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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창조적 파괴*
데이비드 하비**
우선 신자유주의는 사적소유권,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특징으로 하는 제도적 틀 안에서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인간의 복리(well-being)가 가장 증진될 수 있다고 하는 정치경제적 실천이론이다. 국가의 역할은 그와 같은 실천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국가는 화폐의 품질과 보전에 관여해야만 한다. 또한 국가는 사적소유권을 보증하고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방위, 경찰 및 사법 기능을 창출해야만 한다. 나아가 (교육, 보건, 사회보장, 환경오염 등의 분야)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필요한 경우 국가활동을 통해 시장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과제 이상을 넘보면 안된다. (일단 창출된) 시장에서 국가개입은 최소한도로 유지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시장신호를(가격) 예측할(second-guess) 충분한 정보를 가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개입의 왜곡과 편향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신자유주의 실천은 종종 다양한 이유로 이같은 틀(template)에서 벗어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정치-경제적 실천과 사상에 있어 표면상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혁명(Thatcher/Reagan revolutions in Britain and the US)을 필두로 한 현저한 선회가 도처에 존재해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등장한 새로운 국가로부터 뉴질랜드나 스웨덴 같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나 복지국가 같은 과거형태의 국가에 이르는 국가들이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강압에 의해 차례로 신자유주의의 견해를 일부 받아들여 적어도 일부 정책과 실천을 조정하기에 이른다. 아파르트헤이드1) 이후의 남아프리카(Post-apartheid South Africa)는 재빨리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수용했고 심지어 현대 중국은 그 방면에서 선두주자로 나섰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지지자들은 이제 교육(대학과 여러 "두뇌집단(think tanks)"), 매체, 기업경영실과 금융기관, 핵심국가기관(재무부, 중앙은행)과 더불어 국제금융과 무역을 규제하는 IMF나 WTO 같은 국제기구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는 담론양식의 패권(hegemony)을 장악한 것이다. 또한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이용하는 상식적인 방식에 신자유주의가 적절히 통합되도록 사고방식 및 정치-경제적 실천에 스미는 영향력을 지닌다.
사실상 신자유주의화는 거대한 조수 같은 제도적 개혁과 광범위한 조정으로 세계를 휩쓸었다. 비록 지리적으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북한 같은 소수의 예외 외에는) 완전히 안전한 곳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나아가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WTO나 (국제금융을 주도하는) IMF를 통해 작금에 성립된 게임의 규칙(rules of engagement)은 신자유주의를 전지구적 규칙의 집대성이라고 예시한다(instanciate). WTO와 IMF에 서명한 국가 (누가 그 외부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는 모두 (완만한 조정을 허용하는 "유예기간(grace period)"이 있다고는 해도) 이러한 규칙을 지키거나 아니면 혹독한 불이익을 받는다는데 동의한다.
신자유주의적 체계의 창조는 분명 다량의 파괴를 수반해왔다. (정치-경제적 사안을 지배하는 이전의 국가주권을 전제로 하는) 이전의 제도적틀과 권력 뿐 아니라 노동분업, 사회관계, 복지급여, 기술적 혼합, 생활 방식, 토지접근성, 기질(habits of the heart), 사고방식 등등도 파괴했다. 신자유주의적 혁명의 득실에 대한 평가가 요청된다. 그러므로 다음에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이러한 변환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논의를 약술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차없는 강도로 신자유주의적 혁명으로 몰아가는 저변의 동인, 이해관계, 주체에 익숙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수사가 자신에게 적대하게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누구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위해서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특정이해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그들의 주장대로 누구에게나·어디에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는가?
신자유주의의 '이식'
어떤 사상체계든 패권을 장악하려면 상식적인 이해 속에 깊이 체화시켜, 당연시되고 의심받지 않도록 근본개념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낡은 개념은 큰 소용이 없다. 우리의 직관과 본능에, 우리의 가치와 바람에, 우리가 거주하는 사회적 세계에 내재한 것처럼 보일 가능성에 거의 "자연스럽게" 호소하는 개념적 도구가 구성되어야만 한다. 신자유주의적 사상의 설립자들은 개인적 자유(individual liberty and freedom)라는 정치적 이상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문명화의 핵심가치"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한 일은 현명한 좋은 선택으로, 이들은 개념으로서 진정 압도적이며 대단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가치들이 파시즘, 독재, 공산주의 뿐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개인의 판단을 집합적 판단으로 대체했던 모든 형태의 국가개입에 의해 위협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들은 "(사적소유권과 경쟁적인 시장)에 결부된 권력과 주도권의 확산 없이 자유가 효과적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결론짓는다.1)
논의의 결론이 논의의 처음과 필연적으로 부합하는 지의 문제와는 별도로 개인의 자유 개념이 본래 강력하고 호소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력한 역사적 실체를 가져왔던 영역 외부에서조차 그러하다. 이러한 이상은 냉전종식 이전의 동유럽 및 소비에트연방의 반체제운동과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1968년파리와 시카고에서 방콕과 멕시코시티까지온 세계를 휩쓸었던 학생운동 일부는 보다 많은 언론의 자유와 개인적 선택의 자유에의 요구에 의해 추동되었다. 이러한 이상이 변화의 강력한 역사적 작인임이 다시금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의 호소가 수사적으로 가는 곳마다 우리를 에워싸고 모든 형태의 현대정치선언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미국이 특히 그렇다. 일례로 '911테러'로 알려진 공격의 일주년에 부시 대통령은 사건 직후 발간된 미국방전략 문서(the US National Defense Strategy document)에서 발췌한 생각을 뉴욕타임즈 New York Times 특집란에 실었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전을 준비할 때도 그랬듯) "자유가 증대되는 평화로운 세계는 미국의 장기간의 이익에 기여했고 불후의 미국의 이상을 반영하며 미국의 우방을 단결시킨다"고 기록했다. "인류는 오랜 원수를 제압하고 자유에 승리를 안길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게다가 이후 그는 보다 정서적인 호소를 통해 "자유는 세계의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전능자의 선물"이며 "지구상의 최강 권력인 (미국은) 자유의 확산을 도울 의무를 (지닌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2)
그러므로 이라크에 대한 선제권을 정당화하는 다른 이유가 모두 그릇되었거나 최소한 미달임이 증명되었을 때, 부시행정부는 이라크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전쟁을 적절히 정당화한다는 생각에 점점 더 많이 호소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파악되는 "자유"의 종류는 문화비평가 매튜 아놀드가 Mathew Arnold 오래 전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한 바와 같다: "자유는 타기 좋은 말이지만 어디로든 가는 말"이다.3) 무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제로 기증된 자유라는 말을 탄 이라크인들이 가는 행선지가 어디라고 예상하는가?
