제, 회의장 주변 야산에 대한 입산금지, 검문검색 강화, 노점상 단속 등 - 이 속속 발표되면서 TV 화면으로만 접했던 테러에 대한 위협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회의장소가 있는 해운대 일대에 대한 교통통제 대책이 발표되었는데, 시내에서 해운대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모두 통제(봉쇄)할 것이라는 계획이 발표되자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APEC 회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이라도 가야겠다”고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한편 APEC 회의 개최에 대해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58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이하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지난 9월 7일 발족 기자회견을 갖고 APEC 회의에 대한 반대 투쟁을 선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APEC에 반대하는 10만 명의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세계화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WTO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국제기구의 회의 때마다 이루어졌던 반세계화 시위가 부산에서 재현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반대/파병반대 운동, 평택에서 진행 중인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쌀 개방 여부를 둘러싼 농민들의 투쟁, 노동시장의 유연화 및 구조조정으로 인해 심화되는 비정규직 문제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확산되면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을 APEC 회의를 계기로 결집시키고 이를 12월에 홍콩에서 있을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까지 연결시키는 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하지만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앞서 언급한 정부나 미디어의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혹은 10만이라는 숫자에 APEC 반대 투쟁이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여겨지는 것은 또 왜일까.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10만’이라는 숫자를 넘어 대중들의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기획된 문화운동 프로젝트이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실험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문화적 실천과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APEC 2005, 무엇을 논의하는가


다시 APEC 회의로 돌아와 보자.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통해 창설되었다. APEC은 1993년 1차 정상회의 개최 이래로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즉 APEC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 간 협력체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및 무역장벽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 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2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APEC 내에서의 포괄적이니 자유무역화를 완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회원국 중 선진국의 경우 2010년까지, 개도국의 경우 2020년까지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보고르 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고르 선언>의 실행을 위해 논의된, 3차 APEC 정상회의에서의 <오사카 행동계획>과 4차 및 5차 정상회의를 통해 제기된 15개 조기 자유무역화 분야의 선정 등을 통한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WTO 협상에 대한 지지는 APEC의 핵심활동’임을 선언한 7차 APEC 오클랜드 정상회의에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9년 시애틀에서의 WTO 각료회의가 무산되는 등 WTO를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세 번째 노력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APEC을 통한 무역자유화가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닌데, APEC의 틀 안에서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 싱가포르․뉴질랜드, 일본․싱가포르, 한국․일본, 일본․멕시코, 한국․칠레 등 - 이 계속되어 왔고 금융자유화 조치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2)


