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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1면] 해고는 살인이다. 모든 구조조정, 정리해고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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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인문학교실 두번째 초대장

 

모두에게 삶을 풍요롭게, 우리에겐 인문학적 상상력을!

 

인문학 교실이 두번째 초대장을 여러분께 보냅니다..^^

 

 

인문학 교실이 첫 번째로 선정한 "원숭이는 왜 철학교사가 될 수 없을까"를 네번에 걸쳐 마쳤습니다.

이제 새로운 주제 선택하기 전, 진화론을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부터 150여 년이 되어온 진화론 논쟁!!

 

이기적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나?

진화는 백미터 경주인가, 넓이 뛰기인가?

종교는 왜 정신 바이러스인가?

다윈의 진화론은 왜 불완전한가?

재밌고 도발적인 질문을 통해 교과서에 갇힌 진화론이 아닌

생생한 진화론을 함께 만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책 : 다윈의 식탁(장대익 지음)

일시 : 5월 24일 / 낮 4시 ( 이번 다윈의 식탁은 1회로 정리합니다)

장소 : 전북대 2학생회관 3층 올리브

문의 : 010 8639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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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광고] 경제위기에 맞선 전북지역 대학생 공동행동

경제위기에 맞선 전북지역 대학생 공동행동 함께해요!

청년인턴제, 대졸초임삭감.. 정부와 기업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서민과 청년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해 지고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민중의 대안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요구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우리의 대안으로 경제위기에 맞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전북지역에서도 공동행동을 꾸려 경제위기에 맞선 우리의 대안을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할 것입니다. 또한 공동행동은 우리와 같은 요구를 위해 싸우는 장애인, 여성, 노동자와 연대합니다.    

이후 일정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날
4월 30일 119주년 노동절 전야제
5월 18일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 광주순례
방학 중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에 연대활동

매주 화요일 저녁 경제위기에 대한 토론과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참가문의 : 018-417-3371(청), 010-8639-0214(민)
(동의하는 개인 단체 모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경제위기에 맞서는 우리의 요구안

경제위기는 기업들의 위기이기 이전에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들의 위기인 것이지만, 그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대책은 언제나 고통을 민중이 짊어지도록 강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업이 살아난다 해도, 삶이 파탄 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정부는 개인파산자들에 대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치부하며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지만, 파산 위기의 기업에 대해서는 천문학적인 지원을 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이 사회 전체를 위한 일인 양 떠듭니다. 이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 영세상인 들에게 지원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경제위기 속에서 기업이 하는 대로, 국가가 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 청년 인턴제 폐기, 생활임금 보장

취업자와 미취업자를 나눠 미취업자의 임금을 깎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끼리의 경쟁을 더욱 부추길 뿐입니다. 이 경쟁 속에서는 이전에 모두가 얻었던 조건을 승자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이 팍팍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얇아질수록 우린 더욱 불안에 떨며 경쟁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명박 정부는 서민생활 대책으로 초단기 비정규직에 불과한 사회적 일자리를 몇 십 만개 확충하겠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 일자리를 따내라며 우리를 또 경쟁시킬 요량입니다. 우리는 동물원 원숭이가 아닙니다.
노동여부와 상관없이 모두가 삶의 기본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실업급여를 확충해야 합니다. 불안정노동을 확산시켜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청년인턴제를 폐기해야 합니다. 모두가 적절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 대학의 금융투기 기업화 반대

많은 대학들이 학생들의 등록금을 펀드에 투자하고 대학의 이름으로 회사를 경영합니다. 돈이 되는 학과만 육성하고, 기초학문은 대학에서도 발딛을 곳이 없습니다.  시간강사만 남쳐나고 전임교수는 갈수록 줄어듭니다. 조교, 미화노동자 등 대학에서 일하는 대다수는 비정규 노동자입니다. 지식은 돈벌이 수단이 되었고, 그만큼 우리의 교육받을 권리도 줄어갑니다.  대학의 금융투기와기업화에 반대합니다.