이에 대한 미국의 대답은 2003년 9월 19일 임시군사정부(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행정관 폴 브레머가 Paul Bremer "공기업의 완전한 사유화, 이라크 경제에 대한 외국기업의 제한 없는 소유권, 해외투자 이윤의 제한 없는 본국 송금이라크 은행 개설에 대한 외국의 통제권, 외국기업과 국내기업의 동등한 대우무역장벽의 거의 완전한 철폐"를 포함하는 네가지 명령을 포고했을 때 명쾌하게 드러났다.4) 이 명령들은, 공공서비스, 매체산업, 제조업, 서비스산업, 운송, 금융, 건설부문을 포함한 경제전반에 적용되었다. 오직 석유만이 제외되었다. 일률과세를 요구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역진적인 세금체계도 제도화되었다. 파업권은 불법화되었고 노조는 주요 부문에서 제외되었다. 임시군사정부의 이라크인 구성원들은 "역사를 무시한 결함투성이 논리"라며 "자유시장근본주의"의 강제 부과에 저항했다.5) 그러나 2004년 수립된 이라크임시정부는 권력변동이나 새로운 법 제정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미 공표된 포고(decrees)만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부과하려고 애썼던 것은 분명 이라크인이나 외국인이나 시장진입자라면 동일하게 이윤을 볼 수 있는 자본축적조건의 활성화를 근본적인 임무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완전한 신자유주의적 국가기구였다. 즉, 이라크인들이 자유라는 말을 타고 신자유주의의 산호초 속으로 뛰어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브레머의 포고는 부의 창출에 있어 필요하면서 충분하고 그러므로 이라크인들의 복리를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 포고는 법, 개인의 자유, 민주정부에 근거한 적절한 통치에 적당한 기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 발생한 폭동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반한 자유시장근본주의를 포용할 수 밖에 없도록 몰린 이라크의 저항으로 통역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국가체제에 대한 최초의 거대한 실험은 브레머의 포고가 발행되기 거의 30여년 전 일어난 1973년의 "소 (小)911(little September 11th)"이라 불리는 피노체트 쿠데타(Pinochet's coup) 이후의 칠레였음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Salvador Allende 좌파사회민주주의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쿠데타는 CIA와 미국부장관 헨리 키신저가 강력하게 지원한 것이었다. 쿠데타는 모든 사회운동과 좌파정치조직을 폭력적으로 탄압했고 (빈곤지역의 지역보건소 같은) 모든 형태의 대중조직을 해체했다. 노동시장은 규제나 (노조 같은) 제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1973년까지 경제재부흥을 꾀했던 (그리고 1964년 군사쿠데타 이후의 브라질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뒀던)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한 과거의 수입대체정책은 비판받았다. 심각한 경제후퇴의 한가운데에 놓인 세계경제와 더불어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밀튼 프리드먼의 Milton Friedman 신자유주의 이론을 따른다고 해서 "시카고학파(the Chicago boys)"로 불리는 일단의 미국 경제학자들이 칠레의 경제재건을 돕기 위해 초빙되었다. 그들은 공공자산의 민영화, 천연자원의 사적 착취 허용, 해외직접투자와 자유무역 촉진 등의 자유시장노선을 따랐다. 칠레에서 운영되는 외국기업 자회사의 이윤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했다. 수출주도성장은 수입대체정책보다 선호되었다. (대처 하의) 영국, (레이건 하의) 미국은 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선회하게 만든 근거를 제시한 성장률, 자본축적, 외국기업의 고도투자회수율 수치로 확인되는 칠레 경제의 부활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소수파가 수행했던 창조적 파괴의 야만적 실험은 중심적인 정책체제모델이 되었다.6)
그토록 상이한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너무나도 유사한 두 국가기구의 재건이 미국의 강압적인 영향력 행사로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사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에 걸쳐 급속히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국가 뒤에 미제국권력이 엄존했음을 보여준다. 지난30년간 작동해온 이 과정의 강력한 요인들이 존재해왔지만 이것이 이야기 구성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1979년 마가릿 대처가 신자유주의의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한 것은 미국이 아니다. 1980년대 초반 대처는 꾸준히 신자유주의를 지지해 온 레이건보다 훨씬 더 일관된 신자유주의 지지자였다. 또한 1978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중국이 자유화의 길을 걷도록 만든 것도 미국은 아니었다. 1992년 인도나 스웨덴이 신자유주의로 이동해간 데 미제국권력이 기여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세계를 무대로 한 신자유주의의 지리학적 불균등발전은 다중적인 결정 및 적지 않은 혼돈과 혼란을 야기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자유주의적 선회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체계가 되도록 몰아간 세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선회의 이유
1960년대말로 향하던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1973년 초 심각한 경기후퇴가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발생했다. 중동전쟁(the Arab-Israeli war) 발발 이후의 석유수출금지와 유가상승은 이미 심각해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회적(일례로 복지국가)·개인적 임금에 큰 관심을 기울인 개입주의적 국가에 의해 중재된 자본과 노동의 불편한 협약 같은 류에 방점을 찍었던 전후의 "체화된 자본주의(embedded capitalism)"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국제무역과 금융규제를 위해 성립된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는 1973년 변동환율제의 채택과 함께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브레튼우즈체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의 고도성장을 가능케했고 (가장 분명하게는 일본에, 그러나 또한 남아메리카 전반과 동남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불균등하게)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걸친 자본주의의 "황금기" 동안 초과이득을 창출했다. 그러나 이제 그 힘이 소진되어, 자본축적과정의 재출발을 위해 몇몇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7) 어떤 종류의 개혁이 수행되든, 그 개혁들은 자본축적 소생(revival)을 위한 적절한 조건의 재구축을 추구해야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유일한 해답으로 신자유주의가 승리자로 등장한 방식과 이유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여기에 소상히 밝히기 어렵다. 되돌아보면 그 해답은 필연적이고, 명확해 보였으나 내 생각에는 당시 누구도 어떤 종류의 해답이 어떻게 작용할 지 확실히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세계는 1990년대의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구축과 함께 새로운 정통교의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로 그저 수렴되었을 뿐인 일련의 선회와 혼돈스런 사건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를 해답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stumble towards). 신자유주의의 지리적 불균등 발전, 한 국가와 사회체제에서 다른 국가와 사회체제로의 빈번한 편파적·일방적 적용은 정치세력·역사적 전통·기존의 제도적 구성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의 실질적인 발생 이유와 방식을 구체화했던 신자유주의적 해답과 방법의 모호성을 입증해준다.
그러나 특별히 주목받을만한 요소가 이 이행(transition)에 존재한다. 1970년대의 자본축적위기는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가속의 결합을 통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쳤다. 불만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선진자본주의 세계 대부분에서 벌어진 노동과 도시사회운동의 결합은 전후 성공적인 자본축적의 근간이었던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절충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등장을 겨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정당이 유럽 대부분에서 근거를 확보했고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대중세력들은 환경보전에서 직업안정과 보건, 기업의 불법행위로부터의 소비자보호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과 국가개입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와중에 지배계급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위협이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와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같은) 다수의 개발도상국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넘어 지배계급의 지위에 대한 경제적 위협이 이제 명백해지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전후사회 안정의 한 조건은 상부계급(upper class)의 경제적 권력을 제한하고 경제적 파이에서 보다 큰 몫을 노동에 허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상위1% 소득자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 전 16%였던 것이 이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8%까지 하락했고 30년간 그 수준을 유지했다. 강력한 성장기에는 이정도 제한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들어 성장이 붕괴하면서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배당이 줄어들었으며, 지배계급 스스로 깊은 경제적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이윤이 하락했다. 정치적 경제적 절멸의 위기에 처한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려면 단호히 움직여야만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지배 엘리트가 내부에서 추동하고 지도한 칠레의 쿠데타 및 군부의 아르헨티나 접수2)는 일종의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소생한 자본축적의 이득이 고도로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해외투자자를 추종하는 국가와 지배 엘리트는 일반대중이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잘 나갔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충분한 효과였으며, 전체 기획에 있어 구조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물론 뒤메닐과 레비는 Dumenil and Levy 신자유주의가 애당초 인구 중 부유층이 지닌 계급권력 복원(restoration) 달성을 위한 기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어떻게 1980년대 중반 이후 최상위 소득자 1%의 몫이 20세기가 끝날 무렵 15%까지 치솟았는지를 보여준다. 다른 수치는 최상위 소득자 0.1%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8년 2%에서 1999년에는 6%를 상회함을 보여준다. 최고경영자 보수에 대한 노동자보수 중간값(median)의 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측정치는 1970년 30대 1이었으나 2000년에 이르면 400대 1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제 효과를 보이는 부시행정부의 감세정책과 더불어 사회의 상위계층에게 소득과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제 궤도에 오르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8) 그리고 이 현상은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국의 상위1% 소득자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년간 6.5%에서 13%로 두배 증가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이 러시아에 시행된 이래, 소(小)과두정 내의 부와 권력의 이례적인 집중, 보다 신자유적인 실천을 채택한 중국에서의 소득과 부의 불평등의 이례적 상승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과 무관한 예외도 있지만(일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프랑스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적절한 수준에서 소득불평등 수준을 억제해왔다) 신자유적 선회가 일정한 방식과 일정한 수준에서 상부계급권력의 복원 또는 재구성 기획과 결부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국제자본주의의 재조직을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유토피아적 기획 또는 자본축적 조건의 재구축과 계급권력복원을 염두에 둔 정치적 기획으로써 검토할 수 있다. 이어지는 글의 내용은 당연히 이 목적들 중 마지막 목적이 지배적인 내용이라는 주장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축적의 회생에는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계급권력의 복원에서는 주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적 논의의 이론적 유토피아주의는 계급권력복원을 위해 수행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정당화와 정당성부여 체계로 작용했다. 신자유주의의 원칙은 이 같은 계급기획과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바로 폐기된다.