무역자유화와 관련한 몇 차례의 시도가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열리는 회의는 ‘WTO 체제의 출범을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APEC의 기본방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번 대회 의장국인 한국이 ‘반부패’ 및 ‘문화간 이해 증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추가하기도 하였지만, 의 역점과제3) 중 첫 번째 과제이자 핵심과제는 ‘무역자유화 증진’이며, 이는 지난 6월의 등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즉 오는 12월에 있을 WTO 홍콩 각료회의를 앞두고 열리는 이번 회의는 전 세계의 무역자유화 실현을 위해 APEC 참가국들의 결의를 모아내는, WTO 체제 출범을 위한 사전 회의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WTO 체제의 출범으로 대변되는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체제의 도입에 대한 문제점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금융세계화로 인한 외환위기의 위협,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과 거대곡물기업의 횡포, 유전자 조작식품의 위협, 제3세계 국가에서의 빈곤문제와 대규모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 생존의 위협,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 등. 이 뿐만이 아니다. 쌀개방 문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문제, 교육개방으로 인한 공교육 붕괴와 교육비 상승의 문제, 그리고 의료시장 개방으로 인한 의료보험체계의 붕괴 등은 당장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이기도 하다. 의 모토인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는, 그 실상을 볼 때 ‘(빈곤, 불평등, 차별이 확대되는) 공동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화영역에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인데,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 GATS)’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영역에 대한 개방화, 시장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GATS는 건설, 유통, 교육, 환경, 보건/사회, 금융, 관광, 운송, 문화 등 12개 분야의 시장개방에 관한 협상으로, 그 범위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공공적인 성격을 가지는 영역에 관한 시장개방 협상이다. 여기에 문화영역에 해당되는 시청각분야(영화, 음반, TV, 라디오 등), 뉴스에이전시를 포함한 오락/문화서비스 분야 등의 개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Protec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Contents, 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틀이 무역질서가 아닌 ‘문화다양성 협약’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국제적인 근거4)를 마련하였지만, 여전히 WTO 체제 출범에 따른 ‘문화의 상품화’ 및 문화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의 위협은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APEC 회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고 대테러 조치를 지지하는 등 미국의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9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이 채택되었고, 2003년 방콕 회의에서는 대테러조치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APEC 주요의제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3년 제11차 APEC 회의에서는 각종 정상회의를 통해 이라크 파병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APEC 회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미국 주도의 군사패권주의의 확산 및 강화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이번 APEC 회의는 WTO 체제 출범을 목전에 두고 열리는 만큼 그 국제적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회의가 실질적인 결정력과 구속력을 가지기는 힘들겠지만, WTO 체제의 출범에 대한 국제적인 흐름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아펙반대 국민행동>을 구성하고, 10만의 아펙반대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목소리가 11월 부산에서 전 세계를 향해 울려퍼질 전망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운동 단체5)가 참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조직된 가장 큰 이유는, 주류 미디어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APEC 회의에 대한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의 필요성6)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현재 주류 미디어 어느 곳에서도 이번 회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않고 있다. 이들 미디어에서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각종 경제수치와 대테러조치들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 이마저도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알려줌으로써7) 최소한의 판단 근거마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어떻게’ APEC 회의가 경제를 살리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APEC 회의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에는 수출이데올로기나 한류열풍과 같이 세계화의 양면성과 관련된 담론의 혼란이라는 측면도 존재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무비판적인 주류 미디어의 역할의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고 있는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운동 내 미디어․문화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제고하는 것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주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회운동 진영 내에서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역할과 위상이 크게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운동 내 미디어 혹은 문화와 관련한 실천은, 선전물 제작이나 문화제 기획, 문화예술인 섭외, 집회 생중계 등 매우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역할로만 인식되고 활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 - 인터넷 환경의 급격한 발달, 캠코더나 디지털카메라의 대중적 보급 등 - 는 더 이상 문화를 도구로서만 바라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사를 ‘직접’ 문화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물을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리는 행위, 직접 제작한 짧은 영상물이나 플래시 등을 유통시키는 행위 등은 이제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대중운동이 ‘대중조직만의 운동’이라는 비판과 오명을 벗고 명실상부한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에 근거한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최근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각종 실험들 -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활용한 ‘모블로깅’, 독립영화 제작 및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인터넷․라디오 방송 등 - 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기회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기간 기능과 수단으로서의 인식되어 왔던 미디어․문화행동이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사회운동 내 필요성과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중장기적으로 진보적인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의 미디어․문화 환경 변화는 수많은 개인들의 직접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활동가들과 잠재적 활동가들이 생산되었으며, 최근에는 부족하나마 공적인 지원을 통한 활동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보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은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이루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별 주체들의 활동이 개인의 실천으로만 머무르고 있고, 이를 공공적이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소통하는 것은 조직된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등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활동은, 진보적 미디어․문화콘텐츠의 공공적 형태의 소통과 이를 통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8)


100만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앞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정부와 미디어가 주도하는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된다는 것은, 제기되는 근본 목적은 다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대중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즉,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 속에서 10만에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이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운동의 목표는 조정될 필요가 있다. ‘열린’ 미디어․문화 공간을 통한 소통과 교류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0만 시위대’ 조직이라는 목표는 ‘10만’을 훌쩍 넘어야 하는 것이다. ‘100만이 참여하는, 그리고 전 세계 민중들이 동참하는’ 대중투쟁을 위해 미디어․문화행동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조직․홍보팀, 문화행동팀, 편성제작팀 등 3개 팀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먼저 조직․홍보팀에서는 전국의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에 대중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활동가 워크숍’, ‘반세계화 투쟁과 미디어․문화행동 토론회(RTV)’ 및 미디어․문화행동의 역사 및 사례에 대한 국제민중포럼에서의 미디어문화행동 포럼 등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결집을 유도하고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미디어․문화행동의 이론적, 실천적 담론을 생산할 것이다. 또한 2006년 1월에는 APEC 반대 투쟁과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 이후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평가와 이후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워크숍을 개최할 예정이다.

