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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동자 전위 901-904호에 걸쳐 4회 연재된 글의 1부에 해당되는 부분을 옮긴 것이다.
노동자 전위 901호
2007년 10월 26일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이론의 발전과 확장
1부
이번 달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당이 지도했던 러시아 혁명 90년을 기념하는 달이다. 10월 혁명은 20세기를 규정하는 사건이었다. 1차 대전의 살육에 특히 자극을 받은 노동계급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하면서, 러시아의 다민족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봉건적 전제와 제국주의적 속박을 몰아내는데 있어서 농민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모든 피업악자들을 지도했다.
신생 노동자 국가는 토지혁명을 수행했으며, 인민을 가두던 짜르의 감옥이었던 모든 민족[국가-해석자 주]들의 자기 결정권을 승인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를 제국주의 세계대전으로부터 구했으며 다른 나라에 있는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의 예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도록 고무했다. 1919년 초대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국제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0월 혁명은 트로츠키에 의해 전개되었던 영구혁명의 이론과 전망에 대한 놀랄만한 확인이었다. 그의 1906년 저작 결과와 전망[Results and Prospects]에서,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경제적 낙후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이미 사회주의를 향해 무르익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일부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연장된 기간 없이 바로 권력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개진했다. 참으로, 만약 러시아가 봉건적 과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면 노동자들이 권력에 올라야만 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강령과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타협에 반대하는 강령적으로 단련되고 검증을 거친 전위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레닌의 불굴의 투쟁의 화해가 1917년 볼셰비키의 성공의 핵심이었다.
결과와 전망이 등장하기 직전, 1905년 혁명은 짜르 제국을 기초로까지 뒤흔들었었으며, 미래 혁명의 발전 경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전면에 부상시켰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나 또한 절대왕조와 외피를 두른 지주귀족들, 그리고 거대한 러시아 정교회에 짓눌려 있던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다.
17세기 영국와 18세기 프랑스의 젊고 역동적인 부르주아지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도상에 있던 봉건적 족쇄를 일소했으며,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발생시켰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도시와 지방 민중의 선두에 섰었다. 그러나 뒤늦게 등장한 외국 산업가들과 은행가들에 종속적이었고 귀족들과 수많은 연으로 연결되어 있던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약했고 비겁했으며, 노동자와 농민 대중이 짜르 전제에 맞서 일서서게 되는 경우 자기 자신 또한 일소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면서, 트로츠키는 그의 1939년 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세 가지 이해들"("세 가지 이해들"로서도 역시 알려진)에서 후에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농민에 스스로를 기초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형식 말고는 생각
조차 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을 일정에 올리게 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시에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강력한 충격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서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부르주아지의 복귀로부터 러시아를 막아줄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그것의 결론으로까지 가져갈 가능성을 러시아에게 보장해 줄 것이다."
볼셰비키들이 예측했듯이, 10월 혁명은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격변과 아시아와 기타 지역에서의 반 식민지 민족 해방 투쟁들을 고무했다. 그러나 혁명적 격정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어느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에 오르지 못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볼셰비키 권력 장악 후 몇 달만에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의해 기진맥진해진 러시아는 고립된 채 남아 있었다. 엄청난 물질적 빈궁이라는 조건들이 관료주의에 대한 강력한 객관적인 압력들을 만들어냈다. 1923년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예외적인 기회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안정화를 허용했고 소비에트 노동자들 사이에서 깊은
사기저하를 야기했다. 이것이 정치적 반혁명과 조세프 스탈린 주변의 특권화된 관료 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1924년 후반에, 스탈린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조를 공표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 물질적 풍요의 무계급사회 - 는 오직 최소한 몇 개의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필요로 하는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국제적인 노동의 분할의 기초에서만 오로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적 이해를 비웃었다. 스탈린과 그의 똘마니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억압했고, 세계 제국주의가 소련을 홀로 내버려두도록 납득시키겠다는 희망에서 혁명적 가능성들을 광범위하게 교살시키면서 수년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조직자로부터 그것의 정반대의 것으로 변형시켰다.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와 코민테른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퇴행이 반대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볼셰비키 기치를 치켜들면서,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교조에 맞서 투쟁했다.
