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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회적 의료인가?*
매튜 R. 앤더슨, 래니 스미스, 빅터 W. 지델
지난 20년동안 보건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기업위주의 의제가 급속히 확산되어왔다. 미국에서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접근체계로 이동하기보다는 진료서비스에의 접근성이나 질적 측면은 점점 보험산업에 주도권을 빼앗겨왔다. 환자들은 이제 "고객"이며 진료서비스는 "생산라인"이 되었다. 요즘은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지원을 받는 연구보다 제약산업의 지원을 받는 연구가 더 많아졌다; 제약업계의 돈은 최고의 연구자들의 봉급을 지불하며 국가적 연구의제 설정에 간여하는 것이다. 진료하는 사람들과 환자들은 모두 (종종 교육으로 위장하고) 두배의 효과를 가지는 값비싼 약 판매의 촉진을 위한 정교한 광고공세에 시달린다. 보건의료분야에 "시장합리성"을 도입하는 일은 보건의료비용 억제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일인당 의료비를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27위를 기록한 신생아의 기대수명 같은 여러 보건 지표에서 나쁜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기업적 의제가 도전받은 적은 없다. 그리고 비관주의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의료분야의 진보적 행동주의의 길고도 풍부한 역사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사는 (최소한) 19세기 초반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데 당시에는 사회, 질병, 의약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 연구--와 이 연구로부터 도출된 의료활동형태--는 "사회적 의료"로 알려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의료"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게 되는데 사회와 다양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이 용어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 속에는 특정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함축하고 있다:
1. 사회적, 경제적 조건은 건강, 질병, 의료활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2. 사람들의 건강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다.
3.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이러한 개념들의 기원 및 라틴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미국에서 이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탐구할 것이다. 짧은 지면상 사회적 의료에 대한 폭넓은 검토가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사회적 의료에 대한 역사적인 경험이 근대의 보건과 보건의료 내의 가장 까다로운 문제들 중 몇가지에 빛을 밝힐 방법을 제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건강과 질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비록 사회와 보건 사이의 연계를 지적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독일 의사 루돌프 비르효를 Rudolf Virchow 사회적 의료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비르효는 19세기의 위대한 병리학자 중 하나이며 세포수준에서의 질병의 이해에 대한 많은 기여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질병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848년 베를린의 왕립 차리트 병원(Royal Charite Hospital)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그는 프로시아의 어퍼 실레지아 지역(Prussian province of Upper Silesia)에서 발병한 티푸스(typhus)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빈곤, 교육 및 민주주의 부족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 전염병의 발전에 있어 핵심요소라고 규명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사회적 혼란기에 발생하는 "인공전염병"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게 된다:
인공전염병...은 사회의 탓이며 잘못된 문화의 산물이거나 전체 계급에
통용되지 않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 전염병들은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에
의해 생산된 결함의 지표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급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G. Rosen, From Medical Police to Social
Medicine [New York: Science History Publications, 1974]에서 재인용.)
에이즈의 성행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러한 단어들은 예언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불평등과 혼란은 HIV 바이러스의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과 HIV보균자인 아이티 사람들의 개인사 사이의 연계는 폴 파머가 Paul Farmer 신랄하게 묘사한 바 있다. 에이즈와의 투쟁은 전염성 질병과의 싸움일 뿐 아니라 여성, 아동, 성노동자,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투쟁은 또한 세계의 극빈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전달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 최고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또한 최악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에이즈의 원인병원체를 신속하게 규명할 수 있고 그에 효과적으로 듣는 치료제를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근대생물의학의 기적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에서 에이즈는 이제 대체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직 완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서비스에 접근을 거부당하는 것은 만행이며--또한 근대 의료의 특징이기도 하다. 에이즈 치료제가 긴급히 필요한 6백만의 가난한 사람들 중 4십4만명만이 실제로 치료제를 구할 수 있었다. 왜 에이즈 환자들은 그들에게 그렇게도 절박하게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 해답은 사실 약값의 문제는 아니다. 에이즈 치료를 위한 "칵테일 요법"(the "cocktail" of AIDS)은 년간 250달러 정도만 가지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WTO를 통해 미국 정부는 빈국이 일반의약품을 생산하거나 구매할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적재산권"을 가진 제약회사의 권리가 공중보건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의료(organized medicine)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요인이 질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천천히 수용해왔다. 19세기 말 병리학과 미소생물학에서 이루어진 놀랄만한 진전은 사회적 요인이 질병의 원인으로는 유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생물학적, 사회적인 본성이 뒤얽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Georgi Plekhanov 그를 특징짓는 날카로운 방식으로 "소화의 법칙"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묘사했다:
일단 위장이 특정량의 음식을 공급받으면 위장소화의 일반법칙에 따라
작용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법칙들의 도움을 받아 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 날마다 당신의 위로 들어가는 반면 내 위에는 방문객이 전혀 없는지의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가? 이 법칙들이 왜 누구는 그렇게 많이 먹고 다른
사람은 굶어죽는지를 설명해주는가? 다른 영역, 다른 종류의 법칙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G. Plekhanov, 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
사회적 의료에 대한 초기의 열정 대부분은 계급간 사망률 차이가 두드러짐을 보여준 유럽 보건 통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건강과 질병은 부나 빈곤과 상관관계를 가진다. 불운하게도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며 보건에서의 불평등은 활발한 연구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공중보건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다.
