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타이거님의 글을 보면서

힘찬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날씨도 더워지고 있는데 그러한 글이 눅눅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띄웁니다.

 

동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당당합니다.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에 물들어 버린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열망은 뜨거우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노력에 대한 댓가가 나오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뜨거운 열정으로 노동자계급의 사상을 노래하는 동지를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엔엘이니 피디니 하는 계파간의 싸움도 이젠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고, 오로지 민주노동당내에서 자신의 잇권을 위한 주도권싸움에 목을 메는 엔엘과 피디 또는 자주파니 다함께, 해방연대 등등의 이름으로 반자본주의, 사회주의건설이라는 행동하는 쁘띠부르조아 정파들의 세상에서 그나마 열려 있는 공간에서 동지를 만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 사상을 알려나갈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다만 동지에게 아쉬운 점이 있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비판을 한다고 판단을 해도 좋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 잘못되었다라면 반박의 글을 올려 주신다면 고맙게 느낄 것입니다.  

 

상황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나타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황우석의 문제, KTX 승무원 문제, 평택의 미군기지 문제, 비정규직문제 등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고, 노동자계급이 나가야만 하는 원론적인 길을 제시하면서 아직도 요원한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투쟁의 한 길에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언제나 없어 진정 쁘띠부르조아 계급과의 차별성으로서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동지는 아니키스트적인 무정부적인 형태로 노동자계급을 이끌어 나가고 싶어하는 결론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지의 글을 한 번 검토를 해보면서 문제점을 하나하나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저도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먼저 평택의 문제에서는 지도부의 문제제기를 한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의 주요한 남한 운동 조직들이, KTX 승무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부산지하철매표노동자들의 투쟁,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매그나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 비정규직 철폐투쟁 등을 포함하는, 반자본 계급투쟁에서 보여주었던 기회주의적 행태와는 질적으로 달리, '평택투쟁'에서 보여준 애국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은, 이 조직들의 지도부들의 계급적 본질, 즉, 기회주의적이고 비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적 본질, 쁘띠부르주아적인 계급적 본질 -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적한다! - 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끝나는 투쟁이 아니라, 끝장낼 수 있는 투쟁으로)

 

지도부에 대한 대안으로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것인지 보면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우파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본질이다."( 끝나는 투쟁이 아니라, 끝장낼 수 있는 투쟁으로)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대안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조직에 대한 지도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도부의 경질 아니면, 새로운 조직 건설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기회주의적인 본질이라고만 외치면 어떠한 경계선으로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인 지를 확인 할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대중에게 현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여 대중이 권력을 잡고 유지하게 위한 전술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지의 모든 글에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자본주의 질서를 반대하고, 그것의 철폐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적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혁명'을 꿈꾸는 동지에게)라고 표현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내용의 글이 비판을 하고 나서 대안적인 모습을 제시하기보다는 - 단하나 비정규직 철페라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하는 모습을 보면 허탈하게 느껴집니다. 프롤레타이라트의 투쟁의 모습은 자본주의체제의 내적 모순에 기인 한 것이며, 투쟁의 기본은 피지배계급의 생존적인 문제에서 시작되고 생존의 문제로 귀결될 수뿐이 없는 것입니다. 그 생존을 위해서 더 낳은 삶을 위해서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모일 수뿐이 없는 것이며, 피지배계급의 단결된 힘은 지배체제를 무너뜨려 새로운 지배체제로의 전환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 과정으로서의 모습, 피지배계급의 약진 해 나갈 수 있는 모습의 바탕은 무기인 조직이며, 사상인 것입니다. 조직과 사상은 피지배계급을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권력에 대한 향수를 일으켜야 하며, 권력에 대한 향수는 지배계급에 대한 부정된 모습을 투영하는 하여 투쟁으로 나가는 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지만, 주도권을 피지배계급이 갖고 있는 모습이 아니며, 이는 또 다른 지배체제를 양산 할 뿐인 것입니다.

 

동지가 언제가 쓴 글중에서 강령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 것을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제가 기억을 잘 하고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강령이 무엇인지를, 무엇에 필요한 것인지는 누구든지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에서는 언제나 주저주저하고 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강령을 실천적 획득 목적으로 투쟁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내에서의 개혁을 하자는 주장하는 세력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잇다라고 봐야합니다. 최소강령적인 투쟁, 과도적강령투쟁 등등에서의 내용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지고 있으며, 강령을 가졌고 있는 조직에서의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개량적 투쟁으로 빠져있는 모습에서 핑계를 대고 하는 모습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번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비정규직 철폐주장의 기본내용은 바로 강령적인 내용의 자본주의 내에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모습입니다.

