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04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4/09
    John Bellamy Foster, "The New Geopolitics of Empire"
    비주류

John Bellamy Foster, "The New Geopolitics of Empire"

제국의 새로운 질서*

존 벨라미 포스터


오늘날의 제국적 이데올로기는 미국을 언덕 위의 새로운 도시, 즉 지구를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온 바와는 다르게 미국이라는 지구제국은 자본의 제국이 아니다; 미제국은 전통적으로(classically) 맑스주의자들과 여타 학자들이 정의해온 경제적 제국주의와 무관하다. 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제국의 시대를 활성화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확신컨대 그 해답은 제국의 철학으로서의 지정학의 극적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뿌리(economic taproot of imperialism)”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모두 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마이클 클레어가  “새로운 지정학 The New Geopolitics”에서 환기시킨 내용은 냉전 이후 미국의 제국적 목적을 통합하는 실용적인 수단이 되어왔다.1)

프란쯔 노이만이 Franz Neumann 1942년 제3제국에 대한 그의 고전적 비판인 『베헤모스 Behemoth』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지정학이란 제국확장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2)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정학은 제국을 조직하고 번영시키는--근대 제국주의와 함께 등장했고, 우리 시대에 또다시 등장한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포함하는--특정 방식을 나타낸다.

지정학은 경제학 및 기술에 의해 조절되는 영토, 인구, 전략적 위치, 천연자원 보유를 포괄하는 지리적 요소들이 국가간의 관계와 세계지배를 위한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고전적 지정학은 제국간 경쟁의 표명이었고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과 보어전쟁(Boer War)기1)에 등장했다. 고전적 지정학은 알프레드 테일러 마한의 Alfred Thayer Mahan 『역사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1890), 프레드릭 잭슨 터너의 Frederick Jackson Turner 『미국역사의 개척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1983), 브룩스 아담스의 Brooks Adams 『새로운 제국 The New Empire』(1902), 테오도르 루즈벨트의 Theodore Roosevelt “러프라이더(Rough-Rider)” 정책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된 미국의 해외확장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구성했다.3)  “지정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1899년 스웨덴 정치과학자 루돌프 헬렌이 Rudolf Kjellén 처음 사용한 것으로 등장이후 체계적인 연구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했다. 영국의 핼포드 맥킨더 Halford Mackinder, 독일의 칼 하우스호퍼 Karl Haushofer, 미국의 존 스픽만은 John Spykman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2) 성립 후부터 이차세계대전에 이르는 핵심 시기에 주요 지정학 이론가로 활동했다.


고전적 지정학


맥킨더는 지리학자, 경제학자, 정치가였다. 그는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학장을 지냈고(1903-1908) 글래스고 지역 의회의원을 역임했다(1910-1922). 그는 1904년 “역사의 지리학적 추축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의 지정학 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4)  맥킨더는 대영제국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가 유럽사회의 안전판을 구성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이 제국주의적 확장을 마감한다면 유럽사회 내의 통제불가능한 계급세력을 풀어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논했다. 그의 분석의 핵심에는 세계에 더 이상의 미개척영역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인해 제국간 경쟁이 심화되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맥킨더는 『민주적 이상과 현실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1919)에서 “역사상 발발했던 큰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은 국가간의 불균등발전”이라고 기록했다. 지정학적 현실은 “제국의 성장에 이바지해 결국에는 단일 세계-제국에 이르도록 만든다”.5)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자극한 그의 일차적 관심사는 영국의 경제적 패권의 쇠락이었고, 나아가 영국자본에는 보호주의와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독일 못지 않게” 영국도 “‘시장에 굶주리게’ 되었다. 영국 특유의 경제에 걸맞는 시장은 세계 전체이다...자유무역, 평화를 사랑하는 랭카셔3)는 제국의 힘의 지원을 받는다...자유방임식의 자유무역과 강압적 방식의 보호 모두가 제국의 정책이며 이 둘은 전쟁을 낳는다.”6)

맥킨더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심장부(Heartland)”이론이다. 지정학적 전략은 심장부--혹은 동유럽, 시베리아를 포괄하는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라는 초대륙적 거대 영토--를 통제하는 끝내기 게임(endgame)에 관한 것이었다. 심장부 외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이 세계섬(World Island)을 구성했다. 심장부란 그 지역을 “지구상 가장 위대한 자연적 요새”로 만들어주는 해상접근불가능성으로 정의된다.7) 해상력에 의해 지배되던 콜럼부스의 시대는 끝났고, 지상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맥킨더는 논의했다. 육상운송 및 육상통신의 발달은 지상력이 해상력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에는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근대적 해군까지 갖출 경우 해상세계--대영제국과 미제국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이상과 현실』에서 맥킨더는 동유럽이 유라시아 지배에 있어 중핵을 담당한다는 전략적인 이유로 심장부에 추가했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금언은 이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동유럽을 통치하는 자가 심장부를 지배한다:

심장부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섬을 지배한다:

세계섬을 통치하는 자가 전세계를 지배한다.8)


맥킨더는 대영제국에 필요한 가장 시급한 대외정책으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동맹체결이나 블록 형성의 차단과 이들의 동유럽 지배 차단을 꼽았다. 이에 따라 두 거대 권력 사이에 위치한 강력한 완충국이 필요해졌다.