문화행동팀은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NO-APEC FESTIVAL’를 개최하였다. 부산영화제의 ‘아펙특별전’ 개최에 맞춰 진행한 행사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한 독립영화 상영, 해변 모래조각 등 전시, 문화공연 등을 진행하였다. 특히 이번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부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기획자, 인디밴드, 퍼포머 등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APEC 기간 중에도 문화공연, 퍼포먼스,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행동이 계획되어 있다.

편성제작팀에서는 10여 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9)를 통한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기획 중이다. 인터넷․라디오 방송은 기존의 집회 생중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운동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장애, 이주노동, 비정규직, 환경, 여성농민, 청소년 등 운동주체들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의 제작․방송과 공동체라디오운동 주체들이 참여하는 라디오방송 등이 준비되고 있으며, 다양한 반세계화 영상물의 인터넷 방송을 기획하고 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모바일 참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모바일 + 블로그 = 모블로깅’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혹은 사진전송 기능을 활용하여 이를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프로젝트로 투쟁 현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를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의 특징은 ‘보다 열린 공간의 구축’에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구축한 공간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들이 소통,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통상적인 홈페이지․게시판 문화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산된 미디어․문화콘텐츠의 홈페이지 게시와 방문자들의 소비라는 구분을 넘어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상호 소통과 교류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아카이브의 기능과 역할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 투쟁의 필요성


그 동안의 반세계화 투쟁의 ‘정형’이 국제회의 저지를 중심으로 한 시위 역량의 집결에 있었다면, 2005년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이를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국제회의’라는 ‘위를 향한’ 투쟁이 지금까지의 반세계화 투쟁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대중들의 ‘삶’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실천, 열린 공간을 통한 대중적 참여를 무기로 한 일상적 실천의 조직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조직을 통한 다양한 실험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이 조직된 대중들의 국제회의 저지투쟁에서 대중들의 삶에 근거한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확대․전화되어야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세계화 반대투쟁이라고 하면, 국제회의장 앞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 반대투쟁은 보다 일상적인 형태, 문화적인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민중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 및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축소, 경제적 삶의 기반 파괴 등 생존권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교육․의료․문화 등 사회공공영역의 축소, 소수 언어의 감소, 문화적 획일화로 인한 다양성 파괴 등 공동체 및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문화적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에까지 침투하는 자본의 논리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제 저항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저작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시스템 구축, 웰빙담론이나 한류열풍에 대한 비판적 이해, 생태적인 생활을 위한 삶의 방식의 재구축,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을 구축하는 문제로까지 반세계화 투쟁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대안세계화 운동을 고민하는데 있어 문화적 실천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화를 삶의 양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안세계화 운동은 곧 문화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말해,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인 담론․운동․콘텐츠의 생산과 소통이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당면 과제가 문화운동 진영의 주요 운동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이 끊임없이 기획되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생산과 소비의 확대 메커니즘의 굴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과학>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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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하지 말자, 제발

 

오바하지 말자, 제발

_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당황스런 시츄에이션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둘러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에 대해 검찰총장은 사퇴로 대응하고 9,000명 원로의 시국선언에다 박근혜 대표와 청와대의 팽팽한 말싸움까지. 한 마디로 당황스런 시츄에이션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 검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에다 재보선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힘겨루기까지 더해져 앞뒤를 재기가 힘들 정도의 판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들은 동국대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지 않은 학생이 대부분일 테고 강정구 교수의 수업을 듣기는커녕 강정구 교수가 자기 학교의 교수인지도 모르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인데, 느닷없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취업을 제한하겠다고 까지 나서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청년 실업 60만 시대인 지금인데...


이제야 칼럼을 읽다


평소 낮은 역사의식을 자랑하며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던 나에게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한국사에 대한 과격할 정도의 적극적인 관심은 당황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득불 ‘이제야’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찾아 읽어보았다. 문제의 칼럼의 제목은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로, 칼럼을 쓴 배경은 맥아더 동상허물기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통일전쟁 관련 부분은 미국와 맥아더에 대한 ‘보은론’을 비판하는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제 보은론을 본질적으로 따져보자. 만약 미국과 맥아더가 자기들 멋대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두 동강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과 형극을 겪었을까? 만약 6.25라는 통일내전에 외국군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전쟁피해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분단되는 비극이 지속될까?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물론 외세가 기원한 내전). 곧 당시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집안싸움이었다. 곧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 中(중)


한국사에 대한 내공의 부족으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평가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이 ‘구국의 세력’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는 판단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등. 이미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알아서 처신하지 못한’ 강정구 교수의 이러한 글은 경찰과 검찰을 자극했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논란은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를 넘어서 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칼럼 내용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닌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을 거쳐 체제 수호의 문제로까지 번진 지금의 상황은,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 9,000명의 원로 등 이른바 ‘구국의 세력’의 정치적 결집과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되고 있다.