수십 년의 스탈린주의의 반역, 거짓말 그리고 관료적 행정이 결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이것은 1991-92년에 소비에트의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반혁명적 전복에서 극에 달했다. 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노동자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위대한 성공과 제국주의의 가장 처참한 패배를 학습하는 것은 계급의식적 노동자들과 좌익 지식인들에 여전히 핵심적이다.
짜르 러시아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프리카까지
트로츠키는 자신의 이론을 짜르 러시아와 관련하여 정립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1917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을 위해 무르익도록 만들었던 조건들이 제국주의 자본주의가 자신의 촉수를 지구의 훨씬 더 구석진 지역들까지 확장하면서 훨씬 후진적인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폭넓게 되풀이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이것은 신생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했던 중국에서 결정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과는 달리, 1925-27년의 중국 혁명은 처절한 패배하게 패배했다. 우리가 이 글의 보다 뒷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처럼, 결정적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농민 대중을 지도하는 대신에 부르주아지에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레닌 이후 제3 인터내셔널(1928)과 영구 혁명(1929)에서 당시 패배의 교훈을 도출하면서,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뒤늦은 모든 국가들에게로 영구 혁명의 이론을 일반화시켰다.
이 혁명적 전망의 정당성이 이후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증명되었다. 수십 개의 구 식민지들이 영웅적이고 지난한 민족해방 투쟁들을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성취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맑스주의 유물론의 법칙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결여되어 있다면 제국주의 지배와 엄청난 빈곤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제국주의의 명령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한 혐오가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에서 멕시코의 로페즈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족주의 민중주의자들의 새로운 층에 대한 지지로 이끌려왔다. 그들의 "반-제국주의"와 심지어 "사회주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굴종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자본주의 질서의 방어를 위해 행동한다.
혹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를 보자.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착취의 옹호자들이 공식적으로 공산주의가 죽었다는 것을 공표했던 시기에, 남아프리카의 수만의 노동계급 투사들은 계속해서 10월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상징인 망치와 낫의 붉은색 깃발 주위에 집결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은 10월 혁명의 교훈들, 핵심적으로 모든 부르주아지 세력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국가 권력과 혁명적 국제주의를 위한 투쟁을 수행할 전위당의 필요성을 유린한다.
1994년에,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의해 지도되었던 정부의 선거는 수십년 동안의 백인 우월주의의 지배의 종식을 의미했다. Sharpeville와 Soweto라는 순교자들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투쟁에서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수천명의 이름으로 ANC는 흑인과 다른 비 백인 대중들이 더 이상 차별, 지위격하, 살인적인 억압, 그리고 무겁게 짓누르는 가난에 쳐해지지 않을 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공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구 정권과 똑 같은 사회적 기초에 기반하여 ANC가 지도하는 정부가 신-아파르트헤이트 자본주의를 관장하는 것이다: 극소수의 엄청나게 부유한 백인 자본가 착취자들(비록 지금은 몇 안되는 흑인 지배인을 포함하지만)에 의한 압도적 다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야수적인 착취.
오랫동안 ANC와 제휴했고 그것의 한 구성부분인 SACP는 사회주의로 성장하게 될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도래를 환영했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던 남아프리카 노동조합회의 - 흑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사회적 힘을 증명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지배의 조종을 알렸던 치열한 노동 투쟁들 속에서 건설된 - 의 지도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ANC와의 삼자 동맹에 있던 SACP에 합류했다. 흑인 아프리카 대중은 사회의 그리고 민족의 해방에 더욱 접근해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에는 더더욱 그렇지 않다.
