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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자본주의와 환경*

 

폴 M. 스위지(Paul M. Sweezy)

 

이 글은 유고슬라비아 Cavtat에서 1988년 10월 개최된 토론회 "세계 속의 사회주의(Socialism in the World)"를 위해 준비되었던 글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이 글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1989년 6월호에 처음 실렸었다.

 

인류가 장구한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했음은 분명하다. 핵전쟁은 인간의 모든 기획을 종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파국적인 종말을 피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도 알다시피 문명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본질적인 조건들이 계속 존속할지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역사상 영구적이고 무한히 사용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다루어 온 토지, 물, 공기로 조성된 물적 환경 안에서 살고 그로부터 생활해간다. 이것이 비파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자연적인 과정 혹은 인간에 의한 환경의 일부의 파괴가 이루어진 (예를 들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는) 여러 국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 파괴는 인간이 생존하기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고 이후로도 오랬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며 예측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이 현상에 특별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파괴의 경우에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역사상 환경의 일부에 대한 소규모의 파괴가 있어왔고 때로 그 규모는 (예를들면 사막화의 경우처럼) 매우 인상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과정조차도 전체 환경의 규모와 비교해서 소규모에 불과했다. 부족 혹은 그보다 복잡한 사회들조차도 전멸하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재난의 범위는 지역적인 것이었지 전지구에 걸친 재난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상--사실,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바로 지금까지도--하나의 사건으로 지역적인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소유한 수단들이 너무도 대단치 않아서 환경에 내재된 순전한 막대함과 회복력에 위협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숙고되지도, 명료화되지도 않은 믿음 때문일 것이다.
변화는 1944년 8월 첫번째 원자폭탄(A-bomb)이 투하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초 이 새로운 폭탄은 기존의 무기를 근본적으로 향상시킨 것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연관된 일련의 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사고를 급선회시켰다. 소비에트연방은 이 무기를 예상보다 훨씬 빨리 개발하는 바람에 새로운 무기가 일정하게 독점되고 통제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은 분쇄되었다. 그리고 보다 거대한 파괴의 잠재력을 동반한 수소폭탄(H-bomb)이 등장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많은 대화와 대체로 상징적인 협정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초강대국 사이의 무기개발경쟁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강대국이 그 상대방을 여러번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제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고,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핵전쟁의 결과에 대한 진행중인 연구는 파국이 교전국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더 널리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 있는 의구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영향은 지구 전체를 휩싸는 방사능오염, 핵겨울 같은 형태를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50년도 채 안되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단기간에 인류는 거주의 안정성에 대한 행복한 확신을 버리고 자신의 생존과 동시에 생활을 지탱해줄 자연환경의 수용력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핵무기 사용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전례없는 인간의 의식변화가 내포하는 온전한 의미는 시간이 한동안 흐르기 전에는 명확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인 핵무기의 압도적인 파괴력에서부터 대부분이 알려지고 연구된 지 불과 1세기 남짓에 불과하지만 핵시대의 개막 이래 점차 새로운 견해로 인식되고 있는 다양한 생태적 과정과 경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거주에 대한 위협에 대한 인식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하다.* 일단 인간이 지구를 인간의 거주에 적합하지 않게 변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되면 핵무기가 그러한 파국의 유일한 원천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진보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제는 지상에서의 생활유지에 대한 다가오는 위협의 일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식에 있어서 이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 일이 얼마나 급속하게 이루어졌는 가를 숙고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틀 내에도 물론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극단적인 입장의 한쪽에는 위험이 매우 과장된 것이라고--대체로 핵위험의 산물일, 비관주의적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무기경쟁을 이제 점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통제하에 두고, 환경저하는 종말의 날을 알리는 서곡이 아니라 인간이 유발한 일련의 문제로 그리고 일간이 유발한 일련의 문제들을 다루어 왔던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는 문제로서 그 진정한 중요성이 인식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극단에는 문제가 지난 50년 동안 발생한 것보다 훨씬 악화될 것이며 이제 가장 우울한 전조의 근거를 돌이키지 못할 지점에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찬반론을 제시하는 방식상 두 입장은 종종 양극단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허상이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현재의 경향이 지속될 경우 인간종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돌이킬 수 없도록 망쳐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와는 반대로 현재의 경향에 내포된 숙명적인 함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향 속에 숨은 과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너무 늦기 전에 이 과정을 돌이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환경저하의 과정

 

이 주제를 다룬 문헌은 많이 있고 대부분 수준급의 글이지만 내가 이 주제를 소개하거나 요약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현재까지의 문제 대부분이 지난 삼사세기 동안 발전되고 작동해온 세계경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 이 기간은 물론 자본주의, 부르주아와 산업혁명, 석탄과 증기 및 철도, 철강과 전기 및 화학산업, 석유와 자동차, 기계화되고 화학화된 농업--그리고 인류의 처분에 맡겨진 생산력의 대량성장에 대한 반응인 세계인구의 급속한 팽창과 도시화의 등장 이후의 기간이다. 이 발전과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것은 새로운 방법과 신물질을 생산하고 사용하며 이를 인간, 집단, 사회를 재생산하고 확장하는 데 소모되고 남은 물질의 처리과정에 도입함으로써 지구의 자원에 부담을 증가시키는 상황과 관련된다. 아마도 다른 세대에는 인류를 비롯한 생명있는 존재들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고 대략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연적인 순환을 유념하여 이를 보존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을 계획하고 수행한 사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사례가 있었더라도 극소수라서 역사기록에서 추적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간 경제에 일어난 혁명에 결합된 새로운 발전은 항상 자신들을 위한 고유한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진 개인, 혹은 전체라는 개념에 대비되는 개념인 소규모집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환경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혹 그들이 환경에 대해 고려한다고 해도 그들의 활동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가 무엇이든 쉽게 흡수되거나 한정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복원력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문제시되는 과정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망상이었고 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환경에 피해를 입히는 활동이 소규모라면 상대적으로 무해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이 일반화되고 발생장소로부터 퍼져나가 전지구적 규모의 경제 전체에 번지면 문제는 극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확히 이차세계대전 뒤 반세기 동안 주로 발생한 일이며 바로 환경위기라고 인식되는 현상이 누적된 결과이다.
이 위기의 주요요소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정교화할 필요는 없다: 이산화탄소 흡수원인 열대우림 파괴의 가속과 더불어 화석연료의 대량연소로 인한 온실효과; 역시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호수와 삼림, 여러 초목을 파괴하는 산성비; 인간과 다른 생물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상층대기 중의 오존층 파괴; 약탈적 농법으로 인한 표토의 파괴와 사막의 확대; 산업폐기물과 화학비료 및 살충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토지와 표층수 오염; 한 때 모든 종류의 쓰레기를 무한히 적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가시적 환경위기 중 하나이자 다른 문제만큼이나 취약한 것으로 생각되는 대양오염 증가.
물론 이 목록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환경위기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광범위하고 종종 잘 드러나지 않는 상호연계에 대한 힌트 수준의 목록이다.* 그러나 위기의 일반적 본질이 근대지구경제에 의해 환경에 부과된 요구와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환경에 배태된 자연력의 수용력 사이의 극적(이며 점증하는) 분열이라고 언급하기에는 충분한 목록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환경에 주어진 부담에 대한 수용능력을 증가시킬 방법은 없기 때문에 조정은 평형의 다른 편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또한 비평형상태가 이미 위험수준이기 때문에 성공하려면 지난 몇세기 동안의 잠재적 경향의 감속이 아니라 상황의 반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향의 중심에 자리한 경제체계는 전체로서의 사회 혹은 자신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가지지 않은 채 자신의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존재들--개인, 동업자, 최근 100년간은 기업--의 에너지와 창의력에 의해 추동된다. 이미 한세기 반 전에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Communist Manifesto[국역--김태호 옮김, {공산주의 선언: 150주년 기념판}, 박종철출판사, 1998] 잊지못할 구절을 통해 이 젊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에너지와 성취에 대해 주목할만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부르주아는 백년도 안되는 지배기간동안 과거 세대들이 창조한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 자연력들의 정복,

               기계장치, 공업과 농경에 대한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대륙전체의 개간, 하천의 운하화,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인구. 이같은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전의

               어느 세기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실질적으로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던 1847년 당시의 부르주아의 지배는 지구 표면의 작은 일부에만 국한된 것이었고 자연력과 인간의 목적을 연결시켜주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이후로 자본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진정한 세계체계가 되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산업과 농업에의 적용은 백오십년 전에 꾸었던 가장 열정적인 꿈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모든 극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직 상호경쟁에 의해서만 견제되며 시장이 실패했을 경우 발생하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위기에 의해 단기적으로 통제되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한가지 목적만을 추구하는 개인과 소집단의 집중된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저거노트(juggernaut)[옮긴이--인도 신화에서 비슈누 신의 제8화신, 8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를 탄 저거노트가 지나가는 길에 신도들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고 한다]라는 체계의 본질은 탄생할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체계의 개념 자체에 내포된 의미는 결합되어 있고 막강한 추진력을 지닌 생산과 파괴이다. 긍정적인 측면인 창조적인 추진력은 인간이 자신의 소용을 위해서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인 파괴적인 추진력은 자연이 가진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를 자연에 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곧 두 추진력은 모순되고 불일치하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논의한대로 조정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자연의 수용능력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부과된 요구 편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 몇세기동안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체계가 자신의 파괴적 추진력을 바꿀 수 있고 동시에 창조적 추진력을 환경력에 적절한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우리가 신뢰할만한 증거를 보여주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그 해답은 불운하게도 그러한 믿음을 장려할만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투자의 목적은 언제나 이윤의 극대화였을 뿐, 사회적 목적에의 기여는 아니었다. 아담 스미스 이래의 주류경제이론은 자본가 (혹은 투자자)의 이윤을 직접적으로 극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들의 개별적인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가들이 모두 함께 상호경쟁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면서 공동체의 욕구를 생산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활동을 사회가 존속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식품, 의복, 주거, 기타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편의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단기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이윤 추구의 장에서 퇴출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는 자본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며 이것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자 전체 경제 체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주류경제이론에서 묘사된 내용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단순한 체계와 자본주의를 구분해주는 자본축적에의 강박이다. 그리고 자본 축적에 의해 추진되는 체계는 부동으로 존재할 수 없는, 영원히 변화하고, 생산 및 분배와 관련된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며,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고 사회를 약화시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도록 만들려는 목적에 지배되는 존재이다. 부단한 혁신과 확장 과정에 사로잡힌 채, 이 체계는 방해가 되거나 실패하면 자신의 봉신마저 거칠게 다룬다. 자연환경이 관련될 경우 자본주의는 자연환경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거나 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이윤추구와 더 나아가서 자본축적이라는 최상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내용은 현재의 환경위기를 유발한 경제체계의 본성적이고 근본적인 내적 추진력이다. 자본주의는 상대가 없으면 작동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과도함을 꺾으려는 노력은 자본주의의 희생자들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보다 현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항상 이루어져왔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국역--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I}, 비봉출판사, 1991] 19세기에 이루어졌던 공장법, 10시간 노동법 쟁취 운동에 대해 실감나게 기록하면서 10시간 노동법을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금세기동안 이루어진 보존운동은 지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동된 것이며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보다 파괴적인 약탈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체계 내에서 시작된 이러한 종류의 제약이 없었다면 지금쯤이면 자본주의가 벌써 환경과 스스로를 파괴했을 것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한 제약이 때로 개별 자본가들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체계 전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체계 전체가 위협당하기 훨씬 전에 자본주의 계급을 통제하는 국가를 포함한 자본주의 계급은 환경보호척도를 [옮긴이--자신들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반박하기 위한 방어물을 결집했다. 그래서 환경의식이나 운동이 지난 세기에 등장해 성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위기가 심화되는 것이다. 예상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 결론이 받아들여진다면--그리고 우리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결론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환경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또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본주의를 사적 이윤과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자본의 축적에 바쳐진 경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고 환경을 지속가능한 건강조건을 회복하도록 헌신하는 경제에 근거한 사회질서로 대체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것이 오늘날의 혁명적 변화의 의미이다. 더 낮은 개혁척도는 그 자체로 얼마나 바람직한 것이든 간에 기껏해야 이미 상당히 진행된 치명적인 쇠퇴와 몰락 과정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여기서 취한 입장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을 사실상 재작성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가 붙는다: 성취된 사회주의는 반드시 맑스와 엥겔스가 항상 생각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소득불평등의 심화, 대량실업, 주기적 불황, 금융공황 등의 자본주의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요소들을 제거한 사회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소외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과 자연을 취급하는 내재적 태도를 지닌 자본주의 그 자체를 뿌리뽑아 재배치해야만 한다. 생산의 기적을 수행하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은 결국 그 기적적인 힘을 자신과 거주지를 저하하거나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과 다음 천년을 살아갈 후손을 위해 이 세계를 보다 나른 곳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러한 혁명적인 목적을 지닌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확실히 누군가의 유토피아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그럴 경우 최소한 오랫동안 아마도 자본주의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관련해서 우리가 제기할 질문은 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와의 경쟁을 단호히 멈추고 스스로 올바른 목표를 정립하며 진정으로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력할 것인지의 여부이다. 만일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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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 M. Sweezy,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Monthly Review Vol.56, No. 5, October 2004.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1004pms3.htm

