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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ng Red and Green

적녹 연합*

폴 버켓

 

서평
제임스 오코너, [자연적 원인: 생태 맑스주의에 관한 에세이](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미국의 주요 맑스주의 사회과학자 중 하나인 제임스 오코너는 미국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다수 생산해왔다. 그의 [현대국가의 재정위기]는 Fiscal Crisis of the State(1973)[옮긴이 주: 국역-우명동 옮김, [현대국가의 재정위기], 이론과 실천, 1990.] 정부의 재정적자 문제의 구조적 근원이 무엇인지 드러내보였고 이후의 저작에서는 자본주의적 위기의 일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축적위기]와 Accumulation Crisis(1984) [위기의 의미]에서 The Meaning of Crisis(1987) 그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심리학적 위기 경향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들을 검토하고 종합했다. 혁신적인 "생태-맑스주의" 계간지인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를 Capitalism, Nature, Socialism 공동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1988년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관점을 확장해 자연조건의 문제에 보다 완벽한 결합을 시도했다. [자연적 원인]은 이 시기에 쓰여진 오코너의 주요 글을 모은 책으로 생태-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상당한 기여를 한 그의 작업을 평가해볼 수 있는 탁월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는 한편의 "환경적, 사회적 문제" 증가, 다른 한편의 "자본에 대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규제 방식"의 붕괴 사이에 존재하는 "20세기 말 세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바로 그 기본 모순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본은 항상 인간적, 사회적, 자연적 생산조건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품들로 취급함으로써 이 조건들을 강탈하고 손상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규제 체제가,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그리고 남반구의 "반자립적 민족주의적 사회경제적 발전 및 규제모델"이 약화되고 몰락하면서--그리고 이윤추구적 생산, 무역, 금융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보다 적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로 대체되면서--이러한 파괴적 경향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노동자 투쟁과 공동체 투쟁은 구(舊)규제체제의 붕괴로 인해 촉발되었고 일부는 붕괴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대부분 "포퓰리즘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것으로 남았으며 그러므로 점점 광범위해지는 자본이나 자연적, 사회적 부의 착취심화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코너의 목적은 보다 광범위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급진 녹색주의와 녹색 급진 정치학"(radical green and green radical politics)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학은 생태적, 사회적,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켜야만 하며 그럼으로써"전지구적인 자본/신자유주의 다양한 형태의 지역주의 모두"에 대한 실행가능한 대안을 현재 진행되는 "새로운 사회운동--특히 환경운동과 생태운동"에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생태-맑스주의적 기획에는 건전한 분석방법에 근거한 훌륭한 이론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적 원인] 1부에서 오코너는 자신만의 "방법론 탐색"에 대해 기록한다. 그는 전통적 유물론의 역사 개념이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요소"를 보다 완전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강화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자연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오코너는 "이론적으로 (다소) 건전하고 또한 급진환경정치학에 있어 실천적으로도 유용한 연구방법"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유물론으로서의 "맑스주의가 진정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생태적이어야 한다". 놀랍게도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대한 맑스주의의 역사적 흘대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대한 편파적 그리고/또는 왜곡적인 해석에 기인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논구하지 않는다. 그대신 [자연적 원인]은 단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이 가진 생태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대해 모범적인 비난을 가할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연조건이나 생태적 주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비난이나 대안적 해석을 옹호하거나 반대할 증거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는 전혀 없다.주1) 오코너가 고전적 맑스주의의 유산이나 자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언급될 내용처럼 그의 자본주의적 환경위기 분석에 특정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코너의 방법론은 어떤 경우에도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연의 사용가치를 인간 노동을 통해 즉각적인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조건인 유용성으로 환원시키는 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의 도구적 가치화는 일련의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태도와 함께 나란히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추적가능하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진화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개별 "사물"(효용)들의 집합으로 취급해왔다. 그 결과 "인간본성[을] 정신과 육체, 정신과 정서, 사고와 감정으로 분리한 것"처럼 "외부 자연과 인간 본성"을 분리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는동안 "인간존재의 사회적 본성[도] 또한 구분하고 분리시켰고" 사회는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으로 규정된다. 오코너에게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자연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 기본적인 임노동과 시장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존재를 다루는 방식,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들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문제삼아야만 한다. 오코너의 방법은 그러므로 매우 반경제주의적인데, 이는 간학문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를 "이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사려깊은 투쟁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생태-맑스주의는 맑스주의 계급분석에서 제시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관점보다 더 총체론적이고 공진화적인 관점을 얻고자 분투하는 것이다.
[자연적 원인]의 2부에서는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적 방법론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생산조건을 저하시키거나 파괴하는 방식"에 적용된다. 그 분석은 "주로 위기이론의 이점에서" 발전된 것으로 자본주의의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까지 확장된 것이다. 오코너가 볼 때 이러한 보다 일반적인 위기이론은 반드시 "사물의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 모두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의 외부의 물적, 사회적 장벽 및 내부의 경제적 장벽"을 인식해야 한다.