1905년 혁명 전야의 러시아
(1908년에서 9년에 쓰여진) 그의 책 1905에서, 트로츠키는 20세기의 시작되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엄청난 모순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유럽에서 가장 집중화된 산업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농업에 기초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 기구가 근대 기술 진보의 모든 성과들을 자기 나라의 역사적 진보를 방해하기 위하여 활용하고 있다." 유럽(주로 프랑스)으로부터의 투자가 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우랄 지역 도시들에 거대한 규모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가장 앞선 산업적 집중을 창출했다. 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 인구의 10% 미만을 이루고 있었던 반면, 경제적으로 전략적인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에 고용된 러시아 노동자의 백분율은 영국, 독일 혹은 미국에서보다 높았다. 그러나 모든 유럽 열강들의 반혁명적 경관이었던 러시아의 전제는 과거의 시대에서 살고 있으며 숨쉬고 있던 지주계급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한 "불균등 결합 발전"의 조건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후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트를 유일하게 혁명적인 세력으로 만든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앞선 자본주의 경험을 단순하게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개념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러시아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후진성에 의해 특징 지어졌다. 그러나 역사적 후진성은 단지 한 세기 혹은 두 세기 뒤늦은
선진 국가들의 발전의 단순한 재생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최신의 자본주의적 기술의 성과들과 구조를 변형시키고 그것에 복종하면서, 그리고 계급들 간의 기괴한 상호관계를 창출하면서 봉건적이고 전(前)봉건적 야만주의의 관계들 속으로 스스로를 뿌리내리는 완전히 새로운 '결합된' 사회적 구조를 발생시킨다."
1905년 혁명의 즉각적인 전조는 1904년 후반 만주에 있는 아더 항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초기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패배였다. 이것이 보다 많은 시민적 자유를 소심하게 주장하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 더 큰 세력들이 꿈들거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오전에 터지게 되었다. 1월 3일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대단위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의 대량 해고에 대항한 파업이 확대되자 러시아 정교회의 급진적 성직자인 가퐁 신부가 지도하던 합법 노동 조직이 짜르에게 하루 8시간 노동,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그리고 제헌의회를 포함하는 개혁을 겸허하게 탄원하기 위한 행진을 조직함으로써 점증하던 계급 대결을 일
소하기 이해 시도했다.
일요일 정장을 입은 10만 이상의 노동자의 그들의 가족들이 군주가 있던 겨울 궁전을 향해 출발했다. 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된 날에 짜르는 군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1천명 이상이 죽었고 거의 4천 명이 부상당했다. 러시아가 폭발했다. 1905년 10월까지, 엄청난 일련의 파업들이 철도 총파업과 11월 트로츠키를 의장으로 선출했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 위원회(소비에트)의 형성에서 절정에 달했다.
격변을 진정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짜르는 헌법과 제한적인 입법부를 허용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힘에 겁에 질린 부르주아지는 열정적으로 선언을 환영했고 공개적인 반혁명 캠프에 합류했다. 동시에 짜르는 검은 백인조의 반동들을 풀어서 전국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약 4천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1만 명 정도가 불구가 되었다. 무장 방어대를 조직했던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혁명을 일탈시키기 위한 이 시도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했다. 산업 노동자들, 특히 러시아 철도 노동자들이 유대인들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미심장하게 성 페테레스부르크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없었는데, 이것은 노동 계급이 유대인
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단호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총파업이 도시 전역에서 바리케이트에서의 격전을 동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봉기로 성장했다. 레닌은 12월 7일에서 19일까지의 모스크바 봉기를 혁명의 절정으로 생각했다. 봉기의 단호함이 짜르 군대의 충성심을 침식했다. 봉기를 진압하고 노동자들의 투쟁 단위들을 분쇄하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1천명 이상이 죽었고 체포와 처형의 광풍이 뒤따랐다.
