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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APEC 반대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APEC, 숫자의 스텍타클


전 세계 GDP의 57% 및 교역량의 46% 점유, 총면적 6,261만 ㎢와 총인구 28.1억 명으로 각각 전 세계 면적의 46.8%와 세계 총인구의 44.8% 차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y Cooperation, 이하 APEC)1)가 가지는 ‘숫자의 스펙타클’은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의 중요성을 대중들에게 홍보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APEC 회의 개최에 따른 관광수입 증가분이 2005년 한 해에만 3천만 달러에 이를 것이며 경제적 파급효과 - 국내총생산이 적게는 1억4천7백9십만 달러에서 많게는 2억5천5백6십만 달러까지 증가 - 또한 상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APEC 회의 개최지인 부산은 생산유발, 부가가치유발, 소득유발 효과가 6천7백억 원 가량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하였다. 경제 발전 논리에 기반한 두 번째 ‘숫자의 스펙타클’은 APEC 회의 성공 개최를 온 국민의 염원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숫자나 규모를 제시함으로써 APEC 회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리는 것은, 현실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일상에서 대중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APEC 회의는 ‘숫자의 스펙타클’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국제회의를 통한 이윤 창출이란게 사실 실제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또 그마저도 부산이라는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미디어의 APEC 회의 광고를 보거나 APEC 로고가 찍힌 산뜻한 색깔의 모자와 옷을 입은 경찰을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것과 같은 간헐적인 시각적 노출 이외에 별다르게 APEC 회의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대중들이 ‘APEC과 나(의 생활, 일상)’를 가장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지점은 테러위협의 일상화, 그리고 테러대비로 인한 일상의 위협 혹은 불편함이 아닐까 싶다. 즉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전후로 고조되었던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미디어를 통해 다시 부활하고 있고, 이에 따른 조치들 - 승용차 2부제, 회의장 주변 야산에 대한 입산금지, 검문검색 강화, 노점상 단속 등 - 이 속속 발표되면서 TV 화면으로만 접했던 테러에 대한 위협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회의장소가 있는 해운대 일대에 대한 교통통제 대책이 발표되었는데, 시내에서 해운대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모두 통제(봉쇄)할 것이라는 계획이 발표되자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APEC 회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이라도 가야겠다”고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한편 APEC 회의 개최에 대해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58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이하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지난 9월 7일 발족 기자회견을 갖고 APEC 회의에 대한 반대 투쟁을 선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펙반대 국민행동>은 APEC에 반대하는 10만 명의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세계화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WTO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국제기구의 회의 때마다 이루어졌던 반세계화 시위가 부산에서 재현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반대/파병반대 운동, 평택에서 진행 중인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쌀 개방 여부를 둘러싼 농민들의 투쟁, 노동시장의 유연화 및 구조조정으로 인해 심화되는 비정규직 문제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확산되면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을 APEC 회의를 계기로 결집시키고 이를 12월에 홍콩에서 있을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까지 연결시키는 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10만 시위대의 APEC 반대 투쟁. 하지만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앞서 언급한 정부나 미디어의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혹은 10만이라는 숫자에 APEC 반대 투쟁이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여겨지는 것은 또 왜일까.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10만’이라는 숫자를 넘어 대중들의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기획된 문화운동 프로젝트이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실험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문화적 실천과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APEC 2005, 무엇을 논의하는가


다시 APEC 회의로 돌아와 보자.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통해 창설되었다. APEC은 1993년 1차 정상회의 개최 이래로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즉 APEC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 간 협력체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및 무역장벽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 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2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APEC 내에서의 포괄적이니 자유무역화를 완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회원국 중 선진국의 경우 2010년까지, 개도국의 경우 2020년까지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보고르 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고르 선언>의 실행을 위해 논의된, 3차 APEC 정상회의에서의 <오사카 행동계획>과 4차 및 5차 정상회의를 통해 제기된 15개 조기 자유무역화 분야의 선정 등을 통한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WTO 협상에 대한 지지는 APEC의 핵심활동’임을 선언한 7차 APEC 오클랜드 정상회의에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9년 시애틀에서의 WTO 각료회의가 무산되는 등 WTO를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세 번째 노력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APEC을 통한 무역자유화가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닌데, APEC의 틀 안에서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 싱가포르․뉴질랜드, 일본․싱가포르, 한국․일본, 일본․멕시코, 한국․칠레 등 - 이 계속되어 왔고 금융자유화 조치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2)


