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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1
    [2호 8면]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꼬민/Comin
  2. 2008/12/02
    [창간호8면] 누구를 위한 교육, 무엇을 위한 시험?
    꼬민/Comin
  3. 2008/11/30
    [창간호5면] 등록금으로 땅 사지 마세요(1)
    꼬민/Comin

[2호 8면]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끝없는 경쟁의 고리를 끊자.
-내 삶을 되찾기 위한 연대


청 http://smallaction.tistory.com


일제고사가 또 치러졌다.

작년 일제고사가 치러지고 나서 지역별로 학업성취도가 공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북 임실에서 성적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정치인과 언론들은 몇몇 사람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일제고사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이번 3월 31일 일제고사에서는 1~50등까지 상품을 주겠다거나, 일제고사 성적을 수행평가에 반영하겠다는 학교까지 나왔다. 31일 시험이 치러지고 나서는 일부 학교에서 미리 시험문제 및 듣기파일이 유출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진단하겠다는 일제고사가 학생들의 순위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변질된 것이 몇몇 학교장의 그릇된 생각 때문일까? 일제고사는 이미 대학생이 되고, 취업한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우리 사회에는 학벌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학벌이 형성되는 것은 교육이 단지 '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육 이외의 다른 떡밥들-취업, 돈, 출세 등- 때문이라는 것을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 했었다. 이런 사회에서 시험성적을 매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정도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 가운데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에 어떠한 떡밥도 없어야 하고, 교육 그 자체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하며, 시험은 점수를 공개해 순위를 매기지 않고, Pass/False 로만 성취도를 평가하는 도구여야 한다고도 제안했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교육에 뭔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서울대 입학생의 반절 이상이 서울 강남출신이다. 올해 초 고려대학교에서는 실질적인 고교등급제를 시행해 특목고 학생들이 쉽게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서 논란이 되었었다. 이미 지금도 해마다 입시가 마무리되면 각 고등학교에는 서울대 합격자가 몇 명인지 현수막을 걸어놓고, 그것이 학교의 서열을 매기는 암묵적인 기준이 된다. 여기에 일제고사가 더해져, 매우 '객관적인 점수'로 각 고등학교의 순위가 매겨진다면, 그 서열을 바탕으로 대학차원에서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는 시나리오는 이미 현실 같지 않은가? 자신의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더욱 우수한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고, 입시경쟁은 초등학교·중학교에서도 당연하게 될 것이다.(그런데... 이미 그런 것 같다. OTL)


일제고사는 이런 경쟁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고, 이런 제도 안에서 학생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들을 외우며 삶을 낭비해야 한다. 세상은 갈수록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삶의 시간들은 더 늘어간다. 인생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일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시간이 더 커지는 역설적인 세상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수행되는 평가는 대개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노동을 해야만 임금이 주어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는 일할 수 없음을, 그래서 먹고 살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회를 통찰했던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자유가 있다. 굶어죽을 자유가.' 자신이 배제되는 편에 속하지 않으려는 경쟁은 정글의 목숨을 건 경쟁, '생존경쟁'이다.  이미 우리는 언제 삶의 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에서는 취업을 위한 경쟁에 목매단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삶이 의미 없이 지불되는 것도 견뎌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험에서는 모두가 서로 더 높은 성적을 바라고, 이를 위해 많은 수단을 강구한다.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는데, 그 수단에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무리 그 경쟁이 싫다 해도, 나 '혼자서'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경쟁의 최하위에 위치하게 되어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사회가 이 경쟁을 주도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경쟁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중고등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제고사 시행은 필경 지금 대학생인 사람들, 이미 취직한 사람들, 혹은 취업대기자들 모두를 더욱더 각박하게 만든다.