1919년 영국정부는 러시아 내전에서 데니킨 장군과 백군 General Denikin and the White Army 지원을 위해 맥킨더를 남러시아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에 지명했다. 적군이 데니킨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자 맥킨더는 런던으로 돌아와 영국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영국이 독일의 산업화를 저해해야 옳지만, 독일이 동유럽에 대한 볼쉐비키의 통제에 맞서는 주요 보루로 작용하므로 독일의 경제적·군사적 붕괴를 허용해서도 안된다. 맥킨더는 제국을 위해 노력한 공헌을 인정받아 작위를 받게 되었다.9)

맥킨더의 지정학적 분석은 영국보다는 독일의 전쟁계획수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 지정학파의 창시자는 프리드리히 라첼로 Friedrich Ratzel,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1890년대에 등장했다. 라첼은 국가유기체론을 통해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을 공간을 위한 지정학적 투쟁에 연결지으려고 했다. 국가들은 정적인 존재가 아닌 자연 성장하는 존재이며, 경계란 파열될 수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했다. 라첼은 독일이라는 정치체의 책무로 “생활공간(lebensraum, 영어로는 living space)”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그는 “지구는 그 규모상 거대 국가 하나면 충분하다”고 기록했다.10)

그러나 독일의 주요 지정학자는 라첼과 맥킨더의 이론을 이용했던 칼 하우스호퍼였다. 그는 독일이 독일인구와 자연지리적 공간 사이의 불균형이 분명해지면, 조정을 위해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4)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미국을 자신의 세력권(region) 내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지정학을 적용한 국가로 간주했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이 미국에 있고, 어떤 외세와의 경쟁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문화한 (미국이 서반구의 “국제경찰력”이라고 주장했던 1904년 루즈벨트 보충이론(Roosevelt corollary)에 계승된) 먼로주의(Monroe Doctrine)5)를 지정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로 보고, 독일식 먼로주의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하우스호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범아메리카주의(Pan-Americanism)를 미국이 자신의 영역적 패권을 실천함으로써 지정학적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범독일주의(Pan-Germanism)나 독일 주도의 범유럽(Pan-Europe)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과 유사한 지역적 패권을 여러 강대권력 사이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1)

하우스호퍼가 볼 때 독일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대영제국주의였다. 그의 책 중 한권에 실린 세계지도에는 영국본토에 자리잡은 거대한 문어가 다리를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뻗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과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독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을 독일의 하위파트너로 삼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간권력블록을 형성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태평양에서 영국과 미국의 해군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동맹이 필요하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Nazi-Soviet pact)6)이 성립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 최종적으로 추축권력과 극동의 합작이 독일정신 목전에 주어졌다. 마침내 서구 민주주의의 아나콘다 정책[에워싸 목을 조르는 일]에 맞서 생존할 희망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하우스호퍼는 기본적으로 지정학에 의존했지만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나치의 “우수-민족(master-races)”주의에 결합시켰다.12)

1차세계대전 당시 하우스호퍼는 여단의 중령으로 복무했고 루돌프 헤스가 Rudolf Hess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그는 소장으로 전역했고 1919년 무니히 대학(University of Munich) 강사가 된다. 그곳에서도 헤스는 그의 학생이자 문하생이었다. 헤스를 통해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와 Hitler 직접 접촉하며 조언했다. 1923년 나치의 맥주집반란계획(the Nazi Beer Hall Putsch)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처음에는 히틀러, 이후 헤스까지 란즈베르크의 성채에 갇히게 된다. 하우스호퍼는 헤스의 조언자(mentor) 자격으로 히틀러가 헤스에게 『나의 투쟁 Mein Kampf』을 구술하는 동안 히틀러를 빈번히 방문했다. 그래서 생활공간을 보는 시각을 포함한 하우스호퍼의 많은 생각들은 히틀러에게 수용되었고, 『나의 투쟁』에 포함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히틀러는 하우스호퍼를 위해 무니히 대학에 방위지리학 교수직을 창설한다. 그곳에서 그는 지정학연구소(Institute of Geopolitics)를 운영했다. 이듬해 히틀러는 하우스호퍼를 독일학술원(the German Academy) 교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헤스가 영국으로 간 이후 히틀러에게 미치는 하우스호퍼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는 잠시동안 다카우집결지를 관장했다. (역시 지도적인 나치의 지정학분석가였던)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Albrecht 1944년 히틀러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친위대(SS)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우스호퍼는 1946년 연합군에 의해 심문받은 직후 자살했다.13)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니콜라스 존 스픽만은 정치과학자, 사회학자, 평론가였다. 스픽만은 두권의 주요 지정학적 저술을 남겼다: 미국이 이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직전 완성된 『세계정치학 속의 미국의 전략 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1942)와 그의 사후에 출간된 『평화의 지리학 The Geography of the Peace』(1944)이다. 그는 유럽, 중동, 동아시아-태평양 연안지역의 육상과 해상을 겸한 주변부를 통제함으로써 미국이 유라시아 심장부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논함으로써 맥킨더의 심장부주의에 맞선 “주변부(rimlland)”론을 주창했다. 스픽만은 미국이 북대서양과 태평양 양쪽 연안에 해군과 공군기지를 건설해 유라시아를 에워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킨더에 맞서 스픽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만일 구세계의 권력정치학을 위한 표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주변부를 통제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통치한다; 유라시아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통제한다’일 것이다.”14)

