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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30
    [창간호2면] 과학철학에 대하여 [첫번째 시간]
    꼬민/Comin
  2. 2008/11/30
    [창간호2면] 데카르트를 다시 보며[두번째 시간](10)
    꼬민/Comin

[창간호2면] 과학철학에 대하여 [첫번째 시간]

 

캔디 brightazure@hanmail.net


과학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절대성에 대해 별로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학은 매우 객관적이며 탈정치적인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20세기 과학철학자들은 이런 ‘과학’의 절대성에 대해 의심했고, 과학의 사회성과 정치성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논의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초기 과학철학은 ‘과학’이 다른 학문과는 차별적인 대상, 방법론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이 시기 과학철학은 명제의 논리적 배치로, 다시 말해 수학-과학(넓은 의미의 물리)적 방법으로 세상을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논리실증주의에서 출발한다. 오로지 검증 가능하고 분석적인 명제만이 가치 있다고 했을 때,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대로 정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원칙으로 새로운 명제를 수용할 것인가, 어떻게 수용해야 그동안 쌓아놓은 세계에 대한 논리적 구성의 체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인지는 논리실증주의에서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이에 포퍼는 이들이 제시한 방법론에 대해 ‘반증주의’를 제시한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무엇을 과학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 과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도구이자 학문이라는 점에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과학‘철학’은 철학과 분리된 ‘과학’이 세상을 서술하는데 중심적인 지위를 가지지만, 그 ‘과학’에 대한 정의가 논리적 엄밀함을 결여했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포퍼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반증을 거쳐 새로운 이론이 도출될 때마다 더욱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는 특정한 방법을 통해 세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가 표현되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시도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다. 역사에 어떠한 도달점과 시작이 있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의 반영이다. 포퍼가 과학을 세상에 대한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과학의 진보를 확신했다는 평가를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듯 과학에 특별한 방법론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달리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역사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을 거쳐 온 것이 아님을 풍부하게 보여주면서, 쿤 역시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과학’에 부여된 권력을 흔드는 역할을 했다. 그는 과학자들이 이론을 등에 업고 관찰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론 중립적이어서 분쟁의 심판 역할을 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한 것으로 이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객관성은 물론이거니와 합리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데 넓은 의미로는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이며 좁은 의미로는 그 집합의 한 구성 요소로서 구체적이고 인상적인 문제 해결의 사례에 해당하는 ‘범례(과학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론의 매우 성공적인 적용 사례)’라고 설명한다.
쿤은 과학을 퍼즐맞추기로 형상화하면서, 빠진 조각들을 기성의 패러다임에 비춰 맞추려 노력하다 해결되지 않는 퍼즐들이 쌓이다보면 다른 패러다임으로 시도를 해보게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정상과학 시기에는 그 시기의 패러다임이 세상을 가장 엄밀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모든 과학자들이 그 패러다임에 충실하다. 쿤은 과학의 연구 과정 속에서 현재의 패러다임에 부합하지 않는 예측결과가 나왔을 때, 대부분 그 값을 무시하는 사실을 들며 합리적으로 보이는 과학이 패러다임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지를 서술한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패러다임보다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물리학이 점진적으로 진보해왔다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주장이다. 또한 쿤은 ‘공약 불가능성’을 통해 매우 흥미로는 이야기를 하는데 ‘공약 불가능성’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틀이며 방식인데 과학자들이 이론 의존적 관찰을 한다는 쿤의 주장은 결국 과학자들도 자신의 세계관에 근거해서 자연 세계를 본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쿤은 과학혁명을 통해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계관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전체가 바뀐다’고까지 주장한다. 세계란 우리가 ‘패러다임을 통해 인식하는 그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유는 우리에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결국 쿤의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제기되는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했느냐이지, 그것이 우주의 근본 원리와 얼마나 가깝느냐가 아니다. 그러나 쿤은 과학이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면, ‘왜 [과학]을 해야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과학이란 ~하는 것이다’는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런 쿤의 입장을 현재 과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므로 보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본질과 기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으려했던 태도로 바라볼 수 있다.



점이 어느면에 있습니까? 쿤에 따르면 당신이 보는 방식에 따라 세계가 결정된다.



라카토시는 과학의 명제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묶음으로(핵+보호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며 과학활동이 개별 명제 하나하나에 대한 증명과 분석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뒤이어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이 다른 학문과 구분되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든 방법론이 과학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에 자신을 특수하게 규정할 수 있는 논리적 언술이 부재하다면, 과학이 그런 언술의 존재여부를 기준으로 자신과 구분지으려 했던 다른 학문들과의 경계가 사실상 무의미 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과학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과학사회학은 왜 현대사회에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인식이 구성되는지를 탐구했다. 우리가 현재 과학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해석될 수 없는 변칙사례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설명이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일지는 알 수 없다. 그 변칙사례들이 제기되는 것은 사회적인 맥락과 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재의 과학체계가 유지되는 것은 과학 바깥의 사회와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다.