계급권력의 복원을 향하여
만일 계급권력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전지구적자본주의 내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수행되었는가? 칠레와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에서는 그 신속성, 야만성, 확실성만큼이나 해답도 간단하다: 상부계급이 지원한 군사 쿠데타, 뒤이어 이루어진 권력의 위협요소였던 노동운동과 도시사회운동 내에 창조된 모든 연대에 대한 맹렬한 탄압. 1976년의 영국이나 멕시코 같은 그 외 지역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들에게 건전한 재정 재구축을 위해 사회적 지출과 복지국가의 축소 정책을 채택하도록 (정책적 동의도 없이) 종용한 아직은 맹렬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이라는 완곡한 암시의 형식을 취했다. 영국에서는 물론 1979년 이후 마거릿 대처는 철저히 신자유주의 논의에 끼어들었고 자신이 소속된 당 내 반대자들을 완전히 물리치지도 못했고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같은 복지국가의 핵심요소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휘둘렀다. 흥미로운 것은 고등교육에 등록금제도를 감히 도입한 것은 2004년 노동당 정부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화 과정은 고르지 못하고 지리적으로도 불균등하며 특정국가체제 내에서, 심지어는 (건강과 교육 같은) 특정 부문 내에서 신자유주의의 핵심계획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계급 및 여타 사회세력 간의 균형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아왔다.9)
그러나 보다 특화시켜 미국 내에서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사례는 이후 진행된 전지구적 변환에 영향을 미친 핵심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 중반 사실상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미국과의 계약(Contract on America)"을 국내행동강령으로 천명한 공화당의 의회권력 장악에서 정점을 이룬 변천(passage)의 매우 특수한 관례(rite)의 창조에는 다양한 권력요소들이 얽혀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서로 의지하고 서로 강화하는 많은 단계가 수반된다.
우선 1970년까지 상부계급 사이에 의식이 증가했고 또는 1960년대 말에 등장했던 반기업, 반제국주의 정서가 과도했다. 공개된 메모에는 (닉슨에 의해 대법원까지 승진했던) 루이스 파월이 Lewis Powell 1971년 미국상공회의소에 기업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라는 집단선전전을 펼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 즉시 은밀하지만 깊은 영향력과 권력을 지닌 산업원탁회의(Business Round Table)가 구성되었다(이 회의는 아직도 존속 중이며 공화당 정책에서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1974년의 정치자금법 하에서 합법화된) 기업정치행동위원회(Corporate Political Action Committees)는 들불처럼 급속히 증가했 1976년 대법원 결정에서 언론자유의 형태로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는 것으로 판단된 그들의 활동을 통해 기업과 금융권력의 (특수하거나 개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인 유일한 계급도구로서 공화당을 체계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화당이 원한 것은 대중적 기반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로 선택된--기독교인의 도리(the Christian right)의 지도자가 기업원탁회의에 합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대부분 백인노동계급인 불만에 찬 불안정한 다수는 문화적 (반자유, 반흑인, 반여성, 반동성애), 애국주의적, 종교적 근거에 기반한 자신들의 물적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표를 던지도록(vote against) 조직적으로 설득당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공화당은 자신의 "자유적" 요소를 거의 상실하고 거대기업자본의 금융자원을 미국 남부에서 특히 맹위를 떨쳤던 "도덕적 다수" 사이에 존재하는 인민주의적 기반에 연계해주는 단일한 우익기계장치로 전락한다.10)
미국에서 이행이 나타나게 된 두번째 요소는 재정규율의 문제였다. 1973년에서 1975년의 경기후퇴로 인해 사회적 지출 요구가 증가되던 시기에 거의 모든 부문의 세입이 감소했다. 어느 곳에서나 적자가 핵심문제로 부상했다. 국가의 재정위기와 관련된 무슨일이든 해야만 했다. 재정규율의 회복이 근본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 신용의 윤곽을 통제했던 금융기관의 힘을 강화했다. 1975년 금융기관이 뉴욕시의 채무만기연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뉴욕시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힘있는 은행가 집단은 국가권력과 결탁해 뉴욕시를 규율했다. 이는 시청의 강성노조의 염원 제압, 공공부문 고용조정, 임금동결, 사회보장 축소(교육, 공중보건, 대중교통)를 의미했다. 긴급융자는 이해관계자들의 빚 청산을 위해 시세입에 대한 일순위 권리를 가진 새로운 제도 구축을 수반했다: 남겨진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인 서비스를 위한 시예산에 편입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모욕은 노조의 연기금을 시채권에 의무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시의 파산으로 인한 연기금상실위험을 피하기 위해 노조 스스로 요구를 자제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뉴욕시정부에 대한 금융기관의 쿠데타로 귀결되었고 어느모로보나 이전에 칠레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만큼 효과적이었다. 시의 사회적 하부구조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운송시스템 같은) 물리적 하부구조는 투자부족이나 심지어는 유지보수 부족으로 인해 심대히 훼손되었다. 뉴욕시 재정 위기의 관리는 1980년대의 레이건 치하에서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 실천의 방법을 개척했다. 이를 통해 한편의 금융기관 및 이해관계자의 보전과 다른 한편의 시민복리 사이의 갈등 국면에서 전자 쪽에 우선권을 주는 원칙을 확립했다. 정부의 역할은 인구 전반의 욕구나 복리를 살피기보다는 좋은 기업환경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관철시켰다. 상부계급에 이득이 되도록 재정을 분배하는 것은 일반적인 재정위기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뉴욕의 재정절충안을 창출하는데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이 당시 상부계급의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서 이를 이해했는지의 문제는 규명되지 않았다. 재정규율 유지의 필요성은 깊은 관심을 받을만한 문제이지만 반드시 계급권력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 국가, 금융기관 사이의 계약을 중재했던 핵심 상업은행가인 펠릭스 로하틴이 Felix Rohatyn 계급권력의 회복을 염두어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목적은 아마도 투자은행가들이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이 칠레 사건의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뉴욕시에 대한 원조를 거부했을 뿐더러 뉴욕시가 끔찍한 고통을 겪어서 미국 내의 어떤 도시도 이런 식의 사회적 책무를 감히 질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던 재무부장관 윌리엄 사이먼의 Secretary of the Treasury William Simon 목적이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11)
미국에서의 이행의 세번째 요소는 언론과 교육기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략이었다. 부유한 개인 및 기업기부자들의 재정지원을 받는 독자적인 "두뇌집단(think tanks)"이 (헤리티지 재단이 Heritage Foundation그 선두이다) 증가해 신자유주의적 계획을 대중의 상식이 되도록 설득해내려는 전방위적 공격을 준비했다. 정책연구보고서와 계획서 및 신자유주의적 생각과 이상을 촉진하기 위해 훈련받은 높은 보수의 진정한 직업군인의 홍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각 분야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매체권력을 획득한 기업과 결부되었다. "대중의 뒤로 돌아가는 정부" 및 "욕조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정부를 축소하려는 기획을 소리높여 공포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복음의 전도사들은 보다 많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권력 및 독점자본의 조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목표로 삼았던 68년의 운동의 한쪽 날개에서 준비된 청중을 찾았다. 신자유주의에게 있어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변화를 위한 막강한 세력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의 재조직 정도에 따라 개별기업가들의 창업영역을 열고, 그 노력이 개별화된 소비주의로부터 창출된 셀 수 없이 많은 (특히 성해방론자들이 규정한) 증가하는 틈새시장의 충족으로 전환됨이 입증되었고, 그래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집단적 열망과 사회적 연대를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68운동의 다른 날개에게 개인화된 기업과 소비주의라는 당근은 국가와 금융기관이 장악한 세력(big stick)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1980년 레이건의 항공운송관제소(air traffic controllers) 파괴나 1984년 마거릿 대처의 영국광산회사 제압은 신자유주의로 향하는 전지구적 선회의 핵심계기였다. 노조와 복지권조직 같이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하거나 증진하려는 기관들에 대한 공격은 그 깊이만큼 넓기도 했다. 복리에 대한 책임을 개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떠넘기는 잔인한 사회적 지출 삭감 및 복지국가 축소는 신속히 진행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실천은 국경에서 멈추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었다.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에 확고히 동의하게 되었고 영국의 명백한 지원을 받은 미국은 지도력, 설득(미국 연구중심대학의 경제학부는 신자유주의적 원칙을 세계 곳곳에서 온 다수의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강압을 혼합한 방법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너른 수출을 추구했다. 1982년 국제통화기금 내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숙청과 신자유주의적 통화주의자로의 대체로, (미국의 지배를 받는) 국제통화기금은 부채상환에 관련된 도움을 필요로했던 어느 국가에게든 재난처럼 찾아간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많은 국가들이 경험한) 구조조정프로그램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최고 대행자로 변환되었다. 1990년대에 맺어진 "워싱턴 컨센서스"와 1998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 하에서 성립된 협상규율(rules)은 신자유주의적 실천으로의 전지구적 선회를 공고히했다.12)
