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강령은 무엇으로 표현되어 지는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에게 대항하는 무기는 조직과 사상이다. 스스로 지배계급의 대열로 합류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부르주아와는 다른 방식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무기는 조직과 사상일 수밖에 없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능력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몸 하나만 가지고 있기에 뜻은 원대하지만 시작은 미미하게 나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더욱더 조직과 사상이라고 스스로에게 무장이 되어 수밖에 없다. 부르조아에게 대항할 수 있는 조직과 사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자계급의 전위인 당으로 표현되어진다. 협의체가 아니고 자신의 힘을, 권력을 장악하기위한 수단으로서의 당은 노동자계급의 정치결사체인 것이다. 남한의 현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결사체인 당이 없는 관계로, 더 직시하자면 당적인 활동을 하는 조직이 없는 관계로 노동계급의 무기가 없어서 언제나 패배하는 모습으로, 쁘띠부르조아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표를 몰아주는 표찍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진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역적관계와 아는 사람이라는 것, 혈연의 차이는 극복되어 지는 것이 아니며, 정치적 경험 속에서만이 각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결정적 역활을 하는 것은 혁명이며, 혁명에서 주도적으로 대중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계급정당이며 노동계급의 정치 결사체이다.

 


노동계급의 당, 계급정당의 실현을 위한다면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계급정당의 모습을 바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선 당적인 활동을 통하여 조직의 모습과 활동을 보여주는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이다.  당적인 활동은 강령에 따르는 모습을, 규약과 강령에 나타나는 바를 대중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선전과 선동 그리고 조직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강령의 모습은 아직도 대선강령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지고 선거강령의 모습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만을 밝혀 혁명의 대의를 제시하고는 있어 그나마 불꽃의 씨앗을 잉태하여 유지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ㅡ 대선 강령을 주장하는 조직의 내용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는 없다. 기회주의 입장에서 프로레타리아트 권력의 내용을 버렸고, 노동자 국가 또는 노동자정부를 제시하는 선거강령에서는 그 내용을 선전 선동한다는 것보다는 조직의 한계로 라는 인식을 스스로 공유하여 책임을 회피한다. 주체 역량의 미비는 대선후보의 외부영입(명망가라는 식의 인사영입)이라는 자충수를 두면서 선전선동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하고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직의 힘을 빌러서 함께하고자하는 후보는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과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고 보기에는 표를 구걸하여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겠다는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사회주의 후보는 명망가를 제시하지 않는다. 명마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쁘띠부르조아의 입장에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명망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망가의 영입으로 사회주의 활동의 모습은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현실이 명망가를 만들고 그 명망가는 투쟁의 자리에 존재한다. 영입해온 명망가는 누가 알아주던가? 권영길이 알아 주던가! 김대중이 알아 주던가! 이름이 많이 알려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좌파로 오지 않고, 좌파의 힘이라도 빌리겠다라는 경우는 자신의 조직만으로 힘이 벅차 한손이라도 더 많이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오는 작자들 뿐이다. 누가 나가서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들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조직원을 선거공간에 나가게 하는 것이 옳바르다.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하고 함께하고 있는 조직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확실하게 표현하여 대중을 빨간색의 사상에 물들이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선거참여는 돈이 좌우를 하기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해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찾아 내어야 한다는 점이 항상 눈에 밟힌다.ㅡ 사회주의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기에는 아직도 미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쁘띠부르조아 정당인 민주노동당내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독일, 프랑스사민당에서 사회주의를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역사의 흐름은 같은 장면을 두 번 보여준다. 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 노동계급을 위한다면 당적인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노동계급정당을 만들어야 함은 이미 시작되어진 혁명의 출발점이다. 조직 없이 혁명은 성공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유지는 못하는 것이다. 전위는 혁명의 성공만을 위하지는 않는다. 혁명에 대한 계승발전 그리고 혁명에 대한 성공에서의 유지를  하기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기회주의적 조류의 무정부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기회주의적 조류의 핵심은 원칙이 없이 그때의 흐름에, 대중의 투쟁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내용만을 가지고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비정규직철폐가 현재 계급전선의 상위에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원칙이 무엇인가? 혁명에 대한 완수이다.  전략적인 승리를 위해서 전술적인 모습은 후퇴와 전진을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중의 투쟁이 먹을 것을 위한다고 할지라도 전술의 승리를 위해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전략적인 승리를 거머질 것인지를 파악하고 전술적인 모습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셰비키의 대중에 대한 전술적인 투쟁이 10월혁명 이전에  빵, 자유, 평화를 외치는 것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본개념에서 나타난 것이다. 부르조아 정부의 모습을 대중 스스로 계급적인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투쟁의 방식을 표현한 것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충하여 투쟁의 강도를 강화 시킨다.  이중권력의 혁명적인 상황에서 권력의 장악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전술적인 모습은 언제나 대중을 그 자리에 맴돌아 챗바퀴를 도는 다람쥐신세로 전락시켜 또 다시 부르조아의 지배를 강화시켜주거나 패배하는 프로레타리트의 모습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권력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대중들의 투쟁을 개량에 만족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찾아 내어 유지 발전 시키고자 한다면, 어떤식의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지를 인식 시킨것이 1917년의 혁명이다.