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자전위994호(2012년1월20일): 이집트 노동자와 농민정부를 위하여!

노동자 전위 994호

2012년 1월 20일

이집트: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들이 여성들, 콥트교도들, 노동자들을 표적으로 한다

노동자와 농민 정부를 위하여!

1월 14일 - 이집트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타도 거의 1년 후인 작년 11월에 있었던 의회 선거의 시작이 다가오면서, 군부지배 종식을 요구하는 대중항의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 도시 전역에서 터졌다. 경찰과 군대는 시위대를 채찍, 테이져, 진압봉 그리고 실탄으로 공격했고, 수십명을 죽였다. 추가적인 선거 일정들이 잡히면서, 집권중인 무장군대 최고위원회(SCAF)가 문민정부가 수립되도록 허용할 어떠한 의도라도 있는지 매우 불투명하다. 불길하게도, 반동 이슬람형제단과 심지어 이들보다 더 강경파인 살라피스트들이 투표의 70% 정도를 가져가면서, 조직화된 최대 야당인 이슬람주의자들이 투표를 휩쓸어 왔다.

지난 겨울의 봉기는 군부의 지원을 받던 증오의 대상이던 무바라크 정권을 축출했지만, 단지 무장군대들의 심지어 더욱 공공연한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시, 부르주아지 미디어와 좌익의 거의 전부가 국제적으로 이것을 이집트 “혁명”으로 환영했다. 권력을 장악한 이래, SCAF는 자본주의 국가의 경찰의 힘을 강화해왔으며, 사회적 불안정을 억눌러왔다. 이것은 정확하게 당시 우리가 “군대와 인민들은 하나다”라는 광범위하게 퍼진 환상들에 반대하여 경고했던 것이다.

군부의 억압적 방책들은 불만에 차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동계급을 중심적으로 표적으로 해왔다. 무바라크 축출 수개월이 되지 않아, 정권은 파업과 시위들을 금지했다. 9월에, SCAF는 시위들로 국가재산을 손상하고 작업을 방해하며 도로를 막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증오의 대상인 비상법을 확대했다. 2월에서 9월 사이에, 무바라크 30년 지배하에서 보다 많은, 적어도 12000명의 시민들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대중항의들의 발생 1주년이 다가오면서, 정권은 항의에 나선 사람들에 대한 무바라크의 살해명령에 대한 재판의 판결을 연기했다

신식민지 이집트에서의 억압적인 삶의 조건들이 인민들의 거대한 분노를 만들어내왔다. 40%의 인민들이 하루에 2달러 혹은 그보다 적은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서, 많은 가족들이 자신들의 수입의 절반보다 많은 돈을 식료품에 쓴다. 2008년, 기초 식료품들의 가격들이 2배로 뛰자, 폭동들이 나라 전역에서 발생했다. 오늘 군부정권은 빵 보조금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실업이 만연하여, 청년들의 4분의 1과 지방 인민들의 60%가 영향을 받는다. 이집트 인구의 30%가 넘는 농민들은 파라오 시대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조건들에서 노동한다. 영양실조와 빈혈이 만연하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1에이커(한국 벼농사 기준 약 6마지기로 80kg 쌀 21가마니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규모) 보다 작은 땅을 가진 소소유자들이거나 소작농들이거나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지방 노동자들이다. 잔인한 빈곤이 경찰국가적 억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있다. 한 파업노동자가 설명했듯이, 일자리가 없고, 돈도 없고, 음식도 없는데, 이것들에 관하여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투옥된다.

지난 봄 항의들의 지도부는 인민의 다수를 위한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선거 민주주의라는 문제에 종속시키고 모든 계급의 이집트인들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민족주의적 거짓말을 설교한다. 우리가 무바라크 축출 직전에 강조했듯이, “오늘날 이집트에서 긴급하게 제기되는 것은 잔혹하고 노쇠한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할 사회적 힘을 가진 유일한 계급인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피억압 대중들의 지도자로 나서는 것이다” (“이집트: 대중적 격변이 독재에 도전하다” 노동자 전위973호, 2011년 2월 4일).

산업 노동계급은 자신의 사회적 힘과 전투성을 특히 섬유산업에서 널리 증명해왔다. 파업물결들이 나라를 지속해서 휩쓴다. 버스 운전노동자들, 섬유 노동자들, 정부 피고용인들, 그리고 기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조합과 생계를 지키기 위하여 투쟁해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으로 권력을 위한 도전자로서 나서기 위해서는 정치적 의식성에서의 거대한 도약이 필요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주의적 환상들과 종교적 반동으로부터 분리해야만 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피억압 인민들에 대한 방어로 획득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군부와 자유주의 야당으로부터 반동적인 정치적 이슬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부르주아지 세력들에 반대하는 전위적 노동자정당의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들

