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맑스의 생태학적 가치분석*
존 벨라미 포스터**
서평
폴 버켓, [맑스와 자연: 좌파적·녹색주의적 시각]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최근 십년간 맑스에 대한 모든 비판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주의"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Aeschylus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Prometheus Bound 보낸 맑스의 찬사와 그리스 신화의 혁명적인 인물인 프로메테우스에게 맑스가 느낀 매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작업 중심에 "프로메테우스 모티프"가 자리하고 있다거나 이것이 그의 분석 전체에 있어 근본적으로 취약한 점이라는 비난이 현재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Leszek Kolakowski [맑스주의의 주요 흐름] Main Currents of Marxism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판이 1968년 폴란드에서 발행되었고 1978년 영국에 등장했다. 코와코프스키가 볼 때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은 (경제의 대척점인) 인간 존재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관심부족이다. 세계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는 육체적 인간의
존재는 부재이다. 인간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존재로 정의된다; 인간존재의
물리적인 한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즉, 건강하거나 병들고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젊거나 나이들었거나; 유전적으로 동등하지 못하다거나; 그리고 이 모든 환경이
계급구분과 무관하게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계획에 결부된다는 사실에 무관심한 것이다...맑스는 인간이 신체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제약받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맬더스에
대한 논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인구란 지구의 공간과 자연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절대적 과잉인구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인구학은
독립적인 세력이 아니고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한 요인이므로 그에 걸맞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체와 육체적 사망, 성과 공격성, 지리학과 인간의
번성 같은 것들을 맑스는 순수하게 사회적인 실재로 변모시킴으로써 그의
유토피아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들을 가장 소홀히 취급했다.주1)
이 성토의 본질상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코와코프스키의 비난을 맑스와 생태학에 대해 논평하는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비난은 즉시 앤서니 기든스의 Anthony Giddens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에서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1981) 반복된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계급체계로 표현되는 인간의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의 전환에 대한 맑스의 관심이 자연의 착취로 확장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적 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 이후로 테드 벤튼, 라이너 그룬트만, 존 클락, 마이클 뢰비 Ted Benton, Reiner Grundmann, John Clark, and Michael Löwy 같은 다양한 좌파생태주의사상가들이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자연에 대한 무관심을 각자의 표현으로 덧붙임으로써 이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주2)
(코와코프스키가 루크레티우스, 브루노, 괴테의 Lucretius, Bruno, and Goethe 방식으로 맑스를 보다 확고히 얽어매고자 했던--맑스가 그리스 신화로부터 모티프를 차용한 것으로 강제로 떠넘김으로써 성립된) 이 비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그 자체로 분석되지 못하는) 신화적 상징을 진정한 비판인 양 효과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주3) 맑스가 자연의 한계를 고려에 넣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심지어 코와코프스키가 가장 강력한 논거라고 생각했을 맑스의 맬더스 비판에서도 이 근거없음이 드러난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구학적 요인이나 지구에서 인류가 확장하는 데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과잉인구"라는 용어를 무색하게 만든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맬더스였다--왜냐하면 맬더스의 인구와 식량공급에 대한 엄격한 평형모델에서 과잉인구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의 논리가 전체로서의 지구의 수용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과잉인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식량공급에 대한 인구압이 애초부터 인간의 조건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주4)
맑스가 생, 사,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단순 무시했다는 주장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3권으로 이루어진 [자본] Capital 중 한 권에 들어있는 노동일에 대한 투쟁에 관한 맑스의 처방 중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건강에 대한 절대적인 착취나 "자살에 대한 푸세의 의견"에 "Peuchet on Suicide" 나타난 부모자식 간에 그리고 배우자 간에 벌어지는 학대, 낙태, 여성착취에 대한 맑스의 언급 중 (생, 사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세부적인 논의에 대해서만 고려하면 된다.주5)
중요한 것은 맑스가 단선적인 프로메테우스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코와코프스키의 주장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생태학 영역이지만 그 영역에서 우리가 가장 결정적인 반증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폴 버켓의 권위 있는 책 [맑스와 자연: 적녹의 입장]은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두드러진다. 이 책은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잘못된 평가가 가장 확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역에--그의 성숙한 정치경제학 비판--초점을 맞추고 있다.