무역자유화와 관련한 몇 차례의 시도가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열리는 회의는 ‘WTO 체제의 출범을 통한 자유무역의 실현’이라는 APEC의 기본방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번 대회 의장국인 한국이 ‘반부패’ 및 ‘문화간 이해 증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추가하기도 하였지만, 의 역점과제3) 중 첫 번째 과제이자 핵심과제는 ‘무역자유화 증진’이며, 이는 지난 6월의 등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즉 오는 12월에 있을 WTO 홍콩 각료회의를 앞두고 열리는 이번 회의는 전 세계의 무역자유화 실현을 위해 APEC 참가국들의 결의를 모아내는, WTO 체제 출범을 위한 사전 회의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WTO 체제의 출범으로 대변되는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체제의 도입에 대한 문제점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금융세계화로 인한 외환위기의 위협,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과 거대곡물기업의 횡포, 유전자 조작식품의 위협, 제3세계 국가에서의 빈곤문제와 대규모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 생존의 위협,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 등. 이 뿐만이 아니다. 쌀개방 문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문제, 교육개방으로 인한 공교육 붕괴와 교육비 상승의 문제, 그리고 의료시장 개방으로 인한 의료보험체계의 붕괴 등은 당장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이기도 하다. 의 모토인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는, 그 실상을 볼 때 ‘(빈곤, 불평등, 차별이 확대되는) 공동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화영역에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인데,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 GATS)’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영역에 대한 개방화, 시장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GATS는 건설, 유통, 교육, 환경, 보건/사회, 금융, 관광, 운송, 문화 등 12개 분야의 시장개방에 관한 협상으로, 그 범위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공공적인 성격을 가지는 영역에 관한 시장개방 협상이다. 여기에 문화영역에 해당되는 시청각분야(영화, 음반, TV, 라디오 등), 뉴스에이전시를 포함한 오락/문화서비스 분야 등의 개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Protec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Contents, 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틀이 무역질서가 아닌 ‘문화다양성 협약’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국제적인 근거4)를 마련하였지만, 여전히 WTO 체제 출범에 따른 ‘문화의 상품화’ 및 문화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의 위협은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APEC 회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고 대테러 조치를 지지하는 등 미국의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9차 APEC 정상회의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이 채택되었고, 2003년 방콕 회의에서는 대테러조치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APEC 주요의제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3년 제11차 APEC 회의에서는 각종 정상회의를 통해 이라크 파병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APEC 회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미국 주도의 군사패권주의의 확산 및 강화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이번 APEC 회의는 WTO 체제 출범을 목전에 두고 열리는 만큼 그 국제적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회의가 실질적인 결정력과 구속력을 가지기는 힘들겠지만, WTO 체제의 출범에 대한 국제적인 흐름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아펙반대 국민행동>을 구성하고, 10만의 아펙반대 시위대가 부산에 집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APEC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목소리가 11월 부산에서 전 세계를 향해 울려퍼질 전망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운동 단체5)가 참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조직된 가장 큰 이유는, 주류 미디어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APEC 회의에 대한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미디어의 필요성6)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현재 주류 미디어 어느 곳에서도 이번 회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않고 있다. 이들 미디어에서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각종 경제수치와 대테러조치들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 이마저도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알려줌으로써7) 최소한의 판단 근거마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어떻게’ APEC 회의가 경제를 살리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APEC 회의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에는 수출이데올로기나 한류열풍과 같이 세계화의 양면성과 관련된 담론의 혼란이라는 측면도 존재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무비판적인 주류 미디어의 역할의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고 있는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운동 내 미디어․문화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제고하는 것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주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회운동 진영 내에서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역할과 위상이 크게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운동 내 미디어 혹은 문화와 관련한 실천은, 선전물 제작이나 문화제 기획, 문화예술인 섭외, 집회 생중계 등 매우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역할로만 인식되고 활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 - 인터넷 환경의 급격한 발달, 캠코더나 디지털카메라의 대중적 보급 등 - 는 더 이상 문화를 도구로서만 바라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사를 ‘직접’ 문화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물을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리는 행위, 직접 제작한 짧은 영상물이나 플래시 등을 유통시키는 행위 등은 이제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대중운동이 ‘대중조직만의 운동’이라는 비판과 오명을 벗고 명실상부한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에 근거한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최근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각종 실험들 -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활용한 ‘모블로깅’, 독립영화 제작 및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인터넷․라디오 방송 등 - 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APEC 회의의 문제점에 대해 대중들과 소통할 기회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기간 기능과 수단으로서의 인식되어 왔던 미디어․문화행동이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사회운동 내 필요성과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중장기적으로 진보적인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의 미디어․문화 환경 변화는 수많은 개인들의 직접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활동가들과 잠재적 활동가들이 생산되었으며, 최근에는 부족하나마 공적인 지원을 통한 활동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보적인 미디어․문화행동은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이루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별 주체들의 활동이 개인의 실천으로만 머무르고 있고, 이를 공공적이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소통하는 것은 조직된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 등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활동은, 진보적 미디어․문화콘텐츠의 공공적 형태의 소통과 이를 통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8)


100만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앞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에 정부와 미디어가 주도하는 ‘숫자의 스펙타클’이 오버랩된다는 것은, 제기되는 근본 목적은 다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대중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즉,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표현 속에서 10만에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이제 ‘10만 시위대의 집결’이라는 운동의 목표는 조정될 필요가 있다. ‘열린’ 미디어․문화 공간을 통한 소통과 교류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0만 시위대’ 조직이라는 목표는 ‘10만’을 훌쩍 넘어야 하는 것이다. ‘100만이 참여하는, 그리고 전 세계 민중들이 동참하는’ 대중투쟁을 위해 미디어․문화행동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은 조직․홍보팀, 문화행동팀, 편성제작팀 등 3개 팀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먼저 조직․홍보팀에서는 전국의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에 대중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활동가 워크숍’, ‘반세계화 투쟁과 미디어․문화행동 토론회(RTV)’ 및 미디어․문화행동의 역사 및 사례에 대한 국제민중포럼에서의 미디어문화행동 포럼 등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디어․문화 활동가들의 결집을 유도하고 새로운 대중운동 방식으로서 미디어․문화행동의 이론적, 실천적 담론을 생산할 것이다. 또한 2006년 1월에는 APEC 반대 투쟁과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 이후 미디어․문화행동에 대한 평가와 이후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워크숍을 개최할 예정이다.

문화행동팀은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NO-APEC FESTIVAL’를 개최하였다. 부산영화제의 ‘아펙특별전’ 개최에 맞춰 진행한 행사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한 독립영화 상영, 해변 모래조각 등 전시, 문화공연 등을 진행하였다. 특히 이번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부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기획자, 인디밴드, 퍼포머 등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APEC 기간 중에도 문화공연, 퍼포먼스,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행동이 계획되어 있다.