인민 대중의 긴급한 필요들에 대응할 수 있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대안의 부재 속에서, 선거결과들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종교가 가지고 있는 피억압인민들에 대한 장악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의 반동적 목적은 “코란이 우리의 헌법이다”라는 슬로건에 표현되어 있다. 군부지배에 대한 시민적 대안으로서 스스로를 내세우면서, 오늘날 무슬림 형제단은 선출되는 어떤 정부에서라도 지배적인 세력이 될 것이다. 콥틱 기독교도인들에 대한 무슬림 형제단이 자칭 선포한 “관용”은 조직화된 테러라는 이들의 긴 역사에 의하여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슬람 국가 수립이라는 형제단의 역사적 목적은 종종 이집트 정부와의 폭력적 충돌을 빚어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정권들이 무수한 방법들로 이들 이슬림주의자들을 고무해왔으며 노동자들, 좌익들, 여성들, 그리고 소수민족들에 대한 공성망치로 이들을 활용해왔다.

군부, 경찰, 그리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여성들과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콥틱 기독교 소수민족에 대한 최근의 공격들에 모두 함께 했다. 10월 9엘에, 콥틱 교회 방화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카이로에 있는 마스페로 국영 텔레비젼 스튜디오 밖에서의 집회가 군복을 입은 군대와 이슬람 깡패들에 의하여 공격받았다. 군대와 폭동진압 경찰의 협조 속에서, 무장한 깡패들이 기독교인들을 찾아서 거리를 돌아다녔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20명이 넘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수백명을 중상을 입혔다.

군부의 권력인수 이후 곧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다. “사람들이 여성들은 물러날 것을 원한다” 그리고 “코란이 우리의 지배자이다”와 같은 구호들 주변으로 동원된 깡패들이 카이로에서 있었던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시위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계산된 모욕주기 속에서, 다음 날 시위에서 체포된 여성들은 강제로 “처녀성” 검사를 받도록 강요되었다. 이제, 12월 시위에서 군사 깡패들에 의하여 길을 관통하여 질질 끌려다니던 옷의 일부가 찢어진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비하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이 이 정권의 미국 후견인이 정권을 온순하게 비판하도록 만들었는데, 힐러리 클린턴은 그러한 행동은 “혁명을 불명예스럽게”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개량주의라는 막다른 골목

12월에, 이슬람주의자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RS)에 대한 사악한 공세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국가안보 세력들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대부분의 부르주아지 미디어들이 이것을 실어날랐다. 무슬림 형제단의 신문은 RS를 폭력적이라고 규탄하는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었던 한편, 살라피스트 알-노르 당은 이 조직을 “무정부상태를 조장한다”, 그리고 CIA의 자금지원을 받는다고 비난하면서 국가 탄압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RS를 방어하고 그러한 모략적 공격들을 패퇴시키는 것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이며, 이것은 모든 좌익들과 전체 노동자 운동에 메세지를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고 토리 클리프가 건설한 국제경향이라는 자신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자들과 더불어, RS는 공개방어 캠페인을 조직함으로써 공격에 대응했다. 동시에, 그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자신들에 대한 마녀사냥에 합류하자 깜짝 놀랐다. “RS가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무바라크의 공세가 절정에 있을 때 형제단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도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유력한 형제단 조직원들에 의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은 분노를 촉발했다” (socialistworker.co.uk, 12월 26일). 지난 해 대중 항의들에서, 심지어 형제단의 성명을 코란을 떠받치고 있는 서로 교차하는 칼이라는 형제단의 상징과 함께 자신의 웹사이트에 게재하면서까지 RS는 독재에 맞서는 투쟁에서 동맹들로서 형제단을 옹호했다. 심지어 RS 자신이 표적일 때에 조차, 이들 뿌리깊은 대중추수주의자들은 종교적 반동세력들과의 동맹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3월에는, 군사정부가 정당들의 형성을 규제하는 법을 발표했다. 이슬람주의자들에 맞서서 비종교주의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그 법은 노동계급 조직들뿐만 아니라 여성과 피억압 소수자들을 대변하고자 애쓰는 조직들을 표적으로 한다. 이 법은 "종교, 계급, 종파, 직업 혹은 지리"에 기초한 정당들 혹은 "성(性), 언어, 종교 혹은 교리에 기초하여” 설립된 정당들에 대한 1977년의 반동적 금지를 거듭 주장한다 ("2011년 정치정당들에 대한 수정법의 주요한 내용들", www.sis.gov.eg).

