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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1
    [2호 3면] 이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3)
    꼬민/Comin
  2. 2009/04/11
    [2호 8면]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꼬민/Comin
  3. 2008/12/01
    [창간호6면] 2008 노동자대회 참가 후기
    꼬민/Comin

[2호 3면] 이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

이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
-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다.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용산철거민들의 저항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진압이 벌어졌고 이에 대해 '과잉'진압이라는 비판여론이 높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이명박 정권의 몰상식함 때문에 일어난 일로 치부하기보다, 왜 이명박 정권이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한 접근이다.
경찰특공대는 용산철거민 투쟁에만 투입되었던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작년 가을에 경찰특공대가 기륭전자 앞에서 임시구조물을 쌓고 고공농성을 하던 노동자를 강제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이 때 구조물 위의 노동자는 단지 맨몸으로 철난간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을 뿐인데도 특공대가 투입된 것이다. 이렇듯 특공대의 투입여부는 폭력의 유무로 결정되어온 것이 아니다. 용산철거민의 투쟁이 폭력적이이서 특공대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경찰의 변명은 궁색해졌다.

경찰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은 용산철거민과 비정규여성노동자는 테러리스트가 맞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명박정권은 경찰특공대가 대테러부대인 만큼, 굳이 거짓말과 변명할 필요 없이 특공대의 투입은 정당했다고 항변해도 된다. 화염병을 들었기 때문에, 높은 구조물 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테러리스트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기업의 돈벌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들의 행위로 용산의 재개발 공사가 반년 가까이 지연되어 삼성, 포스코 기업의 돈벌이 계획은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기륭전자는 회사 사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특공대의 투입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로 기업의 이익에 얼마나 큰 타격을 줬느냐에 있는 것이다.

같은 그림 찾기 - 2008년 10월 21일 기륭전자와 2009년 1월 20일 용산
표면상 국가와 기업은 별개로 활동하고, 때로는 서로 적대적인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법·제도와 공권력은 결국에는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되어 왔고, 기업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국가의 권한을 강화시키는데 협조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이전에 자본주의 국가이고, 기업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이다.(대한민국은 자본주의국가다.x2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기업으로부터 나온다.) 국가의 입장에서 기업의 이윤을 침해하는 행위는 자신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의 경찰들은 쉽사리 특공대 투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통념상 국가는 중립적이기 때문에 경찰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곤혹스러웠을 뿐. 그러니 경찰여러분들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기업의 용역으로서의 역할을.

 

 

- 이것을 단지 이명박 정권이 친기업정책을 펴기 때문으로, 이명박 정권의 관료들 중 강부자가 많아서 때문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업의 이윤생산을 위해 국가가 개입해왔던 것을 보여준다. 교과서적 통념대로 국가는 기업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의 다양한 장치들-군대, 경찰, 학교 등-을 통해 기업활동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금 시기의 자본주의 형태에서도 국가의 작용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국가의 간섭을 없애야한다는 소위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설은 기업의 규제에만 해당할 뿐, 기업의 활동에 장애가 될 것들을 억압ㆍ통제하는 국가적 장치는 더욱 강화된다.(현재 국회에서 계류중인 국가정보원법, 인터넷실명제법 등을 보라. 좀 더 민주적이었던 마냥 언급되는 노무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했다고? 천만에, 의지가 없었던 것일뿐. 최근 쟁점이 되는 집시법 개정은 노무현 정권에서 먼저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죽음도 이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철거민들에 대한 탄압,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발정책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만 그때는 이명박 정권과 같이 무식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덜 알려졌을 뿐이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되겠다.