편성제작팀에서는 10여 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독립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9)를 통한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기획 중이다. 인터넷․라디오 방송은 기존의 집회 생중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운동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장애, 이주노동, 비정규직, 환경, 여성농민, 청소년 등 운동주체들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퍼블릭액세스 프로젝트’의 제작․방송과 공동체라디오운동 주체들이 참여하는 라디오방송 등이 준비되고 있으며, 다양한 반세계화 영상물의 인터넷 방송을 기획하고 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모바일 참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모바일 + 블로그 = 모블로깅’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혹은 사진전송 기능을 활용하여 이를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프로젝트로 투쟁 현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를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활동의 특징은 ‘보다 열린 공간의 구축’에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이 구축한 공간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들이 소통,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통상적인 홈페이지․게시판 문화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산된 미디어․문화콘텐츠의 홈페이지 게시와 방문자들의 소비라는 구분을 넘어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상호 소통과 교류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 홈페이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디어․문화콘텐츠의 아카이브의 기능과 역할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 투쟁의 필요성


그 동안의 반세계화 투쟁의 ‘정형’이 국제회의 저지를 중심으로 한 시위 역량의 집결에 있었다면, 2005년 APEC 반대 투쟁을 계기로 이를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국제회의’라는 ‘위를 향한’ 투쟁이 지금까지의 반세계화 투쟁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대중들의 ‘삶’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실천, 열린 공간을 통한 대중적 참여를 무기로 한 일상적 실천의 조직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미디어문화행동>의 조직을 통한 다양한 실험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이 조직된 대중들의 국제회의 저지투쟁에서 대중들의 삶에 근거한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확대․전화되어야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세계화 반대투쟁이라고 하면, 국제회의장 앞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 반대투쟁은 보다 일상적인 형태, 문화적인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민중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 및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축소, 경제적 삶의 기반 파괴 등 생존권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교육․의료․문화 등 사회공공영역의 축소, 소수 언어의 감소, 문화적 획일화로 인한 다양성 파괴 등 공동체 및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문화적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에까지 침투하는 자본의 논리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제 저항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저작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시스템 구축, 웰빙담론이나 한류열풍에 대한 비판적 이해, 생태적인 생활을 위한 삶의 방식의 재구축,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을 구축하는 문제로까지 반세계화 투쟁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대안세계화 운동을 고민하는데 있어 문화적 실천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화를 삶의 양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안세계화 운동은 곧 문화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말해,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인 담론․운동․콘텐츠의 생산과 소통이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당면 과제가 문화운동 진영의 주요 운동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의식까지도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질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중적 대안은 모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삶이 아닌 민중적, 대안적 삶을 구성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이 끊임없이 기획되어야 한다.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인 삶, 독점과 소유가 아닌 교류와 공유에 기반한 삶, 소수자의 문화가 차별받지 않는 삶의 질서를 창출하는 것만이 자본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생산과 소비의 확대 메커니즘의 굴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과학>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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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하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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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ptrevo@jinbo.net



당황스런 시츄에이션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둘러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에 대해 검찰총장은 사퇴로 대응하고 9,000명 원로의 시국선언에다 박근혜 대표와 청와대의 팽팽한 말싸움까지. 한 마디로 당황스런 시츄에이션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 검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에다 재보선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힘겨루기까지 더해져 앞뒤를 재기가 힘들 정도의 판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들은 동국대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지 않은 학생이 대부분일 테고 강정구 교수의 수업을 듣기는커녕 강정구 교수가 자기 학교의 교수인지도 모르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인데, 느닷없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취업을 제한하겠다고 까지 나서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청년 실업 60만 시대인 지금인데...


이제야 칼럼을 읽다


평소 낮은 역사의식을 자랑하며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던 나에게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한국사에 대한 과격할 정도의 적극적인 관심은 당황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득불 ‘이제야’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찾아 읽어보았다. 문제의 칼럼의 제목은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로, 칼럼을 쓴 배경은 맥아더 동상허물기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통일전쟁 관련 부분은 미국와 맥아더에 대한 ‘보은론’을 비판하는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제 보은론을 본질적으로 따져보자. 만약 미국과 맥아더가 자기들 멋대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두 동강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과 형극을 겪었을까? 만약 6.25라는 통일내전에 외국군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전쟁피해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분단되는 비극이 지속될까?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물론 외세가 기원한 내전). 곧 당시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집안싸움이었다. 곧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7-27)> 中(중)


한국사에 대한 내공의 부족으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평가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강정구 교수의 칼럼이 ‘구국의 세력’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는 판단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등. 이미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알아서 처신하지 못한’ 강정구 교수의 이러한 글은 경찰과 검찰을 자극했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논란은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를 넘어서 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칼럼 내용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닌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을 거쳐 체제 수호의 문제로까지 번진 지금의 상황은,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 9,000명의 원로 등 이른바 ‘구국의 세력’의 정치적 결집과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되고 있다.


통일전쟁, 그래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은 간단한 검색으로 ‘아직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음으로써 국가의 혼란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박근혜 대표와 9,000명의 원로뿐이다. 아직까지 강정구 교수의 칼럼을 읽고 좌경화되었다거나 좌경세력이 결집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고, 또한 강정구 교수 칼럼의 내용은 그 동안 진보적인 사학자들, 혹은 운동세력 내에서 일관되게 언급했던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강정구 교수 관련 논란을 활용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다시 칼럼을 보자.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이 논쟁의 출발점인 그 칼럼으로. 칼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먼저이지, 구속하고 구국의 결단 운운하는게 먼저일 수 있겠는가. 사회 분열과 체제 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의 눈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것들이 분열과 위기로 보일 뿐이다. 분단 이후 50년이 넘게 강요해 온 미국과 이승만에 대한 보은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신체를 구속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국전쟁이 북한의 통일전쟁이라고 말하면 어떻나. 아니라고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같이 말하면 그만이지. 광화문 사거리를 인공기 들고 뛰어다니면 또 어떻나. 무단횡단으로 벌금때리면 그만이지. 오바하지 말자, 제발.