지난 해 RS와 RS의 국제적으로 생각을 같이 하는 자들에 대한 논박에서 우리가 썼듯이, 우리는 “파산한 개량주의적 틀을” 거부하는데 “이 개량주의적 틀은 이집트의 노동계급을 위한 오로지 두가지 ‘선택들’이 ‘비종교적인’, 군부의 지원을 받는 부르주아지-민족주의 정권이나 혹은 정치적 이슬람에 굴종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실제로, 이 두가지 선택들은 지배자들을 위한 광대한 부를 보장하고 도시와 지방 대중들에게는 비참한 가난을 보장하는 체제인 자본가계급 지배를 지탱하는 서로 다른 두가지 방식들이다” (“반동적 무슬림 형제단에 영합하기”, 노동자 전위974호, 2011년 2월 18일).

무슬림 형제단, 살라피스트들, 그리고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자들이라는 3개의 주요 선거연합들은 모두 파업들을 명시적으로 규탄하면서 자신들의 선거운동들에서 노동계급을 표적으로 해왔다. 지난 해의 광범위한 파업들과 항의들이 좌익 조직들에 보다 더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왔던 한편, 정세는 또한 노동계급, 가난한 농민들, 그리고 모든 피억압 인민들을 옹호하는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어떻게 개량주의 조직들이 장애물로서 행동하는지를 분명히 해왔다.

RS와 연계되어 있는 민주노동자당(DWP)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스스로를 내세운다. 다른 좌익 조직들과 페미니스트 작가 나왈 엘-사다위와 같은 저명인사들과 함께, DWP는 군부정권의 잔혹성에 대한 항의로 선거들에서의 보이코트를 요구해왔다. DWP의 강령은 사회주의라는 겉치레가 아니라 “의회 공화국의 수립” (국제사회주의, 2011년 6월 28일)에 대한 요구이다. 이것은 단순히 일종의 부르주아지 정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의회 공화국에 대한 요구를 추진하는 가운데, 개량주의자들은 그릇되게도 인민의 민주주의적 열망들을 이집트 부르주아지 계급의 계급지배에 결박한다. 연속된 의회들이 군부독재를 위한 무화과 잎사귀들을 제공해 온 이집트에서는, 출판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포함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정당한 열망들이 깊이 느껴진다. 하지만,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권리들로부터 여성해방과 도시와 지방의 절망적인 빈곤을 근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대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뿌리뽑는 것과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 이외로는 성취될 수 없다. 볼셰비키 지도자 V.I. 레닌이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이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인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거짓말들, 허위들, 그리고 위선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 다시말해, 지금은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 부르주아지- 공화국에서 조차도) 광대한 다수의 노동인민들에게는 민주주의라는 축복들이, 실제로, 가용하지 않음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이 민주주의라는 축복들이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진정으로 가용할 수 있도록 만들수 있다.

- V.I. 레닌, “‘민주주의’와 독재” (1918년 12월)

제국주의와 “인권”이라는 가면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수사로 자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약탈들을 덮어가리는데 있어서 명수들이다.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자들, 소위 “비정부 조직들”(NGOs) 그리고 개량주의 좌익은 이런 이미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자신들의 기여를 해왔다. 리비아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유엔의 권위를 빌어 “인도주의의” 기치 아래 대령 무아마르 카다피의 축출과 암살로 귀결되었던 폭격테러를 자행했다. 나토 공격을 위한 자발적인 공범들이었던 리비아 “반군들”을 환영하는 가운데, 독재에 대항하는 “아랍 혁명”을 응원하면서, 국제적으로 개량주의 좌익의 다수가 제국주의자들의 공세에 동조했다. RS는 “법원, 군대, 경찰, 그리고 감옥들을 포함하는 모든 기구들이 인민 민주주의적 통제하에 있는”, 반군이 통제하는“해방 리비아”에 열광했다 (사회주의 연구 센터, 2011년 3월 4일).

리비아 “반군들”은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탈주한 자들, 왕조주의자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과거 CIA 정보제공자들, 부족장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제국주의 폭격을 위한 빌미를 제공했고,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지상군들로서 활동했으며, 자신들이 장악한 영토들에 있는 아프리카 흑인 이주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제국주의의 폭격이 시작된 다음 날 성명에서,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카다피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반식민지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방어의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라는 전망을 제기했다. 우리는 “인도차이나와 한반도로부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이 주도한 점령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수백만의 피해자들이 흘린 피를 가로질러 걷는다” (“제국주의 공격에 맞서 리비아를 방어하라!” 노동자 전위977호 2011년 4월 1일)라고 추가했다.

이집트는 무려 일년에 13억달러로 미국 군사원조의 최대 수혜국의 하나였고 여전히 그렇다. 동시에, SCAF로부터의 신랄한 불평들을 불러일으키면서,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작전들에 인도주의적 위장막을 제공하고 항의 운동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적” 야당 그룹들 또한 키워왔다. 그리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 승리를 성취하고 있는 지금, 오바마 행정부는 더 가까운 유대들을 만들기 위한 시도속에서 무슬림 형제단과의 고위급 만남들을 해오고 있다.

