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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할 땐 책상청소를...

TV에서 '열대야'를 언급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바람이 거의 통하지 않는 내 자취방에서의 취침이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사무실에 새벽같이 나와서 밤늦게 들어가는 것이 생활화되어버린 요즘이다.

 

 

오늘도 7시가 채 되기 전에 사무실에 나와서 별안간 책상청소를 했다. 책상정리하기 전에 사진도 찍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쩝.

 

어쨌든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데 책상청소만큼 좋은 것은 없는 듯...

 

 

잉... 찍어놓고 보니깐 그리 깔끔해보이지도 않구나...ㅠ.ㅠ


 

내 책상에 살고있는 고냥들...과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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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4기 서울시, '민선3+1기'에 그칠 것인가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chobari@gmail.com

 

*참여연대 '참여사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의 선거판이 언제 정책선거였던 적이 있었겠냐마는, 이번 5.31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정책의 실종, 정치의 과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무능에 대한 대중적 심판은 ‘확실했다’. 역대 최저 투표율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날려버리며 5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은 ‘커터칼 테러’의 바람을 타고 ‘부패정당’에 대한 극단적인 몰표로 결과했다. 이제 “2-가 후보 중 떨어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한국 지방선거의 역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충분히 예상되었던 대로, 서울시장 선거의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거 세몰이의 정점이자 지방선거 최대 관심사였던 서울시장 선거에 대비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모두 ‘외부인사’라는 카드를 뽑고 전력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오세훈 후보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한나라당이 25개 기초단체장을 싹쓸이하고 서울시의원 106석 중 102석을 장악하기까지 했으니... 한나라당 스스로에게도 머쓱할 수밖에 없는 선거결과에 대해 ‘일당독재’ 운운하는 세간의 평가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민선4기=‘민선3+1기’?


지방선거에서의 ‘정책의 실종’은, 서울에서는 전임 이명박 시장의 개발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평가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채,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은 선거 시기 ‘뉴타운 50개 건설’, ‘청계천 남북간 4대축 거점지역 특성화’, ‘도심재개발의 본격적 추진’과 같은 본격적인 개발공약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제시하였고, 결국 “3달 준비하고 1달 선거해서 당선됐다”는 급조된 시장에게서 이명박식 개발사업의 ‘재방송’을 감지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발주의에 대한 우려는, 한양주택1)에 대한 오세훈 후보의 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은평뉴타운 개발계획에 포함되면서 전면철거될 위기에 처한 한양주택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선거 기시 각 당 후보들에게 한양주택 재개발계획을 철회할 것을 약속하라는 공개질의서를 발송하였다. 하지만 오세훈 후보는 “...뉴타운지구로 결정된 만큼 일관성을 유지하되, 뉴타운 사업시 생태마을로서의 기능을 보존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며 사실상 한양주택 재개발사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100일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시청 앞에서의 1인 시위, 서울시와 SH공사에 대한 끊임없는 항의, 국가인권위원회, 고충처리위원회 등에 대한 진정, 기자회견, 집회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데 힘겨워하던 주민들의 마지막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오세훈 후보 개발공약의 문제점


이 밖에도 오세훈 후보의 많은 공약들이 ‘개발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뉴타운 50개 건설’ 공약이 대표적이다. 뉴타운 개발은, 강남북균형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강북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부동산 투기만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삶과 권리, 그리고 잘 보존된 자연이 대대적으로 파괴될 위험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의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전면 철거와 아파트 건설만을 강요하면서, 실제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삶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뉴타운 개발 이후 원주민의 재정착률이 채 10%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서울에 뉴타운이 50개 생긴다면, 서울 전역이 공사판이 되고 부동산 투기만 악화시켜 저소득층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국립극장~남대문 수변공원 및 복합문화공간조성’의 경우, 서울에 이미 존재하는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및 구 단위 문예회관 등 기존 공연시설의 활용도가 극히 낮은 상황에서 또 다른 공공공연장을 짓는다는 계획보다는,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고 콘텐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세운상가 재개발도 마찬가지이다. 세운상가 철거를 통해 지하 복합문화공간 및 지상 녹지공원으로 개발하고 남산-도심-종묘로 연결되는 녹지벨트를 조성하겠다고 하였으나, 지하기피현상으로 인하여 현재에도 을지로, 종로3가 등 기간 조성된 서울시내 지하시설에 대한 활용성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한다면, 적절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청계천 주변부에 상품소비형 시장 및 경제활동 활성화를 위한 임대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도시개발 계획이라는 점에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귤맛이 난다”는 오세훈 서울시장. 하지만 후보시절의 공약과 최근의 행보 - 노들섬예술센터 건립 재추진 등 - 를 볼 때, “귤맛은 날지언정 탱자는 탱자일 뿐”이라는 판단이 아직은 옳은 듯하다. 민선4기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이 ‘리틀 이명박’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을 지,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비판과 감시가 필요하다.