자본주의에는 착취할 노동력을 재생산해낼 수 있는 물적, 사회적 조건--이윤을 추구하는 자본투자에 적합한 조건--이 필요하다. 또한 "삶의 방식이 자본에 의해 전복된 사람들"이 일으키는 폭동 정도는 통제가능한 변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코너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에 간단히 대답하면 '아니다'이고 좀더 길게 답한다 해도 '아마 아닐 것이다'이다". 이 체계가 보여주는 막대한 환경적 약탈과 생태적 저하의 "증거"는 "자본주의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환경에 대한 주류환경주의자와 자본주의적 관점 사이에 "분리나 균열"이 증가하고 있다. "개혁주의적 녹색주의자들은 자본을 재구성해 자연의 지속가능성에 부합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반대로 집합적 자본은 근시안적인 경제적 동기(일례로 "소비자들과 대중에게 어떻게하면 그럴듯한 녹색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하면 "에너지와 원료를 절약할 수 있을까")로 환원시키는데 더해 "안정적인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장기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는 모두 "자기-확장하는 자본과 자기-제한하는 자연 사이의 모순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정(+)의 이윤율은 전체 생산의 증가를 의미한다...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확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제한적이라는 자연적 조건의 성격과 모순되며 최소한 이러한 주어진 조건들의 질적인 측면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생산조건이 "적시, 적소에 적정량과 적정수준에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 오코너는 시장지향적인 환경 정책(소위 녹색세와 보조금, 오염거래권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실제로든 공식적이든(de facto or de jure) 상관없이 "일반적으로는 생산조건의 자본화, 특수하게는 자연의 자본화는 자본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자연과 사회적 조건의 생산성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지는 제살깍는 효과는 "'생산성'을 복원하거나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이 비용을 덜 들이도록 생산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지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전반적인 생태계획, 도시계획, 사회계획에 간여하는...국가기관이나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저하시키는 자본주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적 원인] 3부에서는 그러므로 오코너의 "생태학 및 관련 운동내의 급진적 경향(에 대한 평가)의 탐색"한 내용을 열거한다. 그가 고려한 운동 중에는 남반구의 비정부기구(NGOs) 및 "가난한 자들의 환경주의" 그리고 북반구의 환경정의와 유독성폐기물운동이 있다. 오코너는 이 운동들이 생태적,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전통적인 조직노동자의 "빵과 버터"의 문제와 엮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는지 탐색한다. 그러한 연합을 가능케 하는 기초는 사회적으로 유용하지만 비상품인 것들을 생산하는 노동이 포함된 "사회적 노동의 통일"의 기저에 놓여있다. 이러한 통일은 여러 "후기-맑스주의" 좌파들이 간과한 것으로 이들은 사회운동과 생태운동 내부에 존재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차이와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후기-맑스주의자들은 또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문제 대부분이 봉급생활자나 잘사는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자, 특히 억압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더 큰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오코너는 "노동운동과 신사회운동의 협력은 가능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북반구의 선진국과 저발전 남반구의 노동-공동체의 조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의 생태주의(ecologism)'와 '생존의 생태주의'...는 여러 방식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교차한다". 북반구의 투쟁이 (지속가능성, 환경정의, 노동적 관심사의 연합을 예고하듯) 자연을 인간생산과 재생산의 기본조건으로 점점 더 인정하고 있고, (비록 당장의 생존이라는 쟁점에 더 강한 지향을 보이긴 하지만) 남반구 내에서도 산업화와 잉여노동 같은 산업예비군의 확산이 질적 측면에서 교차하는 비슷한 관심사를 떠오르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적, 사회적 조건의 자본화에 대한 대중적이고 전지구적인 적-녹 대안의 잠재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현존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의 환경적 충격과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나 오코너의 적녹연합은 자본의 노동착취와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파괴적인 이용 사이에 그 자신이 그려넣은 인위적인 선에 의해 방해받는다. 이 문제는 오코너가 자본주의가 현재 두가지 기본모순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논의를 진행하면서 분명해진다. 이 두가지 모순은 "오늘날 자본축적을 위한 일관된 틀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서 국가와 자본"이 "구별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일차모순은 노동과착취로 인한 과생산위기의 위험과 관련된다. "자본이 [과도하게] 노동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때 임금기반 수요는 생산된 상품전체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자본이 이 상품에 담긴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과축적 경향은 자본이 증가하는 "실현위기의 위험"에 대응하면서 생겨나는 "거대신용구조, 공격적 마케팅, 끊임없는 상품혁신, 경쟁심화"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이차모순은 자본과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코너는 이차모순이 생산비용을 증가시켜 자본의 이윤율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한다. 개별기업이 "자신의 물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점차 저하시키거나 유지하지 않는 전략으로 이윤율을 보호하거나 복원하려 할" 때 "다른 자본(궁극적으로는 자본 일반)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되고 그럼으로써 이윤의 생산을 저하시킨다". 이윤은 "사회운동이 자본에게"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보다 잘 유지하고 복원하라고 요구할" 때 보다 더 감소한다. 여기에는 "보건의료, 토양황폐화 저지, 자본비용을 증가시키거나 자본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도시 주민 보호"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 체계는 케인즈주의 수요측면정책이나 신자유주의 공급 또는 비용측면 정책 모두 자본축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정도까지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문제는 오코너가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데 있다. 심지어 그는 "경제적 용어로 해석되든, 사회정치적 용어로 해석되든 상관없이 일차모순은...생산조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일차모순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산조건과 분리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맑스에게서 배운 바로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착취율의 증가는 (특히 노동력 자체의 가치를 감소시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경우) 모두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전유에 근거한 것인 동시에 이들 조건을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그리고 시장에서 거래가능한 사용가치로 잉여노동을 객관화하는 수단으로 전화시키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코너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 상황은 직접생산자가 "자신의 토지 및 여타 생산수단으로부터...자유로운 상태의 본래적 축적과정(process of original accumulation)"을 가정한다.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건 사이의 사회적 분리는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 생산에서의 자연과 노동을 착취적이고 파괴적으로 조합하는 자본, 과도축적 문제의 핵심이다. 오코너의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은 자본 축적에 대한 "내부적" 장벽과 "외부적" 장벽을 인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선 사이의 사회적 분리를 부지불식간에 재생산하며 자신이 제기한 자본의 위기와 사회운동에 대한 적녹연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차모순"의 경우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자본이 이용함에 있어 발생하는 "외부 비용"의 증가가 자본 일반의 이윤율 문제로 해석될 필요가 있는 지 분명하지 않다. 