무바라크 타도 이래, 미국은 4000만 달러보다 많은 돈을 이집트 “인권” 그룹들에게 제공해왔다. 12월에는, 영국이 근동에 있는 NGO들에게 자신이 제공하던 원조의 양을 두 배로 하는 계획들을 선언했다. 전세계 NGO들에 대한 주요한 한 후원자가 유엔인데, 유엔 그 자체가 제국주의, 특히 미국 제국주의의 약탈들에 인도주의적 겉치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제국주의자들이 허가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NGO들은 자신들의 부르주아지 후원자들로부터 거의 독립적이지 않다.

이집트의 군부정권은, 심지어 자신의 제국주의 보호자들이 지지할 때에 조차도 정치활동에 대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관용을 베풀지 않는지를 보여주면서, 12월 29일에 17개의 NGO들의 사무실들을 급습했다. 독일 수상 안젤라 메르켈의 기독민주당과 연결된 콘라드 아데노이에르 기금과 CIA와 연결된 악명높은 자유의 집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미국 국무성이 “심히 염려”된다고 선언하고 이집트에 대한 군사원조를 줄이겠다고 위협한 이후, 정권은 압수된 모든 물품들의 반환과 NGO들이 정상적인 활동들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뉴욕 타임즈2011년 4월 14일자 “아랍의 봄”에 대한 기사는 “운동들의 핵심 지도자들이 미국인들에 의하여 훈련받아 온 것을 비롯하여, 미국의 민주주의 건설 캠페인들이 항의들을 선동하는데 있어서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짐바브웨로부터 이란과 베네쥬엘라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자들의 표적에 들어 있는 정권들을 타도하는 것에 관하여 “친 민주주의” 활동가들에 조언을 해 온 “비폭력 행동과 전략 응용 센터(CANVAS)”가 이것을 위한 하나의 매개이다. 이집트에서는, CANVAS와 같은 조직들의 역할이 제국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대중 항의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CANVAS는 자신은 어떠한 정부로부터도 자금을 받지 않으며, “우리의 아젠다는 교육적이지 정치적이지는 않다”(www.canvasopedia.org)고 말하면서 가장 모호한 용어들로 스스로를 묘사한다. 그러나 CANVAS의 역사가 CANVAS의 목적을 충분히 보여준다. CANVAS는 세르비아의 최대 사적 인터넷 및 전화 회사의 수장인 슬로보단 드지노비치와 과거 의회의원인 스르좌 포포비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두 사람 모두는 세르비아 학생 반대운동 그룹인 오트포르의 지도자들이었는데, 이 조직은 CIA 의 위장단체인 전국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과 CIA에 정보를 제공하는 다른 하나의 CIA 정보제공기관인 미국국제개발처[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와 같은 제국주의 정보제공자들로부터 자금을 받았다. 오트포르는 2000년 가을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를 축출했던 시위들의 선봉에 섰다. 이들 시위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1999년 나토의 “인권” 을 내세운 폭격공세의 다른 수단들을 통한 실질적인 지속이었고, 코소보 알바니안들에 대한 방어라는 구실하에 실행되었다. 이집트 “혁명”에서의 역할 때문에 부르주아지 미디어에서 환영을 받았던 4월 6일 청년운동은 그들의 로고로 오트포르의 것을 모범으로 했고, 자신들의 조직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CANVAS의 자료들을 사용했다.

4월 6일은 지난 겨울에 블럭의 형식으로 형성되어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를 위하여 발언한다고 주장했던 혁명청년위원회(RYC)의 일부이다. RYC는 무슬림형제단의 대표들과 “민주주의적” 야당 정치인 모하메드 엘바다레의 지지자들 또한 포함한다. 과거 클리프 경향의 제휴 그룹이었던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은 그들을 “이집트의 청년 혁명가들”이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오늘 군부가 선출된 지배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통령 선거전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오늘 선언했던 엘바다레이가 이끄는 “민족구제 정부”에게 SCAF가 권력을 이양할 것을 4월 6일과 RYC는 모두가 요구해왔다. 엘바다레이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해왔다: 유엔의 핵 감시단체의 수장이었던 동안, 그는 2003년 미국의 침공 직전에 이라크의 소위 “대량파괴무기들”에 대한 조사를 이끌었다.

노동조합들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무바라크 축출에 이르기까지의 십년동안, 이집트 프롤레타리아트는 3000번이 넘는 파업들, 현장점거들, 그리고 기타 실천 등에 2백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던 것을 포함하여 파도와 같은 투쟁을 벌였다. 이 실천들은 합법적으로 승인된 유일한 노동조합 조직체인,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이집트 노동조합연맹(ETUF) - 그 전신이 대령 하말 아브델 나세르에 의하여 1957년에 설립되었다 - 의 부패한 지도부에 반(反)하여 수행되었다. 20십년이 넘는 동안, 연맹의 위원장이 노동부장관으로 복무하는 것이 관례였다. 노동운동 내의 이집트 독재의 부사관들로서 행동하면서, ETUF 지도부는 파업들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고, 노동자 투쟁들을 사보타지했으며, 투사들이 탄압에 직면하도록 투사들을 밀고했다.