성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의 경험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공장으로부터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 파업 위원회로부터 시작된 소비에트는 곧 대안적인 권력의 구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가 분쇄된 후, 트로츠키와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판을 혁명적 사상을 선전하는 연단으로 활용했다.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는 50일 동안 존재했고, 모스크바의 바리케이트는 훨씬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의 충격은 세계 역사상 대단한 것이었다. (2006년 6월 노동자 전위 872호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을 보시오.) 혁명은 유럽 지배계급들의 심장부에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국제 사회민주주의(당시 맑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의 혁명적 세력들에게 활기를 주었다. 혁명은 아시아 전역에서 반식민지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같은해에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세계 산업 노동자(IWW)가 창설된 미국을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노동자 운동을 고무했다. 결정적으로 혁명은 1917년에 바리케이트의 반대편에 서는 것으로 끝나게 될 러시아 사
회민주당(RSDLP)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들 사이의 강령적 차이들을 드러내주었다.
플레하노프와 러시아 맑시즘의 기원들
조직화된 러시아 맑시즘은 플레하노프가 망명중에 지배적이었던 민중주의 경향으로부터 분리하여 소규모 노동해방 그룹을 조직하였던 1883년에 시작되었다. 나로드니키들(민중주의자들)은 때때로 짜르주의 전제에 대항하는 혁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영웅적이었다. 용감하기는 했지만 쓸모없었던 짜르 관리들에 대한 테러 활동들이 "인민에게로 가"기 위한 그리고 무지몽매한 농민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영웅적이지만 쓸모없는 노력들의 뒤를 이었다.
나로드니크들은 근대화된 부르주아 유럽을 흉내내려고 했던 군 장교들에 의해 추동되었던 1825년 데카브리스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민중주의자들은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을 뒤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전통 자치체의 농민 토지인 미르에 기초한 러시아 고유의 사회주의를 계획했다. 그러나 농민은 집단적 분노의 자생적이고 휘발성의 폭발들에 관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농민의 전망과 염원들은 소 소유자의 그것이었지 일관되고 집합적인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플레하노프가 민중주의에 대항한 그의 독창적인 맑스주의자의 논박이었던 우리의 차이(1884
년)에서 증명하였듯이, 농민의 미르는 이미 자본주의 시장 관게들의 충격하에 붕괴되기 시작했었다.
자기 시대의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맑스주의를 인기 있기 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플레하노프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개관하였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선언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포했다. 계급들은 생산 수단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으로 확장하며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생산수단과 상행위를 창출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부르주아 민족 국가에 의해 부과된 장벽들이 이번에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장애가 되었다.
생산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위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집산화된 경제에 기초한 사회화된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확장하는데 있어서 물질적 이해와 이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사회적 힘 모두를 가지는 유일한 계급으로 만든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 발전이 곧 중대한 산업 노동계급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농민과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인민'과 인구의 '교육받은' 부위 사이의 역사적 심연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선전이 결국 러시아 시골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침투할 것이다. 게다가 만약 그들이 단결하고 단일한 노동자 정당으로 제 때에 조직화된다면, 그들은 총체적인 붕괴에 반대하여 지방의 공동체들을 보호할 경제적 개혁들을 위한 사회주의적 선동의 주요한 보루가 될 수 있다..... 노동자 정당의 가능한 한 빠른 조직화가 오늘날 러시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모순들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이다. 그 길 귀에 모든 성공과 승리가 놓여있다; 모든 다른 길들은 단지 패배와 무기력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우리의 차이(1884년), 철학 저작 선집 1권에서 재출판
플레하노프는 민중주의자들의 최고분자들 중 일부를 맑스주의로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878년 성 페테르스부르크 경찰 국장을 사살하려고 했던 시도로 유럽 전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과거 나로드니크 베라 자술리치가 노동해방 그룹의 최초의 성원들 중에 하나였다. 다른 나로드니크들은 결국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주요 정당인 입헌민주당(카데트)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혁명가들[Socialist Revolutionaries, 사회혁명당-해석자 주](SRs)으로 결합하였다.