 

*문화연대 <문화사회>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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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 노숙인 문화권 운동을 시작하며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들어가며 : 노숙, 해방, 문화


정의와 당위의 문제를 넘어서는 노숙인 문화운동의 실천이 무엇일까. 지난 1월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 이후 처음으로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고민했던 지점이다. 유목, 방랑, 자유 혹은 불결, 주정, 공포. 노숙과 노숙인에 대한 기존의 사회 관념은 어느 것 하나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힌트조차 주지 못했다.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노숙인 개개인을 분리 - 기존의 사회 질서로부터 노숙인 ‘집단’을 분리, 또한 노숙인 개개인을 서로에게서 분리 - 하여 고립시키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행동은, 주체로서의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그로부터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의 고민과 실천을 확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주체, 운동의 주체로서 노숙인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노숙인 운동을 이제는 ‘해방운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숙인 문제가 ‘재활’이나 ‘사회복귀’를 전제로 한, 이른바 평균적인 경제․사회․문화적 지표를 따라잡는 것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질서의 창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이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른바 ‘정상 이데올로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노숙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게 하는 ‘해방운동’의 운영원리와 실천을 문화와 문화운동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권, 노숙인 문화권


문화권 혹은 문화적 권리는, 사실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워낙에 ‘소비’를 통해 문화적 행위를 하는데 익숙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문화생활을 경제적 문제 해결 이후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여기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웰빙’ 담론이 몸과 건강 그리고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이러한 관심은 경제적․공간적․신체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공적인 문화생활의 향유가 아니라 수십만원 대의 용품을 사야지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노숙인 문화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일 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화권은 문화(생활)에 대한 자유권, 평등권, 참여권 등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문화생활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주거가 일정치 않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빈곤하다는 이유로 최고한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기본권으로서 문화권의 위배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공공영역의 확대를 통해 노숙인의 기본적인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 - 공공문화기반시설 문화프로그램에의 참여 보장 및 유도, 문화바우처제도의 확대, 사회교육의 확대 등 - 이 적극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문화권을 정의하고 문화운동의 실천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국가정책적 차원 혹은 문화복지적 차원의 실천을 전제로 하되, 이를 넘어서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실천이 고민되어야만 한다. 노숙인의 정체성에 기반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문화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 참여나 교육, 관람이 아닌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문화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그것이다. 요구나 당위의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획득하는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가야 한다.


노숙인 문화행동의 시작과 평가, 이후 계획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가칭)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이, 앞서 언급한대로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문화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취지에 전적으로 부합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해방운동’으로서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다짐하면서 지난 활동을 돌아보자.


3월 문화행동.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진행하기로 한 문화행동의 첫 시작이었다. 서울역에서의 간단한 공연과 영화상영으로 기획된 첫 번째 문화행동은, 말 그대로 조금 ‘서툴렀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서울역 등에서 문화행동을 진행해 온 노숙운동단체에 비해, 문화연대의 경우 처음으로 노숙인들과 대면하는 자리여서 긴장했던 탓일까. 준비부족으로 행사가 지연되기도 했고, 영화선정의 문제 - <슈퍼스타 감사용>의 선정과정과 내용에 대한 문제 - 가 평가되기도 했다. 주되게는 결국 노숙인 당사자들을 ‘행사참여자(객체)’로 만드는 형식의 행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4월. 이번에는 영등포공원에서의 공연이었다. 장소대여와 관련하여 시설관리공단에서는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소를 불허하였고, 행사는 강행되었다. 전기 사용을 위해 벌어졌던 해프닝 - 결국 발전기를 급하게 대여하면서 마무리 - 과 시설관리공단의 ‘고발’ 운운에도 불구하고, 노숙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참여로 빛난 공연이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춤 공연, 당사자모임의 노래공연, 그리고 참가자 모두가 함께 진행한 타악퍼포먼스는 행사기획자, 참가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5월에는 감리교신학대에서 감신대 노래패의 노래공연과 함께 독립영화를 상영했다.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 <상암동 월드컵, ‘사람은 철거되지 않는다’>라는 두 편의 독립영화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했다.


지난 세 차례의 문화행동을 그 자체로만 평가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개별 행사의 규모, 예산, 기획과 집행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동의에서 출발한 만큼 준비부족으로 인한 평가의 지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 4, 5월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정말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중장기적인 문화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 삶의 주체로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화행동의 목적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숙인 문화행동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 게스트로 참여한 사람 모두 매우 만족해하는 행사라는 점이다.


‘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의 이후 계획은, 노숙인 농활지역에서의 영화상영(6월)과 이후 <문화워크샵>을 통한 문화행동으로 잡혀있다. <문화워크샵>은 지난 활동 평가를 통해 노숙인 스스로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중장기적으로 노숙인 스스로가 조직화되는 것이 노숙인 운동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획되었다. <문화워크샵>의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7, 8월 - 9월부터는 미디액트의 지원으로 <노숙인 영상활동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계획 - 두 달의 기간 동안 마술, 미술(치료), 음악, 요리, 사진 등의 워크샵이 진행될 예정이며, 두 달 동안의 ‘야심만만한’ 워크샵 이후에는 발표회, 전시 등의 문화행동 또한 기획 중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조금 앞서가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민해보자. 아니 이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노숙인 재활 혹은 자활의 목적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에 있는지. 그래서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 질서로 편입되는 것에 있는지를. 물론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노숙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구축마저 미흡한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동시에’ 고민되어야 하는 문제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은 이러한 자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집을 구하고 취직을 하라!”라는 구호에 대해 왠지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노숙인의 존재적 특성, 정체성은 주거의 불안정성과 함께 스스로 조직해야 할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노숙인은 일상적으로 적게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적 특성에 기반한 운동도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정부, 기업, 언론이 자극하는 소비자본주의적 삶의 지표를 거부하면서도 더 건강하게, 더 의미있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공동체운동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거, 생활, 교육 등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집단과 공동체의 역능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많은 실험적인 공동체운동이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운동은 개인, 가족단위로 분화된 주거, 모든 생활의 영역이 시장질서에 편입되면서 악화되는 생활․환경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주거, 육아, 교육 등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나가는 대안적 삶의 운동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라는 표현은, 이러한 공동체운동에 착안하여 노숙인 스스로가 공동으로 주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또한 함께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도달 불가능한 ‘이론적인’ 목표라고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교육 등과 관련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적극적인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화공동체운동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실시 예정인 매입임대주택 사업을 통해 노숙인 문화공동체운동의 모델을 고민할 수 있다. 즉 매입임대주택 입주자들의 문화공동체운동을 통해 문화예술프로그램, 교육프로그램, 공동육아 등을 관련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연계하여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을 거점으로 학교,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문화의 집 등과 연계한 프로그램도 기획할 수 있겠다.