 

1) 1978년 조성된 한양주택은 도심자락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통일로 입구에 있는 단독주택단지이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한양주택은, 처음 조성되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으로 강제이주된 주민들은, 1996년 서울시가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한양주택을 선정할 정도로 이곳을 변화시켰다. 길 양쪽으로 차를 주차하고도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충분할 정도의 널찍한 골목길, 집집마다 가꾼 자그마한 정원, 담장을 대신하고 있는 낮은 울타리, 마을 곳곳을 빼곡이 채운 꽃과 나무들을 보며, 이제는 많은 전문가들이 한양주택을 ‘생태주거단지’로 평가할 정도가 되었다(http://cafe.naver.com/foreverhy.cafe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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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월드컵과 광장문화

*중대대학원 학보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호혜적, 선순환적 관계성의 복원․생성과 광장문화는 가능한가?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대한민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다. 2002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흥분의 월드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6년의 두 번째 월드컵은 아마도 ‘비장한 월드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가미가제 출정식을 연상시키는” 붉은 응원리본과 락버전으로 되살아난 ‘애국가’, 그리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광장을 찾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응원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 이런 광경을 보며 월드컵과 거리응원에 대한 흥분과 기쁨보다도 오히려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 아니 결승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범국민적 국가주의․애국주의에 기반한 ‘비장함’을 더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월드컵 반(反)광장문화?


한편, 2006년 월드컵 응원문화는 2002년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장문화의 부재’다. 2002년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의 실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이따가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당장에 평가전이 열리는 시청 앞 광장으로 가보자. 2002년 거리응원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겨난 시청 앞 광장. 앉아서 축구보기 딱 좋을 것 같던 잔디광장은 질서 유지를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구획되었고, 음주와 질서문란 등을 막는다는 이유로 배치된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은 정해진 곳으로만 다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을 보며, 정해진 규칙에 맞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더 이상 거리응원의 에너지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장문화가 부재하다”는 말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분할과 그 속에서의 자율성의 침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광장에서의 소통이 일방향으로 또한 위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들은 국가-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에 의해 점령당한 광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록 현란한 스펙타클을 소비하며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무대와 화면에 집중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객체’로 전락하고, 이로 인해 몸은 광장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문제인 것은, 4천만 모두가 ‘붉은악마’가 되고, 붉은 티셔츠를 입어야만 광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정체성으로 인해, 즉 ‘내부성’과 ‘순수성’에 기반한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다른 집단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월드컵 반(反)광장문화’가 만들어진다는데 있다.


광장open space, 열린 공간


‘광장’이란 말 그대로 ‘open space’ 즉 ‘열린 공간’을 말한다. 특히 ‘광장문화’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우리는 ‘광장’을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가 발생하는 곳, 다시 말해 공동체 구성원 간의 ‘관계성’이 발현되는 곳(공간, 지점, 계기)으로 ‘광장’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광장이 없었다”라는 말은 이제 기각시킬 수 있다. 어렸을 적 동네 꼬마들이 뛰놀던 공터, 시장 한 켠 약장수가 약을 팔며 차력을 하던 시장터가 바로 ‘광장’이고, 또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상을 나누던 평상이 바로 ‘광장’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열린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월드컵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과 교류, 선순환적인 관계성이 복원-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회문화 연구자들이 한국 사회 변화의 동력을 읽어내면서, 87년 이후 상실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재현을 꿈꾼 것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했다.


이는 한편으로 구체적인 공간에 대한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공간이 사회마다 다르며 또 이질적”이라며 공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고 했던 뒤르켐의 말처럼, 한국 사회 토건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며 도시민의 삶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형태로 조직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재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한 계획이 제출되었다. 권력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세종로 일대에 문화시설을 배치하고 광장을 조성하자는 계획은, 2002년 당시 확산되었던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공간-문화 전략으로 자본주의 하 도시공간에서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한 기획이었다.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


하지만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출발한 문화적, 미학적 상상력은, 결국 정치-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이라는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의 프리즘에 굴절되고 말았다. 효순, 미선이의 죽음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다시 한 번 광장문화가 소생하고, 이후 대선과 파병, 탄핵 등 주요 정치적 계기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광장)로 모였지만 결국에는 정치, 자본, 미디어의 힘 앞에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청 앞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잔디광장과 촛불의 힘으로 당선되었다는 노무현 정권의 실망스런 모습뿐”이라는 자조섞인 한숨이 결코 과장은 아닌 듯하다.


시청 앞 광장을 잔디로 만들어 자유로운 출입을 막고(“잔디를 보호합시다!”), 광장 사용 ‘허가제’를 도입하여 진보진영의 집회를 원천봉쇄한 정치-권력. 2006년 월드컵 자본-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SKT가 150여억 원으로 월드컵 기간 내내 광장 사용권을 독점한 채, 경비용역업체까지 동원하여 광장을 구획, 관리하며 거리응원을 쇼케이스로 만들고 있는 상황. 그리고 3․1절을 ‘축구절’로 만들며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월드컵 보도로 막아버린 미디어-권력. 이들 3주체가 장악한 광장문화로 인해, 오히려 월드컵 거리응원과 광장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할 ‘시민/다중/인민의 권력’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광장, 2006년 월드컵과 광장문화 재현의 가능성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소실되었던 광장문화를 복원․생성할 수는 없을까? 2006년, ‘open space’에 걸맞는 ‘open mind’의 재현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치, 자본, 미디어 등 월드컵을 장악한 반(反)광장문화-권력에 맞선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광장문화의 복원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다분히 상상불가능한 기획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3패로 예선탈락했으면 좋겠다”는 류의 부정과 무시의 전략으로는, 이주노동자들마저도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폭주와 국가주의․애국주의의 문화적 영향력과 위험을 감당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문화’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행동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광장문화’의 민주주의적 전유의 가능성이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관계성의 복원에 있다고 할 때, 월드컵이라는 ‘광장’에서 닫히지 않은, 배타적이지 않은, 타인과의 호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건과 계기, 소통을 만들어야 한다. 월드컵에 대한 탈근대적, 탈자본주의적 문제제기와 함께 한미FTA와 평택평화항쟁, 비정규직과 사회양극화, 이주노동자,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소통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찾을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광장의 복원, 즉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복원(잔디광장 리모델링, 세종로 문화광장화 등)과 민주적 소통을 위한 광장 운영의 복원, 그리고 자본에 의해 장악된 광장의 시민적 재전유에 대한 실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FTA반대 골세레머니’를 기대할 수 없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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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로사진2

