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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e and Brenner, "Women and Class: What Has Happened in Forty Years?"

 여성과 계급: 지난 40년 간 무슨 일이 있었나?*


스테파니 루스, 마크 브레너

 

40년 전 여름 한 무리의 여성과 남성들이 모여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an; NOW)를 결성했다. 전미여성기구는 교육과 법적 소송을 통한 성평등 쟁취를 맡은 바 소임으로 삼았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하는 기존 단체들이 여럿 있었지만 전미여성기구는 곧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거대한 단체 중 하나로 부상했다. 오늘날 전미여성기구는 미국 전역에서 5십만명이 넘는 회원과 5백여 지부를 거느리고 있다. 전미여성기구가 설립되던 때는 유급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여성들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전미여성기구에 대한 비판도 많다. 전미여성기구가 인종이나 계급문제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남녀평등헌법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통과 같은 일에 매진하는  전미여성기구가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여성노조연대(Coalition of Labor Union Women), 9시에서 5시까지(9to5), 노동하는 여성의 전국기구(National Organization of Working Women), 콤바히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 등 노동계급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을 대표하는 여러 다른 단체들도 성장했다. 이들은 무수히 많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여성을 직접 조직하거나 법을 개정하기 위해 기울인 이들의 노력이 이 운동의 성공에 얼마만큼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꼭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196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하는 여성들의 지위에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성별을 보고 고용하거나 성별에 따라 급료에 차별을 가하는 법적 장벽이 제거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서는 성에 따른 직업적 차별이 사실상 금세기 최초로 무너지기 시작했다.1) 1964년 남성이 시급 일달러를 받을 때 여성은 59센트를 받았지만 2004년에는 77센트로 오르면서 성별임금격차는 줄어들었다.2) 학사학위를 가진 노동인력 중 여성의 비율은 1970년 11.2%에서 2004년 32.6%로 증가해 남성 증가율의 두배에 달한다.3)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여성은 여전히 대부분의 가사노동, 아동양육, 그 외 여러 종류의 보살핌 노동을 수행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남성보다는 여성이 빈곤한 생활을 할 여지가 많다.

그럭저럭 1990년대에 접어들면 남녀간 직업통합정도 같이 개선되어오던 부문에서도 지체와 반전이 시작되는 추세를 보였다. 1990년대에는 백인여성과 흑인여성의 직업상 차별이 증가했고 고졸이나 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여성과 그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사이의 임금불평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젊은 백인 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의 고용 격차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우리는 이 추세들 중 일부는 서비스 부문의 증가 및 제조업 부문의 해외 이전 같은 경제적 변화로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 시기의 사회운동으로 설명된다고 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은 시민권 운동과 함께 노동계급 내의 일부 집단에게 의미심장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다 줄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한편 이러한 운동들이 텅 빈 공간에서 활동해온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한 내부적 불화를 겪었다. 그리고 역습과 결과적인 반발에도 대처해야만 했다.

이로써 얻은 것이 많은 여성이 있는 반면 누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상황을 낳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여성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비하면 그 당시에는 공통점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이 시작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일부 여성이 획득한 것들이 여성노동자 사이에 더 큰 계급분할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계급간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한 일인지를 검토하게 만든다.


지난 40년동안 여성노동자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노동하는 여성들의 오늘날의 조건을 이해하고 새로운 여성운동의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진정 무엇이 변했고 이러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노동시장 전체에서 여성의 참여가 상당히 증가해왔으며 특히 결혼한 여성과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의 경우는 주목할만하다는 것이다.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에 따르면 1950년 유급노동시장에 참여한 여성은 전체 여성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2004년에는 약 60%에 이른다. 같은 기간 결혼한 여성의 참여율은 24%에서 61%로 증가했다.4) 1975년 6세 미만의 자녀를 둔 여성의 39%가 노동인구였지만 2004년에는 62%로 증가했다.5) 1950년 이후 여성의 노동시장참여가 안정화되면서 그때로부터 1990년 사이에 주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경우에는 어린 아기를 기르는 결혼한 백인여성의 노동시장참여율이 약간 하락했음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현상의 일차적 원인은 경기후퇴와 일자리찾기의 어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6)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추세가 인종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금새 지적해낼 것이다. 흑인여성은 백인여성보다 노동시장참여율이 항상 높았다. 또한 흑인여성들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인생의 일부를 할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백인여성들에 비해 평생동안 더 많은 해를 노동에 투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인구가 증가했다는 일반적인 추세는 백인여성이나 흑인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아시아 여성이나 라틴계 여성의 노동시장참여율을 알아볼 수 있는 적합한 당시의 자료는 확보하지 못했다.

노동시장참여율의 증가와 더불어 특정 직업들의 성구성비율에서도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2004년 여성은 관리직, 전문직, 관련 직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직업군은 상대적, 절대적 의미에서 여성이 가장 크게 성장한 직업군이다.7)

이런 변화들의 혜택을 받은 여성은 누구인가? 학계나 공공정책수립자들은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들이 받은 사회보장혜택에 주목해왔다. 여성 중 학사학위를 가진 집단이 막대한 이득을 얻어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1973년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은 평균적으로 (2003년 달러가치로) 시간당 15.45달러를 받았던 반면 2003년에는 시간당 20.19달러를 받아 31% 증가했으며8) 같은 기간동안 학사학위를 가진 남성의 임금증가율이 17%였고 그 이상의 학위를 가진 여성의 평균시급이 24% 증가한 사실과 비교된다.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경제적 독립은 여성이 직업으로의 진입이 공식적으로 막히거나 자신의 직업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할 때까지 결혼시기를 늦추거나 결혼 자체를 피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물론 에릭 올린 라이트와 레이첼 드와이어의 Erik Olin Wright and Rachel Dwyer 연구는 1960년대의 경우 신규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 누군가가 얼마나 많은 것을 획득했는가를 설명하는데 있어 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1990년대에는 인종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9)

교육을 많이 받은 백인여성노동자의 상향 이동은 과거 40년간의 주목할만한 변화 중 하나이며 고학력 여성이 획득한 것들을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첫째, 많은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승진상한선” 같은 커다란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별이 노동시장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과 가정 모두에서 잘 해내려고 노력하는 전문직 여성의 경우에는 이 방면에 관한 한 별로 변화한 것이 없는 직업 세계에서 받는 불이익으로 고통받는다. 둘째,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이야기에서 생략된 핵심요인은 계급과 인종이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여성의 대다수는 여전히 저임금의 비정규직이다. 이러한 직업은 내세울만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이지도 않으며 사회보장혜택도 없다.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2005년 전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시급의 중위값은 12.5달러였다. 두명의 자녀를 혼자 키우는 어머니가 전일제 일자리를 가졌을 경우 이 가정의 소득은 연방에서 정한 3인가정의 빈곤선의 160% 정도가 된다.1) 전체 흑인 여성의 60%, 전체 라틴계 여성의 67%가 이 액수에 못 미치는 시급을 받는다. 학사학위를 가진 사람 중에서는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여성 전체로 보았을 때는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2004년 25세에서 64세 사이의 여성 중 23%만이 학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연령대의 흑인여성의 경우 학사학위나 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은 14%, 히스패닉계 여성의 경우는 9%에 불과했다.

학력의 차이는 직업관련 자료를 인종에 따라 검토했을 때 각 인종별로 수치상 차이가 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전체 백인여성의 39%, 전체 아시아 여성의 44%가 관리직, 전문직, 유관 직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흑인여성과 히스패닉계 여성의 경우 각각 31%와 22%만이 해당 직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직과 관리직급을 구성하는 여성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인종별로 심하게 차이나는 것이다.

성별 임금격차는 차츰 좁혀지고 있다. 하지만 여성의 평균 임금이 증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여성의 소득은 인플레이션조차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성과의 소득 격차가 꾸준히 좁혀지는 이유는 남성의 임금하락이 여성의 임금하락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부 집단의 여성들이 평균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기간동안의 소득이 상당히 줄어드는 경향은 여전하다. 여성정책연구소(Institute for Women’s Policy Research)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26세에서 59세 사이의 여성이 15년간 벌어들인 소득은 (1999년 달러가치로) 고작 273,592달러에 불과한 반면 같은 연령대 남성이 같은 기간 벌어들인 소득은 722,693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 시점에서 성별에 따른 시급의 비율은 77%에 이르게 되었지만 평생을 비교해보면 성별임금격차는 상당해서 위의 경우 그 비율은 38%에 불과하다. 최근 성별임금격차의 평균비율이 젊은 노동자들의 경우 84%에 이르는 등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이것이 세대에 따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생애주기에 따른 소득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이를 기르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여전히 여성이 지고 있다. 비록 남성가장 가정이 증가해왔고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일도 전반적으로 많이 늘어났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는 데 할애하는 평균시간은 여전히 크게 차이난다. 젊은 아버지들 중 다수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떠나고 있다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3세 미만의 자녀를 둔 아버지들 중 직장을 가진 사람은 95%에 이르며 이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심지어 부모 모두가 가정 밖의 일터에서 일하며 아버지가 아이돌보는 일을 분담하는 경우에도 어머니들은 일터에서 빠져나와 학교로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아이가 아플 때 휴가를 낼 수 있도록 근무시간이 자유로운 일자리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어린 자녀를 둔 노동하는 여성은 배우자보다 기본적인 아이돌보기 활동에 하루 두배의 시간을 더 할애한다. 남편들이 떠맡은 가사일이 약간 더 많아지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이들이 수행하는 일의 양은 여전히 부인들이 수행하는 가사일의 절반 수준이다.10) 유급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여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아지면서 가사노동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몫도 증가해왔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격차가 줄어든 일차적인 이유는 여성의 총노동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회사들이 가족휴가 및 의료휴가를 제공하지만 자료를 통해 휴가를 사용하는 대신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문직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현상은 전문직 부부들이 기본적으로 다른 여성이 제공하는 도우미서비스에 가사일을 맡기는 일이 증가해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빈곤한 생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세 번째 경향은 여성의 낮은 임금과 무거운 아이돌보기 책임과 관련된다. 우선 많은 학자들이 연방이 정한 빈곤선이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고 오늘날의 생활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성의 3분의 1은 연방에서 정한 빈곤선의 200%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여성가장 가정의 총빈곤율은 과거 몇십년에 걸쳐 감소해왔지만 그래도 그 수치는 각 인종별 전체 가족 빈곤율의 두배이다. 나아가 2001년 이후 빈곤한 생활을 하는 여성가장 가족 비율은 증가해왔다. 오늘날에는 백인여성가장 가족의 20%, 그 외 각 인종별 여성가장 가족의 약 3분의 1이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흑인과 히스패닉 여성가장 가족의 약 40%가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할 수 없는 소득으로 생활한다.
무엇이 여성을 빈곤에 붙들어두는가?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받는 낮은 임금이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다. 주로 여성이 일하는 직업의 평균임금은 아주 낮고 바바라 에렌라이히가 Barbara Ehrenreich 『빈곤의 경제 Nickel and Dime』에서 분명히 지적했듯이 적어도 너무 적다. 그러나 임금이 더 높은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여성이, 게다가 학사학위가 필요없는 직업을 구하려는 경우 실질적 장벽에 부딪힌다. 가령 여성이 전통적인 여성의 직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건설분야나 제조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직업을 갖게 된 여성은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립되기 일쑤이며 결국 대부분은 이 직업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직업상의 차별은 제조업이나 건설업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티븐 로즈와 하이디 하트만에 Stephen Rose and Heidi Hartmann 따르면 남성과 여성으로 서열화된 직업군들을 보면 낮은 임금을 받는 계층에는 여전히 여성이 주로 포진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이 여성노동자로 구성된 직업의 종류는 194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간호사, 간호조무사, 타자수, 비서 같은 일들이다.11) 이렌느 패더빅과 바바라 레스킨도 Irene Padavic and Barbara Reskin 1970년대에는 여성들이 직업상의 차별대우를 변화시키면서 진일보했지만 1990년대에는 정체되어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는 직업에서 인종간의 통합이 추세였지만 이러한 추세 또한 1990년대에 들어 역전되었다.)

일부 직업에는 여전히 성별에 따른 심한 차별이 존재하며 이러한 직업군에서의 임금격차 또한 다른 직업들과 비교해볼 때 여전히 심하다. 가령 기본적으로 남성의 직업인 수위의 경우 2004년 평균시급은 10달러였지만 수위와 비슷한 수준의 훈련과 기술을 요구하는 청소원이나 가정부는 8.67달러의 시급을 받는다. 기계정비사와 간호조무사는 비슷한 수준의 훈련을 받지만 2004년 기계정비사의 시급은 16.64달러였던 반면 간호조무사는 10.53달러였다.12)


추세 해석


어떤 것은 그렇게 극적으로 변한 반면 어떤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누가 수혜자이고 누가 비수혜자인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일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가령 근래에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여성들은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종사하게 된 여성이다. 그러나 요한나 브레너가 Johanna Brenner 지적한 바대로 이 여성들이 성공하게 된 원인은 노동시장에서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투쟁 같은 개별화된 해법에서 찾을 수 있다.13) 여성들은 여성의 대학입학이나 전문학교입학을 허가하라고 요구해왔고 노동시장에 대한 보다 많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투쟁에 법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소송을 활용해왔다. 이들의 성공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해왔고 더불어 실질적인 직업상의 차별철폐에 일부 기여해왔다. 이러한 개별적인 해법의 혜택은 대부분 백인여성이나 자원에 먼저 접근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차지했다.

우리는 또한 수치를 통해 인종과 계급이 중요한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참신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최근의 추세는 인종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는 1990년대의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의 직업상 차별 증가와 최근 나타난 젊은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의 고용율의 차이를 들 수 있다.14) 유급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여성 대부분은 계급상의 변화를 겪지 못했다. 미국의 계급이동성은 여전히 낮은 수치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연구는 최근 들어 계급이동성이 점점 줄어들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녀가 있다는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자녀를 둔 여성 모두가 노동시장에서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가정의 75%가 18세 미만의 자녀를 둔 가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5) 그리고 자녀를 두었는가의 문제는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얼마나 잘 진입할 수 있을 것인지를 예견하는 최고의 가늠자로 여전히 활용된다. 자녀와 여성의 노동시장참여의 관련성은 남편이나 보조부모(second parent)가 있을 경우 완화되지만 아이를 기르는 일차적인 책임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만으로 위에서 논의된 추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단지 노동계급 여성이나 유색인종 여성이 엘리트 여성이나 백인 여성에 비해 권력이나 자원을 적게 가졌기 때문이라거나 자녀를 두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거나 임금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직화 또한 중요한 사안이다. 노동계급 여성을 포함해 여성 모두는 이 기간동안 자신들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개별적이고 집합적인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권력과 자원이 분배되는 방식이나 사회적 재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이 이 힘이 행사된 방식을 구체화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지에 따라 투쟁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넬슨 리히텐슈타인은 Nelson Lichtenstein 미국노동운동이 이차세계대전 이후 대두한 노동계급을 포괄적이고 집합적인 관점에서 조직하는데 실패했다고 논의한다.16) 예컨대 보편적 보건의료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고 개별 현장에 따른 보건의료보장을 얻어냈다거나 모든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건이나 고용기회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지 않고 조합원의 이익을 우선하여 투쟁했던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 대부분은 노조운동의 외부로 밀려났고 노조 또한 보건의료체계나 퇴직 후의 사회보장문제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차세계대전 후 발전한 미국노동운동에서 특히 주변화된 집단은 여성과 유색인종이다. 이들은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종이나 성 (또는 다른 기준)에 따른 고용차별을 금지하고 동일 노동을 수행하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을 동일하게 지급하도록 만든 기념비적인 법령의 통과를 추진했던 1960년대의 시민권 운동은 이러한 대안모색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가 입법적 승리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행은 기본적으로 개별 소송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여성단체들이 채택한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접근법 대부분이 성공을 거두어왔기 때문에 여성단체들은 개별화된 전략을 노동계급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꾸준히 강조한다. 이들은 직업상의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 여성이 종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직업교육을 주장한다.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여성의 대학진학을 위한 프로그램을 늘릴 것을 요구하거나 동일한 임금지급을 집행할 법 제정을 요구한다.

개별적인 해결책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계급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물론 베티 듀크 대 월마트 사건2)이나 Betty Dukes v. Wal-Mart 노동계급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발의된 법안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해결하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고 대부분의 노동계급 여성들에게는 시간도 없거니와 소송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도 없다. 법적인 방법이나 기타 개별적 해결책을 활용할 수 없고 (노조 같은) 집단행동 수단도 하락해가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위한 규모 있는 조직조차 없는 노동계급 여성들은 대부분 방치되었다.
물론 모든 단체들이 개별적인 해결책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임금과 직장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집합적 접근, 즉 노조결성의 혜택을 받은 노동계급 여성들도 있다. 오래전부터 미국에는 여성을 조직해왔던 노조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최근 몇십년 사이에 극적으로 성장해왔다. 가령 교사나 간호사로 일하는 여성들은 노조를 결성함으로써 임금상승과 사회보장혜택의 향상을 경험했다. 1973년 설립되어 현재는 50개주 모두에 회원을 가진 9시에서 5시까지 같은 노동계급 여성 단체들은 1991년의 시민권리법, 가족휴가및의료휴가법, 국가보건안전법, 주별 생활임금조례 등의 통과를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같은 집단행동이 존재하는 곳에는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원천을 배치하는 두 번째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센터운동의 역동성을 분석하고 있는 스티브 젠킨스는 Steve Jenkins 노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두가지 권력의 원천을 제시하고 이들의 특질을 훌륭하게 구별해냈다. 첫 번째는 사회적 권력으로 생산이나 회사영업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두 번째는 옹호하는 권력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변호사, 로비스트, 유권자, 기타 필요한 여러 사람들을 확보해내는 능력이다.17)

여성노동자들은 둘 중 어떤 종류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과거 몇십년간 직업시장에서 상대적으로 훌륭하게 적응해온 일군의 여성들은 희소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여성들로, 특히 학사학위나 그 이상의 학력을 가졌거나 특정 관리직이나 전문직으로 진출한 여성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여성들은 보다 나은 직업과 임금에의 접근성을 얻기 위해 개인적 권력에 의존하거나 때로 집합적 협상력에 의존 할 수 있었던 부류이다.

두 번째 부류의 여성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본적으로 노조결성을 통한 집단행동에 각자 가진 기술과 교육수준을 결합시켜왔다.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20개 직업을 목록화한 <표 1>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여성노동자의 43%가 이 20개 직업에 종사한다. 공인간호사와 초등학교 교사의 주급은 전체 여성노동자 주급에 비해(585달러) 상당히 높고(각각 930달러와 813달러) 노조조직율 또한 높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교육과 희소한 기술을 획득하거나 노조원이 된다는 사실이 노동시장에서의 성공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가령 보조교사나 예비학교 및 유치원 교사들의 노조조직율은 평균보다 높은 편이지만 평균 주급은 평균보다 낮다. 보살핌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낸시 포브르가 Nancy Folbre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The Invisible Heart』에서 논의한 것처럼 모든 보살핌 노동이 노동시장에서 저평가되는 현상은 성별노동분업의 부산물이다. 보살핌 노동이 점점 더 시장의 손에 맡겨져(privatize) 유급노동시장으로 진입한 여성이 더 많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이 계속해야 하는 무급노동이 상당부분을 보조하고 있다(포브르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그 규모는 미국에서 구매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30%에서 60% 사이 어딘가에 해당한다). 포브르는 또한 보살핌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노조를 조직하더라도 결국에는 보살핌 부문이 아닌 다른 비슷한 직종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보다 낮은 급여인 채로 남는다고 논의한다. 노조를 결성하더라도 업무상 보살핌을 제공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파업이나 여타 쟁의행위 등의 수단을 활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표 1> 2005년 여성직업 상위 20개(근로자수는 천명단위)

 

근로자 전체

(여성)

근로자 전체

(남녀)

여성의 비율

주급 중위값*

(여성)

노조조직율

(노동자 전체)

전체

65,762

141,730

46.4

$585

12.5

비서 및 행정보조

3,405

3,499

97.3

559

7.4

계산원

2,334

3,075

75.9

322

6.2

공인간호사

2,230

2,416

92.3

930

16.6

초중등학교 교사

2,150

2,616

82.2

813

52.5

할인점 판매원

1,686

3,248

51.9

401

1.2

간호, 정신과 및 가사보조원

1,685

1,900

88.7

385

12.2

현장슈퍼바이저/

할인점판매원 관리자

1,462

3,523

41.5

525

4

음식점 종업원

1,384

1,927

71.8

332

1.7

경리, 회계사무원

1,329

1,456

91.3

551

4.7

안내

1,271

1,376

92.4

463

3.8

보육

1,260

1,329

94.8

330

5

고객센터

1,259

1,833

68.7

505

7.7

가정부

1,237

1,382

89.5

328

6.2

현장 슈퍼바이저/

사무행정직원 관리자

1,115

1,598

69.8

656

7.3

회계사

1,042

1,683

61.9

784

5

보조교사

861

947

90.9

398

32.8

일반사무행정

815

965

84.5

509

7.5

요리사

777

1,838

42.3

314

4.6

예비학교 및 유치원 교사

702

719

97.7

520

18.9

* 주급은 전일 근무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

자료: U.S. Census Bureau, Current Population Survey, 2005; Barry T. Hirsch & David A. Macpherson, Union Membership & Coverage Database from the CPS (Unionstats.com).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부류이다. 이들은 개인적 역량도 없고 노조도 없는 여성노동자들이다. 교육수준도 높지 않고 전통적으로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 이상의 직업을 구할 능력도 없는 여성들이다.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직업은 계산원, 할인점 직원, 식당종업원 등으로 사회적 권력이 거의 따르지 않는 직종이다. 이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인력으로 취급되며 노조조직율도 매우 저조하다. <표 1>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여성이 근무하는 직업의 노조조직율은 평균 노조조직율에 못 미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도 구할 수 없고 노조결성 같은 집합적 노력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이란 이 부류의 여성들에게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문제의 핵심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월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1950년대에 포드자동차의 생산직으로 일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급료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해당 직업을 “괜찮은 일자리”로 변화시키기 위한 직업훈련이 아니라 집합적 조직화인 것이다. 그 방법을 통해 한 때 자동차 산업의 “나쁜 일자리”로 통했던 생산직이 고임금의 혜택 많은 일자리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세 번째 부류의 여성들이 개별적 전략보다는 집합적 전략을 통해 보다 많은 혜택을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집합적 접근만으로는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단기적으로 볼 때 집합적 전략은 직업의 질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뿐 계급위치의 문제는 다룰 수 없다. 심지어 여성이 주로 일하는 전 직종을 통틀어 노조조직율이 높은 직종이라고 해도 우리가 계급경제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일하는 여성은 여전히 고용주로부터 착취를 당할 것이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피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임금과 직업의 질을 향상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집합적 접근을 통해 일하는 여성의 생활에 미칠 수 있는 효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시장활동에 대해서 뿐 아니라 비시장활동에 대한 집합적 접근도 필요하다. 시장진입가능성을 향상시키고 직업의 질을 높이는 일은 개별 여성에게 혜택을 줄 수 있지만 오히려 여성들에게는 보살핌 노동의 단순 재분배가 되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요한나 브레너와 바바라 라슬렛이 Johanna Brenner and Barbara Laslett 논의한 것처럼 문제는 기회를 조직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 전체를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8) 특히 성별노동분업 같은 사회적 재생산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여성이 자기조직화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거나 닫아버릴 수 있다. 가령 보살핌 노동이 시장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는 것은 가사와 아이를 돌볼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이나 가족에게 떠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노동분업은 이러한 일의 대부분을 여성이 떠맡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충격은 사회운동의 상태에 좌우되면서, 특히 계급과 인종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진보의 시대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같은 시기에는 성별노동분업에 도전하고 대부분 중산층인 백인여성이 자신들의 요구를 중심으로 자기조직하고 동원할 여지를 창출했던 강력한 여성운동이 존재했다. 현재는 사회적 재생산의 대부분이 민간 시장으로 넘어갔다. 부모들은 아이를 돌보(고 다른 보살핌 노동을) 직접 해결해야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생활을 더욱 개별화하고 어떤 종류든 자기조직하고 집합적으로 해결할 여지를 차단한다. 물론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경험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문제가 되는 다른 물적 조건들을 무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사회적 재생산구조 외에도 생산구조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노동시장참여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대부분 고용주와/나 정부가 여성을 집 밖의 일자리로 적극적으로 불러들일 때였다. 대표적으로는 1800년대 초 로웰 섬유공장에서 농장에서 일할 여성을 대규모로 모집했던 일이나 이차세계대전 도중 방위산업체가 여성을 고용한 예를 들 수 있다. 여성은 자기조직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경험에 상당한 변화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스스로 선택한 상황” 하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전부가 여성의 자기조직화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앞으로도 계속 작업장에서의 차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노동계급 여성의 투쟁에는 한계가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투쟁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모두에게 생계임금을 보장할 수 있고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보다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동문제에 관련된 사안을 다루는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결국 이 틀을 인정하는 정책을 추진할 뿐이다. 이들은 여성이 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을 늘리고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아동양육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추진한다. 비교적 의미있는 정책으로 고용주가 여성의 인간자본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다.19) 결국 이 해결책들은 여성이 노동계급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늘려주는 이상은 될 수 없다. 최상의 경우 계급을 완전히 등지게 된다. 이들은 계급이란 철저하게 노동자와 고용주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체계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조건 향상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투쟁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지속가능한 생계임금을 제공할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존속하는 생계임금을 제공하는 직업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부장제와 인종억압체계는 이 직업들이 분배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장에 대한 권리 보장을 추구하는 개별적 해결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성에게는 계급에 입각한 해결책도 필요하다. 사실 개별적 해결책은 대부분의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각각의 여성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높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얻어내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기회를 가지며 의미있는 일자리를 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소수 아니 대부분의 여성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이 계급을 등지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나머지를 뒤에 남겨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관리받는 사람을 두지 않는 관리자가 있을 수 없고 패자 없는 승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패자가 될 것인가? 우선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어왔던 여성과 유색인종이 패자로 남는다. 대표주자는 노동계급과 빈민이다. 게다가 새로 얻은 학위와 일자리를 통해 “승자”가 된 여성 대부분 역시 진정한 의미의 승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타인을 보살피거나 보살핌을 받을 그녀들의 선택권을 제약라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자본주의 하에서 “승리한” 여성에게는 패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구를 중심으로 우리의 생활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금과는 다른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모형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을 아우르는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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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ephanie Luce and Mark Brenner, "Women and Class: What Has Happened in Forty Years?" Monthly Review vol. 58, no. 3, July-August 2006.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706lucebrenner.htm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주 이다.