 

 



원주

 

* 너무 날카롭게 구분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환경적 변화는 자연적 과정과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결합되어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이 전혀 기여하지 않은 거대한 지질학적 변형도 있고 과도한 벌목으로 야기된 결과인 남벌처럼 인간의 탓으로만 생각되는 일도 있다.
* 환경적 관심사와 핵시대의 개막 사이의 연관성은 저서, {원은 닫혀야 한다}(The Closing Circle, 1971)[국역--송상용 옮김, 『원은 닫혀야 한다: 자연과 인간과 기술』, 전파과학사, 1980]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진정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던 창시자 중 한 명인 배리 커머너가 Barry Commoner 잘 표현했다: "나는 1953년 열린 미국원자력위원회(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로부터 환경에 대해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공기, 물, 토양, 기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어느 정도는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1946년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는 핵 및 원자력을 군사적, 과학적, 산업에 이용가능하도록 만들려는 미국의 대량개발프로그램을 담당하기 위하여 창설되었다. 1951년까지 미국 16개, 소련 13개의 폭파실험을 했고 다음해 영국은 실험대열에 합류했다."(pp. 49-50)
* 상호연관성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한 복잡한 분석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된 배리 커머너의 저작 {원은 닫혀야 한다}를 참고하라.
* 보다 이해하기 쉬운 분석은 "현존 사회주의(really existing socialism)"의 창조적/파괴적 추진력을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국가들은 보다 발전된 지도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겨루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이들을 따라잡으려는 노력 중에 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현존 사회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효과는 자본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다. 상이한 지구적 맥락에서--안정감을 느끼고 외부의 압력과 무관하게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사회주의 사회가 환경에 질적으로 다른 영향을 줄 것인지 여부는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이 논문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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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ng Red and Green 번역문 개정

* 이 글은 비주류님의 [Fusing Red and Green]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올렸던 허접한 번역글이 무려 세분의 교열을 거쳐 예쁘게 재탄생되었습니다. 진보저널읽기모임에 가시면 재탄생한 저의 번역물을 저의 허접한 소개글과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부끄럽사오니 *^^* 제 원래의 번역물과 비교하지는 말아주셔요 ^^a;;.

 

진보저널읽기모임 주소 http://journal.jinbo.net

번역자료실-Monthly Review게시판에 있구요

게시물 제목은 " [MR] Paul Burkett, "[서평] 적녹 연합", 1999년 2월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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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Debt and Property Rights on Carbon Sinks and Reservoirs

탄소흡수원 및 저장소에 관련된 생태부채와 재산권*

 

후안 마르티네즈-알리에르

 

환경정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그리고 유색인종이나 저소득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더 심하게 오염되는 데 저항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환경정의는 환경적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인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불균형적 방출은 국제적 차원의 환경부정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주1) "온실 정치학"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 하나는 환경안보(Environmental Security)로 군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식량안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환경안보는 (물 같은) 자연자원과 환경서비스 접근권을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모두에게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반구는 이 개념을 이용해 북반구가 온실가스를 불균형적으로 배출해왔고 현재도 배출하고 있다고 논의한다. 북반구의 온실가스배출은 환경정의 문제와 충돌하며 환경관련 책임문제룰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북반구의 온실가스배출은 남반구의 환경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일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각지마다 매우 상이하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농축 증가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의 배출량을 절반으로 감소시켜야 한다. 누가 줄일 것인가? 누가 탄소흡수원과 저장소 역할을 맡을 것인가? 부유한 국가들은 배출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지 못한다(1997년의 교토의정서의 애매한 약속은 이제 폐기되었다). 부유한 국가들은 필요한 감축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돈을 절약하게 된다. 감축을 이행하려면 경제활동에서 화석연료 이용량의 감소시키거나 에너지 기술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피된 비용이 바로 "탄소부채"이다.주2) 
탄소흡수원인 (대양, 새로운 식물, 토양 등)과 임시 저장소인 대기가 제공하는 환경서비스 사례를 살펴보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축은 280ppm에서 360ppm까지 증가했다. ("주도권 경쟁" 중인) 유럽연합은 1997년 12월 교토에서 "안전하게" 550ppm까지만 증가하는 궤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은 감축이라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550ppm이라는 수치는 지구의 기온을 섭씨 2도 가량 상승시킬 가능성에 관련된 수치이며 어느 정도 범위까지 영향을 미칠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불확실한 상태이다.) 즉, 이 "안전한" 한계선이라는 것조차도 매우 논쟁적인 문제인 것이다.주3)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호흡을 줄여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킨다는 것은 비실용적인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정도 비슷한 양의 칼로리를 매일 섭취한다(물론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대신 지구 온난화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사치스러운 이산화탄소 배출을 구분한다. 이런 구분은 인간 생태학의 한가지 특징적인 측면, 즉 신체 외부적 에너지 사용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차이에 기인한 것이며 이 차이는 기술적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신체 외부적 에너지 사용에서 드러나는 막대한 차이는 생물학적인 원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다.
미국의 일인당 연간 탄소배출량은 6톤 정도이며 유럽은 그 절반, 인도는 0.4톤을 배출한다. 일인당 연산 탄소배출량의 지구 평균은 1톤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지구 전체로 보면 연간 6천메가톤에 이르는 양이다).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증가분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우리가 대기에 농축되는 이산화탄소량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이미 과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유럽연합은 부유한 국가들에게 (1990년 수준 대비) 적은 양이나마 감축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 제안조차도 수용하지 않았다(이유 중에는 미국 내의 인구증가 문제도 포함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가 언급하는 것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대기 중에 더 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농축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감축해야 할 양은 현재 배출량의 절반 수준으로 년간 3천메가톤에 이른다. 비록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량이 많으면 각 대양, 새로운 식물, 토양의 탄소흡수력이 증가하기는 하겠지만 (농축증가시 조금 더 흡수된다는 의미에서) 대기를 탄소저장소로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이러한 활동이 기후변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게다가 영구적인 흡수원(대양, 토양, 새로운 식물) 또한 대가 없이 선착순으로 제공된다는 원칙 하에 운영되는 실정이다(소수의 "공동대응(joint implementation)" 실험을 제외하고).
탄소배출감소에 대해 집중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오존층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현재 금지된) 클로로플루오로카본(chlorofluorocarbon; CFC)이나 (최소한 쓰레기 매립에서 발생하는 부분에 있어) 연소를 통해 저렴하게 재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온실가스로서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는 메탄 같은 다른 온실가스의  감축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탄소배출감소나 추가적인 탄소흡수창출을 위해 고안된 공동대응(Joint Implementation)의 경험적 사례(나 청정개발기제(Clean Development Mechanism))를 활용할 경우 탄소 일톤의 가격은 불과 몇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측정되었다.
때로는 온실가스감소의 음의 한계비용도 발생한다. 경제성 제고 및 배출량 감소가 결합된 사례로 "양자 이득(win-win)"을 얻을 수 있다. 일례로 발전소에 석탄대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양자 패배(lose-lose)"의 상황도 벌어진다. "공동대응"이나 "청정개발기제" 실험의 전형적인 사례로, 75만 헥타르에 유칼립투스와 소나무를 심어 네덜란드의 650MW 발전소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려고 계획된 에콰도르의 FACE 프로젝트의 경우이다. 네덜란드는 에콰도르의 소나무 플랜테이션 조성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흡수되는 이산화탄소는 네덜란드 계정에서 감소된 것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이산화탄소배출을 줄이지 않고 다른 장소의 이산화탄소 흡수를 증가시키는 일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FACE의 첫의장은 전 환경부 장관이었던 에드 네이펠스(Ed Nijpels)였다. FACE는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Foreast Absorption of Carbondioxide Emissions)"의 약자이다. FACE가 안데스 지역의 생태(일례로 널리 배포된 1995년 연감에서는 에콰도르에서 고도 2800m가 넘는 지역에서 농업이 불가능하며 가축사육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를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1999년 말 소나무 재배시 뿌려주는 파라모(paramo)의[옮긴이 주-안데스산맥지역에서 고도 3000m 이상의 수목한계선을 넘어서는 곳에는 약간의 관목이 산재하는 초지를 이루는데 이러한 경관을 파라모(Paramo)라고 하며, 양이나 산양의 목장으로 이용된다] 비옥한 유기토로 인해 흡수되는 양보다 더 많은 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네덜란드의 생태부채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 사례로 볼 때 FACE 프로젝트는 고산지역의 농업과 가축사육 농민의 얕잡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유럽중심-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FACE 프로젝트의 실패는 알려져야 하는 사례이다.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약속한 배출감소량은 적은 양이고 결국 흡수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공동대응프로젝트에서 거래되는 탄소 일톤의 가격은 낮아질 것이다. 가격하락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프로젝트 자체로 인해 해당 지역에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외부비용이 가격에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에너지 공급과 남반구의 산업 프로젝트가 수요에 비해서 더 커질 경우 (특히 위협받는 일차림의 보전 또한 수용되어 추가 흡수원이 생긴다거나 석탄 대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등의 탄소배출을 감소시키는 기술의 변화가 발생할 경우) 가격은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추가농축을 막기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연간 탄소 3000메가톤을 줄이기로 동의해야 한다면 이산화탄소 경감 비용은 막대하게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탄소흡수원을 소유한 국가가 가난하다면 추가 경감을 위해 지역에서 지불해야 할 가격은 여전히 낮을 것이다. 그러면 남반구 정부나 북반구 금융기관에 중재자들이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반면 감축이 없다면 흡수원 및 저장소는 영속적이고 불균형적으로 이용될 것이고 이를 부유한 국가들의 소유물로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다("힘"이 "권리"에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생태부채는 연간 6백억 달러에 달하며 (톤당 20달러의 비용을 들여 감축한다고 할 때 3천메가톤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회피비용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탄소부채는 필요한 감축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대충 계산해도 막대한 금액을 부유한 국가들이 자신들을 위해 보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탄소감축의 적정평균비용이 탄소 1톤당 20달러가 넘는다고 쉽사리 논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교 사례로 1999년 라틴 아메리카의 누적 대외부채는 7천억 달러였다. 대충 계산해보아도 (오직 탄소배출만 1톤당 20달러로 계산해서) 지난 12년간 북반구에서 축적한 탄소부채를 상쇄할 수 있는 금액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생태부채에는 ("생물침해" 등의 불평등한 생태적 교환 때문에 발생하는) 탄소 외의 다른 품목도 포함된다. 여기서 탄소성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탄소 배출구와 저장소에 대한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채 불균형적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온실" 정치학에 대한 이런 종류의 시각은 "주도권 경쟁"이라기보다는 "책임소재를 가리는 게임"이며 지금까지 남반구 국가들은 여기에 참여하기를 주저해왔다. 석유수출국[옮긴이 주-coungtries는 countries의 오기로 보임]들은 온실효과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다른 남반구 국가들은 북반구 국가의 정부들에 반감을 사기를 원하지 않는다. 생태부채를 주장하는 대신 기술이전을 위한 약간의 돈을 요청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AOSIS(소도서국연합; Alliance of Small Island States) 탄소부채 개념을 촉구함과 동시에 위협받는 환경안보를 표현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반구에서 생태부채를 주장하는 것은 국제정치의제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며 북반구가 반드시 "생태적 정산"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데 강력한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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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an Martínez-Alier, "Ecological Debt and Property Rights on Carbon Sinks and Reservoirs",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13  No. 1, March 2002.


원문

http://blog.naver.com/post/postView.jsp?blogId=ecopeace&logNo=10467761&categoryNo=14&viewdate=&cpage2=1&cpage=1

PDF포맷입니다.



원주

 

1) Anil Agarwal and Sunita Narain, Global Warming: A Case of Environmental Colonialism(Delhi: Centre for Science and Environment, 1991).
2) Jyoti K. Parikh, "Joint Implementation and the North and South Cooperation for Climate Change," International Environmental Affairs, 7, 1, 1995.
3) C. Azar and Rhode, "Targets for Stabilzation of Atmospheric CO2," Science, 276, 1997, pp. 18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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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Roots: Which Go Deepest?

생태적 연원: 어디까지인가?*

 

헬레나 세만**

 

서평

존 벨라미 포스터, [맑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300pp.