통일전쟁, 그래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은 간단한 검색으로 ‘아직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음으로써 국가의 혼란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박근혜 대표와 9,000명의 원로뿐이다. 아직까지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고 좌경화되었다거나 좌경세력이 결집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고, 또한 강정구 교수 칼럼의 내용은 그 동안 진보적인 사학자들, 혹은 운동세력 내에서 일관되게 언급했던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강정구 교수 관련 논란을 활용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다시 칼럼을 보자.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이 논쟁의 출발점인 그 칼럼으로. 칼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먼저이지, 구속하고 구국의 결단 운운하는게 먼저일 수 있겠는가. 사회 분열과 체제 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의 눈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것들이 분열과 위기로 보일 뿐이다. 분단 이후 50년이 넘게 강요해 온 미국과 이승만에 대한 보은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신체를 구속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국전쟁이 북한의 통일전쟁이라고 말하면 어떻나. 아니라고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같이 말하면 그만이지. 광화문 사거리를 인공기 들고 뛰어다니면 또 어떻나. 무단횡단으로 벌금때리면 그만이지. 오바하지 말자, 제발.

 

*문화연대 <문화사회>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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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 노숙인 문화권 운동을 시작하며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들어가며 : 노숙, 해방, 문화


정의와 당위의 문제를 넘어서는 노숙인 문화운동의 실천이 무엇일까. 지난 1월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 이후 처음으로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고민했던 지점이다. 유목, 방랑, 자유 혹은 불결, 주정, 공포. 노숙과 노숙인에 대한 기존의 사회 관념은 어느 것 하나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힌트조차 주지 못했다.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노숙인 개개인을 분리 - 기존의 사회 질서로부터 노숙인 ‘집단’을 분리, 또한 노숙인 개개인을 서로에게서 분리 - 하여 고립시키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행동은, 주체로서의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그로부터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의 고민과 실천을 확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주체, 운동의 주체로서 노숙인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노숙인 운동을 이제는 ‘해방운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숙인 문제가 ‘재활’이나 ‘사회복귀’를 전제로 한, 이른바 평균적인 경제․사회․문화적 지표를 따라잡는 것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질서의 창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이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른바 ‘정상 이데올로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노숙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게 하는 ‘해방운동’의 운영원리와 실천을 문화와 문화운동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권, 노숙인 문화권


문화권 혹은 문화적 권리는, 사실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워낙에 ‘소비’를 통해 문화적 행위를 하는데 익숙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문화생활을 경제적 문제 해결 이후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여기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웰빙’ 담론이 몸과 건강 그리고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이러한 관심은 경제적․공간적․신체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공적인 문화생활의 향유가 아니라 수십만원 대의 용품을 사야지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노숙인 문화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일 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화권은 문화(생활)에 대한 자유권, 평등권, 참여권 등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문화생활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주거가 일정치 않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빈곤하다는 이유로 최고한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기본권으로서 문화권의 위배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공공영역의 확대를 통해 노숙인의 기본적인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 - 공공문화기반시설 문화프로그램에의 참여 보장 및 유도, 문화바우처제도의 확대, 사회교육의 확대 등 - 이 적극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문화권을 정의하고 문화운동의 실천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국가정책적 차원 혹은 문화복지적 차원의 실천을 전제로 하되, 이를 넘어서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실천이 고민되어야만 한다. 노숙인의 정체성에 기반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문화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 참여나 교육, 관람이 아닌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문화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그것이다. 요구나 당위의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획득하는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가야 한다.


노숙인 문화행동의 시작과 평가, 이후 계획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가칭)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이, 앞서 언급한대로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문화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취지에 전적으로 부합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해방운동’으로서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다짐하면서 지난 활동을 돌아보자.