돼지고양이라고 놀림을 받기는 하지만, 인물 하나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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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주택, 공간에 대한 변혁적 상상력의 시작?

 

한양주택, 공간에 대한 변혁적 상상력의 시작?

_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chobari@gmail.com



뒤르켐은 “공간이 사회마다 다르며 또 이질적”이라고 했다. 공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주니족’이라는 인디언 부족의 예를 든다. 뒤르켐에 따르면, ‘주니족’은 공간을 동서남북과 천정, 천저, 중앙 등 7개 지역으로 나누고 그들의 사회적 관계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7개 공간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람과 공기는 북쪽, 물과 봄은 서쪽과 같은 식으로. 여기에는 새나 식물, 혹은 생명의 에너지도 포함되는데, 즉 북쪽은 펠리컨과 두루미, 파괴의 지역이라는 식이다. ‘주니족’에게 공간은 현실의 경계와 상관없이 무한하게 확장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뒤르켐이 말한 공간에 대한 사회적 관계의 우위가 ‘2006년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에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서울은 공간에 대한 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공간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토건자본주의’라고도 말해지는, 개발자본과 관의 결탁을 통한 이윤창출의 메커니즘은 이명박 시장의 뉴타운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재현으로서의 ‘신개발주의’로.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도시공간’ 속에서 그 구조적 모순에 대한 각성 혹은 계급실천은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한양주택이라는 공간과 이를 둘러싼 싸움을 통해 공간에 대한 미학적, 대안적 상상력이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한양주택은 어떠한 곳인가. 은평구 진관내동 440번지 도심자락의 끝 통일로 입구, 북한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방호벽’보다도 북쪽에 한양주택 220여 가구가 들어서 있다. 똑같은 모양으로 생긴 단층 양옥단지인 한양주택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관계 속에서,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북의 대표단이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에다 ‘보여주기식’ 주택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탄생하게 된 한양주택단지를 정작 지금과 같이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주거단지로 조성한 것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한양주택으로 강제이주된 주민들은, 박정희식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도 말해지는 똑같은 지붕의 양옥집들에 개성을 불어넣어 ‘사람이 사는 동네’로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 1996년에는 서울시가 선정한 제1호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덩그러니 존재하던 시멘트 건물이 부족하나마 많은 사람들이 ‘생태주거단지’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2003년, 서울시와 SH공사가 한양주택 지역을 포함하는 은평뉴타운 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양주택 주민들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시와 SH공사에 대한 진정과 항의, 100일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1인 시위와 집회 등. 이명박식 ‘신개발주의’에 맞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주민들 간의 커뮤니티가 강화되고 있으며, 또한 주민들이 개발을 통한 자본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을 자발적으로 체득하고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생산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성격과 잠재력이 한양주택 재개발반대 싸움으로 점차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양주택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양주택 자체의 문제를 넘어 확장된 시민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하는 등 정치적으로 그 관심과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 하 도시공간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형태로 조직된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의식 또한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공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한양주택 싸움은 단순히 재개발과 연관된 싸움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양주택에서 새로운 방식의 비자본주의적 삶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고,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적인 사회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운동 차원의 기획이 요구된다.

 

*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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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월드컵이 ... ... 우리를 부른다.” 2002년 ‘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되찾아주었던(?) 월드컵이 2006년 다시 우리를 TV 앞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2006년의 월드컵은 2002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오대영’이라는 오명과 함께 기대반 의심반으로 시작된 2002년 월드컵이 결국 자발적인 광장문화의 형성이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으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냈다면, 2006년의 월드컵 광풍은 온 국민을 붉은악마로 호명하면서 국가적인 동원체계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에서의 ‘꼭짓점 댄스’나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팀의 4강 진입은, 이러한 월드컵 광풍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자, 다시 첫 번째 문장을 보자. “월드컵이 (자본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른다.” SKT는 145억원을 들여 월드컵 기간 동안 시청 앞 광장의 독점적 사용권을 획득하였다. 2002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점유하였던 시청 앞 광장을, 이제는 SKT의 허용방침 아래 ‘사용’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3.1절에 보여주었던 미디어의 광분 - 지상파 방송 3사가 몽땅 앙골라와의 시합을 중계 방송한 것은 관두고라도, 그에 앞서 거의 하루 종일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었다 - 은 2006년 월드컵 시기에 국가와 자본, 미디어가 보여줄 모습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애써 기억해 내야 한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수많은 사회적 현안들과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언론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아래 뭉쳤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월드컵에 의해 배제되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 아직 3달이나 남은 월드컵을 가지고 광분하는 미디어와 자발적이었던 응원문화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의 발빠른 움직임을 보면서, 아직도 해결 안 된 비정규직 법안과 사회양극화 문제 그리고 한미FTA가 또 어떤 식으로 묻혀버릴 지를 상상해본다. 월드컵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다.