 

존 벨라미 포스터의 이 새로운 책을 보자마자 리처드 르원틴은 Richard Lewontin "맑스에 관한 더 이상의 위대하고 두껍고 무거운 책은 사절일세!"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맑스주의에 관한 두꺼운 책을 썼음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르원틴은 신간 광고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게 되면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쓰기에 이르렀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그러하다.
이 책은 명쾌하고 주제에 충실하며 학술적이고 실질적인 책이다. 지성사를 조망하고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독자들에게 친숙한 책들을 제시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석한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은 독자에게나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에게나 이 책은 탁월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자신을 포함해서 다양한 인물들의 사상의 진화도표 그린다. 그는 맑스가 종종 반-생태 사상가로 오인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언제나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맑스의 사상의 생태적 측면이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은 몇년이 지난 후였다.
기본적으로 포스터는 맑스주의 내부의 두가지 흐름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의 논점을 바꾸어왔다. 자연과학의 영역 전체를 실증주의에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엥겔스의 전통과 결부된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은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 모두를 포괄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한다.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신칸트주의적, 신헤겔주의적 neo-Kantian and neo-Hegelian 논증에 결부되었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Frankfurt School 대다수의 신좌파들이 받아들인 또 다른 전통은 자연의 변증법이라는 생각과 맑스주의와 자연과학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편다. 맑스의 원전을 재독하는 것에서 먼슬리 리뷰의 유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레빈스, 르원틴, 굴드 Levins, Lewontin, and Gould 같은 과학자들과 결부된 신좌파의 또 다른 흐름에 이르기까지 영향력 있는 많은 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후 물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양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유물론을 논의한다.
"서구 맑스주의" 전통은 인본주의자 맑스와 실증주의자 엥겔스 사이의 기본적인 불화를 감지했고 이후 좌파의 역사에서 맑스를 둘러싼 모든 것에 존경을 보내고 엥겔스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문헌과 맥락들을 정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맑스와 엥겔스 사이에 존재하는 이론적 거리에 대한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엥겔스의 매우 진보적이면서 지적인 철학적 유산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몇 저작을 살피는 것이 유용하다. 엥겔스의 저작에서 뽑은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용문은 우리 시대의 생태적 의식에도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히 신선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마치 자연 외부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타국의 원주민을 정복하듯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존재로 자연에 속하며 그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모두 모든

              존재 중 자연법칙을 알아내고 이를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포스터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20년대의 소련의 생태학이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나갔다는 논쟁적인 그의 주장이다. 그 이유를 그는 서구모델은 환원주의적이고 단선적이며 기술적이었던 반면 소련의 사고방식은 보다 역동적이고 변증법적 복합성을 띠었으며 총체적이고 공진화적이었다는 데에서 찾는다. 그는 버나드스키의 Vernadsky 생물권 분석과 바빌로프의 Vavilov 유전적 다양성 연구 및 레닌과 Lenin 루나차르스키의 Lunacharsky 환경보호정책을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대화는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비난받고 생태학자들이 숙청당한 스탈린 집권과 1차 5개년 계획 이후에 모든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하린도 Bukharin 이 때 숙청당했다. 소련의 과학철학에 대해 연구해왔기 때문에 부하린의 철학책들에 대해 알려진 것들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벨라미의 책을 통해서 부하린의 새로운 기록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판받는 시련기, 루반카의 Lubyanka 테러 속에서도 부하린이 4권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자전적 소설([이 모든 일의 시작] How it All Begin), 시집([세계의 변환]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사회주의와 사회주의 문화] Socialism and Its Culture), 광범위한 철학저작([철학의 아라베스크] Philosophical Arabesques). 이 기록은 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기에 glasnost years under Gorbachev 발견되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철학의 아라베스크]는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영어로는 [이 모든 일의 시작]이 1998년에, [철학의 아라베스크]는 출간예정이다. 이전부터 알려져있던 부하린의 다른 저작들을 초월하여 부하린을 진정한 심층생태학자로 해석하는 것을 보면 포스터는 분명히 먼슬리 리뷰 출판사로부터 [철학의 아라베스크]의 영어초역본을 받아 읽어보았을 것이다.
먼슬리 리뷰 출판사의 또다른 공로는 코드웰의 Caudwell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연구와 추가 연구]를 Studies and Further Studies in a Dying Culture 꽤 오랫동안 출판했다는 점이다. 포스터가 읊조리는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이 간명하고 탁월하며 놀라운 존재의 구절들은 내 귀에 음악으로 들려온다. 코드웰은 통합적인 통찰력,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관계가 아니라 유기체나 환경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특정한 이원론을 꿰뚫는 능력을 통해 거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변증법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포스터에 따르면 코드웰은 다른 사상가들은 파악하지 못한 생태적 세계관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한다.
[맑스의 생태학]이라는 제목은 이 책에 딱 맞는 제목은 아니다. 왜냐하면 맑스 이전과 이후 사상가들에 대한 탐구의 범위가 너무도 광범위한데다가 논지는 너무도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포스터의 "문헌탐구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매우들은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에서부터 포이에르바흐, 맬더스와 다윈을 거쳐 엥겔스, 부하린, 버날, 홀데인, 코드웰 Democritus and Epicurus through Feuerbach, Malthus, and Darwin to Engels, Bukharin, Bernal, Haldane, Caudwell 외 다수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실제로는 유물론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물론의 역사는 현대의 생태운동이 지니는 반유물론적 경향에 대한 반론을 품도록 만든다.
유물론적 자연 및 역사 개념에서 생태학이 중심적이라는 주장과 유물론적 자연 및 역사 개념이 생태학에 있어 중심적이라는 주장이 이 책의 핵심이다. 반목하는 해석의 역사 전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포스터는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의 역사 전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녹색사상이 생태적 저하의 전 과정에 대한 책임을 17세기에 등장한 과학혁명이나 낭만주의적, 유기론적, 생기론적 포스트모더니즘과 반대될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착취적인 기제를 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지배"라는 베이컨의 사상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원론적 접근은 현대 생태운동 대부분을 근대성과 과학의 단순 거부하고 맑스주의의 계몽주의적 측면을 희화화하며 비합리적인 근시안을 가지도록 만든다.
일단 생태적 측면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재론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에 근거하여 재이해된다면 자연과 사회의 합리적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근대성, 과학, 유물론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누구라도 맑스주의 전통 내의 생태적 측면의 위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또 다른 관점으로 현재의 생태적 관심사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기초를 파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연원에 대해 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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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ena Sheehan, Ecological Roots: Which Go Deepest?, Monthly Review vol.52, no. 5, October 2000

원문http://www.monthlyreview.org/1000shee.htm

BOOK REVIEW
Foster, John Bellamy,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300pp., $18, paperback

** 헬레나 세만(Helena Sheehan)은 아일랜드에 있는 더블린시립대학 신문방송학과(School of Communications at Dublin City University)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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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맑스의 생태학적 가치분석*

존 벨라미 포스터**

 

서평
폴 버켓, [맑스와 자연: 좌파적·녹색주의적 시각]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최근 십년간 맑스에 대한 모든 비판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주의"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Aeschylus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Prometheus Bound 보낸 맑스의 찬사와 그리스 신화의 혁명적인 인물인 프로메테우스에게 맑스가 느낀 매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작업 중심에 "프로메테우스 모티프"가 자리하고 있다거나 이것이 그의 분석 전체에 있어 근본적으로 취약한 점이라는 비난이 현재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Leszek Kolakowski [맑스주의의 주요 흐름] Main Currents of Marxism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판이 1968년 폴란드에서 발행되었고 1978년 영국에 등장했다. 코와코프스키가 볼 때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은 (경제의 대척점인) 인간 존재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관심부족이다. 세계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는 육체적 인간의

              존재는 부재이다. 인간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존재로 정의된다; 인간존재의

              물리적인 한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즉, 건강하거나 병들고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젊거나 나이들었거나; 유전적으로 동등하지 못하다거나; 그리고 이 모든 환경이

              계급구분과 무관하게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계획에 결부된다는 사실에 무관심한 것이다...맑스는 인간이 신체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제약받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맬더스에

              대한 논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인구란 지구의 공간과 자연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절대적 과잉인구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인구학은

              독립적인 세력이 아니고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한 요인이므로 그에 걸맞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체와 육체적 사망, 성과 공격성, 지리학과 인간의

              번성 같은 것들을 맑스는 순수하게 사회적인 실재로 변모시킴으로써 그의

              유토피아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들을 가장 소홀히 취급했다.주1)

 

