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동지들, 혁명당강령 수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사회주의자 통신 2호]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약평

 

- 사노위 전북지역위 사무국장 백종성

 

 

1. 소책자 개괄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라는 사노위의 소책자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소책자는,

 

첫 번째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왜 극복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현재의 공황은 단순한 순환적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뿌리깊은 구조적 위기이다.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며, 이 막다른 길에 도달한 자본주의가 노동자 민중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 역시 유럽과 중동에서 전세계로 번지고 있으며,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사회주의가 어떤 사회인가를 논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의 사적소유를 끝장내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생산을 통제하는 사회, 성별의 차이와 성적지향의 차이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 제국주의의 지배와 폭력을 종식시키는 사회, 자본가 국가기구를 파괴하고노동자계급의 권력기구를 세워가는 사회이다.

 

세 번째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종식시키는 운동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그 자체로 인해 필연적이고, 부르주아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인간본성의 이기성'이야말로 계급사회가 낳은 이데올로기이다. 소련을 비롯한 소위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국제혁명의 패배와일국사회주의론의 득세, 그에 따른 폭력적 생산력발전정책, 그리고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형해화가 낳은 당관료들의 지배계급화에 기인한다(또한 사노위 내부의 소련사회 평가에 대한 이견을 소개한다). 사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사민주의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사민주의는 20여년간 지속된 자본주의의 장기호황이라는 일시적인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곧 호황은커녕 공황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는 현 시기에 사민주의의 전망은 기만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주의야 말로 사민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네 번째로 소책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의 시급한 필요를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운동이 노동자정치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민주대연합과 진보대통합은 왜 기만적인가를 논한다. 또한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 운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은 이미 그 실패가 드러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운동이 아닌 대안적 지도력이어야 하며, 그 대안이 바로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임을 주장한다.

 

다섯 번째로 소책자는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의 노선을 소개한다.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은 응당 노동계급의 정당, 의회주의와 수권주의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이다. 역사에서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의 권력기관들을 창출해갔다. 1871년의 프랑스 파리코뮨, 19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 1936년 스페인 노동자민병대, 1968년 프랑스 파업위원회, 1972년 칠레의 코르돈등이 그 예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권력기관이며, 이들은 의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민주적이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여성, 생태, 소수자문제를 계급의 문제속에 포괄하며,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견지한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당원은 이름만 올려놓은 페이퍼 당원이 아닌,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실천적 주체여야 함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소책자는 사노위가 이땅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점하는 위치를 논한다. 사노위의 결성은 그 동안 노동조합이나 각급 현장조직 뒤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활동했던, 즉 사회주의 강령에 입각한 정치활동에 불철저했던 이 땅 사회주의자들 스스로의 각성과 반성에 기초하며, 이제 우리는 당을 건설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나서야 함을 주장한다.

 

 

 

2. 이행강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 그리고 계급동맹전략의 잔재

 

소책자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회주의의 원칙을 쉽게 잘 풀어쓰고 있다. 08년 이후의 세계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코 평화적으로 지양될 수 없으며 국제적으로 촉발된 계급투쟁이 증명하듯 저항주체들이 형성되고 있음에서 당건설의 가능성과 필요를 주장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지향과 운영원리 및 역사적으로 드러난 노동자권력의 양태와 본질 역시 잘 짚어내고 있다.

일부 동지들의 비판, 즉 ‘미래소득’이라는 단어가 사회당류의 ‘기본소득제’로 연결되는 함의를 지닌다는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 소책자가 이미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논하고 있다는 점, 명백한 의회주의 반대와 자본가 국가기구 파괴및 노동자 자체권력기구 형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득이라는 단어로 기본소득제를 유추하는 것은 과도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부채로 연명하고 있는 공황기 자본주의가 지금당장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부채를 통한 연명 자체가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산소호흡기를 착용시킨 것에 불과함을, 즉 부채를 통한 연명 그 자체를 위해 또 다시 무시무시한 수탈과 착취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미 그것은 현재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즉 대중적 수탈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소책자를 두고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우리에게 비판의 자유는 있을지언정,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 잘못된 비판을 할 자유는, 없다. 우리에게 '오보'의 자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책자에 문제는 명백히 존재한다. ‘이행강령적 관점의 부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미적시’가 그것이다. 먼저, 2장에 서술된 사회주의 상은 참으로 평온하다. 물론 사회주의가 수립되었을 때 좋은 점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서술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교육과 학습의 자리에서 자본가가 없을 때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정작 그 다음이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가 되면 이러저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에 비춰보면 우리 힘이 너무 적지 않나요?”맞다. 우리의 힘은 너무 적다. 우리 스스로 잘 알고있듯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야만적 권력에 비해 우리의 역량은 명백히 한정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런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을 계급대중에게 주는 것이 선동의 핵심이다. 단순히 '사회주의가 되면 이렇게 좋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나열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현재의 투쟁과 미래의 상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선취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미래로 이어지는 사슬의 고리를 움켜쥘방법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혁명정치의 핵심이다. 단순히 사회주의가 '미래의 상태가 아닌 현실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행강령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전북 버스파업의 예를 들어보자. 체불임금 문제로 투쟁을 시작한 그 동지들은 이미 파업투쟁을 통해 자본가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어떻게? 파업투쟁 자체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버스소유권/면허권 몰수를 통한 완전공영제 쟁취’라는 전망을 통해! 다음을 보자.

 

완전공영제의 첫 번째 단계로, 우리는 버스자본가의 버스 소유권과 면허권을 무상으로 환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버스파업으로 시청, 도청, 노동부를 비롯한 국가기관과 자본가들의 노골적 유착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직접적 서비스 생산자인 버스노동자, 이용자인 시민이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

백해무익함이 증명된 버스자본가들 대신 대중교통 서비스 생산자인 노동자, 서비스 소비자인 시민이 함께 ‘대중교통관리위원회’를 구성하자. 이를 통해 버스운영을 통제하고, 인간적인 노동에 기반한 교통체제를 운영하자. 운영 및 통제의 권한을 생산자인 노동자와 소비자인 시민에게 이양하고, ‘대중교통의 사회화’에 대한 요구를 분명히 해야 한다.

- 사노위 8호, 이삼형, <대중교통의 사회화를 위한 버스 완전공영제를 즉각 실현하자!>

 

 

버스동지들은 단순한 국유화를 넘어, 이미 노동자 통제까지 공감하고 있다. 그 동지들은 당면요구인 ‘민주노조 사수’와 '노동자 통제'의 연관고리를 본능적으로 알고있다. 이미 자본가들과 한통속임이 명백히 드러난 국가로부터 완전공영제의 노동자성, 자주성,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노조 없이는 죽었다 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이다. 사노위 전북지역위원회가 진행한 다음 인터뷰를 보자.

 

 

이: 완전공영제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국가로 소유권만 이전하는 경우, 말하자면 국가가 지명한 법정관리인이 관리를 하는건데, 착취구조는 존속한다. 완전공영제를 하되, 경영은 노동자, 시민이 해야하지 않겠는가.

남 : 노동자와 시민이 꼭 참여해야한다. 전북고속에는 버스에 대한 주주들도 있는데, 한군데만 고치면 되는 걸 통째로 갈아끼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경우도 봤다. 또 부속품 가게에서 로비를 하더라. 그러다보니 허위지출이 많다. 운영을 노동조합이 관리하고, 시민은 총지출입을 관리해서, 제대로 관리했으면 좋겠다.

- 3월 11일 사노위 전북지역위원회 신문, 남상훈 전북고속 비대위원장 인터뷰 <솔직히 동지들이 같이 파업을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에서.

 

 

화물연대 동지들은 어떤가? 08년 파업에서 그 동지들은 ‘정유소 국유화’를 주장했고, 이것은 기름값 폭등의 형태로 드러난 공황의 전개 속에서 그 동지들의 파업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아무리 요구수준이라고 해도,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이행강령적 요구이고, 투쟁이다.