플레하노프와 연결되어있던 러시아의 맑스주의 선전 써클들이 1890년대 중반에 대중 선동으로 전환했고, 청년 레닌과 율리우스 마르토프가 지도적 위치에 섰다. 동시에 개량주의 세력들이 성장했다. 플레하노프에 의해 경제주의로 지칭되었던 이 경향은 짜르의 절대주의를 개혁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적 노력들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자신의 선동을 기초적인 노동조합적 요구들에 한정했다. 1897-98년 즈음 시작하여 경제주의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정통 맑시즘을 적대시하면서, 경제주의자들은 독일의 베른슈타인 주변에 있는 개량주의 경향들과 느슨하게 연대하고 있었다.
1903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1990년에 (레닌과 마르토프에 의해 대표되던)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의 2세대가 최초의 노동해방강령에 구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혁명적 전통으로 러시이 사회민주주의를 되돌리기 위하여 창립자들(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와 합쳤다.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은 신문 이스크라(불꽃) 주위로 조직되었고, 레닌이 그것의 조직자가 되었다. 이스크라는 최초로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위한 중앙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레닌은 그것으로부터 경제주의로부터 지방 사회민주주의 위원회들을 획득하거나 필요하다면 그들과 분리하기 위한 러시아에서의 작업을 지도했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1902년)는 "사회민주주의 정치들을 노동조합 정치들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경제주의자들의 시도에 맞서는 가차없는 논박이었다! 이것[경제주의자들의 시도들-역자주]에 맞서서, 레닌은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노동 지원단체가 아니라 "인민의 지도자"로서 활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당은 인민의 모든 층들 사이에서 부정에 맞서 선동해야만 하며 지배계급이 되고 사회주의적 기초에서 사회를 재건설 할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7-8월 RSDLP 2차 대회 즈음에 경제주의 경향은 작은 소수였다.
비록 이스크라주의자들이 굳건한 다수로 대회에 진입했지만, 외관상의 통일의 저변에는 단일한 당 내부의 비이스크라주의자들의 더 많은 역할에 호의적이었던 "유연한" 마르토프와 "엄격한" 레닌 사이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차이들은 누가 당원인가를 정의하는 RSDLP의 규약들의 첫번째 문단을 두고 폭발했다. 마르토프의 초안은 당원을 "당의 조직들 가운데 하나의 지도하에서 규칙적인 개인적 조력을 제공하고 있는" 자로서 정의했다. 레닌에 따르면, 당원은 "당 조직들 중 하나에 개인적인 참여"에 의해 정의되
었다. 이 보다 협소한 정의는 기회주의자들을 쫓아내고 당의 느슨한 써클적 성격 때문에 RSDLP에 이전에 인입되었던 어설픈 아마츄어들을 제거하기 위한 열망에 의해 동기되었다. 경제주의자들과 유대 분트의 지원을 받은 마르토프의 공식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경제주의자들과 분트가 대회에서 퇴장하게 도었을 때, 레닌의 "엄격함"이 근소하게 다수를 차지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어 "다수"에서 유래한 반면, 멘셰비키는 "소수"에서 유래한다.)
결정적인 분열이 새로운 이스크라 편집국 선거에서 발생했다. 레닌의 제인이 통과되자, 마르토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편집국이나 중앙위원회에서 복무하는 것을 거부했다. 플레하노프는 볼셰비키 분파를 지지했으나 곧 레닌과 결별하고 멘셰비키들과 운명을 같이했고, 그래서 멘셰비키들은 이스크라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장악했다.