『세계정치학 속의 미국의 전략』에서 스픽만은 미국은 “[패권이] 미치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력입지”로 정의되는 “패권을 방지하는 방향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말은 미-영 지배의 촉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5) 1942년 대영제국이 약화되고 미제국이 성장함에 따라 스픽만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독-일의 시도를 패배시킬 수 있다면--지구상의 “미-영 패권”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미국 및 영국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픽만은 『평화의 지리학』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유럽 주변부에 대한 패권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제안했다. 스픽만은 소비에트연방 “자체의 힘”만으로는 미국에게 지배권을 부여하는 존재인 미국의 패권 하에서 “통일된 주변부에 맞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고 보았다.16)

스픽만의 관점은 미국의 정책집단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읽혔으나 1942년이 지나기 전, 독일지정학사상 및 히틀러에게 미친 하우스호퍼의 영향에 대해 미국 언론이 조성한 공포분위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면 “지정학”이라는 용어에 접근하기 더욱 어려웠다. 25년 정도 후에야 이 개념이 공공의 담론으로 재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스픽만의 주변부 개념은 종종 조지 케넌의 George Kennan “봉쇄(containment)”라는 개념 이면의 지적 배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스픽만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지정학


1939년 국무부(State Department) 계획가들은 외교위원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와 함께 상부차원에서 극비리에 수행된 전쟁과 평화연구(War and Peace Studies; WPS)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이 연구는 나머지 전승국들과을 염두에 둔 연구였다.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연구 첫 해에 4만4천5백달러를 기금으로 제공했다. 전쟁과 평화연구는 “대영역(Grand Area)”으로 정한 지정학적 영역(region)을 제시했고 여기에는 우선 대영제국과 미제국이 포함되었다. 대영역 “이면의 지정학적 분석에는 세계의 특정 영역을 반드시 ‘개방’시키려는--투자개방, 본국으로의 이윤 송금개방--시도가 포함되었다. 즉, 개방이란 미국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노엄 촘스키는 Noam Chomsky 설명했다.17)

그러므로 새롭게 제시된 대영역은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패권 하에서 자유로운 자본의 흐름과 연계되면서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 이후 입체화 된 비공식적인 제국을 구성했다. 독일이 유럽을 점령한 직후엔,s 대영역을 미국의 제국적 영역, 대영제국, (태평양에서 미국이 일본을 이긴다는 가정 하에) 극동에 제한해서 이해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무렵 대영역은 서부유럽전체를 아우르면서 확대되었다. 미국 정치지리학의 지도적 인물이고 (언론이 때로 “미국의 하우스호퍼”라고 언급하며) 외교위원회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이사야 보우맨은 Isaiah Bowman 1941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가 이룬 승리의 척도는 승리 이후 우리 지배의 척도가 될 것이다.”18)

1943년 맥킨더는 “둥근 세계와 평화달성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외교위원회가 발간하는 잡지 『외교문제 Foreign Affairs』에 실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당면 과제에 비추어 볼 때, 소비에트연방의 영토가 심장부에 상응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언급하면서19) 최초로 심장부가 완전한 요새를 이루어 위협젓인 존재가 되었다고 논의했다. 그러므로 미국의 목적은 소비에트라는 심장부 권력에 맞서는 것이었다. 콜린 그레이가 Colin Gray 『핵시대의 지정학 Geopolitics of the Nuclear Era』(1977)에서 관찰한대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냉전(Cold War)의 본질은 “유라시아-아프리카 ‘주변부’의 통제/통제거부를 둘러싸고...미국의 고립적 지배영역과 소비에트연방의 ‘심장부’ 지배영역 사이에 벌어진” 경쟁이었다.20)

지정학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드물었던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제임스 버냄의 James Burnham 저술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과거 명성을 날렸던 좌파였던 버냄은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반공산주의 지정학(a geopolitics of anticommunism)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쟁취를 위한 투쟁 The Struggle for the World』(1947)은 원래 1944년 (미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비밀연구의 일환으로 작성되어,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 참석하는 미대표단이 사용하려던 문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유라시아] 심장부와 외곽의 경계의 결집에 성공한 권력이 세계를 통제한다고 확신하며, 이것이 지정학의 공리(axiom)이다.” 맥킨더처럼 버냄은 소비에트연방이 세계 최초로 세계섬과 나아가 전세계를 위협할 거대하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대중을 갖춘 거대 심장부 권력으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지리학적으로, 전략적으로 유라시아는 미국을 에워싸고 압도한다.” 미국 역시 하나의 제국이었지만 스스로를 제국이라고 부르기를 꺼렸기 때문에 다양한 완곡어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단어를 사용하든 또한 현실인식에 적절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공산주의 세계제국의 유일한 대안은 미제국 뿐이며, 미국의 공식적 경계를 고려할 때 문자 그대로의 전세계를 아우르지는(world-wide) 못했을지라도 세계를 통제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타임 Time』지에서 헨리 루스는 Henry Luce 『세계쟁취를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갔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President Truman 정치적 조력자인 찰스 로스를 Charles Ross 설득해 대통령도 이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은 Ronald Reagan “버냄은 미국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고 공표하면서 미국대통령자유메달(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21)

1970년대의 미국대외정책의 명실상부한 공식 교의로서 지정학이 부활할 수 있었던 데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Henry Kissinger 공이 컸다. 베트남전 참패라는 상황에 직면한 미국은 제국의 위기증가라는 상황을 돌파하고 권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은 President Nixon 지정학이라는 개념에 손을 뻗쳤다. 중-소 분열에 뒤이은 중국과의 교섭, 소비에트연방과의 화해분위기(détente) 조성 같은 냉전의 해동이 “지정학적 필요”로 제시되었다. 지정학에 대한 키신저의 언급은 1979년 발간된 그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 The White House Years』 곳곳에서 등장한다.22)