 

우리는 모든 투쟁에서 권력을 지향한다. 우리는 모든 투쟁을 노동자권력의 쟁취와 연결시킨다. 레닌이 말했듯 파업은 혁명이라는 괴물을 배태하고 있으며, 우리는 파업이 배태하고 있는 괴물을 혁명으로, 노동자권력의 쟁취로 이끌고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권 투쟁이니까 여기까지”, “이것은 그 자체로 정치투쟁이니까 저 멀리까지”, 이런 것이야말로 비강령적 태도다. 강령은 권력쟁취의 문제이고, 권력쟁취의 문제는 곧 노동계급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정확히 바로 이것이 이행강령이 원하는 것이다. 공황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노동자권력이라는 연꽃을 피우는 일은 이행강령 없이는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다. 이미 권력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 노동자투쟁을 실제의 권력으로 인도해야 한다. 당이라는 조직적 도구는 강령에 기반해 정치활동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강령은 반드시 이행적 관점을 내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계급 스스로 수행하게 될 그 수많은 변화는 현실투쟁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채 정치권력의 접수 이후에야 가능할 먼 미래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활적 투쟁과 권력의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하는 강령은 포켓용 당원수첩의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이 현재 제출된 3인안이 우리의 강령이 될 수 없는 핵심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토록 처절했던 09년 쌍용차투쟁 시기, 현대차 그리고 기아차의 투사들은 실제로 라인을 잡을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했다. 그 동지들은 ‘쌍용차 동지들이 깨져나가는데 금속노조가 안한다고 이렇게 보고만 있는 나는 과연 활동가인가?’라는 고민 속에 수도 없이 번뇌했다. 그 수많은 동지들에게 실제로 라인을 잡자고 책임있게 선동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면, 즉 "관료들이 파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파산기업 국유화와 노동자통제의 전망 속에 생산을 멈추자"고 선동할 수 있는 준비된 세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승리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상적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승리할 생각이, 혁명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이행적 관점의 부재가 사회주의를 그토록 평온하게만 묘사한,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과의 극명한 대비만을 묘사한, 그를 통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압도적 폭력과 우리의 실력의 차이만을 부각시키게 된 이유라고 본다.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러시아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칠레의 코르돈은 노동자권력의 기구였다. 이것을 서술한 것은 소책자의 과학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반쪽만 담보한다. 노동자조직의 형태와그 조직을 관통하는 정치적 요구는 한 몸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권력기구들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산업의 통제, 생산의 노동자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 이 노동자통제의 요구를 일상에서 전면화시키지 못하는한, 생산의 노동자통제를 위한 권력기관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날 리는 만무하며,천우신조로 그것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 권력기관을 유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의 요체다.

 

두 번째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적시문제다. 소책자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적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소책자가 공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수행한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곧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구상이 가지는 한계와 같다. 즉 마음씨 좋은 독지가가 나타나 8시간 일하고, 8시간 교육하고, 8시간 휴식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구상은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노동자가 해방된 사회가 자본주의 안의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즉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파괴하지 않고, 노동자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오웬과 프루동과 생시몽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소책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적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곧 공상적 사회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책자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와 노동자 권력기관의 건설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할 핵심적 문제는, 강령에 어떤 노선을 적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는 곧 그에 대한 동의여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노위의 한 동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강령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무장봉기를 적시하면 프롤테타리아 독재와 무장봉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노위에 못 들어오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이들어오면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이미 파산한 의회주의 유로코뮤니즘 정당이 된다.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무장봉기의 문제는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다. 인류의 한줌에 불과한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재, 즉 권력을 다투는 무자비한 투쟁을 통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아니 질적으로 다른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 혁명사상의 요체다.

그렇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강령에서 사수하려는 투쟁은 역사적으로 주요한 계급투쟁이었다.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종식을 선언한 스탈린주의자들에 발맞추어 당 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삭제를 추진한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우리가 개량적이라고 비판하는 발리바르조차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다. 그때의 팜플렛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하여(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저작이다. 2년전 LCR(혁명적공산주의동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령에서 삭제하고 NPA(반자본주의신당)이 되었다. 다음의 인터뷰를 보자.

 

 

- LCR에서 NPA로 재창당되면서 당명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삭제되었다.

= LCR의 모든 당원이 혁명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LCR 안에서도 다수의 당원들은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소수 그룹의 반혁명파도 있다. 그래도 모두들 어쨌든 LCR 당원이었고 지금은 모두들 NPA 당원이다

-2008년 11월 26일 레디앙, 평당원 아가트, LCR과 NPA를 말하다. 2008년 11월 18일 파리3대학에서, 박지연 파리 통신원

 

 

 

그들은 이미 노동계급의 이해를 민중의 이해와 섞기 시작했고, 이제 민중의 이해를 대중의 이해와 섞기 시작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삭제하는 것의 귀결은, 브장스노라는 ‘스타’에 의존한 합법 의회주의 전략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 한국 정치지형으로 치면, 이들의 대응물은 진보신당 정도가 될 것이다.

 

세 번째가 소책자에는 계급동맹 전략의 잔재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50페이지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계급동맹 전략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만을 위해 싸우지 않으며,①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민중의 이해를 위해 싸운다. 동시에 노동자 계급이 전체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안고 싸울 수 있는 계급적 감수성과 헤게모니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한다. ②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전체 민중의 전위에 서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투쟁의 주체로 서나가도록 활동하는 당이다.”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 50페이지

 

 

①에 대한 서술에서 ②는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예를들면, ①은 노동자계급과 도시빈민/영세상공인이 단결해야 한다는 말이고, ②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가? 뉴타운 정책에 반대해 노동자와 민중이 연대하여 싸우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 도모된다는 것인가?단호히 말하겠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모든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지지하는 민중만을 대변한다.소책자가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만을 위해 싸우지 않으며”라는 문장은 암묵적으로, 아니 명시적으로 계급동맹 전략을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든 민중’의 이해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사실상 쁘띠부르주아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3인안의 동지들이 그람시를 굉장이 우경적으로 해석한다고 본다. 헤게모니 전략은 인민전선전략, 즉 계급동맹전략과 어떤 관계도 없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주아의 요구를 받아안는 것도 아니고, 양자의 요구를 섞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주도(이니셔티브)하에 그들을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람시에게 가장 중요한 ‘진지’는 공장평의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3인안을 주장하는 동지들은 다수자혁명을 계급간 동맹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 동지들은 뒷문으로 인민전선전략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썼던 다수자 혁명의 의미는 3인안을 주장하는 동지들이 이해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맑스는 노동계급을 ‘인류의 절대다수’라고 썼다. 쁘띠부르주아가 분해되어 노동계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썼다. 또한 맑스는 공산당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지지한다’고 썼다. 나는 단순히 “맑스가 그렇게 썼으니 맞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의 정신과 노선에 대한 문제다. 다시 말하겠다.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옹호한다.이것은 노동자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사회주의민중정당'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이해는 때로는 쁘띠부르주아의 요구와 충돌하며, 그때 우리는 단호히 노동계급의 요구를 지지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다수자 혁명전략의 포기할 수 없는 핵심이다.

 

 

 

3. 혁명당은 혁명이전에 이미 건설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의 모순은 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정도가 아니라 DNA에 각인될 정도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투쟁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체제를 뒤집어 엎는 대신에 체제의 좁은문을 뚫고 들어가려 발버둥을 치는가?

 

소위 ‘민주정부’ 10년 간, 우리는 고립된 채 전망없이 싸워왔다. 패배를 거듭하며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그 야성을 상실했고, 사회주의자들은 행동강령의 부재 속에서 그저 ‘구조조정 분쇄’라는 구호로 대중운동을 추수했다. 전투파, 혹은 현장파의 결집체였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채 파산했으며 전노투 역시 좌파결집 이상의 시도가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적 전망의 부재속에 개량주의자-의회주의자들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이라는 그들 고유의 프로그램을 진전시켰고, 이것은 어느새 조직 노동운동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양 굳어졌다. 대중투쟁이 후퇴하면 후퇴할수록 개량주의자들의 퇴행적 전망은 기승을 부렸고, 전투적 현장파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조직노동운동과 임단투는 이음동의어가 되었으며, 노동자정치는 표 찍어주고 세액공제 후원금 내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전망없이 후퇴해온 10년을 거쳐 우리가 맞이하게 된 것은 850만 비정규직, 실질실업률 30%라는 끔찍한 현실이다.

 

쌍용차에서 드러났듯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의 생존조차 이미 고려대상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는 산별노조는 연대파업은커녕 기세있는 가두투쟁조차 하지 못했다. 문제는 전망이다. 싸울 수 있다는 전망,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전망, 계급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전망! 당건설의 전망!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너무나도 늦게 제기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강령이라는 방향타가 필요하며, 그 강령을 실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이라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 시기 모든 계급투쟁의 성과는 당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수렴되어야 하며, 더 이상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구체적 전망을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말로 에둘러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또 다시 써클로 추락한다면공황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노동계급을 집어삼킬 것임을!