 

*한국노총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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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가

 대형서점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가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chobari@gmail.com



이제 “교보 갔다 올게”라는 말만으로는,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을지언정 ‘무엇을 하러 가는지’는 알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음반, 다이어리를 구입하거나 학용품 혹은 생일선물을 사는 것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교보문고에 간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를 교보문고로 잡는 경우도 많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도 않을뿐더러 간단한 스낵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교보문고는 학생들과 연인들의 약속장소로도 활용된다. 책도 사고 음반도 사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결정적으로 서점은 돈 벌어서 좋고...


한편 이러한 대형서점들의 활약(?) 덕분에 동네서점들이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점 자체의 ‘복합문화공간화’에다 주변의 문화시설과의 지리적인 매개까지 가능하게 되면서 동네서점을 찾는 발길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동네서점의 개수는 서울지역만 하더라도 2000년 678개에서 2004년에는 413개로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지난 3월 22일 3000평 규모로 오픈한 잠실 교보문고에 대응하여 인근의 중소서점 상인들이 이익의 80%가 줄어드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20~30%의 책값인하(마일리지 등으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대형서점의 등장이 동네서점에 미치는 파괴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파괴적인 상황이야말로 ‘진실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대형마트에 대한 별다른 규제를 하지 못함으로써 지역의 재래시장이 줄줄이 문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형서점들의 시장 독과점에 대한 규제나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동네서점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대형서점의 입지조건이나 매장크기에 대한 제한 - 실제로 도서정가제 토론회에서 동네서점을 살리는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대안’은 완전한 도서정가제 실현보다는 서점 매장크기의 제한이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 등과 같은 조치들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우리는 대형서점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형서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대형서점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이윤의 사회적 환원 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독과점이란 게 결국 소비자에 대한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형서점의 사회문화적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와 규제를 통해서만이 대형서점과 동네서점이 공존하고 또한 ‘책’과 관련한 대중의 권리 - 접근에 있어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을 권리 등 - 가 증진될 수 있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독서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서점이 잘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책 읽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대형서점이 막대한 시장점유율을 기반으로 얻는 이윤의 상당부분을 독서문화진흥에 투여해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 베스트셀러 중심의 마케팅, 학습지 중심의 도서판매 등은 단기적이니 매출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현상으로 인해 출판문화의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국 중장기적인 매출하락의 위험을 서점 스스로 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도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양질의 도서가 유통될 수 있도록 대형서점 스스로가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책에 대한 접근이 차별받거나 배제된 계층의 사람들 - 저소득층, 도서지역 등 - 에 대한 문화복지 차원의 서비스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이른바 ‘복합문화공간화’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대형서점의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은, 말이 ‘복합문화공간’이지 실상은 상업시설의 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보문고를 비롯한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등 3대 대형서점들 모두 사실상 ‘다종문화상품판매전략’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영업전략을 주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돈 안내고 앉아 있을 공간도 부족한 것이 대형서점들의 현실이다. 따라서 가장 우선적으로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부담없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커다란 수고가 드는 일이 아니다. 책장 간의 간격을 더 넓히는 것만으로, 빈 공간에 의자를 놓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책을 위해 서점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문방구 어음’과 같은 전근대적인 유통 관행에 대한 개선 문제는 대형서점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문방구어음’과 같은 관행이 상존하고, 같은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도매가가 달라지는 불합리한 관행. 그리고 대형서점과 대형출판사에 의한 일방적인 계약이 성립하는 불합리한 거래로 인해 출판시장 자체가 교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형서점 스스로가 출판유통의 투명성, 공정성, 합리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서점은 책을 ‘만나고’ 또 ‘사는’ 공간이다. 이 단순한 정의 가운데 (대형)서점이 나아갈 방향이 있다.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 ‘책’과 ‘독자’를 중심으로 서점 내부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독서문화진흥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대형서점의 운영윤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오프라인 대 온라인, 대형서점 대 동네서점, 도서정가제 문제, 유통구조 합리화 문제 등 산적한 출판유통 관련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도 바로 ‘책’과 ‘독자’에 대한 고려를 전제로 한 출판 관련 주체들의 윤리의 복원과 이 주체들 간의 공존과 선순환을 위한 구조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 그런데 우리에겐 대형서점과 함께하는 미래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대형서점의 독과점적 존재를 전제한 대안 모색과 함께 영국의 헤이온와이(Hay-on-Wye)와 같은 전문화, 특성화, 집중화된 대안적 출판유통 모델을 고민하는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무리일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

 

*출판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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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를 위한 과제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를 위한 과제들

: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필요성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2005년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채용관련 금품수수 사건과 이에 뒤이어 터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뇌물수수 사건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의 위기와 한계에 대한 논쟁을 가속화시켰다. 민주성, 투명성, 도덕성이라는, 정권과 자본에 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무기가 되었던 가치들을 스스로 저버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현장 조합원을 포함한 대중들은 허탈과 냉소로 대응하였다. 또한 이로 인해 그 동안 노동운동 내부에 지속되었던 문제들 - 사회적 교섭 논란, 대기업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정파 간의 갈등문제 등 - 까지를 포함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한 전투적 노동운동의 성과가 96년 민주노총의 출범이라는 계기를 맞게 된 지 10년 만에 노동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10년 만에.