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쁘띠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대중의 모습을 우유부단하게 만들고, 방향점을 찾지 못하여 좌충우돌하는 모습속에서 승리는 부르조아의 몫으로 떨어진다. 확고한 대안과 신념은 피지배계급에게 무엇이 계급간의 차이점인지 인식시켜주며 전진의 발걸음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이 대안인가? 당적활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강령이 대안인 것이다. 강령의 모습을 권력의 모습, 추구하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 이상과 현실에 대한 경계선을 명확하게 이어주는 고리인 것이다. 고리를 가지고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을 거울로 비추어 준다면 자신들의 처지를 파악하면서 스스로 무엇을 해야 만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여 갈 수있는 깅르 찾아 가게 된다.  당적인 활동의 핵심은 규율도 중요하지만 강령에 대한 모습을 대중에 제시해 하는 것은 강령의 모습을 가지고 투쟁의 현실에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기회주의 세력과의 모습의 차이는 강령의 투쟁을 개량에만 머물지 않고 혁명에 대한 전진으로 모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강령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개량적인 모습을 담아내야함은 기본이다. 물적인 담보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인간다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시작이기 때문에 개량적인 모습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물적인 여건들이 나타나고 실현되었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이 아닌 이상 계속적인 발전을 위한다면 강령의 개량적인 모습은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발전은 변화를 담보하는 축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량적인 강령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강령투쟁의 모습에서 개량투쟁의 모습만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자들이 가고자하는 바를 제시하지 못하는한 언제나 그 자리에 맴돌아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어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혁명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대중의 투쟁의 능력을 심화시키고 관료적인 조직에서 해방을 시키면서 능동적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가고 권력에 대한  장악의 의지를 표출하게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하는 임무이며, 그것이 쌓여갈 때 혁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령의 내용은 무엇을 담보를 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형식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이 강령의 핵심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 사회의 확립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투쟁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레닌 저작집1 우리의 강령 p78) 자본주의의 극복인 사회주의 실현으로서의 노동자국가, 계급적인 모순의 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투쟁을 벌여나가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차별철폐를 위한 비정규직철폐,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최저생활임금 쟁취, OECD의 국가중에서의 최장의 노동시간을 임금축소없는 6시간노동시간 등등의 모습을 담아 낼수 있다.(강령의 모습은 다음장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강령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어떤 식의 사용방식을 사회주의자들이 가져야 하는지를 밝혀 나가야 하는 것이 혁명을 주장하고 대중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의식이다. 강령은 개량적인 부분과 혁명적인 정치적인 내용을 함께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대중에게도 제시할 땐 어떠한 경우라도 혁명에 대한 상상을 제시 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 대중을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중의 의식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인하여 보수적인 형태로 자신의 의지를 억제( 또는 억압) 해 왔다. 지배계급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로 이해를 하면서  그 안에 머물러 존재할 때 가장 편한함을 느끼는  어머님의 품속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속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노동자국가의 건설은 필연적이라는 의식전환을 제시하고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실의 투쟁에서 계급간의 모습에서 무멋을 제시하는 것이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를 혁명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매개적인 역활을 할 수 있는 개량적인, 또는 직접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강령을 제시하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다.  그동안 필자는 노동자통제에 대한 견해를 계속해서 피력 해왔다. 강령투쟁의 모습을 가지고 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은 대중에게 자본주의 모습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게 하고 대안을 찾게 하고 자 한다면 그 것은 현 시기에서 노동자 통제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아직도 유용하다고 판단이 된다.ㅡ 그 내용은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많이 부족하다. 알고자 한다면 본인이 쓴 “노동자의 이름으로”를 참조하기 바란다.  ㅡ  강령의 내용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라고 하지만 초안을 가지고 임시적인 형식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도 최소한의 도리라고 판단을 하지만 선거강령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강령을 제시하지 못하여 대중의 투쟁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중에게 목을 메며 오늘은 어떤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만을 눈이 빠지게 기 달리고 있는 조직들의 처세술은 아직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여 안절부절 하는  뜨네기 장사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은 천천히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누구보다도 더욱더 급진적으로 변한다. 천천한 걸음에서 조차도 자신의 원칙을 가지지 못하는 조직들에서 대중에 대한 처세술은 여전히 부르조아정치인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만을 보여준다. 피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담고 있는 사회주의 사상은 정치인이나 정치가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정치인의 행세를 하거나 그러한 모습이 보여준다는것은 부르조아사상에 오염된 또 하나의 병균이다.