원주


1) Irene Padavic, “Patterns of Labor Force Participation and Sex Segregation” (conference paper, 3rd Annual Invitational Journalism-Work/Family Conference, Boston University and Brandeis University, Community, Families & Work Program, May 20–21, 2004).
2) 전일제 노동자의 경우이다. Stephen J. Rose & Heidi I. Hartmann, Still a Man’s Labor Market: The Long-Term Earnings Gap (Washington D.C.: Institute for Women’s Policy Research, 2004),
http://www.iwpr.org/pdf/C355.pdf.
3) Data in this article comes from the Bureau of Labor Statistics, Current Populaton Survey, Women in the Labor Force Databook 2005, unless otherwise specified.
http://www.bls.gov/cps/wlf-table9-2005.pdf를 참고하라.
4)
http://www.bls.gov/cps/wlf-table4-2005.pdf.
5)
http://www.bls.gov/cps/wlf-table5-2005.pdf.
6) Heather Boushey, “Are Mothers Really Leaving the Workplace?” (issue brief, Council on Contemporary Families and the 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 March 28, 2006).
7)
http://www.bls.gov/cps/wlf-intro-2005.pdf.
8) Economic Policy Institute,
http://www.epinet.org/content.cfm/datazone_dznational.
9) Erik Olin Wright & Rachel Dwyer, “The American Jobs Machine: Is the New Economy Creating Good Jobs?” Boston Review 25 (December/January 2000–01): 21–26.
10) Bureau of Labor Statistics, Time Use Survey.
11) Irene Padavic & Barbara Reskin, Women and Men at Work, 2nd ed. (Thousand Oaks, CA: Pine Forge Press. 2002).
12) National Occupational Employment and Wage Estimates.
13) Johanna Brenner, Women and the Politics of Clas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14) Lori L. Reid & Irene Padavic. “Employment Exits and the Race Gap in Young Women’s Employment,” Social Science Quarterly 86 (December 2005): 1242–60.
15)
http://www.census.gov/hhes/www/poverty/histpov/hstpov4.html.
16) Nelson Lichtenstein, State of the Union: A Century of American Labor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17) Steve Jenkins, “Organizing, Advocacy and Member Power: A Critical Reflection,” WorkingUSA (Fall 2002): 56–73.
18) Johanna Brenner & Barbara Laslett, “Gender, Social Reproduction, and Women’s Self-Organization: Considering the U.S. Welfare State,” Gender and Society 5, no. 3 (1991): 311–33.
19) 비교적 가치있는 정책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론적/정치적 입장차를 보이는 쓸모있는 논쟁에 대해 참고하려면 Paula England, Comparable Worth: Theories and Evidence (New York: Aldine De Gruyter, 1992)를 보라.

 

옮긴이주

1)  http://aspe.hhs.gov/poverty/05poverty.shtml를 참고하라.
2)  http://en.wikipedia.org/wiki/Dukes_v._Wal-Mart
베티 듀크 대 월마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시민권 확보를 위한 집단행동이다. 미국 최대 유통회사인 월마트를 승진, 임금, 업무배정상의 차별 및 성, 인종, 종교, 출신국적에 따른 노동자 차별을 금지하는 1964년의 시민권리법 7장 위반을 근거로 고소한 사건이다. 54세의 월마트 노동자 베티 듀크가 성차별 문제로 고용주를 제소한 2000년 시작되었고 원고들은 백6십만 전현직 월마트여성노동자를 대표하려고 애썼다. 2004년 6월 마틴 젠킨스 연방법원판사는 집단 소송을 인가하는 판결을 내렸고 월마트는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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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ellamy Foster, &quot;The New Geopolitics of Empire&quot;

제국의 새로운 질서*

존 벨라미 포스터


오늘날의 제국적 이데올로기는 미국을 언덕 위의 새로운 도시, 즉 지구를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온 바와는 다르게 미국이라는 지구제국은 자본의 제국이 아니다; 미제국은 전통적으로(classically) 맑스주의자들과 여타 학자들이 정의해온 경제적 제국주의와 무관하다. 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제국의 시대를 활성화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확신컨대 그 해답은 제국의 철학으로서의 지정학의 극적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뿌리(economic taproot of imperialism)”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모두 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마이클 클레어가  “새로운 지정학 The New Geopolitics”에서 환기시킨 내용은 냉전 이후 미국의 제국적 목적을 통합하는 실용적인 수단이 되어왔다.1)

프란쯔 노이만이 Franz Neumann 1942년 제3제국에 대한 그의 고전적 비판인 『베헤모스 Behemoth』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지정학이란 제국확장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2)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정학은 제국을 조직하고 번영시키는--근대 제국주의와 함께 등장했고, 우리 시대에 또다시 등장한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포함하는--특정 방식을 나타낸다.

지정학은 경제학 및 기술에 의해 조절되는 영토, 인구, 전략적 위치, 천연자원 보유를 포괄하는 지리적 요소들이 국가간의 관계와 세계지배를 위한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고전적 지정학은 제국간 경쟁의 표명이었고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과 보어전쟁(Boer War)기1)에 등장했다. 고전적 지정학은 알프레드 테일러 마한의 Alfred Thayer Mahan 『역사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1890), 프레드릭 잭슨 터너의 Frederick Jackson Turner 『미국역사의 개척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1983), 브룩스 아담스의 Brooks Adams 『새로운 제국 The New Empire』(1902), 테오도르 루즈벨트의 Theodore Roosevelt “러프라이더(Rough-Rider)” 정책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된 미국의 해외확장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구성했다.3)  “지정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1899년 스웨덴 정치과학자 루돌프 헬렌이 Rudolf Kjellén 처음 사용한 것으로 등장이후 체계적인 연구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했다. 영국의 핼포드 맥킨더 Halford Mackinder, 독일의 칼 하우스호퍼 Karl Haushofer, 미국의 존 스픽만은 John Spykman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2) 성립 후부터 이차세계대전에 이르는 핵심 시기에 주요 지정학 이론가로 활동했다.


고전적 지정학


맥킨더는 지리학자, 경제학자, 정치가였다. 그는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학장을 지냈고(1903-1908) 글래스고 지역 의회의원을 역임했다(1910-1922). 그는 1904년 “역사의 지리학적 추축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의 지정학 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4)  맥킨더는 대영제국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가 유럽사회의 안전판을 구성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이 제국주의적 확장을 마감한다면 유럽사회 내의 통제불가능한 계급세력을 풀어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논했다. 그의 분석의 핵심에는 세계에 더 이상의 미개척영역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인해 제국간 경쟁이 심화되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맥킨더는 『민주적 이상과 현실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1919)에서 “역사상 발발했던 큰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은 국가간의 불균등발전”이라고 기록했다. 지정학적 현실은 “제국의 성장에 이바지해 결국에는 단일 세계-제국에 이르도록 만든다”.5)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자극한 그의 일차적 관심사는 영국의 경제적 패권의 쇠락이었고, 나아가 영국자본에는 보호주의와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독일 못지 않게” 영국도 “‘시장에 굶주리게’ 되었다. 영국 특유의 경제에 걸맞는 시장은 세계 전체이다...자유무역, 평화를 사랑하는 랭카셔3)는 제국의 힘의 지원을 받는다...자유방임식의 자유무역과 강압적 방식의 보호 모두가 제국의 정책이며 이 둘은 전쟁을 낳는다.”6)

맥킨더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심장부(Heartland)”이론이다. 지정학적 전략은 심장부--혹은 동유럽, 시베리아를 포괄하는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라는 초대륙적 거대 영토--를 통제하는 끝내기 게임(endgame)에 관한 것이었다. 심장부 외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이 세계섬(World Island)을 구성했다. 심장부란 그 지역을 “지구상 가장 위대한 자연적 요새”로 만들어주는 해상접근불가능성으로 정의된다.7) 해상력에 의해 지배되던 콜럼부스의 시대는 끝났고, 지상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맥킨더는 논의했다. 육상운송 및 육상통신의 발달은 지상력이 해상력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에는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근대적 해군까지 갖출 경우 해상세계--대영제국과 미제국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이상과 현실』에서 맥킨더는 동유럽이 유라시아 지배에 있어 중핵을 담당한다는 전략적인 이유로 심장부에 추가했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금언은 이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동유럽을 통치하는 자가 심장부를 지배한다:

심장부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섬을 지배한다:

세계섬을 통치하는 자가 전세계를 지배한다.8)


맥킨더는 대영제국에 필요한 가장 시급한 대외정책으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동맹체결이나 블록 형성의 차단과 이들의 동유럽 지배 차단을 꼽았다. 이에 따라 두 거대 권력 사이에 위치한 강력한 완충국이 필요해졌다.

1919년 영국정부는 러시아 내전에서 데니킨 장군과 백군 General Denikin and the White Army 지원을 위해 맥킨더를 남러시아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에 지명했다. 적군이 데니킨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자 맥킨더는 런던으로 돌아와 영국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영국이 독일의 산업화를 저해해야 옳지만, 독일이 동유럽에 대한 볼쉐비키의 통제에 맞서는 주요 보루로 작용하므로 독일의 경제적·군사적 붕괴를 허용해서도 안된다. 맥킨더는 제국을 위해 노력한 공헌을 인정받아 작위를 받게 되었다.9)

맥킨더의 지정학적 분석은 영국보다는 독일의 전쟁계획수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 지정학파의 창시자는 프리드리히 라첼로 Friedrich Ratzel,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1890년대에 등장했다. 라첼은 국가유기체론을 통해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을 공간을 위한 지정학적 투쟁에 연결지으려고 했다. 국가들은 정적인 존재가 아닌 자연 성장하는 존재이며, 경계란 파열될 수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했다. 라첼은 독일이라는 정치체의 책무로 “생활공간(lebensraum, 영어로는 living space)”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그는 “지구는 그 규모상 거대 국가 하나면 충분하다”고 기록했다.10)

그러나 독일의 주요 지정학자는 라첼과 맥킨더의 이론을 이용했던 칼 하우스호퍼였다. 그는 독일이 독일인구와 자연지리적 공간 사이의 불균형이 분명해지면, 조정을 위해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4)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미국을 자신의 세력권(region) 내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지정학을 적용한 국가로 간주했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이 미국에 있고, 어떤 외세와의 경쟁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문화한 (미국이 서반구의 “국제경찰력”이라고 주장했던 1904년 루즈벨트 보충이론(Roosevelt corollary)에 계승된) 먼로주의(Monroe Doctrine)5)를 지정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로 보고, 독일식 먼로주의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하우스호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범아메리카주의(Pan-Americanism)를 미국이 자신의 영역적 패권을 실천함으로써 지정학적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범독일주의(Pan-Germanism)나 독일 주도의 범유럽(Pan-Europe)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과 유사한 지역적 패권을 여러 강대권력 사이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1)

하우스호퍼가 볼 때 독일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대영제국주의였다. 그의 책 중 한권에 실린 세계지도에는 영국본토에 자리잡은 거대한 문어가 다리를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뻗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과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독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을 독일의 하위파트너로 삼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간권력블록을 형성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태평양에서 영국과 미국의 해군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동맹이 필요하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Nazi-Soviet pact)6)이 성립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 최종적으로 추축권력과 극동의 합작이 독일정신 목전에 주어졌다. 마침내 서구 민주주의의 아나콘다 정책[에워싸 목을 조르는 일]에 맞서 생존할 희망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하우스호퍼는 기본적으로 지정학에 의존했지만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나치의 “우수-민족(master-races)”주의에 결합시켰다.12)

1차세계대전 당시 하우스호퍼는 여단의 중령으로 복무했고 루돌프 헤스가 Rudolf Hess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그는 소장으로 전역했고 1919년 무니히 대학(University of Munich) 강사가 된다. 그곳에서도 헤스는 그의 학생이자 문하생이었다. 헤스를 통해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와 Hitler 직접 접촉하며 조언했다. 1923년 나치의 맥주집반란계획(the Nazi Beer Hall Putsch)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처음에는 히틀러, 이후 헤스까지 란즈베르크의 성채에 갇히게 된다. 하우스호퍼는 헤스의 조언자(mentor) 자격으로 히틀러가 헤스에게 『나의 투쟁 Mein Kampf』을 구술하는 동안 히틀러를 빈번히 방문했다. 그래서 생활공간을 보는 시각을 포함한 하우스호퍼의 많은 생각들은 히틀러에게 수용되었고, 『나의 투쟁』에 포함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히틀러는 하우스호퍼를 위해 무니히 대학에 방위지리학 교수직을 창설한다. 그곳에서 그는 지정학연구소(Institute of Geopolitics)를 운영했다. 이듬해 히틀러는 하우스호퍼를 독일학술원(the German Academy) 교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헤스가 영국으로 간 이후 히틀러에게 미치는 하우스호퍼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는 잠시동안 다카우집결지를 관장했다. (역시 지도적인 나치의 지정학분석가였던)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Albrecht 1944년 히틀러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친위대(SS)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우스호퍼는 1946년 연합군에 의해 심문받은 직후 자살했다.13)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니콜라스 존 스픽만은 정치과학자, 사회학자, 평론가였다. 스픽만은 두권의 주요 지정학적 저술을 남겼다: 미국이 이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직전 완성된 『세계정치학 속의 미국의 전략 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1942)와 그의 사후에 출간된 『평화의 지리학 The Geography of the Peace』(1944)이다. 그는 유럽, 중동, 동아시아-태평양 연안지역의 육상과 해상을 겸한 주변부를 통제함으로써 미국이 유라시아 심장부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논함으로써 맥킨더의 심장부주의에 맞선 “주변부(rimlland)”론을 주창했다. 스픽만은 미국이 북대서양과 태평양 양쪽 연안에 해군과 공군기지를 건설해 유라시아를 에워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킨더에 맞서 스픽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만일 구세계의 권력정치학을 위한 표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주변부를 통제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통치한다; 유라시아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통제한다’일 것이다.”14)

『세계정치학 속의 미국의 전략』에서 스픽만은 미국은 “[패권이] 미치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력입지”로 정의되는 “패권을 방지하는 방향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말은 미-영 지배의 촉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5) 1942년 대영제국이 약화되고 미제국이 성장함에 따라 스픽만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독-일의 시도를 패배시킬 수 있다면--지구상의 “미-영 패권”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미국 및 영국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픽만은 『평화의 지리학』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유럽 주변부에 대한 패권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제안했다. 스픽만은 소비에트연방 “자체의 힘”만으로는 미국에게 지배권을 부여하는 존재인 미국의 패권 하에서 “통일된 주변부에 맞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고 보았다.16)

스픽만의 관점은 미국의 정책집단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읽혔으나 1942년이 지나기 전, 독일지정학사상 및 히틀러에게 미친 하우스호퍼의 영향에 대해 미국 언론이 조성한 공포분위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면 “지정학”이라는 용어에 접근하기 더욱 어려웠다. 25년 정도 후에야 이 개념이 공공의 담론으로 재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스픽만의 주변부 개념은 종종 조지 케넌의 George Kennan “봉쇄(containment)”라는 개념 이면의 지적 배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스픽만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지정학


1939년 국무부(State Department) 계획가들은 외교위원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와 함께 상부차원에서 극비리에 수행된 전쟁과 평화연구(War and Peace Studies; WPS)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이 연구는 나머지 전승국들과을 염두에 둔 연구였다.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연구 첫 해에 4만4천5백달러를 기금으로 제공했다. 전쟁과 평화연구는 “대영역(Grand Area)”으로 정한 지정학적 영역(region)을 제시했고 여기에는 우선 대영제국과 미제국이 포함되었다. 대영역 “이면의 지정학적 분석에는 세계의 특정 영역을 반드시 ‘개방’시키려는--투자개방, 본국으로의 이윤 송금개방--시도가 포함되었다. 즉, 개방이란 미국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노엄 촘스키는 Noam Chomsky 설명했다.17)

그러므로 새롭게 제시된 대영역은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패권 하에서 자유로운 자본의 흐름과 연계되면서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 이후 입체화 된 비공식적인 제국을 구성했다. 독일이 유럽을 점령한 직후엔,s 대영역을 미국의 제국적 영역, 대영제국, (태평양에서 미국이 일본을 이긴다는 가정 하에) 극동에 제한해서 이해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무렵 대영역은 서부유럽전체를 아우르면서 확대되었다. 미국 정치지리학의 지도적 인물이고 (언론이 때로 “미국의 하우스호퍼”라고 언급하며) 외교위원회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이사야 보우맨은 Isaiah Bowman 1941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가 이룬 승리의 척도는 승리 이후 우리 지배의 척도가 될 것이다.”18)

1943년 맥킨더는 “둥근 세계와 평화달성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외교위원회가 발간하는 잡지 『외교문제 Foreign Affairs』에 실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당면 과제에 비추어 볼 때, 소비에트연방의 영토가 심장부에 상응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언급하면서19) 최초로 심장부가 완전한 요새를 이루어 위협젓인 존재가 되었다고 논의했다. 그러므로 미국의 목적은 소비에트라는 심장부 권력에 맞서는 것이었다. 콜린 그레이가 Colin Gray 『핵시대의 지정학 Geopolitics of the Nuclear Era』(1977)에서 관찰한대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냉전(Cold War)의 본질은 “유라시아-아프리카 ‘주변부’의 통제/통제거부를 둘러싸고...미국의 고립적 지배영역과 소비에트연방의 ‘심장부’ 지배영역 사이에 벌어진” 경쟁이었다.20)

지정학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드물었던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제임스 버냄의 James Burnham 저술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과거 명성을 날렸던 좌파였던 버냄은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반공산주의 지정학(a geopolitics of anticommunism)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쟁취를 위한 투쟁 The Struggle for the World』(1947)은 원래 1944년 (미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비밀연구의 일환으로 작성되어,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 참석하는 미대표단이 사용하려던 문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유라시아] 심장부와 외곽의 경계의 결집에 성공한 권력이 세계를 통제한다고 확신하며, 이것이 지정학의 공리(axiom)이다.” 맥킨더처럼 버냄은 소비에트연방이 세계 최초로 세계섬과 나아가 전세계를 위협할 거대하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대중을 갖춘 거대 심장부 권력으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지리학적으로, 전략적으로 유라시아는 미국을 에워싸고 압도한다.” 미국 역시 하나의 제국이었지만 스스로를 제국이라고 부르기를 꺼렸기 때문에 다양한 완곡어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단어를 사용하든 또한 현실인식에 적절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공산주의 세계제국의 유일한 대안은 미제국 뿐이며, 미국의 공식적 경계를 고려할 때 문자 그대로의 전세계를 아우르지는(world-wide) 못했을지라도 세계를 통제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타임 Time』지에서 헨리 루스는 Henry Luce 『세계쟁취를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갔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President Truman 정치적 조력자인 찰스 로스를 Charles Ross 설득해 대통령도 이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은 Ronald Reagan “버냄은 미국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고 공표하면서 미국대통령자유메달(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21)

1970년대의 미국대외정책의 명실상부한 공식 교의로서 지정학이 부활할 수 있었던 데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Henry Kissinger 공이 컸다. 베트남전 참패라는 상황에 직면한 미국은 제국의 위기증가라는 상황을 돌파하고 권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은 President Nixon 지정학이라는 개념에 손을 뻗쳤다. 중-소 분열에 뒤이은 중국과의 교섭, 소비에트연방과의 화해분위기(détente) 조성 같은 냉전의 해동이 “지정학적 필요”로 제시되었다. 지정학에 대한 키신저의 언급은 1979년 발간된 그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 The White House Years』 곳곳에서 등장한다.22)

1970년대는 베트남전 패배 이후의 경제침체(economic stagnation)와 미국의 경제적 패권 하락을 목도한 시대였다. 1971년까지 미제국이 해외에 창출한 막대한 과잉달러 때문에 닉슨은 금과 달러의 연동을 끊는 수 밖에 없었고 기축통화로서의(as the hegemonic currency) 달러입지는 약화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Yom Kippur War)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아랍권의 석유불매 때문에 도래한 에너지 위기와 석유연합인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 출범은 페르시아만 석유에 대한 미국 자동차-석유기업복합체의 의존도 증가를 보여주었다. 1974-75년의 경기후퇴(recession)는 몇 번의 소귬 반등에도 불구하고, 이후 30년동안 꾸준히 이어진 미국경제의 장기적인 경제성장둔화(a secular slowdown)를 가져왔다.

1970년대 초반 미제국 전체가 위기에 빠진 데다가 보수주의자들이 “베트남증후군”(주변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지원에 대해 미국 국민의 저항)이라 칭한 미국 내 분위기로 인해 미국이 전쟁기제를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없게 되자 체계를 벗어나려는 제3세계 국가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관심이 중앙아메리카 및 미국의 “뒤뜰”인 카리브해연안의 혁명과 혁명적 운동에 맞서는 워싱턴의 노력에 쏠렸다. 그러나 미제국이 베트남전 이후 겪은 가장 큰 패배는 1979년 이란혁명(Iranian Revolution)이었다. 이란혁명은 지금까지 페르시아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에 요긴했던 샤(Shah)를 축출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그 즉시  CIA는 근대적 지하드를 지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여기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Osama Bin Laden 포함된다) 결집시켜 역사상 가장 은밀한 전쟁을 시작했다--중동에 대한 통제력 상실 및 미국의 석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미국 내 국가안보집단의 견해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총체적인 미국의 패권 회복, 특히 페르시아만에서의 미국의 입지 재구성을 위한 대규모 시도가 이루어졌다. 신호탄이 된 사건은 카터주의(Carter Doctrine)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 연두교서에서 “ 페르시아만 지역의 통제권을 획득하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는 미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같은 공격에 대해서는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먼로주의를 모델로 한 카터주의는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패권의 그늘이 페르시아만으로까지 확장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의 지정학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 1월 28일자 『비즈니스 위크 Business Week』에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미국 권력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자원의 지정학(geopolitics of minerals)”을 개발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신국제경제질서’를 바라는 탈-식민지 체제들 간의 요구와 다국적 자원기업에 관련된 적개심에 포위되었던 1980년대의” 미국은 전략적 자원과 “세계의 석유 및 천연자원 경로”의 상실에 점점 더 “취약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위크』가 이같이 언급한 의도는 “워싱턴이 대외정책의 이상주의적 목적과 지정학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절충하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23)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중부군사령부(Central Command; Centcom)를 창설함으로써 그와 같은 요구에 부응한다. 중부군사령부는 지역 “통합사령부” 다섯 개 중 하나로 지구 전역의 미국전투부대를 지휘한다. 중부군사령부의 명령권은 (페르시아만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남부 지역과 아프리카의 뿔(the Horn of Africa)7)을 아우른다. 창설당시부터 중부군사령부는 석유 흐름을 유지할 책임을 맡았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창설 이후 20년간 “중부군사령부가 치른 주요 전쟁만 4개에 달했다: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이후 아직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24)


새로운 지정학


그러나 미제국에 현저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은 1999년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이루어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소련의 권력약화에 따른 중동지역의 권력균형의 침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붕괴와 뒤이은 해체의 조짐은 미국이 걸프전 기간동안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자제하도록 만든 주요 이유 중 하나로도 작용했다. 소비에트 블록의 붕괴로 인해 생겨난 지정학적 불확실성 때문에 워싱턴은 중동 지역에 대규모 파병을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한편 그 불확실성은 이라크 침공과 점령이 미제국에 대한 소련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위험의 소지를 줄여주었고, 이후 소련에서 이후 벌어진 대규모 변화를 지연시키거나 반전시키지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은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은 1991년 여름에 찾아왔다.

뒤이어 미국을 유일한 초권력으로 하는 “일극체계”가 “새로운 세계질서”로 자리잡았다. 국방부는 곧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undersecretary of defense for policy) 올포위츠가 Wolfowitz 지휘하에 전략적 검토를 시작했다. 1992년 언론에 일부 흘러나온 이 계획은 『방위계획지침 Defense Planning Guidance』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에는 스픽만의 어투를 연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우리는 지상의 잠재적 경쟁자 등장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전략적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올포위츠는 또한 심장부주의를 모방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존속할 것이며 미국을 파괴할 능력을 지닌 지구상 유일한 세력이 될 것이다.”25) 『방위계획지침』은 선제행동을 통한 미국의 영구적인 군사적 패권유지라는 지구 차원의 지정학적 목적을 제안했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강력한 반대로 워싱턴은 단독으로 지구를 지배한다는 보고서 초안의 명시적 언급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의 국가안보집단과 대외정책집단은 십년에 걸쳐 미국이 수행해야 하는 지구적 패권이라는 막연한 목적의 범위와 관련한 논쟁을 벌였다. 1966년에서 69년 국무부 정무담당관을 지냈던 유진 로스토는 Eugene Rostow 1993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맥킨더[sic.]8) 용어로 주변부인) 아시아와 유럽의 해안지역을 공격했던 군사력을 지닌 막대한 권력의 중심을 구성[하는] [러시아의] 심장부 지역”을 포함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1994년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정학도들은...누가 러시아를 통치하든, 핼포드 맥킨더가 지정학적 심장부라고 지칭한 지역을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제국적 전통 중 하나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26) 지도적인 국가안보분석가들이 표명한 목적은 지구적 권력을 획득할 수단인 주변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논쟁은 끝내기 게임 자체보다는 미국이 (유럽과 일본을) 하위 파트너로 삼아 지구를 삼강구도로 통치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구상에 미국만의 제국을 단독으로 추구해야 하는 지에 집중되었다.27)

결국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논쟁은 부시와 클린턴 정부 시절(George H. W. Bush and Clinton years) 해외주둔미군이 실제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면서 비실용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미군의 투입은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 경제적 패권을 확장·갱신하려는 미국의 활발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당면 목적은 분명히 소비에트의 소멸에 따른 유라시아 심장부 주변의 방어선 안정화였다. 그러므로 1990년대의 군사적 개입은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의 뿔에서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미국의 지도 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코소보(Kosovo)의 경우) 11주에 걸쳐 폭격한 후 과거 소비에트 영향권의 일부였던 지역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지상군이 투입된 곳이다. 페르시아만의 경우 이라크에 경제봉쇄조치가 내려졌고 미국과 영국은 연일 폭격을 퍼부었다. 그사이 미국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카스피해연안을 에워싼 지역에 군사기지 구축을 시도했다.