자본축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 착취가능한 노동력과 물적 조건이며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로의 객관화이다. 생산조건, 노동력, 생산된 사용가치의 질적 본질은 역사적으로 조건적인 것이다.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 (수감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감옥, 경찰과 보안서비스는 개별 기업에서 볼 때는 사적 비용 그리고/또는 세금으로 보인다고 해도 모두 큰 이윤을 남기는 부문이다. 사실은 자본축적의 "외부 비용"이 개별 기업 뿐 아니라 자본 일반--이러한 기회를 조율하고 분배하는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있건 없건--의 잉여가치생산과 실현을 위해 이익이 되는 기회를 창조한다. 한편으로 자본은 과축적 문제에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사용가치(플라스틱포장, 패스트푸드, 자동차, 살충제)를 양산하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함으로써 대응한다. 다른한편 자본축적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외부 비용"으로 인해 필요하거나 유용하게 된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식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동차/석유/부동산 복합체 전체가 하나의 예로 이들은 부정적 외부화를 발생시키는데 기여하는만큼 자본주의의 "부정적 외부화"를 이용한다; 동일한 내용이 의료산업이나 법률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1990년도에 연간 2천억에서 3천억달러의 매출을 올린(전지구의 대기산업 전체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산업은 외부화-기반 활동의 신전에 가장 최근 등록한 일원일 뿐이다.주2)
그러한 파괴적 그리고/또는 외부화-기반 활동의 이윤은 자본주의의 "일차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사기업이 자연스럽게 가장 이윤이 남는 방식의 오염통제와 쓰레기처리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한 잠재적 잉여가치의 과축적 문제는 그에 상응하여 악화될 것이며--이러한 활동을 소수의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남기는 기업이 점차로 독점하게 되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환경산업은 다른 독점자본부문과 다르지 않다. 환경산업이 그 자체로 과축적 문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재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동자와 공동체가 직면한(vis-a-vis) 생산조건의 소외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은 모두 이러한 보다 기본적인 모순의 징후들(symptoms)에 불과하다.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저변에 존재하는 통일성을 일단 인식하고 나면 우리는 녹색 자본주의자들의 개혁주의적 전망의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환경산업은 과축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자본주의의 환경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 오염통제, 쓰레기처리, 재활용은 이윤을 볼 수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성장의 경쟁적인 특징과 질적 수준에 상관 없이 자연적 조건이 가지는 제한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인정을 꺼린다.
이러한 사실처럼 환경산업 자체의 경쟁적 "성공"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생태적 지속불가능성의 성장에 의존하면서 그 성장에 기여한다. "환경유지"는 자체로 "성장산업"이라는 사실은 자본축적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지속가능한 인간발전과 사회발전의 과정을 위해 필요한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드러내준다. 거칠게 말하면 자본은 원칙적으로 어떤 자연 조건에서도 축적을 지속할 수 있다. 아무리 저하되더라도 가능하며 인간이라는 종이 절멸하지 않는 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축적의 환경적 위기와 자연적, 사회적 종인 인간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일반적인 저하라는 의미의 환경위기를 구분해 내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해도 두 번째 제시된 위기형태가 곧 앞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발전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체계라는 말이다.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미치는 자본의 파괴적 효과가 "이윤과 축적을 위협할 뿐 아니라 생활수단과 생활 자체로서의 사회적, 자연적 환경의 생존능력도 위협한다"고 기록한다. 또한 생태운동과 사회운동을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 생산조건이 사실상 존재해야 하는 가를 결정하는" 투쟁으로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조건을 자본의 노동착취에 "외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이분법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조건과 인간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의 구분을 완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경제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오코너의 건전한 바램의 이율배반인(ironic)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화의 효과가 노동 투쟁과 생태적 투쟁의 인위적 구분--생태적 투쟁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비-계급"투쟁으로 규정된다--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은 그러므로 차이와 특수성을 강조하는 "후기-맑스주의" 정치학에 대한 오코너의 비판을 약화시킨다.
반자본주의 생태적 전망이 자연조건이 자본축적에 "외부적"이라는 틀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교환가치로서의 축적을 위해서 자본은 사회적 노동과 자연을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에 결합시킨 형태를 채택해야만 한다. 그 결과 현재의 "자연" 조건은 대체로 자연을 자본주의적으로 전유한 결과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적-녹 운동이라도 반드시 노동과 자연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서 발생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에 그리고 착취에서 초래된 투쟁에 기반해야만 한다. 자연조건의 파괴 및 저해함과 동시에 사회적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보다 보편적이며 덜 제한적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끌어낼 잠재력을 창출해낸다. 이렇게 볼 때 현대생태사상가들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주3)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오직 노동대중을 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분리시키는 자본주의를 민주적 노동자공동체가 대체하여 이러한 조건들의 사회적 활용을 통제하는 체계로 전환화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의 전통적 과정에 우리가 개입해 "규제"하는 것은...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현재까지 존재해왔던 생산양식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필요로하며 동시에 우리의 현존 사회질서 전체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주4)
엥겔스의 관찰은 자리잡고 앉아 "혁명을 기다리자"는 처방은 아니다. 생산에 대한 대중 통제를 보다 높이려고 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공동체의 투쟁은 단순한 자본축적의 도구로서 노동과 자연을 취급하는 데 명시적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투쟁이 생산조건의 탈소외를 향해 나갈 수 있으려면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하며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인간, 사회 자연의 공진화를 창조해야 한다. [자연적 원인]은 위에서 말한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운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풍요로운 자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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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 Burkett, "Fusing Red and Green", Monthly Review, vol. 50, no. 9, February 1999.