이 성토의 본질상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코와코프스키의 비난을 맑스와 생태학에 대해 논평하는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비난은 즉시 앤서니 기든스의 Anthony Giddens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에서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1981) 반복된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계급체계로 표현되는 인간의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의 전환에 대한 맑스의 관심이 자연의 착취로 확장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적 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 이후로 테드 벤튼, 라이너 그룬트만, 존 클락, 마이클 뢰비 Ted Benton, Reiner Grundmann, John Clark, and Michael Löwy  같은 다양한 좌파생태주의사상가들이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자연에 대한 무관심을 각자의 표현으로 덧붙임으로써 이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주2)
(코와코프스키가 루크레티우스, 브루노, 괴테의 Lucretius, Bruno, and Goethe 방식으로 맑스를 보다 확고히 얽어매고자 했던--맑스가 그리스 신화로부터 모티프를 차용한 것으로 강제로 떠넘김으로써 성립된) 이 비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그 자체로 분석되지 못하는) 신화적 상징을 진정한 비판인 양 효과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주3) 맑스가 자연의 한계를 고려에 넣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심지어 코와코프스키가 가장 강력한 논거라고 생각했을 맑스의 맬더스 비판에서도 이 근거없음이 드러난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구학적 요인이나 지구에서 인류가 확장하는 데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과잉인구"라는 용어를 무색하게 만든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맬더스였다--왜냐하면 맬더스의 인구와 식량공급에 대한 엄격한 평형모델에서 과잉인구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의 논리가 전체로서의 지구의 수용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과잉인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식량공급에 대한 인구압이 애초부터 인간의 조건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주4)
맑스가 생, 사,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단순 무시했다는 주장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3권으로 이루어진 [자본] Capital 중 한 권에 들어있는 노동일에 대한 투쟁에 관한 맑스의 처방 중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건강에 대한 절대적인 착취나 "자살에 대한 푸세의 의견"에 "Peuchet on Suicide" 나타난 부모자식 간에 그리고 배우자 간에 벌어지는 학대, 낙태, 여성착취에 대한 맑스의 언급 중 (생, 사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세부적인 논의에 대해서만 고려하면 된다.주5)
중요한 것은 맑스가 단선적인 프로메테우스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코와코프스키의 주장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생태학 영역이지만 그 영역에서 우리가 가장 결정적인 반증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폴 버켓의 권위 있는 책 [맑스와 자연: 적녹의 입장]은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두드러진다. 이 책은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잘못된 평가가 가장 확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역에--그의 성숙한 정치경제학 비판--초점을 맞추고 있다.
[맑스와 자연]은 3부로 나누어진다. "자연과 사적유물론"이라는 제하의 1부는 맑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과 생산의 자연적 기초를 다루고 있다. "자연과 자본주의"라는 제하의 2부는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을 체계적으로 평가한다. "자연과 공산주의"라는 제하의 3부에서는 이 분석에 근거해서 맑스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해석"에 대한 진전된 비판을 제시함과 동시에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의 생태적인 측면도 드러낸다.
버켓은 맑스에게 자연은--노동이나 노동력과 함께--부를 창출하는 원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정립하면서 이 책의 1부를 시작한다. 진정한 부는 사용가치를 구성하는데 사용가치는 자연의 도움으로만 생산되는 것이다. 상품의 구성요소로 변모되는 모든 물적 사용가치는 자연자원에 근거하고 있고 또한 자연자원 없이는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자연의 "보편적 신진대사"는 생산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위적 생산은 원칙적으로 노동력의 조직에 의존하지만 노동력 자체는 그 본성상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은 오직 자연이 (생기있는 자연력으로서 또는 전환된 에너지로서) 물질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맑스는 단순한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몇몇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맑스가 자연적 조건과 한계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맑스는 그러한 자연적 조건을 통해 인위적 생산(human production)에 대한 분석을 구축했으며 심지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위적 생산에 대한 자연초월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그러나 맑스가 인위적 생산의 자연적 기초와 인위적 생산이 자연적 조건에 의존함을 주장했지만, 인위적 생산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생산이며 공진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고 매번 지적함으로써 버켓이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주의적" 접근이라 부른 것을 피해간다. 그러므로 인위적 생산 일부는 (오직 일부만) 그 자연적 기반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사회적, 자연적 조건의 소외이다. 맑스는 "생기있고 활동적인 인류와, 인간의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교환 및 그 결과 나타나는 설명이 필요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자연의 전유라는 자연적·비유기적 조건의 통합(unity)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존재의 비유기적 조건과 활동적인 존재 사이의 분리 즉,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 속에만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 분리"주6)라고 기록하고 있다. 버켓의 주장대로 맑스가 일면적 "자연주의자"이거나 일면적 "사회구성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일반 개념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처방은 철저하게 자연과 (자연의 일부로 남아있는) 인간사회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관계된다. 인간의 자유와 자기창조는 실재이지만 특정 둘레, 자연조건과 자연법칙의 도전이라는 테두리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실재관은 맑스의 자본주의 사회 비판을 지배했을 뿐더러 미래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이해를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이 모든 통찰에도 불구하고 버켓의 책 1부는 난해하다. 이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쟁점에 관한 논의가 워낙 복잡할 뿐 아니라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버켓은 (맑스의 방법을 따라) 생산을 그 역사적인 형태와 분리시켜,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도 분리시켜 일반적인 수준에서 다룬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과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에 대한 내용을 2부에서 다루게 된다. 버켓 자신만의 새로운 맑스 해석이 들어있는 2부는 이 책의 핵심이다--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논의가 담긴 3부가 2부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2부에서 버켓의 책은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맑스의 가치분석 및 사회관계로서의 자본 비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역사적으로 보다 특수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2부는 토지와 노동자의 분리와 같이 노동자들을 생산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본주의를 (특히 산업자본주의)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은 그러므로 노동의 소외 및 자연의 소외 증가를 의미한다--맑스가 1844년 일찌기 깨달은 것처럼 버켓은 맑스의 정치생태학에 대한 비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어 왔던 내용, 즉 자연은 자연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노동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본은 자연을 가치가 결여된 존재로 취급한다는 사실 같은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의 "무상 전유"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맑스와 노동가치이론을 자연의 내재적 가치나 자연의 저하에 따른 실질적인 사회적 비용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은 이 점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데, 자본은 체계 속에서 자연이 생산한 것을 "자연이 준 공짜 선물"로 이해해왔음과 동시에 자본이 자연의 사용가치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자연이 부의 창출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며 또한 궁극적인 부의 원천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맑스의 분석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독점적 임차에 근거한 화폐가치로서의 자연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본주의는 체계적으로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평가절하하고 생태적 문제를 점점 키우는 것이다.
버켓의 접근이 지니는 힘은 맑스가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이론의 옹호자였을 뿐 아니라 반대자이기도 했다는 점을--이 때 맑스가 자본주의 하에서 어떤 다른 가치법칙을 정식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자본의 자치법칙 자체를 극복하는 방안을 추구했다는 의미에서--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분석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으로 인식함으로써 맑스는 가치법칙이 작용하게 하는 협소한 기준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켓은 맑스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태위기가 두가지 형식을 취한다고 설명한다: "(1) 자본축적의 위기, 자본의 물적 필요와 원료생산의 자연조건 사이의 불균형에 기인; (2) 인간-사회발전의 질적인 면에 찾아오는 보다 일반적인 위기, 도시와 시골이라는 자본주의적 산업분할에서 기인하는 물질과 생명력의 순환 방해에서 기인"(107). 두가지 위기 중 첫 번째 위기는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상품의 흐름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도 증가시키는 자본의 경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 노동력은 경제성을 보다 강화시킨 방식으로 투입된다. "생산성 증대는 추상노동의 각 시간이 이제 보다 많은 양의 사용가치와 물적 필요조건을 처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10). 이 경향은 생산과정에 투입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과 에너지의 사용가능성에 일시적인 문제를 발생시켜 자본주의 내에 보존문제를 일으키지만, 이 체계의 운동법칙은 보존에 대한 진정한 생태적 접근을 반대한다.
보다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맑스를 분석함에 있어 에 더 중요한 것은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도시와 시골의 분리가 가져오는 생태적 모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생태적 비판이다. 맑스는 토양영양순환의 파괴--토양파괴와 도시의 오염에서 분명히 드러나는--에 기인하는 인간사회와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불균형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 버켓은 맑스가 생태문제를 농업(시골)에만 관련해 다루며 산업(도시)에 관련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에 논박하기 위해 생태위기에 대한 맑스의 변증법적 이해를 강조한다.주7)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환경위기가 도출된다는 맑스의 인식은 "환경적 측면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비판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반복되는 주제"라는 버켓의 주장에 근거를 제공해준다(126).
"자연과 공산주의"에 관한 3부에서 버켓은 자신이 맑스의 생태 분석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해석"이라 부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박한다. 버켓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역사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를 단순한 생산성과 풍요를 통해--즉, 양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해석한다고 한다. 예를들면 알렉 노브는 Alec Nove 자본주의가 맑스의 관점에 나타난 풍요의 세계를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의 문제는 '해결되어' 왔고" 미래에 나타날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는 "부족한 자원의 분배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생태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는 맑스에게서 등장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노브의 주장이다.주8) 그러나 맑스가 생산의 양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예를들면 그는 자본주의는 농업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질적 문제도--인간노동 뿐 아니라 자연의 소외에 근거한 사회 즉,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불균형--크게 강조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다(164). 물론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인간 공동체의 소외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소외라는 이중적인 소외와--협소한 착취적 형태를 통한 생산과 부의 창출의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버켓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맑스 사상의 생태적 측면(과 여기서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이라고 언급되는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춤으로써 버켓은--광범위한 자연에 대한 몇 안되는 정당한 분석 중 하나인--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진정하며 심도깊은 해석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과거의 해석들은 일반적으로 순수한 양적 문제에 과도하게 경도되었다. 그러나 버켓은 그와 같은 변환이 필연적으로 연계되는 사회적, 생태적 신진대사 전체에 질적 혁명에 대해 묘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사상가들이 사회주의혁명을 임박한 것으로 보았던 맑스가 그러한 변환을 야기하고/동인이 되는 생태적 모순에는 직접적인 강조점을 상대적으로 적게 두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의해 오도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환경에 대한 고려는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필수가 아니라고 가정된다(129; 199).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과는 별도인 사회주의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할 때 맑스는 항상 생태적 요소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 자유 및 공동체의 필요와 지속가능성의 원리를 조화시키도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맑스에세 공산주의의 구성은 버켓의 말대로--사적 재산의 통치 하에서 가정되는 왜곡된 형태와 전혀 별개인--"자연의 진정한 사회화를 위한 투쟁"이었다(214).
맑스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Grundrisse 자연(혹은 토양)은 본래 "생산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논의한다. 자본주의는 이 본래적 통일을 파괴하여 자연과 생산에 필요한 매개자로 (비록 소외된 형태이지만)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이 가진 풍요로운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자연과의 그 본질적 통일성을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생산의 사회화가 필수적이다: "진정한 사회 공동체"의 발전이 필요하다. 버켓의 맺음말을 보자.

 

                만일 사람들이 자연적 존재로서 발전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사회적 존재로 더 발전해야만 하며 생산의 자연적 조건의 명백한 사회화를

                성취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적 필요를 극복할 수 없다--우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무매개적인

                자연으로 도피함으로써 인위적 생산의 의식적, 사회적, 누적적 특징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인위적 생산의 발전은 그 자체로의 자연에 의해 더이상

                선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조직의 통제자가 되어야만 한다(257).

 

버켓이 볼 때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의 중요성은 하나의 모순의 두 차원인 자연의 소외, 인위적 생산의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사회 자체의 혁명적 변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을 밝혀낸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맑스의 저작에 대한 어떤 분석도 단견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맑스주의라기보다는 부르주아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의 이상으로 특징되는 기계적 프로메테우스주의일 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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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Monthly Review vol. 50, no. 2, September 2000.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900jbf.htm

BOOK REVIEW
Paul Burkett,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45, hardcover

***  존 벨라미 포스터는(John Bellamy Foster) Monthly Review Press에서 출판된 책 [맑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 및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국역-김현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1]의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and The Vulnerable Planet 저자이다.



원주

 

1) Leszek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pp. 412-414.

2) Anthony Giddens,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 pp. 59-60[국역-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출판, 1991]; Ted Benton, “Marxism and Natural Limits,” New Left Review, no. 178 (November-December 1989, p. 82[국역-추선영 옮김, "맑스주의와 자연의 한계-생태주의적 비판과 재구성", 읽을꺼리 6호, 2000]; Reiner Grundmann, Marxism and Ec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p. 52[국역-박만준, 박준건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 동녘, 1995]; Michael Löwy, “For a Critical Marxism,” Against the Current, vol. 12, no. 5 (November-December 1997), pp. 33-34.

3) 로마제국 시대에 그리고 맑스가 이해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기술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계몽주의 및 종교비판과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즉, 일반적인 혁명의식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다). Walt Sheasby, “Anti-Prometheus, Post-Marx: The Real and the Myth in Green Theory,” Organization & Environment, vol. 12, no. 1 (March 1999), pp. 5-44 를 참고하라.

4) John Bellamy Foster, “Malthus' Essay on Population at Age 200,” Monthly Review, vol. 50, no. 7 (December 1998), pp. 1-18 and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chapter 3을 참고하라.

5) Karl Marx, Capital, vol. 1 (New York: Vintage, 1976), pp. 389-411[국역-김수행 옮김, [자본론]I-III, 비봉출판사, 1989], and “Peuchet on Suicide,” in Eric A. Plaut and Kevin Anderson, eds., Marx on Suicid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9), pp. 45, 53-54, 57-58. See also the excellent introductory essay by Kevin Anderson.

6) Karl Marx, Grundrisse (New York: Vintage, 1973), p. 489[국역-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비판요강], 백의, 2000].

7) John Bellamy Foster, “Marx's Theory of Metabolic Rift: Classical Foundations for Environmental Sociolog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105, no. 2 (September 1999), pp. 366-405, and Marx's Ecology, chapter 5를 참고하라.

8) Alec Nove, “Socialism,” in John Eatwell, Murray Milgate, and Peter Newman, eds.,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 vol. 4 (New York: Stockton, 1987), p.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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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Social Medicine?

무엇이 사회적 의료인가?*


매튜 R. 앤더슨, 래니 스미스, 빅터 W. 지델

 

지난 20년동안 보건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기업위주의 의제가 급속히 확산되어왔다. 미국에서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접근체계로 이동하기보다는 진료서비스에의 접근성이나 질적 측면은 점점 보험산업에 주도권을 빼앗겨왔다. 환자들은 이제 "고객"이며 진료서비스는 "생산라인"이 되었다. 요즘은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지원을 받는 연구보다 제약산업의 지원을 받는 연구가 더 많아졌다; 제약업계의 돈은 최고의 연구자들의 봉급을 지불하며 국가적 연구의제 설정에 간여하는 것이다. 진료하는 사람들과 환자들은 모두 (종종 교육으로 위장하고) 두배의 효과를 가지는 값비싼 약 판매의 촉진을 위한 정교한 광고공세에 시달린다. 보건의료분야에 "시장합리성"을 도입하는 일은 보건의료비용 억제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일인당 의료비를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27위를 기록한 신생아의 기대수명 같은 여러 보건 지표에서 나쁜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기업적 의제가 도전받은 적은 없다. 그리고 비관주의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의료분야의 진보적 행동주의의 길고도 풍부한 역사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사는 (최소한) 19세기 초반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데 당시에는 사회, 질병, 의약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 연구--와 이 연구로부터 도출된 의료활동형태--는 "사회적 의료"로 알려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의료"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게 되는데 사회와 다양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이 용어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 속에는 특정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함축하고 있다:

 

               1. 사회적, 경제적 조건은 건강, 질병, 의료활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2. 사람들의 건강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다.
               3.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이러한 개념들의 기원 및 라틴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미국에서 이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탐구할 것이다. 짧은 지면상 사회적 의료에 대한 폭넓은 검토가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사회적 의료에 대한 역사적인 경험이 근대의 보건과 보건의료 내의 가장 까다로운 문제들 중 몇가지에 빛을 밝힐 방법을 제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건강과 질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비록 사회와 보건 사이의 연계를 지적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독일 의사 루돌프 비르효를 Rudolf Virchow 사회적 의료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비르효는 19세기의 위대한 병리학자 중 하나이며 세포수준에서의 질병의 이해에 대한 많은 기여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질병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848년 베를린의 왕립 차리트 병원(Royal Charite Hospital)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그는 프로시아의 어퍼 실레지아 지역(Prussian province of Upper Silesia)에서 발병한 티푸스(typhus)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빈곤, 교육 및 민주주의 부족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 전염병의 발전에 있어 핵심요소라고 규명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사회적 혼란기에 발생하는 "인공전염병"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게 된다:

 

               인공전염병...은 사회의 탓이며 잘못된 문화의 산물이거나 전체 계급에

               통용되지 않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 전염병들은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에

               의해 생산된 결함의 지표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급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G. Rosen, From Medical Police to Social

               Medicine [New York: Science History Publications, 1974]에서 재인용.)

