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가 1938년 9월 개최되기 몇 개월 전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지도부와 이행 강령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행 강령은 창립대회의 강령적 문건으로서 트로츠키는 이것이 대회에서 채택된 것을 레닌 사후 세계혁명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취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대담 자료들은 이행 강령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차례>

강령을 완성해서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

이행 요구들에 대한 개략적 설명

미국노동자들의 정치적 후진성

노동자 농민 정부를 위하여

강령을 완성해서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 1938년 6월 7일

트로츠키: 강령의 의의는 당의 의의와 같다. 당은 계급의 전위이다. 당은 가장 의식이 투철하고 선진적이며 가장 헌신적인 분자들 가운데에서 선정된다. 당은 그 구성원의 숫자와 무관하게 아주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역할을 한다. 규모에 비해 훨씬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05년 첫 러시아혁명에서 볼세비키 분파는 1만명 멘세비키 분파는 1만명에서 1만2천명 정도였다. 당시 이들은 같은 당에 속해 있었으며 당은 2만에서 2만2천명 정도의 규모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은 올바른 정책과 응집력을 과시하여 전국의 소비에트를 지도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즉 보수적 개량주의의 전통이 없이 성장한 아주 활기있고 신선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반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도가 필요했고 실제로 지도를 원했던 젊고 신선한 노동계급이었다. 당은 전부 합쳐 보아야 2만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2천 3백만 노동자들을 투쟁과정에서 지도했다.

그렇다면 당은 무엇인가? 당의 응집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응집력은 계급투쟁 과정에 존재했던 사건들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공통된 인식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당 강령이다. 원시인이나 현대 노동자나 도구 없이 일할 수 없다. 당에게 강령은 이 도구이다. 강령이 없으면 모든 노동자들은 투쟁의 무기를 임시변통으로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임시변통된 도구들을 가지고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공통된 인식에 기초한 조직된 전위가 있을 때에만 정치적 행동이 가능하다.

지금에야 강령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이미 정치적 행동을 했다. 이 강령은 다른 논문들과 다른 결의문 등등에 이미 표현되었던 것이다. 이 의미에서 이행 강령 초안은 새로운 발명품도 아니고 어느 한 사람의 작품도 아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집단적 정치 행동의 집약판이다. 그러나 동지들에게 상황을 이해시켜 공통의 인식에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이같은 집약판은 절대 필요하다.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당에게 공통의 사상과 태도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두려워한다. 이 대신 이들은 도덕론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령은 공통 경험의 산물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원들은 자발적으로 강령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시켜 필요에 대비되는 개념인 자유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소부르주아의 생각인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이며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을 때 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이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나는 맥주에 대한 욕구를 발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몸이 가진 욕구이다. 나는 이 욕구를 행동에 옮길 뿐이다. 그러나 몸의 욕구를 인식하고 이 욕구를 의식적으로 충족시키는 한에서 나는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것은 필요를 인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자유의 느낌이다. 여기에서 몸의 욕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동물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일종의 동물이다. 계급에게도 사정은 같다. 계급의 강령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필요를 인식하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전자는 나의 몸의 욕구를 인식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회의 욕구를 인식하는 것이다. 강령은 이 필요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필요를 인식하는 법을 우리는 배웠다. 이 필요는 계급 구성원 모두에게 전부 같은 것이므로 우리는 임무를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필요의 인식이 바로 강령이다.

또한 더 나아가 우리 당의 규율이 아주 엄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의식하고 있는 적들의 엄청난 연합에 대항하는 혁명정당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뿐 아니라 부르주아 하수인들 가운데 가장 극악한 스탈린주의자들의 공격도 받고 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의 인식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라면 족쇄에 불과하다. 올바른 인식에서 나오는 규율은 개성의 표현이다. 그렇지 않다면 족쇄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규율은 나의 자유로운 개인적 존재의 표현이다. 개인의 의지와 당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의지를 통해 당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령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진짜 제대로 이해할 때에만 이 강령은 확고한 정치적 도덕적 기초 위에 설 수 있다.