1999년 해군대학의 전략 및 군사계획 교수(Professor of Strategy and Force Planning at the Naval War College) 맥커빈 토머스 오웬스는 Mackubin Thomas Owens 『해군대학평론 Naval War College Review』에 “고전적 지정학을 변호하며 In Defense of Classical Geopolitics”라는 제하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실었다. 맥킨더와 스픽만에 기초해 하우스호퍼를 비판하면서 오웬스는 탈냉전시대의 전쟁의 세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목적은 오로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고 미국의 제해권에 도전할 능력을 가진 패권국의 등장”을 사전에 예방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28)

이 시기에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전보장담당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er)인 쯔비그뉴 브레진스키가 Zbigniew Brzezinski 미제국 지정학의 열렬한 지지자로 등장했다. 『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에서 그는 맥킨더와 하우스호퍼 (그리고 하우스호퍼 이론의 “통속적 반향”인 히틀러의 “독일민족에게 필요한 ‘생활공간’ 강조”)에 의해 활성화된 심장부주의를 직접 언급했다. 변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의 우세가 전지구적 차원의 주도권을 쥐었음을 알게 해주는 핵심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에 지정학은 지역 차원에서 지구 차원으로 이동해왔다. 미국은...이제 유라시아 대륙의 삼면--서(유럽), 남부(중동을 포함한 중앙남부 유라시아), 동부(동아시아 태평양 주변부)--에 전략적 군사배치를 직접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국제적 주도권을 향유한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가진 전지구 차원의 주도권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우세를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가에 달려있으므로 최초의 그리고 진정 유일한 전지구적 차원의 권력”을 지닌 미국건설을 통해 그가 “전지구에 대한 지배권(global supremacy”이라고 이름붙인 “새로운 종류의 패권” 창출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논의했다.29)

클린턴 정부 시절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제국적 지정학이 대외정책을 지배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우월한 측면이 많았다.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 시절에도 역시 이 두 차원이 모두 존재했으나 애초부터 강조점은 반전되어 있었고 따라서 경제적 권력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정학적/군사적 활동을 통해 미국의 전지구적 주도권을 강화하는 측면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다 많이 보였다. 이같은 초점이동은 2000년 선거기간 중 발간된 핵심인물의 두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부통령 후보자인 딕 체니의 Dick Cheney 부탁으로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기획(the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도널드 럼스펠드 Donald Rumsfeld, 폴 올포위츠, 루이스 리비 Lewis Libby, 조지부시의 동생 젭이 Jeb 참여하는 전략적 정책 집단)이 작성해 2000년 9월 발간된 『미국방위의 재구축 Rebuilding America's Defenses』이라는 제하의 대외정책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1992년 『방위계획지침』의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전략을 강력히 재천명했다. 다른 하나는 곧바로 정책계획국장(director of policy planning)으로서 콜린 파월의 Colin Powell 국무부에 합류한 리처드 하스의 Richard Haass 2000년 11월 11일의 연설 “미제국”이었다. 하스는 미국인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전통적인 민족국가에서 제국권력으로 재인식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지구적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은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Great Powers9)에서 제안한 “제국의 과다확장”이 아니라 “제국의 과소확장”이라는 것이다.30)

2001년 9월 11일 테러주의자들이 공격해오자 부시 행정부는 즉시 세계적이고 장기적인 테러주의에 대한 전지구적 전쟁을 선언한다. 이 전쟁은 미제국의 권력의 확장을 정당화시키는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요란스럽게 선전하던 2002년 9월, 백악관이 의회에 전달한 미국의 『신국가안보전략 new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은 1992년 올포위츠가 작성했던 기존의 『방위계획지침』을 모델로 작성된 것이다. 『신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의 공식 전략정책으로 자리잡았다: (1) 미국과 대등하거나 미국보다 더 큰 군사적 역량을 가진 국가의 사전 방지; (2) 결국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적 역량을 키우는 국가 및 그 우방국과 동맹국에 대항한 “선제”공격 수행--심지어는 곧 닥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사전 조치함; (3)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미국의 관리와 군병력의 면책주장. 여기서 재차 “패권 보호”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스픽만의 선언이 반영되는데, 명시적 목적이 미국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도전할 가능성 차단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통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지배함으로써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석유수요증가 및 공급감소가 나타나는 이 시기에 세계의 주요 원유비축지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미제국 권력 증강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을 확보하게 되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대부분의 석유와 천연가스공급이 페르시아만, 카스피해연안, 서아프리카에 집중될 것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미국은 화석연료 자체에 대한 언급이 극히 자제된 지정학적 언어를 이용해 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자신의 “극히 중대한 이익”을 실현할 것으로 보인다.

2004년 5월 앨런 라슨 Allan Larson 국무부 경제·기업·농업담당 차관은 “석유와 천연가스의 지정학”이라는 제하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서 그는 “석유나 가스가 발견되는 국가의 대부분은 도전적이거나 지리적으로 까다로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원유사업의 공리”라고 선언했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지정학은 극히 중대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페르시아만, 러시아와 카스피해 연안, 서아프리카와 베네수엘라에서 창출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31)

새로운 지정학은 세계지배라는 목표를 고전적 지정학과 공유하지만 특히 중앙남부 유라시아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변화했다. 마이클 클레어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수행하는 전쟁의 목적은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지도를 다시 그려” 러시아, 중국, 유럽공동체, 일본, 심지어는 인도를 포함한 “다른 잠재적인 경쟁자 또는...대척 지역에 미국의 권력과 지배권을 심고 공고히하는 것이다. 미국의 엘리트집단은 유라시아의 유럽 및 동아시아 주변부를 미국이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거나 혹은 덜 중요[하거나] 둘 다인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들이 볼 때 지정학적 경쟁에서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지역은 남부중앙 유라시아로,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페르시아만과 나머지 3분의 1의 대부분이 매장되어 있는 카스피해 연안과 중앙아시아의 주변국을 에워싸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 세계적 투쟁과 갈등의 새로운 중심지이며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이 결정적인 지역을 지배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32)

1999년 6월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분석을 명시적으로 채택한, “새로운 지정학”이라는 제하의 『이코노미스트 Economist』 특별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코소보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민주주의의 제국”을 다투는 지정학적 투쟁의 핵심은 유라시아와 특별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통제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자신들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한 카스피해 연안까지 확장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미제국의 확장은 그러므로 불가피하다.33)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은 브레진스키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전략은 맥킨더가 “단일한 세계제국”이라고 칭한 것의 반영이다. 이 새로운 지정학은 제국의 맹신도들 사이에 만연했다. 『아틀란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의 통신원 로버트 캐플런은 Robert Kaplan 최근 발간한 저서, 『제국의 첨병 Imperial Grunts』 서두를 다섯 개의 “통합시령부”를 주둔시킨 펜타곤의 지구적 군사배치도가 “지정학의 지도적 인물인 칼 하우스호퍼 교수가 1931년 독일군을 위해 그린” 지도와 “이상하리만큼 닮았다”는 찬사로 장식하기도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캐플런은 키플링의 시 “백인의 부담 The White Man's Burden”을 “이상주의적” 가치의 현신이라고 언급하며 나아가 언론인인 자신의 “미제국의 막사와 병영을 돌아보러 다니는 여정(odyssey)”을 새로운 “아메리카인디언 국가(Injun Country)”로의 여행이라고 특징짓기에 이른다.34)


지정학의 실패


1943년 이후 지정학적 분석이 인기를 상실한 것은 일반적으로 나치의 세계정복전략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중이 지정학을 거부한 일은 모든 형태의 고전적 지정학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전쟁과 연계된 사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다. 1942년 비판적 지정학 분석가 로버트 스트라우크-후페는 Robert Strausz-Hupé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지정학은 전쟁과 평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확장을 추구하고 확장과정은 영구전쟁으로--군사력이 실질적으로 적용되건 연기된 위협의 도구인 ‘평화적’ 외교술을 이용하건 간에--인식되었다.”35)

미제국의 지정학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지구적 공간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의 지배계급--과 3강(북아메리카, 유럽, 일본) 전반의 지배계급과 연계된 다소 협소한 범위를 대변하는 자본축적에 헌신하는 세계를 형성해가는 중이다. “식민주의의 종식”과 “새로운 반자본주의적 국가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비지니스 위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들을 포괄하는 미국 권력의 우산”이 존재해왔다...“미국은 보다 자유로운 무역, 투자, 정치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서구 국가들 사이의 번영증가를 이룰 능력이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이같은 정치적 틀의 경제적 표현이었다.”36)

미국의 지배권이 미국의 파워엘리트 뿐 아니라 핵심자본주의국가 중 상위집단의 파워엘리트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특정 자본주의국가와 그들의 지배계급에 존재하는 전지구적 패권을 향한 충동은 자본축적 자체 같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인식하지 못한다.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Socialism or Barbarism』에서 이스트반 메자로스는 István Mészáros 통제되지 않는 미제국의 야망으로 인해 세계는 잠재적으로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위험한 국면”으로 진입 중이었다고 논의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위기는 불이익을 주면서도 여전히 몇몇 경쟁자들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하면서--규모와 무관하게--지구상의 특정 지역을 통제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군사적 초권력을 지닌 하나의 패권이 전체성을 통제하는 데 기인한다...전체성의 통제는 양립할 수 없는 적수를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구적으로 발전된 자본의 궁극적 합리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그러한 합리성이...동시에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결부될 경우, 나치의 세계정복개념을 포함해,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비합리성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37)

유일한 초권력에 의해 시작된 노골적인 제국주의(naked imperialism)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누구나 전지구와 거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본질을 이해한다. 조지타운 대학의 지정학 및 지구정의 교수인 G. 존 이켄베리가 G. John Ikenberry 2002년 『외교문제』에 실은 글 “미국의 제국적 야망”에 따르면: 미국의 “신제국이라는 이상”은 “규범을 정하고, 위협대상을 결정하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정의를 실현하는 지구적 역할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월권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군사적 주도권을 향유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운 목적은 이같은 이점을 영구적인 것으로, 다른 국가들이 따라잡을 시도조차 못하도록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은 이 전략을 ‘포위돌파(breakout)’라고 묘사해왔다.” 그러나 이켄베리에 따르면 그같은--제국의 적수를 완전히 제거하는--“강경한 제국적 거대 전략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38)

제국주의의 경제적 뿌리를 강조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은 전지구적 공세는 그 야만성만큼이나 성과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권력이란 포신에 의존할 경우 일시적으로 부과될 수 있지만, 그 진정한 원천은 본질상 덧없는 상대적 경제권력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미국 패권의 등장과 함께 끝난 것으로 생각되어온 제국간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제국간 경쟁은 워싱턴의 무제한적 패권 추구를 유지시켜왔다. 그 연원은 경쟁하는 민족국가들로 나뉘어진 세계에서 기저에 깔려있는 자본의 논리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초권력인 미국은 오늘날 최후의 세계지배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기획”은 미국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대한 주요 경쟁자(나 잠재적 경쟁자)를 염두에 두고 “포위돌파” 전략을 완수하면서 동시에 주위국가들로부터 가능한 최대한의 잉여를 추출하기 위해 작동되는 미국 주도의 지구적 제국창조 시도를 상징한다. 이같은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며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지정학의 실패가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맑스주의 제국이론은 언제나 지정학의 문제보다는 지경학(geoeconomics)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왔다. 지경학적 관점으로 볼 때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발전(uneven-and-combined capitalist development)은 지정학적/군사적 수단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전지구적 생산력의 이동으로 귀결된다. 자본주의 하의 제국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게다가 영구히 지배할 수 있는 세계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의 제국이란 더 거대하고 잠재적으로 더 위험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랜기간을 거친 진화는--대량파괴를 가능케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한--야만으로 향해간다.

이 불상사 속에서도 우리는 극복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것을 제국주의와 전쟁의 특정 사례에 국한하지 않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부양하는 세계경제체계 전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새로운 세계평화운동을 구축함으로써 희망의 불씨를 보존할 수 있다. 전지구적 착취와 제국의 지정학이 더 이상 주된 목적이 되지 못하는 실제적인 평등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는 이같은 급진적 평등주의 질서를 이르는 명칭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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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Bellamy Foster, "The New Geopolitics of Empire", Monthly Review vol. 57, no. 8, January 2006.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106jbf.htm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주 이다.

 

원주

 

1) Michael Klare, "The New Geopolitics," Monthly Review, vol. 55, no. 3 (July-August 2003), 51-56. “제국의 경제적 뿌리”라는 구절은 1902년 존 홉슨의 John Hobson 고전적 저서 『제국주의: 일 연구  Imperialism: A Study』(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5), 71에서 차용한 것이다.

2) Franz Neumann, Behemoth: The Structure and Practice of National Social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147.

3) Alfred Thayer Mahan,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London: Sampson, Low, Marston, 1890); Brooks Adams, The New Empire (London: Macmillan, 1902); Frederick Jackson Turner, The Frontier in History (New York: Henry Holt and Co., 1921). 터너의 책은 미국의 해외확장의 필요성을 방어하는 논리를 펼쳤던 1893년 논문과 1896년 『아틀란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에 실린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The Frontier in History의 219를 보라.

4) Halford Mackinder,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 Geographical Journal, vol. 23, no. 4 (April 1904), 421-44.

5) Halford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New York: Henry Holt and Co., 1919), 1-2.

6)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179-81. 맥킨더 경제관점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Bernard Semmel, Imperialism and Social Reform (Garden City, New York: Anchor Books, 1960), 157-68을 보라.

7) Halford Mackinder,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 Foreign Affairs, vol. 21, no. 4, (July 1943), 601.

8)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186.

9) Brian W. Blouet, Halford Mackinder (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87), 172-77.

10) Ratzel quoted in Robert Strausz-Hupé, Geopolitics: The Struggle for Space and Power (New York: G.P. Putnam’s Sons, 1942), 31.

11) Strausz-Hupé, Geopolitics, 66, 227; Neumann, Behemoth, 156-60.

12) Haushofer quoted in Strauz-Hupé, Geopolitics, 152; Neumann, Behemoth, 144.

13) Derwent Whittlesey, "Haushofer: Geopoliticians," in Edward Mead Earle, ed., Makers of Modern Strateg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8), 388-411; German Strategy of World Conquest (New York: Farrar & Rinehart, Inc., 1942), 70-78; Andreas Dorpalen, The World of General Haushofer (New York: Farrar & Rinehart, 1942), 70-78; David Thomas Murphy, The Heroic Earth: Geopolitical Thought in Weimar Germany, 1918-1933 (Kent, Ohio: Kent State University Press, 1997); Saul B. Cohen, Geopolitics in the World System (New York: Rowman and Littlefield, 2003), 21-22.

14) Nicholas John Spykman, The Geography of the Peac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44), 43.

15) Nicholas John Spykman, 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42), 19, 458-60.

16) Spykman, Geography of the Peace, 57.

17) Noam Chomsky, “The Cold War and the Superpowers,” Monthly Review, vol. 33, no. 6 (November 1981), 1-10; Neil Smith, American Empire: Roosevelt’s Geographer and the Prelude to Globalizat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325-31.

18) Smith, American Empire, 287, 329.

19) Mackinder,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 598.

20) Colin S. Gray, The Geopolitics of the Nuclear Era (New York: Crane, Russak, and Co., 1977), 14.

21) James Burnham, The Struggle for the World (New York: John Day, 1947), 114-15, 162, 182; Gary Dorrien, Imperial Designs: Neoconservatism and the New Pax Americana (New York: Routledge, 2004), 22-25; Francis P. Sempa, Geopolitics: From the Cold War to the 21st Century (New Brunswick, New Jersey: Transaction Publishers, 2002), 25-63. 버냄과 마찬가지로 레이먼드 애론 Raymond Aron 역시 자신의 책 『총체적 전쟁의 세기 Century of Total War』(Boston: Beacon Press, 1955), 111에서 소비에트연방을 세계섬에 대한 위험세력이라고 언급했다.

22) Leslie W. Hepple, “The Revival of Geopolitics,” Political Geography Quarterly, volume 5, no. 4 (October 1986), supplement, S21-S36.

23) “Fresh Fears that the Soviets Will Cut Off Critical Minerals,” Business Week, January 28, 1980, 62-63; Noam Chomsky, Towards a New Cold War (New York: The New Press, 2003), 180-81.

24) Michael Klare, Blood and Oil (New York: Henry Holt and Co., 2004), 2.

25) “Excerpts from Pentagon’s Plan: ‘Preventing the Re-Emergence of a New Rival,’” New York Times, March 8, 1992; “Keeping the U.S. First,” Washington Post, March 11, 1992; Dorrien, Imperial Design, 40-41.

26) Eugene V. Rostow, A Breakfast for Bonaparte (Washington, D.C.: National Defense University Press, 1993), 14; Henry Kissinger, Diplomac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4), 814.

27) 이같은 맥락에서 맥킨더의 저서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어 1996년 국방대학교(the National Defense University)에서 『민주적 이상과 현실을 재출간하기에 이른다.

28) Mackubin Thomas Owens, "In Defense of Classical Geopolitics," Naval War College Review, vol. 52, no. 4 (Autumn 1999),

http://www.nwc.navy.mil/press/review/1999/autumn/art3-a99.htm.

29) Zbigniew Brzezinski, 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 (New York: Basic Books, 1997), 3, 10, 30, 38-39. [국역--김영섭 옮김, 『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삼인, 2000.]

30) See John Bellamy Foster “‘Imperial America’ and War,” Monthly Review, vol. 55, no. 1 (May 2003), 1-10.

31) Alan Larson, "Geopolitics of Oil and Natural Gas," Economic Perspectives, May 2004.

32) Klare, "The New Geopolitics," 53-54.

33) "The New Geopolitics," Economist, July 31, 1999, 13, 15-16.

34) Robert Kaplan, Imperial Grunts (New York: Random House, 2005), 3-15.

35) Strausz-Hupé, Geopolitics, 101.

36) "The Fearful Drift of Foreign Policy," Business Week, April 7, 1975, 21.

37) István Mészáros, Socialism or Barbar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1), 38.

38) G. John Ikenberry, "America's Imperial Ambition," Foreign Affairs vol. 81, no. 5 (September-October 2002), 44, 50, 59.

 

옮긴이주

 

1)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1898

    보어전쟁(Boer War)-1899-1902

2) 1919. 6. 28. 1차세계대전 이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조약.

3) 산업혁명의 발상지 중 하나

4) 1845년 미국의 텍사스 병합 당시 『데모크라틱 리뷰』지의 주필이던 J. L. 오설리번(1813~95)이 『데모크라틱 리뷰』 7, 8월호에 게재한 논설 중 “아메리카대륙에 확대해야 할 우리의 명백한 운명은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신이 베풀어 주신 것이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고 이후 미국의 영토팽창 이념의 표어가 된 이 말은 텍사스 병합에 뒤이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오리건의 합병 등 미국의 영토 확장주의 정책의 논거로 이용되었다.

5) 1823년 12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J.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으로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독립 직후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국이 공동선언을 제의한 데 대하여 미국이 독자적으로 선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국무장관 J. Q. 애덤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먼로주의의 근원은 대통령 G. 워싱턴 이래의 고립주의에 근거하여 더욱 명확히 발전시킨 것으로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 배격의 원칙 등 3개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정책의 일방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국제법과 같은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충분히 있었고, 또 각종 사건에 의하여 국제적으로도 사실상 이를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6)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가 조인한 상호불가침조약.

7) 아프리카 북동부 10개국

8) 주변부이론은 스픽만의 용어이다.

9) 국역--이왈수 등 옮김,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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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arvey, &quot;Neo-Liberalism as Creative Destruction&quot;

신자유주의, 창조적 파괴*

데이비드 하비**


우선 신자유주의는 사적소유권,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특징으로 하는 제도적 안에서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인간의 복리(well-being) 가장 증진될 있다고 하는 정치경제적 실천이론이다. 국가의 역할은 그와 같은 실천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국가는 화폐의 품질과 보전에 관여해야만 한다. 또한 국가는 사적소유권을 보증하고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방위, 경찰 사법 기능을 창출해야만 한다. 나아가 (교육, 보건, 사회보장, 환경오염 등의 분야)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필요한 경우 국가활동을 통해 시장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과제 이상을 넘보면 안된다. (일단 창출된) 시장에서 국가개입은 최소한도로 유지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시장신호를(가격) 예측할(second-guess) 충분한 정보를 가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국가개입의 왜곡과 편향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신자유주의 실천은 종종 다양한 이유로 이같은 틀(template)에서 벗어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정치-경제적 실천과 사상에 있어 표면상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혁명(Thatcher/Reagan revolutions in Britain and the US)을 필두로 한 현저한 선회가 도처에 존재해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등장한 새로운 국가로부터 뉴질랜드나 스웨덴 같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나 복지국가 같은 과거형태의 국가에 이르는 국가들이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강압에 의해 차례로 신자유주의의 견해를 일부 받아들여 적어도 일부 정책과 실천을 조정하기에 이른다. 아파르트헤이드1) 이후의 남아프리카(Post-apartheid South Africa)는 재빨리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수용했고 심지어 현대 중국은 그 방면에서 선두주자로 나섰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지지자들은 이제 교육(대학과 여러 "두뇌집단(think tanks)"), 매체, 기업경영실과 금융기관, 핵심국가기관(재무부, 중앙은행)과 더불어 국제금융과 무역을 규제하는 IMF나 WTO 같은 국제기구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는 담론양식의 패권(hegemony)을 장악한 것이다. 또한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이용하는 상식적인 방식에 신자유주의가 적절히 통합되도록 사고방식 및 정치-경제적 실천에 스미는 영향력을 지닌다.

사실상 신자유주의화는 거대한 조수 같은 제도적 개혁과 광범위한 조정으로 세계를 휩쓸었다. 비록 지리적으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북한 같은 소수의 예외 외에는) 완전히 안전한 곳이 있다고 주장할 없다. 나아가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WTO (국제금융을 주도하는) IMF 통해 작금에 성립된 게임의 규칙(rules of engagement) 신자유주의를 전지구적 규칙의 집대성이라고 예시한다(instanciate). WTO IMF 서명한 국가 (누가 외부에 존재할 있겠는가?) 모두 (완만한 조정을 허용하는 "유예기간(grace period)" 있다고는 해도) 이러한 규칙을 지키거나 아니면 혹독한 불이익을 받는다는데 동의한다.

신자유주의적 체계의 창조는 분명 다량의 파괴를 수반해왔다. (정치-경제적 사안을 지배하는 이전의 국가주권을 전제로 하는) 이전의 제도적틀과 권력 아니라 노동분업, 사회관계, 복지급여, 기술적 혼합, 생활 방식, 토지접근성, 기질(habits of the heart), 사고방식 등등도 파괴했다. 신자유주의적 혁명의 득실에 대한 평가가 요청된다. 그러므로 다음에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이러한 변환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논의를 약술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차없는 강도로 신자유주의적 혁명으로 몰아가는  저변의 동인, 이해관계, 주체에 익숙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수사가 자신에게 적대하게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누구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위해서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특정이해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그들의 주장대로 누구에게나·어디에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는가?


신자유주의의 '이식'

어떤 사상체계든 패권을 장악하려면 상식적인 이해 속에 깊이 체화시켜, 당연시되고 의심받지 않도록 근본개념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낡은 개념은 큰 소용이 없다. 우리의 직관과 본능에, 우리의 가치와 바람에, 우리가 거주하는 사회적 세계에 내재한 것처럼 보일 가능성에 거의 "자연스럽게" 호소하는 개념적 도구가 구성되어야만 한다. 신자유주의적 사상의 설립자들은 개인적 자유(individual liberty and freedom)라는 정치적 이상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문명화의 핵심가치"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한 일은 현명한 좋은 선택으로, 이들은 개념으로서 진정 압도적이며 대단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가치들이 파시즘, 독재, 공산주의 뿐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개인의 판단을 집합적 판단으로 대체했던 모든 형태의 국가개입에 의해 위협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들은 "(사적소유권과 경쟁적인 시장)에 결부된 권력과 주도권의 확산 없이 자유가 효과적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결론짓는다.1)

논의의 결론이 논의의 처음과 필연적으로 부합하는 지의 문제와는 별도로 개인의 자유 개념이 본래 강력하고 호소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력한 역사적 실체를 가져왔던 영역 외부에서조차 그러하다. 이러한 이상은 냉전종식 이전의 동유럽 소비에트연방의 반체제운동과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1968년파리와 시카고에서 방콕과 멕시코시티까지온 세계를 휩쓸었던 학생운동 일부는 보다 많은 언론의 자유와 개인적 선택의 자유에의 요구에 의해 추동되었다. 이러한 이상이 변화의 강력한 역사적 작인임이 다시금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의 호소가 수사적으로 가는 곳마다 우리를 에워싸고 모든 형태의 현대정치선언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미국이 특히 그렇다. 일례로 '911테러'로 알려진 공격의 일주년에 부시 대통령은 사건 직후 발간된 미국방전략 문서(the US National Defense Strategy document)에서 발췌한 생각을 뉴욕타임즈 New York Times 특집란에 실었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전을 준비할 때도 그랬듯) "자유가 증대되는 평화로운 세계는 미국의 장기간의 이익에 기여했고 불후의 미국의 이상을 반영하며 미국의 우방을 단결시킨다"고 기록했다. "인류는 오랜 원수를 제압하고 자유에 승리를 안길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게다가 이후 그는 보다 정서적인 호소를 통해 "자유는 세계의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전능자의 선물"이며 "지구상의 최강 권력인 (미국은) 자유의 확산을 도울 의무를 (지닌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2) 

그러므로 이라크에 대한 선제권을 정당화하는 다른 이유가 모두 그릇되었거나 최소한 미달임이 증명되었을 때, 부시행정부는 이라크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전쟁을 적절히 정당화한다는 생각에 점점 더 많이 호소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파악되는 "자유"의 종류는 문화비평가 매튜 아놀드가 Mathew Arnold 오래 전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한 바와 같다: "자유는 타기 좋은 말이지만 어디로든 가는 말"이다.3) 무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제로 기증된 자유라는 말을 탄 이라크인들이 가는 행선지가 어디라고 예상하는가?