그러나 이 국제적 양상은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 전통의 소생과 재배치에 의존했다. 1920년대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했던 그 전통은 무식민지 제국주의의 형태를 추구했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소모사 Somoza in Nicaragua3), 이란의 샤 Shah4),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강력한 지도자"와 군사지원 및 금융원조를 추종하는 집단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최상의 경우 미국의 대리인으로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독립공화국을 자신의 영향력과 효과적인 통제 하에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은밀한 지원은 그러한 지도자들의 권력의 부상을 촉진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이르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시장, 새로운 투자영역, 금융력이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 분명한 분야의 개척은 전지구적 경제를 명확한 금융구조에 보다 더 많이 통합되도록 만들었다. IMF와 WTO에 의해 성립된 것과 같은 새로운 제도적 실천의 창조는 금융력과 시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유럽과 일본이 미국과 제휴해, 나머지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종속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전지구적 금융체계와 무역체계를 틀 짓는 최강의 자본주의 권력과 G7 간의 협동이 필요했다. 이러한 전지구적 규율을 확립하는 데 실패한 국가로 정의되는 "불량국가"는 필요할 경우 제재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을 동원해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전략의 한 가지 취지는 미국 상부계급이 이미 압도적인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세계의 나머지로부터 세금을 가차없이 거두고 지대를 지배하도록 허용한 결과인 전지구적 권력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교화되었다.13)
신자유주의, 창조적 파괴
어떤 방법으로 신자유주의가 쇠락해가는 자본축적문제를 해결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제성장활성화 관련 실제 수치는 참담하다. 1960년대의 총성장율은 3.5% 안팍이었고 어려움을 겪었던 1970년대조차 2.4%까지만 떨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지구적 성장율이1980년대 1.4%, 1990년대 1.1%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리고 2000년 이후 가까스로 달성하는 성장율 1%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성장을 촉진하는 데 전반적으로 실패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14) 심지어 우리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치료의 서막이 오를 때, 러시아와 일부 중유럽 경제에 몰아쳤던 파국적 붕괴를 배제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자본축적조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지구적 경제활동은 미약했다.
병든 경제 치료라는 그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영국도 미국도 높은 수준의 경제활동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일례로 1980년에는 사실상 전지구적 경제의 발전소였던 일본, 동아시아의 "호랑이" 경제, 서독의 시대였다. 각국의 제도가 완전히 상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로의 (부과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단순한 선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명백한 경제적 완화책이라는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확실히 서독연방은행(West German Bundesbank)은 20년 이상 (신자유주의에 부합하는) 강력한 통화주의 노선을 걸었다. 이는 통화주의 자체와 계급권력회복 추구 사이에 필연적인 연계가 없음을 제시한다. 서독에서 노조는 여전히 강력했고 임금수준은 진보적 복지국가기관이 구축됨에 따에 따라 상대적으로 고수준을 유지했다. 그 효과 중 하나는 고도의 기술혁신의 촉진이었고 이는 서독이 국제적 경쟁의 장에서 선두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수출주도성장은 전지구적 선두주자로서 나설 힘을 국가에 부여했다. 일본의 경우 독립적 노조는 미약하거나존재하지 않지만 기술적 조직적 변화에 대한 국가투자와 (서독에서 또한 적절한 것으로 판명된 배치인) 기업과 금융기관의 밀접한 관계는 많은 부분 영국과 미국 같은 여타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을 기반으로 놀라운 수출주도성장활동을 창출했다. (곤란을 겪던 1970년대의 총성장율보다도 더 낮은 총성장율을 기록했던) 1980년대에 일본이 이룩한 그와 같은 성장은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많은 유럽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저항했고 몇몇 사례에서는 진정 성공적이었던 서독모델로 이동하는 동안 자신들의 사회민주주의 전통 대부분을 보존할 방법을 점점 더 발견했다. 아시아의 남한, 대만,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 정부 하에서 일본모델을 이식했는데 이 또한 실행가능하며 납득할만한 분배의 평등과 양립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신자유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일본의 장기불황과 통일로 새롭게 변모된 독일의 상대적 침체의 한복판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기후퇴가 단지 경쟁압력이 낳은 결과인지, 일본경제를 무너뜨리려고 자신들의 모든 금융력을 쏟아부은 미국의 권력계급이 추동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고르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신자유주의가 매우 성공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에 우리가 설득당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두뇌집단이 만들어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항구적인 선전의 흐름을 딛고 넘어서 보면 두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보인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 변동성 증가를 수반했다. 신자유주의가 "성공"했었다는 사실은 어디에선가 전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 극단적인 변동성은 극심한 금융위기로 나타났던, 창조적 파괴가 집중되는 국면에 산재된 주기적인 성장신화를 가장 통상적으로 동반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해외자본에 문을 열어주고 스스로 민영화의 길을 걸었고 90년대 말 국제자본이 빠져나가 완전한 재앙의 나락으로 빠지기 전까지 월가가 가장 사랑한 국가였다. 금융붕괴 및 사회적 황폐화와 더불어 장기간의 정치위기가 재빠르게 찾아왔다. 금융위기는 전 개발도상국으로 퍼져나갔고 브라질이나 멕시코 같은 몇몇 경우 경제마비로 이어진 구조조정과 긴축의 물결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상부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거대한 성공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처럼) 지배엘리트의 계급권력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인도, 러시아, 그 외지역에서처럼) 자본가계급체제를 위한 조건을 창조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심대한 고통을 받은 국가들조차 계급구조 내부의 상당한 질서재확립이 이루어졌다. 1992년 살리나스 정부(Salinas administration)에 의해 멕시코에 도착한 민영화의 물결은 (전국전화체계를 독점했고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된 카를로스 슬림 Carlos Slim 같은) 소수의 손에 예외적인 부의 집중을 허용했다. 상부계급의 이해에 의해 지배된 언론과 함께 이 신화는 경쟁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로 실패한 지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신자유주의적 개혁단계를 구축했다). 지역의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경쟁력을 부여하고 성장을 추동했던 투자위험과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필요했다. 만일 하부계급 사이의 조건이 악화된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개인적·문화적 이유로 인해 (헌신적인 교육,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 획득, 노동기율과 유연성에의 복종,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인간자본을 증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즉, 경쟁력 부족 때문이건, 개인적·문화적·정치적 실패 때문이건 특정 문제들이 발생한다. 다윈주의의 세계의 논리는 오직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아야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선언의 눈보라와 과도한 지역적 위기는 체계적인 문제를 덮어버렸다.