이번 일제고사에는 5800여명이 '오답'선언을 했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한다면, 이 승자 없는 경쟁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학교는 사회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체념시킨다. 교육에 대한 아무리 훌륭한 대안을 제출하더라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교육이 이런 경쟁체제·착취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강요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경쟁·착취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키려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가 시험보기 싫어 시험 치르지 않고 결석하겠다는 데 그것을 회유하고 커다란 불이익을 있을 거라고 협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이 초중고 12년 동안 개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시험 치르지 않을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들을 파면·해임한 것은 또 어떤가. 정작 집단적으로 성적을 조작한 사람들은 경미한 징계를 받고 지금도 교육현장에 있다. 이번 3월 31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현장활동을 가자는 내용의 유인물에 대해 전라북도교육청은 '불온'유인물이라며 배포를 금지시켰다. 아니 이게 학교를 폭파시키자는 내용이라도 된단 말인가? 학교 앞 불법 사교육 전단지나 단속하시지.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치르게 하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을 체화시키는 교육이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이 경쟁에 편입하는 것 외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까? 아니다. 있다.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3월 31일,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험현장활동을 떠났고, 5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오답'을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작년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대신 체험현장활동을 다녀오게 한 교사들이 12명 해임 파면되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이번 일제고사에서는 145명의 교사들이 불복종 선언을 했다. 일제고사 반대운동이 고양되는 것은 일제고사가 학생들의 삶을 어떻게 옥죄게 될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옥죄어지는 삶 안에 우리의 삶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일제고사에 맞서는 사람들의 싸움에 동참하여 다 같이 경쟁을 거부하는 것, 그래서 이 사회를 바꾸어내는 것. 그것만이 진정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이다. 눈앞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짧은 순간의 만족감을 줄지 모르지만 그 경쟁에 편입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자신의 삶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곳에 쏟아부어야 할 뿐이다. 일제고사에 불복종한 교사들에게 지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저들에게 불이익이 생겼을 때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적극적으로 항의하자. 혼자 꿈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꿈꾸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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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8면] 누구를 위한 교육, 무엇을 위한 시험?

http://smallaction.tistory.com

또 한 번의 수능시험이 지났다. 시험을 치르는 당사자들에게 수능은 괴로운 과정이지만, 정작 사회는 그들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수능을 통과의례쯤으로 이야기하며 그 선을 넘으면 축하해주자고 얘기한다. 그래서 수능시험은 수험생들에게 일종의 축제가 된다. 그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신문에는 스치듯 올해도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학생이 있다는 기사가 실릴 것이다. 수험생들은 누구를 위해 공부했고, 무엇을 달성했기에 격려와 위로를 받는 것일까. 수능 때문에 고통 받는 데에도, 수능을 마치고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데에도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합격선을 넘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봐도, 자신의 미래는 공부나 시험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명확하다.
따라서 수험생들의 공부는 그 가치가 그대로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다. 수능시험은 학생이 스스로 원서를 제출해야 하므로, 원하지 않는 학생은 얼마든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이 땅의 학생들에게는 학교․사회가 시키는 공부를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배제될 자유. 그 학생들에게 시험을 강제하고, 또 시험을 잘 마쳤다고 격려하는 것은 재주 부리면 살코기 한 점을 더 던져주는 조련사의 태도와 얼마나 다를까?


고등학교 시절, 패닉을 좋아했다. 답답한 현실을 공감하는 가사들이 참 좋았다. 그런데 해마다 이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수험생 응원글을 올린다. 그 글에 많이 실망해서, 요샌 이적의 노래를 듣지 않는다. ‘조금만 견디면 돼. 힘들겠지만 이건 원래 견뎌야 하는 거야.’ -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견뎌야 하는 것 자체에 어떠한 질문도 허락하지 않고, 무조건 그 아귀다툼에 학생을 몰아넣는 학교․선생들에 비해 이적의 메시지는 그 고통을 공감해주니 참 따뜻하다. 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다. 넌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교육에 대한 인도적인 접근은 이런 한계를 가진다. 비인간적인 학교나 교육환경 자체의 현상적인 조건들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 이상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사랑으로 감싸는 교육현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욱 열심히 수능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수능시험의 목표는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것이다. 수험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대학교 입학자격을 획득해야 하지만, 그 표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등급이 또박또박 나뉘어서. 내가 한 등수 올라가면 누군가는 한 등수 내려가야 한다. 내가 한 등급 높은 표를 얻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 표를 놓치게 된다. 이런 시험을 찬양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그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삶을 내놓은 이들을 직접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애초 자기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그 미래와는 동떨어진 것을 획득하도록 강요받아 따른 사람들이, 그 순간을 넘겼다고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지금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자기 삶을 메우려 하게 된다. 중고등학교의 교육과 수능시험은 현실에서 추구하고픈 가치를 미래로 유예하는 법(다른 말로 옮기자면, 현실에 체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배우는 것이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길 바란다. 사회적 소통과 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든, 자신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든, 배우는 것은 지금 당장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사회적 성원으로 참여하는 자격조건으로 작용하여 포함과 배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배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수능시험이 보여주듯, 그 배제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유예해야 하게 된다. 그 유예는 결국 그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길 바라는 이들에게 이득이 될 뿐이다.