* 공적 자금의 사회적 통제
공적자금은 우리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돈입니다. 그 돈이 투입된 회사는 사회적으로 통제받아야 합니다. 기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던 이들이 이제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기업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합니다. 사회적통제를 받지 못하겠다면 공적자금을 지원받지 말고 파산하는 것이 옳습니다. 공적자금을 제공한 것은 우리인데, 그 돈이 우리의 삶을 깎아먹는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 금산분리완화 추진 중단
지금의 경제위기가 금융자본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은 오히려 금산분리를 완화하여 금융자본을 자유롭게 하겠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들 삶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눈앞의 기업의 이윤만을 보장하려는 정부는 경제위기의 공범입니다.
지금 당장 금산분리완화  입법을 중단하고, 금융을 규제해야 합니다. 금융거래세 도입으로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동을 제한하고, 한미FTA 비준을 중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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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광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인문학은 대학에서도 찬법신세 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인문학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돈되지 않는 학문을 필요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이 사회의 '철학'인 것이고 그 '철학'이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학문입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행해졌던 철학교육은 우리의 일상적인 고민과 동떨어진 채, 단순히 아무개가 한 말을 주워 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교육이 철학을 쓸모없고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태도를 기르기 위해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교실'을 준비했습니다.

때 : 4월 26일 4시 (격주로 진행)

곳 : 전북대학교 제2학생회관 3층 OLIB

주최 : 전북평화와인권연대, 꼬민, OLIB

연락처 : 010.8639.0214(민), 011.600.5025(환희)

http://cafe.daum.net/2008sem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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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1면] 일자리 나누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일자리 나누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난 2월 23일, 한국노총과 경제단체, 정부, 시민단체와 종교계, 학계 인사들이 모여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안'을 발표한 이후, 취업준비중인 대학생은 물론, 고생 끝에 취업에 성공한 사회초년생까지 대한민국 청년들은 요즘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그것은 합의안의 내용에 “경영여건이 어려운 사업장에서는 임금 동결·반납·절감을 실천키로”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합의안이 발표되길 기다렸다는 듯이 26일에는 “대졸 신입사원의 연봉을 최고 28%까지 차등 삭감해 신규직과 인턴채용에 쓰겠다.”는 전경련 소속 30대 그룹의 합의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청년들이 선호하는 공무원 사회에서도 기업형 연봉제 도입과 월급 반납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그 어디를 가더라도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언론에서는 이러한 임금 동결․반납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제2의 금모으기'에 비유하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고통분담을 한껏 격려하고 있다. 소도 웃을 일이다. 우리가 금 쪼가리 조금 없다고 굶어죽는 것은 아니지만, 임금을 동결하고 반납하는 문제는 바로 생계로 직결되는 문제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임금 반납과 금모이기를 같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 서민을 생각하는 대통령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작금의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고유 모순에서 기인한 이미 예견되어 있던 사태로서, 소위 '좌빨'로 매도당하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걱정해오던 것이다. 필요에 의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인데,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과잉생산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과잉생산은 결국 공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 공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과 뉴딜정책과 기타 등등의 역사가 쓰여 왔던 것이고, 또 이미 우리의 머릿속과 생활방식을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정책 또한 그런 맥락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경제위기를 촉발시킨 미국발 금융위기는 바로 실물경제의 성장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자본이 금융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실물경제성장의 한계→자본이 금융시장으로 집중→파생상품 등에 대한 투기로 불안정성 증가→실업률 증가와 임금하락으로 인한 개인 파산 증가→금융시장의 붕괴→전 세계 경제위기로 이어진 셈이다.
  따라서 이런 신자유주의 흐름을 당장 끝장내야지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내놓는 것들마다 하나같이 기간제 일자리뿐이고, 그나마 2년밖에 고용할 수 없는 기간제 고용기간을 2배로 늘리겠다며 비정규직법안을 다시 손대고 있으며, 공공부문의 사유화를 추진하면서 서민들의 삶을 더욱더 불안정한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고유 모순으로 인한 경제위기의 책임을 우리 서민과 청년들에게 전가시키지 말라! 고통분담은 우리의 임금을 깎아서 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펀드투기와 비정규직 노동자 착취로 막대한 이윤을 뽑아온 기업의 재정을 출자해야 되는 것이다. 사회에 더 이상 소비가 되지 않아 공장이 멈춘다 하더라도, 자본가는 절대 굶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는 굶으라고 강요하는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너나 굶으세요.” 그리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모두가 평등하게 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함께 꿈꾸어보자. 만물이 생동하는 이 봄날에 우리는 살기 위하여 더 이상 저들이 얘기하는 거짓희망에 속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살길을 찾자.