만일 신-자유주의의 주요 성과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재분배적인 것이었다면 대중으로부터 상부계급으로의 혹은 취약한 국가로부터 보다 부유한 국가로의 자산이전 및 부와 소득의 재분배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른 책에서 나는 "강탈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는 주홍글씨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15) 이를 통해 나는 맑스가 자본주의의 태동기 동안 "원시적" 혹은 "시초적"인 것으로 다루었던 축적의 실천이 지속되고 확산됨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최근 멕시코와 인도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농민층의 강압적 축출 다양한 형태의 재산권(공공, 집합, 국가 등)의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으로의 전환 노동력의 상품화와 대안적(고유한) 생산과 소비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한) 자산전유의 식민적, 신-식민적, 제국적 과정 특히 토지의, 교환 및 과세의 화폐화 (특히 성산업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노예무역 원시축적의 과격한 수단으로 폭리, 국가채무와 무엇보다도 가장 파괴적인 신용체계의 이용이 포함된다. 폭력의 독점과 합법정의권(definitions of legality)을 가진 국가는 이 과정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많은 경우, 폭력에 의존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메커니즘 목록에 다수의 부가적 기법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허권·지적재산권을 통한 사용료 징수, 세대를 거치며 사회민주적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했던 (국가연금, 유급휴가, 교육 및 보건의료 접근권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공공재산권의 축소나 말소 같은 것들이다. 일례로 (독재시절 칠레에서 주창된) 모든 국가연금권의 민영화 제안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숙원목표 중 하나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사례에 대해서 "원시적" 그리고 "시초적"이라는 견지에서 최근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지만 미국과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가 엘리트의 계급권력을 복원했던 실천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급속히 두드러지게 된 진행 중인 강탈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네가지 주요 요소를 각기 살펴보자:
1. 사유화
지금까지 공적 자산이었던 것들의 기업화, 상품화, 사유화는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징후적 양상이었다. 그 일차적 목적은 자본축적을 위해 과거에는 이윤계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졋던 영역 내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모든 종류의 (물, 통신, 운송) 공익설비, 사회복지급여(사회적 주택, 교육, 보건의료, 연금), (대학, 연구소, 감옥 같은) 공익기관,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이라크 내의 무장군을 따라 작전에 참가한 사적도급업자들의 "군대"로 예증되는)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일정 정도 사유화되어왔다. 유전물질, 종자원형, 그 외의 생산품 양식 전체를 사적 재산으로 규정하는 WTO의 소위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협정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에 따라 지적재산권이 구축되었다. 사용료는 유전물질의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낼 수 있다. 생물해적질5)이 발호하며 세계의 유전자원 비축은 소수의 거대 제약회사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가는 중이다. 지구의 환경적 공공재(토지, 공기, 물) 고갈 가속화와 자본집약적농업생산양식 외에는 배제하는 서식지 강등의 확산 역시 어떤 형태이든 자연의 전면적인 상품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행주의를 통한) 문화형태, 역사, 지적창조성의 상품화는 전면적인 강탈을 낳는다(음악산업은 풀뿌리 문화와 창조성의 전유와 착취로 악명높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은 대중의 의지에 반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과정을 강제하곤 했다. 노동과 환경을 강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규제적 틀의 제거는 권리상실을 동반했다. 수년간의 강고한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했던 (국가연금, 복지, 국가보건의료에 대한 권리) 공공재산권(common property rights)의 사적 영역으로의 역전은 신-자유주의라는 정통신앙의 이름으로 추구된 모든 강탈정책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과정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영역에서 사적이고 계급특권적 영역으로 자산을 이동시키는 결과로 귀결된다. 아룬다티 로이가 Arandhuti Roy 인도의 사례를 들어 논의한 것처럼 사유화는 "생산적 공적자산을 국가에서 사기업으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삼림, 물, 공기. 이러한 것들은 국가가,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뢰 속에, 관리하는 자산이다. 이들을 강탈해서 사기업에 주식마냥 팔아넘기는 것은 역사상 필적할만한 것이 없는 대규모의 야만적인 강탈과정이다."16)
2 .금융화
1980년대 이후 정착된 금융화의 강력한 물결은 투기적, 약탈적 특징을 보여왔다. 1983년 23억달러를 기록했던 국제시장 금융거래의 일일총거래액은 2001년 천3백억달러까지 상승했다. 2001년 연간 거래액 40조달러는 국제무역과생산적 투자흐름 지원을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8천억 달러와 대조된다.17) 탈규제로 인해 금융체계는 투기, 약탈, 부정행위, 도둑질을 통한 재분배활동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다. 주식장려, 피라미드 구조(ponzi schemes),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강탈, 심지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이루어지는 인구전체에게 환원되는 채무변제를 위한 채무책임수준 촉진, 기업의 부정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신용과 주식조작을 통한 자산강탈(연기금 투매와 주식 및 기업 붕괴에 의한 연기금의 격감)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금융체계의 핵심적인 모습이 되었다. 스톡옵션으로 받는 자본관리자의 보수를 통해 주식보유자와 자본관리자의 이윤을 접합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주식가치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시장조작을 이끌었다. 엔론의 Enron 극적 붕괴는 다수의 생계와 연금권을 강탈하는 일반과정의 표상이다. 이를 넘어 우리는 또한 헤지펀드와 여타 주요 금융자본기관에 의해 수행되는 투기적 투매를 주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전지구적 단계에서 강탈축적의 선두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이들은 심지어 "위험을 확산시키는" 자본가계급을 위해 절대 이윤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3 .위기의 관리와 조작