글을 쓰고 보니 겨우 몇 차례 문화행사의 경험으로, 그리고 아직 운동의 현장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해 상상해 본 것이라 매우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리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모쪼록 지속적인 문화행동이 노숙인 당사자 분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나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를 통해 나 자신의 고민 또한 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실노협 기관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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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문화행동'을 시작하며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먼저 솔직한 고백부터 하자. 지난 1월 22일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과 집단행동이 있기 전까지 노숙과 노숙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울역 사망사건에 대한 인터넷에서의 악플들 - “노숙자 인권 이전에 시민의 인권과 안전부터 고민해라!”, “게으른데다가 술 먹고 행패부리는 노숙자에게 무슨 인권이냐?”와 같은 - 을 보며, 노숙인에 대해 평소 무의식중에 가졌던 생각을 떠올리며 섬뜩함을 느꼈다는 사실을. 문화연대가 <노숙인 사망사건 실태조사와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연대모임>(이하 <연대모임>)에 참가하게 되고 또 ‘노숙인 문화행동’을 고민하게 된 것도, 사실은 노숙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가졌던 이 같은 선입견과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면서였다.


노숙의 문제는 온갖 사회문제가 집약된 결정체와도 같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 강화되는 빈곤과 민중생존권의 문제, 저소득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및 건강권의 문제, 차별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교육의 문제, 문화적 소외와 배제의 문제 등. ‘IMF 극복’이라는 선언 이후 ‘2만불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빈곤계층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계급계층간 차별과 갈등만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모순의 최극단에 노숙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말해 이러한 사회 구조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숙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 문제를 다루는 정부와 언론의 태도는 전형적인 ‘피해자 때리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거리노숙인의 특정한 행위를 부각시켜 거리노숙의 모든 책임을 ‘다시’ 노숙인에게로 몰아가는 가운데,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사회 구조의 문제나 정작 필요한 응급지원체계의 문제, 노숙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복지․의료․주거정책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시민 對 노숙인’이라는 피지배계급 내부의 갈등만이 부각되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고 있다.


문화연대가 <연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주되게 고민한 지점이 바로 이른바 ‘시민 對 노숙인’의 갈등구조의 극복 문제이다. 즉 노숙과 노숙인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시민 對 노숙인’의 갈등구조(의 방치와 조장)이며,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이런 갈등구조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숙인 문화행동’을 통해, 게으르고 낮부터 술 마시며 행패부리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노숙인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은 감성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자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숙인 정책의 방향과 노숙인 운동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 또한 존재한다. 즉 현재와 같은 복지정책의 체계 - 가구 중심의 지원정책, 국민등록제도에 기반한 복지정책, 저축과 취업의 요구 등 - 로는 근본적으로 노숙인에 대한 ‘관리와 통제’라는 정책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노숙인 문제 해결의 핵심은 ‘자활’이나 ‘사회로의 복귀’가 아니라 노숙인의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노숙인 개개인의 삶의 질의 문제에 있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이 사회구성원의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거리에서도, 쪽방에서도, 쉼터에서도 그들의 건강권, 교육권, 문화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며, 오히려 이렇게 노숙인 개개인의 삶의 질이 보장된 이후에 ‘자활’과 ‘복귀’도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노숙인 운동 또한 주거문제를 중심으로 한 근본대책의 마련과 함께 현재 노숙인의 ‘삶의 질’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노숙인 문화행동’은 노숙인의 문화적 권리 쟁취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한 해 동안, 그 동안 지속적으로 노숙 현장에서 운동을 해 온 많은 분들과 함께 올 한 해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진행할 것이다. ‘노숙인 문화행동’과 같은 정기적인 문화행동 프로그램이 인권, 시민권, 기본권이 박탈당한 채 사회에서 배제된 노숙인 문제에 대해 사회운동적 차원의 연대감 형성과 함께, 노숙인 당사자 간의 소통과 교류를 확대하고 나아가 노숙인 운동의 주체를 확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역에서 사망하신 두 노숙인 당사자 분들을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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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展> 스케치: 아주 타당한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국보법은 비단 표현을 업으로 삼는 우리 미술인 뿐 아니라, 오만가지 표현에 의존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오늘날, 그 의사소통의 근거인 ‘표현’과 ‘자유’를 범법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현행법으로 존속하는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나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이번 전시의 성격은 국보법이 우리 삶의 ‘안전을 위태하게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느껴서, 그 위기감에서 벗어나 우리들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시국선언’임을 밝힌다.” - 반이정 (전시기획자)

지난 10월 15일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전시실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라는 작가 12명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시국선언展>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법조문을 넘어서 개인과 공동체의 ‘타당한 자유와 권리(표현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 인권 등)’를 억압하는 상징체계로 자리잡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작가들의 기억과 고민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참여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국가보안법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도 있다.