레닌은 1903년 분리와 1905년 혁명 사이의 기간을 분리에 대하여 레닌에 반대하여 두 분파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던 볼셰비키 분파 내부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와 같은 외부에 있는 자들에 대항한 치열한 투쟁을 수행하면서 보내게 된다. 1903년에는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의 정치적 차이들이 대체적으로 분명하지 않았으나, 곧 그것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분파 투쟁의 논리가 패배했던 경제주의자들과의 화해로 이끌면서 멘셰비키들을 더욱 우익 쪽으로 몰아갔다. 과거 경제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알렉산더 마르티노프가 멘셰비키의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
우리가 1978년 스파르타시스트 팜를렛 레닌과 전위당에서 밝혔듯이, 1903년의 분리는 공공연한 개량주의에서 혁명자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의 기치를 주창하는 모든 정치적 경향들이 공존하는 "계급 전체의 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으로부터 레닌의 최종적인 결별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은 그러한 분리의 시작, 전문적인 혁명가들의 중핵에 의해 지도되는 전위정당 건설의 첫 번째 발걸음을 의미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1905년 혁명은 트로츠키가 그의 저작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개념들"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러시아의 정치적 삶의 근본적인 배치들이 이루어졌으며 러시아 맑스주의 내의 모든 경향들과 명암들이 투영되었던" 실험실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확하게 러시아의 역사적 더딤 때문에 러시아는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와 당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혁명 이
전에조차 강력한 발전을 획득했던 유럽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상호 관계의 문제가 정확하게 러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이론적 분석에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세 가지 개념들
멘셰비키들, 볼셰비키들, 그리고 레온 트로츠키는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에 관하여 세 가지 다른 개념들을 제출했다. 러시아의 후진성을 지적하면서 멘셰비키들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을 것으로 되어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보조자아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05년 초에 마르티노프는 그의 팜플렛 두 가지 독재들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이런 방침을 성문화했다. 멘셰비키의 주요 전술가인 악셀로드는 1906년 RSDLP "통합 대회"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은 오로지 부르주아 혁명을 위해서만 성숙해왔다.... 우리 나라의 정치적 권리의 일반적인 박탈 앞에서, 정치 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계급들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에 관하여는 이야기 될 수조차 없다. ....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발전의 조건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들이 공동의 적에 맞선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와 불가피하게 협력하는 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으로 만들었다."
플레하노프를 포함하여 모든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이 기본노선을 지지했다. "그들은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레닌의 1906년 8월 29일자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들"에서 인용됨)는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우리는 비프롤레타리아트 당들의 지지를 소중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분별없는 행동들로 그들을 우리로부터 내쫓지 말아야만 한다"고 플레하노프는 말했고, 레닌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은 수백만 번의 '분별없는' 행동들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할 것이지만 토지를 몰수하기 위한 소환장에 대해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응답했다. 트로츠키는 위의 논전을 인용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관
한 세 가지 개념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플레하노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전면에 나설 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반혁명 캠프 쪽으로 이동한다는 19세기 정치의 역사에 관한 근본적인 결론에 관하여 그의 눈을 명백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닫았다. 대중투쟁이 대담할 수록 자유주의의 반동적 퇴행도 빨라진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계급투쟁 법칙의 결과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들을 방명하지 못했다."
레닌은 자신의 입장에서 러시아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 공화국을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지의 지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필요한 단계라는 것을 수용했다.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들, 1905) 그러나 결정적으로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의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시키면서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일부 "진보적인" 성격에 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짜리즘에 맞선 결정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은 결정적인 투쟁으로 들어가기에는 사적 소유, 자본 그리고 토지에 너무나도 많이 속박되어 있다. 그들은 짜리즘이 파괴되기를 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료, 경찰, 군대를 가진 짜리즘을 너무나도 필요로 한다.... '짜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인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의미한다.
레닌은 독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좋게는, 그것은 농민을 위한 부동산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가져올 것이며, 공화국의 수립을 포함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립할 것이며, 지방에서뿐만 아니라 공장 생활에서도 아시아적 속박의 모든 억압적 요소들을 근절할 것이고, 노동자들의 상황에서의 철저한 개선과 그들의 삶의 표준 향상을 위한 기초를 놓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혁명적 격변을 유럽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의 1906년 저작 "러시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트로츠키가 "세 가지 개념들"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그는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백만의 피업압 인민들을 영웅적이고 자기 희생적이며 속박되지 않은 어떤 것도 멈추게 하지 못하는 혁명적 공격으로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중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들의 기치 하에서만 따라서 지주들에서 시작하는 착취계급들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적대감 속에서만 오직 봉기로 일어설 수 있다."
