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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자율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 노숙인 문화권 운동을 시작하며

_최준영 / 문화연대 정책실장 ptrevo@jinbo.net



들어가며 : 노숙, 해방, 문화


정의와 당위의 문제를 넘어서는 노숙인 문화운동의 실천이 무엇일까. 지난 1월 서울역에서 발생한 노숙인 사망사건 이후 처음으로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고민했던 지점이다. 유목, 방랑, 자유 혹은 불결, 주정, 공포. 노숙과 노숙인에 대한 기존의 사회 관념은 어느 것 하나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힌트조차 주지 못했다.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노숙인 개개인을 분리 - 기존의 사회 질서로부터 노숙인 ‘집단’을 분리, 또한 노숙인 개개인을 서로에게서 분리 - 하여 고립시키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행동은, 주체로서의 노숙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그로부터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의 고민과 실천을 확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주체, 운동의 주체로서 노숙인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노숙인 운동을 이제는 ‘해방운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숙인 문제가 ‘재활’이나 ‘사회복귀’를 전제로 한, 이른바 평균적인 경제․사회․문화적 지표를 따라잡는 것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질서의 창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이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른바 ‘정상 이데올로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노숙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게 하는 ‘해방운동’의 운영원리와 실천을 문화와 문화운동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권, 노숙인 문화권


문화권 혹은 문화적 권리는, 사실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워낙에 ‘소비’를 통해 문화적 행위를 하는데 익숙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문화생활을 경제적 문제 해결 이후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여기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웰빙’ 담론이 몸과 건강 그리고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이러한 관심은 경제적․공간적․신체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공적인 문화생활의 향유가 아니라 수십만원 대의 용품을 사야지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노숙인 문화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일 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화권은 문화(생활)에 대한 자유권, 평등권, 참여권 등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문화생활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주거가 일정치 않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빈곤하다는 이유로 최고한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기본권으로서 문화권의 위배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공공영역의 확대를 통해 노숙인의 기본적인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 - 공공문화기반시설 문화프로그램에의 참여 보장 및 유도, 문화바우처제도의 확대, 사회교육의 확대 등 - 이 적극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문화권을 정의하고 문화운동의 실천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국가정책적 차원 혹은 문화복지적 차원의 실천을 전제로 하되, 이를 넘어서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실천이 고민되어야만 한다. 노숙인의 정체성에 기반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문화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 참여나 교육, 관람이 아닌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문화행동을 조직하는 일이 그것이다. 요구나 당위의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획득하는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가야 한다.


노숙인 문화행동의 시작과 평가, 이후 계획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가칭)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이, 앞서 언급한대로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문화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취지에 전적으로 부합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해방운동’으로서 노숙인 문화권 쟁취운동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다짐하면서 지난 활동을 돌아보자.


3월 문화행동.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진행하기로 한 문화행동의 첫 시작이었다. 서울역에서의 간단한 공연과 영화상영으로 기획된 첫 번째 문화행동은, 말 그대로 조금 ‘서툴렀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서울역 등에서 문화행동을 진행해 온 노숙운동단체에 비해, 문화연대의 경우 처음으로 노숙인들과 대면하는 자리여서 긴장했던 탓일까. 준비부족으로 행사가 지연되기도 했고, 영화선정의 문제 - <슈퍼스타 감사용>의 선정과정과 내용에 대한 문제 - 가 평가되기도 했다. 주되게는 결국 노숙인 당사자들을 ‘행사참여자(객체)’로 만드는 형식의 행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4월. 이번에는 영등포공원에서의 공연이었다. 장소대여와 관련하여 시설관리공단에서는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소를 불허하였고, 행사는 강행되었다. 전기 사용을 위해 벌어졌던 해프닝 - 결국 발전기를 급하게 대여하면서 마무리 - 과 시설관리공단의 ‘고발’ 운운에도 불구하고, 노숙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참여로 빛난 공연이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춤 공연, 당사자모임의 노래공연, 그리고 참가자 모두가 함께 진행한 타악퍼포먼스는 행사기획자, 참가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5월에는 감리교신학대에서 감신대 노래패의 노래공연과 함께 독립영화를 상영했다.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 <상암동 월드컵, ‘사람은 철거되지 않는다’>라는 두 편의 독립영화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했다.


지난 세 차례의 문화행동을 그 자체로만 평가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개별 행사의 규모, 예산, 기획과 집행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동의에서 출발한 만큼 준비부족으로 인한 평가의 지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 4, 5월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정말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중장기적인 문화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문화행동을 통해 노숙인 당사자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 삶의 주체로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화행동의 목적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숙인 문화행동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 게스트로 참여한 사람 모두 매우 만족해하는 행사라는 점이다.


‘노숙인 문화권 증진을 위한 문화행동’의 이후 계획은, 노숙인 농활지역에서의 영화상영(6월)과 이후 <문화워크샵>을 통한 문화행동으로 잡혀있다. <문화워크샵>은 지난 활동 평가를 통해 노숙인 스스로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중장기적으로 노숙인 스스로가 조직화되는 것이 노숙인 운동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획되었다. <문화워크샵>의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7, 8월 - 9월부터는 미디액트의 지원으로 <노숙인 영상활동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계획 - 두 달의 기간 동안 마술, 미술(치료), 음악, 요리, 사진 등의 워크샵이 진행될 예정이며, 두 달 동안의 ‘야심만만한’ 워크샵 이후에는 발표회, 전시 등의 문화행동 또한 기획 중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


조금 앞서가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민해보자. 아니 이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노숙인 재활 혹은 자활의 목적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에 있는지. 그래서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 질서로 편입되는 것에 있는지를. 물론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노숙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구축마저 미흡한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동시에’ 고민되어야 하는 문제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에 대한 상상은 이러한 자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집을 구하고 취직을 하라!”라는 구호에 대해 왠지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노숙인의 존재적 특성, 정체성은 주거의 불안정성과 함께 스스로 조직해야 할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노숙인은 일상적으로 적게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적 특성에 기반한 운동도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정부, 기업, 언론이 자극하는 소비자본주의적 삶의 지표를 거부하면서도 더 건강하게, 더 의미있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공동체운동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거, 생활, 교육 등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집단과 공동체의 역능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많은 실험적인 공동체운동이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운동은 개인, 가족단위로 분화된 주거, 모든 생활의 영역이 시장질서에 편입되면서 악화되는 생활․환경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주거, 육아, 교육 등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나가는 대안적 삶의 운동이다.


자율적이고 대안적인 문화공동체라는 표현은, 이러한 공동체운동에 착안하여 노숙인 스스로가 공동으로 주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또한 함께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도달 불가능한 ‘이론적인’ 목표라고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교육 등과 관련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적극적인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화공동체운동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실시 예정인 매입임대주택 사업을 통해 노숙인 문화공동체운동의 모델을 고민할 수 있다. 즉 매입임대주택 입주자들의 문화공동체운동을 통해 문화예술프로그램, 교육프로그램, 공동육아 등을 관련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연계하여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을 거점으로 학교,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문화의 집 등과 연계한 프로그램도 기획할 수 있겠다.


글을 쓰고 보니 겨우 몇 차례 문화행사의 경험으로, 그리고 아직 운동의 현장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노숙인 문화운동에 대해 상상해 본 것이라 매우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리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모쪼록 지속적인 문화행동이 노숙인 당사자 분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나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를 통해 나 자신의 고민 또한 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실노협 기관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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