교육이 그 자체로 자기실현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시험은 자신의 이해정도를 점검하고, 이해를 늘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 시험은 강제가 되지 않아야 하고, 그 시험의 결과는 서열화되어서는 안된다. 등수의 고저로 그 사람의 성취도가 평가될 수는 없다. 또한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등수가 필요하지 않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교육 외적인 잣대를 도입하여 배움을 그 잣대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은 배움 그 자체를 목적을 삼지 않고, 교육을 다른 떡밥(학벌? 성공? 돈? 기타 등등)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교육현실은 모든 게 전도되어 있다.
교육은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이어야 한다. 또한 그 교육과정 내적인 기준에 달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고, 따라서 시험은 성취도를 평가하되 P/F로만 매겨져야 한다. F는 결코 낙오가 아니라, P의 기준이 되는 점까지 자신의 학업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하나의 지침일 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생활하기 위해 교육을 시키는 거라면, 그 결과의 평등이 하향평준화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열외자도 없도록 해야 한다. 이 나라 모든 학생의 교육수준을 어떻게 획일화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면,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은 교육과정을 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한다는 현실부터 지적해야 한다. 고등학교․대학교가 다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발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육의 줄 세우기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모든 학교를 평준화시키고, 그 배움의 기회를 ‘평등’하게 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은 인정하지만 ‘결과의 평등’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는 언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시철폐, 대학평준화를 외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요구’한다. 알량한 인도주의는 집어치우라고. 수험생들을 진정으로 걱정하겠다면, 수능을 견디라고 주문할 게 아니라 이 땅의 교육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라고.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래 유서를 남긴 학생들을 죽인 공범이다.
1986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너무나 모순이다, 모순. 세상은 경쟁! 경쟁! 공부! 공부! 아니 대학! 대학! 순수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멋들어진 사각모를 위해, 잘나지도 않은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위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난 사람도 아닌가? 내 친구들은 뭐, 다 못난 거야? 그리고 왜 약한 사람을 괴롭혀? 돈! 돈! 그게 뭐야. 그게 뭔데 왜 그렇게 인간을 괴롭히는 거야.



1989년 자살한 고등학생의 유서
저는 지금 막 교실을 뛰쳐 나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부르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묵묵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1989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공부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2차 방정식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까?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젠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2007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인권선언, 미국의 독립선언, 또 뭐있더라. 천부인권설... 음. 더 기억이 안나네.. 내무식이 들어나나봐,ㅎㅎ 아무튼 저런 것을 보면서 난 생각했었어.,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구나.. 나도 자유로운 사람이되야지. 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현실은 너무달라. 상상 이상으로 너무달라.
공부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공부공부공부. 좁디좁은교실에 선풍기4대히터2대. 40명이 넘는 아이들.. 같은곳에서 각기 다른재능을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법”. 슬펐어.


2007년 자살한 고등학생의 일기
바보같은 나는 공부하는 목적이 오직 시험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닳은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진 공부한 것을 확인해보기 위한 수단으로 시험이란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것 같다. '공부를 위한 시험' 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를 우리가 하고 있잖아. 선생님들은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쳐주시고 시험에 나오지 않는 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교에선 시험을 빼면 아무런 의미 없는 교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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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5면] 등록금으로 땅 사지 마세요

해마다 등록금을 올리며 학교가 내세우는 논리는 간단하다. 물가가 인상되었고, 교육시설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와 등록금협상을 하는 총학생회 또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낸 등록금만큼 제대로 해택을 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얘기한다. 많은 등록금을 냈으니, 더 많은 혜택을 달라는 요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역으로 더 많은 혜택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내야한다는 것이고, 돈을 내지 않으면 교육받을 수 없다는 논리와 같다.