  http://www.monthlyreview.org/299burk.htm
  BOOK REVIEW
  James O'Connor, Natural Causes: Essays in Ecological Marxism(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19.95, paper.



원주

 

1) John Bellamy Fodster, "Marx and the Environment," Monthly Review, vol. 47, no. 3, July/August 1995, pp. 108-123; Paul Burkett, "On Some Common Misconceptions About Nature and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7, no. 3, Fall 1996, pp. 332-359.

 

2) 더 세부적인 내용을 찾아보려면 Joshua Karliner, "The Environment Industry: Profiting from Pollution," The Ecologist, vol. 24, no. 2, March/April 1994, pp. 59-63, and Claudia H. Deutsch, "Scrubbing the Air, Buffing the Cleaners: Belated E.P.A. War on Pollutants May Infuse Value into Companies," New York Times, October 17, 1997, pp. C1; also Martin Gellen, "The Making of a Pollution-Industrial Complex," in Eco-Catastrophe, Editors of Ramparts, ed. (New York: Harper & Row, 1970), pp. 73-83.

 

3) Howard L. Parsons, Marx and Engels on Ecology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77), pp. 88-89; Victor Wallis, "Socialism, Ecology, and Democracy," in Socialism: Crisis and Renewal, C. Polychroniu, editor (Westport, CT: Praeger, 1993), pp. 147-148.

 

4) Frederick Engels, Dialectics of Natur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4), pp. 183-184. [국역: 황태호 옮김, [자연의 변증법], 전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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