1970년대는 베트남전 패배 이후의 경제침체(economic stagnation)와 미국의 경제적 패권 하락을 목도한 시대였다. 1971년까지 미제국이 해외에 창출한 막대한 과잉달러 때문에 닉슨은 금과 달러의 연동을 끊는 수 밖에 없었고 기축통화로서의(as the hegemonic currency) 달러입지는 약화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Yom Kippur War)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아랍권의 석유불매 때문에 도래한 에너지 위기와 석유연합인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 출범은 페르시아만 석유에 대한 미국 자동차-석유기업복합체의 의존도 증가를 보여주었다. 1974-75년의 경기후퇴(recession)는 몇 번의 소귬 반등에도 불구하고, 이후 30년동안 꾸준히 이어진 미국경제의 장기적인 경제성장둔화(a secular slowdown)를 가져왔다.

1970년대 초반 미제국 전체가 위기에 빠진 데다가 보수주의자들이 “베트남증후군”(주변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지원에 대해 미국 국민의 저항)이라 칭한 미국 내 분위기로 인해 미국이 전쟁기제를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없게 되자 체계를 벗어나려는 제3세계 국가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관심이 중앙아메리카 및 미국의 “뒤뜰”인 카리브해연안의 혁명과 혁명적 운동에 맞서는 워싱턴의 노력에 쏠렸다. 그러나 미제국이 베트남전 이후 겪은 가장 큰 패배는 1979년 이란혁명(Iranian Revolution)이었다. 이란혁명은 지금까지 페르시아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에 요긴했던 샤(Shah)를 축출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그 즉시  CIA는 근대적 지하드를 지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여기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Osama Bin Laden 포함된다) 결집시켜 역사상 가장 은밀한 전쟁을 시작했다--중동에 대한 통제력 상실 및 미국의 석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미국 내 국가안보집단의 견해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총체적인 미국의 패권 회복, 특히 페르시아만에서의 미국의 입지 재구성을 위한 대규모 시도가 이루어졌다. 신호탄이 된 사건은 카터주의(Carter Doctrine)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 연두교서에서 “ 페르시아만 지역의 통제권을 획득하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는 미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같은 공격에 대해서는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먼로주의를 모델로 한 카터주의는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패권의 그늘이 페르시아만으로까지 확장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의 지정학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 1월 28일자 『비즈니스 위크 Business Week』에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미국 권력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자원의 지정학(geopolitics of minerals)”을 개발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신국제경제질서’를 바라는 탈-식민지 체제들 간의 요구와 다국적 자원기업에 관련된 적개심에 포위되었던 1980년대의” 미국은 전략적 자원과 “세계의 석유 및 천연자원 경로”의 상실에 점점 더 “취약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위크』가 이같이 언급한 의도는 “워싱턴이 대외정책의 이상주의적 목적과 지정학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절충하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23)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중부군사령부(Central Command; Centcom)를 창설함으로써 그와 같은 요구에 부응한다. 중부군사령부는 지역 “통합사령부” 다섯 개 중 하나로 지구 전역의 미국전투부대를 지휘한다. 중부군사령부의 명령권은 (페르시아만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남부 지역과 아프리카의 뿔(the Horn of Africa)7)을 아우른다. 창설당시부터 중부군사령부는 석유 흐름을 유지할 책임을 맡았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창설 이후 20년간 “중부군사령부가 치른 주요 전쟁만 4개에 달했다: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이후 아직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24)


새로운 지정학


그러나 미제국에 현저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은 1999년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이루어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소련의 권력약화에 따른 중동지역의 권력균형의 침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붕괴와 뒤이은 해체의 조짐은 미국이 걸프전 기간동안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자제하도록 만든 주요 이유 중 하나로도 작용했다. 소비에트 블록의 붕괴로 인해 생겨난 지정학적 불확실성 때문에 워싱턴은 중동 지역에 대규모 파병을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한편 그 불확실성은 이라크 침공과 점령이 미제국에 대한 소련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위험의 소지를 줄여주었고, 이후 소련에서 이후 벌어진 대규모 변화를 지연시키거나 반전시키지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은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은 1991년 여름에 찾아왔다.

뒤이어 미국을 유일한 초권력으로 하는 “일극체계”가 “새로운 세계질서”로 자리잡았다. 국방부는 곧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undersecretary of defense for policy) 올포위츠가 Wolfowitz 지휘하에 전략적 검토를 시작했다. 1992년 언론에 일부 흘러나온 이 계획은 『방위계획지침 Defense Planning Guidance』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에는 스픽만의 어투를 연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우리는 지상의 잠재적 경쟁자 등장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전략적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올포위츠는 또한 심장부주의를 모방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존속할 것이며 미국을 파괴할 능력을 지닌 지구상 유일한 세력이 될 것이다.”25) 『방위계획지침』은 선제행동을 통한 미국의 영구적인 군사적 패권유지라는 지구 차원의 지정학적 목적을 제안했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강력한 반대로 워싱턴은 단독으로 지구를 지배한다는 보고서 초안의 명시적 언급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의 국가안보집단과 대외정책집단은 십년에 걸쳐 미국이 수행해야 하는 지구적 패권이라는 막연한 목적의 범위와 관련한 논쟁을 벌였다. 1966년에서 69년 국무부 정무담당관을 지냈던 유진 로스토는 Eugene Rostow 1993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맥킨더[sic.]8) 용어로 주변부인) 아시아와 유럽의 해안지역을 공격했던 군사력을 지닌 막대한 권력의 중심을 구성[하는] [러시아의] 심장부 지역”을 포함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1994년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정학도들은...누가 러시아를 통치하든, 핼포드 맥킨더가 지정학적 심장부라고 지칭한 지역을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제국적 전통 중 하나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26) 지도적인 국가안보분석가들이 표명한 목적은 지구적 권력을 획득할 수단인 주변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논쟁은 끝내기 게임 자체보다는 미국이 (유럽과 일본을) 하위 파트너로 삼아 지구를 삼강구도로 통치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구상에 미국만의 제국을 단독으로 추구해야 하는 지에 집중되었다.27)