가히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할만한 지금의 위기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이 있다. 우선 현재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라는 점이다. 사실 이전에도 노동운동 위기론이 사회변동의 중요 고비마다 제기되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1991년~1992년 시기에 정치민주화와 경제 불황, 그리고 동구 사회주의 체제 몰락과 공안정국 등을 배경으로 노동운동 위기논쟁이 전개되었으며, 또한 1998년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심각한 위기진단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진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은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사회민주화의 핵심 추동주체로 인정받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 꿋꿋하게 노동정치로의 시민권을 확장해왔다.1)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노동 양극화’라고 이야기되는 대기업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격차 확대, 이주노동자 문제 등 새롭게 제기되는 노동 현안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임금투쟁을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 부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급격한 확대 등 민주노조운동 내․외부를 둘러싼 문제들로 인해 ‘과연 노동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핵심주체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위기 논의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해법 또한 사회운동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 - 사회운동 간 새로운 연대의 복원 및 형성 - 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급한대로 지금의 위기는 ‘사회변혁운동의 위기’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새로운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와 구심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운동 차원에서 위기에 대한 논의와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이는 새로운 사회운동 간 연대의 복원 및 형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사회변화의 흐름, 90년대 이후 성장한 시민운동의 역량, ‘작업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형성과정, 지속가능한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구축 등을 고려한 사회운동의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역’이라는 공간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기반 하에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통합적 사회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이는 노동문화운동의 변화, 혹은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연대 등과는 구분되는 문제의식이다(물론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를 기본적인 전제로 포함해야 하는 문제다). 즉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전략을 형성하기 위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요구하는 조건들을 검토하고, 이어서 재구조화의 방향과 원칙 그리고 구체적인 방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노동운동의 위기,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


작년의 비리사건으로 촉발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2)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현상적인) 접근으로는, 우선 노동조합의 조직률에서 확인 가능하다. 2002년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이 전체 임노동자의 11.6%에 그치는 가운데, 그 대다수가 300인 이상의 대기업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300인 미만의 노조 조직이 조합수로는 5,813개(89.3%)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조합원수의 22.0%에 그치고 있는 반면, 300인 이상의 대공장 노조는 그 수로는 10.7%밖에 안되지만 조합원수로는 78.0%를 차지하고 있다. 해당 사업체 규모별 노조조직 현황을 살펴보면, 300인 미만 사업체에 종사하는 전체 노동자의 2.8%만이 노조가 조직화되어 있는 반면, 300인 이상 대기업의 69%에 노조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임시․일용직의 경우 노조 가입률이 1.23%로 집계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률은 2.4%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조합의 조직적 보호는 매우 미흡한 가운데, 대공장 중심으로 기업별 노조활동이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3)


[표] 조직 규모별 노동조합 현황(단위 : 개소, 명, %)4)

구분

총계

49인 미만

50~299인

300~999인

1,000인 이상

조합수

6,506(100)

3,079(47.3)

2,734(42.0)

485(7.5)

208(3.2)

조합원수

1,605,972

(100)

52,895

(3.3)

299,803

(18.7)

219,557

(13.7)

1,033,717

(64.3)

*출처 : 노동부(2003)


비정규직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IMF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갈수록 늘어났고, 현재는 절반이 넘는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등의 노동조건에서 크게 차별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노동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동조합운동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이다. 특히 2004년 초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투쟁과 관련하여 결국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금속연맹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받게 되는 일련의 과정5)들은, 현재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가속화된 이른바 ‘사회적 교섭’ 논란 또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사회적 교섭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는데 있다. 즉 ‘사회적 교섭’을 제안하며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 자체에 대한 논의는 부재한 채, 노사정위 참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갈렸다. 그리고 이는 결국 2005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폭력사태6)로 결과하였다. 이는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민주적인 논의구조와 합의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밖에도 적절한 긴장과 상호 비판을 넘어서는 대립과 갈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내부의 정파문제나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부족한 대응, 앞서 언급한 노동조합의 비리문제, 그리고 임금투쟁을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노동조합의 활동의 부족 등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노동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전략 변화를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자와 노동자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들(작업장 안팎을 포함시키는)로까지 확장시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어떻게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에 대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는, 비단 WTO나 FTA의 문제 혹은 시장개방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신체, 의식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을 ‘경쟁’과 ‘효율’과 같은 자본의 논리로 지배하려 한다. ‘노동자 주체형성의 위기’는 자본의 논리에 노동자의 일상이 구조화되면서 노동자 스스로 자본에 대항하는 저항주체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노동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절대적인 착취와 배제, 차별에 직면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부정해서도 안 될 문제이다. 하지만 주거, 교육, 의료 등의 영역에서 노동운동 스스로가 공공성의 확대 나아가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생활에서는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둔 채 자본의 일방적인 지배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며, 휴가 때는 스키와 골프를 즐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는 가운데 노동자의 일상과 의식의 자본의 소비패턴으로 조직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건강한 집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며 남녀노소 등 아무런 차별 없이 여유와 문화를 즐기고 창조하면서 사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며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20%만 잘 살고 80%는 불안해지는 그런 구조 속에서 잘 사는 20%에 진입하는 것도 아니다. 또 ‘똑똑하고 잘난’ 지배 엘리트들이 하자는 식으로만 끌려가는 삶도 아니다. 온갖 제도와 규칙들은 ‘공동체적 삶의 질’ 차원에서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논해서 바꿀 수 있어야 한다.7)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연대 혹은 연계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제안하는 문제의식은,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현상적인 대응을 넘어 노동자의 일상까지를 포함하는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데서 출발한다.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이 이제는 더 이상 상층에서의 선거나 합의, 현장과 동떨어진 총파업 투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현상적인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일상에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결연하게 맞서 비자본주의적인,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대안적 삶의 방식을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노동운동의 강화에도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공동체 마을을 이룬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다보니 자연스레 생태친화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반대로 생태친화적인 삶을 구성하려면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게 된다고도 한다. 공동체성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기초조직부터 튼튼하게 만들 것이다. 주요 공공영역에서 자본의 소비패턴이 아닌 공동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 상품 소비가 아닌 방식의 문화생활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 화석연료의 지속적인 소모가 아닌 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 등 더 많은 상품의 소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의 질 향상을 공동으로 상상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비단 노동운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노동운동에만 한정되는 문제는 아니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비자본주의적인 대안적 삶을 구축하는 문제는, 전환기를 맞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함께 논의해야할 문제이다. WTO 협상 체결이 눈앞에 닥쳐왔고, 한미FTA 체결이 2007년 상반기까지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 지역의 풀뿌리운동까지를 포함하는 사회운동의 전략이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질적, 양적 성장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생활체육, 문화생활, 생협 등 흔히 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사회운동의 전략 수립을 통해 사회운동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안세계화운동과도 연결되는 전략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 원칙과 방향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원칙과 방향을 대략 다음의 여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사회변혁운동 주체의 확장이다. ‘대기업 남성 정규직노동자’로 표현되는 노동운동의 주체를 노동자 ‘민중’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및 노동자 가족까지도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운동의 성격과 구체적인 실천도 상당부분 달라질 수 있다.