춘투(春鬪)에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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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2면] 학자금 대출, 철거 그리고 빈곤

학자금 대출, 철거 그리고 빈곤
-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룩 http://blog.jinbo.net/counterattack


철거민과 우리

대학 등록금은 학생인 나에게 가장 큰 관심사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용산 철거민 참사의 불길을 보며 언뜻 등록금이 떠오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대학 등록금에 고생한 친구 J의 모습이다. J는 결코 낮지 않은 금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자는 '알바'로 갚고 있으나 졸업 후에 원금을 갚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정부가 일자리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청년인턴제'란 '정부 공인 알바'가 나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빡세게 공부해 정규직 노동자가 되겠다고 했다. 헌데 이번에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란 명목으로 대졸초임을 10∼30% 까지 삭감한다고 했다. J, 대출금 갚지 못해 신용등급 떨어지면 안 그래도 어려운 취직이 안드로메다로 갈까 걱정되어 졸업하고 단기직이라도 찾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 새내기 땐 고시원에 넌더리내던 J, 결국 아껴야 한다며 고시원 잔류를 결정했다. 바로 지금, 대학인의 전형적인 모습들 중에 하나다. 그런데 왜 용산 철거민 참사의 불길을 보며 J의 모습을 떠올렸을까.

 

1970년대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며 생겨난 달동네․쪽방촌은 1980년대 정부와 건설자본들의 재개발 아래 하나둘 철거된다. '상계동 올림픽'이란 영화엔 80년대 당시 철거민의 처절함과 잔혹한 개발주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2009년의 용산 철거민 항쟁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전보다 살만해졌네'라는 말을 비웃듯이.) 이렇게 재개발 정책이 서민 싹쓸이 식으로 진행되며 도심에서 가난한 이들이 몸 누일 공간이 사라져갔다. 내 친구처럼 당장 삶이 다급한 이들은 의식주라도 줄여야하는데 그 끝에 고시원을 선택하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고시원이 매년 약 500개 씩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의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3.6평의 방에 살며 학비를 벌고 생활비를 버는 사람들이 바로 고시원 거주자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의 열에 일곱은 월 평균 50만원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 50만원 중에 주거비용으로 지출할 돈은 몸 누일 공간만 구할 정도면 된다. 그리고 몸 만 누울 수 있는 저렴한 고시원일수록 화재 등의 안전문제에 노출된다. 고시원 화재로 죽어간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그 우울한 증거다. 개발은 한쪽에선 철거로 집과 목숨을 뺏고 또 다른 쪽에선 거주의 빈곤을 확대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라 한다.



한국 사회의 빈곤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에선 이러한 문제가 세련되게 은폐되면서 여전히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단 거주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빈곤이라는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2005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월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113만 6천원) 이하인 기초법 수급자(160만 명)와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인 차상위 계층, 소득이 없지만 재산기준이나 부양자 기준에 의해 기초법 수급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합친 빈곤인구는 약 5백만 명이 된다고 추산하고 있다.(말이 5백만이지 비정규직 등 일을 해도 빈곤한 노동빈곤층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많다.) 그런데 5백만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그만큼 빈곤문제가 잘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떻게가능한가? 통계청이 발표하는 빈곤율 자료의 근거가 되는 절대 빈곤율은 그 기준선을 최저생계비로 삼는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급여기준선이 되고 있는 최저생계비는 2007년 기준, 1인 가구 435,921원에 불과하며, 이는 전체 가구 평균소득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즉, 빈곤을 판가름하는 기준선 자체가 낮아지니, 빈곤은 은폐되고 수치상으로는 개선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절대 빈곤율이 낮아졌다는 것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줄었기 때문이 아니다.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경제적 빈곤 문제만이 빈곤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빈곤은 점점 사유화 되는 공공재(가스, 전기, 물 등)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또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필수품(핸드폰, 인터넷 등)으로부터도 멀어지며 따라서 사회적 관계와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비닐하우스촌과 고시원과 타워펠리스가 함께 있다. 어떤 이의 풍요를 위해 다른 누군가는 인간의 존엄마저 빼앗겨야 한다. 좌측이 우면동 비닐하우스촌, 우측이 논현동 고시원 화재사건 사진이다.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없는, 노동빈곤을 만들어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내놓고라도)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동을 팔아도 최저임금으로는 한 달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을 뿐이고, 매번 그 다음 달 생계를 위해 꼼짝없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기아와 같은 문제만이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만들 수 없는 것도 빈곤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실업과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이 확산되면서 일해도 빈곤한 노동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증가시키는 5백만이라는 빈곤인구의 숫자만큼 혹은 그보다 늘어나는 건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렇듯 언제 용역깡패와 경찰이 몰아낼지 모르는 철거민과 혹시라도 화재가 자신을 삼킬지 몰라 불안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 모두 빈곤문제의 위에 서있다. 이 시대의 당신과 나, 우리에게 빈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 목숨을 담보로 잡은 삼성, 포스코 등의 (건설)자본들은 개발 축제를 즐긴다. 이들이 마음 놓고 축제를 즐기도록 지원하는 자봉 역할은 자본의 서포터 정부가 맡는다.