전시장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재료로 한 작가 12인의 재기발랄하면서도 솔직한 표현과 상상력을 접할 수 있다. 어렸을 적 한두 번은 받아봤음직한 ‘반공그리기대회’ 상장을 소재로 한 김태현의 작품 <개같은 내인생>, “이념은 색칠하기 나름이라”며 국가보안법의 ‘색깔씌우기’를 비판하고 있는 노순택의 작품 외에도 옥정호, 최경태, 조습, 반이정, 김학량, 김형석, 이제, 최진욱 등 작가들 모두가 국가보안법과 국가보안법이 상징하는 한국 사회의 억압을 비틀고 또 반문하고 있다.

이 중 ‘학교사수단’과 김형석의 작품은,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작품으로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교과서 제목을 고치던 학창시절을 기억을 되살려 준 ‘학교사수단’의 작품 <굼벵이의 보행법>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논’ 중학생들의 상상력을 접함과 동시에 직접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국가보안법”이 “곰~결혼하자”나 “즐겨라 본드의 향긋한 냄새를”로 바뀌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김형석의 작품 <모두 함께 주술을 풀어나가요>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주술을 푸는 ‘대못’을 국가보안법에 꽂아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대못을 박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번 주 토요일(23일)이면 전시가 끝나게 된다. 늦었지만 전시장에 꼭 들러 12명 작가들의 상상력을 확인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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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얘기는 이렇다. 1948년 제정된 이래 56년 동안이나 전국민을 억압해 온 악법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눈앞에 와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폐지’를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되, 그 동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온 수많은 민주세력과 국민적 여론이 그 결정적 배경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한켠으로 치우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0월 4일 시청앞 광장에 모인 10만의 인파로 증명된, 국가보안법 사수를 위해 몸부림치는 세력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 빨갱이 천국 => 나라 망함’이라는 논리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하는데 성공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길거리에 인공기를 들고 뛰어다녀도 잡아들일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람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하고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가보안법 폐지를 ‘현실적 조건’에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성 싶다. 요약하자면 ‘폐지를 전제로 한 유연한 대처(?)’라고나 할까. 어쨌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유와 목적이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쪽으로 당론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과도 유사하다. 열우당은, 우익들의 극렬한 반발을 고려함과 동시에 ‘실질적 폐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만큼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정치적으로 승리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그리고 별 것 아닌) 내 경험에 근거해볼 때, 국가보안법은 ‘그냥 없어져야할’ 법일 뿐이다. 국제적인 흐름이나 유엔의 권고 등 국가보안법 폐지의 근거로 제기되는 수많은 사실들을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유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만 접속해보자. 인터넷 사이트를 조금만 둘러봐도 이른바 ‘이적표현물’은 널려있다. 마음만 먹으면 북한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고, 그들의 주장을 접할 수도 있다. 요컨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국가보안법은 오히려 ‘악법이기보다 현실적으로 유효성이 없는 법’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절대 사수를 외치는 우익의 주장을 고려하여 대체입법, 형법보완 등을 검토하는 것 또한 나에게는 ‘현실성 없는 모색’에 불과하다. 국가보안법은 존재 자체가 넌센스인 법일 뿐이다.


또 같은 이유로 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라는 주장 또한 이번 싸움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슬로건이라고 생각한다. 형법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는 대략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던 내용을 형법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일텐데,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으로 야기된 억압과 탄압을 인정, 지속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형법으로 대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이유라기보다는 우익들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 수사라고는 믿고 있지만,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그 법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이데올로기를 모두 소멸시키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번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당장에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의 명칭을 없애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정치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공기를 들고 뛰어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게 뭐 어때서?’라고 이야기하고 논쟁하자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의 실질적, 실천적인 폐지를 위한 싸움. 당당하게 ‘완전 폐지’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하자.


<참고 :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국가보안법 폐지 문화주간 삐이라’에서 발췌)


- 수학적이지 못한 법이군요 : 피타고라스

- 그 법 좀 저리 치워주시겠소? : 디오게네스

- 국가가 병들만한 법입니다 : 히포크라테스

- 지옥에 온 기분입니다 : 단테

- 나비의 법입니까, 인간의 법입니까? : 노자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법이군요 : 비트겐슈타인

- 입체적인 법은 아니군요 : 피카소

- 외계인의 음모입니다 : 멀더

- 박제가 되어버린 법을 아시오? : 이상

- 상상할 수 없는 법이군요 : 존 레논

 

* 이 글은 민예총 일일문화정책동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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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가서...

'우리형' 봤다. 원빈 나오는...ㅠ.ㅠ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남포동 인파를 헤집으며 영화보는게 애당초 불가능한건가. 다른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가긴 했지만, 여튼 참... 그렇네... 지랄.

 

 

 

 

 

 

 

원빈 잘생겼다.

 

 

 

 

 

 

아! 부산 비엔날레도 잠깐 구경했구나. 음... 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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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 '일일문화정책동향'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문화연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연극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와~ 대단한데...” 음악을 전공한 친구라 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연극에 쓰이는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한다고 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연극에 참여하면서 계약(?)한 방식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건너건너 알게된 음악감독을 소개받고’ 프로젝트와 같은 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단다. 이른바 ‘도급계약’이 아닌가. 물론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을 것이고,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인 만큼 생각보다 적은 돈을 받고 매일 저녁 피아노를 칠 것이다. 그래도 연극이 다음달 말까지 계속한다 그러고, 게다가 연극이 재밌다고 하니깐 꼭 한 번 보러가리라 마음은 먹고 있다.