[맑스와 자연]은 3부로 나누어진다. "자연과 사적유물론"이라는 제하의 1부는 맑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과 생산의 자연적 기초를 다루고 있다. "자연과 자본주의"라는 제하의 2부는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을 체계적으로 평가한다. "자연과 공산주의"라는 제하의 3부에서는 이 분석에 근거해서 맑스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해석"에 대한 진전된 비판을 제시함과 동시에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의 생태적인 측면도 드러낸다.
버켓은 맑스에게 자연은--노동이나 노동력과 함께--부를 창출하는 원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정립하면서 이 책의 1부를 시작한다. 진정한 부는 사용가치를 구성하는데 사용가치는 자연의 도움으로만 생산되는 것이다. 상품의 구성요소로 변모되는 모든 물적 사용가치는 자연자원에 근거하고 있고 또한 자연자원 없이는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자연의 "보편적 신진대사"는 생산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위적 생산은 원칙적으로 노동력의 조직에 의존하지만 노동력 자체는 그 본성상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은 오직 자연이 (생기있는 자연력으로서 또는 전환된 에너지로서) 물질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맑스는 단순한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몇몇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맑스가 자연적 조건과 한계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맑스는 그러한 자연적 조건을 통해 인위적 생산(human production)에 대한 분석을 구축했으며 심지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위적 생산에 대한 자연초월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그러나 맑스가 인위적 생산의 자연적 기초와 인위적 생산이 자연적 조건에 의존함을 주장했지만, 인위적 생산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생산이며 공진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고 매번 지적함으로써 버켓이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주의적" 접근이라 부른 것을 피해간다. 그러므로 인위적 생산 일부는 (오직 일부만) 그 자연적 기반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사회적, 자연적 조건의 소외이다. 맑스는 "생기있고 활동적인 인류와, 인간의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교환 및 그 결과 나타나는 설명이 필요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자연의 전유라는 자연적·비유기적 조건의 통합(unity)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존재의 비유기적 조건과 활동적인 존재 사이의 분리 즉,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 속에만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 분리"주6)라고 기록하고 있다. 버켓의 주장대로 맑스가 일면적 "자연주의자"이거나 일면적 "사회구성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일반 개념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처방은 철저하게 자연과 (자연의 일부로 남아있는) 인간사회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관계된다. 인간의 자유와 자기창조는 실재이지만 특정 둘레, 자연조건과 자연법칙의 도전이라는 테두리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실재관은 맑스의 자본주의 사회 비판을 지배했을 뿐더러 미래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이해를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이 모든 통찰에도 불구하고 버켓의 책 1부는 난해하다. 이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쟁점에 관한 논의가 워낙 복잡할 뿐 아니라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버켓은 (맑스의 방법을 따라) 생산을 그 역사적인 형태와 분리시켜,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도 분리시켜 일반적인 수준에서 다룬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과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에 대한 내용을 2부에서 다루게 된다. 버켓 자신만의 새로운 맑스 해석이 들어있는 2부는 이 책의 핵심이다--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논의가 담긴 3부가 2부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2부에서 버켓의 책은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맑스의 가치분석 및 사회관계로서의 자본 비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역사적으로 보다 특수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2부는 토지와 노동자의 분리와 같이 노동자들을 생산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본주의를 (특히 산업자본주의)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은 그러므로 노동의 소외 및 자연의 소외 증가를 의미한다--맑스가 1844년 일찌기 깨달은 것처럼 버켓은 맑스의 정치생태학에 대한 비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어 왔던 내용, 즉 자연은 자연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노동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본은 자연을 가치가 결여된 존재로 취급한다는 사실 같은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의 "무상 전유"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맑스와 노동가치이론을 자연의 내재적 가치나 자연의 저하에 따른 실질적인 사회적 비용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은 이 점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데, 자본은 체계 속에서 자연이 생산한 것을 "자연이 준 공짜 선물"로 이해해왔음과 동시에 자본이 자연의 사용가치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자연이 부의 창출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며 또한 궁극적인 부의 원천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맑스의 분석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독점적 임차에 근거한 화폐가치로서의 자연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본주의는 체계적으로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평가절하하고 생태적 문제를 점점 키우는 것이다.