 

지금도 튀지니, 이집트, 리비아, 예멘에서 무수한 노동계급이 피를 뿌리고 있다. 중동과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계급투쟁이 다시 발발하고 있다. 1871년 파리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프로이센이 진압했듯, 바레인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사우디 자본가계급이 진압하는 자본가들의 국제주의가 펼쳐지고 있다. 남한 자본가들은 대법원 판결조차 지키지 않은 채 자신의 초과착취체제를 사활적으로 지키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령에 적시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25일간 신나게 두들겨 맞은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자위적 무장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혁명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동지들! 지금도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헌납하고 있다. 우리가 이 국면을 놓치면 우리는 당건설의 'ㄷ'자를 다시 꺼내기 위해 몇 년, 몇 십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흰머리의 전공투 출신 일본 활동가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국가에서 거세당한 채 해마다 메이데이가 돌아오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서 '국제연대'의 초라한 깃발을 흔들어야 하는 미래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처럼 혁명이 도래해서야 부랴부랴 혁명당을 만든 죄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혁명당은 혁명이전에 이미 건설되어 있어야 한다.모든 주객관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혁명은 폭풍처럼 올 것이라고, 그러니 당건설로 나아가라고, 결코 다시는 써클로 추락해서는 안된다고! 동지들, 단호히 나아가자!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칙을 움켜쥔 노동자혁명정당을 반드시 건설하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담] 오세철, 최철에게 듣는다 [사회주의자 통신 2호]

[대담] 오세철, 최철에게 듣는다

- 사회주의 문화예술 운동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 김병효, 임천용

 


 

임천용 : 오는 길가에 보니 연극제 포스터가 많이 있던데, 무슨 연극제인가요?
최  철 : 서울연극제는 대학로 전반에서 하는 것인데요, 연극제 개막 행사에서 4-5명 정도가 서울연극제 관련한 주제 토론회가 있습니다. 저도 패널로 참가하는데 무슨 발언할까 고민중이에요. 이번 연극제 주제가 ‘거울’이라는 사회적 이슈입니다.
임천용 : 전에도 이런 주제가 있었나요?
최  철 : 처음이에요. 문화예술인들도 기획 과정에서 뭔가 이슈, 주제들을 다루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임천용 : 사회가 이 모양이다 보니 세태를 반영한 것인가요?
최  철 : 그런 고민은 아닌 것 같고, 연극하는 사람과 행정하는 사람들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다가 최근 MB 들오면서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특히 유인촌 이후 자기 사람 포진시키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민감성보다는 내부 삐걱거림이 표현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임천용 : 이번 작품이 여덟 번째죠? 여섯 편 정도 봤는데, 대학로에서 연극 흥행이 여의치 않은데, 어떻게 칠 년 넘게 해오고 계신지? 밥은 잘 먹고 다니나요?
최  철 : 거꾸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밥 잘 먹고 다니나요?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죠.
임천용 : 저도 많이는 못 먹고 조금씩 먹고 있습니다.
최  철 : 연극하고 밥 먹고 산다는 것, 기획하고 연극팀을 꾸리고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연극 일반에 만성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임천용 : 오선생님께서는 음주, 뒤풀이 문화가 마음에 들어서 연극 계속하시는 것 아닙니까?
오세철 : 내 음주 문화를 전파하려고 결합한 측면도 있다. 연극하면서 술을 더 먹게 됐고...  예전부터 먹으면 새벽까지 가긴 하지만 반도체 소녀 하면서도 하루 걸러 하루씩이었다. 젊은 배우들에게 몹쓸 짓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훨씬 가까워졌다. 나이 차이가 있지만 연극계 막내로서, 막내처럼 행동하니까, 선배들이 참 좋아하더라. 술이라는 것이 운동에서도 마찬가지고, 뭔가 만들어가는 데 있어 좋은 매개가 된다.
임천용 : 술을 많이 못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술 외에도 젊은 동지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나요?
오세철 : 무대체질이 좀 있어서 판이 벌어지면 이야기도 잘 하고,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그래서 젊은 동지들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 같다.


반도체 소녀, 나르키소스와 택시택시

 

김병효 : 최철 동지의 전작인 반도체 소녀를 볼 때 불편하다는 느낌을 갖는 분들이 많던데, 연출자가 특별히 의도한 것인가요?
최  철 : 뭐 연극이론을 끌어다 대는 것은 우습고..... 감정이입하는 분들도 계시고,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판단은 관객의 몫이죠. 처음에 오선생님께 대본을 보여드리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준비를 하며서 추상적이고 모호하던 것이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임천용 : 노동자들이 봤을 때 눈물도 흘리고 하는 것을 보면 노동자들은 감정이입이 쉬웠다고 봐요. 그런데 학생들은 아직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것 아닐까요?
김병효 : 저는 쉬우면서도 곱씹어보면 더 깊은 것이 있는 것이 좋던데요. 쉽게 생각하면 쉽고,  또 그러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뭔가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최  철 : 쉬우면서도 묵직하게 뭔가 던져줄 수 있는,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뭔가 제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실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것이죠.
임천용 : 결론을 나열하지 않고도 관객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새로운 결론을 향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요?
최  철 : 말로 해야하기 때문에, 또 배우도 사람이기 때문에, 글과 달리 많이 힘들어요.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연극은 계속 사람들과의 만남, 특히 관객하고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죠. 영화는 틀어놓으면 끝이잖아요. 연극은 관객의 호흡과 같이 가지 않으면 어렵지요. 배우, 무대, 관객, 연극의 3요소에 관객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어요.

임천용 : 나르키소스 극중에서 브이가 에프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성을 찾아나가는데,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최  철 : 근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유물변증법 요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을 인간으로서 만드는 노동, 긍정적 힘으로서의 노동을 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을 통해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는데, 노동을 통해 복원, 아니 오히려 창조되어야 할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원초적인 에너지가 바로 사랑이죠. 남녀만의 사랑이 아니라 더불어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의 노동이 아닌, 생산의 노동으로서의 에너지가 아닐까요?

임천용 : 오선생님은 김상수 연출의 택시택시에 출연하시는데, 택시택시는 88년 초연 후 이번에 시대상황에 맞게 수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횡포는 변한 게 없는데 오늘날 현실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그리고 어떤 역으로 나오시는지 궁금합니다.
오세철 : 그 당시 연극은 못 봤다. 월남전을 다뤘다고만 알고 있다. 어쨌든 이번 연극에서는 두 죽음, 반도체 소녀와 장자연 죽음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구조적 타살이다. 대사도 적나라하다. 지난 반도체 소녀랑 이어지는 면이 있다. 이 연출자가 반도체 소녀를 보고 작년 말에 나에게 자기 연극에 출연해 줄 수 있는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이후 공식적인 제안을 거쳐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인공 운전수를 하라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못하겠고 잠시 등장해서 압축적으로 대사를 하는 인물로 등장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유럽 연극에서 대사 없이 연극을 지켜보는 인물을 설정하는 것처럼 역할을 잡았다. 대사보다 오히려 침묵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공유했다. 구루라고 하는 말처럼. 대사를 적어둔 것이 있기는 한데, 오히려 그것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평가를 해봐야 한다. 9번 정도 등장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앞이나 무대 뒤에 계속 서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과정에 나온다는 말이다.
최  철 : 하이퍼 리얼리즘, 연극적 현실과 실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인데요, 오선생님께서 교수이면서 출연을 하지만 현실에서도 운동가이자 교수시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드문 것이긴 한데, 반도체 소녀에서도 오선생님께서 연극에 그대로 들어가 계셨죠. 거기서는 그대로 연극의 인물로서 들어가 계셨고, 물론 이번에는 대사 없이 관찰자로서의 역할이긴 합니다. 반도체 소녀의 경우 미리 이야기 돼서 고려하여 기획한 것이고 이번 택시택시에서는 그냥 지켜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여튼 저도 오늘 출연하시는 연극을 한 번 보려고요.

 

 

인생은 연극이다

 

임천용 : 오선생님께서는 반도체 소녀 이후에 불과 두 달만에 김상수 감동의 택시택시에 캐스팅되셨는데, 연극을 통한 문화운동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최철 동지는 쭉 작연출을 해오셨고... 세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했는데, 두 분께 연극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최  철 :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라는 막연함에서 연극을 통해 구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오선생님과 함께 저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사회주의 운동과 연극이 만난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이 엄중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계시면서도 가장 원칙적인 분과 만난 것이 행운이지요. 오히려 제가 공부와 다른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가가야 할 지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오세철 : 극단 ‘날’이 무대에 올렸던 관동여인숙, 리스트를 봤다. 요번 반도체 소녀 극본을 먼저 볼 기회가 있었고, 연극이 아니라 삶 자체를 무대로 올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연극하면 가상,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리스트는 용산 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뤘고, 반도체소녀는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다. 직접 현실에 다가설 기회를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무대에 설 수 있게 한 것에 대해서도.
임천용 : 최철 동지의 그 전 작품들은 추상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난해했다고 할까요. 나르키소스는 반도체소녀 공연 후 짧은 준비기간 속에서 올린 것인데도 이해가 쉽고, 자본에 예속된 기계적 삶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그 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김병효 : 오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 운동, 조직활동을 해오셨는데, 새롭게 연극에 대해 흥미도 있으시고요. 오선생님 운동에 있어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세철 :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는데, 부모님이 연극인이시자, 사회주의자셨다. 지금까지 잘 안 드러나다가 이제야 드러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우리가 혁명정당 건설 한다고 하는데, 당건설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예술에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결합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노동현장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너무 좁게 사고하는 경향이 있어서 장기적으로 본다면 뿌리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생각했고,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 속에서 나는 이 분야의 적임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재미있게 신나게 할 생각이다. 그냥 배우로서 무대에 선다가 아니라, 사회주의 예술운동, 당건설 운동에 복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임천용 : 나르키소스 작품은 혁명 패배 후 미래사회의 끔찍한 이야기를 하지만, 희망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미래가 아니라 그냥 혁명에서 성공할 방법은 없을까요? 연극을 통해 이것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최  철 : 자본이 더 흉폭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대한민국은 현상적으로 별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잔인한 발톱을 드러내겠죠. 이번 나르키소스 연극에서는 혁명의 전망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다음 연극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혁명을 그려내려고 하고 있지요. 다음 세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노동자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다뤄보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의 핵심 키워드는 무장인데, 아랍 현실을 보더라도 그렇고 평화라고 하는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을 다루려고 해요. 우리가 폭력혁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이야기 하는 폭력보다는 자본주의의 폭력 자체가 인간성까지 파괴하는 것 같아요.
오세철 : 나르키소스는 1984의 21세기판이다. 조지오웰에서는 자본주의 문제 자체보다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것, 인간성을 되살리는 것을 통해 노동자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주의적 인간상이라는 말을 쓰는데, 자본주의에 찌든 속에서 새로운 인간형이 나오겠는가? 본성을 부정하고 역사, 사회적 산물이라고만 보면 오히려 답이 없다.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토론해야 한다. 이런 시도를 한 것이 아닌가? 삼부작이 나온다는데 기대해보자.
김병효 : 본성에서부터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인가요? 그렇다면 분열적 자아로 빠져들거나 아니면 외부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최  철 :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토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심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부르주아 학문만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오선생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한 것처럼, 무의식에 대한 반성 속에 60년대 유럽 철학을 비롯하여 알튀세르 중첩 이론, 좌파 철학자 등이 많은데, 이런 것이 심도 있게 토론이 많이 안되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근원을 흔들면 안되는데, 이 부분까지 건드린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죠. 저는 출발이 종교였거든요. 이런저런 과정을 쭉 거치고 나서 유물변증법의 진리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가야 한다는 생각이고요. 자본주의는 원칙적이잖아요. 원칙을 훼손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유연하죠. 가치증식의 기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무장봉기 문제도 사실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이고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흔들리는 순간 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고 봅니다. 공산당선언에서 맑스가 사회주의의  조류를 구분한 것도 원칙 없는 유연성에 대한 경계 아니었겠어요?