결국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논쟁은 부시와 클린턴 정부 시절(George H. W. Bush and Clinton years) 해외주둔미군이 실제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면서 비실용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미군의 투입은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 경제적 패권을 확장·갱신하려는 미국의 활발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당면 목적은 분명히 소비에트의 소멸에 따른 유라시아 심장부 주변의 방어선 안정화였다. 그러므로 1990년대의 군사적 개입은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의 뿔에서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미국의 지도 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코소보(Kosovo)의 경우) 11주에 걸쳐 폭격한 후 과거 소비에트 영향권의 일부였던 지역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지상군이 투입된 곳이다. 페르시아만의 경우 이라크에 경제봉쇄조치가 내려졌고 미국과 영국은 연일 폭격을 퍼부었다. 그사이 미국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카스피해연안을 에워싼 지역에 군사기지 구축을 시도했다.

1999년 해군대학의 전략 및 군사계획 교수(Professor of Strategy and Force Planning at the Naval War College) 맥커빈 토머스 오웬스는 Mackubin Thomas Owens 『해군대학평론 Naval War College Review』에 “고전적 지정학을 변호하며 In Defense of Classical Geopolitics”라는 제하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실었다. 맥킨더와 스픽만에 기초해 하우스호퍼를 비판하면서 오웬스는 탈냉전시대의 전쟁의 세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목적은 오로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고 미국의 제해권에 도전할 능력을 가진 패권국의 등장”을 사전에 예방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28)

이 시기에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전보장담당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er)인 쯔비그뉴 브레진스키가 Zbigniew Brzezinski 미제국 지정학의 열렬한 지지자로 등장했다. 『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에서 그는 맥킨더와 하우스호퍼 (그리고 하우스호퍼 이론의 “통속적 반향”인 히틀러의 “독일민족에게 필요한 ‘생활공간’ 강조”)에 의해 활성화된 심장부주의를 직접 언급했다. 변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의 우세가 전지구적 차원의 주도권을 쥐었음을 알게 해주는 핵심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에 지정학은 지역 차원에서 지구 차원으로 이동해왔다. 미국은...이제 유라시아 대륙의 삼면--서(유럽), 남부(중동을 포함한 중앙남부 유라시아), 동부(동아시아 태평양 주변부)--에 전략적 군사배치를 직접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국제적 주도권을 향유한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가진 전지구 차원의 주도권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우세를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가에 달려있으므로 최초의 그리고 진정 유일한 전지구적 차원의 권력”을 지닌 미국건설을 통해 그가 “전지구에 대한 지배권(global supremacy”이라고 이름붙인 “새로운 종류의 패권” 창출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논의했다.29)

클린턴 정부 시절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제국적 지정학이 대외정책을 지배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우월한 측면이 많았다.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 시절에도 역시 이 두 차원이 모두 존재했으나 애초부터 강조점은 반전되어 있었고 따라서 경제적 권력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정학적/군사적 활동을 통해 미국의 전지구적 주도권을 강화하는 측면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다 많이 보였다. 이같은 초점이동은 2000년 선거기간 중 발간된 핵심인물의 두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부통령 후보자인 딕 체니의 Dick Cheney 부탁으로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기획(the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도널드 럼스펠드 Donald Rumsfeld, 폴 올포위츠, 루이스 리비 Lewis Libby, 조지부시의 동생 젭이 Jeb 참여하는 전략적 정책 집단)이 작성해 2000년 9월 발간된 『미국방위의 재구축 Rebuilding America's Defenses』이라는 제하의 대외정책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1992년 『방위계획지침』의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전략을 강력히 재천명했다. 다른 하나는 곧바로 정책계획국장(director of policy planning)으로서 콜린 파월의 Colin Powell 국무부에 합류한 리처드 하스의 Richard Haass 2000년 11월 11일의 연설 “미제국”이었다. 하스는 미국인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전통적인 민족국가에서 제국권력으로 재인식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지구적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은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Great Powers9)에서 제안한 “제국의 과다확장”이 아니라 “제국의 과소확장”이라는 것이다.30)