빈곤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아마 그들은 더 나은 유전자나 더 나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균형이 사회개혁이나 혁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호지킨 림프종(Hodgkin's Lymphoma[옮긴이 주-림프조직의 원발성 악성종양])의 발견자로 알려진 토마스 호지킨과 Thomas Hodgkin 스페인 내전동안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으며 중국에서 혁명가들을 돕다가 죽은 캐나다 출신 외과의사 노먼 베쑨 Norman Bethune은 의사로서 활동가의 삶을 살아간 두가지 사례이다.
비르효는 또 다른 예이다. 질병이 사회적인 원인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면 그가 볼 때는 건강하지 못함에 대한 책임은 정치체계에 있었다. 그는 1848년 3월 베를린 폭동 당시 바리케이드 친 현장에 있었으며 훗날 베를린시의 고문(Berlin city counselor)으로, 독일급진진보당(the German Progressive Radical Party)의 건설자로, 프러시아와 독일 의회(Prussian and German parliaments)의 의원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친다. 1848년 혁명기에 그는 자신이 펴낸 잡지를[옮긴이 주-Medicinische Reform; 의료 개혁] 통해 "의료는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은 대규모의 의료일 뿐(politics nothing but medicine on a grand scale)"이라고 선언했다.
20세기에 라틴아메리카는 가장 활동적인 사회적 의료 센터를 발전시켰다. 그 멤버 중 가장 저명한 사람 두명은--살바도르 아옌데와 체 게바라 Salvador Allende and Che Guevara--보통 그들의 정치경력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공중보건의였던 아옌데는 칠레보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칠레의 질병과 고통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분석한 자료를 출간했다: 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 a. 그는 이 책에서 보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의 개선 뿐 아니라 공중위생, 주거, 영양, 노동조건 개선도 필요하다고 논의했다. 비르효의 주장을 따라 아옌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 누더기를 걸히고 자비없는 착취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칠레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연합(Popular Unity) 정부의 정치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된다. 아옌데는 1971년에서 1973년 미국이 조직학 쿠데타로 살해되기 전까지 인민연합 정부의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의사이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결국 혁명정부의 경제장관이 된다. 정치는 대규모의 의료일 뿐이라는 비르효의 견해를 따른다:
혁명의 과업은--아이들을 훈련시키고 돌보는 과업, 군대를 양성할 과업,
결실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매일 그 토지에 기대어 행복한 세월을 보낸
구(舊)부재지주의 토지분배과업--쿠바에서 이루어져 온 사회적 의료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David Deutschmann, ed., Che Guevara:
A Reader: Writings on Guerilla Strategy, Politics and Revolution
[New York, Ocean Press, 1997]에서 재인용)
살바도르 아옌데와 마찬가지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했다.
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번성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에 있어 풍부한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이들은 이론과 실천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프락시스를 praxis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다. 임상의료진은 공동체조직, 노조, 정치운동과 연계를 맺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억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또한 의학과 전염병학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질병을 고립된 상태나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상과 병리 사이에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인 "건강-질병 변증법(health-illness dialectic)"을 강조한다. 이 변증법은 질병의 독특한 유형을 만들고 질병을 설명하고 다루는 차별화된 의료 이데올로기를 생성하는 사회구조 내에 존재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1980년대 중앙아메리카의 반전운동과 연계되어 북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의료해방(liberation medicine)" 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최근 몇몇 개괄적 소논문의 출간과 뉴멕시코대학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를 다루는 웹싸이트 개설을 통해 부분적으로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 운동은 대체로 영어사용자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새로운--보다 민주적이고 덜 위계적인--보건의료 모델에 대한 열망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치가 대규모의 의료라면 또한 의료는 소규모의 정치임이 분명하다.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은 중요한 정치적 지류가 될 것이다. 사회적 의식을 지닌 의사들은 상이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진료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남아프리카의 의사였던 시드니 카르크와 에밀리 카르크와 Sidney and Emily Kark 부분적으로 연관된 운동인 공동체 의료의 발전이다. 1940년 남아프리카의 정치가 특별히 좋았던 시절 카르크 부부는 (지금은 크와줄루/나탈인) 나탈의 폴레라에(Pholela in Natal(now in KwaZulu/Natal))서 의료단위 모델을 구축했다. 의료센터는 카르크 부부가 우선 "사회적 의료의 실천"으로 묘사했지만 훗날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community oriented primary care)"로 재명명된 활동의 기초를 시험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기획은 1946년 더반(Durban)에서 8개의 의료센터와 주요 교육프로그램을 갖춘 가족과 공동체 보건 연구소(Institute of Family and Community Health)로 확장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정치풍토가 변하면서 1959년 연구소는 활동을 그치게 된다. 카르크 부부는 결국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이스라엘 사회적 의료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 모델은 사회적 의료 원칙에 근거한 혁신을 통합시켰다. 계획은 "공동체 진단"에서 시작한다. 전염병학적 작업에 근거해 폴레라의 세가지 공통적인 조건을 "나쁜 영양공급; 전염성 질병; 심리-사회적 문제"라고 규명했다. 이 세가지가 결합되어 "공동체 증후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아이들에게 우유나눠주기 프로그램, 공원에 나무심기 같은 비전통적 의료개입으로 이어졌다.