 


대중은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열망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능동적으로 나가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누군가 자신들을 이끌어 가기를 원하면서 대안으로서 현실에선 부르조아에게 의탁하고 있다. 계급사회에서의 대중의 수동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다. 6천여년 동안 누적되어온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문화의 틀을 이루어 물질화 하면서 유전인자에게 복종만이 피지배계급의 삶의 길이라는 것을 강요 온것이다.  이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치적인 경험과 능동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파악하게 해야 하는것이다. 누적된 양은 질적인 변화를 나타내야 한다. 수동적으로 삶이 눌려 물러설 곳까지 없는 절벽끝에서 터뜨린 화약고의 모양은 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것을 확인 시켜주고 있지만, 대안이 없어서 무정부적인 투쟁을 전개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계급에게 다음세상을 양보한다. 프랑스혁명에서의 모습, 1917년의 러시아혁명, 가까이에는 1960년에서 1987년에서의 부르조아혁명에서의 대중은 무엇을 갈망했고, 어떻게 나갔는지 볼수 있는 것이다. 1917년 볼셰비키의 권력쟁탈을 피지배계급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만이 혁명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스로가 대안을 제시하게 할려면, 그에 맞는  청사진을 보고 가는것이 능동적인 삶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초기적인 투자이다. 이것은 대중에게 강령을 제시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다.현재의 대중의 모습이 파악될때 꿈은 현실이 된다. 노동대중은 자신들의 소박한 삶을 이어주는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무엇일수 있으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강령을 가지고 대주에게 눈에 띄도록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대중이 자신의 세상을 그리는 모습을 가진다면 혁명에 대한 승리와 유지는 필연적으로 될 것이며, 현재 무엇을 가지고 투쟁해야 하는지는 체험적으로 느껴서 기회주의 세력의 모습을 사라지게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혁명적인 전술을 가지고 대중에게 다수의 권위를 획득하는 것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다. 현장에서 살아 있는 전술은 강령에서 보충을 하고 개량적인 요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투쟁은 대중을 지배계급과의 차이점을 인식하게 만들어 준다면 아무리 권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강령으로서의 모습으로 들어 날 수가 있을 것이다. 전술의 핵심은 대중의 계급의식 강화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을 깨우기 위해, 또는 대중이 혁명전선에 앞장설 수 있는 동력으로서 제 몫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 다음 사회에 대한 그리움으로서의 강령을 제시해 하는 것이며 전술적인 승부의 요건은 전략의 승리를 위해서  강령을 전술적인 슬로건으로 채택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현실의 계급투쟁의 모순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찾아내어 강령의 모습이 어떻게 표출되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전선에서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단계적인 차이는 존재할지라도  어떠한 투쟁이라도 하나의 계급투쟁인 것은 분명하다. 둘의 차이점으로 생색을 내기 위한 것으로서 물적인 개량만을 제시하는 투쟁의 모습은 전술이 가지는 내용을 무시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철부지의 장난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개량주의자들이나 기회주의자들은 개량적투쟁과 정치투쟁을 분리시킨다. 대중의 투쟁이 약하고 분산되어 있다는 논리로, 대중의 힘이 하나로 뭉쳐있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의 개량적목적이 물적인확보, 즉 지배계급의 양보를 통한 획득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전술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개량적인 투쟁과 혁명적인 투쟁의 차이는 지배계급의 야보를 요구 하느냐, 아니야의 차이가 아니라, 대중이 지배계급과의 자신과의 차이점을 확인하고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주인 행세를 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인가, 아닌가의 차이에서 시작 된다. 획득되어지는  것은 물질적인 양보이고 잃어버리는 것은 게급의식이면 어떠한 투쟁의 모습이라도 개량투쟁에 빠져 자신의 무기를 동료에게 겨루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제투쟁을 통해서 지배질서에 대한 반항을 키워나간다면 ㅡ 물론 전재적인 조건이 필요하다.ㅡ 계급투쟁이 권력투쟁으로까지 발전의 모습에서 대안과 목표를 명확하게 하면 할수록 의식은 혁명적으로 변화 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요구는 물적인 토대 위에서 가능하겠지만 정치적으로 발전되어지는 모습은 토대의 해체 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정치투쟁을 권력투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의 투쟁의 질적인 고양시기와 지배계급과의 역관계 속에서  표현되어지지만 그 경계선을 칼로 무를 잘라내듯이 질적인 모습의 차이만을 강조하는 것은 혁명을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은 아니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하나의 복합채로서 서로 상반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보충하여 발전되어지는 것이므로 개량만을 위한 투쟁, 권력만을 제시하는 투쟁 등의 모습으로 분리되어서는 대중을 기만하는 또 다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혁명의 모습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강령의 모습이다.