이행 강령 초안은 완전한 강령은 아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것도 있고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간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강령에 포함되지 말아야할 것은 논평이다. 이 강령은 구호 뿐 아니라 논평 그리고 적들에 대한 논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강령은 아니다. 완벽한 강령은 제국주의 단계의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이론적으로 표현해야한다. 경제위기의 이유, 실업의 증대 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강령 초안에는 이 분석이 제 1장에 짤막하게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분석 내용들은 눈문, 단행본 등의 형태로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글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작성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목적을 위해서는 이 강령 초안의 내용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견해가 같기 때문이다. 강령의 첫 부분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리고 제 1장은 힌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강령의 끝부분도 완벽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회혁명, 봉기를 통한 국가권력 장악,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계급 독재로의 변모, 노동계급 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로의 변모 등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강령은 독자들을 서론까지만 인도한다. 오늘부터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될 때까지만을 다루는 행동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적 관점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각기 다른 계층을 사회혁명의 길로 지도하는 방법이다. 지금 뉴욕의 동지들이 이 초안 강령을 연구하고 비판할 뿐 아니라 이 강령을 대중에게 제시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정교화 하기 위해 써클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당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강령은 최초의 개략적 요약에 불과하다. 국제대회에 제출되기 때문에 이 강령의 내용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세계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을 표현할 뿐이다. 반식민지와 식민지 국가들, 파시스트 국가들, 소련 등에 대한 짤막한 장이 있다. 전 세계가 제국주의 경제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세계 정세의 일반적 경향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은 나름의 독특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진정한 살아있는 정치행동은 모든 나라 모든 지역의 독특한 조건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강령에 대한 매우 진지한 접근 태도가 미국의 모든 동지들의 첫 번째 의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령을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두가지 위험이 있다. 일반적 추상적 수준에 머물러 각 지역 노동조합과 진정한 연관을 맺지 못한 가운데 일반적 구호를 반복하는 것이 첫 번째 위험이다. 다른 위험은 이와 정반대이다. 지역의 조건에 너무 매몰되어 일반적 혁명 노선을 놓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두 번째 위험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특히 노동계급의 무장과 무장 파업방위대 등의 문제에서 이 위험성이 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이 구호가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등의 우려를 일부 동지들이 나타냈다.

지난 며칠동안 나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등장에 대해 어느 이탈리아 노동자가 쓴 프랑스어 책을 읽었다. 이 저자는 기회주의적이다. 그는 이탈리아사회당 당원인데 흥미로운 내용은 그의 결론이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사실들이다. 특히 그는 1920년과 1921년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상황을 잘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당은 의회 의원을 무려 160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는 무려 3분의 1을 넘게 장악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의 아성인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지역들은 모두 사회당의 손에 있었다. 자본가도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는 고용과 해고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공업노동자 뿐 아니라 농촌노동자에게도 해당되었다. 사회의 49%는 노동계급 독재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계급과 예비역 장교들의 반응은 이 상황에 치명타를 가했다. 장교들의 주도 하에 소부르주아 계급이 주축이 된 파시스트 깡패들은 소규모 모임을 만들어 버스를 타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사회당이 장악한 1만명 단위의 도시들에서 이 소모임들은 도시 중심부로 진입해 관공서와 가옥을 불태우고 노동계급 지도자들을 암살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자본가 지배체제를 강제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수만의 도시에서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테러 분위기와 체계적인 행동으로 파시스트 소모임들은 노동조합을 철저히 파괴하고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었다. 이들은 극소수의 집단이었으나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자 파시스트들은 버스에 깡패들을 실어 보내 지역의 모든 파업을 파괴하고 소규모 조직을 통해 노동자 조직을 전부 쓸어버렸다. 그리고 선거가 실시되었다. 테러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전과 같은 수의 의원들을 의회에 보냈다. 의원들은 의회에서 테러에 항의했으나 의회는 곧 해산되었다. 형식적인 권력과 실제 권력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회당 의원들 전부는 자기들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잘 조직된 1만명 정도의 파시스트들은 희생정신과 우수한 군사 지도자들 무기로 역시 희생정신으로 구축된 이 거대한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흔적도 없이 쓸어버렸다.