 


부르주아 문화와 연극, 영화

 

최  철 : 우리가 노동시간 24시간 중 10시간을 노동한다면 10시간의 현실이 재생산구조를 통해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이마저도 자본은 착취기제로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10시간의 문제를 문제로 못 느끼게끔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노동자들을 마취시키고,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이를 통해 착취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연극 이런 것을 떠나서, 임금을 받아서 쓰는 것을 보면 얕은 쾌락을 위해서 쓰잖아요. 그리고 이를 문화예술로 착각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착취 구조로 돌아가지요. 공장에서의 소외뿐 아니라 노동력 충전을 위한 시간에도 정신적으로 지배당하게 되는 겁니다.
김병효 : 우리 일상에서는 연극보다 영화에 많이 익숙한데, 이런 부분과도 관련되나요?
최  철 :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성장했잖아요. ‘블레이드 러너’처럼 체제 비판적인 영화도 존재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익명성이 존재해요.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이미지만 남게 됩니다. 생산 방식도 그렇고 향유방식도 자본주의적입니다. 영화가 효율적이고, 자본주의적 방식과 동일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더불어 방송매체와 영화가 성장하는 것이죠. 제가 왜 굳이 연극을 고집하느냐 하면,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면하기 때문에, 그래서 연극이 노동자 예술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거든요. 브레히트가 연극에서 영화로 갔다가 쓸쓸한 노년을 맞이하는데, 이 때 자신의 연극 시절을 부정하기까지 하잖아요. 채플린도 사회주의자였지만, 매체의 익명성, 기계를 통해 상영되고 그를 통해 비춰지는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최  철 : 연극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연극 예술의 치유 기능이에요. 억눌린 자존심, 자괴감, 위축감 등을 연극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거든요. 자기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활동하는 것이에요. 많이 억눌린 아이들을 보거나, 노동자들은 얼마짜리 인생인가로 평가받으면서 자존감을 잃는 모습을 보잖아요. 연극을 통해서 이것이 치유가 가능해요. 그래서 힘들지만 이것을 하고 견뎌내려고 해요.
김병효 : 현자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한 큰 투쟁을 겪으면서 많은 동지들이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으로 봅니다. 연극이 이러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겠지요?
최  철 : 현자뿐만 아니라 쌍차도 마찬가지죠. 자살 문제도 그렇고. 운동하던 사람들도 투쟁 후에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이 많아요. 한국사회에서 특히 승리의 역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문화예술이 해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문화예술 운동 과정에서 구호로서가 아니라 직접 가서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습니다. 연극계에도 의식의 편차는 있지만 기회만 되면 현장과 결합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현장 노동자들 과 함께 연극 만들고 다시 대학로 무대로 오고 싶어요.

 


사회주의 문화예술 운동의 전망과 과제


임천용 : 문화예술 운동도 비용과 시간 등에서의 어려움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연극을 계속하실 계획인가요?
오세철 : 연극배우가 가장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이다. 이 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조건에서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오히려 안정적인 연극운동의 토양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중적 운동으로 벌여가야 한다. 연극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장하고, 연극체를 만들어내고 대중적인 후원을 모아내야 한다. 대자본과 별개로 살아남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연극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고, 노동자들도 스스로의 운동으로서 접근해야 한다.
임천용 : 노동자로서의 연극배우로 인식하고, 그들의 생활 또한 안정될 때, 현장노동자들에 대해 더 폭넓게 다가갈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오세철 : 배우들도 노동자라고 인식해야 한다. 배우는 이중적이다.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스타의 꿈을 꾼다.
임천용 : 노동자 운동이 자본에 밀리면서 임금만 보더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비용이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그나마 일부 노동자들의 경우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데, 대체로 자본의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되고 마는데요.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이 창출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김병효 : 문화예술운동 기획에 있어서 부르주아적 문화 향유 시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착취당하는 시간을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으로 대체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최  철 : 시스템 자체를 뒤집어낼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을 부르주아적 문화의 향유가 아니라, 대공장에서 공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재충전의 틀거리를 노조 중심이 아니라 다른 틀거리를 찾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연극 한 편에 3천만 원 드는데, 연극인들은 그 돈이 없다보니, 자본가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노동자 한 명당 천 원씩 3만 명을 만들어서 연극을 꾸리게 되면 연극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상영할 수 있거든요. 자기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서 거꾸로 대학로에 들어와서 공유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상호 피드백이 이뤄지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거에요.
예를 들어 한 달에 천 원씩 내서 만드는 공연이 내가 함께 하는 누군가가 만들고, 바로 우리 노동자들의 이야기고, 감동을 느낄 수 있고 한다면 큰 운동의 성과로 남겠죠.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주의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죠. 딱딱한 책보다 토론에 더 쉽지 않겠어요?
공연 한 편에 3천만 원 정도 투자되면 연극 노동자도 기초 생활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다수가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예술의 힘이죠. 자본가에게 3천만 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노동자에게 있어 오직 단결이 무기라고 한다면, 단결을 통해 힘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문화예술의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김병효 : 앞으로의 활동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세요.
최  철 : 기존에 추상적으로 접근했었어요. 현장과 결합하면서 문화예술적 상상력과 현실적 과제들을 결합시키는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어요. 그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요. 현장에서 함께 하고, 문화예술적 상상력으로 이를 풀어내고 이를 일반인들에게도 감동으로 전해주고, 이를 통해 사회관계 전반에 긍적적 변화를 끼칠 수 있을 것으로 봐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었고, 구체화시키는 데 실패했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이것이 현재 나의 과제고 숙제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I) [사회주의자 통신 2호]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I)

 

미첼 / 번역 : 사노위 강령기초위원 오세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한 치의 의심 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혁명은 위로부터 밑에까지 자본주의국가를 파괴했고 부르주아 지배를 처음으로 완전하게 이룩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파리 꼬뮨은 단지 이러한 독재를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었을 뿐이다.) 맑스주의자가 이를 진보적경험(그 후의 반혁명에도 불구하고)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이끈 길로의 한 걸음으로 분석해야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물질적, 정치적 조건

 

이 거대한 사건이 쌓은 상당량의 자료로부터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분명한 지향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연구의 상태를 전제할 때 아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한 이론적 의미, 역사적 실재로부터의 특정한 맑스주의 영역과의 대면은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제기한 복잡한 문제가 부르주아 사회의 보편성과 그 법칙 그리고 국제계급 투쟁의 지배에 기초한 일련의 원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기본적 결론에 도달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대와 반대로 가장 부유한 나라,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 사회주의를 위해 “무르익은”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반봉건 후진지역에서 일어났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혁명의 최선의 조건은 물질적 부족이 사회갈등을 다루는 지배계층의 능력부족에 상응하는 상황과 함께 간다는 두 번째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말로 정치적 요인은 물질적 요인을 압도했다.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맑스의 테제와 모순되는 것과 달리 이러한 긍정은 이 연구의 첫 번째 장애서 우리가 이 요인에 따르는 중요한 의미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결론으로부터의 추론인 세 번째 결론은 공산주의의 서장으로서의 사회주의 건설 이라는 본질적으로 국제적인문제는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없지만, 세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패배에 근거하여 적어도 부르주아 지배의 중심인 선진국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지배를 수립한 후 특정한 경제적 과업을 수행할 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 건설은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세계 혁명의 발전 과정 속에 통합될 때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괴 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다른 말로 그 자신의 경제에 관하여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은 국제적 계급투쟁의 필요에 종속된다.