3월 문화행동.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진행하기로 한 문화행동의 첫 시작이었다. 서울역에서의 간단한 공연과 영화상영으로 기획된 첫 번째 문화행동은, 말 그대로 조금 ‘서툴렀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서울역 등에서 문화행동을 진행해 온 노숙운동단체에 비해, 문화연대의 경우 처음으로 노숙인들과 대면하는 자리여서 긴장했던 탓일까. 준비부족으로 행사가 지연되기도 했고, 영화선정의 문제 - <슈퍼스타 감사용>의 선정과정과 내용에 대한 문제 - 가 평가되기도 했다. 주되게는 결국 노숙인 당사자들을 ‘행사참여자(객체)’로 만드는 형식의 행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4월. 이번에는 영등포공원에서의 공연이었다. 장소대여와 관련하여 시설관리공단에서는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소를 불허하였고, 행사는 강행되었다. 전기 사용을 위해 벌어졌던 해프닝 - 결국 발전기를 급하게 대여하면서 마무리 - 과 시설관리공단의 ‘고발’ 운운에도 불구하고, 노숙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참여로 빛난 공연이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춤 공연, 당사자모임의 노래공연, 그리고 참가자 모두가 함께 진행한 타악퍼포먼스는 행사기획자, 참가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5월에는 감리교신학대에서 감신대 노래패의 노래공연과 함께 독립영화를 상영했다.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 <상암동 월드컵, ‘사람은 철거되지 않는다’>라는 두 편의 독립영화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했다.


지난 세 차례의 문화행동을 그 자체로만 평가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개별 행사의 규모, 예산, 기획과 집행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동의에서 출발한 만큼 준비부족으로 인한 평가의 지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 4, 5월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정말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중장기적인 문화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 삶의 주체로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화행동의 목적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숙인 문화행동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 게스트로 참여한 사람 모두 매우 만족해하는 행사라는 점이다.


‘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의 이후 계획은, 노숙인 농활지역에서의 영화상영(6월)과 이후 <문화워크샵>을 통한 문화행동으로 잡혀있다. <문화워크샵>은 지난 활동 평가를 통해 노숙인 스스로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중장기적으로 노숙인 스스로가 조직화되는 것이 노숙인 운동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획되었다. <문화워크샵>의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7, 8월 - 9월부터는 미디액트의 지원으로 <노숙인 영상활동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계획 - 두 달의 기간 동안 마술, 미술(치료), 음악, 요리, 사진 등의 워크샵이 진행될 예정이며, 두 달 동안의 ‘야심만만한’ 워크샵 이후에는 발표회, 전시 등의 문화행동 또한 기획 중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조금 앞서가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민해보자. 아니 이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노숙인 재활 혹은 자활의 목적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에 있는지. 그래서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 질서로 편입되는 것에 있는지를. 물론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노숙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구축마저 미흡한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동시에’ 고민되어야 하는 문제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은 이러한 자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집을 구하고 취직을 하라!”라는 구호에 대해 왠지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노숙인의 존재적 특성, 정체성은 주거의 불안정성과 함께 스스로 조직해야 할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노숙인은 일상적으로 적게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적 특성에 기반한 운동도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정부, 기업, 언론이 자극하는 소비자본주의적 삶의 지표를 거부하면서도 더 건강하게, 더 의미있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공동체운동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거, 생활, 교육 등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집단과 공동체의 역능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많은 실험적인 공동체운동이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운동은 개인, 가족단위로 분화된 주거, 모든 생활의 영역이 시장질서에 편입되면서 악화되는 생활․환경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주거, 육아, 교육 등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나가는 대안적 삶의 운동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라는 표현은, 이러한 공동체운동에 착안하여 노숙인 스스로가 공동으로 주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또한 함께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도달 불가능한 ‘이론적인’ 목표라고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교육 등과 관련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적극적인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화공동체운동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실시 예정인 매입임대주택 사업을 통해 노숙인 문화공동체운동의 모델을 고민할 수 있다. 즉 매입임대주택 입주자들의 문화공동체운동을 통해 문화예술프로그램, 교육프로그램, 공동육아 등을 관련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연계하여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을 거점으로 학교,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문화의 집 등과 연계한 프로그램도 기획할 수 있겠다.