신-자유주의적 금융조작의 특징인 투기적이고 종종 사기적인 거품 너머에는 강탈축적의 일차적 수단인 "부채의 덫"을 놓는 보다 깊은 과정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위기 창조, 관리, 조작은 가난한 국가로부터 부유한 국가로 부를 신중하게 재분배하는 훌륭한 예술로 진화해왔다. 1979년 갑작스런 이자율 상승으로 볼커6)는 Volcker 차입국이 지불해야만 하는 채무이자인 해외수입의 비율을 증가시켰다. 파산지경에 이른 멕시코 같은 국가들은 구조조정에 동의해야만 했다. "퇴출"을 조직하여 전지구적 자본축적을 안정시키고 궤도를 유지하는 고상한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선언한 미국은 또한 지역적 위기의 조건 하에서 우월한 금융력을 전개해 멕시코 경제 약탈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이것은 전세계 어느 곳에든 통하는 미재무성/월가/IMF 복합체의 전문영역이 되었고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the Federal Reserve)의 그린스펀7)은 Greenspan 볼커가 썼던 것과 동일한 전략을 1990년대에 수차례 이용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드문 일이었던 개별 국가의 채무 위기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빈번하게 발생했다. 거의 모든 개발도상국이 위기를 겪었으며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처럼 어떤 경우에는 그 위기가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해 풍조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 채무위기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체계합리화와 자산재분배를 위해 조직되고 관리되고 통제되었다. 웨이드와 베네로소는 Wade and Veneroso 1997-8년 (처음에는 미국에 근거한 헤지펀드의 활동으로 촉발된) 아시아 위기에 대한 글을 통해 자신들이 파악한 이 과정의 본질을 기록한다:
금융위기는 언제나 자신의 자산을 온전히 유지하고 신용을 창출하는 편으로 소유권과 자산을 이전시켜주는 원인이 되며 아시아의 위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구기업과 일본기업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규모 평가절하, IMF가 밀어붙이는 금융자유화, IMF가 촉진하는 회생의 조합은 과거 50년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심지어는 평시에도, 소유권이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는 최대의 자산이전을 촉진할 수도 있다. 198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나 1994년 이후 멕시코에서 벌어졌던, 국내로부터 미국 소유주로의 이전은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앤드루 멜론8)의 Andrew Mellon 발언을 생각나게 한다: "공황 속에서 자산은 자신들의 올바른 소유자에게 돌아간다"18)
보다 많은 축적에 편리하도록 저임금잉여노동저수지를 창출하는 신중한 실업의 창조와의 유비는 정확하다. 가치로운 자산은 쓸모를 잃고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 유동성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이 그들을 붙들어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로 선택하기까지 그들은 버려져 휴면중인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통제를 벗어나 일반화되거나, 위기를 창출하는 체계에 저항하는 반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국가개입과 국제기관의 일차적 기능 중 하나는 일반적인 붕괴나 대중폭동을 촉발하지 않은 채 강탈축적이 가능한 방식으로 위기와 평가절하를 조직하는 것이다. 월가/재무성/IMF 복합체에 의해 관리되는 구조조정프로그램은 일반적인 붕괴에 대해 신경 쓰고, 대중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은 습격당한 국가의 (제국권력의 군사원조에 의해 지원 받는) 이차적인 신-자유주의적 국가기구의 매국노가 할 일이다. 그러나 대중폭동의 징후는 1994년 멕시코의 자파티스타 Zapatista 봉기를 필두로 이후 시애틀 폭동에서 싹튼 반세계화운동으로 드러난 보편화된 불만으로, 곧 등장하기 시작했다.
4 .국가 재분배
일단 신-자유주의적 기관의 집합으로 전환된 국가는 사회민주주의가 패권을 장악했던 시절에 이루어졌던 상부계급에서 하부계급으로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재분배정책의 주요 행위자가 된다. 국가는 우선 민영화 계획 추구와 그 틀 내에서 사회적 임금을 지탱하는 국가지출의 삭감을 통해 이 일을 수행한다. 심지어 민영화가 하부계급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일 때조차도 장기적 효과는 부정적일 수 있다. 일례로 대처의 사회주택 민영화 계획은 일견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주택임차인에서 주택소유자로 전환되어 가치있는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부를 증대시킬 수 있게 된 하부계급에게 혜택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단 전환이 마무리된 후 주택투기바람이 특정한 주요 핵심지역에 불었고, 결과적으로 저소득 인구는 매수되거나 강제로 런던 같은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예전의 노동자 계급의 주거용 부동산은 고급주택 밀집지역 중심부로 전환되었다.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에게는 통근거리가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중심지역에 주거를 마련할 능력의 상실은 노숙자를 양산했다. 1990년대에 마련된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의 핵심구성요소가 된 멕시코 에히도스(ejidos)9)의 민영화는 멕시코 농민의 장래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는데, 많은 농촌거주자들이 토지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정부는 대중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소수의 엘리트에게 자산을 수여하는 일련의 가혹한 과정을 그대로 답습했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또한 소득과 임금보다 투자에 이득이 돌아가도록 세금체계 조정, 세금체계 내에 (판매세 같은) 역진적 요소 촉진, 국가지출이나 모든 자유접근 방식의 (예를 들자면 고둥교육에 대한) 사용자부담 이용료지불 방식으로의 치환, 막대한 보조금 지급 및 세금 특혜 등과 같은 다양한 여타 수단을 통해 재분배를 추구한다. 미국에서 운영되는 모기지이자율세금감면이 주택을 소유한 상위소득자와 건설산업에 대한 대량 보조금인 것처럼, 미국 내에 연방정부·주정부·지방정부 수준에 아직 존재하는 조합주의적 복지국가 프로그램은 결국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공적자금을 대대적으로 재정향했다(직접적으로는 농산업에 대한 보조금 사례가 있고 간접적으로는 군산부문의 사례가 있다). 감시와 치안이 등장하고 대중 내의 반항분자를 투옥한 미국의 사례는 강도 높은 사회적 통제라는 매우 음흉한 국가의 역할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및 강탈축적에 대한 반대가 보다 강력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역할은 (게임광 미군의 지원과 원조를 받기 위해 이제는 대부분 "테러주의자"로 지목된) 멕시코의 자파티스타나 브라질의 무토지농민 같은 반대운동에 대해 낮은 수위의 전쟁을 치르는 적극적 억압의 양상을 띤다.
로이의 보고대로 사실상 "7백만명을 떠받치고 있는 인도의 농촌경제는 교살되고 있다. 과다생산 농부나 과소생산 농부 모두 곤궁하며, 무토지 농업노동자들은 거대한 사유지와 농장이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떼지어 몰려갔다."19) 중국의 경우 농촌소요와 폭동을 피하려면 앞으로 10년간 최소한 5억의 인구가 도시화에 의해 흡수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그들이 도시에서 할 일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이제 시작된 막대한 물적 기간시설구축 계획은 원시축적에 의해 풀려나온 잉여노동을 흡수하는 방법 중 일부가 되어 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재분배 전략은 광범위하고 정교하며 종종 이데올로기적 책략으로 위장하지만 취약계층과 취약지역의 존엄과 사회적 복리를 파괴한다.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전망을 횡단하며 찾아온 신자유주의라는 창조적 파괴의 물결은 자본주의 역사상 미증유의 것이다. 그 결과로 저항과 가능한 대안 모색이 발생한 것은 당연하다.