 

 

부르조아 정치 세력은 무엇이든지 다 해준다라는 명분과 자신이 다가지고 나서 책임을 진다라는 책임의식으로 대중을 현혹시키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정치세력은 현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의 발전경로를 제시한다. 속이지 않고 환상을 제거하며 정치가적인 입장을 버리고 노동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며,  노동의 진실된 모습속에서 삶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부하고 여유롭게 만들기 위한 세상의 진실은 빨간색상의 물결이 넘쳐흘러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말로만의 사회주의를 외치고 권력의 형태, 잉여가치(또는 이윤)의 분배는 가진자들의 몫이라고 제시하고, 노동자를 또 따른 자본가로 만들어 가는것이 새로운 세상을 가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작자들하고는 틀린 것이다. 환상은 대중을 열광적으로 만들어 맹목적으로 끌려가고, 끝은 독재자의 화려한 만찬속에서의 음식을 나르는 하인으로 나타나 가진자들의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잔반처리반으로 떨어져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하기에 대중은 화려한 조명과 아이돌 스타를, 또는 환상적인 에스라인의 몸매를 가진 여자배우들에게  현혹되어 자신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가야함을 잊어버리고 지배자의 권력에 아부를 하며,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본능이라고 자각을 하고 있다. 스스로의 주인의식, 계급의식으로 무장되어야만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무엇을 위한 변명이나, 책임회피가 아닌 진실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 사회 및 환경을 건설 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것이 강령으로서의 표현이다.


 


강령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며, 조직화 시키고, 투쟁의 진정한 목적을 제시하는데 있다. 노동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한다면 강령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은 첫 번째로서 권력에 대한 형태 및 누가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제시하며, 국제적인 관계, 즉 이미 세계적으로 자신의 몸짓을 키운 자본주의는 하나의 발전과정을 가지며 그 힘은 국제적인 연대를 가진 노동계급에 의한 국제 연대에 대한 부분을 인식 시켜야 하면서, 다음 사회상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해야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인지시킬 수 가 있는 것이다. 

