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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9
    정리(1)

정리

1. 잘살기위해

내가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잘산다 라는 말의 의미는

일반적인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닌,

 

마치 영토확장전쟁처럼 서로가 보유하는 것을 향해

공격하여 뺏고 빼앗기는 양상에서의 더 잘 살아남는것에 가깝다.

 

 

남의 역사를 일부 뺏어오면 그것이 국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반대로 남에게 역사의 일부를 뺏기면 국력의 약화가 된다는

그런 식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2. 동북공정의 주장

이 말을 한 의도는 대체 무엇이 옳으냐? 라는걸 알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1.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실 여부를 떠나, 역사라는걸 힘의 행사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사업 또는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학원의 대응을 (적어도 나는) 그러한 중국의 도발행위에 '힘'을 밀집해 대응하자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데 나는, 너에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힘의 행사에 힘으로만 대응하려는 것이 맘에 들지않는다는거다.

 

그건 역사라는 것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역사"를 "국가의 역사적 자원"이라는 것으로 물화시킨 후, 이러한 자원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물적 투쟁으로 변질시키려는 동북공정>이 정한 '게임의 룰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너는 역사의 본질이 대체 뭐냐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뭐..'역사의 본질'이라는 부담스러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로서의 역사,

차분히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화두로서의 역사,

이정도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가 어떤 역사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었는가?"

가 더 중요해진다고 본다.

 

 

어쩌면 그들의 주장대로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역사를 빼앗기고 있는 듯한 상황이니

그걸 막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도 자체가, "역사"라는 것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보기에 불쾌한 것이며, 설사 중국과의 역사적 투쟁이 필요하다 해도 현재 이들의 방식은 동북공정이 짜놓은 판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싫다는 것이다.

 

 

전략적으로도 나는 이러한 도발일수록

그들의 주장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욕망을 까발리는 방식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들이 조작된 역사를 내세우고 그것을 그들의 장점인 힘의 우위로 밀어붙이면 우리는 힘싸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며, 그들이 역사를 자원화하고 소유하려는 야욕을 불태우면, 그런 논쟁 자체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기들의 야욕을 위해 역사를 왜곡한다는 주장이

한국/중국의 경계가 아닌 상관없는 이들에게도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한국의 역사만이 아닌 역사라는 것 자체를 지키기 위한

진실된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것이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3. 우리라는 경계

우리는 2. 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이 정해놓은 민족/국가간의 '역사'라는 무형자원을 놓고 벌이는 투쟁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더불어, 한국인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도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심지어는 중국인이 들어도 설득력을 느낄수밖에 없을 만큼의 주장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우리"란 단어를 생각해 본다면,

무조건 중국에 대응해 한국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해줄 모든 이들이 되는게

효과적이라고 본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한국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컨데 과거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진실은

분명히 현재 중국인/한국인이 아니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관심이 현재의 논쟁을 종결시키는데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는 반드시 한국인이 아니어도 되며,

오히려 아니어야만 더 맞는말로 여겨지고, 더 효과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말을 한국인이라는 경계로 특정지으려 한다면, 오히려 아예 그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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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사업/문제제기에 대해 민족 대 민족의 문제로만 끌고들어가려는건 좀 우습지 않나 하는 거다.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방법론적인 문제에 앞서 문제의 해석부터 좀 삽질이 아닌가 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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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효과적인 허구

너의 말처럼 민족이란 실질적 효과를 갖는 허구일 수 있겠다. 애초부터 그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현재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대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특징들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민족'이란 개념의

너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국가', 특히 18세기 이후의

국민국가라 할수 있는 형태가 나오면서라고 알고 있다.

 

과거의 국가와 상당부분 단절한 근대적인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국가-국민의 결합력/종속력(또는 단결력)을 일정수준 이상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씨족, 부족 등의 개념에 비해

보다 초월적인 '민족'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전략을 채택한

많은 근대국가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누구에 의해 주입되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엔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가, 계몽가들에 의해

'우리'의 결속을 다져 개화를 이루고 독립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의 개념이 한국인들에게 결정적으로 각인되었으며, 이후 지배에의 유용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라 본다.

 

 

우리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은 이렇듯 애초에는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그 개념이) 발견(?)되고 이용되며, 결국은 특정 집단 전체를 아우르고 단결을 도모하는 거대한 생각덩어리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라는 말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이성적 논의가 힘든 대상이다.

기본적으로 이성보단 감성으로 받아들이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논의가 이루어지기보단,

한국인이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근본적 정신구조'쯤으로

여겨지도록 설계되어있다는 거다.

 

 

아무튼 ㅅㅂ.

내가 말하고 싶은건 민족이란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제창된 거고,

다수가 고민없이 받아들이기 쉽게 설계되었으며,

 

그 결과로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개념을 이용해 국민들을 더 잘 단결시키고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민들도 뜨거운 뭔가를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럴수록 이 '민족'이란 개념은

이에 대한 의문이나 논의가 필요없는 (면제되는)

그러한 시도에 대한 거부감을 들게하는

어떤 성역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개념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해지고,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가 일상적이 된다면

내가 문제삼은 부분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개념의 유용성도 같이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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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족이란 개념을 강조할수록, 민족주의를 제창할수록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에

가슴이 복받쳐 오를수록, 한민족 또는 대한민국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타자화는 강력해진다는 점이다.

 

아니, 반대로 민족을 언급하는 각종 사회운동과 월드컵같은 스포츠행사 등을 통한 타자화는 우리의 '복받쳐오르는 감동'을 밀려오게 하고, 이를 통해 각종 층위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라 뒤덮혀지고, 해결되어야만 하는 모순들이 여론의 층위로 떠오르려는 시도를 깔아뭉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제외한 이들을 타자화시켜야만 하는가?

 

생존을 위해 경쟁은 어쩔 수 없다 말하지만,

사실은 배제하기 위한 경쟁은 아닌가?

 

신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시장 논리라는 것도

아담스미스 등의 완전경쟁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쟁자를 더럽고 치사하게라도 배제시키는 과정을 변명하려는

알리바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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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너무 정리하지 말자.

 

너가 아무리 오래, 열심히 잘 쓰려고 해도

서로 곡해되는 부분은 항상 많을 거다.

 

약간 퀄리티가 떨어지는 다작의 공유가

(자기만의 기준으로) 잘 다듬어진 소작의 공유보단 낫지 않을까?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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