이에 대한 미국의 대답은 2003년 9월 19일 임시군사정부(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행정관 폴 브레머가 Paul Bremer "공기업의 완전한 사유화, 이라크 경제에 대한 외국기업의 제한 없는 소유권, 해외투자 이윤의 제한 없는 본국 송금이라크 은행 개설에 대한 외국의 통제권, 외국기업과 국내기업의 동등한 대우무역장벽의 거의 완전한 철폐"를 포함하는 네가지 명령을 포고했을 때 명쾌하게 드러났다.4) 이 명령들은, 공공서비스, 매체산업, 제조업, 서비스산업, 운송, 금융, 건설부문을 포함한 경제전반에 적용되었다. 오직 석유만이 제외되었다. 일률과세를 요구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역진적인 세금체계도 제도화되었다. 파업권은 불법화되었고 노조는 주요 부문에서 제외되었다. 임시군사정부의 이라크인 구성원들은 "역사를 무시한 결함투성이 논리"라며 "자유시장근본주의"의 강제 부과에 저항했다.5) 그러나 2004년 수립된 이라크임시정부는 권력변동이나 새로운 법 제정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미 공표된 포고(decrees)만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부과하려고 애썼던 것은 분명 이라크인이나 외국인이나 시장진입자라면 동일하게 이윤을 있는 자본축적조건의 활성화를 근본적인 임무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완전한 신자유주의적 국가기구였다. , 이라크인들이 자유라는 말을 타고 신자유주의의 산호초 속으로 뛰어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브레머의 포고는 부의 창출에 있어 필요하면서 충분하고 그러므로 이라크인들의 복리를 향상시킨다고 한다. 포고는 , 개인의 자유, 민주정부에 근거한 적절한 통치에 적당한 기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 발생한 폭동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반한 자유시장근본주의를 포용할 밖에 없도록 몰린 이라크의 저항으로 통역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국가체제에 대한 최초의 거대한 실험은 브레머의 포고가 발행되기 거의 30여년 전 일어난 1973년의 "소 (小)911(little September 11th)"이라 불리는 피노체트 쿠데타(Pinochet's coup) 이후의 칠레였음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Salvador Allende  좌파사회민주주의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쿠데타는 CIA와 미국부장관 헨리 키신저가 강력하게 지원한 것이었다. 쿠데타는 모든 사회운동과 좌파정치조직을 폭력적으로 탄압했고 (빈곤지역의 지역보건소 같은) 모든 형태의 대중조직을 해체했다. 노동시장은 규제나 (노조 같은) 제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1973년까지 경제재부흥을 꾀했던 (그리고 1964년 군사쿠데타 이후의 브라질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뒀던)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한  과거의 수입대체정책은 비판받았다. 심각한 경제후퇴의 한가운데에 놓인 세계경제와 더불어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밀튼 프리드먼의 Milton Friedman 신자유주의 이론을 따른다고 해서 "시카고학파(the Chicago boys)"로 불리는 일단의 미국 경제학자들이 칠레의 경제재건을 돕기 위해 초빙되었다. 그들은 공공자산의 민영화, 천연자원의 사적 착취 허용, 해외직접투자와 자유무역 촉진 등의 자유시장노선을 따랐다. 칠레에서 운영되는 외국기업 자회사의 이윤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했다. 수출주도성장은 수입대체정책보다 선호되었다. (대처 하의) 영국, (레이건 하의) 미국은 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선회하게 만든 근거를 제시한 성장률, 자본축적, 외국기업의 고도투자회수율 수치로 확인되는 칠레 경제의 부활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소수파가 수행했던 창조적 파괴의 야만적 실험은 중심적인 정책체제모델이 되었다.6)

그토록 상이한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너무나도 유사한 국가기구의 재건이 미국의 강압적인 영향력 행사로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해볼 있다. 사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 걸쳐 급속히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국가 뒤에 미제국권력이 엄존했음을 보여준다. 지난30년간 작동해온 과정의 강력한 요인들이 존재해왔지만  이것이 이야기 구성의 전부라고 수는 없다. 어쨌든 1979 마가릿 대처가 신자유주의의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한 것은 미국이 아니다. 1980년대 초반 대처는 꾸준히 신자유주의를 지지해 레이건보다 훨씬 일관된 신자유주의 지지자였다. 또한 1978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중국이 자유화의 길을 걷도록 만든 것도 미국은 아니었다. 1992 인도나 스웨덴이 신자유주의로 이동해간 미제국권력이 기여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세계를 무대로 신자유주의의 지리학적 불균등발전은 다중적인 결정 적지 않은 혼돈과 혼란을 야기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자유주의적 선회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체계가 되도록 몰아간 세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선회의 이유

1960년대말로 향하던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1973년 초 심각한 경기후퇴가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발생했다. 중동전쟁(the Arab-Israeli war) 발발 이후의 석유수출금지와 유가상승은 이미 심각해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회적(일례로 복지국가)·개인적 임금에 큰 관심을 기울인 개입주의적 국가에 의해 중재된 자본과 노동의 불편한 협약 같은 류에 방점을 찍었던 전후의 "체화된 자본주의(embedded capitalism)"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국제무역과 금융규제를 위해 성립된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는 1973년 변동환율제의 채택과 함께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브레튼우즈체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의 고도성장을 가능케했고  (가장 분명하게는 일본에, 그러나 또한 남아메리카 전반과 동남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불균등하게)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걸친  자본주의의  "황금기" 동안 초과이득을 창출했다. 그러나 이제 그 힘이 소진되어, 자본축적과정의 재출발을 위해 몇몇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7) 어떤 종류의 개혁이 수행되든, 그 개혁들은 자본축적 소생(revival)을 위한 적절한 조건의 재구축을 추구해야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유일한 해답으로 신자유주의가 승리자로  등장한 방식과 이유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여기에 소상히 밝히기 어렵다. 되돌아보면 그 해답은 필연적이고, 명확해 보였으나 내 생각에는 당시 누구도 어떤 종류의 해답이 어떻게 작용할 지 확실히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세계는 1990년대의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구축과 함께 새로운 정통교의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로 그저 수렴되었을 뿐인 일련의 선회와 혼돈스런 사건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를 해답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stumble towards). 신자유주의의 지리적 불균등 발전, 한 국가와 사회체제에서 다른 국가와 사회체제로의 빈번한 편파적·일방적 적용은 정치세력·역사적 전통·기존의 제도적 구성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의 실질적인 발생 이유와 방식을 구체화했던 신자유주의적 해답과 방법의 모호성을 입증해준다.

그러나 특별히 주목받을만한 요소가 이 이행(transition)에 존재한다. 1970년대의 자본축적위기는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가속의 결합을 통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쳤다. 불만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선진자본주의 세계 대부분에서 벌어진 노동과 도시사회운동의 결합은 전후 성공적인 자본축적의 근간이었던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절충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등장을 겨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정당이 유럽 대부분에서 근거를 확보했고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대중세력들은 환경보전에서 직업안정과 보건, 기업의 불법행위로부터의 소비자보호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과 국가개입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와중에 지배계급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위협이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와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같은) 다수의 개발도상국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넘어 지배계급의 지위에 대한 경제적 위협이 이제 명백해지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전후사회 안정의 한 조건은 상부계급(upper class)의 경제적 권력을 제한하고 경제적 파이에서 보다 큰 몫을 노동에 허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상위1% 소득자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 전 16%였던 것이 이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8%까지 하락했고 30년간 그 수준을 유지했다. 강력한 성장기에는 이정도 제한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들어 성장이 붕괴하면서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배당이 줄어들었으며, 지배계급 스스로 깊은 경제적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이윤이 하락했다. 정치적 경제적 절멸의 위기에 처한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려면 단호히 움직여야만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지배 엘리트가 내부에서 추동하고 지도한 칠레의 쿠데타 및 군부의 아르헨티나 접수2)는 일종의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소생한 자본축적의 이득이 고도로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해외투자자를 추종하는 국가와 지배 엘리트는 일반대중이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잘 나갔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충분한 효과였으며, 전체 기획에 있어 구조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물론 뒤메닐과 레비는 Dumenil and Levy 신자유주의가 애당초 인구 중 부유층이 지닌 계급권력 복원(restoration) 달성을 위한 기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어떻게 1980년대 중반 이후 최상위 소득자 1%의 몫이 20세기가 끝날 무렵 15%까지 치솟았는지를 보여준다. 다른 수치는 최상위 소득자 0.1%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8년 2%에서 1999년에는 6%를 상회함을 보여준다. 최고경영자 보수에 대한 노동자보수 중간값(median)의 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측정치는 1970년 30대 1이었으나 2000년에 이르면 400대 1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제 효과를 보이는 부시행정부의 감세정책과 더불어 사회의 상위계층에게 소득과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제 궤도에 오르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8) 그리고 이 현상은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국의 상위1% 소득자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년간 6.5%에서 13%로 두배 증가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이 러시아에 시행된 이래, 소(小)과두정 내의 부와 권력의 이례적인 집중, 보다 신자유적인 실천을 채택한 중국에서의 소득과 부의 불평등의 이례적 상승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과 무관한 예외도 있지만(일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프랑스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적절한 수준에서 소득불평등 수준을 억제해왔다) 신자유적 선회가 일정한 방식과 일정한 수준에서 상부계급권력의 복원 또는 재구성 기획과 결부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국제자본주의의 재조직을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유토피아적 기획 또는 자본축적 조건의 재구축과 계급권력복원을 염두에 정치적 기획으로써 검토할 있다. 이어지는 글의 내용은 당연히 목적들 마지막 목적이 지배적인 내용이라는 주장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축적의 회생에는 소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계급권력의 복원에서는 주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결과 신자유주의 논의의 이론적 유토피아주의는 계급권력복원을 위해 수행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정당화와 정당성부여 체계로 작용했다. 신자유주의의 원칙은 같은 계급기획과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바로 폐기된다.


계급권력의 복원을 향하여

만일 계급권력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전지구적자본주의 내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수행되었는가? 칠레와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에서는 그 신속성, 야만성, 확실성만큼이나 해답도 간단하다: 상부계급이 지원한 군사 쿠데타, 뒤이어 이루어진 권력의 위협요소였던 노동운동과 도시사회운동 내에 창조된 모든 연대에 대한 맹렬한 탄압. 1976년의 영국이나 멕시코 같은 그 외 지역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들에게 건전한 재정 재구축을 위해 사회적 지출과 복지국가의 축소 정책을 채택하도록 (정책적 동의도 없이) 종용한 아직은 맹렬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이라는 완곡한 암시의 형식을 취했다. 영국에서는 물론 1979년 이후 마거릿 대처는 철저히 신자유주의 논의에 끼어들었고  자신이 소속된 당 내 반대자들을 완전히 물리치지도 못했고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같은 복지국가의 핵심요소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휘둘렀다. 흥미로운 것은 고등교육에 등록금제도를 감히 도입한 것은 2004년 노동당 정부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화 과정은 고르지 못하고 지리적으로도 불균등하며 특정국가체제 내에서, 심지어는 (건강과 교육 같은) 특정 부문 내에서 신자유주의의 핵심계획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계급 및 여타 사회세력 간의 균형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아왔다.9)

그러나 보다 특화시켜 미국 내에서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사례는 이후 진행된 전지구적 변환에 영향을 미친 핵심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 중반 사실상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미국과의 계약(Contract on America)" 국내행동강령으로 천명한 공화당의 의회권력 장악에서 정점을 이룬 변천(passage) 매우 특수한 관례(rite) 창조에는 다양한 권력요소들이 얽혀있다. 그러나 이전에, 서로 의지하고 서로 강화하는 많은 단계가 수반된다.

우선 1970년까지 상부계급 사이에 의식이 증가했고 또는 1960년대 말에 등장했던 반기업, 반제국주의 정서가 과도했다. 공개된 메모에는 (닉슨에 의해 대법원까지 승진했던) 루이스 파월이 Lewis Powell 1971년 미국상공회의소에 기업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라는 집단선전전을 펼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 즉시 은밀하지만 깊은 영향력과 권력을 지닌 산업원탁회의(Business Round Table)가 구성되었다(이 회의는 아직도 존속 중이며 공화당 정책에서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1974년의 정치자금법 하에서 합법화된) 기업정치행동위원회(Corporate Political Action Committees)는 들불처럼 급속히 증가했 1976년 대법원 결정에서 언론자유의 형태로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는 것으로 판단된 그들의 활동을 통해 기업과 금융권력의 (특수하거나 개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인 유일한 계급도구로서 공화당을 체계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화당이 원한 것은 대중적 기반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로 선택된--기독교인의 도리(the Christian right)의 지도자가 기업원탁회의에 합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대부분 백인노동계급인 불만에 찬 불안정한 다수는 문화적 (반자유, 반흑인, 반여성, 반동성애), 애국주의적, 종교적 근거에 기반한 자신들의 물적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표를 던지도록(vote against) 조직적으로 설득당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공화당은 자신의 "자유적" 요소를 거의 상실하고 거대기업자본의 금융자원을 미국 남부에서 특히 맹위를 떨쳤던 "도덕적 다수" 사이에 존재하는 인민주의적 기반에 연계해주는 단일한 우익기계장치로 전락한다.10)

미국에서 이행이 나타나게 된 두번째 요소는 재정규율의 문제였다. 1973년에서 1975년의 경기후퇴로 인해 사회적 지출 요구가 증가되던 시기에 거의 모든 부문의 세입이 감소했다. 어느 곳에서나 적자가 핵심문제로 부상했다. 국가의 재정위기와 관련된 무슨일이든 해야만 했다. 재정규율의 회복이 근본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 신용의 윤곽을 통제했던 금융기관의 힘을 강화했다. 1975년 금융기관이 뉴욕시의 채무만기연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뉴욕시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힘있는 은행가 집단은 국가권력과 결탁해 뉴욕시를 규율했다. 이는 시청의 강성노조의 염원 제압, 공공부문 고용조정, 임금동결, 사회보장 축소(교육, 공중보건, 대중교통)를 의미했다. 긴급융자는 이해관계자들의 빚 청산을 위해 시세입에 대한 일순위 권리를 가진 새로운 제도 구축을 수반했다: 남겨진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인 서비스를 위한 시예산에 편입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모욕은 노조의 연기금을 시채권에 의무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시의 파산으로 인한 연기금상실위험을 피하기 위해 노조 스스로 요구를 자제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뉴욕시정부에 대한 금융기관의 쿠데타로 귀결되었고 어느모로보나 이전에 칠레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만큼 효과적이었다. 시의 사회적 하부구조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운송시스템 같은) 물리적 하부구조는 투자부족이나 심지어는 유지보수 부족으로 인해 심대히 훼손되었다. 뉴욕시 재정 위기의 관리는 1980년대의 레이건 치하에서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 실천의 방법을 개척했다. 이를 통해 한편의 금융기관 및 이해관계자의 보전과 다른 한편의 시민복리 사이의 갈등 국면에서 전자 쪽에 우선권을 주는 원칙을 확립했다. 정부의 역할은 인구 전반의 욕구나 복리를 살피기보다는 좋은 기업환경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관철시켰다. 상부계급에 이득이 되도록 재정을 분배하는 것은 일반적인 재정위기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뉴욕의 재정절충안을 창출하는데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이 당시 상부계급의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서 이를 이해했는지의 문제는 규명되지 않았다. 재정규율 유지의 필요성은 깊은 관심을 받을만한 문제이지만 반드시 계급권력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 국가, 금융기관 사이의 계약을 중재했던 핵심 상업은행가인 펠릭스 로하틴이 Felix Rohatyn  계급권력의 회복을 염두어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목적은 아마도 투자은행가들이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이 칠레 사건의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뉴욕시에 대한 원조를 거부했을 뿐더러 뉴욕시가 끔찍한 고통을 겪어서 미국 내의 어떤 도시도 이런 식의 사회적 책무를 감히 질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던 재무부장관 윌리엄 사이먼의 Secretary of the Treasury William Simon 목적이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11)

미국에서의 이행의 세번째 요소는 언론과 교육기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략이었다. 부유한 개인 기업기부자들의 재정지원을 받는 독자적인 "두뇌집단(think tanks)" (헤리티지 재단이 Heritage Foundation 선두이다) 증가해 신자유주의적 계획을 대중의 상식이 되도록 설득해내려는 전방위적 공격을 준비했다. 정책연구보고서와 계획서 신자유주의적 생각과 이상을 촉진하기 위해 훈련받은 높은 보수의 진정한 직업군인의 홍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분야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있도록 매체권력을 획득한 기업과 결부되었다. "대중의 뒤로 돌아가는 정부  "욕조에 빠질" 있을 정도로 정부를 축소하려는 기획을 소리높여 공포했다. 과정에서 새로운 복음의 전도사들은 보다 많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권력 독점자본의 조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목표로 삼았던 68년의 운동의 한쪽 날개에서  준비된 청중을 찾았다. 신자유주의에게 있어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변화를 위한 막강한 세력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의 재조직 정도에 따라 개별기업가들의 창업영역을 열고, 노력이 개별화된 소비주의로부터 창출된 없이 많은 (특히 성해방론자들이 규정한) 증가하는 틈새시장의 충족으로  전환됨이 입증되었고, 그래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있었다.

집단적 열망과 사회적 연대를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68운동의 다른 날개에게 개인화된 기업과 소비주의라는 당근은 국가와 금융기관이 장악한 세력(big stick)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1980년 레이건의 항공운송관제소(air traffic controllers) 파괴나 1984년 마거릿 대처의 영국광산회사 제압은 신자유주의로 향하는 전지구적 선회의 핵심계기였다. 노조와 복지권조직 같이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하거나 증진하려는 기관들에 대한 공격은 그 깊이만큼 넓기도 했다. 복리에 대한 책임을 개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떠넘기는 잔인한 사회적 지출 삭감 및 복지국가  축소는 신속히 진행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실천은 국경에서 멈추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었다.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에 확고히 동의하게 되었고 영국의 명백한 지원을 받은 미국은 지도력, 설득(미국 연구중심대학의 경제학부는 신자유주의적 원칙을 세계 곳곳에서 온 다수의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강압을 혼합한 방법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너른 수출을 추구했다. 1982년 국제통화기금 내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숙청과 신자유주의적 통화주의자로의 대체로, (미국의 지배를 받는) 국제통화기금은 부채상환에 관련된 도움을 필요로했던 어느 국가에게든 재난처럼 찾아간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많은 국가들이 경험한) 구조조정프로그램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최고 대행자로 변환되었다. 1990년대에 맺어진 "워싱턴 컨센서스"와 1998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 하에서 성립된 협상규율(rules)은 신자유주의적 실천으로의 전지구적 선회를 공고히했다.12)

그러나 이 국제적 양상은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 전통의 소생과 재배치에 의존했다. 1920년대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했던 그 전통은 무식민지 제국주의의 형태를 추구했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소모사 Somoza in Nicaragua3), 이란의 샤 Shah4),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강력한 지도자"와 군사지원 및 금융원조를 추종하는 집단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최상의 경우 미국의 대리인으로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독립공화국을 자신의 영향력과 효과적인 통제 하에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은밀한 지원은 그러한 지도자들의 권력의 부상을 촉진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이르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시장, 새로운 투자영역, 금융력이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 분명한 분야의 개척은 전지구적 경제를 명확한 금융구조에 보다 더 많이 통합되도록 만들었다. IMF와 WTO에 의해 성립된 것과 같은 새로운 제도적 실천의 창조는 금융력과 시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유럽과 일본이 미국과 제휴해, 나머지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종속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전지구적 금융체계와 무역체계를 틀 짓는 최강의 자본주의 권력과 G7 간의 협동이 필요했다. 이러한 전지구적 규율을 확립하는 데 실패한 국가로 정의되는 "불량국가"는 필요할 경우 제재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을 동원해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전략의 한 가지 취지는 미국 상부계급이 이미 압도적인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세계의 나머지로부터 세금을 가차없이 거두고 지대를 지배하도록 허용한 결과인 전지구적 권력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교화되었다.13)


신자유주의, 창조적 파괴

어떤 방법으로 신자유주의가 쇠락해가는 자본축적문제를 해결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제성장활성화 관련 실제 수치는 참담하다. 1960년대의 총성장율은 3.5% 안팍이었고 어려움을 겪었던 1970년대조차 2.4%까지만 떨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지구적 성장율이1980년대 1.4%, 1990년대 1.1%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리고 2000년 이후 가까스로 달성하는 성장율 1%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성장을 촉진하는 데 전반적으로 실패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14) 심지어 우리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치료의 서막이 오를 때, 러시아와 일부 중유럽 경제에 몰아쳤던 파국적 붕괴를 배제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자본축적조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지구적 경제활동은 미약했다.

병든 경제 치료라는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영국도 미국도 높은 수준의 경제활동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일례로 1980년에는 사실상 전지구적 경제의 발전소였던 일본, 동아시아의 "호랑이" 경제, 서독의 시대였다. 각국의 제도가 완전히 상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로의 (부과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단순한 선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명백한 경제적 완화책이라는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확실히 서독연방은행(West German Bundesbank) 20 이상 (신자유주의에 부합하는) 강력한 통화주의 노선을 걸었다. 이는 통화주의 자체와 계급권력회복 추구 사이에 필연적인 연계가 없음을 제시한다. 서독에서 노조는 여전히 강력했고 임금수준은 진보적 복지국가기관이 구축됨에 따에 따라 상대적으로 고수준을 유지했다. 효과 하나는 고도의 기술혁신의 촉진이었고 이는 서독이 국제적 경쟁의 장에서 선두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수출주도성장은 전지구적 선두주자로서 나설 힘을 국가에 부여했다. 일본의 경우 독립적 노조는 미약하거나존재하지 않지만 기술적 조직적 변화에 대한 국가투자와 (서독에서 또한 적절한 것으로 판명된 배치인) 기업과 금융기관의 밀접한 관계는 많은 부분 영국과 미국 같은 여타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을 기반으로 놀라운 수출주도성장활동을 창출했다. (곤란을 겪던 1970년대의 총성장율보다도 낮은 총성장율을 기록했던) 1980년대에 일본이 이룩한 그와 같은 성장은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많은 유럽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저항했고 몇몇 사례에서는 진정 성공적이었던 서독모델로 이동하는 동안 자신들의 사회민주주의 전통 대부분을 보존할 방법을 점점 발견했다. 아시아의 남한, 대만,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 정부 하에서 일본모델을  이식했는데 또한 실행가능하며 납득할만한 분배의 평등과 양립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신자유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일본의 장기불황과 통일로 새롭게 변모된 독일의 상대적 침체의 한복판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기후퇴가 단지 경쟁압력이 낳은 결과인지, 일본경제를 무너뜨리려고 자신들의 모든 금융력을 쏟아부은 미국의 권력계급이 추동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고르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신자유주의가 매우 성공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에 우리가 설득당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두뇌집단이 만들어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항구적인 선전의 흐름을 딛고 넘어서 보면 두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보인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 변동성 증가를 수반했다. 신자유주의가 "성공"했었다는 사실은 어디에선가 전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 극단적인 변동성은 극심한 금융위기로 나타났던, 창조적 파괴가 집중되는 국면에 산재된 주기적인 성장신화를 가장 통상적으로 동반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해외자본에 문을 열어주고 스스로 민영화의 길을 걸었고 90년대 국제자본이 빠져나가 완전한 재앙의 나락으로 빠지기 전까지 월가가 가장 사랑한 국가였다. 금융붕괴 사회적 황폐화와 더불어 장기간의 정치위기가 재빠르게 찾아왔다. 금융위기는 개발도상국으로 퍼져나갔고 브라질이나 멕시코 같은 몇몇 경우 경제마비로 이어진 구조조정과 긴축의 물결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상부계급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는 거대한 성공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처럼) 지배엘리트의 계급권력을 회복시켰을 아니라 (중국, 인도, 러시아, 외지역에서처럼) 자본가계급체제를 위한 조건을 창조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심대한 고통을 받은 국가들조차 계급구조 내부의 상당한 질서재확립이 이루어졌다. 1992 살리나스 정부(Salinas administration) 의해 멕시코에 도착한 민영화의 물결은 (전국전화체계를 독점했고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카를로스 슬림 Carlos Slim 같은) 소수의 손에 예외적인 부의 집중을 허용했다. 상부계급의 이해에 의해 지배된 언론과 함께 신화는 경쟁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로 실패한 지역으로 퍼져나갈 있었고 (그래서 많은 신자유주의적 개혁단계를 구축했다). 지역의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경쟁력을 부여하고 성장을 추동했던 투자위험과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필요했다. 만일 하부계급 사이의 조건이 악화된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개인적·문화적 이유로 인해 (헌신적인 교육,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 획득, 노동기율과 유연성에의 복종,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인간자본을 증진하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 경쟁력 부족 때문이건, 개인적·문화적·정치적 실패 때문이건 특정 문제들이 발생한다. 다윈주의의 세계의 논리는 오직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아야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선언의 눈보라와 과도한 지역적 위기는 체계적인 문제를 덮어버렸다.