글을 쓰고 보니 겨우 몇 차례 문화행사의 경험으로, 그리고 아직 운동의 현장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해 상상해 본 것이라 매우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리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모쪼록 지속적인 문화행동이 노숙인 당사자 분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나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를 통해 나 자신의 고민 또한 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실노협 기관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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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문화행동'을 시작하며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먼저 솔직한 고백부터 하자. 지난 1월 22일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과 집단행동이 있기 전까지 노숙과 노숙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울역 사망사건에 대한 인터넷에서의 악플들 - “노숙자 인권 이전에 시민의 인권과 안전부터 고민해라!”, “게으른데다가 술 먹고 행패부리는 노숙자에게 무슨 인권이냐?”와 같은 - 을 보며, 노숙인에 대해 평소 무의식중에 가졌던 생각을 떠올리며 섬뜩함을 느꼈다는 사실을. 문화연대가 <노숙인 사망사건 실태조사와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연대모임>(이하 <연대모임>)에 참가하게 되고 또 ‘노숙인 문화행동’을 고민하게 된 것도, 사실은 노숙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가졌던 이 같은 선입견과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면서였다.


노숙의 문제는 온갖 사회문제가 집약된 결정체와도 같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 강화되는 빈곤과 민중생존권의 문제, 저소득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및 건강권의 문제, 차별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교육의 문제, 문화적 소외와 배제의 문제 등. ‘IMF 극복’이라는 선언 이후 ‘2만불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빈곤계층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계급계층간 차별과 갈등만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모순의 최극단에 노숙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말해 이러한 사회 구조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숙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 문제를 다루는 정부와 언론의 태도는 전형적인 ‘피해자 때리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거리노숙인의 특정한 행위를 부각시켜 거리노숙의 모든 책임을 ‘다시’ 노숙인에게로 몰아가는 가운데,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사회 구조의 문제나 정작 필요한 응급지원체계의 문제, 노숙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복지․의료․주거정책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시민 對 노숙인’이라는 피지배계급 내부의 갈등만이 부각되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고 있다.


문화연대가 <연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주되게 고민한 지점이 바로 이른바 ‘시민 對 노숙인’의 갈등구조의 극복 문제이다. 즉 노숙과 노숙인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시민 對 노숙인’의 갈등구조(의 방치와 조장)이며,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이런 갈등구조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숙인 문화행동’을 통해, 게으르고 낮부터 술 마시며 행패부리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노숙인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은 감성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자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숙인 정책의 방향과 노숙인 운동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 또한 존재한다. 즉 현재와 같은 복지정책의 체계 - 가구 중심의 지원정책, 국민등록제도에 기반한 복지정책, 저축과 취업의 요구 등 - 로는 근본적으로 노숙인에 대한 ‘관리와 통제’라는 정책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노숙인 문제 해결의 핵심은 ‘자활’이나 ‘사회로의 복귀’가 아니라 노숙인의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노숙인 개개인의 삶의 질의 문제에 있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이 사회구성원의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거리에서도, 쪽방에서도, 쉼터에서도 그들의 건강권, 교육권, 문화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며, 오히려 이렇게 노숙인 개개인의 삶의 질이 보장된 이후에 ‘자활’과 ‘복귀’도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노숙인 운동 또한 주거문제를 중심으로 한 근본대책의 마련과 함께 현재 노숙인의 ‘삶의 질’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노숙인 문화행동’은 노숙인의 문화적 권리 쟁취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한 해 동안, 그 동안 지속적으로 노숙 현장에서 운동을 해 온 많은 분들과 함께 올 한 해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진행할 것이다. ‘노숙인 문화행동’과 같은 정기적인 문화행동 프로그램이 인권, 시민권, 기본권이 박탈당한 채 사회에서 배제된 노숙인 문제에 대해 사회운동적 차원의 연대감 형성과 함께, 노숙인 당사자 간의 소통과 교류를 확대하고 나아가 노숙인 운동의 주체를 확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역에서 사망하신 두 노숙인 당사자 분들을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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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展> 스케치: 아주 타당한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국보법은 비단 표현을 업으로 삼는 우리 미술인 뿐 아니라, 오만가지 표현에 의존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오늘날, 그 의사소통의 근거인 ‘표현’과 ‘자유’를 범법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현행법으로 존속하는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나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이번 전시의 성격은 국보법이 우리 삶의 ‘안전을 위태하게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느껴서, 그 위기감에서 벗어나 우리들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시국선언’임을 밝힌다.” - 반이정 (전시기획자)

지난 10월 15일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전시실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라는 작가 12명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시국선언展>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법조문을 넘어서 개인과 공동체의 ‘타당한 자유와 권리(표현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 인권 등)’를 억압하는 상징체계로 자리잡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작가들의 기억과 고민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참여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국가보안법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도 있다.