 

"자본주의 질서라는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러한 부류들의 정체성은, 적어도 쁘띠부르주아 이상인 자신들의 지위의 보존과 그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적인 개수작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혁명'을 꿈꾸는 동지에게)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부르조아의 맛있는 밥상의 반찬 그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개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큰 것을 바라기 때문에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정규직과의 차별문제입니다. 그러면 정규직과의 차별이 없다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지급이 된다면 그들의 투쟁의 효과 에너지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국가들에서의 비정규직 문제는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고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비정규직문제는 서비스계통에서의 아르바이트식의 형태와  또 하나는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차이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국에서의 자회사를 통한 취업, 하청공장을 위장한 취업 등등으로 나타나는 형태의 직접고용이 아니라 간접고용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서로간의 격차를 두고 있는 실정으로서 회사는 비용절감의 효과를 십분발휘하며, 노동자계급은 실업의 위협와 저소득에 대한 힘겨운 힘겨루기에 직면하게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직접적인 지원이 존재하지 못하는 한 비정규직철폐투쟁의 한계는 나타날 수뿐이 없고, 노조간부나 민주노총의 간부들에 의한 부르조아 정부에 대화와 타협으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은그릇으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50%가 넘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투쟁의 힘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10%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부르조아 계급의 언론의 통제로 인한 정보의 부재로 단결을 하지못하고 있으며, 가장 커다란 것은 정규직노동자와의 연대를 통한 투쟁의 효과를 찾아내지 못한다는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힘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일단은 몇 가지의 요구가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 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로 단합이 가능해야 할 것입니다. 분열되어있고 분산되어 있을 때는 부르조아에게는 먹기 좋은 사냥감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작고 연약한 개미라도 모이고 뭉치면 어떠한 맹수라도 도망치게 마련입니다. 하나하나가 약하고 실업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이라도 모두가 하나가 되는 목소리로 지배계급에게 대항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의 양보를 얻어 물적인 개량의 폭을 넓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명 한명은 계급적인 존재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좌우를 하지만 계급간의 전체 속에서는 계급적인 존재의 모습이 각인되어 투쟁의 고리와 폭이 쉽게 결정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앞으로 노동계급이 만들어 나가야하는 사회의 모습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벽을 깨부수고 전진하고 하고자 한다면 벽의 모습을 각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목적의식성을 갖고 하나라도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적과 아군 방관자그룹을 판단할 수 있는 교육의 효과도 동반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계급이라도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적대하지 않으며, 최대한 같은편으로 편입하게끔 노력을 할 것이며, 최소한의 방관자적으로 남아 있기를 부탁합니다. 적은 적을수록 좋고, 우군은 많을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제시 할 수 있는 강령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전술적인 지침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내용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현시기에 비정규직철폐투쟁보다는 생산현장에서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노동자통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이고 가질 것은 사회주의입니다.  노동자계급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회주의모습입니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을 하고 노동자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노동자계급에게 나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전달해야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결단코 그 모습을 속일 생각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성을 저해하고 부르조아의 계급의 사기성을 답습해서는 안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혁명은 순수합니다. 모든 계급의 모습을 가장 처절하게 들어내주는 모습이 혁명상황인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노력하는 계급들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의 모습으로 유지하여 발전하고자 한다면 다음 사회에 대한 창을 최대한 선전 선동하여 대중들을 현시기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은 바로 다음사회로 가는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서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매개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치투쟁은 권력투쟁입니다. 권력을 누가 잡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지배계급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피지배계급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정치투쟁에서 피지배계급이 승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청사진이 존재한다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며,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매개고리는 투쟁의 지침입니다. 매개고리는 권력에 대항 해 나갈 수 있는 역할과 피지배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현시기 계급투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아야 합니다. 부르조아는 신자유주의방식으로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노동생산성을 OECD국가들중에서 2위를 기록할 만큼 높이면서 비용절감을 위해서 비정규직노동자를 양산하고, 노동유연화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OECD국가들중에서 연간 노동시간은 2,423시간으로 최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에게 비정규직철폐라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부르조아계급에게 노동유연화정책에 힘을 갖고 있는 상태에선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해고의 위협을 받고 있는 존재이며, 이들의 해고는 언제나 비용절감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며, 부르조아가 정보를 독점하고있는 상태에선 정규직노동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할 수뿐이 없는 것입니다. 정규직노동자계급이 비정규직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비정규직 철폐라는 투쟁의 목소리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비정규직문제는 하나의 파편일 뿐입니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계급의 집회에서 비정규직철폐라는 목소리는 당연한 것이며,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대철폐, 농민대회에서의 수입개방저지라는 구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동자계급의 전체 집회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는 정규직노동자계급도 함께 끌어 안아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 자본주의 모순 중에서 현 시점의 특수한 모순을 잡아 하나의 계급투쟁의 전선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확인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정규직노동자양산이 문제인지, 비용절감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계급의 목을 조르는 노동유연화정책이 문제인지 다시금 제고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의 물결을 타면서 계속해서 이전되고 있습니다. FTA라고 명명되어지는 자유뮤역의 확대는 소자본의 붕괴와 자본의 집중를 일으키고, 비용절감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계급의 목을 세계적으로 죄고 있는 것은 하루이틀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를, 프랑스에서 최초고용법, 기회균등법으로 나타나고 , 독일에서는 복지부분의 예산감책정책으로 회사의 부담률을 적게 만드는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최초고용법철폐를 얻어냈습니다. 기회균등법이 존재하는 한 승리도 빛을 바랄 수뿐이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답니다. 당장에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부합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산당 사회당 등등 좌파당이 줄줄이 있는 국가들이지만 투쟁의 목적을 제대로 인식시키지도 못하고 물러선 그들은 힘겨운 나날이 다시금 기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겠지만 프랑스에서도 노동자통제를 주장하고 공장자주화운동으로 전개시킬 때만이 계급투쟁의 전면에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위상을 떨쳐나갈 것입니다.