버켓의 접근이 지니는 힘은 맑스가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이론의 옹호자였을 뿐 아니라 반대자이기도 했다는 점을--이 때 맑스가 자본주의 하에서 어떤 다른 가치법칙을 정식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자본의 자치법칙 자체를 극복하는 방안을 추구했다는 의미에서--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분석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으로 인식함으로써 맑스는 가치법칙이 작용하게 하는 협소한 기준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켓은 맑스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태위기가 두가지 형식을 취한다고 설명한다: "(1) 자본축적의 위기, 자본의 물적 필요와 원료생산의 자연조건 사이의 불균형에 기인; (2) 인간-사회발전의 질적인 면에 찾아오는 보다 일반적인 위기, 도시와 시골이라는 자본주의적 산업분할에서 기인하는 물질과 생명력의 순환 방해에서 기인"(107). 두가지 위기 중 첫 번째 위기는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상품의 흐름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도 증가시키는 자본의 경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 노동력은 경제성을 보다 강화시킨 방식으로 투입된다. "생산성 증대는 추상노동의 각 시간이 이제 보다 많은 양의 사용가치와 물적 필요조건을 처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10). 이 경향은 생산과정에 투입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과 에너지의 사용가능성에 일시적인 문제를 발생시켜 자본주의 내에 보존문제를 일으키지만, 이 체계의 운동법칙은 보존에 대한 진정한 생태적 접근을 반대한다.
보다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맑스를 분석함에 있어 에 더 중요한 것은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도시와 시골의 분리가 가져오는 생태적 모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생태적 비판이다. 맑스는 토양영양순환의 파괴--토양파괴와 도시의 오염에서 분명히 드러나는--에 기인하는 인간사회와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불균형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 버켓은 맑스가 생태문제를 농업(시골)에만 관련해 다루며 산업(도시)에 관련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에 논박하기 위해 생태위기에 대한 맑스의 변증법적 이해를 강조한다.주7)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환경위기가 도출된다는 맑스의 인식은 "환경적 측면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비판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반복되는 주제"라는 버켓의 주장에 근거를 제공해준다(126).
"자연과 공산주의"에 관한 3부에서 버켓은 자신이 맑스의 생태 분석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해석"이라 부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박한다. 버켓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역사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를 단순한 생산성과 풍요를 통해--즉, 양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해석한다고 한다. 예를들면 알렉 노브는 Alec Nove 자본주의가 맑스의 관점에 나타난 풍요의 세계를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의 문제는 '해결되어' 왔고" 미래에 나타날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는 "부족한 자원의 분배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생태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는 맑스에게서 등장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노브의 주장이다.주8) 그러나 맑스가 생산의 양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예를들면 그는 자본주의는 농업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질적 문제도--인간노동 뿐 아니라 자연의 소외에 근거한 사회 즉,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불균형--크게 강조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다(164). 물론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인간 공동체의 소외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소외라는 이중적인 소외와--협소한 착취적 형태를 통한 생산과 부의 창출의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버켓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맑스 사상의 생태적 측면(과 여기서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이라고 언급되는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춤으로써 버켓은--광범위한 자연에 대한 몇 안되는 정당한 분석 중 하나인--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진정하며 심도깊은 해석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과거의 해석들은 일반적으로 순수한 양적 문제에 과도하게 경도되었다. 그러나 버켓은 그와 같은 변환이 필연적으로 연계되는 사회적, 생태적 신진대사 전체에 질적 혁명에 대해 묘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사상가들이 사회주의혁명을 임박한 것으로 보았던 맑스가 그러한 변환을 야기하고/동인이 되는 생태적 모순에는 직접적인 강조점을 상대적으로 적게 두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의해 오도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환경에 대한 고려는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필수가 아니라고 가정된다(129; 199).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과는 별도인 사회주의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할 때 맑스는 항상 생태적 요소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 자유 및 공동체의 필요와 지속가능성의 원리를 조화시키도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맑스에세 공산주의의 구성은 버켓의 말대로--사적 재산의 통치 하에서 가정되는 왜곡된 형태와 전혀 별개인--"자연의 진정한 사회화를 위한 투쟁"이었다(214).