2001년 9월 11일 테러주의자들이 공격해오자 부시 행정부는 즉시 세계적이고 장기적인 테러주의에 대한 전지구적 전쟁을 선언한다. 이 전쟁은 미제국의 권력의 확장을 정당화시키는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요란스럽게 선전하던 2002년 9월, 백악관이 의회에 전달한 미국의 『신국가안보전략 new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은 1992년 올포위츠가 작성했던 기존의 『방위계획지침』을 모델로 작성된 것이다. 『신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의 공식 전략정책으로 자리잡았다: (1) 미국과 대등하거나 미국보다 더 큰 군사적 역량을 가진 국가의 사전 방지; (2) 결국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적 역량을 키우는 국가 및 그 우방국과 동맹국에 대항한 “선제”공격 수행--심지어는 곧 닥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사전 조치함; (3)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미국의 관리와 군병력의 면책주장. 여기서 재차 “패권 보호”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스픽만의 선언이 반영되는데, 명시적 목적이 미국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도전할 가능성 차단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통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지배함으로써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석유수요증가 및 공급감소가 나타나는 이 시기에 세계의 주요 원유비축지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미제국 권력 증강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을 확보하게 되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대부분의 석유와 천연가스공급이 페르시아만, 카스피해연안, 서아프리카에 집중될 것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미국은 화석연료 자체에 대한 언급이 극히 자제된 지정학적 언어를 이용해 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자신의 “극히 중대한 이익”을 실현할 것으로 보인다.

2004년 5월 앨런 라슨 Allan Larson 국무부 경제·기업·농업담당 차관은 “석유와 천연가스의 지정학”이라는 제하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서 그는 “석유나 가스가 발견되는 국가의 대부분은 도전적이거나 지리적으로 까다로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원유사업의 공리”라고 선언했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지정학은 극히 중대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페르시아만, 러시아와 카스피해 연안, 서아프리카와 베네수엘라에서 창출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31)

새로운 지정학은 세계지배라는 목표를 고전적 지정학과 공유하지만 특히 중앙남부 유라시아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변화했다. 마이클 클레어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수행하는 전쟁의 목적은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지도를 다시 그려” 러시아, 중국, 유럽공동체, 일본, 심지어는 인도를 포함한 “다른 잠재적인 경쟁자 또는...대척 지역에 미국의 권력과 지배권을 심고 공고히하는 것이다. 미국의 엘리트집단은 유라시아의 유럽 및 동아시아 주변부를 미국이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거나 혹은 덜 중요[하거나] 둘 다인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들이 볼 때 지정학적 경쟁에서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지역은 남부중앙 유라시아로,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페르시아만과 나머지 3분의 1의 대부분이 매장되어 있는 카스피해 연안과 중앙아시아의 주변국을 에워싸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 세계적 투쟁과 갈등의 새로운 중심지이며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이 결정적인 지역을 지배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32)

1999년 6월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분석을 명시적으로 채택한, “새로운 지정학”이라는 제하의 『이코노미스트 Economist』 특별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코소보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민주주의의 제국”을 다투는 지정학적 투쟁의 핵심은 유라시아와 특별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통제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자신들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한 카스피해 연안까지 확장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미제국의 확장은 그러므로 불가피하다.33)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은 브레진스키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전략은 맥킨더가 “단일한 세계제국”이라고 칭한 것의 반영이다. 이 새로운 지정학은 제국의 맹신도들 사이에 만연했다. 『아틀란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의 통신원 로버트 캐플런은 Robert Kaplan 최근 발간한 저서, 『제국의 첨병 Imperial Grunts』 서두를 다섯 개의 “통합시령부”를 주둔시킨 펜타곤의 지구적 군사배치도가 “지정학의 지도적 인물인 칼 하우스호퍼 교수가 1931년 독일군을 위해 그린” 지도와 “이상하리만큼 닮았다”는 찬사로 장식하기도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캐플런은 키플링의 시 “백인의 부담 The White Man's Burden”을 “이상주의적” 가치의 현신이라고 언급하며 나아가 언론인인 자신의 “미제국의 막사와 병영을 돌아보러 다니는 여정(odyssey)”을 새로운 “아메리카인디언 국가(Injun Country)”로의 여행이라고 특징짓기에 이른다.34)


지정학의 실패


1943년 이후 지정학적 분석이 인기를 상실한 것은 일반적으로 나치의 세계정복전략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중이 지정학을 거부한 일은 모든 형태의 고전적 지정학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전쟁과 연계된 사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다. 1942년 비판적 지정학 분석가 로버트 스트라우크-후페는 Robert Strausz-Hupé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지정학은 전쟁과 평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확장을 추구하고 확장과정은 영구전쟁으로--군사력이 실질적으로 적용되건 연기된 위협의 도구인 ‘평화적’ 외교술을 이용하건 간에--인식되었다.”35)

미제국의 지정학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지구적 공간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의 지배계급--과 3강(북아메리카, 유럽, 일본) 전반의 지배계급과 연계된 다소 협소한 범위를 대변하는 자본축적에 헌신하는 세계를 형성해가는 중이다. “식민주의의 종식”과 “새로운 반자본주의적 국가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비지니스 위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들을 포괄하는 미국 권력의 우산”이 존재해왔다...“미국은 보다 자유로운 무역, 투자, 정치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서구 국가들 사이의 번영증가를 이룰 능력이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이같은 정치적 틀의 경제적 표현이었다.”36)

미국의 지배권이 미국의 파워엘리트 뿐 아니라 핵심자본주의국가 중 상위집단의 파워엘리트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특정 자본주의국가와 그들의 지배계급에 존재하는 전지구적 패권을 향한 충동은 자본축적 자체 같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인식하지 못한다.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Socialism or Barbarism』에서 이스트반 메자로스는 István Mészáros 통제되지 않는 미제국의 야망으로 인해 세계는 잠재적으로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위험한 국면”으로 진입 중이었다고 논의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위기는 불이익을 주면서도 여전히 몇몇 경쟁자들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하면서--규모와 무관하게--지구상의 특정 지역을 통제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군사적 초권력을 지닌 하나의 패권이 전체성을 통제하는 데 기인한다...전체성의 통제는 양립할 수 없는 적수를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구적으로 발전된 자본의 궁극적 합리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그러한 합리성이...동시에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결부될 경우, 나치의 세계정복개념을 포함해,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비합리성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37)