레닌에게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공식은 미지수로 남아 있었다. 공동의 혁명적 독재를 위한 그의 개관들은 계급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 국제적인 무대로 확장되는 계급전쟁의 하나의 삽화적 사건을 위한 전투계획들을 위한 용어들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파괴는 유럽 노동자들을 국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북돋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같은 일을 하도록 지원할 것이다.
레닌의 공식은 멘셰비키의 부르주아 꽁무니 쫓기와는 화해 불가능하게 반대였다. 그러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지는 두 계급의 독재를 추진하는 것은 애초부터 모순이었다. 역사가 민주주의 독재를 위해 레닌이 계획했던 임무들은 오로지 농민에 기반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며, 한편으로 민주주의 독재의 공식은 1917년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다.
1905년 혁명 직전에 사회민주당 알렉산더 파르부스와의 협력에서 최초로 공식화되었던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의 이론은 멘셰비키들과 레닌 양쪽의 것들과 구별되기는 하였으나 레닌의 것에 더욱 가까왔다. 레닌 처럼,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어떠한 혁명적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결과와 전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진정한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국가적인 부르주아 혁명은 불가능하다. 국가적인 부르주아 혁
명의 시기는 지났다 - 적어도 유럽에서는.... 우리는 단지 식민지 정복의 체제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명백한 통치체제인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구 통치체제의 반대에 부르주아 국가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반대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배치한다."
레닌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농민은 혁명에서 지도자는 고사하고 독립적인 파트너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유럽에서의 농민 봉기들은 통치체제를 타도했지만 이것이 농민 정당들의 정부로 결코 귀결되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결과와 전망에서, 그는 후에 봉건주의를 타도했던 것은 언제나 첫 번째 혁명적 계급들이 성장했던 도시에서였다고 썼다."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왕조의 손아귀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을 해방시킨 계급으로서 농민들 앞에 설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후에, 트로츠키는 "세 가지 개념들"에서 그의 논점을 확
장시켰다:
"결국, 농민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들에서도 역시 이질적이다: 쿨락 계층[부유한 농민]은 자연스럽게 도시 부르주아지와의 연맹 쪽으로 흔들리는 경향이 있는 반면 촌락의 하층 계층은 도시 노동자들의 편으로 이끌린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후에 일어난 스탈린주의자들의 왜곡들과는 반대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차이는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들을 건너뛸수 있는가 혹은 노동자와 농민사이의 동맹이 필요한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동맹의 특수한 정치적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없는 인질들로서가 아니라 지도 세력으로서 정부에 참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선을 파괴한다; 즉, 그것은 집산주의를 일정에 올린다."(결과의 전망).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들이 선진국에서보다 빨리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에서 권력에 오른 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완전한 통치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를 잡기 전에 권력이 노동자들의 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것이다 - 그리고 혁명의 승리의 경우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동시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국가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자신의 임시적인 지배권을 지속되는 사회주의적 독재로 바꿀 수 없다. 이것에 관하여는 한 순간의 어떠한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임시적 지배권을 사회주의 독재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칼 맑스의 "영속(과정에 있는) 혁명"
그의 영구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레온 트로츠키는 맑스가 "영속(과정에 있는) 혁명"이라는 공식화를 도출했던 1848-49년 유럽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의 패배에 뒤 이어 맑스가 도달한 결론들에 의지했다.
그들의 1850년 3월 공산주의 연맹에 보내는 "중앙 당국의 인사말"에서 맑스와 그의 공동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다가오는 혁명적 투쟁의 부활에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1848년 독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했었던 것과 똑같은 배신자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848-49년 혁명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것과 봉건적 잔재를 파회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던 민주주의 봉기들이었다. 독일에서, 이것은 나라를 수많은 작은 군주 국가들과 프러시아 왕국으로 쪼개고 그래서 전국적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던 장벽들을 파괴할 필요성을 포함했다.