과학이 어떤 식으로 정립되는가에 대한 논쟁에 대해, 왜 다른 것이 아닌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논쟁을 하는 가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자. 초기 알튀세르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고, 철학에는 대상이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정초하고자 한다.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과학’의 특수한 대상과 방법론이 있고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에 부합하기 때문에 과학으로 언명한다고 하더라도, 그 언명은 사회적-정치적인 맥락에서 존재한다. ‘과학’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쓰이고 평가 되는가, 즉 어떠한 힘을 가지는가를 살피면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구성해볼 수 있게 된다. 과학사회학은 이런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본다.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술적인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요건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과제는 우리가 과학철학의 논쟁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먼저 선험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이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축적하는 체계라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 이는 어떤 특정학문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으로 넓혀질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이 설사 내부적인 공리와 증명 체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공리 자체가 사회적인 인식들 속에서 구성되는 것인 만큼, 다른 학문 역시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 속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즉,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과학’에 딴지를 거는 태도 자체를 배울 수 있겠다.



과학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읽어볼 책들

 ::과학철학에 대한 개괄서
현대의 과학철학_A.F 차머스_서광사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_장대익_김영사


::과학철학자들의 원저
과학혁명의 구조_토마스 쿤_까치글방
방법에의 도전_파이어아벤트_한겨레 (절판되었다.)


::과학철학 내 논쟁과 비판
지적사기_앨론 소칼_민음사
쿤/포퍼 논쟁_스티브 풀러_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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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2면] 데카르트를 다시 보며[두번째 시간]

티거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나는 철학을 공부 하면서 데카르트를 공부하지 않고 넘어 간 적이 없다. 하지만 매 번 데카르트를 보면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 철학을 단순히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수준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데카르트의 철학보다는 데카르트의 삶이나 어떻게 하여 이런 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고 방법서설은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고 본다.
이번에 [방법 서설]과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나온 데카르트 철학 부분을 함께 공부를 한 것이 나에겐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까지 데카르트를 이해하는데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많이 의존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이해하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데카르트 한 사람을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 부족한 점을 [방법 서설]이 채워주었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철학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알려져 있다. 이 말이 알려주듯이 데카르트는 중세의 시각을 벗어나 근대의 시각을 시작하였다. 중세는 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데카르트의 철학이 남았다는 것은 데카르트의 처세가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대의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가 있다. 아무튼 이렇게 데카르트는 은근슬쩍 새로운 사고를 시작하였다.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제1원리이다. 이 명제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가 생각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본 점에서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이라는 중세의 관점에서 갈라서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여럿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반박할 수 없는 지식, 즉 수학적 지식과 모두가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가 진리라고 말한다.


문제 설정
‘나’라는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나 진리를 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알아 갈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본유관념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해결한다. 본유관념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나’라는 주체는 신이 없이도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근대 철학의 출발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주체가 이성에 내장되어있는 본유관념을 이용하여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우선한다. 생각하는 것은 정신이고 존재하는 것은 육체라 볼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로 존재하면서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육체가 어떻게 일치 하는가 즉 주체와 대상이 어떻게 일치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성을 얘기 한다.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성을 데카르트는 신이 주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누가 이성을 주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이성으로 완전한 것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데 데카르트가 근대와 중세의 중간에서 공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과학과 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수학의 방식은 누가 보아도 맞는 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이라는 표현에 신뢰를 가지는 것은 근대의 과학이 가졌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이 과학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통제가 되지 않는 육체는 불확실한 것이며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육체의 활동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고 이것을 데카르트의 도덕론이라 부른다.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이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알아야 한다. 이에 데카르트는 해부학을 공부하고 근육과 심장의 움직임을 연구 하였다. 육체를 기계적 작동의 원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완전한 이성이 어떻게 통제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 사이에 연결선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정신이 육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끝으로
데카르트에게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의 존재여부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많은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지식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스콜라철학이 불분명한 논리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시대상으로는 새로운 전환이었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데카르트의 철학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데카르트를 공부하면서 데카르트의 생애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그의 생애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고, 그 환경 속에서의 철학이며 시대적인 한계도 분명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데카르트를 보는 것은 근대 철학의 시작이며 근대 철학 딜레마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욱 철학의 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저작 중 ‘방법서설’과 ‘정념론’을 읽었다. 방법서설의 번역은 이현복씨의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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