진료서비스는 (보통 공동체 출신인) 일차진료의사, 공동체 간호사, 보건교사로 구성된 팀에서 책임을 졌다. 이 팀은 그들이 친근하게 알고 지내는 이웃가정을 위해 진료했으며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가족인 "환자"로 받아들였다:
팀진료의 연속성은 가족과 그들의 의사 및 간호사 간에 개별적 관계를
이끌어냈다. 마을사람들이나 이웃을 진료했던 과거 가족주치의의 활동과
같은 종류의 활동이다. (S. L. Kark and G. W. Steuart, A Practice of
Social Medicine [Edinburgh: E&S Livingstone Ltd., 1962])
전통적인 가족주치의와는 다르게 진료팀은 개별 환자들이 처한 보다 넓은 사회적 맥학의 함의를 고려할 수 있고 개별 환자들에게서 새로운 진단이 나올 경우 전염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미국 고용창출국(U.S. 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은 미국 최초로 두 개의 공동체 의료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했다: 아라는 보스톤의 컬럼비아 포인트 반도(Boston’s Columbia Point peninsula)에 지어졌고 다른 하나는 미시시피의 마운드 베이유(Mound Bayou, Mississippi)에 건립되었다. 미시시피의 경우 잭 가이거가 Jack Geiger 설립한 것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카르크 부부와 함께 동료로서 일했던 인물이다. 의회는 결국 오늘날 미국 내의 "제3세계" 사람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공동체 의료센터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글의 저자 중 두명도(매트 앤더슨과 래니 스미스 Matt Anderson and Lanny Smith) 그와 같은 의료센터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공동체 의료운동의 여러 이상은 1978년 WHO가 주관한 일차의료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 on Primary Care)에서 출간한 "알마-아타 선언(Declaration of Alma-Ata)"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선언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복리를 온전히 누리는 상태, 단순히 질병이나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WHO의 건강에 대한 총체적 정의를 재확인했다. 사람들은 보건의료서비스 활동과 조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일차의료는 보편적으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현존하는 건강상의 심대한 불평등"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경고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보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선언은 2000년까지 "모두를 위한 보건"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슬프게도 신자유주의적 경제 의제가 진보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압도해버렸다. 오늘날 "모두를 위한 보건의료"는 (심각한 저기금 상태에 놓인)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 기금 같은 다양한 질병 각각에 우선권을 주는 식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알마-아타에서 표현된 이상은 이제는 민중의 보건의료 운동으로 조직된 전지구적인 기반의 국제 공동체 보건 운동을 활성화시키면서 지속되었다.
사회적 의료는 오늘날의 의료활동에 적절한가?
때때로 명백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국의 보건의료에 "시장 개혁"을 도입한지 20년이 지났지만 모든 미국인이 질 높은 보건의료서비스를 감당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황제에게는 옷이 없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HIV에 대한 처방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비용은 미국정부가 사담 후세인이나 그에게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제의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 의료진은 자신들의 환자의 생명을 자세히 알고 있고 환자들의 문제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 대해 이해하기에 적합한 유일한 사람이다. 비르효는 의사는 본원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라고 간명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의사들이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는 현대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이러한 사명은 1999년 국경없는 의사회나 1985년 핵전방지국제의학자기구(International Physicians for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 ; IPPNW)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인식되었다.
사회적 의료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미국의 보건의료의 문제가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의약품, 더 질 높은 통제주도권, 더 많은 컴퓨터, 더 많은 감사, 더 빠른 퇴원 등 뭐든 더하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의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성찰이 필요하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의료를 바라는 진보적인 의사들이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레지아 지방에 발생한 전염병 티푸스에 대한 비르효의 처방전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어퍼 실레지아에서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것과 비슷한 조건을
장래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리적 해답은 그러므로
매우 쉽고 간단하다: 그 딸들의 자유와 번영을 포함한 교육이다.
(G. A. Silver, “The Heroic Model in Medicine: Health Policy by Accolad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77, vol. 1 [1987] 82-88에서 재인용)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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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R. Anderson, Lanny Smith, and Victor W. Sidel, "What is Social Medicine?", Monthly Review vol. 56, no. 8, january 2005.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105anders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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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본문 중체 the "cocktail" of AIDS drugs은 "칵테일 요법"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듯하네요. 에이즈치료제 3가지를 동시복용하는 치료법인데 왠지 특정한 약을 가르키는 것처럼 읽혀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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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감사드립니다. 주말에 잠시 여행갔다 와보니 이렇게 귀중한 조언을 주셨네요. 수정해놓겠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