무바라크의 몰락 이후, 몇 개의 새로운 노동조합들이 번성해왔다. 역사가 조엘 베이닌에 따르면, “버스 운전노동자들과 창고 노동자들의 카이로 합동운송청(Cario Joint Transport Authority) 노동조합과 RETA[부동산세(稅)청] 노동자 노동조합과 같은 일부 독립 노동조합들은 상당히 크고, 잠재적 협상단위 대다수의 충성심을 받고 있다. 다른 독립 노동조합들은 수백명 혹은 수천명을 고용하는 공장들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조합원만을 보유하고 있다” (“이집트 혁명으로부터 노동자들은 무엇을 성취해 왔는가?” 외교정책, 2011년 7월 20일). 작년 1월에 창립된 이집트 독립노동조합 연맹(EFITU)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지배계급들의 대리인들로서 행동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인 AFL-CIO와 영국 노동조합회의의 최고위층들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사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비록 EFITU가 이집트 국가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운영되지는 않지만, 이 조직은 자본가 지배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EFITU와 기타 조직들이 군부정권이 ETUF를 해산하고 그들의 자산을 압수하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베이닌은 만족스럽게 보고하는데, 군부는 이렇게 했다. 국가에 대한 노동운동의 결박들을 재차 강화하는데 복무하는 이 행위는 ETUF 노동조합들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하게 노동운동을 공격하도록 사장들의 국가에게 분명한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자본가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강력한 산업 노동조합들을 위하여 투쟁할, 노동조합들에서의 새로운 계급투쟁 지도부의 성장은 긴급하게 필요한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파산한 민족주의가 종교적 반동을 낳는다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의 역사에서 유래하는 이집트 민족주의는 최상위층에 있는 아주 작은 층의 추잡한 부자들과 잔혹하게 착취당하고 빈곤에 처한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분열을 흐림으로써 나라의 자본가 지배자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복무해왔다. 이러한 환상들로부터 노동계급을 분리하기 위하여 투쟁하기보다는, RS를 포함하는 좌익조직들은 이들 환상들을 강화해왔다. 좌익민족주의 독재자 나세르가 근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1950-60년대를 되돌아보면, RS는 “혁명은 이집트의 독립, 존엄, 그리고 지역에서의 지도력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노동자 전위974호 2011년 2월 18일자 “이집트: 군부가 자본가 지배의 버팀목들을 접수한다”를 보시오)

오늘날 이집트 좌익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이상화되고 있는 나세르의 부르주아지 정권은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대중 항의들과 파업들의 시대 와중에 군사 쿠데타로 권력에 올랐다. 대령 나세르가 이끌던 군부세력들이 1952년 파루크 왕조를 타도했고, 곧이어 영국 군대가 철수했다. 나세르가, 특별히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로, “반제국주의자”로서 널리 인정을 받았지만, 이집트는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에 예속된 빈곤화된 나라로 남아 있었다.

나세르는 부분적으로는 부분적 토지 재분배, 임금인상, 그리고 의료보장 및 교육 기회 확대와 같은 양보들을 통해서, 하지만 가장 특징적으로는 잔혹한 탄압을 통하여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나세르는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살해하면서 공산당원들을 진압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공산당원들을 잔혹하게 다룸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1965년 나세르의 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 속으로 청산하여 입당하면서 나세르에 대한 자신의 계급협조적 지지를 계속했다. 소련은 나세르 정권에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제공했고, 이것이 오늘날은 불가능했을 제국주의적 통제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나세르에게 허용했다.

이 지역의 빈민과 피억압 인민들 사이에서 한때 지배적이었던 세력들인 비종교적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의 파산이 정치적 이슬람의 극적인 성장을 자양분을 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기타 걸프지역 국가들에 의하여 아낌없는 후원을 받는 이슬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국가가 극도로 비참한 가난과 경찰탄압 말고는 어떠한 것도 제공해주지 않는 인민대중들에게 주로 구호(舊好) 및 사회적 서비스들을 제공함으로써, 심지어 명목상으로는 금지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기반을 건설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메리 앤 위버는 카이로의 임바바 빈민촌에서의 그녀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형제단이 이끌던 이슬람주의자들은 여기에 국가의 그것과 경쟁하는 그들 자신의 사회 및 복지 시스템을 건설했었다. [강경 이슬람주의자] 가마아가 통제하던 ‘인기있는’ 이슬람 사원들은 할인이 되는 의료 클리닉들과 학교들, 어린이 집들, 그리고 실업자들을 고용하기 위한 가구공장들을 세웠었고, 빈민들에게 도매가격들로 고기를 제공했다. 1994년 말 정부가 시작했던 공세적인 1000만달러의 사회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의 기구들은 부진한 정부 시설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우월한 상태로 있었다.”