 

에이즈의 성행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러한 단어들은 예언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불평등과 혼란은 HIV 바이러스의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과 HIV보균자인 아이티 사람들의 개인사 사이의 연계는 폴 파머가 Paul Farmer 신랄하게 묘사한 바 있다. 에이즈와의 투쟁은 전염성 질병과의 싸움일 뿐 아니라 여성, 아동, 성노동자,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투쟁은 또한 세계의 극빈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전달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 최고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또한 최악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에이즈의 원인병원체를 신속하게 규명할 수 있고 그에 효과적으로 듣는 치료제를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근대생물의학의 기적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에서 에이즈는 이제 대체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직 완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서비스에 접근을 거부당하는 것은 만행이며--또한 근대 의료의 특징이기도 하다. 에이즈 치료제가 긴급히 필요한 6백만의 가난한 사람들 중 4십4만명만이 실제로 치료제를 구할 수 있었다. 왜 에이즈 환자들은 그들에게 그렇게도 절박하게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 해답은 사실 약값의 문제는 아니다.  에이즈 치료를 위한 "칵테일 요법"(the "cocktail" of AIDS)은 년간 250달러 정도만 가지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WTO를 통해 미국 정부는 빈국이 일반의약품을 생산하거나 구매할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적재산권"을 가진 제약회사의 권리가 공중보건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의료(organized medicine)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요인이 질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천천히 수용해왔다. 19세기 말 병리학과 미소생물학에서 이루어진 놀랄만한 진전은 사회적 요인이 질병의 원인으로는 유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생물학적, 사회적인 본성이 뒤얽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Georgi Plekhanov 그를 특징짓는 날카로운 방식으로 "소화의 법칙"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묘사했다:

 

                일단 위장이 특정량의 음식을 공급받으면 위장소화의 일반법칙에 따라

                작용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법칙들의 도움을 받아 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 날마다 당신의 위로 들어가는 반면 내 위에는 방문객이 전혀 없는지의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가? 이 법칙들이 왜 누구는 그렇게 많이 먹고 다른

                사람은 굶어죽는지를 설명해주는가? 다른 영역, 다른 종류의 법칙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G. Plekhanov, 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

 

사회적 의료에 대한 초기의 열정 대부분은 계급간 사망률 차이가 두드러짐을 보여준 유럽 보건 통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건강과 질병은 부나 빈곤과 상관관계를 가진다. 불운하게도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며 보건에서의 불평등은 활발한 연구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공중보건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다.

 

빈곤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아마 그들은 더 나은 유전자나 더 나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균형이 사회개혁이나 혁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호지킨 림프종(Hodgkin's Lymphoma[옮긴이 주-림프조직의 원발성 악성종양])의 발견자로 알려진 토마스 호지킨과 Thomas Hodgkin 스페인 내전동안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으며 중국에서 혁명가들을 돕다가 죽은 캐나다 출신 외과의사 노먼 베쑨 Norman Bethune은 의사로서 활동가의 삶을 살아간 두가지 사례이다.
비르효는 또 다른 예이다. 질병이 사회적인 원인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면 그가 볼 때는 건강하지 못함에 대한 책임은 정치체계에 있었다. 그는 1848년 3월 베를린 폭동 당시 바리케이드 친 현장에 있었으며 훗날 베를린시의 고문(Berlin city counselor)으로, 독일급진진보당(the German Progressive Radical Party)의 건설자로, 프러시아와 독일 의회(Prussian and German parliaments)의 의원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친다. 1848년 혁명기에 그는 자신이 펴낸 잡지를[옮긴이 주-Medicinische Reform; 의료 개혁] 통해 "의료는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은 대규모의 의료일 뿐(politics nothing but medicine on a grand scale)"이라고 선언했다.
20세기에 라틴아메리카는 가장 활동적인 사회적 의료 센터를 발전시켰다. 그 멤버 중 가장 저명한 사람 두명은--살바도르 아옌데와 체 게바라 Salvador Allende and Che Guevara--보통 그들의 정치경력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공중보건의였던 아옌데는 칠레보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칠레의 질병과 고통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분석한 자료를 출간했다: 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 a. 그는 이 책에서 보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의 개선 뿐 아니라 공중위생, 주거, 영양, 노동조건 개선도 필요하다고 논의했다. 비르효의 주장을 따라 아옌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 누더기를 걸히고 자비없는 착취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칠레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연합(Popular Unity) 정부의 정치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된다. 아옌데는 1971년에서 1973년 미국이 조직학 쿠데타로 살해되기 전까지 인민연합 정부의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의사이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결국 혁명정부의 경제장관이 된다. 정치는 대규모의 의료일 뿐이라는 비르효의 견해를 따른다:

 

                혁명의 과업은--아이들을 훈련시키고 돌보는 과업, 군대를 양성할 과업,

                결실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매일 그 토지에 기대어 행복한 세월을 보낸

                구(舊)부재지주의 토지분배과업--쿠바에서 이루어져 온 사회적 의료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David Deutschmann, ed., Che Guevara:

                A Reader: Writings on Guerilla Strategy, Politics and Revolution

                [New York, Ocean Press, 1997]에서 재인용)

 

살바도르 아옌데와 마찬가지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했다.
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번성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에 있어 풍부한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이들은 이론과 실천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프락시스를 praxis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다. 임상의료진은 공동체조직, 노조, 정치운동과 연계를 맺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억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또한 의학과 전염병학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질병을 고립된 상태나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상과 병리 사이에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인 "건강-질병 변증법(health-illness dialectic)"을 강조한다. 이 변증법은 질병의 독특한 유형을 만들고 질병을 설명하고 다루는 차별화된 의료 이데올로기를 생성하는 사회구조 내에 존재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1980년대 중앙아메리카의 반전운동과 연계되어 북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의료해방(liberation medicine)" 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최근 몇몇 개괄적 소논문의 출간과 뉴멕시코대학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를 다루는 웹싸이트 개설을 통해 부분적으로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 운동은 대체로 영어사용자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새로운--보다 민주적이고 덜 위계적인--보건의료 모델에 대한 열망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치가 대규모의 의료라면 또한 의료는 소규모의 정치임이 분명하다.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은 중요한 정치적 지류가 될 것이다. 사회적 의식을 지닌 의사들은 상이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진료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남아프리카의 의사였던 시드니 카르크와 에밀리 카르크와 Sidney and Emily Kark 부분적으로 연관된 운동인 공동체 의료의 발전이다. 1940년 남아프리카의 정치가 특별히 좋았던 시절 카르크 부부는 (지금은 크와줄루/나탈인) 나탈의 폴레라에(Pholela in Natal(now in KwaZulu/Natal))서 의료단위 모델을 구축했다. 의료센터는 카르크 부부가 우선 "사회적 의료의 실천"으로 묘사했지만 훗날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community oriented primary care)"로 재명명된 활동의 기초를 시험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기획은 1946년 더반(Durban)에서 8개의 의료센터와 주요 교육프로그램을 갖춘 가족과 공동체 보건 연구소(Institute of Family and Community Health)로 확장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정치풍토가 변하면서 1959년 연구소는 활동을 그치게 된다. 카르크 부부는 결국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이스라엘 사회적 의료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 모델은 사회적 의료 원칙에 근거한 혁신을 통합시켰다. 계획은 "공동체 진단"에서 시작한다. 전염병학적 작업에 근거해 폴레라의 세가지 공통적인 조건을 "나쁜 영양공급; 전염성 질병; 심리-사회적 문제"라고 규명했다. 이 세가지가 결합되어 "공동체 증후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아이들에게 우유나눠주기 프로그램, 공원에 나무심기 같은 비전통적 의료개입으로 이어졌다.
진료서비스는 (보통 공동체 출신인) 일차진료의사, 공동체 간호사, 보건교사로 구성된 팀에서 책임을 졌다. 이 팀은 그들이 친근하게 알고 지내는 이웃가정을 위해 진료했으며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가족인 "환자"로 받아들였다:

 

                   팀진료의 연속성은 가족과 그들의 의사 및 간호사 간에 개별적 관계를

                   이끌어냈다. 마을사람들이나 이웃을 진료했던 과거 가족주치의의 활동과

                   같은 종류의 활동이다.  (S. L. Kark and G. W. Steuart, A Practice of

                   Social Medicine [Edinburgh: E&S Livingstone Ltd., 1962])

 

전통적인 가족주치의와는 다르게 진료팀은 개별 환자들이 처한 보다 넓은 사회적 맥학의 함의를 고려할 수 있고 개별 환자들에게서 새로운 진단이 나올 경우 전염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미국 고용창출국(U.S. 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은 미국 최초로 두 개의 공동체 의료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했다: 아라는 보스톤의 컬럼비아 포인트 반도(Boston’s Columbia Point peninsula)에 지어졌고 다른 하나는 미시시피의 마운드 베이유(Mound Bayou, Mississippi)에 건립되었다. 미시시피의 경우 잭 가이거가 Jack Geiger 설립한 것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카르크 부부와 함께 동료로서 일했던 인물이다. 의회는 결국 오늘날 미국 내의 "제3세계" 사람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공동체 의료센터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글의 저자 중 두명도(매트 앤더슨과 래니 스미스 Matt Anderson and Lanny Smith) 그와 같은 의료센터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공동체 의료운동의 여러 이상은 1978년 WHO가 주관한 일차의료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 on Primary Care)에서 출간한 "알마-아타 선언(Declaration of Alma-Ata)"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선언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복리를 온전히 누리는 상태, 단순히 질병이나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WHO의 건강에 대한 총체적 정의를 재확인했다. 사람들은 보건의료서비스 활동과 조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일차의료는 보편적으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현존하는 건강상의 심대한 불평등"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경고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보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선언은 2000년까지 "모두를 위한 보건"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슬프게도 신자유주의적 경제 의제가 진보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압도해버렸다. 오늘날 "모두를 위한 보건의료"는 (심각한 저기금 상태에 놓인)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 기금 같은 다양한 질병 각각에 우선권을 주는 식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알마-아타에서 표현된 이상은 이제는 민중의 보건의료 운동으로 조직된 전지구적인 기반의 국제 공동체 보건 운동을 활성화시키면서 지속되었다.

 

 

사회적 의료는 오늘날의 의료활동에 적절한가?

 

때때로 명백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국의 보건의료에 "시장 개혁"을 도입한지 20년이 지났지만 모든 미국인이 질 높은 보건의료서비스를 감당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황제에게는 옷이 없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HIV에 대한 처방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비용은 미국정부가 사담 후세인이나 그에게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제의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 의료진은 자신들의 환자의 생명을 자세히 알고 있고 환자들의 문제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 대해 이해하기에 적합한 유일한 사람이다. 비르효는 의사는 본원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라고 간명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의사들이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는 현대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이러한 사명은 1999년 국경없는 의사회나 1985년 핵전방지국제의학자기구(International Physicians for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 ; IPPNW)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인식되었다.
사회적 의료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미국의 보건의료의 문제가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의약품, 더 질 높은 통제주도권, 더 많은 컴퓨터, 더 많은 감사, 더 빠른 퇴원 등 뭐든 더하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의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성찰이 필요하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의료를 바라는 진보적인 의사들이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레지아 지방에 발생한 전염병 티푸스에 대한 비르효의 처방전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어퍼 실레지아에서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것과 비슷한 조건을

                 장래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리적 해답은 그러므로

                 매우 쉽고 간단하다: 그 딸들의 자유와 번영을 포함한 교육이다.

                 (G. A. Silver, “The Heroic Model in Medicine: Health Policy by Accolad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77, vol. 1 [1987] 82-88에서 재인용)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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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R. Anderson, Lanny Smith, and Victor W. Sidel, "What is Social Medicine?", Monthly Review vol. 56, no. 8, january 2005.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105anders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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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ng Red and Green

적녹 연합*

폴 버켓

 