모든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이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러시아 혁명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정치적 기준보다 경제적이고 문화적 기준을 보면서,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한 국가의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이 부여하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사회주의의 건설의 양식에 본질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실천적 경험이 아직 사회주의라는 의미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를 흐트러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본질적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가 우선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러시아 혁명은 경제 건설 강령에 대한 매우 엄격한 한계가 있는, 잠정적으로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역사적 필요성을 지닌 가장 악화된 형식이다.

 

세력의 지구적 균형은 사회주의 건설의 리듬과 양식을 결정한다.

 

“일국 사회주의”의 거부는 모든 생산영역을 포괄하고, 가장 변화하는 도구에 부응하여 통합경제를 건설하여 다른 비슷한 경제에 병치시켜 세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생산 발전을 향한 경제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각각의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세계 혁명의 승리 이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국제 분업을 통하여 매우 불완전한 방식으로 이를 실현했던 것이 사실이다.) 혁명 운동의 지체라는 덜 유리한 전망과 함께(1921년 러시아 상황) 그것은 전 세계 계급투쟁의 리듬에 프롤레타리아 경제의 과정을 적응시키는문제이지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봉기를 준거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를 강화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 목적이 통합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요소를 준비하는것으로 명확하게 말했지만 위와 같은 기본적 노선을 자주 놓쳤다.

사실 소비에트 경제 발전의 분석에서 트로츠키는 경제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의존한다는 올바른 전제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세계 자본주의 사이의 경제적 수준에서의 “대결”인 것처럼 접근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많이,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할 때 그 우월성이 증명되는 것이 맞지만, 그러한 역사적 증명은 프롤레타리아 경제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사이의 충돌의 결과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의 치열한 투쟁 이후 세계 경제에서 일어난 기나긴 과정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경쟁의 기반 위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생산의 사회적 내용의 변혁을 가로막는 노동착취라는 자본주의 방식에 불가피하게 종속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의 우월성은 노동 생산성의 무한정한 확장의 결과로서의 더욱 “싸게” 생산하는 능력에 있다고 볼 수 없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자본주의 모순의 소멸을 통해서만 그 우월성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트로츠키는 분명히 “세계 자본과의 경제적 경주”같은 기준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중도주의의 이론적 무기를 내세웠다. 즉 “결정적 요인으로서 발전의 유혹”, “발전율 사이의 비교”, “전쟁 전 수준의 기준” 등등 모두는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에 대한 중도주의 슬로건을 빼다 닮았다. 이는 중도주의 정책의 직접적 결과이지만, 러시아 노동자 참상 위에서 이루어진 기괴한 공업화가 왜 러시아의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타고난” 자식인지의 이유이다. 이러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국제적 혁명 투쟁의 후퇴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를 추적한 전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신경제정책(NEP)이후 진화한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그의 모든 분석은 국제적 정치 요인으로부터 고의로 발췌하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이 그들의 순간적 접점 속에서 모든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당면 시기의 실제적 해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시기를 위한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두드러진“ 요소, 다시 말해 무엇보다 정치적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 하다.”(자본주의를 향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를 향하느냐?) 이처럼 임의적인 분석 방법은 자연스럽게 소비에트 경제를 계급세력의 세계적 균형의 진화의 함수로 보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관리의 문제를 검토하게 만든다.

NEP 이후 레닌이 “누가 이길 것인가”라고 제기한 문제는 그가 애초에 놓았던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엄격한 경제적 영역으로 바뀌어졌다. 강조점은 판매가격을 낮춤으로써 세계 시장 가격에 맞출 필요성에 두어졌다.(실제로는 노동의 지불부분, 즉 임금의 삭감으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피할 수 없는 악으로서의 노동력 착취로 스스로를 제한하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자본주의 내용을 담는 이러한 요소를 경제과정의 결정적 요소로 만드는 고도의 착취수준을 제재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전투로 볼 때, 사회주의 경제(즉 소련)의 생산물로 세계 시장에서 자본주의 생산을 “능가하는” 전쟁을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 일국 사회주의의 생각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한 관점으로 세계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미래에 대해 편안하게 확신할 수 있음이 명백하다.

여기에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두 단계에 대한 이론적이고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 하나는 “전시 공산주의”이고 두 번째는 신경제정책이다. 전시 공산주의는 내전이라는 극단적 사회적 긴장에 해당되고, 신경제정책은 무장투쟁의 종료와 세계 혁명의 퇴조 상황에 해당된다.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상황적 국면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사회적 현상이 문제가 되는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수준과 함께 강도와 리듬을 지키면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검토는 더더욱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행기에 이들의 정확한 위상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 유형의 “전시 공산주의”는 “정상적”인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미리 확립된 강령의 산물이 아니었고 무장한 계급투쟁의 항거할 수 없는 압력이 부여한 정치적 필요였다. 이론은 부르주아지를 정치적으로 분쇄할 필요성에 잠정적으로 양보해야 했다. 이는 경제가 정치에 복속되어야하는 이유였지만 생산과 교역의 몰락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실제로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점점 더 혁명을 위한 강령에서 볼셰비키가 발전시킨 이론적 전제와 충돌했는데 그것은 강령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제적 이유”(노동자 통제, 은행의 국유화, 국가 자본주의)의 성과라는 매우 절제된 성격이 부르주아지가 무장저항을 일으키도록 고무시켰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국유화의 법령이 단순히 성문화한 몰수를 대대적으로 가속시키면서 대응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수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예상하면서 이러한 경제적 “급진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실제로 1921년 봄, 볼셰비키는 노동자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의도하지 않은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식해야 했다. “전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기근을 피하고 투사들은 먹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경제적 기구의 강제 동원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적 내용이 없는 평등한 소비의 “공산주의”였다. 농업 잉여물을 징발하는 방법은 현저한 생산 감소를 가져올 뿐이었고, 임금 상승은 노동 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상황이 부여한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 중앙집권주의는 합리적 중앙집중주의의 진정한 불구화였다. 교환의 질식(암시장의 성행이 수반한)과 화폐의 실질적 소멸(현물 지급과 자유 용역)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는 내전의 산물이었고, 실질적 경제생활의 몰락이었다. 그 조치들은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수단이 아니었다. 요약하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시 공산주의”의 의미를 심각하게 변경시키지 못했을지라도 발전의 특정단계를 고도로 발전된 국가에서의 승리한 혁명이 “뛰어넘게” 함으로써 상당하게 약화시켰던 경제적 궁핍화를 통하여 계급의 적을 분쇄하는 대가를 치렀다.

맑스주의자는 내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에 선행하든, 수반하든, 뒤따라오든 간에 경제 수준을 잠정적으로 떨어뜨릴 것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수준이 제국주의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이 떨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진국에서 유기적으로 약한 부르주아지의 급속한 정치적 박탈은, 이 부르주아지가 아직 넓은 사회적 계층으로부터 힘을 끌어 모을 능력을 가졌다면 (러시아에서는 문화수준이 낮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광범위한 농민이 있었다.) 새로운 권력을 해체할 목적인 장기간의 투쟁이 뒤따른다.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정치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강력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승리는 치열하고 폭력적이며 물질적으로 참담한 내전이라는 다소 긴 시기가 선행되기 보다는 바로 뒤따를 것이 가능하다. (반면, 혁명 이후의 “전시 공산주의”의 단계는 그런 나라들에서 상당히 일시적일 수 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볼 때, 특히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잔인한 반대에 놓인 「신경제정책」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유” 시장, “자유” 소생산, 그리고 화폐로의 회귀를 통한 자본주의로의 심각한 후퇴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후퇴”는 우리가 그 뒤에 있는 실제적 경제 조건을 검토하면 진정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말로 「신경제정책」(그 두드러진 국면,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적 요소와 독립적인)은 이행 경제의 진화를 위한 “정상적” 조건의 재확립으로 보아야 한다. 내전의 불가항력 이후에 따라온 「신경제정책」이 그를 넘어서서 잘 나아갔을 지라도, 그것은 러시아에게는 볼셰비키의 초기의 강령으로의 회귀였다.

요약하면 「신경제정책」은 그 상황적 요인과 분리할 때, 어떤 다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야할 경제 행정의 형식이다.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가능성이 모든 자본주의적 범주와 형식의 사전 철폐(맑스주의가 아닌 관념론으로부터 도출된 생각)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반대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행정이 부르주아 예속의 특정한 표현의 불가피하지만 잠시 동안 생존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결론이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역사적 조건에 걸맞는 경제 정책의 추구가 국제 혁명의 하강과 기근과 노동자․ 농민의 총체적 탈진에 의한 내적 곤궁의 시기로부터 나온, 가장 중압적이고 위협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음은 사실이다. 이는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특성이 러시아의 「신경제정책」의 보편적 중요성을 가리게 한 이유이다.