이집트에 대한 초상화(1999)

오늘날 이슬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지지를 거의 확보하지 못해왔던 조직화된 노동계급 사이에서 기반을 만들려고 다시한번 애쓰고 있다. 산업노동자들의 한 계층 사이에서 반응을 확보했던 때인 1946년, 그들은 파업파괴의 역할을 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슈브라 알카야마의 섬유공장에서의 주요한 파업들에 반대했던 한편으로, 그들의 신문은 반공산주의와 반유대주의라는 독약을 퍼뜨렸다. 그해 1월 파업 중에 파업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을 때, 형제단은 그들이 “유대인들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포들의 조직원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규탄했다. 같은 공장에서의 6월 파업 중에, 형제단은 “파업위원회의 이름들과 주소들을 경찰에 밀고했다” (조엘 베이닌과 자카리 로크만, 나일의 노동자들 [1998]).

클리프 추종자들과 이슬람자신들을 공격하는 적에게 먹이 주기

RS와 RS와 생각을 같이하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무슬림 형제단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억압에 맞서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잠재적 동맹으로 추켜세우면서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환상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해왔다. “중동 리포트(2007년 봄)”에서 출판된 “동지들과 형제들”이라는 제목의 한 기사에서, RS 대변인 호삼 엘-함알아위는 자신의 조직이 형제단과의 “긴밀한 협조를 밀어부쳤다”고 자랑했고, 그것의 “형제적 정신”을 칭송했다. 반년 전에, “이슬람주의자들과 이집트 혁명”이라는 제목의 SWP의 사회주의 리뷰(2011년 6월)에 실린 한 기사에서, 클리프를 추종하는 이집트인 사메흐 나귀브는 기승을 부리던 이슬람주의 운동에 대한 좌익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의 “과잉흥분의 상태”에 관하여 불평했다. 나귀브는 “‘국교 ... 그리고 이슬람 법을 입법행위의 원칙적 근원으로’ 명문화하는 헌법 2조에 관한 논쟁들로 유인되었던” 자들을 규탄하는 것으로까지 가버렸다.

이보다 오래 전에, “선지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영향력있는 국제사회주의(1994년 가을) 기사에서, SWP 지도자 크리스 하만은 정치적 이슬람이 “옛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형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그들의 반제국주의 구호들과 몇몇 반제국주의 행동들이 민족자본과 국제자본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들을 당혹스럽게 해왔다는 이유로 정치적 이슬람을 우호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상당한 정도 나아갔다. 이것은 미국이 지원했던 피비린내 나는 샤에 맞섰던 1970년대 후반 이란에서의 대중적 고양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 세력들을 지지하는 것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대부분의 좌익들이 취했던 범죄적 노선이었다. 새로운 이슬람 정권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들과 기타 좌익들이 도륙 당했고, 여성들이 더욱 노예화되었으며, 소수민족과 기타 소수자들이 잔혹하게 탄압을 당하게 되면서, 그 범죄적 노선의 결과는 전투적 노동계급에 대한 참수였다.

SWP는 형제단의 “반제국주의적 행보”에 관한 넌센스로 무수한 종이들을 채울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형제단을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 현대화하는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비종교적 자유주의자들에 맞서는 제국주의의 자발적 도구였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미국 제국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신의 냉전 공세의 한 부분으로서 형제단을 추동했고 자금을 지원했다. 이것이 후일 아이젠하워의 국무장관으로 복무하게 될 존 포스터 덜라스가 1950년에 서술했던 정책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다: “동양의 종교들은 뿌리가 깊게 내렸고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정신적 믿음들은 공산주의적 무신론과 유물론과는 화해할 수가 없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공통의 끌어당기는 힘을 만들어 내며,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찾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반소비에트 “성전의 전사들”)을 응원했던 것을 포함하여, 클리프 경향은 이슬람 반동 세력들의 편에 섰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CIA 역사상 가장 대규모였던 작전에서 이들 이슬람주의 테러주의자들에게 광대한 양의 무기들과 자금을 보냈다. 무슬림 형제단은 무제헤딘의 대규모 전투부대를 제공했는데,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던 현대화하던 민족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이들의 성전은 정권이 결혼지참금을 인하하는 것과 같은 개혁들을 도입했을 때 촉발되었다. 여성들의 지위가 중심적 이슈였던 현대 역사상 처음의 전쟁에서, 소비에트 적군은 베일을 벗은 여성들의 얼굴에 산을 뿌리고 어린 소녀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교육했던 선생님들을 죽였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였다.