서평
제임스 오코너, [자연적 원인: 생태 맑스주의에 관한 에세이](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미국의 주요 맑스주의 사회과학자 중 하나인 제임스 오코너는 미국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다수 생산해왔다. 그의 [현대국가의 재정위기]는 Fiscal Crisis of the State(1973)[옮긴이 주: 국역-우명동 옮김, [현대국가의 재정위기], 이론과 실천, 1990.] 정부의 재정적자 문제의 구조적 근원이 무엇인지 드러내보였고 이후의 저작에서는 자본주의적 위기의 일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축적위기]와 Accumulation Crisis(1984) [위기의 의미]에서 The Meaning of Crisis(1987) 그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심리학적 위기 경향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들을 검토하고 종합했다. 혁신적인 "생태-맑스주의" 계간지인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를 Capitalism, Nature, Socialism 공동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1988년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관점을 확장해 자연조건의 문제에 보다 완벽한 결합을 시도했다. [자연적 원인]은 이 시기에 쓰여진 오코너의 주요 글을 모은 책으로 생태-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상당한 기여를 한 그의 작업을 평가해볼 수 있는 탁월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는 한편의 "환경적, 사회적 문제" 증가, 다른 한편의 "자본에 대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규제 방식"의 붕괴 사이에 존재하는 "20세기 말 세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바로 그 기본 모순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본은 항상 인간적, 사회적, 자연적 생산조건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품들로 취급함으로써 이 조건들을 강탈하고 손상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규제 체제가,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그리고 남반구의 "반자립적 민족주의적 사회경제적 발전 및 규제모델"이 약화되고 몰락하면서--그리고 이윤추구적 생산, 무역, 금융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보다 적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로 대체되면서--이러한 파괴적 경향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노동자 투쟁과 공동체 투쟁은 구(舊)규제체제의 붕괴로 인해 촉발되었고 일부는 붕괴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대부분 "포퓰리즘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것으로 남았으며 그러므로 점점 광범위해지는 자본이나 자연적, 사회적 부의 착취심화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코너의 목적은 보다 광범위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급진 녹색주의와 녹색 급진 정치학"(radical green and green radical politics)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학은 생태적, 사회적,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켜야만 하며 그럼으로써"전지구적인 자본/신자유주의 다양한 형태의 지역주의 모두"에 대한 실행가능한 대안을 현재 진행되는 "새로운 사회운동--특히 환경운동과 생태운동"에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생태-맑스주의적 기획에는 건전한 분석방법에 근거한 훌륭한 이론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적 원인] 1부에서 오코너는 자신만의 "방법론 탐색"에 대해 기록한다. 그는 전통적 유물론의 역사 개념이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요소"를 보다 완전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강화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자연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오코너는 "이론적으로 (다소) 건전하고 또한 급진환경정치학에 있어 실천적으로도 유용한 연구방법"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유물론으로서의 "맑스주의가 진정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생태적이어야 한다". 놀랍게도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대한 맑스주의의 역사적 흘대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대한 편파적 그리고/또는 왜곡적인 해석에 기인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논구하지 않는다. 그대신 [자연적 원인]은 단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이 가진 생태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대해 모범적인 비난을 가할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연조건이나 생태적 주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비난이나 대안적 해석을 옹호하거나 반대할 증거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는 전혀 없다.주1) 오코너가 고전적 맑스주의의 유산이나 자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언급될 내용처럼 그의 자본주의적 환경위기 분석에 특정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코너의 방법론은 어떤 경우에도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연의 사용가치를 인간 노동을 통해 즉각적인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조건인 유용성으로 환원시키는 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의 도구적 가치화는 일련의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태도와 함께 나란히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추적가능하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진화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개별 "사물"(효용)들의 집합으로 취급해왔다. 그 결과 "인간본성[을] 정신과 육체, 정신과 정서, 사고와 감정으로 분리한 것"처럼 "외부 자연과 인간 본성"을 분리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는동안 "인간존재의 사회적 본성[도] 또한 구분하고 분리시켰고" 사회는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으로 규정된다. 오코너에게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자연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 기본적인 임노동과 시장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존재를 다루는 방식,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들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문제삼아야만 한다. 오코너의 방법은 그러므로 매우 반경제주의적인데, 이는 간학문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를 "이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사려깊은 투쟁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생태-맑스주의는 맑스주의 계급분석에서 제시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관점보다 더 총체론적이고 공진화적인 관점을 얻고자 분투하는 것이다.
[자연적 원인]의 2부에서는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적 방법론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생산조건을 저하시키거나 파괴하는 방식"에 적용된다. 그 분석은 "주로 위기이론의 이점에서" 발전된 것으로 자본주의의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까지 확장된 것이다. 오코너가 볼 때 이러한 보다 일반적인 위기이론은 반드시 "사물의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 모두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의 외부의 물적, 사회적 장벽 및 내부의 경제적 장벽"을 인식해야 한다.
자본주의에는 착취할 노동력을 재생산해낼 수 있는 물적, 사회적 조건--이윤을 추구하는 자본투자에 적합한 조건--이 필요하다. 또한 "삶의 방식이 자본에 의해 전복된 사람들"이 일으키는 폭동 정도는 통제가능한 변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코너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에 간단히 대답하면 '아니다'이고 좀더 길게 답한다 해도 '아마 아닐 것이다'이다". 이 체계가 보여주는 막대한 환경적 약탈과 생태적 저하의 "증거"는 "자본주의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환경에 대한 주류환경주의자와 자본주의적 관점 사이에 "분리나 균열"이 증가하고 있다. "개혁주의적 녹색주의자들은 자본을 재구성해 자연의 지속가능성에 부합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반대로 집합적 자본은 근시안적인 경제적 동기(일례로 "소비자들과 대중에게 어떻게하면 그럴듯한 녹색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하면 "에너지와 원료를 절약할 수 있을까")로 환원시키는데 더해 "안정적인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장기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는 모두 "자기-확장하는 자본과 자기-제한하는 자연 사이의 모순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정(+)의 이윤율은 전체 생산의 증가를 의미한다...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확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제한적이라는 자연적 조건의 성격과 모순되며 최소한 이러한 주어진 조건들의 질적인 측면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생산조건이 "적시, 적소에 적정량과 적정수준에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 오코너는 시장지향적인 환경 정책(소위 녹색세와 보조금, 오염거래권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실제로든 공식적이든(de facto or de jure) 상관없이 "일반적으로는 생산조건의 자본화, 특수하게는 자연의 자본화는 자본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자연과 사회적 조건의 생산성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지는 제살깍는 효과는 "'생산성'을 복원하거나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이 비용을 덜 들이도록 생산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지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전반적인 생태계획, 도시계획, 사회계획에 간여하는...국가기관이나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저하시키는 자본주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적 원인] 3부에서는 그러므로 오코너의 "생태학 및 관련 운동내의 급진적 경향(에 대한 평가)의 탐색"한 내용을 열거한다. 그가 고려한 운동 중에는 남반구의 비정부기구(NGOs) 및 "가난한 자들의 환경주의" 그리고 북반구의 환경정의와 유독성폐기물운동이 있다. 오코너는 이 운동들이 생태적,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전통적인 조직노동자의 "빵과 버터"의 문제와 엮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는지 탐색한다. 그러한 연합을 가능케 하는 기초는 사회적으로 유용하지만 비상품인 것들을 생산하는 노동이 포함된 "사회적 노동의 통일"의 기저에 놓여있다. 이러한 통일은 여러 "후기-맑스주의" 좌파들이 간과한 것으로 이들은 사회운동과 생태운동 내부에 존재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차이와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후기-맑스주의자들은 또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문제 대부분이 봉급생활자나 잘사는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자, 특히 억압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더 큰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오코너는 "노동운동과 신사회운동의 협력은 가능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북반구의 선진국과 저발전 남반구의 노동-공동체의 조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의 생태주의(ecologism)'와 '생존의 생태주의'...는 여러 방식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교차한다". 북반구의 투쟁이 (지속가능성, 환경정의, 노동적 관심사의 연합을 예고하듯) 자연을 인간생산과 재생산의 기본조건으로 점점 더 인정하고 있고, (비록 당장의 생존이라는 쟁점에 더 강한 지향을 보이긴 하지만) 남반구 내에서도 산업화와 잉여노동 같은 산업예비군의 확산이 질적 측면에서 교차하는 비슷한 관심사를 떠오르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적, 사회적 조건의 자본화에 대한 대중적이고 전지구적인 적-녹 대안의 잠재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현존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의 환경적 충격과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나 오코너의 적녹연합은 자본의 노동착취와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파괴적인 이용 사이에 그 자신이 그려넣은 인위적인 선에 의해 방해받는다. 이 문제는 오코너가 자본주의가 현재 두가지 기본모순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논의를 진행하면서 분명해진다. 이 두가지 모순은 "오늘날 자본축적을 위한 일관된 틀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서 국가와 자본"이 "구별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일차모순은 노동과착취로 인한 과생산위기의 위험과 관련된다. "자본이 [과도하게] 노동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때 임금기반 수요는 생산된 상품전체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자본이 이 상품에 담긴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과축적 경향은 자본이 증가하는 "실현위기의 위험"에 대응하면서 생겨나는 "거대신용구조, 공격적 마케팅, 끊임없는 상품혁신, 경쟁심화"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이차모순은 자본과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코너는 이차모순이 생산비용을 증가시켜 자본의 이윤율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한다. 개별기업이 "자신의 물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점차 저하시키거나 유지하지 않는 전략으로 이윤율을 보호하거나 복원하려 할" 때 "다른 자본(궁극적으로는 자본 일반)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되고 그럼으로써 이윤의 생산을 저하시킨다". 이윤은 "사회운동이 자본에게"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보다 잘 유지하고 복원하라고 요구할" 때 보다 더 감소한다. 여기에는 "보건의료, 토양황폐화 저지, 자본비용을 증가시키거나 자본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도시 주민 보호"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 체계는 케인즈주의 수요측면정책이나 신자유주의 공급 또는 비용측면 정책 모두 자본축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정도까지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문제는 오코너가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데 있다. 심지어 그는 "경제적 용어로 해석되든, 사회정치적 용어로 해석되든 상관없이 일차모순은...생산조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일차모순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산조건과 분리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맑스에게서 배운 바로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착취율의 증가는 (특히 노동력 자체의 가치를 감소시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경우) 모두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전유에 근거한 것인 동시에 이들 조건을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그리고 시장에서 거래가능한 사용가치로 잉여노동을 객관화하는 수단으로 전화시키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코너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 상황은 직접생산자가 "자신의 토지 및 여타 생산수단으로부터...자유로운 상태의 본래적 축적과정(process of original accumulation)"을 가정한다.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건 사이의 사회적 분리는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 생산에서의 자연과 노동을 착취적이고 파괴적으로 조합하는 자본, 과도축적 문제의 핵심이다. 오코너의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은 자본 축적에 대한 "내부적" 장벽과 "외부적" 장벽을 인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선 사이의 사회적 분리를 부지불식간에 재생산하며 자신이 제기한 자본의 위기와 사회운동에 대한 적녹연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차모순"의 경우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자본이 이용함에 있어 발생하는 "외부 비용"의 증가가 자본 일반의 이윤율 문제로 해석될 필요가 있는 지 분명하지 않다. 자본축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 착취가능한 노동력과 물적 조건이며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로의 객관화이다. 생산조건, 노동력, 생산된 사용가치의 질적 본질은 역사적으로 조건적인 것이다.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 (수감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감옥, 경찰과 보안서비스는 개별 기업에서 볼 때는 사적 비용 그리고/또는 세금으로 보인다고 해도 모두 큰 이윤을 남기는 부문이다. 사실은 자본축적의 "외부 비용"이 개별 기업 뿐 아니라 자본 일반--이러한 기회를 조율하고 분배하는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있건 없건--의 잉여가치생산과 실현을 위해 이익이 되는 기회를 창조한다. 한편으로 자본은 과축적 문제에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사용가치(플라스틱포장, 패스트푸드, 자동차, 살충제)를 양산하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함으로써 대응한다. 다른한편 자본축적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외부 비용"으로 인해 필요하거나 유용하게 된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식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동차/석유/부동산 복합체 전체가 하나의 예로 이들은 부정적 외부화를 발생시키는데 기여하는만큼 자본주의의 "부정적 외부화"를 이용한다; 동일한 내용이 의료산업이나 법률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1990년도에 연간 2천억에서 3천억달러의 매출을 올린(전지구의 대기산업 전체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산업은 외부화-기반 활동의 신전에 가장 최근 등록한 일원일 뿐이다.주2)
그러한 파괴적 그리고/또는 외부화-기반 활동의 이윤은 자본주의의 "일차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사기업이 자연스럽게 가장 이윤이 남는 방식의 오염통제와 쓰레기처리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한 잠재적 잉여가치의 과축적 문제는 그에 상응하여 악화될 것이며--이러한 활동을 소수의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남기는 기업이 점차로 독점하게 되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환경산업은 다른 독점자본부문과 다르지 않다. 환경산업이 그 자체로 과축적 문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재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동자와 공동체가 직면한(vis-a-vis) 생산조건의 소외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은 모두 이러한 보다 기본적인 모순의 징후들(symptoms)에 불과하다.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저변에 존재하는 통일성을 일단 인식하고 나면 우리는 녹색 자본주의자들의 개혁주의적 전망의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환경산업은 과축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자본주의의 환경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 오염통제, 쓰레기처리, 재활용은 이윤을 볼 수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성장의 경쟁적인 특징과 질적 수준에 상관 없이 자연적 조건이 가지는 제한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인정을 꺼린다.
이러한 사실처럼 환경산업 자체의 경쟁적 "성공"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생태적 지속불가능성의 성장에 의존하면서 그 성장에 기여한다. "환경유지"는 자체로 "성장산업"이라는 사실은 자본축적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지속가능한 인간발전과 사회발전의 과정을 위해 필요한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드러내준다. 거칠게 말하면 자본은 원칙적으로 어떤 자연 조건에서도 축적을 지속할 수 있다. 아무리 저하되더라도 가능하며 인간이라는 종이 절멸하지 않는 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축적의 환경적 위기와 자연적, 사회적 종인 인간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일반적인 저하라는 의미의 환경위기를 구분해 내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해도 두 번째 제시된 위기형태가 곧 앞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발전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체계라는 말이다.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미치는 자본의 파괴적 효과가 "이윤과 축적을 위협할 뿐 아니라 생활수단과 생활 자체로서의 사회적, 자연적 환경의 생존능력도 위협한다"고 기록한다. 또한 생태운동과 사회운동을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 생산조건이 사실상 존재해야 하는 가를 결정하는" 투쟁으로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조건을 자본의 노동착취에 "외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이분법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조건과 인간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의 구분을 완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경제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오코너의 건전한 바램의 이율배반인(ironic)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화의 효과가 노동 투쟁과 생태적 투쟁의 인위적 구분--생태적 투쟁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비-계급"투쟁으로 규정된다--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은 그러므로 차이와 특수성을 강조하는 "후기-맑스주의" 정치학에 대한 오코너의 비판을 약화시킨다.
반자본주의 생태적 전망이 자연조건이 자본축적에 "외부적"이라는 틀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교환가치로서의 축적을 위해서 자본은 사회적 노동과 자연을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에 결합시킨 형태를 채택해야만 한다. 그 결과 현재의 "자연" 조건은 대체로 자연을 자본주의적으로 전유한 결과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적-녹 운동이라도 반드시 노동과 자연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서 발생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에 그리고 착취에서 초래된 투쟁에 기반해야만 한다. 자연조건의 파괴 및 저해함과 동시에 사회적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보다 보편적이며 덜 제한적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끌어낼 잠재력을 창출해낸다. 이렇게 볼 때 현대생태사상가들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주3)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오직 노동대중을 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분리시키는 자본주의를 민주적 노동자공동체가 대체하여 이러한 조건들의 사회적 활용을 통제하는 체계로 전환화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의 전통적 과정에 우리가 개입해 "규제"하는 것은...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현재까지 존재해왔던 생산양식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필요로하며 동시에 우리의 현존 사회질서 전체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주4)
엥겔스의 관찰은 자리잡고 앉아 "혁명을 기다리자"는 처방은 아니다. 생산에 대한 대중 통제를 보다 높이려고 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공동체의 투쟁은 단순한 자본축적의 도구로서 노동과 자연을 취급하는 데 명시적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투쟁이 생산조건의 탈소외를 향해 나갈 수 있으려면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하며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인간, 사회 자연의 공진화를 창조해야 한다. [자연적 원인]은 위에서 말한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운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풍요로운 자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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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 Burkett, "Fusing Red and Green", Monthly Review, vol. 50, no. 9, February 1999.

  http://www.monthlyreview.org/299burk.htm
  BOOK REVIEW
  James O'Connor, Natural Causes: Essays in Ecological Marxism(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19.95, paper.