유일한 초권력에 의해 시작된 노골적인 제국주의(naked imperialism)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누구나 전지구와 거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본질을 이해한다. 조지타운 대학의 지정학 및 지구정의 교수인 G. 존 이켄베리가 G. John Ikenberry 2002년 『외교문제』에 실은 글 “미국의 제국적 야망”에 따르면: 미국의 “신제국이라는 이상”은 “규범을 정하고, 위협대상을 결정하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정의를 실현하는 지구적 역할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월권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군사적 주도권을 향유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운 목적은 이같은 이점을 영구적인 것으로, 다른 국가들이 따라잡을 시도조차 못하도록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은 이 전략을 ‘포위돌파(breakout)’라고 묘사해왔다.” 그러나 이켄베리에 따르면 그같은--제국의 적수를 완전히 제거하는--“강경한 제국적 거대 전략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38)

제국주의의 경제적 뿌리를 강조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은 전지구적 공세는 그 야만성만큼이나 성과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권력이란 포신에 의존할 경우 일시적으로 부과될 수 있지만, 그 진정한 원천은 본질상 덧없는 상대적 경제권력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미국 패권의 등장과 함께 끝난 것으로 생각되어온 제국간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제국간 경쟁은 워싱턴의 무제한적 패권 추구를 유지시켜왔다. 그 연원은 경쟁하는 민족국가들로 나뉘어진 세계에서 기저에 깔려있는 자본의 논리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초권력인 미국은 오늘날 최후의 세계지배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기획”은 미국의 전지구적 지배권에 대한 주요 경쟁자(나 잠재적 경쟁자)를 염두에 두고 “포위돌파” 전략을 완수하면서 동시에 주위국가들로부터 가능한 최대한의 잉여를 추출하기 위해 작동되는 미국 주도의 지구적 제국창조 시도를 상징한다. 이같은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며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지정학의 실패가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맑스주의 제국이론은 언제나 지정학의 문제보다는 지경학(geoeconomics)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왔다. 지경학적 관점으로 볼 때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발전(uneven-and-combined capitalist development)은 지정학적/군사적 수단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전지구적 생산력의 이동으로 귀결된다. 자본주의 하의 제국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게다가 영구히 지배할 수 있는 세계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의 제국이란 더 거대하고 잠재적으로 더 위험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랜기간을 거친 진화는--대량파괴를 가능케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한--야만으로 향해간다.

이 불상사 속에서도 우리는 극복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것을 제국주의와 전쟁의 특정 사례에 국한하지 않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부양하는 세계경제체계 전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새로운 세계평화운동을 구축함으로써 희망의 불씨를 보존할 수 있다. 전지구적 착취와 제국의 지정학이 더 이상 주된 목적이 되지 못하는 실제적인 평등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는 이같은 급진적 평등주의 질서를 이르는 명칭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  [추선영 옮김]

------------------------------------------

* John Bellamy Foster, "The New Geopolitics of Empire", Monthly Review vol. 57, no. 8, January 2006.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106jbf.htm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주 이다.

 

원주

 

1) Michael Klare, "The New Geopolitics," Monthly Review, vol. 55, no. 3 (July-August 2003), 51-56. “제국의 경제적 뿌리”라는 구절은 1902년 존 홉슨의 John Hobson 고전적 저서 『제국주의: 일 연구  Imperialism: A Study』(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5), 71에서 차용한 것이다.

2) Franz Neumann, Behemoth: The Structure and Practice of National Social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147.

3) Alfred Thayer Mahan,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London: Sampson, Low, Marston, 1890); Brooks Adams, The New Empire (London: Macmillan, 1902); Frederick Jackson Turner, The Frontier in History (New York: Henry Holt and Co., 1921). 터너의 책은 미국의 해외확장의 필요성을 방어하는 논리를 펼쳤던 1893년 논문과 1896년 『아틀란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에 실린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The Frontier in History의 219를 보라.

4) Halford Mackinder,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 Geographical Journal, vol. 23, no. 4 (April 1904), 421-44.

5) Halford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New York: Henry Holt and Co., 1919), 1-2.

6)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179-81. 맥킨더 경제관점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Bernard Semmel, Imperialism and Social Reform (Garden City, New York: Anchor Books, 1960), 157-68을 보라.

7) Halford Mackinder,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 Foreign Affairs, vol. 21, no. 4, (July 1943), 601.

8)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186.

9) Brian W. Blouet, Halford Mackinder (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87), 172-77.

10) Ratzel quoted in Robert Strausz-Hupé, Geopolitics: The Struggle for Space and Power (New York: G.P. Putnam’s Sons, 1942), 31.

11) Strausz-Hupé, Geopolitics, 66, 227; Neumann, Behemoth, 156-60.

12) Haushofer quoted in Strauz-Hupé, Geopolitics, 152; Neumann, Behemoth, 144.