이렇듯 기업의 이윤은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본래 역할이고, 저항하는 노동자․빈민은 국가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라고 인식해야만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자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와 경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본질을 짚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 이명박 정권은 본래 국가와 공권력의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철거민들의 죽음에 머리를 조아려야할 것은 김석기ㆍ이명박보다 삼성과 포스코의 총수들이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세상에서 못가진자들의 죽음은 반복된다. 그것이 이번과 같이 극단적인 살인으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해도, 그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 역시 지금의 경제질서이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삶이 붕괴될 가능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붕괴된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대로 사라지거나, 마지막 힘을 모아 소리 지르거나. 그러므로 이들의 외침이 '불법행위'라고 탓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불법'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질서를 먼저 탓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계를 요구하는 이들이 국가에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라면, 이 국가가 지탱하고 보호하는 질서자체가 애초 모든 이에게 인간으로서 삶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던져보자. 모두에게 생계를 보장하게 될 때 스스로 붕괴되는 질서라면, 그래서 그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이 질서를 붕괴시켜야 한다 - 삶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통해!!

따라서 철거민들의 죽음에 분노한다면, 비판을 하고 싶다면, 이러한 사회구조를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해야한다. 그것은 불안정노동 철폐를 외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투쟁,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투쟁, G20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의 투쟁, 이외에도 삶의 현장에서 싸우는 전 세계 곳곳 민중들의 투쟁과의 연대이다.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1. 철거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야만적인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1. 신자유주의의 대리인 이명박 정권은 퇴진하라.
1. 다주택보유자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집을 투기대상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라.
1. 재개발된 주택은 공공임대주택으로 하여 임대료를 정부가 보증하고 주택이 없는 서민들에게 우선 입주할 권리를 주라.
1. 재개발 이익을 환수하여 공공시설 확충에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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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8면]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내 삶을 되찾기 위한 연대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일제고사가 또 치러졌다.

작년 일제고사가 치러지고 나서 지역별로 학업성취도가 공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북 임실에서 성적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정치인과 언론들은 몇몇 사람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일제고사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이번 3월 31일 일제고사에서는 1~50등까지 상품을 주겠다거나, 일제고사 성적을 수행평가에 반영하겠다는 학교까지 나왔다. 31일 시험이 치러지고 나서는 일부 학교에서 미리 시험문제 및 듣기파일이 유출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진단하겠다는 일제고사가 학생들의 순위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변질된 것이 몇몇 학교장의 그릇된 생각 때문일까? 일제고사는 이미 대학생이 되고, 취업한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우리 사회에는 학벌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학벌이 형성되는 것은 교육이 단지 '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육 이외의 다른 떡밥들-취업, 돈, 출세 등- 때문이라는 것을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 했었다. 이런 사회에서 시험성적을 매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정도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 가운데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에 어떠한 떡밥도 없어야 하고, 교육 그 자체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하며, 시험은 점수를 공개해 순위를 매기지 않고, Pass/False 로만 성취도를 평가하는 도구여야 한다고도 제안했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교육에 뭔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서울대 입학생의 반절 이상이 서울 강남출신이다. 올해 초 고려대학교에서는 실질적인 고교등급제를 시행해 특목고 학생들이 쉽게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서 논란이 되었었다. 이미 지금도 해마다 입시가 마무리되면 각 고등학교에는 서울대 합격자가 몇 명인지 현수막을 걸어놓고, 그것이 학교의 서열을 매기는 암묵적인 기준이 된다. 여기에 일제고사가 더해져, 매우 '객관적인 점수'로 각 고등학교의 순위가 매겨진다면, 그 서열을 바탕으로 대학차원에서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는 시나리오는 이미 현실 같지 않은가? 자신의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더욱 우수한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고, 입시경쟁은 초등학교·중학교에서도 당연하게 될 것이다.(그런데... 이미 그런 것 같다. OTL)