만일 신-자유주의의 주요 성과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재분배적인 것이었다면 대중으로부터 상부계급으로의 혹은 취약한 국가로부터 보다 부유한 국가로의 자산이전 및 부와 소득의 재분배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른 책에서 나는 "강탈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는 주홍글씨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15) 이를 통해 나는 맑스가 자본주의의 태동기 동안 "원시적" 혹은 "시초적"인 것으로 다루었던 축적의 실천이 지속되고 확산됨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최근 멕시코와 인도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농민층의 강압적 축출 다양한 형태의 재산권(공공, 집합, 국가 등)의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으로의 전환 노동력의 상품화와 대안적(고유한) 생산과 소비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한) 자산전유의 식민적, 신-식민적, 제국적 과정 특히 토지의, 교환 및 과세의 화폐화 (특히 성산업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노예무역 원시축적의 과격한 수단으로 폭리, 국가채무와 무엇보다도 가장 파괴적인 신용체계의 이용이 포함된다. 폭력의 독점과 합법정의권(definitions of legality)을 가진 국가는 이 과정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많은 경우, 폭력에 의존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메커니즘 목록에 다수의 부가적 기법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허권·지적재산권을 통한 사용료 징수, 세대를 거치며 사회민주적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했던 (국가연금, 유급휴가, 교육 및 보건의료 접근권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공공재산권의 축소나 말소 같은 것들이다. 일례로 (독재시절 칠레에서 주창된) 모든 국가연금권의 민영화 제안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숙원목표 중 하나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사례에 대해서 "원시적" 그리고 "시초적"이라는 견지에서 최근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지만 미국과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가 엘리트의 계급권력을 복원했던 실천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급속히 두드러지게 된 진행 중인 강탈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네가지 주요 요소를 각기 살펴보자:


1. 사유화

지금까지 공적 자산이었던 것들의 기업화, 상품화, 사유화는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징후적 양상이었다. 그 일차적 목적은 자본축적을 위해 과거에는 이윤계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졋던 영역 내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모든 종류의 (물, 통신, 운송) 공익설비, 사회복지급여(사회적 주택, 교육, 보건의료, 연금), (대학, 연구소, 감옥 같은) 공익기관,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이라크 내의 무장군을 따라 작전에 참가한 사적도급업자들의 "군대"로 예증되는)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일정 정도 사유화되어왔다. 유전물질, 종자원형, 그 외의 생산품 양식 전체를 사적 재산으로 규정하는 WTO의 소위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협정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에 따라 지적재산권이 구축되었다. 사용료는 유전물질의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낼 수 있다. 생물해적질5)이 발호하며 세계의 유전자원 비축은 소수의 거대 제약회사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가는 중이다. 지구의 환경적 공공재(토지, 공기, 물) 고갈 가속화와 자본집약적농업생산양식 외에는 배제하는 서식지 강등의 확산 역시 어떤 형태이든 자연의 전면적인 상품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행주의를 통한) 문화형태, 역사, 지적창조성의 상품화는 전면적인 강탈을 낳는다(음악산업은 풀뿌리 문화와 창조성의 전유와 착취로 악명높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은 대중의 의지에 반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과정을 강제하곤 했다. 노동과 환경을 강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규제적 틀의 제거는 권리상실을 동반했다. 수년간의 강고한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했던 (국가연금, 복지, 국가보건의료에 대한 권리) 공공재산권(common property rights)의 사적 영역으로의 역전은 신-자유주의라는 정통신앙의 이름으로 추구된 모든 강탈정책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과정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영역에서 사적이고 계급특권적 영역으로 자산을 이동시키는 결과로 귀결된다. 아룬다티 로이가 Arandhuti Roy 인도의 사례를 들어 논의한 것처럼 사유화는 "생산적 공적자산을 국가에서 사기업으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삼림, 물, 공기. 이러한 것들은 국가가,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뢰 속에, 관리하는 자산이다. 이들을 강탈해서 사기업에 주식마냥 팔아넘기는 것은 역사상 필적할만한 것이 없는 대규모의 야만적인 강탈과정이다."16)


2 .금융화

1980년대 이후 정착된 금융화의 강력한 물결은 투기적, 약탈적 특징을 보여왔다. 1983년 23억달러를 기록했던 국제시장 금융거래의 일일총거래액은 2001년 천3백억달러까지 상승했다. 2001년 연간 거래액 40조달러는 국제무역과생산적 투자흐름 지원을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8천억 달러와 대조된다.17) 탈규제로 인해 금융체계는 투기, 약탈, 부정행위, 도둑질을 통한 재분배활동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다. 주식장려, 피라미드 구조(ponzi schemes),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강탈, 심지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이루어지는 인구전체에게 환원되는 채무변제를 위한 채무책임수준 촉진, 기업의 부정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신용과 주식조작을 통한 자산강탈(연기금 투매와 주식 및 기업 붕괴에 의한 연기금의 격감)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금융체계의 핵심적인 모습이 되었다. 스톡옵션으로 받는 자본관리자의 보수를 통해 주식보유자와 자본관리자의 이윤을 접합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주식가치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시장조작을 이끌었다. 엔론의 Enron 극적 붕괴는 다수의 생계와 연금권을 강탈하는 일반과정의 표상이다. 이를 넘어 우리는 또한 헤지펀드와 여타 주요 금융자본기관에 의해 수행되는 투기적 투매를 주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전지구적 단계에서 강탈축적의 선두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이들은 심지어 "위험을 확산시키는" 자본가계급을 위해 절대 이윤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3 .위기의 관리와 조작

신-자유주의적 금융조작의 특징인 투기적이고 종종 사기적인 거품 너머에는 강탈축적의 일차적 수단인 "부채의 덫"을 놓는 보다 깊은 과정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위기 창조, 관리, 조작은 가난한 국가로부터 부유한 국가로 부를 신중하게 재분배하는 훌륭한 예술로 진화해왔다. 1979년 갑작스런 이자율 상승으로 볼커6)는 Volcker 차입국이 지불해야만 하는 채무이자인 해외수입의 비율을 증가시켰다. 파산지경에 이른 멕시코 같은 국가들은 구조조정에 동의해야만 했다. "퇴출"을 조직하여 전지구적 자본축적을 안정시키고 궤도를 유지하는 고상한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선언한 미국은 또한 지역적 위기의 조건 하에서 우월한 금융력을 전개해 멕시코 경제 약탈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이것은 전세계 어느 곳에든 통하는 미재무성/월가/IMF 복합체의 전문영역이 되었고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the Federal Reserve)의 그린스펀7)은 Greenspan 볼커가 썼던 것과 동일한 전략을 1990년대에 수차례 이용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드문 일이었던 개별 국가의 채무 위기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빈번하게 발생했다. 거의 모든 개발도상국이 위기를 겪었으며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처럼 어떤 경우에는 그 위기가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해 풍조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 채무위기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체계합리화와 자산재분배를 위해 조직되고 관리되고 통제되었다. 웨이드와 베네로소는 Wade and Veneroso 1997-8년 (처음에는 미국에 근거한 헤지펀드의 활동으로 촉발된) 아시아 위기에 대한 글을 통해 자신들이 파악한 이 과정의 본질을 기록한다:

금융위기는 언제나 자신의 자산을 온전히 유지하고 신용을 창출하는 편으로 소유권과 자산을 이전시켜주는 원인이 되며 아시아의 위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구기업과 일본기업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규모 평가절하, IMF가 밀어붙이는 금융자유화, IMF가 촉진하는 회생의 조합은 과거 50년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심지어는 평시에도, 소유권이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는 최대의 자산이전을 촉진할 수도 있다. 198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나 1994년 이후 멕시코에서 벌어졌던, 국내로부터 미국 소유주로의 이전은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앤드루 멜론8)의 Andrew Mellon 발언을 생각나게 한다: "공황 속에서 자산은 자신들의 올바른 소유자에게 돌아간다"18)

보다 많은 축적에 편리하도록 저임금잉여노동저수지를 창출하는 신중한 실업의 창조와의 유비는 정확하다. 가치로운 자산은 쓸모를 잃고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 유동성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이 그들을 붙들어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로 선택하기까지 그들은 버려져 휴면중인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통제를 벗어나 일반화되거나, 위기를 창출하는 체계에 저항하는 반란이 발생할 있다는 위험이 있다. 국가개입과 국제기관의 일차적 기능 하나는 일반적인 붕괴나 대중폭동을 촉발하지 않은 강탈축적이 가능한 방식으로 위기와 평가절하를 조직하는 것이다. 월가/재무성/IMF 복합체에 의해 관리되는 구조조정프로그램은 일반적인 붕괴에 대해 신경 쓰고, 대중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은 습격당한 국가의 (제국권력의 군사원조에 의해 지원 받는) 이차적인 -자유주의적 국가기구의 매국노가 일이다. 그러나 대중폭동의 징후는 1994 멕시코의 자파티스타 Zapatista 봉기를 필두로 이후 시애틀 폭동에서 싹튼 반세계화운동으로 드러난 보편화된 불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4 .국가 재분배

일단 신-자유주의적 기관의 집합으로 전환된 국가는 사회민주주의가 패권을 장악했던 시절에 이루어졌던 상부계급에서 하부계급으로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재분배정책의 주요 행위자가 된다. 국가는 우선 민영화 계획 추구와 그 틀 내에서 사회적 임금을 지탱하는 국가지출의 삭감을 통해 이 일을 수행한다. 심지어 민영화가 하부계급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일 때조차도 장기적 효과는 부정적일 수 있다. 일례로 대처의 사회주택 민영화 계획은 일견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주택임차인에서 주택소유자로 전환되어 가치있는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부를 증대시킬 수 있게 된 하부계급에게 혜택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단 전환이 마무리된 후 주택투기바람이 특정한 주요 핵심지역에 불었고, 결과적으로 저소득 인구는 매수되거나 강제로 런던 같은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예전의 노동자 계급의 주거용 부동산은 고급주택 밀집지역 중심부로 전환되었다.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에게는 통근거리가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중심지역에 주거를 마련할 능력의 상실은 노숙자를 양산했다. 1990년대에 마련된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의 핵심구성요소가 된 멕시코 에히도스(ejidos)9)의 민영화는 멕시코 농민의 장래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는데, 많은 농촌거주자들이 토지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정부는 대중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소수의 엘리트에게 자산을 수여하는 일련의 가혹한 과정을 그대로 답습했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또한 소득과 임금보다 투자에 이득이 돌아가도록 세금체계 조정, 세금체계 내에 (판매세 같은) 역진적 요소 촉진, 국가지출이나 모든 자유접근 방식의  (예를 들자면 고둥교육에 대한) 사용자부담 이용료지불 방식으로의 치환, 막대한 보조금 지급 세금 특혜 등과 같은 다양한 여타 수단을 통해 재분배를 추구한다. 미국에서 운영되는 모기지이자율세금감면이 주택을 소유한 상위소득자와 건설산업에 대한 대량 보조금인 것처럼, 미국 내에 연방정부·주정부·지방정부 수준에 아직 존재하는 조합주의적 복지국가 프로그램은 결국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공적자금을 대대적으로 재정향했다(직접적으로는 농산업에 대한 보조금 사례가 있고 간접적으로는 군산부문의 사례가 있다). 감시와 치안이 등장하고 대중 내의 반항분자를 투옥한 미국의 사례는 강도 높은 사회적 통제라는 매우 음흉한 국가의 역할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강탈축적에 대한 반대가 보다 강력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자유주의적 국가의 역할은 (게임광 미군의 지원과 원조를 받기 위해 이제는 대부분 "테러주의자" 지목된) 멕시코의 자파티스타나 브라질의 무토지농민 같은 반대운동에 대해 낮은 수위의 전쟁을 치르는 적극적 억압의 양상을 띤다.

로이의 보고대로 사실상 "7백만명을 떠받치고 있는 인도의 농촌경제는 교살되고 있다. 과다생산 농부나 과소생산 농부 모두 곤궁하며, 무토지 농업노동자들은 거대한 사유지와 농장이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떼지어 몰려갔다."19) 중국의 경우 농촌소요와 폭동을 피하려면 앞으로 10년간 최소한 5억의 인구가 도시화에 의해 흡수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그들이 도시에서 할 일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이제 시작된 막대한 물적 기간시설구축 계획은 원시축적에 의해 풀려나온 잉여노동을 흡수하는 방법 중 일부가 되어 줄 것이다.

-자유주의의 재분배 전략은 광범위하고 정교하며 종종 이데올로기적 책략으로 위장하지만 취약계층과 취약지역의 존엄과 사회적 복리를 파괴한다.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전망을 횡단하며 찾아온 신자유주의라는 창조적 파괴의 물결은 자본주의 역사상 미증유의 것이다. 결과로 저항과 가능한 대안 모색이 발생한 것은 당연하다.


대안들

신자유주의의 영역 안팍에서 반대운동이 물결쳤다. 이들 운동 대부분은 1980년대 이전을 지배했던 노동자기반운동(worker-based movements) 매우 다르지만 "대부분"이지"전부" 아니다. 전통적 노동자기반운동은 신자유주의의 맹공으로 힘이 많이 약화된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남한과 남아프리카에서는 강력한 노동운동이 1980년대에 일어났고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노동계급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도 활약 중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잠재적 중요성이 것으로 평가되는 노동운동이 투쟁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중국에서의 노동불안의 잠재성은 예측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막대하다. 그리고 최근 세대에 일관되게 문화적 민족주의, 종교, 다양한 사회운동에 대한 반대를 근거로 자신들의 물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투표를  해온 미국의 노동계급 대부분이 공화당과 민주당이 비슷하게 꾸미는 음모에 의한 그와 같은 정치학에 영원히 매인 채로 머무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끊임없는 변동성을 고려할 , 장차 강력한 -신자유주의 의제를 내건  노동자기반정치학의 부활을 배제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강탈축적에 저항하는 투쟁은 완전히 다른 사회정치투쟁 노선을 선동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같은 운동을 촉발시킨 특수한 조건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정향과 조직양식은 전형적인 사회민주적 정치학의 정치적 정향이나 조직양식과는 사뭇 상이하다. 일례로 자파티스타 반란은 국가권력장악이나 정치적 혁명 달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대신 시민사회전체를 아우르는 활동을 통해 상이한 사회집단 특유의 욕구를 주목하고 그들이 각자의 몫을 증진시킬 있도록 하는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대안을 추구하는 가운데 보다 중산층을 대상으로 정치학을 추구했다. 자파티스타는 조직적으로 전위주의를 피하고 정치정당 형성을 거부하려 했다. 그대신  원주민문화가 주변이 아닌 중심에 자리잡은 정치권력블록 형성시도를 통해 국가 내의 사회운동으로 남기를 선호했다. 때문에 자파티스타는 국가권력의 영토논리 내에서 수동혁명과 유사한 무엇의 달성을 추구했다.

이 모든 운동들의 효과는 정치조직의 영역을 전통적 정치정당과 노동조직으로부터 주목을 덜 받던 시민사회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사회행동의 정치적 동력으로 이동시켜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동력이 스스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동력은 일상생활과 투쟁의 핵심 속에 배태됨으로써 자신의 힘을 끌어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강탈축적이 무엇이었고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거시정치학에 대한 지역적이고 특유한 이해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발견하곤 한다. 이 같은 투쟁의 다양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단지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의 연계를 생각해내기조차 어렵다. 과거나 지금, 그들은 1980년대와 그 이후 세계를 휩쓸었고 신문 머리기사에 점점 더 많이 오르내렸던 저항운동의 일시적인 혼합의 일부였고 일부이다.20) 때로 이 운동들과 폭동은 그 대부분이 "질서와 안정"의 미명하에 활동하는 국가권력의 맹렬한 폭력으로 인해 진압되었다. 자본가 세력 측의 분할-지배 전략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강탈축적이 강도높은 사회적·정치적 경쟁관계를 만들어내듯 이 운동들은 인종간 폭력과 내전(civil wars)을 일으키키도 했다. 군사적으로 지원받거나 몇몇 경우 (미국이 지도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주변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요 군사조직에 의해 훈련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는 종속국가들은 억압체계 및 강탈축적에 도전하는 행동주의자 운동을 가차없이 색출하여 청산하는 일을 선도했다.

운동자체는 대안에 관련된 사상을 과도하게 생산했다. 일부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압도적인 권력으로부터 완전한 혹은 일부의 독립을 모색한다. 일부는 개혁이나 IMF, WTO, 세계은행 같은 권력기관의 해체를 통한 전지구적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를 모색한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투쟁 및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쓴 역사를 통해 수행되어온 투쟁과 깊은 연속성을 보여주는  "공공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일부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흩어지고 분산된 권력에 직면하기 위해 전지구적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행동이나 운동을 그리는 반면 어떤 이들은 보다 차분하게, 완전히 상이한 종류의 사회관계 및 생태적 실천에 의해 작동되는 새로운 생산 및 소비체계와 관련된 지역적 실험에 관심을 가진다. 전지구적 경제질서개혁을 향해 내딛는 한걸음으로써의 국가권력 획득을 목표로 하여, 보다 전통적인 정치정당 구조에 자신들의 신념을 거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 수많은 다양한 흐름은 이제 세계사회포럼에서 모여 자신들의 공통점을 규명하고 갖가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맞설 수 있는 조직된 힘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많은 찬사와 영감이 존재한다.21)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에서 구성된 분석으로부터 도출될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우선 사회민주적타협의 역사 전체와 이후 수반된 -자유주의로의 선회는 계급권력의 파악과 회복을 위한 계급투쟁이 담당해온 핵심적인 역할을 지적한다. 효과적으로 감추어져 왔지만, 우리는 압도적인 계급권력을 회복하거나 중국이나 러시아에서처럼 압도적인 계급권력을 구성하려는 사회 내의 상부계급 일부가 진행했던 계급투쟁의 세대 전부를 경험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계급은 의미없는 범주라고 이론적으로 설득당해왔고 노동계급을 위해 수행된 계급투쟁을 통해 구축된 제도들이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던 10년간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첫번째 교훈은 만일 그것이 계급투쟁처럼 보이고 계급투쟁처럼 수행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압도적인 계급권력에 의해 규정된 역사적·지리학적 궤도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그에 대항해야만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활발히 활동하던 황금시절의 상실에 대한 향수에 불을 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역사적 변환의 (배타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차적인 작인이라고 호소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단순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한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유토피아적 맑스주의의 환상에는 우리가 은거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불가피함의 핵심은 계급구성방식이 미리 결정되거나 결정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계급운동은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하에서도 스스로를 형성한다. 그리고 분석은 그러한 조건들이 현재는 임노동착취 및 사회적 임금을 규정하는 조건을 핵심쟁점으로 하는 확대재생산을 둘러싼 운동과  문화·역사·환경에 대한 파괴적 행위를 통한 원시축적의 계급적 형태에서부터 현재의 금융자본의 형태가 공들여 만든 약탈에 이르는 모든 것을 저항의 핵심으로 하는 강탈축적을 둘러싼 운동으로 양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상이한 운동들 사이의 유기적 연계를 찾는 일은 시급한 이론적·실천적 과제이다. 그러나 분석은 또한 이것이 증가하는 시간과 공간의 연계에 근거하고 있지만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의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축적의 역사적-지리적 궤도를 따라 일어나야만 함을 보여준다. 문화적 지형과 사회적 세계에서 구축된 과거 배열의 잔재의 표지들이 얼마나 중요하든 간에, 이 불균등성은 반드시 자본축적과정에 의해 활발히 생산되며 유지되는 무언가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분석은 또한 -자유주의적 의제 내의 착취적 모순을 지적한다.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수사와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현실 사이의 간극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 계속 증가하며 사회운동은 간극에 보다 많이 주목해왔다. 시장이 경쟁과 공평무사함에 관련되었다는 생각은 과도한 독점, 집중화, 기업과 금융력의 세계화라는 사실에 의해 점점 부정되고 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멕시코, 남아프리카 같은) 국내에서 아니라 국제적인 계급과 지역적 불평등의 놀라운 증가는 -자유주의적 세계를 완벽하게 만드는 도상의 "과도기적인" 무언가로 이상 숨길 없는 정치적 문제를 부과한다. 개인의 권리와 체계 유지를 위해 증가하는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사용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강조는 논쟁의 인화점이 되었다. -자유주의가 계급권력의 회복을 위한 성공적 기획임을 차폐하는 부정직한 유토피아 기획이 아니라고 해도, 실패한 것으로 인식될수록 정치적 평등주의를 요구하며 경제정의·공정한 무역과 보다 경제적 안정   민주화를 추구하는 대중 운동들의 부활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의 주요 초점이 되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의 반민주주의적 본성은 심원하다. 막대한 권력을 가진 연방준비이사회 같은 기관들은 어떤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IMF, WTO,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기관들의 압도적인 사적권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책임부족은 민주화에 관한 어떤 심각한 관심도 조롱거리로 만든다. 민주적 통치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요구를 성취하는 일은 과거 황금기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단계의 의미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다루기 위해 재창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의 의미는 상파울루, 요하네스버그, 상하이, 마닐라, 샌프란시스코, 리즈, 스톡홀름, 라고스 같은 다양한 환경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와는 별다른 관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대만, 한국과 남아프리카, 이란, 인도, 이집트에서부터 투쟁중인 동유럽 국가들과 현대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전지구를 가로질러 민주적 가치를 표현하는 개혁을 위해 모여드는 활동중인 집단과 사회운동이 있다. 많은 투쟁의 핵심적인 초점 한가지가 이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운동이 자신들의 중심 목표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렇게 효과적으로 회복된 계급권력에 직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보다 더 응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탈을 떨쳐버리고 매우 효과적으로 그 권력의 회복을 정당화하고 적법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된 유혹적 수사를 폭로하는 일은 그러한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현대 자본주의의 제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광범위하고 성공적인 행진을 구축하고 달성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투쟁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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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Harvey, "Neo-Liberalism as Creative Destruction", 2005. 11. 16. 국토연구원 강연원고

** 뉴욕시립대 대학원 인류학 과정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주 이다.


원주

 

1) See the website http://www.montpelerin.org/aboutmps.html

2) G. W. Bush, "Securing Freedom's Triumph," New York Times, September 11th, 2002, p. A33. 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 of America can be found on the website: www.whitehouse.gov/nsc/nss. See also G. W. Bush, "President Addresses the Nation in Prime Time Press Conference," April 13th, 2004; http://www.whitehouse,gov/news/releases/2004/0420040413-20.html.

3) Matthew Arnold is cited in R.Williams,  Culture and Society, 1780-1850(London: Chatto and Windus, 1958), 118.

4) A Juhasz, "Ambitions of Empire: the Bush Administration economic plan for Iraq (and Beyond)," LeftTurn Magazine, No.12 Feb/March 2004.

5) T. Crampton, "Iraqi official urges caution on imposing free market," New York Times, October 14, 2003, C5.

6) J. Valdez, Pinochet's Economists: The Chicago School in Chile(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7) P. Armstrong, A.Glynn and J.Harrison, Capitalism Since World War II: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Long Boom (Oxford: Basil Blackwell, 1991).

8) G. Dumenil and D. Levy, "Neo-Liberal Dynamics: A New Phase?"  Unpublished MS, 2004, p.4. See also Task Force on Inequality and American Democracy, American Democracy in an Age of Rising Inequality,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2004, p.3.

9) D. Yergin and J.  Stanislaw,  The Commanding Heights: The Battle Between Government and Market Place that is Remaking the Modern World,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9)

10) T. Edsall, The New Politics of Inequality (New York: Norton,1984); J. Court, Corporateering: How Corporate Power Steals Your Personal Freedom., New York, Tarcher Putnam, 2003; T. Frank,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How conservatives Won the Heart of America, New York, Metropolitan Books, 2004.

11) W. Tabb,  The Long Default: New York City and the Urban Fiscal Crisi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2;  R.Alcaly and D.Mermelstein, The Fiscal Crisis of American Cities, New York, Vintage, 1977.

12) J. Stiglitz,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New York, Norton, 2002. [국역--조지프 스티클리츠, 송철복 옮김, 『 세계화와 그 불만: 전세계 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세종연구원, 2002.]

13) D. Harvey, The New Imperi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4) World Commission on the Soci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A Fair Globalization: Creating Opportunities for All (Geneva, International Labor Office, 2004).

15) D. Harvey, op.cit. chapter 4.

16) A. Roy, Power Politics (Cambridge, Mass: South End Press, 2001)

17) P .Dicken, Global Shift: Reshaping the Global Economic Map in the 21st Century (New York: Guilford Press, 4th edition, 2003), chapter 13.

18) R. Wade and F. Veneroso, "The Asian Crisis: The High Debt Model versus the 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The New Left Review, 228 (1998), 3-23.

19) Roy, op.cit.

20) B. Gills (ed), Globalization and the Politics of Resistance(New York, Palgrave, 2001); T.Mertes (ed.) A Movement of Movements (London, Verso, 2004; W. Bello, Deglobalization: Ideas for a New World Economy (London, Zed Books, 2002) [국역--월든 벨로, 김공회 옮김, 『 탈세계화』, 잉걸, 2004.]; P.Wignaraja (ed.) New Social Movements in the South: Empowering the People (London, Zed Books, 1993); J.Brecher, T.Costello, and B. Smith, Globalization from Below: The Power of Solidarity (Cambridge, Mass, South end Press, 2000).

21) T. Mertes (ed.) op.cit. W. Bello,  Deglobalization: Ideas for a New World Economy, London, Zed Books, 2002


옮긴이주


1)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인종분리정책, 넬슨만델라의 집권 이후 폐지된다.