미국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 임무는 같다. 파시스트 헤이그의 전술에 대해 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파시스트들의 국가전복 행위를 예행 연습하는 것이다. 그는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분노한 소기업 사장들을 대표한다. 그는 헌법에 완전히 위배되는 깡패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전염성이 강하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이 현상은 미국 전역에 퍼질 것이다. 그러면 아주 훌륭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인 루즈벨트도 "맞아, 파시즘이 유일한 해결책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수상은 사회당에게 입각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파시스트들에게 입각을 제의했다. 사회당의 영향력을 중화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이 수상마저 박살내버렸다. 뉴저지주의 뉴워크시는 아주 중요한 예를 제공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활용해야한다. 파시스트들의 승리를 분석한 글들을 특별시리즈로 신문에 실을 것을 나는 제안한다. 우리도 파시스트들의 방법을 이용하면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규모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소규모 무장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최상의 규율과 조직 노동자와 정당방위대 등을 보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압살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 동지들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파시스트들의 광풍은 2년 또는 3년 후에 휘몰아칠 수 있으며 최상의 노동자 지도자들은 미국 남부지방의 흑인들처럼 최악의 방식으로 린치를 당할 것이다. 미국의 테러는 가장 끔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소박하게 정당방위대를 시작으로 방어를 조직하는 일을 즉시 착수해야 한다.

질문: 실제로 정당방위대를 어떻게 수립할 수 있을까요?

트로츠키: 아주 단순하다. 파업할 때 파업방위선(picket line)을 구축하지 않는가? 파업이 끝나면 노동조합을 이 파업방위선으로 영원히 방어해야 한다고 말하면 된다.

질문: 당도 당원으로 정당방위대를 수립합니까?

트로츠키: 동조자들과 우리를 방어할 노동자들이 있는 지구에서 당의 구호들이 제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은 독자 정당방위대를 수립할 수 없다. 우리의 임무는 노동조합에 이것을 수립시키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규율을 가진 동지들의 모임을 규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임을 적들이 자극하기 쉬우므로 쉽게 적들의 책동에 말려들지 않는 훌륭하고 조심스러운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 내년의 주요한 임무는 분쟁과 유혈충돌을 피하는 것이다. 파업 중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소수이므로 무력충돌 상황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파시스트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서는 역량이 결집되어야한다. 우리 혼자는 힘이 부족하다. 우리는 공동전선을 제안하여 이 투쟁에 노동계급 전체의 역량을 결집시켜야한다.

히틀러는 자기 성공담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막강했다. 이들의 집회에 그는 루돌프 헤스를 두목으로 하는 깡패집단을 보냈다. 집회의 말미에 그가 보낸 30명의 깡패들이 모든 노동자들을 집회장 밖으로 몰아냈는데 이들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조직의 노동자들은 회비를 내기 위해 모인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다른 임무를 위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히틀러가 한 일을 거꾸로 해야한다. 40명 내지 50명 정도의 노동자들을 보내 파시스트들의 집회를 해산시켜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강철같이 단련된다. 이들은 승리의 나팔수가 된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이 노동자들이 진지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인구의 대다수는 맹목적이고 후진적이고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의 사례를 통해서만 각성된다. 우리는 전위만을 각성시키면 된다. 그러면 전위는 대중을 각성시킨다. 다시 반복하건데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능력있는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이 파시스트들에 대한 투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여 미국 전역에 희망을 불어 넣어야 한다.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짤막하게 처리된 초안의 한 부분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반 이론 부분이다. 사회 일반을 분석한 이 강령의 이론 부분에 충분한 지면이 할애되지 않고 간단한 힌트 정도로 처리되었다고 지난 번 토론에서 내가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이 강령은 혁명, 노동계급 독재, 혁명 이후 사회의 재건 등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행의 시기만 다루어 지고 있다. 우리는 강령을 특정 정세나 현재 대중의 사고나 정서에 맞추지 않는다. 사회의 경제 계급적 구조가 드러내는 객관적 상황에 강령을 맞출 뿐이다. 이것이 우리 활동의 과학적 성격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다. 대중의 사고는 후진적일 수 있다. 당의 정치적 임무는 이 후진적 사고가 객관적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객관적 임무를 인식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후진성에 강령을 맞출 수 없다. 후진적 사고나 정서는 부차적 요인일 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객관적 현실이다. 강령의 일부가 현재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과 평가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곳에서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묻는다. 우리 강령을 객관적 상황에 맞출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정서에 맞출 것인가? 이 강령이 미국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든 동지들에게 나는 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강령은 과학적 강령이다. 객관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노동자 전체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음 시기에 전위가 이 강령을 이해하고 노동자들에게 "파시즘으로부터 여러분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객관적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사회혁명의 객관적 조건들을 분석해야한다. 이 조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나와 있으며 지금까지 그 핵심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선 맑스는 한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사회는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시키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사회를 주관적인 의지로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블랑끼주의자들처럼 소수의 음모가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능성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가 사라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회가 자신의 생산력을 발전시킬 능력이 있는 한 그리고 나라를 더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한 이 사회는 강력하고 안정적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전부 이러했다.