이 사회에서는 교육을 ‘이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게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우선 그 논리에 따라 얘기를 해보겠다.학교는 학생들을 위한다며 쉴새없이 새 건물을 짓고 학습기자재를 구입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한다. 원광대, 우석대, 전주대 등과 같은 사립대학의 경우 대학교 운영이 학생들의 등록금과 재단의 전입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학별로 정도의 차이가 잇지만, 많은 대학에서 전체 운영비용 중 70% 이상을 등록금으로 충당한다. 이에 비해 재단전입금이 한자리수를 넘는 대학은 거의 없다. 도내 대학 또한 마찬가지이다.(원광대의 경우 순전입재단금이 1%에도 못미친다.) 현행법 상 교육기관은 ‘비영리’법인이다. 영리법인과 달리 비영리 법인은 자신이 거둔 수익을 재단 외부로 현금화 시켜서 내보내서는 안되고, 모두 재단의 운영을 위해 쓰여야 한다. 다시 말해 학교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반드시 학생들의 교육에 모두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법률로 의료•교육과 같이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생활하기 위해 필수적인 분야(다른말로 공공성이 높은 분야)를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한다.


학교가 건물을 늘리고 기자재를 충당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니 법률상으로는 비영리법인의 규정에 맞게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건물•땅과 같은 부동산과 고가 기자재들은 사용함으로써 그 가치가 사라지는 소비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학교로 귀속되어 재단의 재산을 불려주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은 다른 종류의 동산과 비교할 때,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보통의 상품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저하되거나 소멸되는데 반해, 부동산은 소유하고만 있어도 그 자치가 경제규모에 발맞춰 계속 상승한다.

법의 목적상 교육기관을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한 것은 그곳에서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재산으로 귀속되는 물건을 구입하는 돈은 자신이 지불해야 한다. 쉽게 표현해보자면, 내 집을 사면서 친구에게 ‘널 재워 줄테니 네가 돈 다 내라’는 것과 같다. 혜택을 보는 사람이 비용을 지불한다는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른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지불해야 할 돈은 그 시설의 이용료이지, 시설의 구입비가 아니다. 법률상으로는 위법이 아닐지 모르지만, 학교의 땅•건물 불리기는 명백히 법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는 2008년에 로스쿨 건물을 지었다. 2009년에는 ‘학생을 위해’ 도서관을 신축한다. 물론 돈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는 있는가? 강의실의 기자재를 보호해야 한다며 수업시간 외에는 강의실을 잠궈놓고, 건물 출입시간마저 통제하는 게 많은 대학의 현실이다. 1주일에 1~2시간 수업만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잠겨있는 강의실이 태반이고, 1년 내내 아무도 들리지 않는 교수연구실이 명패만 달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준비했다는 시설물들을 정작 당사자들이 원할 때 이용하지 못하고 학교직원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해마다 건물은 늘어나지만 어째서 동아리 공간 및 학생자치 공간은 줄어가고, 세미나 할 공간하나 변변치 못해 대학로 카페로 나서야 하는 걸까?


이쯤되면, 1년 365일 공사 중인 학교를 보며 마냥 흐뭇해할 게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 학교의 시설이 늘어나도, 그것이 학생들의 ‘혜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학교의 재산만 불려주는 꼴이니 말이다.


학교가 이미 지었고, 구입한 건물•시설에 대해 이용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의 거의 모든 땅과 건물이 그동안 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늘어난 것인 이상, 그 건물을 학교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그 소유권을 바탕으로 또 다른 돈벌이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재단이 맨 처음에 지분으로 갖고 있던 부분 외의 것들은 졸업한 학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기부하여 공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등록금으로 불린 재산, 모두 뱉어라. 그렇지 않겠다면, ‘교육’ 운운하며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장사치임을 고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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