전시장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재료로 한 작가 12인의 재기발랄하면서도 솔직한 표현과 상상력을 접할 수 있다. 어렸을 적 한두 번은 받아봤음직한 ‘반공그리기대회’ 상장을 소재로 한 김태현의 작품 <개같은 내인생>, “이념은 색칠하기 나름이라”며 국가보안법의 ‘색깔씌우기’를 비판하고 있는 노순택의 작품 외에도 옥정호, 최경태, 조습, 반이정, 김학량, 김형석, 이제, 최진욱 등 작가들 모두가 국가보안법과 국가보안법이 상징하는 한국 사회의 억압을 비틀고 또 반문하고 있다.

이 중 ‘학교사수단’과 김형석의 작품은,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작품으로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교과서 제목을 고치던 학창시절을 기억을 되살려 준 ‘학교사수단’의 작품 <굼벵이의 보행법>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논’ 중학생들의 상상력을 접함과 동시에 직접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국가보안법”이 “곰~결혼하자”나 “즐겨라 본드의 향긋한 냄새를”로 바뀌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김형석의 작품 <모두 함께 주술을 풀어나가요>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주술을 푸는 ‘대못’을 국가보안법에 꽂아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대못을 박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번 주 토요일(23일)이면 전시가 끝나게 된다. 늦었지만 전시장에 꼭 들러 12명 작가들의 상상력을 확인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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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얘기는 이렇다. 1948년 제정된 이래 56년 동안이나 전국민을 억압해 온 악법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눈앞에 와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폐지’를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되, 그 동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온 수많은 민주세력과 국민적 여론이 그 결정적 배경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한켠으로 치우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0월 4일 시청앞 광장에 모인 10만의 인파로 증명된, 국가보안법 사수를 위해 몸부림치는 세력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 빨갱이 천국 => 나라 망함’이라는 논리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하는데 성공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길거리에 인공기를 들고 뛰어다녀도 잡아들일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람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하고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가보안법 폐지를 ‘현실적 조건’에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성 싶다. 요약하자면 ‘폐지를 전제로 한 유연한 대처(?)’라고나 할까. 어쨌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유와 목적이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쪽으로 당론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과도 유사하다. 열우당은, 우익들의 극렬한 반발을 고려함과 동시에 ‘실질적 폐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만큼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정치적으로 승리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그리고 별 것 아닌) 내 경험에 근거해볼 때, 국가보안법은 ‘그냥 없어져야할’ 법일 뿐이다. 국제적인 흐름이나 유엔의 권고 등 국가보안법 폐지의 근거로 제기되는 수많은 사실들을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유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만 접속해보자. 인터넷 사이트를 조금만 둘러봐도 이른바 ‘이적표현물’은 널려있다. 마음만 먹으면 북한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고, 그들의 주장을 접할 수도 있다. 요컨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국가보안법은 오히려 ‘악법이기보다 현실적으로 유효성이 없는 법’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절대 사수를 외치는 우익의 주장을 고려하여 대체입법, 형법보완 등을 검토하는 것 또한 나에게는 ‘현실성 없는 모색’에 불과하다. 국가보안법은 존재 자체가 넌센스인 법일 뿐이다.


또 같은 이유로 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라는 주장 또한 이번 싸움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슬로건이라고 생각한다.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는 대략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던 내용을 형법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일텐데,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으로 야기된 억압과 탄압을 인정, 지속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형법으로 대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이유라기보다는 우익들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 수사라고는 믿고 있지만,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그 법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이데올로기를 모두 소멸시키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번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당장에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의 명칭을 없애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정치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공기를 들고 뛰어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게 뭐 어때서?’라고 이야기하고 논쟁하자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의 실질적, 실천적인 폐지를 위한 싸움. 당당하게 ‘완전 폐지’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하자.


<참고 :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국가보안법 폐지 문화주간 삐이라’에서 발췌)


- 수학적이지 못한 법이군요 : 피타고라스

- 그 법 좀 저리 치워주시겠소? : 디오게네스

- 국가가 병들만한 법입니다 : 히포크라테스

- 지옥에 온 기분입니다 : 단테

- 나비의 법입니까, 인간의 법입니까? : 노자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법이군요 : 비트겐슈타인

- 입체적인 법은 아니군요 : 피카소

- 외계인의 음모입니다 : 멀더

- 박제가 되어버린 법을 아시오? : 이상

- 상상할 수 없는 법이군요 : 존 레논

 

* 이 글은 민예총 일일문화정책동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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