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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1
    [2호 4면] 마르크스의 '실천'에 주목하며
    꼬민/Comin

[2호 4면] 마르크스의 '실천'에 주목하며

[꼬민세미나정리]

마르크스의 '실천'에 주목하며

룩 http://blog.jinbo.net/counterattack


시작하기에 앞서

처음 꼬민을 발간하고 철학 세미나 부분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참 많은 이야기가 듣게 되었다. 왜 이런 급박한 시기에 근대 철학을 보는 것이냐,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냐, 혹은 앞으로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조언과 충고들을 들었다. 꼬민의 어떤 부분보다도 더 많은 비판과 질책을 들었다. 어떤 활동가의 말대로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론적 잡식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상황에 최소한의 합의되는 내용과 방향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론을 위해 변혁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했다. 우리의 활동은 결코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근대 철학 넘어서기

철학의 주체 또는 출발점은 무엇인가에 근대철학은 이런 저런 견해를 내어 놓는다. 그라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출발점인 전제들로부터 완전히 떠나 현실 자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시작하는 자신의 작업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정의한다.
또한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어떤 것이다라는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도 끝없이 되풀이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마르크스는 본질이나 정의라는 문제설정 자체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단 번에 뛰어넘는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ensemble, 총체)이다.'로서 이전의 질문을 넘어선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만이 이전의 철학과 단절하려 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이전의 철학을 '진리에의 의지(지향)'라고 정리해버린다. 더욱이 진리를 원하는 것이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 안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라는 주체로 철학을 시작하던 데카르트의 명제를 무너뜨린다. 또한 세계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와 단절하려 하고, 세상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태도 또한 관념론의 판박이일 뿐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니체의 철학하기는 마르크스의 작업과 매우 유사하다. 피안(彼岸,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의 세계가 아닌 차안(此岸,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닌 '왜 진리를 찾으려 하는가'를 묻는 계보학적인 질문 등은 그 자체로 차안의 삶을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이런 태도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니체의 태도를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좌파에게서 볼 수 있다. 그것 또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삶의 양식일 수 있으나, 세상에 대항하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것의 간극은 매우 넓다.

 

마르크스의 실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처럼 세상을 해석만 하거나 인간본질을 탐구했던 이전의 철학을 넘어섰던 마르크스의 실천의 개념에서 우리가 나갈 방향이 있다고 본다.
이론의 진정한 힘 혹은 진리여부는 실천만이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 정도는 그렇다고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던 철학의 기준에서 볼 때 상대주의이겠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기준을 넘어서고자 했다. 애당초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은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현실을 변혁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 세계는 단지 해석하기 위한 관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분석한 것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지, 자본주의를 자세히 알기 위함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실천'에 얼마나 적합한지가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까지 이론학습은 마르크스가 이전과 단절한 것이 무엇인지, 세상을 변혁하는 과학으로서 정초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결국 마르크스냐'라는 식상하고 해묵은 이야기이지만 굳이 지면의 귀퉁이를 썼다. 세미나에서 나왔던 말 중에 예전까지 이렇게 저렇게 헤매던 것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잡아둘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최대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고 선택은 실천이다. 지배계급의 사상은 어떤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라고 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전파하는 사상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우리의 것과 일치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가 당파적 과학으로 노동계급의 편에 선 것처럼 마르크스의 과학을 받아들여 현실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용산에서 죽은 철거민과 굴뚝으로 올라가고 거리로 나서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 우리의 증명이고 실천이다.



이후 구조주의와 알튀세르를 지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에 대한 인식과 그 전화에 대해 확인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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