 


강령의 모습은 이행강령의 모습으로 나타 날수 있고, 이단계 강령의 모습을 표현되어 질수는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행강령이나 최대최소강령의 모습이 중요하다라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어떠한 강령을 가지고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가라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겐 혁명의 순간을 즐길만한 시간은 아직 없다. 강령의 활용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강령은 아무리 좋은 문구로 쓰여있다고 하더라도 얼음속의 불꽃일 뿐이다. 강령의 모습은 투쟁의 전선에서, 삶의 현실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인텔리켄챠들의 놀이이다.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변화를 주기위한 실천적인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기초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시작된다. 모순의 극복은 주체적인 대중의 투쟁으로 획득되어진다. 주체적인 대중의 투쟁은 전위의 희생과 더불어서 선진대중의 자발적인 숭고한 노력의 결실로 나타난다. 붉은 물결을 뒤로하고 나타나는 희망의 함성은 승리의 열정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으로 대중을 혁명의 전선으로 가게 하기위해서는 그들이 가고자 하는 목표를 인식해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목적과 의식이 없는 투쟁의 모습은 언제나 배반당한 혁명으로 1987년의 부르조아의 사상의 저주로 표출되어진 모습에서 이어지는7,8월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물결을 확인하지 않았을 경우엔 반동으로의 회귀로 돌아가는 시계추의 형태를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의 승리만이 아니라 혁명의 유지를 하기 위해선 목적에 대한 방향점을 제시하는 것이야 말로 전위의 몫이다. 대중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는 물결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의 길을 제시하고 계급의식으로 무장시켜 다가오는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희망에 찬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해선 혁명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강령의 초안조차도 잡아내지 못하고 대중의 꽁무니만을 강조하여 따라가는 모습은 엽기적인 모습이며, 아직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존재하는 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일 뿐이다. 혁명의 모습은 뒷전이며, 사회주의 사상은 공허한 가르침이며,노동자국가는 꿈의 세상일뿐이 이들의 행동방식이다. 의미없는 실천속에 목을 메며, 자신들의 헛된 손짓이 대중에 대한 기만임을 무시하면서, 남의 이름을 가지고 온 사상의 실천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오늘도 외치다가 쓰러진다. 또 한명의 열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대중은 사회주의를 알고 나서 실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그 것을 극복하고자 하면서 투쟁의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 그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강령인 것이다. 이행강령의 내용을 알고 나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닌 투쟁의 길에서 체험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지배계급과의 전쟁 속에서 필연적으로 표출되어지는 모순을 스스로 극대화시켜 전진해 나가 자신의 발자취를 남긴다. 발냄새가 사라질 때 의식의 변화는 보수주의로 떨어져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여 반동의 회귀에 한 표를 찍어 투쟁의 성과물을 부르조아에게 헌납한 것이 한 두번 이었던가! 대중의 의식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자신들의  모습에서 또는 현실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급격한 변화를 주고 있지만, 언제나 대안없이; 나타난 투쟁은  부르조아에게 성과물을 다시 반납하여 브로조아이데올로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부여 해 주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의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라고 떠드는 차베스국가의 모습(독일의 나찌즘에서 제시해왔던 정치 강령과 그들의 권력을 잡았을 때의 모습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과 함께 비교해 보아라. 모든 계급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주장을 하고 결론은 자본주의발전을 위해서 대자본가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은 차베스정권이 가는 길과 별 차이가 없다) )에서, 이미 망해버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습에서 승리의 관건은 언제나 부르조아들이지 피 지배계급의 형식적인 승리 뒤엔 내용에선 제자리나 아니면 더 뒤떨어지는 모습으로 재현되어 왔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인 시기를 제외하고는 늘 소수로 존재하며, 자신의 사상이 옳다라고 검증되는 순간은 혁명의 부르조아들의 계급적인 본성을 대중이 자각했을 때이며, 그때는 혁명의 진행이 순간적으로 다음단계로 진행되어진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전의 볼셰비키들의 모습에서  나타난 것을 상기해야 한다. 대중은 평상시엔 굼벵이 보다 느리게 천천히 움직이고 지배계급의 물리력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때가 되면 자신의 모습을 각성하는 정치적인 경험을 하는 경우엔 사회주의사상자들보다 더욱더 급진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이 얻은 물적인 욕구를 유지하고자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물러섬이 없고 지배계급의 약한 모습에선 스스로 그 대역을 자처하기 위해서  권력기구를 만들어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줘 왔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에서 파리 꼼뮌,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시민위원회 등등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강령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남이 해놓을 글을 베껴 자신의 사상을 대변한다라고 주장을 하고 이제라도 강령에 대한 준비를 하고자하는 조직이 있는가 하면, 초안이라도 제시를 하고 강령투쟁을 주장을 하지만 대중투쟁의 후미 쫒아 다니면서  혁명전술의 의식을 버려 다수를 모집하기 위한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조직도 있고 , 강령의 모습을 중도에 포기한 조직도 존재하며, 강령의 의미를 인식도 하지 못하는 조직도 아직은 존재하고 있다. 조직 간의 이합집산을 통한 이들  조직 간의 방향점은 대중투쟁의 모습에서 자신의 장단점을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모습에 만족을 하고 스스로의 위안을 삼아 안주하는 것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더욱더 소수로 타락시키고 사상투쟁이라는 것에선 집안싸움으로 빠져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대중과 거리차를 유지하여 대중의 전진에 매달려, 전진을 막는 벽으로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켜왔다. 조직 간의 사상의 차이가 나지 않아도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서, 자신들이 조직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직 간의 통합은 언제나 힘이 든다. 스스로의 이익은 사상의 승리로 확신이 되어 사회주의라는 대의는 언제나 버려둔 채로 조직에 대한 권력의 숭배를 위해 지분 싸움으로 결론이 나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진흙탕으로 변하게 만들어 마실 수 없게 만든다.