둘째, 확장된 현장성의 구축이다. ‘현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 노동운동의 현장을 ‘작업장 내’로만 한정하지 말고 ‘작업장 안팎’으로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노동자의 일상생활, 취미활동 등의 영역까지도 정치의 영역으로 포함시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모순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일상에서의 문화활동은 대부분 문화상품의 소비로만 한정되어 있고, 또한 주류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독해능력을 길러내고 대안적 문화활동을 조직하는 것 또한 노동운동의 ‘현장활동’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셋째, 새로운 사회운동 간 연대성의 강화와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이다. 주체의 확장, 확장된 현장성을 기반으로 사회운동 간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한 시민운동의 다양한 의제들을 노동운동에 반영하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통합적 사회운동을 실현해야 한다. 다만 ‘통합적’ 사회운동이라는 말이 조직의 통합, 혹은 이념의 통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 사안에 대한 형식적 연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연대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자기 운동의제가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형식으로는 오히려 수평적 네트워크의 구조가 적합할 것이다.


넷째, 지역성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연대성의 강화와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은 자연스레 ‘지역’이라는 공간과 사회문화적 관계망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현재 기업별 노동조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의 노력이 현실에서는 상층 중심의 협상이나 혹은 오히려 개별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반감시키는 경우도 있다. 종적인 노동운동의 질서 구축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횡적인 운동질서의 구축이라는 전제 하에 추진될 필요가 있다. 지역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연대운동의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의 운동의제를 자기운동의 과제로 삼고 실천적인 연대성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대한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산성 향상’의 파괴적 성격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노동운동 내부의 반생태주의를 극복하려는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삶의 질’,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문제가 상품의 소비가 아닌 스스로의 삶의 생태친화적으로 재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의 실천으로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여섯째, 노동운동의 공동체성을 복원해야 한다. 정권과 자본의 노동통제 전략에 의해 파편화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공동체성을 복원하여 노동운동의 기초를 탄탄하게 만들고, 지역의 공동체운동 또한 강화시켜내야 한다. 노동자 개개인이 분절화, 파편화되는 것에 맞서 동아리, 스터디모임, 써클, 동호회 등 작업장 안팎에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운동의 공동체성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들이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고, 이를 통해 지역의 주요한 현안에 대하여 발언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를 위한 방안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라는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읽혀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실의 투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의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전략적인 대안 모색을 강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라도 가능한 방안을 상상해낼 필요가 있다. 아래의 방안들은 현재 수준에서 상상 가능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 관련 고민들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실천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제안임이 사실이지만, 부족한 부분은 이후 사회운동 차원의 적극적인 논의와 실천을 통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상력과 함께 현장에서의 실천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사회운동진영 내부의 활발한 논의와 공감대의 형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재 제기되고 있는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성격 규정, 자본의 논리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자 주체 형성과정에 대한 평가 등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문화생활 패턴에 대한 조사 등 기초적인 연구 작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사회문화적 관계망까지를 포함한 연구 조사를 통해 이후 지역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실현이라는 과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연대성에 기반한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이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기존 연대활동의 관성에 대한 평가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생태적이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의 재구축을 위해 운동의제를 확장시켜내고 사회운동 간 연대활동을 강화시켜내야 한다.