일제고사는 이런 경쟁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고, 이런 제도 안에서 학생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들을 외우며 삶을 낭비해야 한다. 세상은 갈수록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삶의 시간들은 더 늘어간다. 인생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일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시간이 더 커지는 역설적인 세상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수행되는 평가는 대개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노동을 해야만 임금이 주어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는 일할 수 없음을, 그래서 먹고 살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회를 통찰했던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자유가 있다. 굶어죽을 자유가.' 자신이 배제되는 편에 속하지 않으려는 경쟁은 정글의 목숨을 건 경쟁, '생존경쟁'이다.  이미 우리는 언제 삶의 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에서는 취업을 위한 경쟁에 목매단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삶이 의미 없이 지불되는 것도 견뎌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험에서는 모두가 서로 더 높은 성적을 바라고, 이를 위해 많은 수단을 강구한다.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는데, 그 수단에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무리 그 경쟁이 싫다 해도, 나 '혼자서'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경쟁의 최하위에 위치하게 되어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사회가 이 경쟁을 주도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경쟁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중고등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제고사 시행은 필경 지금 대학생인 사람들, 이미 취직한 사람들, 혹은 취업대기자들 모두를 더욱더 각박하게 만든다.


이번 일제고사에는 5800여명이 '오답'선언을 했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한다면, 이 승자 없는 경쟁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학교는 사회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체념시킨다. 교육에 대한 아무리 훌륭한 대안을 제출하더라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교육이 이런 경쟁체제·착취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강요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경쟁·착취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키려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가 시험보기 싫어 시험 치르지 않고 결석하겠다는 데 그것을 회유하고 커다란 불이익을 있을 거라고 협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이 초중고 12년 동안 개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시험 치르지 않을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들을 파면·해임한 것은 또 어떤가. 정작 집단적으로 성적을 조작한 사람들은 경미한 징계를 받고 지금도 교육현장에 있다. 이번 3월 31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현장활동을 가자는 내용의 유인물에 대해 전라북도교육청은 '불온'유인물이라며 배포를 금지시켰다. 아니 이게 학교를 폭파시키자는 내용이라도 된단 말인가? 학교 앞 불법 사교육 전단지나 단속하시지.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치르게 하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을 체화시키는 교육이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이 경쟁에 편입하는 것 외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까? 아니다. 있다.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3월 31일,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험현장활동을 떠났고, 5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오답'을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작년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대신 체험현장활동을 다녀오게 한 교사들이 12명 해임 파면되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이번 일제고사에서는 145명의 교사들이 불복종 선언을 했다. 일제고사 반대운동이 고양되는 것은 일제고사가 학생들의 삶을 어떻게 옥죄게 될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옥죄어지는 삶 안에 우리의 삶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일제고사에 맞서는 사람들의 싸움에 동참하여 다 같이 경쟁을 거부하는 것, 그래서 이 사회를 바꾸어내는 것. 그것만이 진정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이다. 눈앞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짧은 순간의 만족감을 줄지 모르지만 그 경쟁에 편입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자신의 삶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곳에 쏟아부어야 할 뿐이다. 일제고사에 불복종한 교사들에게 지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저들에게 불이익이 생겼을 때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적극적으로 항의하자. 혼자 꿈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꿈꾸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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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6면] 2008 노동자대회 참가 후기

 

_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http://smallaction.tistory.com



노동자대회 전날, 전국의 투쟁사업장을 돌며 연대하고 있던 ‘노동해방선봉대’가 강남성모병원을 들러 집회를 한다는 공지를 듣고 그 시간에 맞춰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근 한달만에 연대를 위해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우리가 찾았던 10월 4일 이후에도 병원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로비농성장을 철거했었고, 병원장은 형식적인 대화조차 응하지 않고 있다. 누구를 탓해야할까? 어떻게 병원이 그러느냐, 가톨릭재단이 그러느냐는 비난은 오히려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병원을 택한 것이고, 가톨릭을 택한 것일 뿐이니까. 중요한 건 그들이 ‘병원’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아프면 선택의 여지없이 이용해야 하는 시설말이다.