13) Derwent Whittlesey, "Haushofer: Geopoliticians," in Edward Mead Earle, ed., Makers of Modern Strateg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8), 388-411; German Strategy of World Conquest (New York: Farrar & Rinehart, Inc., 1942), 70-78; Andreas Dorpalen, The World of General Haushofer (New York: Farrar & Rinehart, 1942), 70-78; David Thomas Murphy, The Heroic Earth: Geopolitical Thought in Weimar Germany, 1918-1933 (Kent, Ohio: Kent State University Press, 1997); Saul B. Cohen, Geopolitics in the World System (New York: Rowman and Littlefield, 2003), 21-22.

14) Nicholas John Spykman, The Geography of the Peac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44), 43.

15) Nicholas John Spykman, 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42), 19, 458-60.

16) Spykman, Geography of the Peace, 57.

17) Noam Chomsky, “The Cold War and the Superpowers,” Monthly Review, vol. 33, no. 6 (November 1981), 1-10; Neil Smith, American Empire: Roosevelt’s Geographer and the Prelude to Globalizat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325-31.

18) Smith, American Empire, 287, 329.

19) Mackinder, “The Round World and the Winning of the Peace,” 598.

20) Colin S. Gray, The Geopolitics of the Nuclear Era (New York: Crane, Russak, and Co., 1977), 14.

21) James Burnham, The Struggle for the World (New York: John Day, 1947), 114-15, 162, 182; Gary Dorrien, Imperial Designs: Neoconservatism and the New Pax Americana (New York: Routledge, 2004), 22-25; Francis P. Sempa, Geopolitics: From the Cold War to the 21st Century (New Brunswick, New Jersey: Transaction Publishers, 2002), 25-63. 버냄과 마찬가지로 레이먼드 애론 Raymond Aron 역시 자신의 책 『총체적 전쟁의 세기 Century of Total War』(Boston: Beacon Press, 1955), 111에서 소비에트연방을 세계섬에 대한 위험세력이라고 언급했다.

22) Leslie W. Hepple, “The Revival of Geopolitics,” Political Geography Quarterly, volume 5, no. 4 (October 1986), supplement, S21-S36.

23) “Fresh Fears that the Soviets Will Cut Off Critical Minerals,” Business Week, January 28, 1980, 62-63; Noam Chomsky, Towards a New Cold War (New York: The New Press, 2003), 180-81.

24) Michael Klare, Blood and Oil (New York: Henry Holt and Co., 2004), 2.

25) “Excerpts from Pentagon’s Plan: ‘Preventing the Re-Emergence of a New Rival,’” New York Times, March 8, 1992; “Keeping the U.S. First,” Washington Post, March 11, 1992; Dorrien, Imperial Design, 40-41.

26) Eugene V. Rostow, A Breakfast for Bonaparte (Washington, D.C.: National Defense University Press, 1993), 14; Henry Kissinger, Diplomac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4), 814.

27) 이같은 맥락에서 맥킨더의 저서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어 1996년 국방대학교(the National Defense University)에서 『민주적 이상과 현실을 재출간하기에 이른다.

28) Mackubin Thomas Owens, "In Defense of Classical Geopolitics," Naval War College Review, vol. 52, no. 4 (Autumn 1999),

http://www.nwc.navy.mil/press/review/1999/autumn/art3-a99.htm.

29) Zbigniew Brzezinski, 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 (New York: Basic Books, 1997), 3, 10, 30, 38-39. [국역--김영섭 옮김, 『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삼인, 2000.]

30) See John Bellamy Foster “‘Imperial America’ and War,” Monthly Review, vol. 55, no. 1 (May 2003), 1-10.

31) Alan Larson, "Geopolitics of Oil and Natural Gas," Economic Perspectives, May 2004.

32) Klare, "The New Geopolitics," 53-54.

33) "The New Geopolitics," Economist, July 31, 1999, 13, 15-16.

34) Robert Kaplan, Imperial Grunts (New York: Random House, 2005), 3-15.

35) Strausz-Hupé, Geopolitics, 101.

36) "The Fearful Drift of Foreign Policy," Business Week, April 7, 1975, 21.

37) István Mészáros, Socialism or Barbar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1), 38.

38) G. John Ikenberry, "America's Imperial Ambition," Foreign Affairs vol. 81, no. 5 (September-October 2002), 44, 50, 59.

 

옮긴이주

 

1)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1898

    보어전쟁(Boer War)-1899-1902

2) 1919. 6. 28. 1차세계대전 이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조약.

3) 산업혁명의 발상지 중 하나

4) 1845년 미국의 텍사스 병합 당시 『데모크라틱 리뷰』지의 주필이던 J. L. 오설리번(1813~95)이 『데모크라틱 리뷰』 7, 8월호에 게재한 논설 중 “아메리카대륙에 확대해야 할 우리의 명백한 운명은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신이 베풀어 주신 것이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고 이후 미국의 영토팽창 이념의 표어가 된 이 말은 텍사스 병합에 뒤이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오리건의 합병 등 미국의 영토 확장주의 정책의 논거로 이용되었다.

5) 1823년 12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J.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으로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독립 직후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국이 공동선언을 제의한 데 대하여 미국이 독자적으로 선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국무장관 J. Q. 애덤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먼로주의의 근원은 대통령 G. 워싱턴 이래의 고립주의에 근거하여 더욱 명확히 발전시킨 것으로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 배격의 원칙 등 3개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정책의 일방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국제법과 같은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충분히 있었고, 또 각종 사건에 의하여 국제적으로도 사실상 이를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6)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가 조인한 상호불가침조약.

7) 아프리카 북동부 10개국

8) 주변부이론은 스픽만의 용어이다.

9) 국역--이왈수 등 옮김,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