 


현실은 냉혹하다. 혁명적 전술은 전략의 승리를 위한 디딤돌로서 대중이 자신을 위해줄 수 있는 조직으로서 인식이 됨으로서 다수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시기는 계급간의 모습이 첨예하게 들어나는 순간에 판단되어지는 것이므로 항상 소수였지만, 한순간에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 다수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으로 가는 것이다. 대중의 계급의식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이득에 목을 메어 순간의 떡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또는 그것을 쟁취하고자 노력을 하는 사이에 대중은 계급의식의 변화를 체험에서 취득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지배사상에 동조하여 부르조아를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하여 그들을 따르고자 자신의 피로서 이룩한 성과를  팔아넘기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혁명전술을 사용함으로서 다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다수가 되고나서 혁명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운동을 하는 조직원이나 개인들에겐 강령에 가지고 있는 성격 및 역활은 인식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행강령의 의미를 모르면서 사회주의활동을 한다라고 주장하지는 못한다. 알고 있는것과 그것을 실천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인간은 관념속에서 절대자, 신, 지배자들을 만들어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과 현실에서 사적소유가 발생한이래 6000년정도 동안 계급사회의 틀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왔다. 권리와 의지는 지배계급을 위해서 존재하고, (언론의) 자유는 가진자들의 놀이로 치부를 하며, 민족과 국가적 사명에 입각한 정치공세 속에서 자칭 선진 대중조차도 기계적인 해부놀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언제나 실천적 활동은 대중의 삶의 현실보다는 공허한 외침으로서, 수동성을 더욱 확대 시켜 왔다. 사회주의의 선전 선동은 구호의 난무속에서 대중과 겪리되고, 대중의 삶은 노동해방이라는 틀속에 갇어 놓고, 대입만 하면 답이 나오는 암기된 수학공식처럼 만들어 온것이 그 동안의 강령 투쟁의 문제인 것이다. 전술적 슬로건의 과제는 현실 계급투쟁의 가장  큰 쟁점이지만, 그것이 모든것이 답이 아니며, 답은 대중을 사회주의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계급의식화 시켜나가는 것이다. 비정규직철폐 투쟁의 핵심도 차별을 받지 않고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받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노력이다. 그러나 그러한 면임에도 불구하고 강령의 의미로서는 그들에게 다가서지는 못한다. 대중의 삶의현장 속에서 살아 숨쉬게 만들어, 그들이 자신의 길로 나가는 나침판의 역활로서의 강령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동지들의 힘은 과소비로 낭비가 되고 마는 것이다.  현실에서 강령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용하여야 하는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적활동에서 꾸준하게 다가오는 문제이다.

 

혁명은 실천이며 인류의 역사는 실천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인간의 실천은 노동이며, 노동은 삶의 원천이다. 노동하는 대중의 삶이 윤택하게 하는 그러한 세상을 위한다면, 어떻게 강령은 활용해야 하는지를 자신들의 모습과 대중들의 모습에서 항상 고민을 하라. 그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며,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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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2 13:35 2007/10/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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