병원 앞 집회를 마치고 노동해방선봉대는 다음 장소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 안에서 주위에서 다른 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번듯해져 있었는데, 그 건물에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병실이 하나도 없다 한다. 세상은 갈수록 살기 좋아진다는데, 어째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는 것일까. 다음에 도착한 곳은 콜텍-하이텍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는 곳이었다. 실제 송전탑 위 고공농성 현장은 ‘송전탑’이란 단어를 통해 얻는 느낌보다 훨씬 아찔했다. 저 높은 곳에, 저 좁은 곳에 사람이 올라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 그 위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한다. 벌써 15일이 넘었다는데, 덜컥 겁부터 났다.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저분들은 목숨을 걸고 올라가 있는데 밑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회사를 폐업하면서 까지 노동조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업주의 태도는 ‘나쁜 자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싸울 수 있는 기반이 주어지는 것 자체로 자신들이 노동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나쁜 자본가’에 대해 투쟁이 ‘인도적인 자본가’를 요구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섬세해야 한다.

집회를 마치고 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해, 전야제 장소 옆에서 열린 사회공공성 쟁취 촛불문화제에 함께했다. 도착이 조금 늦어 이미 문화제는 진행 중이었다. 2008년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었다. 이 땅에는 거의 매일같이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채 공중에 올라가 있다. 어째서 우리네 삶은 그렇게 처절해야 할까. 왜 이 절실함은 저 경찰차 벽을 넘어가지 못하는 걸까. 그 시간에도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사람들이 슬펐다. 이 세상은 다른 이의 싸움에 대한 무관심이 스스로의 삶을 옥죄게 되리라는 사실을 감추고 보이지 않게 만든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높은 빌딩들은 그대로 나를 땅 밑으로 짓누를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나 혼자서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의 발언도 있었다. 비정규직이 대세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대세가 아니라 없어져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투쟁하는 사업장들의 연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공공성 촛불문화제라고 해서, 현재 수돗물사유화 등의 쟁점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곳곳에서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반가웠다


사회공공성 촛불문화제가 끝난 후 전야제는 생략하고, 바로 강남성모병원의 농성장으로 이동해 함께 참석한 사람들과 노동자대회의 의미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동자대회가 처음 열린 88년을 떠올려본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그토록 많은 것에 감격, 자기만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위로감, 그곳에 있던 것은 현실의 모순에 저항해 싸우려는 힘과 그 힘을 모아 함께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지향이었다. 자기 삶의 조건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요구야 말로 노동자의 요구이고, 혁명적인 요구이다. 노동자의 요구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본질론적 접근에 매몰될 때, 현실의 투쟁에서 노동자정신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의 집행부가 내세워야 할 노동자대회의 기조가 ‘민생’이어야 하는지, 종부세 등 세제 개편에 대한 반대여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정신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2008년의 전태일열사정신이 무엇일지 고민할 때, 그것에는 이런 투쟁성과 연대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이 투쟁성과 연대성이 현재 강남성모병원, 기륭전자, 동희오토, 콜텍, 하이텍,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업장들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얘기를 나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씨가 전태일정신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 깊숙이 와 닿았다.