우리는 아프카니스탄의 적군을 환영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만연했던 중세적 상태들보다 수세기 진보했던 소련 속으로 포함되었던 중앙아시아 지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적군의 존재는 아프가니스탄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취들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1988-89년 소비에트 군대들의 철수는 모스크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배신이었고,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후진성과 동족간 유혈충돌이라는 늪에 버려두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비에트의 철수는 소련 자신의 붕괴의 전조였다.

비록 관료계층의 기생적 지배로 인하여 기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노동계급의 독재를 의미했다. 1991-92년 소련이 자본주의 반혁명을 통하여 파괴되었을 때, “공산주의는 붕괴했다”로 선포하면서,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회주의자가 크게 기뻐해야 할 사실이다”(사회주의 노동자[영국], 1991년 8월 31일)라고 추가하면서, SWP는 이것을 환영했다. 국제적으로 노동인민과 피억압인민들에게 중대한 패배였던 소련의 종말은 미국 제국주의가 멋대로 행동하고,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반동 세력들이 더욱 강력하게 성장해 온 더욱 위험한 세상을 의미했다.

영구혁명

볼셰비키 혁명은 20세기의 본질적 의미를 규정하는 사건이었다. 부르주아지 지배를 타도하고 짜르전제와 국가교회제를 아울러 일소하는데 있어서 농민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모든 피억압 인민들을 지도하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노동인민들을 해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했다. 혁명은 1904-06년 레온 트로츠키에 의하여 전개되었던 영구혁명의 이론을 확증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미 사회주의적 이행을 위하여 무르익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한 부분임을, 특별히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같은 후진적 국가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필요함을 트로츠키는 보여주었었다. 수적으로는 작았지만 대규모 산업에 전략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그 나라가 자본주의 발전의 긴 기간을 겪기 전에 권력에 오를 수 있었다. 게다가, 만약 러시아가 자신의 봉건적 과거라는 멍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면,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권력을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영구혁명에서 1929년에 썼듯이:

“뒤늦은 부르주아지적 발전을 가진 나라들, 특별히 식민지 그리고 반식민지 나라들, 에 관해서는, 영구혁명의 이론은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성취라는 그들의 임무들의 완전하고 진정한 해결이 오로지 예속된 민족, 무엇보다도 그 민족의 모든 농민 대중들의 지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오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불가피하게 그리고 매우 신속하게 그것의 수행이 부르주아지적 소유의 권리들에 대한 깊은 침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임무들에 직면한다.”

같은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적 영역에서 시작되어, 국제적 영역으로 전개되고, 세계적 영역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은 더욱 새롭고 더욱 폭넓은 단어의 의미에서 영구혁명이 된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은 우리 지구 전체에서 새로운 사회의 최종적인 승리에서만 오로지 완수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일년 전 튀니지아와 이집트에서의 봉기들에 관한 기사들에서, 노동계급이 공장위원회들과 기타 이중권력의 기관들을 수립하는 것의 필요성을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일련의 민주주의적 요구들과 함께 혁명적 헌법제정의회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뒤이은 토론의 결과, ICL은 부르주아지 국가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 될 수 있을뿐인 헌법제정의회에 관한 요구를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우리가 “튀니지아 선거들: 이슬람 반동분자들의 승리”(노동자 전위993호, 1월 6일)에서 썼듯이: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반식민지 나라들에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혁명적 부르주아지 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헌법제정의회에 대한 요구는 영구혁명에 반한다.”

영구혁명은 오늘날 이집트와 근동 전역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강령을 제공한다. 이 지역은 극도로 비참한 가난,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노예화,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몰아내기,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정권들에 의한 무수한 다른 소수민족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으로 특징지어진다. 사회적 후진성과 억압이라는 이러한 유산은 석유공급에 대한 통제를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강화된다. 가장 인구가 많은 아랍민족이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수에즈 운하가 위치해 있는 이집트는 미국 제국주의의 자발적인 장기판의 말이었고, 1979년 이래로 이스라엘의 견고한 동맹으로 있어 온 부패한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지배된다. 근래에, 이집트의 자본가 지배자들은 시나이에 있는 국경을 봉쇄하는 것을 포함하여,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아사(雅士)봉쇄에 도움을 주어왔다.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 군대들의 철수로부터 거의 60년 후인 오늘날, 이집트는 350억 달러 정도라는 외채의 늪에 빠져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집트의 부채부담은 15% 증가해온 반면, 채무상환 자금으로 240억 달러가 이집트로부터 지불되었다. 국제통화기금에 의하여 부과된 “구조조정 프로그램들” 하에서, 산업에 대한 나세르 시절의 국가통제가 계속해서 후퇴해왔고, 공장들은 무바라크의 친구들과 외국 투자자들에게 헐값으로 팔렸다. 동시에, 그 정도가 비밀로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대규모 재산들을 보유해왔다. 저널리스트 조슈아 해머는 이것들을 “의료장비로부터 노트북들, 텔레비젼들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제조하는 온갖 회사들뿐만 아니라 광대한 규모의 부동산까지 … 이집트 경제의 40%를 군부가 통제한다”(뉴욕서평, 2011년 8월 18일)고 서술했다.