사건의 압력 아래에서 「신경제정책」은 효과적으로 방어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는 필수조건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복종의 결과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부르주아지와의 어떠한 정치적 타협도 포함하지 않았지만 경제의 진보적 진화를 위한 출발점을 배우려는 단순한 경제적 후퇴였다. 실제로 계급 전쟁은 무장투쟁의 영역으로부터 경제 투쟁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위치지음으로써, 덜 잔인하고 더욱 함정에 빠지지만 가공할 다른 형식으로 취함으로써, 전체가 약화될 운명에 놓이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본질적인 것은 국제 투쟁의 변화와 연관되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이다. 이행기의 보편적 수용에서 「신경제정책」은 이행 경제 그 자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견고한 계급 노선 위에서 유지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적 적의 도구를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남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활동이다. 오로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진화를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 강령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 강령에 부과된 역사적 한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째, 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사회화”된 생산수단과 교환의 집산화. 둘 째,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제적 무기로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대외 무역의 독점화. 셋 째, 경제의 구조적 특성과 전 세계 사회주의 분업에서 요청되지만 경제 사회적 수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지위를 강화시키는 구체적 기능에 기초한, 생산력의 생산과 분배를 위한 계획. 넷 째, 해외무역의 독점에 기초하고, 생산수단과 부족한 소비의 대상을 획득할 목적으로 하며, 세계 시장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고 그 시장 속에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통합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지침과 함께, 기본적 생산계획에 종속되어야 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과의 연계를 위한 계획이 그것이다.

이러한 강령의 진보와 실현은 어느 정도 생산력 발전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의 문화적 수준에 달려 있지만, 본질적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힘, 그 권력의 견고함, 국내 및 국제 수준의 세력 균형이다. 일정하게 상호 침투하는 물질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 사이의 어떠한 단절이 결코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되풀이 말하지만, 보기를 들어 사회적 부의 몰수 양식을 다룰 때, 집산화가 자본주의 확립을 위해 봉건적 재산의 폐절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주의 확립을 위해 필요한 법적수단이지만, 그것은 자동적으로 생산의 변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엥겔스는 집단 재산 소유를 사회적 만능약으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여 우리에게 경계하도록 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러나 주식 회사로의 전화도, 국가 소유로의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주식 회사의 경우에 이것은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명백하다. 그리고 현대 국가 역시 부르주아 사회가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의 침해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일반적인 외적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조직일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떠하건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기관, 자본가들의 국가, 관념상의 총자본가이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들을 더 많이 자기의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현실적 총자본가로 되며, 국민들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 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점에서 그 자본 관계는 전도된다. 생산력들의 국가 소유가 충돌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해결의 칼자루는 그 안에 숨겨져 있다.”(반위링론)임을 그는 보여주었다. 덧붙여 그는 사회세력을 모든 사람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생산수단을 “전제적 주인으로부터 온순한 하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력에 작용하는 사회 세력의 본질기능을 이해하는데 그 해법이 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만이 이러한 집합적 의지를 결정하고 재산의 사회적성격이 변환되어 그 계급적 성격을 잃게 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분명하다.

집산화의 법적 효과는 후진적 경제 구조에 의해 제한받고 이는 정치적 요인이 더욱 결정적이게 만든다.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자본주의 축적과 위험한 계급 분화로 이끌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요인들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위해 국가를 장악하게 한 유일한 정책, 즉 매우 강력한 계급 정책을 통해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업 문제와 함께 소규모 산업 문제는,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긴 무거운 유산, 법령으로 제거될 수 없는 유산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핵심 쟁점을 구성한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영국을 제외하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제기된 중심 문제는 상품의 소생산자와 소농에 반대하는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이며 이 사회 계층을 폭력으로 몰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투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사실 생산의 몰수는 이미 “사회화”된 기업에 관련하여 경제적으로 실현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낮은 원가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없고 시장 수단을 통한 통제 밖에 없는 개별 기업의 경우는 아니다. 이것이 개별 노동과 집합 노동 사이의 이행의 초점이다. 나아가 “사회주의”, 자본주의, 또는 전(前)자본주의라는 유일하게 경쟁에만 바탕을 두고 진화하는, 반대되는 사회관계에 기초한 순수한 생산 유형의 병렬체로,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추상적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단화되는 것은 사회주의적이 되고 소부르주아와 농업 부문은 불가피하게 “사회주의”의 층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부하린으로부터 나온 중도주의의 테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생산의 각 영역은 다소간 자본주의의 기원의 흔적이 있고, 병렬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압력 아래에서 서로 싸우고, 내전시기보다 덜 잔인하더라도 매우 치열한 방식으로 발전하는, 모순된 요소들의 상호 침투이다. 이 싸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스스로 집합화된 산업을 기반으로 이미 정치적으로 극복된 자본주의의 모든 사회․ 경제적 세력을 완전히 폐지할 때까지 통제하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기구의 활동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웠고 믿는 결정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계속되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강화하는 조건 위에서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해 그 과정을 나아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농업 문제

 

농업 문제는 분명히 혁명 이후 제기된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 사이의 관계라는 복잡한 문제의 본질적 요소 중의 하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가 권력을 잡은 가장 유리한 조건 아래인 서구에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과업의 수천의 복잡한 어려움이라는 최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전,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매우 올바르게 지적했다.

이는 그 기본적인 노선에서조차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안이 아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요소인 토지의 완전한국유화와 농업과 산업의 융합을 제기하는 정도로 제한하려 한다.

첫 번째(완전한 국유화)는 대규모 생산수단의 집산화와 함께 권력 장악 이후 즉각 수행될 수 있는 완벽하게 실현가능한 법적 조치이다. 반면 두 번째(농업과 산업의 융합)는 세계적 사회주의 조직의 결과로서, 경제를 통한 과정의 산물이다. 이 둘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국유화가 농업과 산업의 융합을 조건지우며 결과적으로 농업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시간적으로 교차할 수 있을 뿐인 행위이다. 토지의 국유화나 토지의 사적 소유의 철폐는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 조치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며 부르주아 민주 혁명의 마지막 행위이다.

토지의 평등한 향유와 함께 혁명의 가장 극단적인 혁명 단계를 구성하지만, 레닌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가장 완벽한 기초이며 동시에 사회주의로의 도정을 위한 가장 충분한 기초인 농업체이다.” 볼셰비키의 농업 강령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러시아 혁명」)의 약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첫 째, 그녀는 “농민에 의한 토지의 즉각적 장악과 분배”가 사회주의 사회와 공통점이 전혀 없지만(우리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불가피한 이행단계를 나타냄을 인식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이것이 “대규모 토지 소유권을 분쇄하고 농민과 혁명 정부를 즉각적으로 묶는 두 가지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짧고, 단순하며 명확한 공식이었다”고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정부를 강화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그것은 훌륭한 전술적 조치였다”고 인정하지만. 두 번째로 그녀는 「사회주의 혁명당」으로부터 볼셰비키가 취한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가 토지의 사적 소유라는 통합적 억압의 기초 위에서 적용되었음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것을 대토지 소유로부터 수많은 소규모 개별 농민 소유로서의 경로로 보았다. 토지 분할이 대규모 기술적으로 발전된 착취로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로서의 농업 경제의 주요 요소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소브코제스”(sovkezes)의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가 그 자신의 농업 강령을 도출하는데 분명히 더 나아간 조치로 연결되었던 토지의 통합적몰수에 대해서 아무 말 없었다는 것을 내친걸음에 말하도록 하자. 그녀는 다만 대규모나 중규모 토지의 국유만을 예측했을 뿐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룩셈부르크는 토지 분할이 사라지지 않고 “농민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계급 적대를 촉진시킬 것이다”는 사실을 비난함으로써 토지 분할의 부정적 측면(필요악)을 드러내는데 스스로를 가두었다. 물론 농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 농민을 끌어냄으로써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농촌에서의 그 승리를 보증하는 사회적 전제를 형성한 계급투쟁의 발전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의심할 여지없이 농업 문제의 이러한 정치적 국면과, 정치적 지배와 대규모 공업의 소유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기본적 역할을 과소평가 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극도로 복잡한 상황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농의 극도의 분산 때문에 국유화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우리는 토지의 집단화가 반드시 그에 부속된 생산 수단의 국유로 나아가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러시아에서 92%가 농민의 사적 소유로 남았고, 8%만이 생산 수단의 국유화가 되었다. 반대로 산업에서는 철도의 97%, 중공업의 99%를 포함하여 생산력의 89%가 집단화되었다. (1925년 상황)

농업 기구가 전체 장비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농민 대중을 전제로 할 때 자본주의 관계의 발전을 위한 유리한 기반을 형성했다. 그리고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을 유지하고 재흡수하는 중심적 방법은 대규모 공업화된 농업의 조직화뿐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는 공업화의 보편적 문제에 종속되었고, 이어서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원조라는 문제에 종속되었다. 죽느냐 아니면 소농에게 도구와 소비재를 공급하느냐라는 곤경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가능한 한 농업 생산과 공업 생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는 국제 혁명 투쟁에 연결시킨다는 전망을 가지고 도시와 농촌에서 계급투쟁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집단적 생산을 만들려는 전제조건으로 소규모 생산을 제거하려고도 했지만, 농민 자본가에 맞서는 투쟁을 하기 위해 소농과 동맹을 맺었다. 그것은 분명히 농촌 마을에 관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여된 모순적 과업이었다.