빈곤은 사랑의 리퀘스트에만 나오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대학 등록금에 목이 뻐근해오는 J와 나 그리고 당신을 비롯한 우리가 빈곤한 사람들이다. 성공을 위한 상상력의 빈곤 같은 게 아니라 우린 진짜 '빈곤'하다. 빈곤의 문제는 개인의 게으름․무능력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며,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문제를 포함한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개발정책에 전면 반대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연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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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3면] 이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

이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
-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다.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용산철거민들의 저항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진압이 벌어졌고 이에 대해 '과잉'진압이라는 비판여론이 높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이명박 정권의 몰상식함 때문에 일어난 일로 치부하기보다, 왜 이명박 정권이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한 접근이다.
경찰특공대는 용산철거민 투쟁에만 투입되었던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작년 가을에 경찰특공대가 기륭전자 앞에서 임시구조물을 쌓고 고공농성을 하던 노동자를 강제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이 때 구조물 위의 노동자는 단지 맨몸으로 철난간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을 뿐인데도 특공대가 투입된 것이다. 이렇듯 특공대의 투입여부는 폭력의 유무로 결정되어온 것이 아니다. 용산철거민의 투쟁이 폭력적이이서 특공대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경찰의 변명은 궁색해졌다.

경찰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은 용산철거민과 비정규여성노동자는 테러리스트가 맞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명박정권은 경찰특공대가 대테러부대인 만큼, 굳이 거짓말과 변명할 필요 없이 특공대의 투입은 정당했다고 항변해도 된다. 화염병을 들었기 때문에, 높은 구조물 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테러리스트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기업의 돈벌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들의 행위로 용산의 재개발 공사가 반년 가까이 지연되어 삼성, 포스코 기업의 돈벌이 계획은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기륭전자는 회사 사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특공대의 투입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로 기업의 이익에 얼마나 큰 타격을 줬느냐에 있는 것이다.

같은 그림 찾기 - 2008년 10월 21일 기륭전자와 2009년 1월 20일 용산
표면상 국가와 기업은 별개로 활동하고, 때로는 서로 적대적인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법·제도와 공권력은 결국에는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되어 왔고, 기업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국가의 권한을 강화시키는데 협조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이전에 자본주의 국가이고, 기업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이다.(대한민국은 자본주의국가다.x2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기업으로부터 나온다.) 국가의 입장에서 기업의 이윤을 침해하는 행위는 자신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의 경찰들은 쉽사리 특공대 투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통념상 국가는 중립적이기 때문에 경찰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곤혹스러웠을 뿐. 그러니 경찰여러분들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기업의 용역으로서의 역할을.

 

 

- 이것을 단지 이명박 정권이 친기업정책을 펴기 때문으로, 이명박 정권의 관료들 중 강부자가 많아서 때문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업의 이윤생산을 위해 국가가 개입해왔던 것을 보여준다. 교과서적 통념대로 국가는 기업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의 다양한 장치들-군대, 경찰, 학교 등-을 통해 기업활동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금 시기의 자본주의 형태에서도 국가의 작용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국가의 간섭을 없애야한다는 소위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설은 기업의 규제에만 해당할 뿐, 기업의 활동에 장애가 될 것들을 억압ㆍ통제하는 국가적 장치는 더욱 강화된다.(현재 국회에서 계류중인 국가정보원법, 인터넷실명제법 등을 보라. 좀 더 민주적이었던 마냥 언급되는 노무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했다고? 천만에, 의지가 없었던 것일뿐. 최근 쟁점이 되는 집시법 개정은 노무현 정권에서 먼저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죽음도 이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철거민들에 대한 탄압,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발정책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만 그때는 이명박 정권과 같이 무식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덜 알려졌을 뿐이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되겠다.