이후, 로비 침탈로 선전물을 다 뺏긴 농성장에서 피켓을 만들었다. 강남성모병원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유인물을 읽었는데, 강남성모병원에서 노동자들의 월급에는 부가가치세를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회계상으로 파견 노동자들은 아예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있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싶어 차라리 속 시원했다. 물건에게서 연금과 각종 세금을 뜯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이율배반인지. 비정규직법 개정으로 파견기간을 연장한다는 논의가 한창 진행된다고 한다. 유통기한 2년을 4년으로 늘린다고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은 확연하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이렇게 노동자를 팔고, 물을 팔고, 의료를 팔고, 교육을 판다. 사회공공성을 쟁취하는 투쟁에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것은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시도에 대한 저항인 것뿐만 아니라, 팔 수 없는 것들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싸움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노동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켜 노동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노동자대회 당일 아침, 일본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활동가들이 강남성모병원을 방문하여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우리도 그곳에 끼어 일본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이 이루어지는지, 무엇이 쟁점이 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의 병원들도 보통의 회사와 비슷하여 돈벌이를 위해 운영되고, 적자가 나면 휴업을 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여, 병원의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이 함께 싸운 사례도 있다고 한다. 병원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을 때, 그곳의 노동자들도 ‘병원’파업이라는 데 큰 부담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준비했는데 의외로 지지와 격려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다 한다. 그 노동자들이 싸우며 요구한 것은 정시에 출근하는 것, 점심시간 1시간을 확보하는 것 등 이랬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강남성모병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똑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주어진 일을 마치려면 9시가 출근시간 이어도 매일 7시에 출근해야 하고, 간호사들은 아예 점심시간이 없다. 간호보조 업무를 하는 자기들은 잠깐 짬을 내서 식사를 하지만 호출이 있으면 그대로 중단하고 일을 하러 가야 한단다. 싸움의 과정과 요구가 한국에서와 너무 비슷해 한마디 한마디 주고 받을 때마다 돌아가며 한숨을 쉬고, 무릎을 치며 자기 일처럼 공감했다.
이렇게 현실에 대한 저항이 한국과 일본에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의 삶에 대해 공감했다. 저 곳에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구나, 같은 꿈을 꾸는 우리는 같은 요구를 하고 있구나, 비슷하게 싸우고 있구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저들은 때때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런 것들이 말을 통하지 않고 서로 이해되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일본의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은 학교 내 유인물 선전이 금지되어 있어서 전학련 학생들은 유인물을 돌리는 투쟁을 격렬하게 진행 중인데, 이 투쟁을 하느라 2년 동안 88명이 연행되고, 4명이 퇴학당했단다. 한국의 대학에서도 머지않아 이런 싸움을 진행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뻑뻑했다. 일본의 공공재 사유화는 8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큰 노조인 JR총련이 고용승계를 대가로 철도 사유화에 합의해서, 배신자 노조로 불린단다. 해마다 노동절이나 노동자대회에는 JR총련의 노동자들이 참석하여 국제연대를 외쳤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이런 철도매각에 대항해 끝까지 싸운 노동자들도 있는데 1047명이 해고되어 22년이 지난 지금도 복직투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국보다 10년 쯤 빨라 보였는데, 일본에서는 90년대 중반 파견법이 통과되었고, 지금은 계약기간이 한 달 단위여서 한 달 일한 뒤 해고당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워낙 해고가 자유롭고, 임금이 적다 보니 이래 잘리나 저래 잘리나 똑같다는 생각에 1인 파업 형태로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나고 있단다. 일본 내 노동운동에서는 1047명의 해고자를 놓아두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편과, 1047명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편으로 입장이 갈려있는데, 전학련 활동가들은 ‘자신들은 당연히 후자’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 노동자정신을 계승하고, 또한 앞으로 어떠한 싸움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일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고민을 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노동자대회 장소로 이동했다. 여러 단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신문이나 유인물을 나눠줬고, 길 좌우에 다양한 주제로 가판이 있었다. 하지만 앞 무대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뒤까지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들은 신문과 유인물들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들렸다 하더라도 듣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대회는 아예 행진도 없었고, 명망가들의 발언과 공연으로 채워졌다. 이것을 듣고 보기 위해 이렇게 1년 중 하루 모이는 것이라면, 일회성 기념일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여러 가판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는데, 이런 생각에 서글퍼졌다.
하지만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하며 전국에 우리 같이 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고 느끼고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 난, 그곳에 모인 이들이 정말 싸우고 있는 사람들일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연대감을 얻지 못하고 시니컬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일게다. 하지만 이런 나의 재단과는 달리 싸우고 있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그 곳에 있었다. 노동자대회는 그렇게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드는 이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여야 한다. 첫 노동자대회가 열리던, 일본의 활동가들과 서로의 고민을 나누던, 전화하던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던, 바로 그 순간처럼.
그 만남이 노동자대회 전체를 메우는 것이 노동자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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