그러나 혁명적 봉기가 유럽을 사로잡으면서 분명해진 것은 부르주아지들이 그들의 지배에 대하여 남아 있던 지주 귀족들에 의해 대표되던 장애들을 그들이 증오했던 것 보다 무장되고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망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세력들이 귀족들과 화해하면서 혁명적 대중들은 배신당했다.
맑스의 주요한 요지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독립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가 기껏해야 위의 요구들의 성취를 가지고 가능한 빨리 혁명을 결론으로 이르게 하고 싶어하는
반면, 모든 소유 계급들이 그들의 지배의 지위로부터 축출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며, 한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연합이 이들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경쟁이 멈추고 적어도 중요한 생산력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집중될 정도로 발전할 때까지 혁명을 영속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이해관계이고 우리의 임무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시 유럽에서 산업적으로 가장 앞서있던 영국에서의 혁명이 없이 고립된 프랑스나 독일의 혁명적 정권은 곧 영국의 재정 자본과 러시아의 짜리스트 군대의 동맹에 의해 분쇄될 것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부르주아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1848-49년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너무도 허약했다. 트로츠키가 후에 그의 저작 1905에서 지적한 한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이 과거의 봉건적 관계들의 파괴를 필요로 할만큼 충분히 진행되었으나 새로운 생산관계들의 산물인 노동계급을 결정적인 정치적 세력의 지위로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적대가 부르주아지가 두려움 없이 국가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컸으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할을 맡기에는 부족했다."
맑스는 1850년 3월의 인사말에서 "혁명의 진전 속에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잠시 동안 독일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획득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1852년에 맑스는 그의 고전적 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부뤼메르 18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농민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그들의 자연적인 동맹과 지도자를 발견하는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부르주아 질서를 타도하는 것이다." 엥겔스에게 보내는 1856년 4월 16일자 편지에서, 맑스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에서 모든 것은 [16세기] 농민전쟁의 어떤 두 번째 판본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달려있다. 이 경우 일은 거침없이 가야한다." 1918년에 레닌은 이 편지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견이며, 불가피
하게 부르주아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러시아 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위한 멘셰비키의 사이비 맑스주의 도식에 대한 훌륭한 폭로라고 지적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정말이지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보다 빠른 발전으로, 독일 부르주아지의 주요 부위는 프러시아의 지주 귀족(융커들)과 동맹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휘하에서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보다 발전된 부르주아 국가들의 힘에 직면하여, 반동 비스마르크는 오로지 산업/금융 부르주아지만이 독일을 동등하게 발전된 국가로 바꿀 수 있으며, 그리고 그래서 또한 과거 지주 귀족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프러시아 군주제가 비-민주적 부르주아 혁명을 통하여 현대화와 독일의 국가적 통일을 관장하였다.
"국가 업무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지위에 있는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과거를 가지는 사람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융커들이 존속 가능한 계급이 아니라는 것과 모든 소유 계급들 중에서 오로지 부르주아지만이 미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노동계급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없다.) 그의 새로운 제국이 그가 근대 부르주아 국가로의 점진적 이행을 위한 토대를 놓는 것에 더 많이 성공할수록 모든 것이 더 안정될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역사에서 힘의 역할 (1887-88년)
비슷한 발전이 비슷한 시기에 과거 무사 계층의 한 부위가 1867-68년 봉건주의 통치체제를 타도하고 일본군대를 설립하여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맞설 수 있도록 했던 일본에서 벌어졌다. 뒤 이른 수십 년 동안, 산업 부르주아지와 근대 제국주의 열강이 일본에서 창출되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오늘날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제국주의 열강 대열로의 진입은 다른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지들에게 막혀 있었다.(이것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은 2004년 봄 스파르타시시트 58호의 "메이지 유신: 부르주아지의 비-민주주의적 혁명"을 보시오.)
이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