전에 나는 [공산당 선언] 서문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지금 논의와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평생 혁명을 기다렸다. 특히 1848년에서 1850년까지 이들은 사회혁명을 기대했다. 왜 그랬는가? 사적 이윤에 근거한 자본주의체제가 생산력의 발전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이 견해는 올바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19세기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권력을 장악했다면 생산력의 발전은 더욱 급격했을 것이며 나라는 더 부유했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는 이들의 견해는 맞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시대의 임무에 부응할 능력이 되지 않아 자본주의는 위기와 그밖의 온갖 모순을 안은 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반적 경향은 생산력 발전의 상승 곡선이었다. 지난번 전쟁(1914-1918)은 이 사실을 보여주었다: 세계시장은 생산력 발전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각국은 딴 나라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을 위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이들을 배제할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제 자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은 사회가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시켰다는 사실의 결과일 뿐이다. 전쟁은 더 이상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전쟁 후에 역사적 위기는 더욱 깊어만 갔다. 모든 곳에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를 합계하면 여전히 생산력은 상승세였다. 그러나 지난 세계대전과 함께 우리는 생산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이 사회가 자신의 내적 가능성들을 소진시켰으며 따라서 새로운 사회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그리이스와 로마 사회가 가능성들을 소진시키고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만 상태(역자 주: 암흑시대, Dark Ages,를 의미한다. 로마제국이 망한 서기 476년에서 서기 1,000년까지 유럽은 정치적 혼란과 문화의 쇠퇴를 경험했다. 봉건제도의 정착으로 이 암흑시대는 끝났다.)로 추락한 것과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이것이며 이 문제는 특히 미국에서 심각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요건은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여 더 높은 수준의 사회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재 생산력은 충분히 발전했는가? 그렇다. 이미 19세기에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충분히 생산력은 발전했다. 만약 미국의 생산력이 그 잠재력을 발휘한다면 현재의 수준보다 생산력은 두배나 세배로 커질 수 있다. 능력 있는 통계 전문가는 누구든지 이 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지들이 통계 조사를 착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회의 두 번째 요건은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숫자나 경제적 영향력이 충분한 새로운 진보적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급은 바로 노동계급이다. 이 계급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다수를 지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국의 경우 노동계급은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은 소수였지만 빈농을 지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노동계급은 최소한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농민들을 지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요건은 주관적 요인이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고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거나 야만 상태로 퇴보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역사적 순간에 있다.

헤이그는 자기 도시에 중세 봉건체제가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어리석은 노인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토론에서 말한 바 있다. 그는 미국 자본가 계급의 선발대이다.

소설가 잭 런던은 [강철 군화]라는 소설책을 썼다. 이 책은 1907년에 쓰여졌는데 일독을 권한다. 당시에는 이 소설이 무시무시한 악몽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지금 이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자본가 계급을 미국 계급투쟁의 전개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파시즘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제시하는 이데올로기는 히틀러의 것과 같다. 아주 흥미로운 소설이다.