2) 1976 군의 수뇌부가 주동해 일으킨 쿠데타. 이사벨 페론 정권을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함

3)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1934년 미국에 의해 훈련을 받은 과르디아 나시오날(니카라과 군대인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대파인 아우구스토 C. 산디노(Augusto C. Sandino) 암살을 공작하고 뒤이어 부정선거를 통해 1937년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독재자로 니카라과를 지배했고 엘살바도르만한 크기의 토지와 엄청난 개인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 1956년 암살당했지만 그의 아들이 권력을 승계, 1979년까지 독재자로 군림

4) 1953년 MI6와 CIA가 모사데크(Mossadeq)가 이끌던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샤(Shah)라는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함. 샤는 국민 다수의 기본적 인권과 보건·교육·일자리에 대한 권리를 부인했다. 1979년 혁명으로 몰락함

5) 반다나 시바, 한재각 외 옮김,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당대, 2000

생명에까지 특허권을 부여하게 된 이 시점에서 특히 GMO는 한 생명체에서 몇 개 안되는 유전자를 조작하여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서 특허권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GMO의 원료가 되는 생물다양성 자원은 별다른 대가 없이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을 약간의 조작을 가한 다음 특허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덧붙여 되파는 것이 현실이며 이런 선진국의 행위를 생물해적질이라고 일컫는다.

6) http://www.pbs.org/fmc/interviews/volcker.htm Paul Volcker,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1979-87)

7) http://www.federalreserve.gov/bios/greenspan.htm Alan Greenspan,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1992. 2.-2006. 1.)

8)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USAmellonA.htm 미국금융가. 공화당원으로 Warren Harding, Calvin Coolidge, Herbert Hoover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 )으로 재직했다. 재직 당시 소득세 삭감 및 공공지출 감소정책을 채택했다.

9) 멕시코의 공동체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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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Grossman, &quot;German Political Turmoil &#8211; and the Left&quot;

독일의 정치적 혼란-그리고 좌파*


빅터 그로스맨(Victor Grossman)**

 

워싱턴 뿐 아니라 베를린 역시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고 누구도 어떤 결말이 날 지 예측할 수 없다! 독일 신좌파정당(new Left Party)의 결정적 중요성은 언론에 의해 거의 철저하게 무시되어온 극적 요소이다.
9월 치렀던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Gerhard Schroeder 사회민주당-녹색당 연정도 기독교민주당-자유민주당의 우파연합도 연방의회(Bundestag) 의석의 과반수를 획득하기 위한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을 때 양측의 주요 정당은 최초의 여성총리 앙엘라 메르켈과 Angela Merkel 슈뢰더의 분신인 프란츠 뮌터페링을  Franz Muentefering 부총리로 하는 소위 "대연정(grand coalition)"의 형태로 자신들의 기존 소(小)정치 파트너를 떨어냈다.
대연정은 보기보다 견고하지 못하다. 소(小)정치파트너와 더불어 양측의 거대 정당은 빈곤층을 흡수하고 부유한 자들에게 보상해주는 방식의 "독일경제구원" 프로그램을 위해 오랫동안 협력해왔다. 사실 슈뢰더의 사회민주당은 그러한 일에 보다 적합한 존재였고 보다 사소한 쟁점들에 대해서도 잘 맞았다. 그러나 모두 실업수당삭감, 의료비용증가, 연금동결 및 노동주의 확대, 임금과 복리후생의 삭감 외면에 동의했다. 최상위부자들에 대한 세금은 은근슬쩍 축소되었다. 열정적이던 여름의 선거캠페인기간까지만 해도 슈뢰더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고 이로써 회의적이지만 공개적인 극우 메르켈보다는 "작은 악"을 바라는 많은 유권자를 되찾아왔다.
10월 한달동안 양 정당의 최고지도자들은 누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기존의 것보다 나빠질지라도 합동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회동을 가져왔다. 그들의 첫 번째 합의가 파산에서 독일을 구해내자는 것이었음은 놀랍지 않다: 현재 65세인 은퇴연령의 67세로의 연장(당장은 아니라고 그들이 주저하며 덧붙였다)하고 (매상세와 마찬가지로) 현재 16퍼센트인 부가가치세를 18-20퍼센트로 인상하는 방안. 그들은 이러한 조치가 얼마간의 투자를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의회의 다음 회기는 몇몇 변화를 약속했다! 그들을 보호해줄 간부의 지위를 보장하기에는 수적으로 너무 적은, 고립되고 무시당했던 민주사회주의당(Party of Democratic Socialism; PDS) 출신의 외로운 두명의 대의원 대신 동독에서 강세를 보이는 PDS와 새로 등장했지만 특히 서독에서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는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의 대안(Electoral Alternative for Jobs and Social Justice) 간의 선거동맹인 신좌파정당 출신인 54명의 대표를 둘 예정이다. 그들의 득표율은 놀랍게도 투표자의 8.7%였으며 그 결과 54석을 얻게된 것이다(남성 28석, 여성 26석).
비록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기에는 부족한 의석이지만 그들은 "대연정"에 물의를 일으킬, 모든 사회적 쟁점과 점점 커지는 군사적 팽창주의에 딴지를 걸 정도의 힘을 지녔다. 굵직한 사안에서 그들의 "협상력"을 노출시킴으로써, 그간 좌파의 힘에 의존해왔던 사회민주당은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고--이미 심각한 손실로 고통받고 있다.
주말이 지나자 SPD(사회민주당)의 상임위원회는 추천된 후보자 중 한명을 당대표로 선택해야만 했다. 사무총장이자 슈뢰더의 친구이며 새로운 당수가 된 프란츠 뮌터페링은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위원회에 말했다: 그 자신만의 특색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호의. 그러나 모두 놀랐던 것은 안드레아 날레스Andreas Nahles 비밀투표에서 23표나 득표했다는 점이다--뮌터페링이 선택한 후보는 맥없이 14표를 얻는데 그쳤다. 35세의 여성인 날레스는 소위 사회민주당 내 "좌익"의 지도자로 슈뢰더 총리의 독재적 통치하에서 오랬동안 부딪혀왔지만 슈뢰더가 그의 철권을 휘두를 때면 언제나 그 힘에 굴복했었다. 그러나 조기선거 요청이라는 재앙을 가져온 결정 이후 슈뢰더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좌파에 기반한 성장하는 새로운 세력의 도전을 받게되자 일부 사회민주당원이 오래된 대중성의 끄트머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저항하고 당을 구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뮌터페링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불복종에 대한 차디찬 분노로 발끈해서 그는 당수직을 사임하겠다고 공표했다.
일부는 "시원하게 사라져준다"고도 했고 일부는 이 "좌익의 반란"에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당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새로운 연정에서 중요한 모든 내용에 동의할 수 있었던 메르켈의 기독교민주당도 자신들의 파트너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좌파에 의존하는 사회민주당적의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PDS와 지역수준의 연정을 구성하고 날레스에 투표한 베를린에서는 일부 비열한 소리들이 그같은 사악한 연정은 녹색당과의 연정과 마찬가지로 전국수준의 계획이었다고 경고했다. 이는 확실히 모두가 거부하는 것이다--당분간은!
이 모든 혼란스러운 책략은 새 연방의회가 첫 모임을 가지기 전에, 그리고 좌파정당이 큰 발언권을 얻기도 전에 발생했다. 그러나 그 낡은 망령은 이미 출몰하고 있었다.
물론 언제나 바위가 가위를 이기는 낡은 게임에서처럼 얼마지나지 않아 반란은 실패의 기미를 보였다. 뮌터페링은 메르켈과 협상을 지속해나갈 의지가 있으며 새로운 행정부에서 맡은 핵심 직책(과 또한 부총리직)을 수행할 의사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우 약해져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드레아 날레스는 뮌터페링이 모든 사안을 그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아마도 자신이 후보로 나서지 않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양보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아마 가장 서글픈 후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일하지만 빈곤한 사람들, 실업자, 모자가정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평상시처럼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는 표시이다. 조화롭게 새로이 통합된 당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다수의 투쟁적인 노조지도자들과 반세계화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세력이 존재한다. 만일 이 세력이--좌파에 항존하는 위험인--분열을 피할 수 있고 외부에서의 조직된 행동과 연방의회 내에서의 훌륭한 연설을 연계시킬 수 있다면--이후의 독일 정치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그 주말에 포르투갈에서 키프러스와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유럽국가에서 온 17개의 좌익정당의 대표자들과 26개 국가에서 온 참관인들이 유럽좌파정당의 첫 번째 정기당대회를 위해 아테네에 모였다. 방문자들 중에는 서사하라(Western Sahara)에서 온 폴리사리오(Polisario), 팔레스타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이스라엘의 공산당(Communist Party)과 우르과이의 확대전선(Frente Amplio)도 보였다. 페미니즘의 공세와 최저임금 및 반군국주의 같은 쟁점에 대한 전유럽차원의 행동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Rifondazione Comunista) 출신 전의장 파우스토 베르티노티가 Fausto Bertinotti 의장직에 재선출되었다. 이제 새로운, 거대 좌파정당이 되어가는 PDS는 가장 활동적인 참석자 중 하나였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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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 Grossman, "German Political Turmoil – and the Left", MRZine 20051103

 

원문 http://mrzine.monthlyreview.org/grossman031105.html

 

** 빅터 그로스맨은 미국인으로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수년간 동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Crossing the River: A Memoir of the American Left, the Cold War, and Life in East Germany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2003)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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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aldwell, &quot;New Oleans: the Making of an Urban Catastrophe&quot;

뉴올리언즈: 도시에 발생한 대참사*

 

로버트 캘드웰(Robert Caldwell)**

 

세계는 슈퍼돔(Superdome)에 모여 자신들이 현재 식량도 물도 적절한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없는 비참하고 불결한 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식할 뿐인 뉴올리언즈 New Orleans 주민을 지켜보고 있다. 홍수로 물이 넘친 지역 주민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자신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줄 수 있는 헬리콥터를 향해 구조를 요청한다. 많은 이들이 다락에 갇혀, 혹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사망했다. 그러는동안 수백의 경찰이 약탈자들로부터 주민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Hurricane Katrina 루이지애나주 Louisiana 주민들이 이때껏 겪은 재난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트리나의 참혹한 결과는 인간이 자연에 가한 무심한 행동의 산물일 뿐이다.

 

잘못설정된 우선권

 

뉴올리언즈는 자본주의치고는 저개발된 도시이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그 아이들은 제 기능을 못하는 공립학교에 다니는 형편인데도 사회서비스는 만성적인 기금부족에 시달려왔다. 한 때 거대한 항구였고 70마일에 이르는 석유-화학지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제3세계의 카리브섬처럼 도시의 유지를 위해 관광산업의 부스러기에 의존해왔다.
적어도 중심상업구역과 주거지역의 대부분이 포함된 도시 절반 정도가 해수면과 같거나 그보다 저지대이다. 정상적인 조건이라면 거대배수펌프(massive drainage pumps)는 도시로 빗물이 유입될 경우 배수를 해야한다. 그러나 비가 오면 펌프가 작동해도 도시의 빈곤지역은 소규모의 침수피해를 겪는다.
그러니 루이지애나의 허리케인 대비책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의회에 의해 변변찮고 부족한 기금으로 유지되어왔다는 것에 놀랄 일도 아니다.
부시와 의회는 이라크 전쟁에 세금을 쏟아붓는 대신 뉴올리언즈 지역을 언제 닥칠지 모르는 홍수로 인한 범람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기간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시급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했다. 빌 모이어의 나우와의 NOW 2003년 인터뷰에서 과학자 다니엘 츠워들링은 Daniel Zwerdling 허리케인 기금의 삭감은 이라크 전쟁비용을 치르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럼가 시드니 블루멘탈에 Sidney Blumenthal 따르면 "연방재난관리청(FEMA;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는 뉴올리언즈에 상륙하는 허리케인은 미국에 발생할 수 있는 3대 거대 재난 중 하나였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뉴올리언즈의 홍수통제기금을 44%나 삭감하고 이라크 전쟁비용으로 사용했다"("허리케인이 닥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No One Can Say they Didn't See it Coming," Spiegel Online, 31 August 2005). 이제 의회는 이 지역에 105억달러를 원조할 것을 승인했다. 이 금액은 2004년 허리케인이 플로리다를 덮쳤을 때 플로리다가 받은 160억달러에 비하면 적은 액수이다. 의회가 이라크 전쟁 첫해에 사용한 1620억달러와 허리케인 복구비용을 비교해보라.
이라크 전쟁은 또한 재해시 구조에 필요한 인력을 감소시켰다. 허리케인철인데도 루이지애나 주방위군의 거의 절반 이상이 주 외부에 배치된 상태였다. 256여단 소속 3천명처럼 일부는 이라크에 배치되었다--보도에 따르면 중요한 홍수대비장비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계획된 참사의 인종과 계급 간 역동성

 

즉석에서 마련된 NBC자선콘서트에서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Kanye West 진실을 토해냈다: "조지 부시는 흑인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네," 그리고 미국은 "빈민과 흑인,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되도록 천천히 돕기로" 작정했다. 빈민과 흑인이 허리케인에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은 CNN 시청자라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희생자들이 겪는 곤경은 뉴올리언즈의 인종간·계급간 불평등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허리케인에 대한 준비를 제일 못한 사람들도 빈민이었다. 녹색당 후보자이며 전 블랙팬더(Black Panther)였던 말릭 라힘은 Malik Rahim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빈민이 가장 취약할 시점인 월말에 허리케인이 불어닥쳤다. 식권이 충분치

                않아서 한달에 3주 정도는 이용가능하지만 월말이 되면 떨어진다. 이제

               그들에게 식권이나 몇푼의 돈조차도 구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극빈층은 운송수단이나 식량, 기타 자원이 없었다. 허리케인 대비책에는--그리고 연방기관, 주기관, 지역기관의 대참사 대비책에도--그들의 소개(evacuation)를 위한 금전적 지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재난계획당국은 뉴올리언즈의 11만2천명이 개인운송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했다. 2003년 타임즈 피카윤은 the Times Picayune 범주5 허리케인의 발생시 사망가능성에 대해 예견한 5부작 연재물을 실었다. 극빈층의 소개를 수행할 정책의 완전한 부재는 극빈층이 출구 없는 도시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인종과 계급은 병든사람들도 분리했다. 테넷건강관리회사(Tenet; Tenet Healthcare Corp.)사적계약자들에게 병원소개비용을 지불했고 그래서 미국의료회사(HCA; Hospital Corporation of America)는 자신이 운영하는 툴레인 병원(Tulane Hospital)을 소개했다--자선병원, 가난하거나 대체로 흑인환자가 이용하는 지역의 외상성장애병원인 자선병원(Charity Hospital)이 도움을 받기 훨씬 전에 말이다.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를 덮친 최초의 허리케인인 것도 아니고 최초의 주요 홍수재해인 것도 아니다. 허리케인 베시가 Hurricane Betsy 불어닥쳤을 때 주민 전부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을 하고 그 중 99%는 흑인이 거주하는 지역인 로우어 나인스 워드는 Lower Ninth Ward 부유한 백인 상층 이웃을 "구하기" 위해 의도적인 홍수피해를 입었다.
정책은 지배계급의 이해에 호의적이고, 그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다수의 백인노동계급을 포함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기존의 인종과 계급 불평등을 이제 선명하게 만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빈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희생자를 비난한다. 말릭 라힘에 따르면 백인 자경단원이 알제를 Algiers 순찰할 때 "픽업트럭에 올라탄 무장한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듯 보이는 젊은 흑인을 발견하면 사살했다"고 한다.

 


희생자를 비난하다

 

연방재난관리청장 마이클 브라운과 Michael Brown 지배적인 매체들은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으로 "사망자 대부분이 강화된 경고에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을 꼽는다. 브라운의 논평은 수십만의 바보같은 사람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실은 수만의 뉴올리언즈 주민들에게는 소개명령을 따를 수단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리포터들과 우파 인터넷 논객들은 수만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도 지방방송과 게시판을 약탈을 인종차별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이야기로 채워넣었다. 무법적인 약탈, 야만적인 흑인이라는 백인의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수천의 사람들이 여전히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을 그 안에 붙잡아두도록 한 정치적 결정에 관심을 두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려놓는다. 관료들은 질서가 잡힐 것이라는 전망을 방관하면서 긴장을 푼다: 그들은 약탈로부터 상점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도 투입할 수 있다. 그러나 군대투입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인생을 살아가는 주민을 탐색·구조·소개함으로써 희소자원을 그들로부터 격리하려는 것이다. 주방위군의 보급품을 실은 호송선이 뉴올리언즈에 모였을 때 루이지애나 주지사 캐슬린 블랑코는 Kathleen Blanco 이 상황을 약탈자들에 대한 경고와 지배계급을 안심시키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들은 군대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M16s를 지녔고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내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대로 사살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맥빠진 대응

 

시장 레이 나긴은 Ray Nagin 연방기관들의 늦장 대응에 분노를 터뜨렸다: "이곳에 그들은 없다. 빌어먹을 놈들은 너무 틎게온다. 이제 그 엉덩이 좀 치우고 뭐라도 좀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나라 역사상 최대인 망할 놈의 이 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에 대한 반응 또한 거의 없었고 매우 늦었다.
무관심과 무능력의 악의적 혼합은 분명히 전시하려는 의도였다. NPR의 "고려해본 모든 것" All Things Considered(1 September 2005)에서 국토방호의장 마이클 체르토프는 Homeland Security Czar Michael Chertoff 거만하게도 컨벤션센터(Convention Center)에 머물고 있는 이천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은 물도 식량도 없는 상태이며 비위생적인 조건에 놓여있다는 NPR 현장리포터의 주장을 일축했다. 연이은 보도들은 컨벤션센터에 모여있는 만오천명에서 이만명의 사람들이 시체들이 가득한 비참한 조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확인하고 있다. 컨벤션센터는 마른 땅위에 있고 지상차량이나 헬리콥터 같은 군수송수단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지체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9월 2일 저녁에는 폭스 뉴스의 FOX News 리포터조차 실망하여서 피난민들을 컨벤션센터에 묶어두려는 정책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했다.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없어서 또는 적대적인 총기발사가 있었다는 보도 때문에 공급이 지체된다고들 한다. 만일 미국이 적들의 포격을 견디며 이라크에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비행기들을 보낼 수 있다면 미국의 도시에서 공중 투하를 통한 공급을 할 수 있음이 확실한데도 말이다.

 

환경적 계기

 

재난을 들여다보면 재난을 키운 생태파괴를 무시할 수 없게된다. 다른 주요 도시와 마찬가지로 뉴올리언즈는 위험지역에 위치한 데다가 지구온난화와 해안침식 같은 환경문제가 도시자체의 위험성을 악화시켰다.
늪과 습지대는 허리케인이 도시에 접근했을 때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침식은 늪과 해안습지의 규모와 허리케인의 영향을 흡수할 역량을 감소시킨다. 해안침식의 주요 원인은 두가지이다. 이전에는 삼각주를 이루었던, 유량이 풍부한 강의 긴 수로는 항해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대륙붕에서 떨어진 깊은 물쪽으로 흘러가도록 유도되었다. 기름과 천연가스 채굴과 파이프라인을 위해 건설된 운하로부터는 소금물이 밀려든다.
지구온난화는 허리케인철을 그 어느때보다도 파괴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보스턴 글로브의 Boston Globe 논설가 로스 겔브스판은 Ross Gelbspan 지구온난화가 "더 긴 가뭄, 보자 집중적인 호우, 더 잦아진 혹서, 보다 혹독한 폭풍을 창출한다. 카트리나는 남플로리다를 스쳐지나가는 허리케인치고는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상대적으로 높아진 멕시코만의 해수면온도에 의해 그 강도가 특별히 강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결론

 

부시 정부는 뉴올리언즈에 홍수가 밀어닥치는 동안에도 빈둥거리고 있었다. 정부와 의회는 예방을 위한 기본적인 기간시설을 제공하지 못했고 구조계획의 준비에도 소홀했다. 그대신 부유한 사람들의 세금을 낮춰주고 이라크 전쟁에 세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내용은 부시가 저지른 실패목록에 가장 최근 올라간 내용이며 더 많은 미국인들이 이 내용들을 빈민과 흑인에 대한 "집안 전쟁"으로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허리케인으로 인한 수많은 이재민은 이제 자신들이 버려졌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카트리나가 닥치기 오래 전에 이미 뉴올리언즈를 포기했다. 인종차별주의, 환경에 대한 무관심, 사회계획부문의 "시장화"를 좇는 자본가들은 오래전부터 뉴올리언즈의 특징이었다. 결국 주로 유입되는 공공자금은 줄어들었다. 호텔, 카지노, 체인점, "디즈니화한" 개발은 투입되는 자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심하게 경쟁할 것이며 허리케인 이전에, 그동안에 그리고 이후에 사람들에게 생기는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체계의 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뉴올리언즈는 다른 기풍으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계획; 대중소개계획을 포함한 대량 수송기간시설의 품질향상; 안정적인 조합일자리(union job)를 창출하는 강화된 공공근로체계; 새공립학교; 공공보건체계를 위한 새로운 투자; 노동계급, 빈민,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 참여적이며 급진적 민주주의를 육성하는 기관으로서의 반상회의 육성--재건설될 수 있다. 이같은 대안적 전망의 진전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적 우선순위를 바꾸어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며 이라크의 미군철수를 시작하고 뉴올리언즈와 미국 남부 멕시코만 경계지역(US Gulf South)의 기간시설의 재건설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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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bert Caldwell, "New Oleans: the Making of an Urban Catastrophe"
" MRZine 20050912

 

원문 http://mrzine.monthlyreview.org/caldwell120905.html

 

** 로버트 캘드웰 2세(Robert Caldwell Jr.)는 뉴올리언즈 나인스 워드 주민이며 녹색당과 연대의 회원이다. 연락가능한 이메일주소는 jamais.vu@gmail.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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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n Dannin, &quot;The Minimum Wage, Part Two&quot;

최저임금(2): 우익두뇌집단의 경제학-수사(Economics-Lite)에 도전하기*

 

엘렌 대닌(Ellen Dannin)**

 

경제학에 맞닥뜨리면 우리 대부분은 (a) 도망치거나 (b) 잠들거나 (c) 포기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라고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경제학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더라도 도망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의구심, 주장들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하려는 의지이다. 또한 경제적 주장을 거점으로 하는 우익두뇌집단의 권위자들 대부분은 경제학-수사에 근거한 주장을 펼친다는 점을 알아두는 것이 유용하다. 그들은 몇개 안되는 피상적이고 독창적이지 못한 사상을 이용해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려고 억지 해석을 일삼는다. 이러한 사상들은 단지 (경멸의 의미로) 이론에 불과할 뿐이며 과학이론과는 달리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 물론 시험을 해보면 이들의 사상은 틀리는 경향을 보인다. 즉, 증거가 그 사상을 뒷받침하지 못한다(아래에서 보다 더 많은 논의를 할 것이다). 당신이 볼 때 그 사상이 과하게 단순화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 생각이 맞거나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익사상의 지지자들이 경제학-수사를 사용한다고 해도 당신이 그들과 논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당신에게 심어줄 것이다.
우익두뇌집단의 경제학-수사에 맞선 싸움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지면 도움이 될텐데 기본원리를 알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최저임금에 관한 기본 논거와 정보들을 개관해본다.
대다수의 신고전주의적 (즉, 보수주의적)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상승이 실업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주장이 여러 연구를 통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이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실질적인 연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안된다. 그들이 말하는 시험이나 연구는 대부분 계량경제학적 모델링(econometric modeling)을 의미한다.
최저임금과 실업의 관계에 대한 가장 엄밀한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시험은 10년전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자였던 데이비드 카드와 알란 크뤼거에 David Card and Alan Krueger 의해 10년전 수행되었다. 그들이 쓴 책 [신화와 측정: 최저임금의 경제학 Myth and Measurement: The Economics of the Minimum Wage](1995)는 그들이 수행한 여러 경험연구의 결과를 수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주장을 평가하고 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도 그들의 자료를 이용할 것이다. 그들의 책은 대중의 관심과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신화와 측정]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연구를 통해 카드와 크뤼거는 이웃한 두개 주인 뉴저지와 펜실베니아의 New Jersey and Pennsylvania 인접한 대도시의 실업율을 비교했다. 뉴저지는 연방 최저임금보다 높게 최저임금을조정했고 펜실베니아는 그렇지 않았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뉴저지의 고용주들이 임금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해고할 것이므로 뉴저지의 실업율이 증가하거나 최소한 고용증가율이 둔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 반대현상이 나타났다. 뉴저지의 고용은 펜실베니아보다 조금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의 분석이 다시 이루어졌고 확증되었다.
미국과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은 카드와 크뤼거의 연구를 확증하는 것과 신고전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등 다양한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혼합된 결과 자체는 최저임금 상승이 언제나 실업의 증가를 결과한다는 주장이 잘못임을 입증한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최저임금의 증가는 항상 보다 많은 실업을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몇몇 다른 요인[들]이 이렇게 혼합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이 신고전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이야기의 일부만을 듣고 있을 뿐인 것이다.
보수주의자들과 기업은 카드와 크뤼거의 연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패스트푸드 로비집단이 후원한 보수주의자들과 기업이 강력히 주장한 연구는 카드와 크뤼거의 발견을 논박하였지만 이 연구의 수행자들은 카드와 크뤼거와는 달리 자료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어떤 경우든 증거의 무게는 이제 충분해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와 --급진적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는--미국경제협회의 전의장을 포함하여 552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최저임금 상승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광고에 서명하게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무언가 더 알고 싶다면 여기에 소개된 카드와 크뤼거의 연구에 관련된 논의를 다룬 다른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존 슈미트, "최저임금과 일자리 상실: 임금상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영향도 찾아내지 못했다" John Schmitt, "The Minimum Wage and Job Loss: Opponents of Wage Hike Find No Effect"

케빈 소어, 월터 블록, "최저임금" Kevin Sohr and Walter Block, "The Minimum Wage"

최저임금에 관한 다양한 자료원에서 뽑은 연구들과 논의들이 다수 정리되어 있다. (최저임금 및 카드와 크뤼거의 발견에 대한 생생한 논의를 보고 참여할 수도 있다.)