이렇듯 기업의 이윤은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본래 역할이고, 저항하는 노동자․빈민은 국가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라고 인식해야만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자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와 경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본질을 짚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 이명박 정권은 본래 국가와 공권력의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철거민들의 죽음에 머리를 조아려야할 것은 김석기ㆍ이명박보다 삼성과 포스코의 총수들이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세상에서 못가진자들의 죽음은 반복된다. 그것이 이번과 같이 극단적인 살인으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해도, 그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 역시 지금의 경제질서이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삶이 붕괴될 가능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붕괴된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대로 사라지거나, 마지막 힘을 모아 소리 지르거나. 그러므로 이들의 외침이 '불법행위'라고 탓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불법'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질서를 먼저 탓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계를 요구하는 이들이 국가에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라면, 이 국가가 지탱하고 보호하는 질서자체가 애초 모든 이에게 인간으로서 삶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던져보자. 모두에게 생계를 보장하게 될 때 스스로 붕괴되는 질서라면, 그래서 그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이 질서를 붕괴시켜야 한다 - 삶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통해!!

따라서 철거민들의 죽음에 분노한다면, 비판을 하고 싶다면, 이러한 사회구조를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해야한다. 그것은 불안정노동 철폐를 외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투쟁,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투쟁, G20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의 투쟁, 이외에도 삶의 현장에서 싸우는 전 세계 곳곳 민중들의 투쟁과의 연대이다.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1. 철거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야만적인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1. 신자유주의의 대리인 이명박 정권은 퇴진하라.
1. 다주택보유자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집을 투기대상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라.
1. 재개발된 주택은 공공임대주택으로 하여 임대료를 정부가 보증하고 주택이 없는 서민들에게 우선 입주할 권리를 주라.
1. 재개발 이익을 환수하여 공공시설 확충에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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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4면] 타락한 노동운동? - 자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운동

타락한 노동운동?

- 자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운동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2008년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정규·여성노동자의 투쟁이었다고 서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이 사회에서 그만큼 여성·비정규노동자의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네들이 사회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재현되는 공간에 서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사회를 바꿔야겠다면, 그네들의 싸움에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최근 노동운동 내부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그렇지 않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작년 코스콤 비정규노동자들이 싸움 끝에 복직을 얻어낼 수 있었을 때, 그것이 무산된 것이 정규직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요구를 합의문에 같이 실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을 때 억장이 무너졌다. 코스콤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에 한 차례도 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함께하지 못하겠다며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한국노총으로 자신의 상급단체를 변경했다. 코스콤의 사례는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서 일어난 일이라 치고 우선 넘어가자.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강남성모병원 비정규노동자들의 고용보장을 위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의 싸움에 많은 노동자·학생·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연대했는데, 정작 상급단체인 보건의료노동조합은 그 사람들 속에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오히려 보건의료노조가 비정규노동자들의 농성물품을 사무실에서 치워달라고 했다한다. 그간 연대에 소홀한 게 꼭 바빠서만은 아니었고,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을 부담스럽거나 마뜩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2008년 노동자들 싸움은 비정규-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싸움은 2009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현대미포조선, KTX, 강남성모병원, 코스콤, 기륭전자, 콜트기타 노동자들이다.

올 겨울, 항만의 높은 굴뚝 위에 여러 날 동안 목숨을 걸고 올라가 있던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복직을 요구하다 회사의 탄압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회사는 일방적으로 합의를 종용하고 복직요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었다. 정작 놀라운 것은 피해 당사자도 모르게 회사와 일방적인 합의를 한 곳이 바로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이에 다른 두 노동자가 한겨울에 먹을 것도 없이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한 것이고, 이들이 굴뚝에서 다시 내려오기 까지 수많은 노동자·사회단체들이 굴뚝아래에서 연대했다. 그래서 그 싸움에 연대했던 노동자들은 삼중으로 싸워야 했다. 회사와 경찰들과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노동조합과 싸워야 하는 사태가 온 것은 기가 막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온 일이기도 하다.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그 생산을 화폐형태로 전유하는 자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적대가 있는 것이 이 세상(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인데, 이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 모순 아래에서는 언제나 최소한의 삶마저 파괴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들로 인한 체제가 붕괴될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고 복지정책을 시행한다. 또한 이 모순을 그대로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 - 학교·언론·군대·경찰·감옥 등.
 
