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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2면] 학자금 대출, 철거 그리고 빈곤

학자금 대출, 철거 그리고 빈곤
-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룩 http://blog.jinbo.net/counterattack


철거민과 우리

대학 등록금은 학생인 나에게 가장 큰 관심사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용산 철거민 참사의 불길을 보며 언뜻 등록금이 떠오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대학 등록금에 고생한 친구 J의 모습이다. J는 결코 낮지 않은 금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자는 '알바'로 갚고 있으나 졸업 후에 원금을 갚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정부가 일자리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청년인턴제'란 '정부 공인 알바'가 나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빡세게 공부해 정규직 노동자가 되겠다고 했다. 헌데 이번에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란 명목으로 대졸초임을 10∼30% 까지 삭감한다고 했다. J, 대출금 갚지 못해 신용등급 떨어지면 안 그래도 어려운 취직이 안드로메다로 갈까 걱정되어 졸업하고 단기직이라도 찾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 새내기 땐 고시원에 넌더리내던 J, 결국 아껴야 한다며 고시원 잔류를 결정했다. 바로 지금, 대학인의 전형적인 모습들 중에 하나다. 그런데 왜 용산 철거민 참사의 불길을 보며 J의 모습을 떠올렸을까.

 

1970년대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며 생겨난 달동네․쪽방촌은 1980년대 정부와 건설자본들의 재개발 아래 하나둘 철거된다. '상계동 올림픽'이란 영화엔 80년대 당시 철거민의 처절함과 잔혹한 개발주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2009년의 용산 철거민 항쟁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전보다 살만해졌네'라는 말을 비웃듯이.) 이렇게 재개발 정책이 서민 싹쓸이 식으로 진행되며 도심에서 가난한 이들이 몸 누일 공간이 사라져갔다. 내 친구처럼 당장 삶이 다급한 이들은 의식주라도 줄여야하는데 그 끝에 고시원을 선택하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고시원이 매년 약 500개 씩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의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3.6평의 방에 살며 학비를 벌고 생활비를 버는 사람들이 바로 고시원 거주자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의 열에 일곱은 월 평균 50만원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 50만원 중에 주거비용으로 지출할 돈은 몸 누일 공간만 구할 정도면 된다. 그리고 몸 만 누울 수 있는 저렴한 고시원일수록 화재 등의 안전문제에 노출된다. 고시원 화재로 죽어간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그 우울한 증거다. 개발은 한쪽에선 철거로 집과 목숨을 뺏고 또 다른 쪽에선 거주의 빈곤을 확대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라 한다.



한국 사회의 빈곤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에선 이러한 문제가 세련되게 은폐되면서 여전히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단 거주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빈곤이라는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2005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월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113만 6천원) 이하인 기초법 수급자(160만 명)와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인 차상위 계층, 소득이 없지만 재산기준이나 부양자 기준에 의해 기초법 수급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합친 빈곤인구는 약 5백만 명이 된다고 추산하고 있다.(말이 5백만이지 비정규직 등 일을 해도 빈곤한 노동빈곤층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많다.) 그런데 5백만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그만큼 빈곤문제가 잘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떻게가능한가? 통계청이 발표하는 빈곤율 자료의 근거가 되는 절대 빈곤율은 그 기준선을 최저생계비로 삼는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급여기준선이 되고 있는 최저생계비는 2007년 기준, 1인 가구 435,921원에 불과하며, 이는 전체 가구 평균소득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즉, 빈곤을 판가름하는 기준선 자체가 낮아지니, 빈곤은 은폐되고 수치상으로는 개선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절대 빈곤율이 낮아졌다는 것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줄었기 때문이 아니다.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경제적 빈곤 문제만이 빈곤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빈곤은 점점 사유화 되는 공공재(가스, 전기, 물 등)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또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필수품(핸드폰, 인터넷 등)으로부터도 멀어지며 따라서 사회적 관계와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비닐하우스촌과 고시원과 타워펠리스가 함께 있다. 어떤 이의 풍요를 위해 다른 누군가는 인간의 존엄마저 빼앗겨야 한다. 좌측이 우면동 비닐하우스촌, 우측이 논현동 고시원 화재사건 사진이다.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없는, 노동빈곤을 만들어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내놓고라도)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동을 팔아도 최저임금으로는 한 달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을 뿐이고, 매번 그 다음 달 생계를 위해 꼼짝없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기아와 같은 문제만이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만들 수 없는 것도 빈곤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실업과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이 확산되면서 일해도 빈곤한 노동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증가시키는 5백만이라는 빈곤인구의 숫자만큼 혹은 그보다 늘어나는 건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렇듯 언제 용역깡패와 경찰이 몰아낼지 모르는 철거민과 혹시라도 화재가 자신을 삼킬지 몰라 불안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 모두 빈곤문제의 위에 서있다. 이 시대의 당신과 나, 우리에게 빈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 목숨을 담보로 잡은 삼성, 포스코 등의 (건설)자본들은 개발 축제를 즐긴다. 이들이 마음 놓고 축제를 즐기도록 지원하는 자봉 역할은 자본의 서포터 정부가 맡는다.

빈곤은 사랑의 리퀘스트에만 나오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대학 등록금에 목이 뻐근해오는 J와 나 그리고 당신을 비롯한 우리가 빈곤한 사람들이다. 성공을 위한 상상력의 빈곤 같은 게 아니라 우린 진짜 '빈곤'하다. 빈곤의 문제는 개인의 게으름․무능력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며,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문제를 포함한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개발정책에 전면 반대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연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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