두 번째로, 노동현장에서의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천해야 한다. 기존 투쟁의 보조적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향상과 새로운 공동체의식의 형성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기존 문예패 활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문화운동이 유의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능하였다면, 이제는 노동시간을 줄여내는 것 그리고 특근이나 야근이 아닌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동체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지역 차원에서의 사회운동 간 공동의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및 가족, 실업자 등 확장된 사회운동 주체형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여기에 지역의 사회운동 자원을 결합시킴으로써 대안적인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여성, 환경, 문화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흐름에 대한 교육,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프로그램,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길러내기 위한 문화강좌 등에 지역의 사회운동단체와 노동조합, 전교조, 문화활동가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통합적 사회운동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문화센터는 이를 위한 유효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역의 관련 시설 등을 활용한다면, 노동자문화센터를 당장에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즉 노동조합은 사람들이 밤늦게 찾아갈 수 있는 ‘개방선터’를 만들어서 모임장소를 제공하고, 서비스와 상품을 소개하며, ‘민중대학’이나 영국의 ‘지역사회센터’ 혹은 덴마크의 ‘생산학교’ 등을 본따 노동자들과 실업자들(과 그 가족들), 퇴직자들, 연금수혜자들, 사춘기 연령의 젊은 부모들을 위해서 교육과정이나 주제토론회, 영화클럽, 수리점들을 제공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보수를 받는 노동시간 이외에는 오직 소극적이고 지루함만이 있을 뿐이라는 낡은 관습적 생각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반박해야 한다. 또 노동조합은 상업적 소비문화와 오락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즉 노동조합은 애초에 자신들이 발생하게 되었던 협동조합과 결사의 전통과 노동자계급문화 서클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고, 또 자발적인 조직활동과 협동적 서비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수행할 공통적 이해가 걸린 작업계획에 대해서 시민이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광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8)


실제로 노동자문화센터와 같은 공간을 통해 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프로그램은 많다. 대구 성서지역의 경우, 이주노동자라디오방송과 같은 계기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발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철학강좌, 아줌마문화강좌, 지역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답사프로그램 등도 당장에 있는 사회운동 역량으로 충분히 시행 가능한 프로그램들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이나 미디어 기술의 대중적 보급은 좋은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노숙인 미디어교육과 같이 지금도 간간히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프로그램들이 노동자문화센터와 같은 계기를 통해 더욱 확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협과 같은 공동체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지역의 농민운동과도 직접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운동 간 접촉면을 넓힘으로써 통합적 사회운동을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이 밖에도 지역에서 가능한 많은 방안들을 상상해 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 문화권, 문화생활비, 그리고 문화센터 건립과 같은 문화적 요구를 담은 임단협 요구를 내걸고, 이에 대해 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캠페인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공공문화기반시설-학교 등을 연계한 공공문화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할 수도 있다. 또 지역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노동운동을 포함한 지역사회운동 차원의 공동대응을 확산시킬 필요도 있다. 노동운동의 경우, 기업별 혹은 산별 운동과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운동의제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회운동 또한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간 단축문제, 일자리 확충 문제 등을 연계한 적극적인 활동을 조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지역에서 노동조합, 진보정당 및 각 영역의 사회운동 주체들이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조직하는 일이다.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구체적인 프로그램까지 실험하고, 그 경험을 다른 지역으로 유통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조직화에 대한 고민을 서술하였다. 노동운동의 문화적 재구조화의 문제의식은, 지금의 위기에 대한 ‘기술적인’ 대응이라기보다는 운동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다. 다만 충분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실천의 부족으로 인해 피상적 수준의 대안제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한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우리의 삶의 조건 전반을 자본의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단지 국제협약 문제이거나 혹은 작업장 내로 한정된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의식까지 해당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또한 삶 자체를 변화시켜내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안적인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함께 실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동자’, ‘지역’, ‘연대성’은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다. 종적이며, 또한 상층지향적인 운동의 패러다임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횡적이며, 동시에 현장지향적인 운동을 통한 근본적인 변화만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다. 지역에서의 통합적 사회운동의 실현, 새로운 연대성에 기반한 사회변혁운동의 실천이 필요하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자세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실천이 요구된다.

 

* 이 글은 문화과학 45호(2006년 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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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밖으로 굽는구나... 동국대, 안되겠네~

 