70년-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자생적인 노동조합들의 요구는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라는 것이었고, 이는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요구였기 때문에 개별사업장을 넘어서는 다양한 연대가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애초에 그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없는 이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개별기업에서의 '임금인상'을 위한 싸움이 될 때부터는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 모순은 개별사업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앞서 말한 여러 장치들을 통해 생산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장치들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 아니라, 기업 내에서의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투쟁을 하는 한 '노동조합'은 자본이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경제적 관계와 정치적 문제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경제적 문제를 별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때문에 경제투쟁으로 치우치게 된다. 정치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은, 그 정치적 장치들이 계속 작동하게 만드는 ' 능동적인' 행위이다.
예를 들어 국가-기업이 노동자들을 통제․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노동자 내부를 분할하여 일부는 선택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것이다. 이런 분할 속에서 자신이 배제당하는 쪽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은 노동자들의 내부적인 갈등을 조장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고등학교 입시경쟁에서부터 취업경쟁에 이르기까지 뼛속 깊숙이 각인된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분할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 차이에 기반한 여성노동자-남성노동자, 이주노동자-국내노동자, 장애인-비장애인으로의 분할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서 관리통치하는 자본의 전략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 안에서는 선택된 무리도 언제 배제될지 모른다는 위협 때문에 최저의 생계에 만족하도록 강요받을 뿐이다. 결국 누군가를 포섭․배제하는 정치적 장치는 노동자의 임금을 제한 나머지 이윤을 뺏아가기 용이한 경제적 관계를 재생산한다.

 

조직된 대공장 남성노동자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울산 현대중공업. - 남성노동자들은 물리적인 공권력의 탄압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정부-기업의 '가족임금'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관리전략에는 쉽게 포섭되었다. 노동운동 안에 가족(여성)에 대한 분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정규직 노동조합 및 대단위 노동조합이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단지 몇몇 노동조합의 활동가가 개량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노동자들을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식을 노동조합 스스로 재현하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경제관계를 재생산해내는 조건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인간학적 차이를 기반으로 노동자를 분할할 때, 노동운동이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변혁적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이것은 차이를 감추자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따른 상이한 요구들이 실현되는, 보편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관료화 되었다는 대부분의 비판에는 이런 내용이 충분히 담기지 못하고, 문제해결의 방안을 활동가들의 자세를 쇄신 하는 것으로 접근한다. 물론 노동조합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재현되는 것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한 자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개별사업장 안에서의 경제투쟁으로 집중될 때, 그 밖의 다른 실천들에 대해 시선을 돌리기 어렵게 된다는 점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형태에 따라 가능한 실천의 형태가 어느 정도 한계지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에서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싸움이 거세다 할지라도, 그 요구가 다른 사업장들의 요구를 포괄하기가 어렵다. 분할과 배제를 넘어서는 보편적 변혁성을 준비할 수 있는 조건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분출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 싸움이 '가족임금'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 되었을 때부터 노동운동은 언제나 '관료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런 흐름과 정확히 맞물린다. 경제관계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개입에 대한 분석이 부재한데 더해 더욱 적극적으로 자본의 이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기업의 이익을 노동자의 이익으로 단순 등치시키는 논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 자본이 노동자를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활용해온 것들을 재현해왔다는 의미이다.


 


노동자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남성만 있다는 비판이 10년 전부터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느 해인가는 민주노총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다음해 포스터 역시 여성은 없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이 하고, 장애인운동은 장애인이 한다는 생각 또한 운동의 영역을 나누고, 주체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을 분할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고, 노동운동에 여성운동이 없거나 여성운동에 노동운동이 없게 한다. 최근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은 이런 운동이 맞게 될 필연적인 결과였고,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결국 노동운동의 관료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는 의제의 선택과 운동의 형태가 필요하다. 보편적인 변혁적 요구와 이를 담보하기 위한 사회적인 연대 말이다. 사실 이런 비판이야 진작부터 있어왔고, 이를 위해 기업을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추진해왔지만 형식적인 형태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운동이 또 다른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배제하고 있지 않은지, 그 배제된 자들의 요구를 어떻게 자신의 요구에 담아낼 것인지, 그 보편적 요구가 실현되는 다른 세계의 이념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70-80년대 뜨거웠던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희미해진 이것을 우리는 사회운동적 전통이라고 일컫고, 그것을 복원시기키 위해 실천한다.