원주

 

1) John Bellamy Fodster, "Marx and the Environment," Monthly Review, vol. 47, no. 3, July/August 1995, pp. 108-123; Paul Burkett, "On Some Common Misconceptions About Nature and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7, no. 3, Fall 1996, pp. 332-359.

 

2) 더 세부적인 내용을 찾아보려면 Joshua Karliner, "The Environment Industry: Profiting from Pollution," The Ecologist, vol. 24, no. 2, March/April 1994, pp. 59-63, and Claudia H. Deutsch, "Scrubbing the Air, Buffing the Cleaners: Belated E.P.A. War on Pollutants May Infuse Value into Companies," New York Times, October 17, 1997, pp. C1; also Martin Gellen, "The Making of a Pollution-Industrial Complex," in Eco-Catastrophe, Editors of Ramparts, ed. (New York: Harper & Row, 1970), pp. 73-83.

 

3) Howard L. Parsons, Marx and Engels on Ecology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77), pp. 88-89; Victor Wallis, "Socialism, Ecology, and Democracy," in Socialism: Crisis and Renewal, C. Polychroniu, editor (Westport, CT: Praeger, 1993), pp. 147-148.

 

4) Frederick Engels, Dialectics of Natur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4), pp. 183-184. [국역: 황태호 옮김, [자연의 변증법], 전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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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Woman, Labor, Capital: living the deepest contradiction

자연, 여성, 노동, 자본: 깊은 모순을 안고 살기*

 

아리엘 살레**(Ariel Salleh)

 

1. 여성의 저항: 체화된 유물론(An Embodied Materialism)

 

1960년대의 사회운동은 미국의 거대핵발전기업에 대한 여성의 법적인 도전부터 인도 북부지방에서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를 껴안고 저항한 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행동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성의 일상적인 노동으로부터 도출된 이해에 물질적으로 근거한 새로운 정치를 알렸다. 다양한 행동의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행동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투쟁 및 생활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투쟁과 일정하게 연관된다는 공동의 인식을 반영했다. 합성어인 "에코-페미니즘"은--1970년대에 여러 대륙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이 양자의 정치적 관심사를 포괄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에코페미니즘은 초국적으로 구조화된 자본주의적 억압에 명시적으로 도전해왔다. 즉, 소위 선진사회가 탐욕스럽게 "발전되지 않은 타국"의 자원과 노동력에 의존하는 전지구적 경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장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경험 속에서 생태정치적 비판을 위한 "근거들"과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실천 "모델들"을 찾아봄으로써 에코페미니즘의 자본주의 진단을 제시한다. 2장에서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과 "여성"이 어떻게 저평가되며, 경제적 지구화가 양자에 대한 착취를 어떻게 심화시키는지 논의한다. 자연-여성-노동 연계에 관해서는 3장과 4장에서 보다 자세히 검토할 것인데 자본주의의 기본모순(a primary contradiction of capitalism)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5장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저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역사적 동인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의 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여성이 접하는 특유의 구조적 쟁점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 "성장"은 북반구의 일부 남성과 여성에게 물질적 이득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이지만 남반구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여성에게는 반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노동의 통합(annexation)은 컴퓨터, 노동력절감도구, 신재생산기술로 탄생한 산업화와 소비주의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는동안 "개발도상"국에서는 상품시장을 위해 농지를 몰수하는 기술관료적 "녹색혁명"이 일어났고, 이제는 기업에 의한 유전자 특허가 생존을 위한 여성노동의 수단을 빼앗고 있다.
자본축적과 초국적활동의 헤게모니 확장이 지속될수록 자연과 여성의 종속은 심화된다. 자본주의가 그러한 억압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말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남성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현존이론에서 전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무언가를 여성의 환경적 반응에 특유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함으로써 가시화하려는 것이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 여성과 "자본" 및 "노동"의 관계는 최소한 네가지 정도의 이유로 남성과는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주1)
첫 번째 차이는 출산과 젖먹이는 일 같은 힘들면서도 예민한 노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여성의 신체기관이 매개하는 경험과 관련된다. 두 번째 차이는 역사적으로 여성의 일로 배정된, 남성과 자연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돌봄과 유지라는 잔일 때문에 생긴다. 세 번째 차이는 농부, 직조공, 약초재배자, 옹기장이 등의 역할을 맡아 상품을 만들어내는 여성의 수작업과 관련된다. 네 번째 차이는 시, 그림, 철학, 모든 담화 등에서 나타나는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의 창조와 관련된다. 이런식으로 노동을 배치함으로써 여성은 구조적으로, 종잡을 수 없게 생활지원적 활동에 관련되며 이러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성에 따른 고유한 지식(gender-specific knowleges)을 발전시킨다. 그 결과 여러 문화권의 여성들은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남성적 접근방식--녹색으로 포장된 기업, 생태윤리, 사회주의에는 없는 통찰을 문화에 관계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에코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몇몇 비판가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같은 단순한 이분법을 전제하지 않는 견해는 실제로 주어진 이분법의 변증법적 해체에 의존한다. 변증법적 해체는 여성의 경제적 주변화 및 고통스러운 모순의 인식 및 자연-여성-노동 연계 속에 주어진 그들의 자리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비주체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정치적 참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변의 목소리를 전략적으로 특권화하는 것은 초역사적 또는 "본질주의적"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정당화된다. 체화된 유물론으로 정식화된 에코페미니즘 정치학은 억압의 최소공분모를 획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계급과 자본에 저항하는 사회운동 간의 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된다.주2)

2. 가치

 

              나의 어머니는 흑인여성은 백인남성의 노새이고 백인여성은 백인남성의 개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주3)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를 가부장적 관계의 근대적 형태로 받아들인다. 즉, 대다수의 여성이 자본이건 노동이건 남성들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현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여성만이 자신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여성은 "노동만" 소유할 뿐이다. 심지어 UN의 통계조차도 여성의 주변화라는 전지구적인 현상을 숨기지 못한다. 여성소유 자산은 전체 자산의 1% 미만이고 전세계 노동의 3분의 2에 대해 지불되는 임금은 전체의 5% 뿐이다.주4) 사실 약육강식의 체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개념적으로는 "자연자원"과 "생산조건" 사이의 어디쯤인 것이다.주5) 어짜피 여성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 정치제도에서 역사적으로 외부화되어 온 것처럼 경제에서도 "외부인"으로 취급되었다.주6)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면에 대해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셀마 제임스가 Selma James [지구 전체의 부엌] The Global Kitchen에서 지적한 고전적 언급을 살펴보자.

 

               1979년 미국성인여성의 51%, 중국과 프랑스의 48%만이 "[임]주1)노동자"였다.

               1975년 노동인구로 계산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여성은 전체 여성 중 14%에

               불과했고 영국에서는 40%만이 임노동인구이다.주7)

 

뉴질랜드 사람인 매릴린 워링은 Marilyn Waring [무를 위한 계산] Counting for Nothing의 지침을 갱신했다.주8) 북반구에서 성장하는 서비스 부문과 남반구의 자유무역지대의 급증은 통계에 얼마간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여성착취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지구화 및 전지구화에 동반해 일어난 작업공간 재구조화를 통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여성은 불안정하고 퇴직수당도 없으며 더 나은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시간제일자리, 계약직, 계절적 일자리를 얻었다. 모성은 사라지고 작업장기반 아동보호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이렇게 강화된 성별에 따른 노동분할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너무나도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성혁명"(sexual revolution)이 일어난지 20년이 지나 적극적 고용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국가에서 여성은 남성이 받는 임금의 3분의 2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이 전형적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여성노동이 국민총생산(GNP) 계산에서 거의 배제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진"세계의 가정주부는 대부분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당 노동시간인 40시간의 거의 두배인 일주일에 70시간의 부불노동을 한다. 부양기술을 이용해 그녀는 요리, 바느질, 청소, 주거유지, 정원관리 등등의 활동을 통해 "사용가치"를 창출한다. 남반구의 비도시거주여성은 그들의 공동체를 위한 식량 대부분을 재배한다. 그 외에도 여성에게는 끝없는 무형의 노동이 의무로 부과된다: 아이돌보기, 노인모시기, 병약자 간호, 생활 속에서 남성에게 자아회복과 성적만족 제공, 그리고 그 결과인 아이낳기의 고역. 영국의 메리 멜러는 Mary Mellor 이 모든 것을 "생물학적 시간"에 놓인 것으로 묘사한다.주9) 더불어 많은 중간계급 여성들은 연속적인 많은 자원활동을 떠맡는다: 예를들면 학부모회(PTA)주2)나 국제 앰네스티 또는 주거개선캠페인 등이다. 이민여성이나 난민여성들은 농장이나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하루종일 일한 뒤에도 가족이나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새로운 부담을 흡수하기 위해 추가적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을 지치게 하는 부불서비스는--"애정노동"-- 원칙적으로는 지불받을 수 있다: 매춘, 패스트푸드점 계산원, 세탁전문점이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편의만을 위하는 방식으로 경제체계를 조직할 본질적인 필요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셀마 제임스의 말처럼

 

               집을 청소하는 여성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정을 폭격하는

               남성군인은 일하는 것이다. 나아가...같은 여성의 노동이라도 남편에게

               고용된 경우에는 GNP에 산정되지도 않는다.주10)

 