 

삶에는 경제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논거는 실제로는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주는데 반대하는 논거이다--인플레이션과 실업에 대한 연방준비위원회의(Fed's) 이론과 꼭 같은 것이다.
우리는 1990년대의 임금상승과 실업의 실제적인 관계를 연구해왔다. 몇 년동안 연방준비위원회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이율을 올려왔다. 이율 상승과 인플레이션율의 관계는 임금과 실업이다: 실업율이 내려가면 노동자들은 고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공세적 입장을 점하게 되는데 고임금은 인플레이션 상승을 야기하며 이러한 상황은 채권소유자들(bondholder)에게는 불리한 것이다. (사실 이 기간동안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내용들은 투자자들이 실업율 하락을 걱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실업율 하락은 연방준비위원회가 이율을 올릴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방준비위원회의 이론은 물가상승을 가속화시키지 않는 실업률(NAIRU; the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이라고 언급되었다. 이 신념은 실업율이 특정 수치 이하로 떨어질 때마다 대략 6.2%의 인플레이션 상승을 가져온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클린턴 정부에서 가한 압력 하에서 인플레이션의 징후가 없었으므로 연방준비은행은 이율 상승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 실업율은 하락했 인플레이션의 징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연방준비위원회를 곤경에 빠뜨렸다: Federal Reserve Bank of San Francisco, Economic Letter 97-35, "NAIRU: Is It Useful for Monetary Policy?" (November 21, 1997).
우리는 최저임금이 역사상 최저수준의 상황에서 또다른 실질적인 실험의 한복판에 놓여있다. 이 기간동안 군인이 되어 해외로 파병되거나 미국에서 활동적인 임무를 맡는 등 일자리는 개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은 여전히 높았다.
최저임금과의 싸움은 핵심적인 단계는 아니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주에서 채택하는 최저임금은 연방에서 정한 최저임금은 시간당 5.15달러이다. 이를 환산하면 전일제 노동으로 연간 벌어들이는 수입이 총 10,712달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2005년 연방지침은 빈곤을 가구별 소득수준이 다음에 제시된 수준이하일 경우로 규정한다.

1................................. 9,570달러
2.................................12,830달러
3.................................16,090달러

 

당신 자신의 경험상 가족은 둘째치고 저기 제시된 최저 금액으로 누군가 살아가는 것이--혹은 최소한 생존만이라도--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가?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수 있는 금액인가? 만일 잘 모르겠다면 도전! 최저임금생활을 시도해보라.
또는 미국에서 가난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야기집(사례 연구)을 읽어보라: David K. Shipler, The Working Poor: Invisible in America (서평 두 개저자와의 인터뷰도 실려있는데 동영상 파일에 담긴 인터뷰 링크도 포함되어 있다).
또는 최저임금에 대한 읽을만한 자료와 여러 정보의 모음집인 Raise the Floor: Wages And Policies That Work For All Of Us를 읽을 수도 있다 (여기를 클릭해서 이 책에 대한 보충적인 정보를 더 얻을 수 있다).
우익

두뇌집단의 경제학-수사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역시 삶에는 경제학에는 없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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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len Dannin, "The Minimum Wage, Part Two" MRZine 20050805

 

원문 http://mrzine.monthlyreview.org/dannin020805.html

 

** 엘렌 대닌은 웨인주립대학 법학부 법학교수이다. [노동을 자유롭게: 뉴질랜드 고용계약법의 기원과 효과 Working free: The Origins and Impact of New Zealand's Employment Contracts Act](Auckland University Press, 1997) 외 다수를 저술했다. 근간 [노동자의 법 되돌리기: 가치에 기반한 노동법개혁을 위한 전략 Taking Back the Worker's Law: A Strategy for Values-based Labor Law Reforms]은 코넬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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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n Dannin, &quot;The Minimum Wage, Part One&quot;

최저임금(I): 최저임금에 대한 우익두뇌집단(Right-Wing Think Tanks)의 발언*

 

엘렌 대닌(Ellen Dannin)**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우익두뇌집단(Right-Wing Think Tanks; RWTTs)이 제안하는 내용을 때로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옹호하는 내용은 정부정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익두뇌집단의 글을 독해함으로써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익집단의 사고를 그대로 전하는 정부대변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정보들을 규명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다.
우익두뇌집단은 최저임금제를 폐지하고 싶어한다. 최저임금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은 종종 연구논문과 연구성과물들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논거들을(arguments) 제시하지만 논의를 추적하고 평가할만한 충분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이제 우익두뇌집단이 만들어낸 가장 통상적인 논거 몇가지를 살펴보자.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논거들

 

1.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은 소수이며 받더라도 그리 오랜 기간동안 받지 않는다. 이 논거에는 최저임금은 십대청소년이나 임금에 생계를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다는 주장이 보통 함께 따른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움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존재가 되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설혹 맞는다고 해도--그리고 맞는 말도 아니지만***--최저임금은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최저임금의 상승은 최저임금보다 약간 많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임금을 상승시키는 파급효과를 갖는다. 최저임금에 관한 유용한 자료원으로는 경제정책연구소의 Economic Policy Institute "최저임금: 한눈에 들어오는 사실들 Minimum Wage: Facts at a Glance"이 있다.

 

***

 

2. 최저임금은 빈민들에게 해가된다. 최저임금이 실업을 증가시키며 실업은 빈곤보다 더 악성의 고통을 부과한다는 논의가 있다. 만일 고용주 마음대로 임금을 줄 수 있다면 임금을 적게 주는 대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라는 논의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럴듯해보일 뿐이다. 고용주는 노동자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여 그 차액을 이윤으로 챙기려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빈곤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고 좌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1990년대 초반 뉴질랜드에서 조사된 공식 실업은 13% 이상이었고 무급(no-wage) 인턴직을 제공한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다면 유급직에 고용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한 수백의 좌절한 지원자로 보답받았다. 그들의 희망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미국에는 실제 일자리를 희망하며 무급직이라도 잡으려는 학생들과 인턴직 종사자들이 있다. 이는 뉴질랜드와 미국에서 모두 불법이지만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3.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4.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경쟁할만한 기술이 없고 그 기술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최상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과 기술이 정말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는가? 항공사 최고경영자들의 임금을 살펴보면 이 말이 신화임을 알 수 있다. 기술과 임금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체계 내에 존재한다.
5. 최저임금은 흑인의 청년실업율을 상승시키는 원인이다.
그러나 이 언급을 통해 우익두뇌집단이 소수자를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실업율 상승의 진정한 원인이 인종차별주의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논거를 만드는가.

 

어떻게 이러한 논거들이 실제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몇가지 예를 제시해보자. 유의할 것은 논거 뿐 아니라 및 논거들이 만들어지고 지지되는 방식도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은 흑인의 청년실업율을 상승시킨다.

최저임금법은 특권이 없는 소수자에 불리하다는 편견은 최저임금이 시간당 75센트에서 1달러로 오른 1956년 이래로 의혹의 대상이었다. 이후 2년동안 비백인 십대의 실업은 14%에서 24%로 급상승했다. 최근의 경우 최저임금이 시간당 5.15달러까지 상승한 1996년에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거의 모든 이들에게 경제호황기였지만 이 시기 흑인남성십대의 실업은 37%에서 41%로 단기간에 뛰어올랐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이 Milton Friedman 최저임금은 "책에 기록된 최악의 반흑인법"이라고 말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출처: Dr. Burton W. Folsom, "Minimum Wage Causes Maximum Pain," Mackinac Center(Michigan RWTT)

 

최저임금은 빈민에 적대적이다. 최저임금제도는 실업을 유발한다.

최저임금제 계획의 대상인 노동하는 빈민은 이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만 한다. 최저임금을 벌기 위해 노동하려는 사람들 외에도 보다 높은 기술을 소유한, 생계임금 범위인 시간당 8달러나 9달러를 벌고자 하는 사람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간당 100달러를 벌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푼도 못벌게 된다. 이 예가 극단적이기는 해도 이 원칙은 "생계임금"법과 동일하다; 단지 그 규모가 조금 더 작은 수준에서 발생할 뿐이다. 최저임금법과 "생계임금"법으로 인한 이 세계의 최대 희생자는 생계를 위해 애써 일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출처: "Let's End Poverty by Decree! 'Living Wage' Laws Defy Basic Economics and Hurt Intended Beneficiaries," Reason Public Policy Institute (Southern California RWTT)

 

듀크대학 연구원들은 최저임금 상승 후 보다 나은 교육을 받은 (보통 부유한 집안 자녀인) 십대가 노동력을 제공함에 따라 가장 저숙련인 성인이 일자리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그들의 "필요(need)"? 단순히 비디오게임이나 아이팟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벌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을 덜 시켜도 되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고임금을 주는 대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보다 고숙련의 십대를 고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출처: Craig Garthwaite, "Minimum Wage Increase Hurts Low-Income Families," Employment Policies Institute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와 혼동하지 말 것]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어떤 old wage라도 단순히 지급할 수는 없다. 경영은 노동자들이 기업에 벌어다주는 가치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만일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기여가 시간당 산물에 5달러의 수익을 낳는 종류의 것이라면 경영은 그 이상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며 여전히 본전치기일 분이다. 만일 피고용자에게 시간당 7달러를 주어야만 한다면 그는 노동자를 고용한 시간당 2달러씩 손해보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노동자에게 해고통지서를 전달하고픈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출처: Shawn Ritenour, "What You Need to Know About the Minimum Wage," Mises Institute (an Alabama RWTT). [같은 저자가 쓴 비슷한 글이 Reason Public Policy Institute 웹사이트 및  에 연결되어 있는 Privatization.org에 목록화되어 있다. Shawn Ritenour, "Give Lower-Skilled Workers a Chance."]

 

FYI에 연결되어 있는 우익두뇌집단 추가

 

- Craig Garthwaite, "Hiking Minimum Wage: Be Careful What You Wish" (Philadelphia Inquirer).
- Employment Policies Institute, "the Minimum Wage" and "Who Actually Earns the Minimum Wage?"

 

우익두뇌집단의 반최저임금주의는 미국만의 쟁점이 아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국제협회 International Society for Individual Liberty 웹사이트에 나타난 것처럼 전세계 우익의 관심사이다.
이제 당신은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우익두뇌집단의 논거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러한 논거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신은 그들의 논거에 반대되는 간결한 진술문을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II)"를 읽고 우익두뇌집단의 주장에 맞설 보다 강력한 지적 무기를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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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len Dannin, "The Minimum Wage, Part One" MRZine 20050801

 

원문 http://mrzine.monthlyreview.org/dannin010805.html

 

** 엘렌 대닌은 웨인주립대학 법학부 법학교수이다. [노동을 자유롭게: 뉴질랜드 고용계약법의 기원과 효과 Working free: The Origins and Impact of New Zealand's Employment Contracts Act](Auckland University Press, 1997) 외 다수를 저술했다. 근간 [노동자의 법 되돌리기: 가치에 기반한 노동법개혁을 위한 전략 Taking Back the Worker's Law: A Strategy for Values-based Labor Law Reforms]은 코넬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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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 Lebowitz, &quot;Building Socialism of the 21st Century&quot;

21세기의 사회주의 건설*

 

마이클 A. 레보위츠**

 

[다음의 글은 2005년 7월 24일 베네주엘라 메리다에서 Merida, Venezuela 열린 21세기 사회주의의 구성을 위한 혁명적 학생들의 전국 컨퍼런스에 마이클 레보위츠가 제출한 "사회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Socialism Doesn't Drop from the Sky)"의 결론부이다.--편집자 ]

 

맑스가 스스로의 관점을 파리꼬뮌의 시각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의 사회주의를 20세기의 경험에 비추어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21세기의 사회주의가 상명하달식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모든 주도권이 공직자나 자기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정치지도자(cadres of self-reproducing vanguards)에게 주어지는 국가통제주의적 사회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가 인간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는 민주적, 참여적, 창발적인 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권을 가진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는 사회주의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사회주의는 인민주의도 populism 아니다. 국가가 자신들에게 자원과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두 제공하기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인간 역량의 발전을 촉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회는 국가와 모든 것을 약속하는 지도자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둔다.
나아가서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도 아니다. 인간은 다르고 상이한 욕구와 능력을 지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정의상 그들의 발전을 위해 다양성을 인식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국가나 공동체는 맑스가 차이의 인식에 기초한 통일성이라며 환영했던 것의 등장을 지원하는 생산활동, 소비의 선택 또는 생활양식에 있어 통일성을 기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사회주의가 맑스주의를 감염시킨 질병이며 가정된 규모의 경제 달성을 추구한 소련에서 거대공장, 광산, 집단농장의 형태를 취했던 기술을 맹신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는 반드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가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는 보다 거대한 민주적 통제를 허용하며 (그 결과 생산자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또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환경보전을 보다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20세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바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당신은 보다 나은 세계 건설을 위해 자본의 논리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고 우리는 이제 사회주의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자발적으로 성장한 대중을 불신하는 전위의 노력과 지도를 통해 위로부터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명하게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계급은 역사의 변증법 속에서 실수하고 배울 권리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인간의 모든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회라는 목표에서 시작했을 때, 그리고 목표를 이루는 길이 사람들의 자기-개발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사실 나는 20세기의 여러 교훈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배워왔으며 볼리바르 헌법( Bolivarian Constitution)에 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99조의 "전반적인 인간개발 보장" 강조, "모든 사람이 그/그녀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개발할 권리를 가진다"는 20조의 선언, "민주사회 내에서 모든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개발하고 그/그녀의 개성을 온전히 펼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102조,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민주적 계획과 참여적 예산집행을 확인하는 가운데 인민의 참여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들의 완전한 개발을 보장하는 것과 연관된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이라는 62조의 선언, 상호협동과 연대의 가치에 의해 지도되는 연합의 형태"의 사례로서 "자기관리, 공동경영, 모든 형태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70조, "연대, 사회적 책임, 인간부조의 힘으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135조에 기록된 의무조항--21세기의 사회주의의 요소는 이 조항들 속에 이상적인 형태로 드러나 있다.
이제 투쟁을 통해 이 이상들은 실재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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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ael A. Lebowitz, "Building Socialism of the 21st Century" MRZine 20050728 

 

원문 http://mrzine.monthlyreview.org/lebowitz280705.html

 

**마이클 A. 레보위츠(Michael A. Lebowitz)는 사이몬 프레이져 대학의 Simon Fraser University, Burnaby, British Columbia, Canada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홍기빈 옮김, [자본론을 넘어서 : 맑스의 노동자 계급의 정치경제학], (백의, 1999) Beyond Capital: Marx's Political Economy of the Working Class (Palgrave Macmillan, 2003), 의 저자이며 2004년 도이쳐기념상 Deutscher Memorial Prize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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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A. Drake, &quot;Honoring the &quot;Prophet of Conservation&quot; &quot;

"보존의 예언자"에 경의를: 조지 퍼킨스 마쉬의 [인간과 자연]*

 

브라이언 앨런 드레이크**

 

서평

조지 퍼킨스 마쉬,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활동으로 수정된 물리적 지리학] 데이비드 로웬탈 편집및 해설, 윌리엄 크로농 서문. 바이어호이저환경고전총서, Seattle and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3.

 

 

조지 퍼킨스 마쉬의 George Perkins Marsh 유명한 저서 [인간과 자연] Man and Nature 읽기는 익숙하다거나 심하게는 진부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면에서 성서나 세익스피어의 작품 읽기와 조금 유사하다.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아마 한번 이상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숙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신의 무관심은 곧 존경으로 바뀌게 된다. [인간과 자연]이 다루는 환경파괴라는 내용은 현대인의 귀에는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864년에는 틀림없는 다량의 증거와 탄탄한 논리로 무장하고 자연세계에 미친 인간의 영향을 단호히 평가한 전례가 없었다. 이 책은 경쟁서인 [종의 기원]이 The Origin of Species 제시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패권에 대한 깊은 신념에 혼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보존이라는 이상의 도래를 알렸는데 이 이상은 다음 세기 미국과 유럽에 나타난 환경관리적 태도를 지배하게 된다.
놀랍게도 마쉬의 최대 역작인 이 책은 하버드대학출판사가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년 데이비드 로웬탈의 David Lowenthal 주석과 해설을 추가하여 재출판한 이래 근 40년 동안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워싱턴대학출판사가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바이어호이저환경고전총서로 Weyerhauser Environmental Classics series 이 책을 재출간하게 되었다. 로웬탈은 해설을 새로 썼고 주석도 개정했다. 그리고 이 총서의 편집자 윌리엄 크로농의 서문이 추가되었다. 그러므로 단정히 정돈된 [인간과 자연]은 이제 세 번째 세기에 영향을 미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책에 대한 논의에 앞서 우선 이 저명한 저자를 잠시 소개해 볼까 한다. 지도적인 마쉬 전문가인 로웬탈은 그의 새로운 해설에서 마쉬를 놀랍도록 소박한 사상가이며 열정적인 학자이자 작가로 묘사한다.주1) 1801년 버몬트에서 태어난 마쉬는 생애 대부분을 소도시에서 변호사와 상공업에 종사하며 비교적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자본가로서는 별 수완이 없어서 잘못된 선택과 의심스러운 동업자들 때문에 60대에는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마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많은 다른 방식으로 그의 실패를 메꿨다. 그는 버몬트 의회에 진출했고 주의 다양한 행정요직을 거쳤으며 이탈리아 대사, 터키 특사로 국가에 봉사했다. 그는 유럽의 국경분쟁을 중재했으며 무역관련 쟁점들을 처리했고 남북전쟁 유니온(Union, 옮긴이--당시 미합중국의 명칭)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마쉬는 자력으로 공부한 지성으로서 가장 빛났다. 20개국어에 능통하고 세부적인 것까지 기억하는 무한한 기억력을 갖춘 그는 예술, 문학, 역사에 헌신했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헌학자였으며, 아이슬랜드어 사전을 집필하고 [네이션]에 Nation [옮긴이--미국의 가장 오래 된 지적인 종합지(현재 주간). 남북전쟁 직후인 1865년에 법률가이며 저널리스트였던 에드윈 가드킨이 창간하였다]글을 싣고 백과사전에 중세카탈로니아시(medieval Catalan poetry)와 뽕나무(mulberry trees) 같은 표제어에 대한 해설을 집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로웬탈의 재미있는 해설에 나타난 마쉬의 다양한 재주에 대해 읽다보면 그가 모든 분야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그 중 여러 분야에 통달했다는 느낌 때문에 약간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자연도 마쉬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는 주제였다. 그는 자연과 관련하여 낙타에서 낚시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로 무수한 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역시 [인간과 자연]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간결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다. 당대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마쉬는 인간의 활동이 자연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영향 중에는 우호적이지 않거나 단기적이지 않는 것도 있다. 물론 인간이 자연 변화에 가장 중요한 행위자에 속하며 기술로 무장하고 경제성장에 매달릴 경우 특히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인간은 진보와 풍요라는 미명 하에 삼림을 통째로 파괴하고 바다로부터 땅을 간척하고 강의 흐름을 바꾼다. 그러나 대부분 동식물과 자연자원을 황폐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인간이 의도한 것도 아니고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이 일을 조장한 인간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서문에서 마쉬는 "인간은 어디에서나 훼방꾼"이라고 기록했다. "인간이 저지른 파괴는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연이 세[웠]던 균형을 파괴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에게 최상의 조수 역할을 맡도록 되어 있는 유기적 힘에 의해 지금까지 균형을 유지했던, 그러나 인간이 우매하게도 활동영역에서 강제로 분산시킨 파괴적 에너지를 풀어놓음으로써 침입자에 대해 직접 복수한다"(pp. 36, 42). 생산력 감소, 빈곤, 미적 황폐는 이러한 파괴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의 영향일 뿐이며 시간이 흐르고 강도가 증가하면 환경파괴는 문명을 소멸시키고 나아가서는 인간종 자체의 멸종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마쉬는 경고한다.
[인간과 자연]은 동식물, 삼림, 물, 사막에 관한 사례를 담고 있는 4장을 할애해 극도로 세세하게 이 파괴를 묘사한다. 삼림에 관한 장은 마쉬의 접근에 관한 좋은 예로, 그는 삼림의 파괴를 인간의 "무생물 자연의 조화를 깨뜨린 최초의 침입"(p. 119)으로 받아들였는데 시간의 차원이 아니라 중요도의 차원에서 최초의 의미이다.
국지적 온도변화 및 지역적 기후패턴에서 공기의 전기적·화학적 특질에 이르는 모든 것에 미치는 삼림의 영향을 꼼꼼히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수량과 토양 중의 수분에 미치는 영향이다. 마쉬의 논의에 따르면 삼림은 물의 순환에 적절히 영향을 미침으로써 인류를 위해 기여한다. 삼림은 폭우 시 토양의 피난처가 되어 침식을 줄인다. 삼림에서 나오는 유기퇴적물은 토양이 막대한 습기를 흡수한 후 천천히 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홍수를 예방하고 건기에 시내가 흐르고 샘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한다. 삼림의 호흡작용은 대기를 식히고 땅에 비를 내리게 한다. 삼림의 작용이 없으면 강우량이 부족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삼림을 제거하자 이러한 혜택도 사라졌다. 토양은 바다로 씻겨나가고 급류가 잔잔한 강에 굉음을 울리며 적절한 습도를 유지하던 토지는 비가 내리지 않기라도 하는 듯 바짝 말라버렸다. 이를 위해 인간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막대할 것이라고 마쉬는 지적한다. 특히 토양침식으로 인한 농업생산력 손실은 몇세기 동안 토양을 불모지로 만들 수 있고, 거주자들에게 질병과 기아를 가져다 줄 것이며 국가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물론 이 문제가 로마제국이 무릎을 꿇게 된 바로 그 이유였다는 마쉬의 주장은 유명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 외로도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례를 제공했다.
동식물, 호수, 시내, 강, 해안선에 관한 다른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삼림에 관한 장에서처럼 마쉬는 각각의 형태와 기능을 묘사하고 인간의 활동이 얼마나 쉽사리 그들을 망쳐놓았는지 묘사하기 위해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증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파국의 목록은 페이지마다 가차없이 채워져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박해"에(p. 96) 폭언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마쉬가 환경의 예레미야[옮긴이--예언자]였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자연세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이지만 또한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존재라고 마쉬는 기록했다. 그리고 당시의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마쉬 역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며 세계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이 세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님은 자명하며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대인들과 마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인에게는 책임이 따른다는 그의 신념이었다. 마쉬가 볼 때 인간이 잘못 관리한 자연의 치유는 관리의 중지가 아니라 보다 나은 관리였다. 과학적 전문성, 목적 수정, 겸손한 마음으로 무장하면 인간은 자신들이 자행한 자연파괴를 멈출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개선도 가능하다. 댐, 둑, 집약적 삼림관리--이러한 것들은 근대 환경주의자들이 주저하는 것들이지만 마쉬는 세심하게 수행된다는 전제 하에 이 방법들을 포용했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마쉬는 그가 성년이었던 남북전쟁 전 이루어진 문화개혁을 반영했다. [인간과 자연]의 "계몽된 관리" 사상과 교정적 시각은 기포드 핀콧, 테디 루즈벨트 Gifford Pinchot and Teddy Roosevelt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마쉬는 19세기 후반의 진보적 보존주의 운동의 전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왜 [인간과 자연]을 읽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마쉬의 비판과 그가 제한 해결책이 오늘날의 환경주의자들 사이에 기본적인 쟁점이기 때문이며 자연세계와 자연세계에 대한 위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가 상상했던 것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근대적인" 마쉬의 환경사상이 진실로 어떤 것이었는 가를 밝혀내는 데 있다. 때로 지나쳤지만 훗날 주요한 환경쟁점이 된 주제와 사상을 다루어 그를 이해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례로 동식물에 관한 장에서 마쉬는 해충통제에서 새와 곤충의 역할을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유기농이나 레이첼 카슨의 Rachel Carson [침묵의 봄]의 Silent Spring 마지막 장과 매우 유사하다. 귀화외래종에 대한 마쉬의 논의는 얼룩말 홍합(zebra mussels)이나 칡(kudzu)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유사하게 들릴 뿐 아니라 앨 크로스비 Al Crosby 같은 학자의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경제학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과도한 사냥에 대한 마쉬의 논의는 근대적 사회정의 환경주의자들의 논의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특히 환경사가들에게 가치로운 책이다. 왜냐하면 일세기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학문에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 기술, 간학문적 접근, 역사적 관점은 현재 우리가 그를 환경사의 1급 연구자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은 여전히 환경관련 연구를 잘 수행하는데 기본이 되는 한두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다.
첫째, 과학문헌에 정통하고 이를 이용했던 마쉬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과학적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그의 책에서 그 가치를 인식하고 능력 닿는데까지 과학을 이해하고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여러 면에서 그는 생물학의 최첨단을 달렸다. 과학적 생태학이 등장하기 몇십년 전부터 마쉬는 생물과 그 환경 사이에 복잡한 연계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마쉬는 "모든 자연은 보이지 않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유기체는 작거나 약하거나 의존적이거나 간에 다른 존재의 복리에 필요하다"(p. 96)고 기록했다. 대부분의 근대환경사가들에게는 그런 선견지명이 없으며 20개국의 언어로 된 과학논문을 읽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마쉬와 경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학문은 우리에게 비인간 자연과 인간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요구하며 객관적거나 충분치는 않지만 과학은 그 사고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로, 마쉬는 "인간"과 "자연"이 환경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이해했다. 만일 학문이 (도널드 워스터의 Donald Worster 말로 부연하면) 인간과 비인간자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마쉬는 이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가 각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양자는 환경변화과정의 이해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인간은 기술을 이용하고 물적 욕망에 따라 자연을 조작하고 누르거나 이끌었다. 그러나 자연도 밀거나 당긴다--자연은 본래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적극적인 세력이다. 많은 생태적 저하가 인간의 활동에 대한 자연의 반작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애당초 자연의 반작용을 인식하지 못한 인간 때문에 발생한다고 마쉬는 기록했다. 즉, 마쉬에게 비인간 세계는 인간사의 문제인 것이다. 현재의 환경사가 인간에 대한 기술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비인간에 대한 문제에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비판가들에게 [인간과 자연]은 즐거움 휴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 번째로 마쉬의 접근은 매우 다국적이었다. [환경사]에 Environmental History 담긴 최근 논문에서 폴 서터는 Paul Sutter  미국의 역사가들에게 "보다 많은 시간을 조지 퍼킨스 마쉬에게 할애하라"고 촉구한다. 이는 훌륭한 조언인데 [인간과 자연]의 강점 대부분은 그 책이 드넓은 지리학적 범위를 아우른다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미국의 환경사가들은 자신들의 주제와 해석 속에서 편협해지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터 같은 학자들은 미국 외의 지역에도 관심을 가졌던 마쉬를 미국의 표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주2)
물론 [인간과 자연]에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진부해보인다. 일례로 자연균형에 대한 마쉬의 논의는공기로부터 "말라리아 작용"을 걸러내는 삼림의 능력(p. 135)에 대한 그의 논의처럼  "카오스 생태학"의 시대에는 기이해 보인다. 물고기남획이 "강렬한 카톨릭"의 식이요법규정의 필요에도 일부 기인한다(p. 106)는 주장을 통해 때로 마쉬가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결점이 있지만 주요 결점은 언어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문학적 간결함으로 알려진 적이 한번도 없는 시대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마쉬의 문장들 대부분은 미치도록 길고 복잡하다--15줄짜리 문장도 있다(p. 50). 마쉬는 고전적 은유와 불필요한 수사학적 표현의 남발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삼림이 각 지역의 봄의 도래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단락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케레스[옮긴이--로마신화의 풍작의 여신;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에 해당]의 화환을 꾸미는 곡물의 꽃이 겨울잠에서 깨기 전에 이미 플로라[옮긴이--로마신화의 꽃의 여신]는 그녀의 전원의 화환을 심었다"(p. 157). 마쉬의 보라빛 시귀의 덤불을 통과하는 일은 [인간과 자연]을 단번에 눈깜짝할 사이에 읽는 최상의 책으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진정 고전적 작품의 비판으로는 매우 사소한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꿈같은 작품이었지만 독자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지금은 활기를 띠고 있는 분야를 예견한 최초의 씨앗을 보게될 것이다. 워싱턴대학출판사는 이 책의 재출간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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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an Allen Drake, "Honoring the "Prophet of Conservation": George Perkins Marsh's Man and Nature"", H-Environment (January, 2004) 

 

원문 http://www.h-net.msu.edu/reviews/showrev.cgi?path=142661079242094

 

BOOK REVIEW
George Perkins Marsh. Man and Nature: Or, Physical Geography as Modified by Human Action. Edited, with a new introduction, by David Lowenthal. Foreword by William Cronon. Weyerhauser Environmental Classics Series. Seattle and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3. xxxv + 472 pp. Notes, index. $24.95 (paper), ISBN 0-295-98316-7.