얼마 전에 ‘부당사례 고발과 그 해결이 있는 곳!’이라는 부제의 <영화인신문고> 사이트가 개설되었다. 4부 조수협회(한국영화조감독협회, 한국영화제작부협회, 촬영조수협의회, 조명조수협의회)와 필름메이커스, 비둘기둥지 등은 <영화인신문고> 사이트(http://210.118.195.55/union/)를 만들고 영화제작과정에서 스탭들이 겪는 불이익과 부당한 처우에 대한 신고를 받고 있다. 사이트에는 현재 근로기준법, 최저임금에 대한 질의부터 영화사, PD 등을 고발한다는 내용까지 다양한 내용의 50여개의 글이 올라와 있는 상황이다.


영화스탭의 경우, 영화제작기간이나 노동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품당 계약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급계약, 통계약 등의 방식으로 계약을 하다고 한다. 이러한 계약조건은 영화스탭들을 만성적인 저임금으로 내몰고 있으며, 흥행성적을 이유로 혹은 스탭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무기로 잔금이 지급되지 않거나 심지어 제대로 계약도 하지 못한 채 무급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영화스탭의 고용과 임금계약방식의 현황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정규직으로 고정급제를 받는 스탭은 전체 1.3%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계약직으로 개별계약(40.1%)하거나 도급계약으로 직급별 분배(40.8%)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임금지급방법도 1회 지급은 10.3%인데 반해, 2회 분할지급이 65.2%로 조사되었다.


‘실미도’와 ‘태극기를~’이 한국영화 천만 관객시대를 여는 동안, 그리고 영화제작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동안에도 영화스탭들의 고용구조나 임금은 크게 개선된 것이 없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스크린쿼터를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2000년 : 32.6%, 2001년 : 46.1%, 2002년 : 45.0%, 2003년 : 49.4%), 영화스탭들은 임금과 관련한 피해를 경험한 사례가 72%가 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스탭의 임금 수준을 보면, 연봉 300만원 미만이 15.7%, 300만원~600만원이 40.9%, 600만원~900만원이 14.2%로 평균연봉 634만원의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영화의 성공은 현장 스탭들을 착취하면서 이루어 낸 고통과 눈물의 결과라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현실에서 진행 중인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 영화계, 문화계 전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투쟁의 영역과 과제가 영화현장으로, 영화계 내부로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 예술영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 - 마이너리티 쿼터 도입, 전용관 건립 등 - 과 열악한 현장의 영화스텝들의 처우 개선 등 이른바 한국영화 대박신화의 ‘그늘’로 이야기되는 부분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노력과 요구가 없다면,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현실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부 조수연합의 활동은, 따라서 스크린쿼터 투쟁을 적극적으로 확장해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이제 ‘다시 한 번’ 촉발된 스크린쿼터 논쟁을 문화다양성 수호를 위한 (확장된) 사회적 발언으로 심화시켜야 한다.


4부 조수연합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이들의 활동이 문화예술운동의 현장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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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 조선일보, 노란색 조선일보를 보지 맙시다

* '일일문화정책동향'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석간 조선일보, 노란색 조선일보를 보지 맙시다

: 문화일보 절독운동을 제안하며


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명색이 운동단체의 정책실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정보 수집에 ‘매우(!)’ 둔감한 편이다. 그나마 꼭꼭 챙겨보던 한겨레신문도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스포츠 소식을 접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문제가 심각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주변에 워낙 정보에 밝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래저래 귀동냥으로 얻는 정보만으로 그나마 심하게 뒤처지지는 않게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무실에 꼬박꼬박 배달되어 오던 문화일보에 별다른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끔 크게 이슈가 되는 일이 있거나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만 - 석간의 장점이다 - 꼼꼼히 살펴봤을 뿐, 평소에는 다른 신문과 마찬가지로 스포츠 소식을 보거나 내일의 운세를 보는 정도였다. 그렇게 ‘문화’일보라는 이름만으로 여전히 다른 신문보다 후한 점수를 받으며 사무실에 문화일보가 하나 둘 씩 쌓여가고 있었다.


9월 1일 문화일보, 분노가 폭발하다


9월 1일자 문화일보다. 늦은 점심을 분식집에서 먹으며 신문을 뒤적이다가 정말 먹던 라면이 솟구쳐 오를 정도로 열받는 글을 읽게 되었다. 문화일보에는 <시론>이라는 꼭지가 있는데, 이 꼭지에는 논설위원이나 외부 전문가 등이 칼럼과 같은 글을 싣게 된다. 이 날 문화일보 <시론>에 이신우라는 인간이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한 글을 실었다.


... 지율 스님과 시민단체가 ‘천성산 도롱뇽’ 명의로 고속철도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신청을 울산지법에 낸 것은 2003년 10월. 울산 지법은 이 소송에 대해 “도롱뇽과 사찰은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다”며 지난 4월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 따라 공사가 간신히 진행되려던 판이었는데 최근에 다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법의 허가를 받아놓고도 여승의 습관적 ‘단식 소동’ 앞에서 청와대가 사실상 무릎을 꿇은 것이다. 청와대라면 대통령을 의미하고, 대통령이야말로 취임식장에서 온 국민 앞에 이 나라의 국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히 선언한 제1 공직자 아닌가....