레닌에게 이러한 동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부분이 일어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농민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의 독자적 정책을 발전시켜 그들을 집합적 노동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무능력과 경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주저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전제조건이었다. 소생산자를 “폐지”시키는 것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분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지만, 레닌이 1918년에 말한 것처럼 “토지의 평등한 향유가 소생산자가 관련된 한 가장 높은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린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이상적” 자본주의를 향한 진전을 돕는 것이고, 농민은 그들 스스로 이 테제의 결함을 느끼고 집합적 경작을 넘어설 필요를 깨달아야 한다.” 3년 동안의 끔찍한 내전 기간 동안 실험적 방법이 러시아 농민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다주지 못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백군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토지를 방어하도록 농민이 도왔다면, 이는 그들의 경제적 궁핍의 대가였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치명적인 징발이었다.

그리고 「신경제정책」은 보다 정상적인 경험의 영역을 재구축하고, “자유와 자본주의”를 되찾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물품세로 “쿨락이 그 전에 밀어붙일 수 없었던 곳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고 레닌이 말하도록 한, 농업 자본가의 편을 든, 거대한 몸값이었다. 경제기구(국가 조직과 당)에 대한 재생하는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중도주의의 지도력 아래에서, 중농은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고 빈농과 프롤레타리아트와 단절하도록 고무되었다. 완벽한 논리적인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 프롤레타리아 봉기 10년 후 부르주아 요소를 향한 세력 균형의 이동은 그 실현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예치치 못한 착취 수준에 의존한, 5개년 계획의 도입과 맞아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관계라는 복잡한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 실패는 오토 바우어나 카우츠키 아류가 주장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혁명 만이 의제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고, 경제적, 정치적 승리를 보증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행정의 원칙으로 볼셰비키가 스스로를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농업 문제의 중요성을 드러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획득에 공헌했다. 이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2차 대회의 테제가 더 이상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고, 특히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가 재검토되어야하고 그 의미에서 제한적임을 덧붙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파리 코뮨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 영감을 얻고 그 후 레닌이 발전시킨 것에서 맑스주의자는 사회 진화의 필요하고 진보적 형식으로서의 중앙집권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 중앙집권주의 사이의 명확한 구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첫 번째 중앙집권주의에 기초했지만, 두 번째의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주의의 파괴를 위해 싸웠다. 그들이 과학적으로 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반박했던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러시아 혁명은 죽어 묻혔던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논쟁 속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경제적․ 사회적 중앙집권주의가 폐지되지 않고 노동 대중에 의한 “자주적 결정”의 테제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서 소련의 반혁명적 진화의 기원을 보는 수많은 비판들이 있다. 이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의식이 이행기를 훌쩍 넘어서야 했다는 것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동시에 가치, 시장, 임금 차이, 기타 자본주의의 흔적에 대한 즉각적 억압에 대한 요구가 있다. 다른 말로, 절대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중앙집권주의의 두 가지 의미 사이의 혼돈이 있고, 이행기를 항해하는 방식으로 정교하든 하지 않든 간에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전형적인 무정부주의로의 회귀가 있다. 권위의 원칙에 자율성의 원칙으로 반대하는 것은 추상이다. 1873년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 진화와 생산의 과정에 연결된 두 가지 매우 상대적 용어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제적정치적 중앙집권주의

 

원시 공산주의로부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로 가다가, 문명화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는” 진화에 근거해서, 자본주의적 “카르텔주의”와 “트러스트화”는 원시적인 사회적 자율성을 밀쳐버리고, 권위가 지속되지만 “생산조건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한” 엄격한 한계를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준비될지라도 실제로는 “무정부적인” 조직형식인 “사물의 관리”를 위한 기초를 놓는다(엥겔스). 본질적인 것은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단계를 뛰어넘으려거나, 이름만 바꿈으로서 집권주의의 본질과 권위의 원칙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보려는 것이 아니다. 보기를 들어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분석이 예상하는 사회적 실재와 이론적 편의에 근거한 분석을 피하지 않았다. (앞에 인용한 그들의 연구를 참조할 것)

러시아 경험에 있어서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그들의 비판은 경제에 대한 관료적 독재를 발생시킨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만 유독 관련시킨 사실에 의해 “더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 뒤의 신경제정책은 폭넓은 경제적 “분권주의”를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가 “최고 경제위원회”로 시장을 대체하여 시장을 억압하기를 원했고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독재로 전환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논쟁거리다. 따라서 네덜란드 동지들에게는 내전의 필요성의 결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극도로 집권화되고 단순화된 경제적, 정치적 기구를 부과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적 계급을 근절시켰지만 독재의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보였다. 불행하게도 네덜란드 동지들은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이 문제의 정치적 측면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집권주의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을 거부하고 뛰어넘음으로써 그들은 말의 의미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본 것은 실천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관심일 뿐인 이행기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였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의 모든 흐름이 흐르지만 생산을 지시하거나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를 결정할 권리가 없는 경제적 중심에 기초한 일반적 사회회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롭고 동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서 경제생활의 통제는 인물이나 기구로부터 나오지 않고 경제생활의 실질적 경로의 공적인 등록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생산이 재생산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다른 말로 “경제생활은 평균 사회적 노동시간을 통해 스스로 통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화로는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전혀 진전이 없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기된 시급한 문제는 공산주의 사회를 규제하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지들이 즉각적 해법, 즉 억압적 형식만 취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집권주의가 아니라 “일반 경제법칙”을 통해 생산을 조정하는 기업 조직에게 관리를 이전하는 것을 제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게 착취의 폐지(따라서 계급의 폐지)는 사회 행정에의 대중의 끊임없는 참여와 성장을 포함하는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처분할 수 있는 기업 위원회의 권리를 포함한다는 전제 하에, 생산 수단의 집단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자신의 모순을 포함하는 정식화라는 사실은 별개로 해도, 사회 집단 사이의 제한적이고 분산된 집단화(주주들의 사회는 집단화의 부분적 형식이다)로 통합적 집단화(특정인이 아닌 모든 사람의 재산)를 반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몰수라는 또 하나의 법적 해결에 대한 법적 해결(기업의 처분권)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부르주아지의 몰수는 단순히 사회 변혁의 초기 조건이며 (완전한 집단화가 즉각적으로 실현가능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은 혁명 전이라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정적 방향타를 쥐게하는 정치적 기반 위에서 계속될 것이다.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의 분석은 틀림없이 맑스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이 사라질 때까지, 즉, 세계 자본주의가 사라질 때까지 국가의 “천벌”을 견디도록 강제된다는 기본적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필요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이 아직 잠정적으로 집권화와 혼합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억압기구의 파괴 이후에 일어나고 노동대중의 문화수준의 발전과 책임지는 능력과 반드시 반대되지는 않으면서도 그렇다. 역사적, 정치적 조건의 실질적 맥락에서 이러한 발전에 대한 해법을 찾는 대신에,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은 유토피아적이고 퇴행적인, “부르주아 권리”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공식화에서 찾으려 했다. 더 나아가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 행정의 복잡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준비될 수 없다면(그리고 이러한 실재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프롤레타리아트 뿐만 아니라 가장 선진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용된다) 공장과 생산의 “처분권”의 정확한 사용은 무엇인가?

러시아 노동자는 효과적으로 공장을 그들 수중에 넣었고, 관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권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서구 자본주의를 배울 때까지 그리고 영국 노동자나 독일 노동자의 문화를 습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1917년의 러시아 노동자보다 서구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 행정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서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폐해 많은 분위기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를, 특히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만 온전하게 나타나는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는 “통합적” 사회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회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은 당이었고, 당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말로 (당은 완전히 효과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혁명 전 뿐만 아니라 혁명 후(무엇보다 후)에 사회 투쟁의 불꽃 속에서 해법을 정교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지 않고 이러한 거대한 과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대중의 능동적이고 자라나는 협력 없이는 적들의 먹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행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초석이다. 그러나 역사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그들, 예속 없이, 상사 없이, 회계 없이는 할 수 없는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은 없을 것이다. (레닌, 「국가와 혁명」)

 

맑스주의 분석에서 이행기와 국가의 이중성

 

