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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1
    [2호 4면] 타락한 노동운동? - 자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운동
    꼬민/Comin

[2호 4면] 타락한 노동운동? - 자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운동

타락한 노동운동?

- 자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운동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2008년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정규·여성노동자의 투쟁이었다고 서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이 사회에서 그만큼 여성·비정규노동자의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네들이 사회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재현되는 공간에 서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사회를 바꿔야겠다면, 그네들의 싸움에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최근 노동운동 내부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그렇지 않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작년 코스콤 비정규노동자들이 싸움 끝에 복직을 얻어낼 수 있었을 때, 그것이 무산된 것이 정규직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요구를 합의문에 같이 실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을 때 억장이 무너졌다. 코스콤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에 한 차례도 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함께하지 못하겠다며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한국노총으로 자신의 상급단체를 변경했다. 코스콤의 사례는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서 일어난 일이라 치고 우선 넘어가자.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강남성모병원 비정규노동자들의 고용보장을 위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의 싸움에 많은 노동자·학생·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연대했는데, 정작 상급단체인 보건의료노동조합은 그 사람들 속에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오히려 보건의료노조가 비정규노동자들의 농성물품을 사무실에서 치워달라고 했다한다. 그간 연대에 소홀한 게 꼭 바빠서만은 아니었고,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을 부담스럽거나 마뜩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2008년 노동자들 싸움은 비정규-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싸움은 2009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현대미포조선, KTX, 강남성모병원, 코스콤, 기륭전자, 콜트기타 노동자들이다.

올 겨울, 항만의 높은 굴뚝 위에 여러 날 동안 목숨을 걸고 올라가 있던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복직을 요구하다 회사의 탄압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회사는 일방적으로 합의를 종용하고 복직요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었다. 정작 놀라운 것은 피해 당사자도 모르게 회사와 일방적인 합의를 한 곳이 바로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이에 다른 두 노동자가 한겨울에 먹을 것도 없이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한 것이고, 이들이 굴뚝에서 다시 내려오기 까지 수많은 노동자·사회단체들이 굴뚝아래에서 연대했다. 그래서 그 싸움에 연대했던 노동자들은 삼중으로 싸워야 했다. 회사와 경찰들과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노동조합과 싸워야 하는 사태가 온 것은 기가 막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온 일이기도 하다.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그 생산을 화폐형태로 전유하는 자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적대가 있는 것이 이 세상(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인데, 이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 모순 아래에서는 언제나 최소한의 삶마저 파괴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들로 인한 체제가 붕괴될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고 복지정책을 시행한다. 또한 이 모순을 그대로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 - 학교·언론·군대·경찰·감옥 등.
 
70년-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자생적인 노동조합들의 요구는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라는 것이었고, 이는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요구였기 때문에 개별사업장을 넘어서는 다양한 연대가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애초에 그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없는 이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개별기업에서의 '임금인상'을 위한 싸움이 될 때부터는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 모순은 개별사업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앞서 말한 여러 장치들을 통해 생산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장치들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 아니라, 기업 내에서의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투쟁을 하는 한 '노동조합'은 자본이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경제적 관계와 정치적 문제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경제적 문제를 별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때문에 경제투쟁으로 치우치게 된다. 정치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은, 그 정치적 장치들이 계속 작동하게 만드는 ' 능동적인' 행위이다.
예를 들어 국가-기업이 노동자들을 통제․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노동자 내부를 분할하여 일부는 선택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것이다. 이런 분할 속에서 자신이 배제당하는 쪽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은 노동자들의 내부적인 갈등을 조장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고등학교 입시경쟁에서부터 취업경쟁에 이르기까지 뼛속 깊숙이 각인된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분할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 차이에 기반한 여성노동자-남성노동자, 이주노동자-국내노동자, 장애인-비장애인으로의 분할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서 관리통치하는 자본의 전략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 안에서는 선택된 무리도 언제 배제될지 모른다는 위협 때문에 최저의 생계에 만족하도록 강요받을 뿐이다. 결국 누군가를 포섭․배제하는 정치적 장치는 노동자의 임금을 제한 나머지 이윤을 뺏아가기 용이한 경제적 관계를 재생산한다.

 

조직된 대공장 남성노동자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울산 현대중공업. - 남성노동자들은 물리적인 공권력의 탄압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정부-기업의 '가족임금'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관리전략에는 쉽게 포섭되었다. 노동운동 안에 가족(여성)에 대한 분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정규직 노동조합 및 대단위 노동조합이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단지 몇몇 노동조합의 활동가가 개량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노동자들을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식을 노동조합 스스로 재현하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경제관계를 재생산해내는 조건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인간학적 차이를 기반으로 노동자를 분할할 때, 노동운동이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변혁적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이것은 차이를 감추자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따른 상이한 요구들이 실현되는, 보편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관료화 되었다는 대부분의 비판에는 이런 내용이 충분히 담기지 못하고, 문제해결의 방안을 활동가들의 자세를 쇄신 하는 것으로 접근한다. 물론 노동조합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재현되는 것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한 자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개별사업장 안에서의 경제투쟁으로 집중될 때, 그 밖의 다른 실천들에 대해 시선을 돌리기 어렵게 된다는 점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형태에 따라 가능한 실천의 형태가 어느 정도 한계지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에서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싸움이 거세다 할지라도, 그 요구가 다른 사업장들의 요구를 포괄하기가 어렵다. 분할과 배제를 넘어서는 보편적 변혁성을 준비할 수 있는 조건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분출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 싸움이 '가족임금'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 되었을 때부터 노동운동은 언제나 '관료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런 흐름과 정확히 맞물린다. 경제관계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개입에 대한 분석이 부재한데 더해 더욱 적극적으로 자본의 이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기업의 이익을 노동자의 이익으로 단순 등치시키는 논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 자본이 노동자를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활용해온 것들을 재현해왔다는 의미이다.


 


노동자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남성만 있다는 비판이 10년 전부터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느 해인가는 민주노총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다음해 포스터 역시 여성은 없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이 하고, 장애인운동은 장애인이 한다는 생각 또한 운동의 영역을 나누고, 주체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을 분할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고, 노동운동에 여성운동이 없거나 여성운동에 노동운동이 없게 한다. 최근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은 이런 운동이 맞게 될 필연적인 결과였고,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결국 노동운동의 관료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는 의제의 선택과 운동의 형태가 필요하다. 보편적인 변혁적 요구와 이를 담보하기 위한 사회적인 연대 말이다. 사실 이런 비판이야 진작부터 있어왔고, 이를 위해 기업을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추진해왔지만 형식적인 형태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운동이 또 다른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배제하고 있지 않은지, 그 배제된 자들의 요구를 어떻게 자신의 요구에 담아낼 것인지, 그 보편적 요구가 실현되는 다른 세계의 이념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70-80년대 뜨거웠던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희미해진 이것을 우리는 사회운동적 전통이라고 일컫고, 그것을 복원시기키 위해 실천한다.

 


** 이 비판은 조선일보 같은 치들의 '귀족노조'라는 비꼼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이다.(이는 조선일보가 비정규노동자들의 싸움에 대한 기사는 얼마나 실었는가를 보면 명확해진다. 저들에게는 오로지 '귀족노조'만 있을 뿐이고, 비정규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저들은 '노동운동' 자체가 그런 것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은 '노동운동'의 전통을 복원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타락했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습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므로 자본주의의 모습이 지저분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자신들의 모습부터 반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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