_최준영 / 문화활동가 ptrevo@jinbo.net


이제는 존경심마저 생기려고 하는 우리의 황우석 선수. 기말을 맞아 네OO 지식검색을 들락거리며 레포트를 베끼고 짜깁기 하는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라’”임를 보여주며 연말 모든 언론의 1면을 특유의 연기력 물씬 풍기는 얼굴로 장식하였다. 덕분에 홍콩에서 1,000여 명이 연행되면서까지 WTO 각료회의 저지를 외쳤던 홍콩민중투쟁도, 집회에서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맞아 두 분이 사망하기까지 한 쌀개방 반대투쟁도 주류언론의 관심에서 비껴났으며, 모든 국민들이 사실은 잘 이해되지도 않는 줄기세포 번호나 ‘스너피’(맞나?)가 복제인지 쌍둥이인지에 대한 얘기만 들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장충동에 조용히 있던 동국대학교가 기어이 ‘일’을 냈다.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라는,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칼럼 때문에 - 그러면 북한이 왜 6.25 전쟁을 시도했을까를 생각해보자. 실수로? 그냥 한 번? 일본으로 가려다보니 지나가던 길이라서?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를 결정한 것이다. 내년 1월 초 이사회에서 직위해제가 확정되면 강정구 교수는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맡을 수 없게 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이놈의 학교는 왜 아직 형이 결정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해 총장까지 참가한 정책회의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일까? 검찰의 기소도 수업내용이 아닌 인터넷 칼럼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수업권을 빼앗는 어이없는 결정을 한 ‘정책회의’가 뭐하는 곳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총장에다 보직 교수 전원이 참가한 회의라... 다시 말해 “배운 만큼 배웠고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일 텐데,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보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면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상․표현․양심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강정구 교수의 사법처리를 주장한 수구꼴통 할아버지 9,000명과 같은 레벨에서 놀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최근 조선일보를 넘어서는 수구꼴통 신문으로 거듭나고자 ‘석간으로’ 고생하는 OO일보가 <강정구 교수 직위해제 늦었지만 당연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진작에 - 소위 만경대 방명록 사건 때 - 직위해제 시켰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고, 조금은 지난 일이지만 경제단체들이 동국대 학생들 취업제한까지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이 어떻게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도 않은 사건, 더군다나 국가보안법이라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된 악법에 의해 기소된 자기 학교의 교수에 대해, 교수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업권을 빼앗겠다고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눈과 귀를 막고, 또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어떤 민주적인 토론과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업권은 ‘수업을 할 권리’임과 동시에 ‘수업을 받을 권리’이기도 하다. 총장과 몇 명의 보직교수들에게 학생들의 수업권을 박탈할 권한은 없다.


‘지식의 상아탑’과 같은 현실에도 맞지 않은 낯간지러운 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대학이 사회의 여론과 특정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자신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수업권 - 이는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해당되는 권리다 - 을 놓아버린다면, 그 대학은 더 이상 존재할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동국대학교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직위해제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수업권을 교수와 학생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것만이 실추된 대학의 명예와 위상을 뒤늦게나마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한참이나 지나간 90년대 말장난으로 글을 맺어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북한산에 ‘어이’ 잡으러 가야겠다!” 장충동에서 잃어버린 ‘어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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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DOWN WTO ! JUNK WTO !

DOWN DOWN WTO ! JUNK WTO !

홍콩 시내에 WTO 해체의 외침이 울려퍼지다

_최준영 /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http://gomediaction.net


지난 12월 13일 제6차 WTO 각료회의가 홍콩에서 개막하였다. 12월 18일까지 계속되는 제6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전 세계의 ‘자유무역화’를 위해 각 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최종적으로 WTO 도하개발의제를 확정, 출범시키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예정이다.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 민중들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WTO가, 그 최종 목적지인 도하개발의제의 출범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WTO가 도하개발의제라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가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괴와 이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식량주권 문제, 빈곤 문제, 아동과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 문제, 교육, 에너지, 물, 문화 등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공공서비스에 대한 사유화 문제, 그리고 에이즈, 말라리아, 조류독감 등의 질병에 대한 저가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는 초국적 제약자본의 횡포 문제 등. 전 세계적인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의 심화가 바로 WTO와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이다.


한편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의 파탄시키는 WTO 각료회의 때마다 각국의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해왔다. 99년 시애틀을 시작으로 칸쿤을 거쳐 이번 홍콩 각료회의 때까지 수만 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집결하여 ‘NO TO WTO’ 등의 구호를 외쳐왔다. 이번 홍콩 각료회의에서는 특히 한국의 민중투쟁단 1,500여 명이 참가하여 쌀개방 문제, 서비스협정 문제, 지적재산권 문제 등 WTO가 야기하는 민중생존권과 기본권과 관련한 이슈를 중심으로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WTO 저지투쟁과 관련하여 홍콩 경찰과 미디어에서는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선 한국민중투쟁단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제(13일) 있었던 해상시위와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루고 있다. 또한 TV에서도 한국 농민들의 투쟁이나 지난 아펙회의 저지투쟁 장면을 매우 자극적으로 편집하여 계속 방송하면서, 마치 한국의 민중투쟁단이 테러리스트인 양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WTO 저지투쟁에 대한 홍콩 미디어의 왜곡은 지난 APEC 회의 저지투쟁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집회에서의 분신과 농민들의 음독자살 등에 대해 ‘집회에서 감정이 격양되면 종종 일어나는 문제’라고 표현하며, 분신이나 음독으로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민중들의 생존권 등에 대한 언급은 배제한 채 이를 마치 시위문화인 양 다루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왜곡과 홍콩정부의 대응 - 홍콩정부는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저렴한 가격(지하철의 1/3)으로 운행하는 ‘스타페리’를 폐쇄시켜 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 으로 인해 홍콩시민들의 한국민중투쟁단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홍콩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중투쟁단과 전 세계 활동가들의 반WTO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抗議世貿!(꽁 이 싸이 무!, WTO 반대한다!)”와 “JUNK WTO”의 외침은 WTO 각료회의가 끝나는 18일까지 홍콩시내에서 계속 울려퍼질 것이다. 실제로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바라보는 홍콩 시민들의 모습은 주류미디어의 악의적인 왜곡과는 달리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와 ‘왜 WTO에 반대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 하는 모습이다. 한국민중투쟁단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알려내고 결국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WTO를 해체시키기 위한 투쟁은 이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의 세계화, 대안세계화의 구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WTO, FTA 등 국제무역협정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고 이러한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전 세계 민중들과의 공유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메커니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 제6차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과 관련한 영상과 사진 등의 자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http://gomediaction.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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