 


** 이 비판은 조선일보 같은 치들의 '귀족노조'라는 비꼼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이다.(이는 조선일보가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에 대한 기사는 얼마나 실었는가를 보면 명확해진다. 저들에게는 오로지 '귀족노조'만 있을 뿐이고, 비정규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저들은 '노동운동' 자체가 그런 것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은 '노동운동'의 전통을 복원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타락했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습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므로 자본주의의 모습이 지저분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자신들의 모습부터 반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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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4면] 마르크스의 '실천'에 주목하며

[꼬민세미나정리]

마르크스의 '실천'에 주목하며

룩 http://blog.jinbo.net/counterattack


시작하기에 앞서

처음 꼬민을 발간하고 철학 세미나 부분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참 많은 이야기가 듣게 되었다. 왜 이런 급박한 시기에 근대 철학을 보는 것이냐,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냐, 혹은 앞으로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조언과 충고들을 들었다. 꼬민의 어떤 부분보다도 더 많은 비판과 질책을 들었다. 어떤 활동가의 말대로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론적 잡식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상황에 최소한의 합의되는 내용과 방향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론을 위해 변혁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했다. 우리의 활동은 결코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근대 철학 넘어서기

철학의 주체 또는 출발점은 무엇인가에 근대철학은 이런 저런 견해를 내어 놓는다. 그라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출발점인 전제들로부터 완전히 떠나 현실 자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시작하는 자신의 작업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정의한다.
또한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어떤 것이다라는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도 끝없이 되풀이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마르크스는 본질이나 정의라는 문제설정 자체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단 번에 뛰어넘는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ensemble, 총체)이다.'로서 이전의 질문을 넘어선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만이 이전의 철학과 단절하려 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이전의 철학을 '진리에의 의지(지향)'라고 정리해버린다. 더욱이 진리를 원하는 것이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 안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라는 주체로 철학을 시작하던 데카르트의 명제를 무너뜨린다. 또한 세계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와 단절하려 하고, 세상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태도 또한 관념론의 판박이일 뿐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니체의 철학하기는 마르크스의 작업과 매우 유사하다. 피안(彼岸,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의 세계가 아닌 차안(此岸,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닌 '왜 진리를 찾으려 하는가'를 묻는 계보학적인 질문 등은 그 자체로 차안의 삶을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이런 태도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니체의 태도를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좌파에게서 볼 수 있다. 그것 또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삶의 양식일 수 있으나, 세상에 대항하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것의 간극은 매우 넓다.

 

마르크스의 실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처럼 세상을 해석만 하거나 인간본질을 탐구했던 이전의 철학을 넘어섰던 마르크스의 실천의 개념에서 우리가 나갈 방향이 있다고 본다.
이론의 진정한 힘 혹은 진리여부는 실천만이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 정도는 그렇다고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던 철학의 기준에서 볼 때 상대주의이겠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기준을 넘어서고자 했다. 애당초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은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현실을 변혁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 세계는 단지 해석하기 위한 관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분석한 것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지, 자본주의를 자세히 알기 위함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실천'에 얼마나 적합한지가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까지 이론학습은 마르크스가 이전과 단절한 것이 무엇인지, 세상을 변혁하는 과학으로서 정초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결국 마르크스냐'라는 식상하고 해묵은 이야기이지만 굳이 지면의 귀퉁이를 썼다. 세미나에서 나왔던 말 중에 예전까지 이렇게 저렇게 헤매던 것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잡아둘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최대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고 선택은 실천이다. 지배계급의 사상은 어떤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라고 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전파하는 사상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우리의 것과 일치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가 당파적 과학으로 노동계급의 편에 선 것처럼 마르크스의 과학을 받아들여 현실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용산에서 죽은 철거민과 굴뚝으로 올라가고 거리로 나서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 우리의 증명이고 실천이다.



이후 구조주의와 알튀세르를 지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에 대한 인식과 그 전화에 대해 확인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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