뉴워크시에서 시장은 헤이그를 모방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헤이그와 대자본가들을 존경하고 있다. 이제 이 위기에서 민주적 수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루즈벨트는 판단할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는 스탈린주의자들이 1932년에 주장한 파시스트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노동자들은 불만이다. 대자본가들도 불만이다. 그는 임기 말까지 요런 저런 술수나 부리며 권력을 지탱하다고 안녕을 고할 것이다. 루즈벨트가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뉴워크시 시장이 파시스트들을 모방하는 행위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년이나 3년이 지나면 미국판 파시즘이 강력하게 대두될 지도 모른다. 헤이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무쏠리니나 히틀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미국의 파시스트일 뿐이다. 그는 왜 행동으로 나섰는가? 왜냐하면 사회가 더 이상 민주적 수단으로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히스테리를 일으켜서는 절대 안된다. 노동계급이 사태의 발전에 뒤쳐질 위험은 의문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올바른 혁명적 구호들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정열적으로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이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 우리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황당한 시도들은 절대 금물이다.

민주주의는 대자본가들의 통치를 의미할 뿐이다. 런버그는 자신의 책에서 60대 족벌이 미국을 통치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통치했는가? 지금까지는 민주적 수단으로 통치를 했다. 이들은 중간 계급, 소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으로 둘러싸인 극소수 집단이다. 이들은 중간 계급을 체제 내에 동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간계급은 절망해서는 안된다. 노동계급도 최소한 상층부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도전받을 경우 하층민의 혁명 가능성들을 분쇄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가장 귀족적인 통치방식이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에게나 가능한 방식이다. 영국의 민주주의자들 모두는 식민지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10명 정도 거느리고 있다. 고대 그리이스 사회 역시 노예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회였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는 없지만 중남미를 자기 세력권으로 가지고 있다. 어쩌면 전세계가 미국의 식민지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은 가장 자원이 풍부한 대륙을 지배하고 있으며 중세 봉건사회의 전통이 없이 발전하고 있다. 역사적 의미에서 미국은 특권을 누리는 나라이다. 그러나 특권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거지" 자본주의 국가와 다를 뿐이다. 거대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탈리아가 먼저 파시스트 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식민지나 자원이 풍부한 종속국을 거느리지 않은 취약한 상태에서 모든 가능성들을 소진했으며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대체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수 없었다. 이 결과 독일도 파시스트 국가가 되었다. 이제 식민지가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미국이 파시스트 국가가 될 차례이다.

우리 당의 임무는 모든 미국 노동자들을 잡고서 그가 상황을 인식하도록 10번 정도 잡아 흔드는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일시적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이다. 우리 당은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과거의 전통과 위선의 무거운 공기를 숨쉬고 있는 젊은 당은 혁명적 구호를 내세우기가 어렵다. "너무 황당하다.", "미국에는 맞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강령의 혁명적 구호들을 제출할 때가 되면 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우리에 대해 웃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용기는 총살을 감수할 뿐 아니라 사회의 다수인 어리석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아준다. 그러나 이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헤이그의 파시스트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으면 정당방위대를 수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의 비웃음은 사라질 것이다.

질문: 노동자들의 후진적 의식 역시 객관적 현실의 일부가 아닌가요?

트로츠키: 우리 극소수 혁명 집단에게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전으로 바뀔 수 있는 요인과 그렇지 않은 요인들을 분석하고 분류해야 한다. 강령이 객관적 현실의 근본적이며 안정적인 요인들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임무는 대중의 정서를 이 근본적인 객관적 요인들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대중의 정서를 바꾸는 것은 교육적 과업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을성을 가지고 끈기 있게 설명해야 한다. 사회 위기가 우리 활동의 기반이다. 대중의 정서는 우리 정치활동의 장이다. 우리는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대중에게 사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와 개량주의의 차이이다.