 

블랙타이거동지 또하나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한분이 다음과 같은글을 올려 주셨던 것이 생각이 나서 올리겠습니다.      
"노동자출신의 의원이 있다고 노동자정당이 아니며,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노동자정당이 아니라는 유럽 자본주의 국가의 사민당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세계 경제현황과 노조관료의 득세. 정세와 노동)
 지금 비록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비호를 받고 노동자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자 하지만 실지적으로 본인은 이 당은 쁘띠부르조아정당이며, 개량주의 정당이지 결코 노동자게급정당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한반도에 존재하지 못하는 노동자계급정당은 이데올로기 문제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는 보수정당보다는 진보적이라는 이유로, 개량정당도 노동자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 정당의 개량판이라고 주장하고있는 작태들 때문입니다. 부르조아 정당이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정당이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은 지배계급에 대한 낭만에 빠져 있는 것으로서 지배계급이 아니면 다 우리편이라고 주장하고픈 망상에 빠진 부류입니다. 부르조아는 당면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관계로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하고 잇습니다. 이데올로기, 언론, 군대, 사법권 등등의 모습으로 노동자계급을 탄압하고 잇는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지배계급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사상과 조직만이 자신들의 무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의 것이다가 아니고 피지배계급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것이나, 그에 동조하는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민주노동당의 변심 - 그들의 존재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의식의 변화는 오지 않고 변화도 오지 않을 것이다. - 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정당의 건설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자, 동지. 동지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힘찬 글속에서 약동하고 벗어나가야하는 사상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관계로 진정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칼집 속의 칼로 , 얼음 속의 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쁘띠부르조아는 대안의 부재속에서 부르조아들이 아니면 자신이다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대안없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투쟁을 고스란히 쁘띠부르조아에게 헌납을 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것은 언제나 부르조아의 지배의 영속화이고 자본주의가 유지가 되는 모습을 늘 보아 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겐 사상과 조직은 자신들을 지킬수 있는 자위수단인 동시에 공격무기입니다. 이 무기를 대안으로서 활용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부르조아의 지배를 유지시키는 뼈대로서 남을 뿐입니다. 무대안은 무정부주의 ,무조직주의로 나가 혁명에 승리는 할 수 있을 진 몰라도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대안의 권력으로서 쁘띠부르조아의 권력의 승계가 이루어질 수뿐이 없습니다. 러시아혁명에서의 2월 혁명이 이중권력의 유지가 되었다라고 하지만, 4월테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부르조아권력으로 이동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또 다시 패배 할 수뿐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에겐 대중에게 보여줄수 있는 것은 함께 행동하는 모습만이 아닙니다. 함께 투쟁하고 선두에 나가서 총알받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이 아니고, 대중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제시, 피지배계급이 앞으로 해 나가야하는 모습을 그려주는 것, 현싯점에서의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방법, 그리고 강령으로서 노동자계급조직의 위상에 맞게 노동자들의 옆으로 다가가는 모습 등등의 것이 존재할 것입니다.

 

블랙타이거 동지.
동지의 열정은 무엇을 가지고 노동자계급이 무엇을 가지고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지는 계급투쟁의 쟁점과 원인에서 찾아 낼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본인과는 틀린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잇고 같은 결과로 도출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틀리게 나온다할 지라도 노동자계급의 사상에 도움을 줄 수 잇다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미 쁘띠부르조아계급의 사상에 풍덩하고 빠져있는 조직과 조직원들에 비해서 아직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견지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아직은 부족하지만 서로 배워나갈 수 있다면 한층 발전해 갈 수잇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짧게 이야기를 할려고 했는데 글이 좀 길어 졌습니다. 저의 글이 좀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글의 내용중 예전에 했던 내용과는 다른 글이 존재합니다. 정규직 노동자와 노동귀족문제에 대한 시각이 변화였던 점이 그러합니다. 독수리 실력으로 긴 글을 쓰고 있으니 손과 목이 아픕니다. 더워지는 여름에 몸과 사상이 건강하게 지낼수 잇기를 부탁드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14 13:37 2006/05/14 13:37
http://blog.jinbo.net/choyul/trackback/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