맑스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Grundrisse 자연(혹은 토양)은 본래 "생산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논의한다. 자본주의는 이 본래적 통일을 파괴하여 자연과 생산에 필요한 매개자로 (비록 소외된 형태이지만)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이 가진 풍요로운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자연과의 그 본질적 통일성을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생산의 사회화가 필수적이다: "진정한 사회 공동체"의 발전이 필요하다. 버켓의 맺음말을 보자.
만일 사람들이 자연적 존재로서 발전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사회적 존재로 더 발전해야만 하며 생산의 자연적 조건의 명백한 사회화를
성취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적 필요를 극복할 수 없다--우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무매개적인
자연으로 도피함으로써 인위적 생산의 의식적, 사회적, 누적적 특징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인위적 생산의 발전은 그 자체로의 자연에 의해 더이상
선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조직의 통제자가 되어야만 한다(257).
버켓이 볼 때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의 중요성은 하나의 모순의 두 차원인 자연의 소외, 인위적 생산의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사회 자체의 혁명적 변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을 밝혀낸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맑스의 저작에 대한 어떤 분석도 단견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맑스주의라기보다는 부르주아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의 이상으로 특징되는 기계적 프로메테우스주의일 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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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Monthly Review vol. 50, no. 2, September 2000.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900jbf.htm
BOOK REVIEW
Paul Burkett,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45, hardcover
*** 존 벨라미 포스터는(John Bellamy Foster) Monthly Review Press에서 출판된 책 [맑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 및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국역-김현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1]의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and The Vulnerable Planet 저자이다.
주
원주
1) Leszek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pp. 412-414.
2) Anthony Giddens,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 pp. 59-60[국역-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출판, 1991]; Ted Benton, “Marxism and Natural Limits,” New Left Review, no. 178 (November-December 1989, p. 82[국역-추선영 옮김, "맑스주의와 자연의 한계-생태주의적 비판과 재구성", 읽을꺼리 6호, 2000]; Reiner Grundmann, Marxism and Ec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p. 52[국역-박만준, 박준건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 동녘, 1995]; Michael Löwy, “For a Critical Marxism,” Against the Current, vol. 12, no. 5 (November-December 1997), pp. 33-34.
3) 로마제국 시대에 그리고 맑스가 이해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기술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계몽주의 및 종교비판과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즉, 일반적인 혁명의식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다). Walt Sheasby, “Anti-Prometheus, Post-Marx: The Real and the Myth in Green Theory,” Organization & Environment, vol. 12, no. 1 (March 1999), pp. 5-44 를 참고하라.
4) John Bellamy Foster, “Malthus' Essay on Population at Age 200,” Monthly Review, vol. 50, no. 7 (December 1998), pp. 1-18 and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chapter 3을 참고하라.
5) Karl Marx, Capital, vol. 1 (New York: Vintage, 1976), pp. 389-411[국역-김수행 옮김, [자본론]I-III, 비봉출판사, 1989], and “Peuchet on Suicide,” in Eric A. Plaut and Kevin Anderson, eds., Marx on Suicid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9), pp. 45, 53-54, 57-58. See also the excellent introductory essay by Kevin Anderson.
6) Karl Marx, Grundrisse (New York: Vintage, 1973), p. 489[국역-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비판요강], 백의, 2000].
7) John Bellamy Foster, “Marx's Theory of Metabolic Rift: Classical Foundations for Environmental Sociolog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105, no. 2 (September 1999), pp. 366-405, and Marx's Ecology, chapter 5를 참고하라.
8) Alec Nove, “Socialism,” in John Eatwell, Murray Milgate, and Peter Newman, eds.,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 vol. 4 (New York: Stockton, 1987), p.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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