- 이신우, ‘헌법 위에 단식투쟁 있나’ 中


“여승의 습관적 ‘단식 소동’이라고!?!?”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생명과 환경, 생태의 중요성을 몸소 말하고 계시는 지율 스님의 단식을 ‘여승의 습관적 단식 소동’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정말 놀라서 까무러칠 뻔 했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보수/우익/꼴통’ 등 어떠한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이신우라는 인간의 표현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글 전체의 맥락 또한 천성산 고속철 터널 공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앞뒤 맥락은 모두 생략한 채 ‘당장에 공사를 중단함으로서 드는 사회적 비용은 어쩔 것이냐’는 주장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우리 모두 인정하다시피 개발과 환경파괴를 중단함으로써 얻는 사회적 효과는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어떻게 일간지 칼럼에 그런 ‘인격 모독적인’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정말 그 잘난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문화일보 절독운동으로


이번 사건을 겪으며 문화연대에서는 문화일보를 끊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이달 말까지는 보라는 신문배달원과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사실 그 동안 문화연대에서는 문화일보가 최고경영자, 편집장 교체 이후 조선일보보다 더 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전체적인 기사의 논조도 없고, 신문의 특색도 없이 다만 ‘오후에 나온다’는 이유로 문화연대가 문화일보 구독을 선택한 것에 대한 내부 반성도 진행하였다. 이렇게 내부에서 문화일보를 둘러싼 말들이 오가는 동안, 누군가 문화일보를 ‘석간 조선일보’라고 표현하였다. 오후에 나오는 조선일보! 노란색 조선일보! 최근 문화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보다 심하다”고 충분히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화일보를 ‘석간 조선일보’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혹여나 문화일보를 보고 계신다면, 절독을 권유하는 바이다. 절독의 이유를 찾으시려면... 문화일보 사이트에서 9월 1일자 <시론> 글을 한 번 읽어보시라. 확실하다. 심장이 약하신 분들이나 쉽게 흥분하는 분들의 경우 읽으실 때 극히 조심해야 할 정도라고 확신한다. 나의 경우, 그 글을 읽고난 후 환경운동연합의 아는 사람들에게 바로 전화해서 “같이 문화일보 절독운동을 진행하자”고 제안했을 정도였으니... 지율 스님의 건강과 천성산 터널 공사의 중단을 기원하며, 열화와 같은 ‘문화일보 절독운동’으로 불량언론에 일침을 가할 수 있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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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절독운동'을 제안합니다... 여승의 습관적 '단식 소동'이라니!!!

9월 1일자 문화일보 '시론'에 이신우라는 인간이 쓴 글입니다.

 

'논조없음'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후에 나오는 누런색 신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근근히 버텨온 문화일보. 하지만 이번 기사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지율 스님의 단식을 두고 '여승의 습관적 단식소동'이라니!!!

 

문화일보 절독운동을 제안합니다. 문화일보, 사지도 보지도 맙시다!!!

 

아래 글을 읽으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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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위에 단식투쟁 있나

법을 만들어 놓았다고 사회가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법은 이를 다루는 사람들의 지성과 선의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시민단체나 정부 스스로에 의해 법이 농락당하고 있다. 특히 천성산 고속철 터널공사가 겪고 있는 파행은 이 나라의 법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지율 스님과 시민단체가 ‘천성산 도롱뇽’ 명의로 고속철도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신청을 울산지법에 낸 것은 2003년 10월. 울산 지법은 이 소송에 대해 “도롱뇽과 사찰은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다”며 지난 4월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따라 공사가 간신히 진행되려던 판이었는데 최근에 다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법의 허가를 받아놓고도 여승의 습관적 ‘단식 소동’ 앞에서 청와대가 사실상 무릎을 꿇은 것이다. 청와대라면 대통령을 의미하고, 대통령이야말로 취임식장에서 온 국민 앞에 이 나라의 국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히 선언한 제1 공직자 아닌가.

지율 스님은 천성산의 도롱뇽을 살려달라며 지난 2003년 3월과 11월 각각 38일과 45일씩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패소하자 올여름에는 아예 청와대 앞으로 단식 농성장을 이전했다. 법원의 가처분소송 패소 결정이야 있건 말건 공사를 중단하라는 협박이었다. 아무리 종교인이라지만 한 나라의 실정법을 이토록 희화화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율 스님이나 그 주변의 시민단체에 묻고 싶다. 종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왜 유독 도롱뇽만 행복해야 하는가. 고속철 공사가 당신네들의 뜻대로 천성산을 우회한다고 하자. 그럼 우회 지역에 살고 있는 맹꽁이, 금개구리, 남생이, 까치살무사 등 정작 자연환경보존법의 보호대상으로 지정돼 있는 다른 생명들은 불행해져도 좋다는 이야기인가. 당신들이 점지해준 생명만 생명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더 큰 잘못은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비서관에게 있다. 그는 얼마전 단식 현장을 찾아가 스님 앞에 무릎 꿇는 자세로 통사정했다. 통사정이든 뭐든 다 좋다. 하지만 소위 법률가 출신이라는 사람이 태연하게 “항고심 결정이 나올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고 대신 판결 결과에는 양쪽 다 승복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발언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담겨 있다.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만큼 현재로서는 여승이 아니라 건교부 및 일선 민간기업만이 공사 진행의 자율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문 수석은 중재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벤트에 약한 건교부나 개인회사의 이해관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투다.

두번째로 문 수석은 미리 공사중단을 선포함으로써 부산고법의 항고심 결정을 앞두고 외부로부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잘못을 범했다. 게다가 ‘부산고법의 판결 결과에는 승복하자’고 제안함으로써 결국 1심 결정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치부했다. 만일 재항고까지 갈 경우 1심 때처럼 부산고법의 결정마저 무효화할 수 있다는 논법인가.

우리는 흔히 종교인 내지 시민단체라면 정의나 진리만을 따르거나, 아니면 당연히 국민 다수의 의사를 반영할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 ‘종교’ ‘시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마력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구성은 국민 의사를 골고루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특정 파당의 선호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인조차 번뇌로부터의 해탈보다 오직 이기고 말겠다는 집착으로 가득차 있을 수도 있다.

종교인이든 시민단체든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차별적 ‘편익’에 따른 차별적 ‘비용’을 부담할 의무가 있다. 지율 스님과 시민단체는 청와대로부터 차별적 편익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만일 법원에서 천성산 터널과 관련해 최종적으로 공사 재개 결정이 내려질 경우 지금까지의 공사지연에 따른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것인가. 그냥 국민의 몫으로 떠넘겨버릴 작정인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이신우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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