세계은행으로 하여금 2001년에 이르러 이집트 농업이 “완전하게 사유화된 영역”이라고 선언하도록 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들”은 지방 인민들의 참상을 광대하게 증대시켜왔다. 90년대 중반 이래, 소작농들의 지대가 에이커에 4달러 정도로부터 60달러까지 치솟았는데, 이것은 3달 동안의 소득과 같은 양이다. 약 5백만명의 농민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이 지대를 지불할 수 없거나 국가의 승인을 받은 토지수탈들 때문에 쫓겨난 후 극히 빈곤한 상태로 내몰려 왔다. 무소유 농민들이 주요도시의 빈민촌들과 판자촌들로 내몰려, 그곳에서 이슬람 반동들을 위한 사람모집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이 해를 거듭하여 지속되어 왔다. 농민들이 시위에서 행진을 하고 주요 도로들을 봉쇄하고, 지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정부 사무소들을 공격했다. 정부는 경찰과 무장한 깡패집단들이 농민들을 공격하게 하고, 곡물을 몰수하고, 힘으로 경작지들을 점령하면서 막중한 탄압으로 대응해왔다.

토지 소유권에 대한 법적보호들의 종결이 외국 회사들로 하여금 거대한 양의 토지를 구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생산이 국내소비를 위한 기초산물들로부터 유럽에서의 판매를 위한 돈이 되는 상품들로 급속히 바뀌면서 농업제품 수출들이 10배 증가했다. 한때 자기 인구를 먹여살일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능력이 있던 이집트는 현재는 빈곤에 처한 인민들을 미국 농경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시장 상황에 완전하게 맡겨두는, 세계 최대의 밀 수입국이다.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서 90%의 여성들이 성기절단을 당하는 나라에서, 이슬람 법 하에 운영되는 법정들이 가족 분쟁들에 평결을 내리고, "명예 살인"이 횡행한다.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여성해방의 문제가 노동계급 전체를 해방하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집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이집트를 휩쓸어왔던 파업의 물결들에서, 특별히 섬유산업에서, 두드러졌다. 만약 혁명적 강령으로 획득이 된다면, 그들은 사회적 후진성과 종교적 반계몽주의라는 사슬들을 깨뜨리는 것에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트로츠키가 1924년의 연설 "동양에서의 전망들과 임무들"에서 강조 했듯이, "동양에서는, 자각한 여성노동자보다 더 훌륭한 공산주의자, 혁명의 사상들과 공산주의 사상들을 위한 더 훌륭한 투사는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위하여!

이집트 대중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단순히 군부타도뿐만 아니라 끝도없이 계속되는 인민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자본가들, 지주들, 이슬람 성직자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타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하기 위한 힘은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는데, 노동계급의 의식성이 자본주의라는 틀 내에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즉자적 계급의 그것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적 투쟁 속에서 모든 피억압 인민들을 지도하는 자신의 역사적 잠재력을 깨닫는 대자적 계급의 그것으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결정적으로, 이것은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을 타도하기 위한 제국주의 심장부들에서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의 조직화를 포함한다. 북아프리카와 근동으로부터 유럽, 북아메리카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노동인민들의 생명과 생계를 유린해온 자본주의 경제위기는 혁명적이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적인 전망을 위한 필요성을 단지 더욱 강조할 뿐이다.

이집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여성, 청년, 그리고 콥트 교도들뿐만 아니라 베두인족, 누비안족, 그리고 다른 소수그룹들까지도 포함하는 사회의 많은 피억압 계층들의 방어와 결합되어만 한다. 노동자 농민의 정부는 지주들을 포함하여 자본가계급을 몰수할 것이며, 계획화된 집산화된 경제를 수립할 것이다. 국제적 규모에서의 계획경제는, 빈곤에 처한 도시 대중들에게 일자리들 제공하고 가장 선진화된 기술을 농경에 적용하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산업을 발전시킬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이 지역 전반에 걸친, 제국주의 통제와 족장들, 왕들, 장교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 민족주의 지배자들, 시온주의 지배자들의 억압적 지배에 맞서는 투쟁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세계 프로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서 근동 사회주의 연맹의 수립을 향한 길을 여는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없이는 인종적 민족적 억압의 끝은 없을 것이며, 여성해방도 없을 것이고, 노동인민에 대한 착취의 끝도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에게 이러한 전망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을 제국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이슬람 반동세력들에게 종속시키려고 애쓰는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 등에 맞서는 전투 속에서 건설될 레닌주의 전위정당의 건설이 필요하다. 국제공산주의동맹은 그러한 정당들의 건설에 전념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