이행기 국가를 다루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국가가 사회의 계급 분화에 기원하고 있음을 상기시킨 바 있다. 원시 공산주의에서는 국가가 없었다. 국가는 계급 착취를 일으키는 주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 구체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기본적 성격을 바꿀 수 없다. 다시 말해 억압적이고 강제적이며 부패하는 유기체로서의 국가이기를 멈출 수 없다. 역사적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다. 노예 주인의 도구가 되는 대신 봉건 지주,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도구가 되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보존하는 완벽한 도구이다. 이것은 자신의 국가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착취 계급의 부상과 함께 사회에서 발전하는 새로운 특권에 의해 위협받는다. 뒤따르는 정치혁명은 이미 진행된 경제 구조의 변혁의 법적 결과였고 낡은 계급을 지배하는 새로운 착취 형식의 승리였다. 이것은 옛 체제 내에서 세워지고 공고화된 물질적 조건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혁명 계급이 그 자신의 생산 양식을 조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불신의 기반 없이 적응하고 완전하게 하려했던 이유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지배하기 위해 역사에서 최초이며, 그 국가가 역사에서 세워진 모든 억압 수단의 가장 압축적 형식인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더욱 그렇다. 부르주아지와 국가 사이에는 적대가 없고, 밀접하고 파괴 불가능한 연결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대는 국경에 제지되지 않는다. 그 뿌리가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있기 때문에 국경도 넘는다.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창설로 지배 계급과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 수정된다.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 위에 세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도구임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는 물질적 기반이 부르주아 사회 안에 놓였던 사회적 특권의 보존을 목표로 하지 않고 모든 특권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새로운 국가는 소수를 지배하는 다수라는 새로운 지배 관계, 즉 새로운 법적 관계(집합적 소유)를 표현한다. 반면에 새로운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의 영향 아래 남아 있기 때문에 (혁명에서의 동시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직 “부르주아 권리”의 대표이다. 이는 아직 사회 경제적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 수중에 있다. 여기에 이행기 국가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착취 계급에 맞서는 무기로서 그 “강력한” 측면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착취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폐절하는 유기체로서 “약한” 측면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새로운 국가는 본질적으로, 정의 그대로 자본주의 특권을 끌어내는 축의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 어떠한 적대도 없지만, 프롤레타리아트와 이행기 국가 사이에는 적대가 생겨나는 이유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는 이행기 국가가 매우 쉽게 국제 계급투쟁에서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부정적 효과가 있다. 확립된 사회계급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이행기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성격을 유지할 때라도 그렇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의 활동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통제를 행사하고 자신의 구체적 이해를 방어해야하는 당의 계급정치와 대중조직(노동조합, 평의회 등)이라는 경계하는 존재를 통해 잠재적 모순의 발전에 맞서 버틸 수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그들을 발생시킨 필요성, 다시 말해 오직 계급투쟁이 사라질 때에만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전적으로 맑스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고무된다. 왜냐하면 이행기 국가 내의 프롤레타리아 “해독제”의 의미는 이미 우리가 지적한 대로 맑스와 엥겔스 뿐만 아니라 레닌이 방어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의 능동적 존재는 노동자에 봉사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유지하고 노동자에 적대로 되돌리는 것을 막는 조건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모순적 이중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행기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반면에 몇몇 동지들은 이 시기에 노동자 조직과 국가 사이에는 오직 동일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기를 들어 헤놀트(Hennault)동지의 “러시아 국가의 본질과 진화”, 「빌랑」, 1121쪽) 네덜란드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 “노동시간은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의 척도이고 모든 분배는 모든 ”정치“의 밖에 있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에서 어떤 기능도 없으며 삶의 조건의 개량을 위한 투쟁은 끝이 날 것이다.”(그들의 글, 115쪽)

중도주의 또한 소비에트 국가가 노동자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제기한 어떠한 요구도 “그들의” 국가에 대한 적대의 행위가 될 수 있고, 국가기제에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가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앞에서의 고려지점에 근거해서 소비에트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성격을 유지했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실재와 전혀 공통점도 없고 소련의 방어를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거부하는 미묘한 구별점인가? 아니다. 이러한 명제는 무엇보다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유물론의 견해로부터 정당화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국가 사이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국가의 성격과 기능 사이의 어떠한 혼동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의해 러시아 혁명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도출한 결론이 그 전제에서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국가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임을 보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료국가라고 말하고 러시아 국가가 역사에서 원천적으로 지배계급이고 새로운 생산양식과 착취와 연결된다고 발견한 것이 더 나은 것인가? 사실 그러한 설명은 맑스주의 유물론에 등을 돌리게 된다.

관료제가 어떤 사회체제의 기능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도구였지만, 그 스스로 착취계급으로 변환된 사회 계층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회 내에 막강한 관료제의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개인을 제외하면 생산에 작용하는 계급들과 혼합되지는 않았다. 「자본」에서 맑스는 인도의 식민화를 검토하면서, 관료제가 「동인도회사」의 외양으로 나타났음을 보였고, 동인도회사는 생산이 아닌 유통과의 경제적 연관을 가졌는데,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도시 자본주의의 편에서 행사했다고 말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계급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견지한다면 러시아 관료주의가 계급도 아니고 지배계급보다 못한 것인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바깥의 생산에 대한 어떠한 특수한 권리도 가지지 않고, 러시아에서의 집산화가 그 기본에서 아직 존재한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렇다. 러시아 관료주의가 사회적 노동의 상당부문을 소비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기생의 유형이지 계급 착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에서 사회관계가 노동자에 대한 거대한 착취를 나타내지만, 이는 집단이나 개인의 재산권의 행사로부터 나오지 않고 전체적인 경제·정치적 과정으로부터 나오고, 관료주의가 원인이 아니라 단지 표현이며, 우리 견해로는 이차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화는 무엇보다 러시아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적 세력의 추동력을 봉쇄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준 중도주의 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사회적 문맥의 독창성은 전례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놓여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세게 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존재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국가기구에 대한, 그리고 당 기구, 이어서 당 정치에 대한 비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압력의 비중에 따라 성장한다.

이러한 착취가 노동자로부터 약탈한 잉여노동으로부터 사는 관료적 계급의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대중 속에서 정치적·교육적 역할을 지속하기 보다는 스스로 국가에 통합되는 당에 대한 적들의 영향력을 통해서임을 설명할 필요는 있다. 트로츠키는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더욱더 당에 가해지는 압력의 계급적 성격과 부르주아 지식인, 소부르주아지, 쿨락, 그리고 당 관료주의로부터 가해지는 이러한 압력 사이의 연결고리에 주목했으며, 이러한 모든 세력을 통해 작동하는 세계 부르주아지의 압력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이 관료주의의 뿌리와 정치적 타락의 세균이 당과 국가의 상호침투의 사회 현상 뿐만 아니라 유리하지 않은 국제적 상황에서 추구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최고로 끌어올린 “전시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위한 타협이나 정상적인 체제의 표현이었던 「신경제정책」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바린(Souvarine)은 그의 책 「볼셰비즘에 대한 개관」("Apercu sur le bolshevisme")에서 당이 전체 국가기구 위에서 기계 같은 철권을 휘둘렀다고 주장하면서 당과 국가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역전시켰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떠한 미리 계획된 의도와 기획 없이, 보편적 문화 결핍, 지친 대중의 무관심, 그리고 혼란을 극복하려는 볼셰비키의 노력이라는 3중 효과를 통해, 수혜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체제의 변혁”(245쪽)이라고.

그러나 만일 혁명가들이 맑스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숙명주의, 즉 물질적 조건의 “미성숙”과 대중의 문화적 무능력으로부터 도출된 숙명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거부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역사적, 객관적 조건이 그 당시 존재했고, 지금도 세계적 규모에서 존재하는데, 이는 맑스주의 관점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유일한 타당한 기준이다.) 그들은 정치적 요소인 당, 즉 역사적 필요성의 수준에서 필수불가결한 도구인 당이라는 중심적 쟁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들은 또한 혁명에서 당 권위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은 독재적 형식임을 결론 내려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당 독재 사이의 되돌릴 수 없는 적대의 유형을 제기함으로써 다시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이든 식민지처럼 후진된 나라든 간에 당의 독재는 이행기의 불가피한 표현임을. 맑스주의자의 기본적 임무는 러시아 혁명의 거대한 경험에 기초해서 이러한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어떻게 세계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숙명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에 조그만 진전이라도 없다면, 문제의 엄청난 복잡성 속에서 연약한 혁명적 핵심의 고통스런 고립이라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된 본질적 문제는 당과 계급투쟁 사이의 관계이며 이러한 맥락 안에서 당의 조직화 양식과 그 내적 삶의 문제가 있다.

「빌랑」의 동지들이 당의 두 가지 활동에 대한 그들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옳다. 그들은 혁명 준비의 기본으로서 (볼셰비키당 역사가 보여주듯이) 당대의 분파투쟁과 대중조직 내의 투쟁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러한 활동 형식이 혁명 후 사라지는가, 급진적으로 변혁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 상황은 계급투쟁이 최소한도로 약화되지는 않지만 다른 형식으로 발전하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조직 방법이나 공식이라도 경향과 분파의 성장을 통해 당내에서의 반향으로부터 계급투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중도주의의 “단일주의(monolithism)” 같은 러시아의 트로츠키 반대파의 “모든 것을 희생한 통일”은 역사적 실재에 정면으로 대들었다. 반대로 분파의 인식은 매우 변증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긍정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빌랑」의 동지들은 몇몇 보석 같은 문구가 해법이 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아직 더 검토해야 할 것은 분파투쟁과 그에 따른 강령 사이의 적대가 어떻게 동질적인 지도력과 혁명 규율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같은 방식으로 노동조합조직 내의 분파의 자유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일당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를 우리는 바라보아야 한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