개량주의자들은 노먼 타머스(Norman Thomas)처럼 대중이 원하는 것을 잘 냄새 맡는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진지한 혁명활동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은 바보요.", "당신은 어리석군요.", "저들은 당신을 배신할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인기를 잃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가끔 열정적으로 우리의 사상을 펼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켜야 한다. 노동자들을 뒤흔들고 설명하고 다시 뒤흔드는 것이 가끔 필요하다. 이것은 다 선전술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정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과학성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노먼 타머스의 웅변으로도 변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즉시 대중을 설득하는 일에 성공하면 우리는 대중의 물결을 타면된다. 이 물결이 바로 혁명이다.

질문: 때때로 우리 지도자들도 이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트로츠키: 아마도 두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인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근육과 근섬유로 느끼는 것이다. 정치활동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박힐 때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것은 대중의 문제일 뿐 아니라 당의 문제이다. 당의 문제일 뿐 아니라 지도자의 문제이다. 우리는 토론을 하면서 견해 차이를 드러내었다. 같은 결론을 동시에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항상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면서도 필요하다. 강령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토론을 촉발시킨다.

질문: 지도자들 사이의 이 토론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야 합니까?

트로츠키: 말하기가 어렵다.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다. 새로운 전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롭기도 하고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장을 열기도 한다. 오류, 갈등, 투쟁에도 불구하고 지금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으며 우리는 좀더 열정적으로 우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강령이 명확히 확립되면 구호들의 성격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기술적으로 요리하여 전국 모든 곳에서 모두가 동시에 같은 구호를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3천명의 역량이 1만5천명이나 5만명의 역량이라는 인상을 줄 수가 있다.

질문: 동지들이 추상적으로 강령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대중에게 구호들을 제출할 경험있는 동지들이 있습니까? 추상적으로 동의할 수는 있지만 각자 소속된 노동조합의 후진적 노동자들에게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트로츠키: 우리 당은 미국 노동계급의 당이다. 강력한 노동계급 혁명은 고사하고 강력한 노동운동도 미국에 없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1905년 혁명이 없었다면 1917년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다. 우리 세대는 아주 젊었다. 12년에 걸쳐 우리는 패배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것들을 교정하여 승리할 아주 좋은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도 새로운 관료집단에게 패배했다. 우리 당이 미국 노동계급을 직접 혁명 승리로 지도할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애국적이고 생활수준이 높은 미국 노동자들이 반란과 파업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다. 한 쪽에는 파시스트 헤이그가 있고 반대 쪽에는 광산노조 위원장인 노동관료 루이스가 있다. 이 상황은 상당히 오래 갈 수 있으며 이때 우리 동지들은 자신을 단련시켜 자신감을 높일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들은 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전쟁 만이 전쟁 영웅을 만들어낸다. 우선 우리에게는 뛰어난 분자들이 있다. 아주 훌륭하며 진지하고 교육 받은 좋은 부대이고 결코 작은 부대가 아니다.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전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의 정서 변화가 아주 빠른 리듬을 탈 것으로 믿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모두는 불만을 느끼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이 상황은 혁명적 선전에 아주 유리하다.

우리는 귀족 분자들 뿐 아니라 빈곤층 분자들도 기억해야 한다. 교양이 있는 미국 노동자들은 영국의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는 아주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 투쟁을 억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혁명적 에너지가 모두 스포츠로 소모된다. 이것은 가장 똑똑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 갈고 닦은 것이다. 스포츠는 혁명 교육의 일환으로 노동조합이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누릴만큼 여유가 있지 못한 청년들과 여성들이 대다수이다. 우리는 사회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침투하는 촉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질문: 지난번 열린 대회 이래 당은 큰 발전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트로츠키: 아주 중요한 전술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제 이 무기에 집중된 행동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산된 일반적 선동은 교육받지 않은 대중의 마음 속으로 침투하지 못한다. 그러나 같은 구호들을 반복해서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가르침의 어머니인 반복이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지식인 뿐 아니라 노동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열정을 가지고 반복하고 매일 모든 곳에서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 강령 초안의 임무이다. 즉 동질적인 인상을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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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6 12:09 2005/09/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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