대안들
신자유주의의 영역 안팍에서 반대운동이 물결쳤다. 이들 운동 대부분은 1980년대 이전을 지배했던 노동자기반운동(worker-based movements)과 매우 다르지만 "대부분"이지"전부"는 아니다. 전통적 노동자기반운동은 신자유주의의 맹공으로 그 힘이 많이 약화된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남한과 남아프리카에서는 강력한 노동운동이 1980년대에 일어났고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노동계급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도 활약 중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잠재적 중요성이 큰 것으로 평가되는 노동운동이 투쟁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중국에서의 노동불안의 잠재성은 그 예측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막대하다. 그리고 최근 세대에 일관되게 문화적 민족주의, 종교, 다양한 사회운동에 대한 반대를 근거로 자신들의 물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투표를 해온 미국의 노동계급 대부분이 공화당과 민주당이 비슷하게 꾸미는 음모에 의한 그와 같은 정치학에 영원히 매인 채로 머무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끊임없는 변동성을 고려할 때, 장차 강력한 반-신자유주의 의제를 내건 노동자기반정치학의 부활을 배제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강탈축적에 저항하는 투쟁은 완전히 다른 사회정치투쟁 노선을 선동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 같은 운동을 촉발시킨 특수한 조건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정향과 조직양식은 전형적인 사회민주적 정치학의 정치적 정향이나 조직양식과는 사뭇 상이하다. 일례로 자파티스타 반란은 국가권력장악이나 정치적 혁명 달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대신 시민사회전체를 아우르는 활동을 통해 상이한 사회집단 특유의 욕구를 주목하고 그들이 각자의 몫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대안을 추구하는 가운데 보다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정치학을 추구했다. 자파티스타는 조직적으로 전위주의를 피하고 정치정당 형성을 거부하려 했다. 그대신 원주민문화가 주변이 아닌 중심에 자리잡은 정치권력블록 형성시도를 통해 국가 내의 사회운동으로 남기를 선호했다. 그 때문에 자파티스타는 국가권력의 영토논리 내에서 수동혁명과 유사한 무엇의 달성을 추구했다.
이 모든 운동들의 효과는 정치조직의 영역을 전통적 정치정당과 노동조직으로부터 주목을 덜 받던 시민사회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사회행동의 정치적 동력으로 이동시켜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동력이 스스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동력은 일상생활과 투쟁의 핵심 속에 배태됨으로써 자신의 힘을 끌어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강탈축적이 무엇이었고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거시정치학에 대한 지역적이고 특유한 이해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발견하곤 한다. 이 같은 투쟁의 다양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단지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의 연계를 생각해내기조차 어렵다. 과거나 지금, 그들은 1980년대와 그 이후 세계를 휩쓸었고 신문 머리기사에 점점 더 많이 오르내렸던 저항운동의 일시적인 혼합의 일부였고 일부이다.20) 때로 이 운동들과 폭동은 그 대부분이 "질서와 안정"의 미명하에 활동하는 국가권력의 맹렬한 폭력으로 인해 진압되었다. 자본가 세력 측의 분할-지배 전략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강탈축적이 강도높은 사회적·정치적 경쟁관계를 만들어내듯 이 운동들은 인종간 폭력과 내전(civil wars)을 일으키키도 했다. 군사적으로 지원받거나 몇몇 경우 (미국이 지도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주변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요 군사조직에 의해 훈련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는 종속국가들은 억압체계 및 강탈축적에 도전하는 행동주의자 운동을 가차없이 색출하여 청산하는 일을 선도했다.
운동자체는 대안에 관련된 사상을 과도하게 생산했다. 일부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압도적인 권력으로부터 완전한 혹은 일부의 독립을 모색한다. 일부는 개혁이나 IMF, WTO, 세계은행 같은 권력기관의 해체를 통한 전지구적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를 모색한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투쟁 및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쓴 역사를 통해 수행되어온 투쟁과 깊은 연속성을 보여주는 "공공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일부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흩어지고 분산된 권력에 직면하기 위해 전지구적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행동이나 운동을 그리는 반면 어떤 이들은 보다 차분하게, 완전히 상이한 종류의 사회관계 및 생태적 실천에 의해 작동되는 새로운 생산 및 소비체계와 관련된 지역적 실험에 관심을 가진다. 전지구적 경제질서개혁을 향해 내딛는 한걸음으로써의 국가권력 획득을 목표로 하여, 보다 전통적인 정치정당 구조에 자신들의 신념을 거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 수많은 다양한 흐름은 이제 세계사회포럼에서 모여 자신들의 공통점을 규명하고 갖가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맞설 수 있는 조직된 힘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많은 찬사와 영감이 존재한다.21)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에서 구성된 분석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우선 사회민주적타협의 역사 전체와 이후 수반된 신-자유주의로의 선회는 계급권력의 파악과 회복을 위한 계급투쟁이 담당해온 핵심적인 역할을 지적한다. 효과적으로 감추어져 왔지만, 우리는 압도적인 계급권력을 회복하거나 중국이나 러시아에서처럼 압도적인 계급권력을 구성하려는 사회 내의 상부계급 일부가 진행했던 계급투쟁의 세대 전부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계급은 의미없는 범주라고 이론적으로 설득당해왔고 노동계급을 위해 수행된 계급투쟁을 통해 구축된 제도들이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던 10년간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첫번째 교훈은 만일 그것이 계급투쟁처럼 보이고 계급투쟁처럼 수행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이 압도적인 계급권력에 의해 규정된 역사적·지리학적 궤도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그에 대항해야만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활발히 활동하던 황금시절의 상실에 대한 향수에 불을 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역사적 변환의 (배타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차적인 작인이라고 호소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단순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한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유토피아적 맑스주의의 환상에는 우리가 은거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불가피함의 핵심은 계급구성방식이 미리 결정되거나 결정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계급운동은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하에서도 스스로를 형성한다. 그리고 분석은 그러한 조건들이 현재는 임노동착취 및 사회적 임금을 규정하는 조건을 핵심쟁점으로 하는 확대재생산을 둘러싼 운동과 문화·역사·환경에 대한 파괴적 행위를 통한 원시축적의 계급적 형태에서부터 현재의 금융자본의 형태가 공들여 만든 약탈에 이르는 모든 것을 저항의 핵심으로 하는 강탈축적을 둘러싼 운동으로 양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상이한 운동들 사이의 유기적 연계를 찾는 일은 시급한 이론적·실천적 과제이다. 그러나 분석은 또한 이것이 증가하는 시간과 공간의 연계에 근거하고 있지만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의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축적의 역사적-지리적 궤도를 따라 일어나야만 함을 보여준다. 문화적 지형과 사회적 세계에서 구축된 과거 배열의 잔재의 표지들이 얼마나 중요하든 간에, 이 불균등성은 반드시 자본축적과정에 의해 활발히 생산되며 유지되는 무언가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분석은 또한 신-자유주의적 의제 내의 착취적 모순을 지적한다.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수사와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현실 사이의 간극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 계속 증가하며 사회운동은 그 간극에 보다 많이 주목해왔다. 시장이 경쟁과 공평무사함에 관련되었다는 생각은 과도한 독점, 집중화, 기업과 금융력의 세계화라는 사실에 의해 점점 더 부정되고 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멕시코, 남아프리카 같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국제적인 계급과 지역적 불평등의 놀라운 증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완벽하게 만드는 도상의 "과도기적인" 무언가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정치적 문제를 부과한다. 개인의 권리와 체계 유지를 위해 증가하는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사용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강조는 논쟁의 인화점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계급권력의 회복을 위한 성공적 기획임을 차폐하는 부정직한 유토피아 기획이 아니라고 해도, 실패한 것으로 인식될수록 정치적 평등주의를 요구하며 경제정의·공정한 무역과 보다 큰 경제적 안정 및 민주화를 추구하는 대중 운동들의 부활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의 주요 초점이 되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의 반민주주의적 본성은 심원하다. 막대한 권력을 가진 연방준비이사회 같은 기관들은 어떤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IMF, WTO,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기관들의 압도적인 사적권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책임부족은 민주화에 관한 어떤 심각한 관심도 조롱거리로 만든다. 민주적 통치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요구를 성취하는 일은 과거 황금기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단계의 의미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다루기 위해 재창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의 의미는 상파울루, 요하네스버그, 상하이, 마닐라, 샌프란시스코, 리즈, 스톡홀름, 라고스 같은 다양한 환경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와는 별다른 관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대만, 한국과 남아프리카, 이란, 인도, 이집트에서부터 투쟁중인 동유럽 국가들과 현대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전지구를 가로질러 민주적 가치를 표현하는 개혁을 위해 모여드는 활동중인 집단과 사회운동이 있다. 많은 투쟁의 핵심적인 초점 한가지가 이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운동이 자신들의 중심 목표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렇게 효과적으로 회복된 계급권력에 직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보다 더 응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탈을 떨쳐버리고 매우 효과적으로 그 권력의 회복을 정당화하고 적법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된 유혹적 수사를 폭로하는 일은 그러한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현대 자본주의의 제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광범위하고 성공적인 행진을 구축하고 달성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투쟁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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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Harvey, "Neo-Liberalism as Creative Destruction", 2005. 11. 16. 국토연구원 강연원고
** 뉴욕시립대 대학원 인류학 과정
주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주 이다.