 

** 브라이언 앨런 드레이크( Brian Allen Drake)는 캔자스 대학 역사학부 교수이다. 



1) 로웬탈이 쓴 가장 최근의 전기인 [조지 퍼킨스 마쉬: 보존의 예언자]는 George Perkins Marsh: Prophet of Conservation 2000년에 워싱턴대학출판사에서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발간되었다.

2) Paul Sutter, "Reflections: What can U.S. Environmental Historians Learn from Non-U.S. Environmental Historiography?" Environmental History 8 (January 2003):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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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Editors,&quot;The Great Fear Stagnation and the War on Social Security&quot;

스태그네이션에 대한 심한 공포와 사회보장과의 전쟁

편집인

 

스탠다드 앤 푸어스의 Standard & Poor's 수석경제분석가(economist)인 데비이드 위스는 David Wyss 최근 공개한 논문 "2005년 길할까, 불길하거나 우울할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장은 [미국 경제의] 최우선적인 소원이지만 회복이 항상 뒤따른다면 경기후퇴(recession)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스태그네이션이 무섭다"(비지니스 위크 온라인 Business Week Online, January 10, 2005).
이러한 평가는 면밀히 조사할만하다고 우리가 믿기에 충분히 중요한 발언이다. 위스는 주기적인 하락 뒤에는 주기적인 상승국면이 자동으로 따라올 것이기 때문에 주기적인 하락이 축적과정에 미치는 위협은 미국과 세계경제가 최근 겪고 있는 스태그네이션의 지속이나 심화가 미치는 위협에 비하면 덜 심각하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스태그네이션은 보통 장기간의 저성장, 저고용, 저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상승세가 약하고 인위적인 진작책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경기상승기에도 스태그네이션은 경기하락기만큼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스태그네이션은 상승과 하락의 반복 같은 전형적인 경기순환이 이루어지는 근원적인 경제적 경향을 표현한다. 스태그네이션은 자동적으로 반전되는 것이 아니며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경기후퇴보다 오히려 스태그네이션이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라고 한 위스의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미국 경제는 이제 2001년의 후퇴국면--신경제의 금융거품이 꺼지면서 나타났던 후퇴국면--으로부터 회복단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떤 실질적인 동력을 유발하지 못할 경우 몇년 (혹은 심지어 몇십년동안) 경제라는 기관차가 갑자기 멈추거나 시동이 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있는가? 위스는 몇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비록 그가 비지니스 위크 온라인의 독자들에게 그 내용을 애써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실질 GDP가 겨우 2.5% 상승했던 지난 4년의 (그 중 3년간은 회복기였다) 역사가 첫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주요한 위험"이 여럿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가 상승, 달러가치하락, 높은 이자율, 쌍둥이 적자"--연방재정적자와 국제거래에서의 경상계정 적자가 포함된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이러한 위험요소로 인해 야기되는 추가적인 금융위기가 1989년 후반 금융거품이 꺼진 이래 일본경제를 괴롭혀온 고질적이고, 꾸준한 스태그네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모건 스탠리의 Morgan Sranley 수석경제분석가인 스티븐 로치는 Stephen Roach "거품이 꺼진 후 지금까지 미국이 경험한 것들은 색다른 것이었다--경기후퇴는 한 번 뿐이었고 경기저하(deflation)의 공포는 단기간에 그쳤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운 일본의 증후군(syndrome)을 미국이 피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선언했다. ("Global Post-Bubble Pitfalls? Yet Another Lesson from Japan" www.morganstanley.com, February 18, 2005)
그러나 스태그네이션의 유령이 미국과 세계경제에 떠돌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2005년도 [대통령 경제보고서]에 Economic Report of the President 나타난 부시행정부의 자체 평가를 경시하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서론은 "미국은 떠들썩한 경제팽창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예견한 2005년 이후의 경제성장율은 지난 35년간의 연평균성장율을 조금 상회하는 3.3%이다. 물론 2000-04년 동안 보여준 2.8%의 성장률(Chart 1을 보라)을 행정부가 수립한 이후 5년간에 대한 계획에 반영시킨다면 2000-09년 십년간의 연간성장율은 3.1%에 지나지 않는데, 이 수치는 지난 30년간의 평균을 약간 하회하는 것으로 1960년대에 비하면 매우 나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경제사와 행정부의 계획은 그러므로 앞으로도 느린 성장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올해의 [대통령 경제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가지는 의미가 여전히 교묘하게 빠져있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ors)가 2월 말 발간한 이 보고서는 지난 몇 년간의 회복세가 느린 이유를 선행한 후퇴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느린 성장의 문제를 피해가려는 노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보고서는 "최근의 후퇴와 팽창은 특히 적절한 것이며 경제가 전반적으로 보다 안정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70). 물론 이 언급은 맥없는 팽창을 선행했던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저하와 구분하기 어렵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스태그네이션인 것이다.
만일 지속적으로 연장되는 스태그네이션이 오늘날의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큰 공포"라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상부로부터 시작된 계급전쟁에 명백히 새로운 국면임을 표시하는 사회보장 및 여타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현재의 공격과 스태그네이션은 어떻게 연계되는가?
우리가 이 지면(these pages)을 통해 수차례 제기한 이론적 입장에 따르면 급속히 성장하지 못하는 상태인 스태그네이션은 자본주의 경제의 전형적인 상태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구화된 기업 세계를 포함해서) 독점자본주의단계에서 특히 분명하다. 이 단계에서 거대기업은 생산능력의 팽창을 통제하고 조심스럽게 규제할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경제적 가처분 잉여를 극대화하려고 시도한다. 대중의 제한된 소비가 궁극적인 원인인 원치 않게 발생되는 과도한 생산능력의 축적을 나타내는 과잉축적은 노는 공장과 설비를 추가하지 않으려는 기업의 투자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진다. 그 결과가 성장에 있어서 일반적인 경기후퇴 경향이다.
이 문제의 근원에는 보다 성숙하고 지위가 튼튼한 산업 내의 가격경쟁의 효과적인 금지가 자리잡고 있다. 가격은 전반적으로 위로만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경쟁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절감을 위한 혁신이나 마케팅 영역으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요 부족에 대한 기업의 대응책은 대부분 가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윤방어를 위해 고용감소 및 생산능력 이용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산성 증가는 낮은 가격이나 (경제가 완전고용의 정점에 도달할 경우 명백히 상승하는) 실질임금증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부자들의 손에 공급하던 잉여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의 결과는 과잉축적을 낳고 경제 전반에 유효수요의 부족을 가져온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거대기업과 부유한 개인의 통제를 점점 더 받는, 투자처를 찾아헤매는 증가하는 잉여는 이익을 내주는 투자처를 찾을 수 없으며 경제팽창율은 둔화된다. 이같은 조건 하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러운 투자열풍은 지극히 명이 짧을 뿐더러 자기제한적인 경향을 보인다.
독점자본주의에 전형적인 이러한 축적문제들은 보다 거대하고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자본주의 하에서의 모든 급속 성장기는 내부축적(저축-그리고-투자)과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외부적 역사적 요인이 작용한 기간이다. 산업화의 도입단계에서는 산업이 실질적으로 무에서 구축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새로운 공장과 설비에 대한 수요는 만족을 모르는 듯 했다. 그러나 성숙기에 접어들어 자본이 풍부하며, 현재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또한 생산수준을 확대하기 위한 충분한 생산력이 낡고 가치가 저하된 공장과 설비를 대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투자와 더불어 존재할 뿐인 경제에서는 산업혁명에 의해 표현되었던 규모의 신규 투자에 대한 강력한 자극제는 결여되어 있다. 조셉 슘페터가 Joseph Schumpeter 2권으로 이루어진 [경기순환론](1939)의 Business Cycles 거의 말미에 관찰한 대로: "산업혁명의--'진보'의--분위기는 오직 자본주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없이 자본주의는 스태그네이션으로 추락할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장기간의 투자기회 부재를 보여주는 시기로 학파 불문하고 모든 경제학자를(economists of all stripes) 스태그네이션과의 씨름장으로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공황이 끝난 이유는 축적에 연계된 내부적 과정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서 발발한 이차세계대전으로 인해 군비지출이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일어난 급격한 경기폭등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스태그네이션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20여년 이상 꾸준한 급속 성장이 이루어졌다. "황금시대"로 불리워 온 이 시기가 그와 같은 강도로 그리 오해 지속된 것은 특별한 역사적 요인의 산물일 뿐이다. 그 요인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1) 전쟁기간 동안 형성된 소비자 저축; (2) 전쟁으로 인한 파괴에 뒤이은 유럽과 일본경제의 재건; (3) 주간 고속도로체계(the interstate highway system) 건설과 시골의 교외화를 포함하는 자동차산업 성장의 물결 속에서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은 자동차의 역할; (4)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과 달러화의 부상; (5) (아시아에서의 뜨거운 전쟁(hot wars)과) 냉전으로 정당화된 영구적인 전시경제의 창조; (6) 추가판매노력과 소비자 채무구조를 동반한 미국인들의 삶 거의 전반에 대한 상업화; (7) 경제의 금융상부구조(superstructure)에 경기폭등/거품발생 시작.
문제는 이러한 요인들 모두가 일시적이거나 그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래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스태그네이션 경향을 동반하는 경제는 바람이 새는 타이어와 같다; 그 경제는 항상 평탄해지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항상 펌프로 공기를 주입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성장하는 세계이며 나아가 타이어와 공기가 새는 구멍의 크기가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타이어의 크기를 키우려면 오직 더 크고 보다 강력한 펌프만이 쓸모있는 것이다(Harry Magdoff and Paul Sweezy, The End of Prosperity, 1977, 22를 보라).
1970년대에 경제는 스태그네이션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춤거렸다. 완전고용생산은 재달성되지 못했고 20세기의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경제성장율은 1960년대와 비교해 4분의 1 이상 가라앉았다(Chart 1). 게다가 성장률은 천천히 미끄러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소득 흐름의 구멍은 더 크고 보다 강력한 펌프를 필요로 했다. 막대한 금융폭발 속에서 이런 현상이 일정하게 발견되는 동안 금융거품(혹은 거품들)의 결과는 갑작스러운 거품붕괴(bubble-bursting)에 대한 공포를 유발했는데 거품의 붕괴는 깊은 스태그네이션에 앞서 나타나는 채무불이행이라는 폭포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 대해 자본의 세가지 차원에서 대응했다: (1) 계급전쟁의 강화; (2) 펌프의 크기 및 활동력 증가 시도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본에 봉사한다는 차원에서 위로부터 부과되는 계급전쟁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3) (경제적 지구화를 포함한) 제국주의의 성장과 전쟁.
백악관의 부시는 이 세사디 위기대처법을 모두 사용해왔다. 계급전쟁 촉진에 있어 어떤 다른 행정부보다도 멀리 나아갔고; 지배계급의 이해를 직접 지원하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경제를 부양했으며; 세계지배라는 제국주의적 전략을 지원하는 지구적 전쟁에 착수했다.
대내적으로는 레이건 행정부가 처음 도입했던 대량재정적자를 통해 경제를 부양하는 동시에 노동자와 빈민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는 정책을 따랐다. 이 정책들은 군비지출과 기업 및 부자들에 대한 세금감면에 연계되었기 때문에 체계에 보다 잘 수용될 수 있었다. 재정적자는 "야수 굶겨죽이기(starve the beast)" 전략의 일환인 빈민과 노동하는 중간계급을 지원하는 사회 프로그램들의 대폭 축소 이유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Paul Krugman, “Spearing the Beast,” New York Times, Op-Ed, February 8, 2005). 계급전쟁의 궁극적이고 약진적인 목표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주요 사회 프로그램--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사회보장 뿐 아니라 주거보조, 영양보조 등을 모두 포함하는--을 제거하거나 일소하는 것이다.
뉴딜과 1960년대의 사회 프로그램을 모두 제거하려는 전투에서 새로운 공세의 일차적 목표로 미국정부의 모든 프로그램 중 가장 대중적인 사회보장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계급투쟁에서의 자본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기습하여 사회보장을 무력화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선전전이 수십년동안 이어져왔지만 역진적인 사회보장분담금(regressive payroll taxes)은 노동자들에게 사회보장급부를 받을 자격을 느끼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레이건 정부 시절 도입된 수혜 감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은 대체로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왔다. 사회보장으로 들어가는 사회보장분담금을 분리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다음으로는 급부 축소를 요구하는 민간부문의 창출을 통해 사회보장 일부를 민영화하려는 계획은 백악관의 부시가 사회보장을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해 도입한 트로이의 목마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겁을 주어 매우 인기있는 정부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정비를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 사회보장이 장기적인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주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요즈음엔 사회보장신용기금이 2042년이 되면 (기금이 그 시점에서 제공해야하는 급부의 25% 정도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견되는 가운데) 자신의 의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연평균경제성장률이 2005년에서 2010년의 3%에서 2010년에서 2015년에는 2.2%로 그리고 2015년에서 2080년에는 1.8%까지 악화되어 가파르게 추락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보장국의 장기 예측에 근거한 것이다(Chart 2를 보라). 여기에서 예측된 1.8% 성장은 대공황의 시기이자 독점 자본주의 하에서 고전적인 스태그네이션 기간으로 여겨지는 1920년에서 1939년을 포함해서 미국 역사상 어떤 20년간의 성장률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경제성장률이 이 수치보다 높다면 사회보장에 위험 따위는 없을 것이고 기금은 자신이 제공해야 할 급부를 무한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보장에 필요한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는 지속적으로 실질성장율이 예상보다 더 높은 것으로 판명됨으로써 뒤로 늦춰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회보장국이 최상의 예측이라고 간주하는 내용에 부합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만큼 깊은 스태그네이션이 (금세기 대부분에서 2%를 하회하는 성장률을 보이며) 실제로 몇십년간 지속된다면 미국 자본주의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고 계급투쟁은 매우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추가로 언급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급부의 4분의 3을 보유할 수 있는 사회보장은 체계의 문제를 최소화하거나 심지어는 구원의 손길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 매우 장기적인 저성장율이 예견되는 경제적 아마게돈의 현실을 고려할 때 모든 미래에 대한 가정을 무용지물로 만들 종류의 사회적 격변을 가정하지 않은 채 사회보장국이 예견하는 길로 추락해 갈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진실은 장기적인 저성장율로 인해 문제시되는 것은 사회보장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일일까? 물론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거대한 위기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은 채 단순한 인구학적 추세의 결과 사회보장이 맞은 위기일 뿐이라고 제안하는 상황 속에서 미국 자본주의 전체가 깊고 항구적인 스태그네이션, 끝나지 않는 위기와 계급전쟁으로 가라앉을 것이라며 미래를 예견하는 일은 매우 부정직한 태도이다.
이러한 속임수의 한도는 부시 행정부의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 그레고리 맨큐가 N. Gregory Mankiw 과감히 선언한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사회보장신용기금은 2042년이면 바닥나 지급불능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The Economic Agenda," The Economists' Voice, vol. 1, no. 3 [2004], 4). 그러나 이 시점에서 사회보장은 사회보장국의 보수적인 가정--심지어 체계에 어떠한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도--에 따르면 4분의 3의 급부를 보장할만큼 충분한 기금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맨큐의 선언은 사람들을 호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미국 정부예산의 일부인 사회보장의 파산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하는 것 역시 적절한 태도이다. 만일 사회보장기금이 그 어느때보다도 부족해지는 일이 발생한다면 다른 선진산업국가들이 하는 것처럼 일반세입으로부터 보충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보장이 내부에서부터 자기지원하는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은 미국방성이 그런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회보장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일으킨 거대한 반발(great revolt)의 산물이며 노인이나 장애인들이 깊고 끝없는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어이없게도 이제는 경기침체에 접근하는 경제하락기가 사회보장의 효과적인 제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난 몇십년에 걸쳐 벌어진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내에 나타난 거대한 반전의 표식 중 이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들과 더불어 현 백악관의 제안에 걸맞게 사회보장이 개별적인 민간부문 창출을 통해 부분적으로 민영화될 수 있으며 이 부문은 고율의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가지 상이한 서적들을 교묘히 뒤섞는 사람들이 따라온다. 심한 정체를 겪는 경제에서는 주식시장에서의 고율의 수익이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경제성장이 사회보장과 관련된 문제를 발생시킬 정도로 지체된다면 주식시장 관련 문제도 함께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매우 자명하다"고 TIAA-CREF 투자경영그룹의 투자분석실장 더글러스 포레가 Douglas Fore, director of investment analytics for TIAA-CREF Investment Management Group 언급하고 있다(Washington Post, February 9, 2005). 피터 디파키오 의원이 Congressman Peter DeFazio(D-OR) 언급한 것처럼 "지지자들은 경제성장이 과거 성장률의 거의 절반 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예견되는 경우 [민간부문을 고려에 넣은 부시행정부의 권유에서 주장된대로]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7%의 수익률을 낼 것인지 증명할 능력이 없다." (Peter DeFazio Reports, January 2005). 4년도 더 된 글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Social Security, the Stock Market and the Elections,"  November 2000) "주식시장은 붕괴하지 않는 대공황을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 몇 년 (혹은 몇 달) 앞의 경제성장추세조차도 정확히 예견할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관계로 사회보장국의 예견은 완전한 어둠 속의 체계를 건져내고, 보다 긍정적인 내용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태그네이션이 미국경제에 깊이 침투해있다고 인식하는 한 이러한 예견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실증이 있기는 하다. 생산부문에서의 완전고용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체계는 또한 점점 더 그 목표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스태그네이션은 오늘날 거의 대다수의 주류경제분석에 내재된 가정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생산가동(full capacity production)은 거의 도달될 수 없을 것이라는 개념은 담담하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정치적 의사결정자들에 의해 여러번 제시되어왔던 경제하락에 대한 해답은 자본에 부과된 제약이나 뉴딜 정책에 의해 강화된 제약들--금융, 산업, 복지, 식료품과 약품, 통신 규제들을 차례로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필연적인 결과는 오직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심화일 뿐이다. 위스가 말하는 "주요 위험"은 축적과정이 얼마나 망가지기 쉬운 것인지를 지적한다. (이라크 침공을 통한 미국의 세계석유시장 통제권 확보 시도와 별개인) 고유가, (미국의 소비를 지탱하고 있는 주택거품붕괴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이자율상승, (무역수지 악화와 제국을 위한 달러 흐름을 악화시키는 경상적자증가에 연계된) 달러가치 하락, (낮은성장, 부자들에 대한 세금감면, 군사-제국 복합체 내의 투기열풍의 결과에 결합된) 연방재정적자 등 이 모든 것은 정체하는 경제에 닥칠 커다란 공포를 나타내는 것이다.
연방적자지출은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불안정성을 불러오는 잠재적인 주요 원천이며 금융시장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연방준비위원회 의장 알란 그린스펀은 Alan Greenspan  2005년 3월 2일 주택예산위원회 앞에서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적자로 인한 부채증가수준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계산해보거나 어느 때보다도 높은 이자율 하에서 부채에 대한 어느 때보다도 높은 이자비용을 더해본다면 체계는 재정적으로 불안정해진다.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불안정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스태그네이션 상태에 진입할 것이다."
그린스펀이 잘 알고 있는것처럼 연방재정적자는 부시정부가 도입한 부자들을 위한 감세혜택을 반전시킴으로써 (또는 이 감세혜택이 영구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감세조치로 인한 세입의 손실 중 일부만으로도 장래에 지독히 느린 성장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사회보장이 한없이 견고한 기반을 가지도록 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현재 이라크와의 전쟁에 소모되는 비용이 GDP에서 차지하는 몫 또한 동일한 목표를 성취하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금액이다(Paul Krugman, “Inventing a Crisis,” New York Times, December 7, 2004). 그러나 자신들의 부를 탐닉하는 미국의 지배계급은 사회보장을 강화하는데--또는 사회보장이 한 걸음 더 나아가거나 사회보장이 자신의 주요 수입원으로 점점 더 사회보장에 의존하는 수혜자들에게 보다 적절한 급부를 제공하도록 사회보장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자신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조금의 잉여조차도 제공하려하지 않는다. 대신 (부분적으로는 실질적인 재정위기를 감추기 위해 날조된) 사회보장위기를 이용하여 더 많은 노동자 해고의 정당화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다시 부과하는 것을 질색하는 그린스펀은 의회에 특히 노동자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소비세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이 정책은 이름하여 계급전쟁이다.
관련 문제들을 동반하며 적자가 계속 축적되는 동안 더 날카롭게 공격받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이 게임의 본질이다. 해리 맥도프와 폴 스위지가 [스태그네이션과 금융시장의 폭발] (Stagnation and the Financial Explosion, 1987)에서 관찰한 바대로 "끝나지도 않고, 그 어느때보다도 심한 붉은 글씨에 의해 발생된 자극은 자기규제이다. 누적적자는 새로운 인플레이션 나선에 연료를 제공하고 고이율이 유지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동시에 누적적자는 결과적으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창업의 하락을 이끄는 동인을 구성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는 자신이 딜레마의 뿔 끝에 서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적자 없이 생존할 수 없고 적자와 함께 살아갈 수도 없다"(106). 국가의 재정위기 혹은 슘페터의 표현대로 "국가의 세입위기"는 그러므로 독점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스태그네이션을 부르는 논리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이점에서 경제가 안고있는 어떤 주된 위기도 잠재적으로는 금융거품붕괴, 현상유지 또는 성장악화를 가져옴으로써 전체체계를 뒤흔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국사회만을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나머지 국가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는 위기에 사로잡혀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 주요자본주의국가 사이에 증가하는 경쟁, 제국주의, 지구적 군사갈등, 폐기물 확산 등은 현재의 경제적 침체의 자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답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체계의 경제적 부담은 일국 혹은 지구적 차원의 일반대중을 점점 더 붕괴시키려고 한다.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탐구 중에 사회주의를 제외한 대안은 없다--일례로 민주주의, 평등주의적 질서를 위한 투쟁을 들 수 있다. 이는 오래된 생각이지만 사멸하기를 거부한 생각이며 이제 새로운 혁명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이해하는 일은 그 첫 단계일 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를 그 너머로 데려다주어야만 한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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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ditors, "The Great Fear Stagnation and the War on Social Security",  Monthly Review April 2005  vol. 56, No. 11.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405editors.htm



원주

* (1920-38년에 1.8%였던) 실질GDP의 연평균성장률은 1920년에서 1939년 사이에는 2.1%를 기록했다(Historical Statistics of the United States, 1970, 226, series F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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