원주
1) See the website http://www.montpelerin.org/aboutmps.html
2) G. W. Bush, "Securing Freedom's Triumph," New York Times, September 11th, 2002, p. A33. 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 of America can be found on the website: www.whitehouse.gov/nsc/nss. See also G. W. Bush, "President Addresses the Nation in Prime Time Press Conference," April 13th, 2004; http://www.whitehouse,gov/news/releases/2004/0420040413-20.html.
3) Matthew Arnold is cited in R.Williams, Culture and Society, 1780-1850(London: Chatto and Windus, 1958), 118.
4) A Juhasz, "Ambitions of Empire: the Bush Administration economic plan for Iraq (and Beyond)," LeftTurn Magazine, No.12 Feb/March 2004.
5) T. Crampton, "Iraqi official urges caution on imposing free market," New York Times, October 14, 2003, C5.
6) J. Valdez, Pinochet's Economists: The Chicago School in Chile(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7) P. Armstrong, A.Glynn and J.Harrison, Capitalism Since World War II: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Long Boom (Oxford: Basil Blackwell, 1991).
8) G. Dumenil and D. Levy, "Neo-Liberal Dynamics: A New Phase?" Unpublished MS, 2004, p.4. See also Task Force on Inequality and American Democracy, American Democracy in an Age of Rising Inequality,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2004, p.3.
9) D. Yergin and J. Stanislaw, The Commanding Heights: The Battle Between Government and Market Place that is Remaking the Modern World,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9)
10) T. Edsall, The New Politics of Inequality (New York: Norton,1984); J. Court, Corporateering: How Corporate Power Steals Your Personal Freedom., New York, Tarcher Putnam, 2003; T. Frank,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How conservatives Won the Heart of America, New York, Metropolitan Books, 2004.
11) W. Tabb, The Long Default: New York City and the Urban Fiscal Crisi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2; R.Alcaly and D.Mermelstein, The Fiscal Crisis of American Cities, New York, Vintage, 1977.
12) J. Stiglitz,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New York, Norton, 2002. [국역--조지프 스티클리츠, 송철복 옮김, 『 세계화와 그 불만: 전세계 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세종연구원, 2002.]
13) D. Harvey, The New Imperi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4) World Commission on the Soci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A Fair Globalization: Creating Opportunities for All (Geneva, International Labor Office, 2004).
15) D. Harvey, op.cit. chapter 4.
16) A. Roy, Power Politics (Cambridge, Mass: South End Press, 2001)
17) P .Dicken, Global Shift: Reshaping the Global Economic Map in the 21st Century (New York: Guilford Press, 4th edition, 2003), chapter 13.
18) R. Wade and F. Veneroso, "The Asian Crisis: The High Debt Model versus the 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The New Left Review, 228 (1998), 3-23.
19) Roy, op.cit.
20) B. Gills (ed), Globalization and the Politics of Resistance(New York, Palgrave, 2001); T.Mertes (ed.) A Movement of Movements (London, Verso, 2004; W. Bello, Deglobalization: Ideas for a New World Economy (London, Zed Books, 2002) [국역--월든 벨로, 김공회 옮김, 『 탈세계화』, 잉걸, 2004.]; P.Wignaraja (ed.) New Social Movements in the South: Empowering the People (London, Zed Books, 1993); J.Brecher, T.Costello, and B. Smith, Globalization from Below: The Power of Solidarity (Cambridge, Mass, South end Press, 2000).
21) T. Mertes (ed.) op.cit. W. Bello, Deglobalization: Ideas for a New World Economy, London, Zed Books, 2002
옮긴이주
1)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인종분리정책, 넬슨만델라의 집권 이후 폐지된다.
2) 1976년 각 군의 수뇌부가 주동해 일으킨 쿠데타. 이사벨 페론 정권을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함
3)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1934년 미국에 의해 훈련을 받은 과르디아 나시오날(니카라과 군대인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대파인 아우구스토 C. 산디노(Augusto C. Sandino) 암살을 공작하고 뒤이어 부정선거를 통해 1937년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독재자로 니카라과를 지배했고 엘살바도르만한 크기의 토지와 엄청난 개인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 1956년 암살당했지만 그의 아들이 권력을 승계, 1979년까지 독재자로 군림
4) 1953년 MI6와 CIA가 모사데크(Mossadeq)가 이끌던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샤(Shah)라는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함. 샤는 국민 다수의 기본적 인권과 보건·교육·일자리에 대한 권리를 부인했다. 1979년 혁명으로 몰락함
5) 반다나 시바, 한재각 외 옮김,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당대, 2000
생명에까지 특허권을 부여하게 된 이 시점에서 특히 GMO는 한 생명체에서 몇 개 안되는 유전자를 조작하여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서 특허권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GMO의 원료가 되는 생물다양성 자원은 별다른 대가 없이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을 약간의 조작을 가한 다음 특허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덧붙여 되파는 것이 현실이며 이런 선진국의 행위를 생물해적질이라고 일컫는다.
6) http://www.pbs.org/fmc/interviews/volcker.htm Paul Volcker,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1979-87)
7) http://www.federalreserve.gov/bios/greenspan.htm Alan Greenspan,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1992. 2.-2006. 1.)
8)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USAmellonA.htm 미국금융가. 공화당원으로 Warren Harding, Calvin Coolidge, Herbert Hoover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 )으로 재직했다. 재직 당시 소득세 삭감 및 공공지출 감소정책을 채택했다.
9) 멕시코의 공동체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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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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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왔는데 좋은 글들이 많네요. 차근차근 읽어봐야겠습니다.^^ 근데 글 내용과는 상관없는 질문이지만, 블로그에서 각주는 어떻게 넣는지 혹시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저도 짧은 글을 번역하고 있어서 블로글에 올릴까 생각중이거든요. 그런데 각주를 어떻게 넣나 잘 모르겠네요..부가 정보
캐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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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다시 보니 색깔만 바꿔서 넣은 후에 뒤에 쭉 써넣으면 되는 거였군요. 이런 민망할데가.. 제가 지독한 컴맹인지라..하하.-.-;;;;부가 정보
eco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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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각주 넣는 법은 사실은 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저렇게 주욱 이어서 썼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