자본주의적 경제편제에서 가부장주의는 노인을 모시는 여성의 가내노동이 연금이나 수당지원의 형태로 보상받는 경우조차도 이러한 지불이 국가의 "선물", 자선 또는 복지로 인식하지, "노동"과 자본 간의 계약처럼 자유시민 간에 거래되는 "경제적 교환"으로는 절대 인식하지 않는다. 경제기준지표를 이용하면 누구나 자본주의 경제에 기여하는 여성의 중요성을 쉽게 보여줄 수 있다. 제임스, 워링 및 핀란드의 에코페미스트인 히카 피에틸레 등 Hikka Pietila 여러 사람들은 가내노동을 표준직업분류에 넣고 지불임금으로 처리해서 모두 더한다면 가사노동이 GNP의 3분의 1내지 절반에 이른다는 것을 입증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청은 가사노동이 GNP의 52∼62%에 달한다고 평가했다.주11) 그러나 만일 가내노동이 이런식으로 무시당하는 처지라면 "여성노동"을 "공식경제"에 자리잡게 만든다면--동반되는 대량의 소득재분배나 이로 발생하는 경제적 기회구조--여성 자신이 사회로부터 보다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성의 억압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의문을 갖는다. 어떤 경우라도 그러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계와 그 축소판인 가부장적 가정이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제도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모든 일처럼 축적가능하며 여성이 생산하는 "잉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작동에 매우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최소한 여성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장기간의 [의견]교환이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진행되었지만주12) 여성의 종속을 둘러싼 정확한 학술적 정식화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민족성, 인종, 북-남의 축과 여성착취가 겹치는 현상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제 전체 논쟁을 재편하고 있다.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기본모순으로 도입함으로써 에코페미니즘은 착취적이고 성별에 근거한 노동분할을 확인함과 동시에 모든 억압에 대한 분석을 생태문제로까지 확대하게 된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기존 체계를 인정하면서 남성과의 평등만을 요구하지만 에코페미니스트는 성정의(gender justice)와 동일하게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사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 양자가 근본적으로 상호연계된 것으로 이해한다. 일례로 노르웨이 출신의 베리트 아스는 Berit As 남성중심적(male-oriented) 경제에서의 경제성장은 여성의 삶에 새로운 짐을 부과할 뿐이라고 논한다.주13) 벌이를 하는 여성을 지탱해줄 돈은 무기, 임원을 위한 여섯자리 숫자의 임금, 투기의 종이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자본주의적 자부장제 하에서는 정부, 경영, 조합, 학교, 국제기구의 결정권을 남성들이 쥐고는 자신들에게 편리한 우선권을 형성한다. 기업의 위계질서에서 소수의 여성임원이 존재하지만 남성의 우선권이 도전받지 않는 한 그 효과는 미미한 것이다. 사람들은 여성이 일국정부를 위해 경제적 조언을 하거나 OECD가 촉진하는 GATT로 착취가 심화되므로 부주의한 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자연환경 역시 남성의 우선권으로 인해 외부화되고 파괴되고 있다.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여성착취와 자연저하는 모든 "발전" 국면에서 나타난다. 에티오피아는 여성의 손에서 토지를 빼앗아 "토지에서 이익을 남기려는" 남성의 손에 넘겨준 이래 사막화와 기아로 고통받았다. 미국에서는 전자회사에 다니는 여성들의 피부, 폐, 신경체계가 독성오염물질에 노출되었고 치명적인 손상으로 고통받았다. 스리랑카는 트랙터를 수입함으로써 토양과 수질이 저하되었고 여성들은 전과 같은 임금으로 두배나 빠른 속도로 면화를 주워야만 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전 유럽의 어머니들은 방사능 노출로 인한 공동체의 건강회복을 비용으로 지불했다. 남성이 계획하고 남성중심적인 생명거래(skin-trade)인 섹스관광은 생태적 재난에 해당하는 남성주의를 상징하는 무기, 수력발전을 위한 댐, 석유 등에 대한 돌진으로 축적된 채무에 대한 남반구의 "외국환" 균형을 유지시켜준다. 살아있는 것들은 스스로 생산하지 않은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위한 희생물이다.주14)
 북반구와 남반구의 여성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며, 소위 경제학자들의 "평등한 입장원칙(level playing field)"이 북반구와 남반구를 가로질러 확장될수록 그 공통점은 증가한다. 성차별 규칙은 이문화(異文化) 간에도 적용되는데 여성은 이를 "최대한의 책임과 최소한의 권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핵심 산업세력--특히 미국, 독일, 일본--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은 지구상에 신식민지주의 시대를 여는 것이며 또한 "발전"은 여성노동의 포섭을 심화시킨다. 반다나 시바는 Vandana Shiva 이러한 추세를 "근대화" 프로젝트와 구조적 적응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과 자연에 "경제적" 성장의 비용을 떠넘기려는 북반구 조언자들과 지역의 엘리트 남성 사이에 이루어진 명백한 계약의 결과로 묘사한다.주15) 마을의 소녀들은 실리콘 노예가 되었고 환금작물재배와 더불어 전통적 토지이용권이 소멸됨으로써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생산수단에 대한 자율권과 경제적 통제권을 빼앗겼다.
인도에서는 문화적으로 지속가능한 여성-자연의 신진대사가 자연의 순환에 부적절한 일련의 환원주의적 "논리"를 적용한 수입된 과학기술로 인해 손상되었다. 시바는 다음과 같이 쓴다.

 

              숲과 강, 들과 숲, 동물과 작물은 분리되었다. 각각은 분리된 채 발전하였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섬세한 균형은...파괴되었다. 극적인 파괴와 파멸이

              가시화된 것을 두고 "진보"라고 불렀다.주16)

 

수천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원주민 여성의 전문성--종자, 나무뿌리의 물보유특성, 가축떼에서 숲으로의 비옥함 이전, 집에서 제조한 약, 피임법 등에 관한 지식--은 사라졌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지 못했다. 사회와 문화는 분리되어 농촌남성은 임금의 약속을 믿고 도시의 불빛을 향해 가족을 떠나갔다. 그러는동안 매판계급남성과 그들의 세계은행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기술을 보유한 공학기술자, 회계사, 화학자 등의 필요"인력"의 연간궤적을 공표하는 일을 맡았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과 여성의 동일시가 남반구 여성과 마찬가지로 북반구의 여성노동을 정의하는 가에 대해 오랜 논쟁을 해왔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하에서 주부가 수행하는 과업의 복잡성을 생각해보자: 성적만족의 제공, 아이낳기 및 젖먹이 돌보기, 어린아이를 돌보고 신체적으로 보호하며 사회화시키기, 식량을 재배하고 요리하기, 주거유지, 청소, 세탁 및 옷수선, 최근 재활용이 추가된 쓰레기 치우기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을 남성을 대리해 "자연을 매개하는" 노동이라 일컫는데 "여성의 평등"이 법적으로 인식되는 국가에서도 이 기능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정부, 자본, 노동 간의 잠재적인 "조화"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개별 남성에게 자신의 "여성(the second sex)"을 보장해 주려는 것이다.

 

3. 모순

 

남성과 자연의 중간에 자리한 전통적인 여성의 위치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며 어떤 모순보다도 깊고 본질적인 모순일 수 있다. 인류학 용어로--남성중심의 이해관계로 모양새를 갖춘--여성의 신체는 우선 "공식적인 노동"의 물질적 기원인 출산의 노동을 하는 기관인 자궁을 가진 "자연자원"인 것처럼 취급된다. 어머니 자연이라는 유럽인들의 유서깊은 상상과 프라크리티(Pakriti)주3)라는 고대 인도의 개념은 확실히 은유 이상의 무엇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과학의 헤게모니 하에서 이러한 여성의 능력에 대한 예찬은 기술의 도움에 힘입은 남성의 생산성 예찬에 견주어 감소해버린다.
유럽신화 속에 나타난 부, 자연, 노동의 창조설화는 중세의 종교적 사고가 세속적인 자연관으로 바뀌면서 17세기에 이르면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모습을 띤다. 토지는 부의 어머니로 노동은 부의 아버지로 인식된다.주17) 세계 전체는 신의 섭리에 해당하는 문제로 남성 일반에게 이용하도록 주어진 거대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나 부란 남성노동의 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존 로크의 John Locke 말대로 모든 남성은 "자신의 신체소유"하기에 "그의 육체노동과 손노동이 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신중한 의미로 자연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어머니"라면 역으로 개인은 노동을 통해 자연의 열매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그의 사적 권리가 된다".주18) 노동이 결부되는 것은 남성의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의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을 사적 영역에서 제공된 개인적인 보호의 대가로 남성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의 신체는 토지를 임대하듯이 임대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자본에 의해 무료로 "자원화되어" 착취가능한 노동을 모든 새로운 세대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여성도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에, 대상화된 재생산 모형으로서의 "여성"과 스스로의 권리를 가진 역사적 주체로서의 여성들 사이에는 반작용이 형성된다. 현재 이 갈등은 낙태 같은 재생산권리의 형태로 그리고 "가치-부가적" 세계에서 돈을 받는 대리모나 아이기르는 일에 대한 "산업적 계약" 가능성의 형태로 표현된다. "자연자원"으로서의 여성과 "불완전한 노동(not quite labor)"으로서의 여성 사이에 그려지는 선은 무한히 유연하다.
게다가 "자연자원"으로서 돌봄의 노동에 손과 두뇌를 이용하는 여성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 인간의 생산성을 창조하는 데 필수적인 집(oikos)이나 주거라는 의미의 "생존조건"으로 포섭된다. 여성의 신체는 당연하게도 남성이 노동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상의 기반을 제공하도록 일하는 남성에 의해 이용된다. 남성이 그들의 임금수준보다는 아내의 상실로 인해 더 불편을 겪는다는 사실은 "생산조건"으로서의 아내의 성적, 심리적, 경제적 가치를 보여준다. 동시에 여성이 "불완전한 노동"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체로의 노동(labor as such)"과 모순을 일으키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임노동자로서 일할 때조차도 그렇다. 여성과 "공식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갈등은 공식노동이 남성적 노동조합운동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가정 내에서, 작업장에서 폭발한다.
여성은 두가지 형태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이중으로 대상화된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이용당하고 버려질 준비가 된 존재이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의 자연처럼 여성들도 발언할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즉, 나오미 셰만이 Naomi Scheman 본대로 남성들은 자신들을 자기규정적 존재로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 친숙한 사회세계를 결합시켜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주19) 소위 노동분업에서 진정한 "대상"인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교환되어왔는데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포주에서 구매자에게로, 이 기업가에게서 저 기업가에게로 건네졌다. 이러한 여성 자원의 교환은 가장 이른 형태의 "상품"거래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낳은 아이들은 남성의 이름을 물려받고, 남성에 의해 전유된다. 나아가 여성이 가부장적 가족에서 자신들의 출산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에도 남성은 새로운 재생산 기술로 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여성으로부터 다시 빼앗았다. 이 최전선에서의 가장 최근의 움직임은 기업의 DNA 특허권 문제이다. 생명 자체의 기본 구조물이 "재산권"으로 공식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유전되는 만성질환을 경감시키려는 목적으로 인간 재생산에 "유전적" 개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 및 식물 간에 유전적 조합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성 또한 가내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서의 사용을 위해, 소작하는 농장에서의 교환을 위해, 또는 삯일이나 공장의 상품으로 "물건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 역시 보통은 남성이--남편, 중간상인, 초국적 기업--가져가 버린다. 독일 에코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는 Maria Mies 자신의 책 [가부장제와 축적]에서 Patriarchy and Accumulation 이와 같은 탈소유의 과정을 기록하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남성의 상호작용의 모든 국면에 만연한 것임을 밝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남성이 자본 및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위해 일제히 대리인의 역할을 맡아 여성을 협박하여 고분고분하게 한다는 것이다.주20)
계급이나 인종차이에 따른 남성에 의한 남성억압 역시 기록된 바 있지만, 자연을 채취하고 여성의 복잡한 생산적 능력을 추출하는 일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가치를 도둑질해가던 시절 이전부터 이루어져왔다. 나아가 자연착취와 성착취는 임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남용하부에서 존속해왔으며 여성해방이라는 근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은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심화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론만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주면서 상이한 형태의 사회적 착취를 뒷받침했다.주21)
에코페미니즘의 분석은 가부장적 가정과 공공노동을 통한 여성의 인클로저 및 사유화가--여성의 시간, 에너지, 힘의 포섭--자본에 의한 계급적 노동착취에 필적하며 동시에 노동착취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매개자"라는 여성의 위상은 자본가와 노동하는 남성--강자와 약자--사이에 발생하는 거래를 위한 선행조건을 구성한다. 경제에 관한 남성중심적 담론에서 자연의 물질적 기여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물질적 기여 역시 대부분 언급되지 않는 채로 남겨진다.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거나 집안단장의 장막 뒤로 숨겨진다. 출산노동이건 유지노동이건 여성이 "무상"으로 하는 일은 생산에 반대되는 "재생산"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생산은 자체로 일차적인 "역사적 활동"을 의미하는 데 비해 여기서 재생산하다 라는 단어는 이차적 혹은 하찮은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생산이 "일차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로 "도리(reason)"라 불리는 상징적인 책략을 통해 여성의 노동은 여성들이 창조하는 "잉여"에 의존하는 축적체계 속에서 착취당한다. 다음에 나오는 폴 엘뤼아르의 Paul Eluard 시는 순결하고 그럴싸한 가부장적 자연주의와 가부장적 자연주의의 모습과 그 여성결핍을 보여준다. 20세기 후반 "건전한 정의(Sound Justice)"란 반어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따스한 남성의 법칙이니
                 그들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석탄으로 불을 지피고
                 키스를 통해 인간을 만든다
                 ...
                 낡고 새로운 법칙이여
                 항상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들어가니
                 아이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최상의 도리에 이르네.주22)

 

4. 여성/자연의 파괴

 

그러한 "도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에코페미니즘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존재론 분석이 유용하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주의는 일상적 담화만큼이나 철학에 깊이 스며있는 고전적 이원론의 "논리"에 매여있다. 이 유서깊은 [이원론] 쌍의 상징성은 성의 형태학(morphology)을 반복하며 여성의 인간성을 제거하며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 상위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광범위한 가정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 "역사"와 "자연"을 인위적으로 구분함
■ 남성은 적극적인 역사의 "주체"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대상"이라는 가정
■ 역사적 활동은 반드시 "진보적"이며 자연에 기반한 활동은 반드시 "퇴행적"이라는 가정
■ 남성성은 "생산"을 통해 역사적 질서에 연합되며 여성성은 "재-생산"을 통해 자연의 질서에 연합됨
■ 생산적 활동은 "가치롭고" 재생산은 "무가치함"주23)

 

시간은 모든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에, 자연이 역사에 선행한다는 말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편제에는 이 구성된 범주의 이해를 위한 근거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인식론적 용어로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사고는 그저 희미한 대기 위를 부유할 뿐이다. "자연질서"는 역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즉, 사회적으로 창조된 언어와 실천이라는 매체 안에 살아있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라는 왜곡된 힘을 통해 이 역사적 차원을 희석시켜 유지한다--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이런식으로 왜곡된 현실을 믿게 되는데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종교, 윤리학, 경제학, 심지어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본질주의적 이원론에 매여있다. 몇몇 좌파비판사상, 심지어 페미니즘에서도 일부 영향을 받아 주어진 가정쌍들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본질주의적 사고범주를 조심스럽게 제거할 필요가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은 신체기관의 차이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존재적으로 "자연"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일정하게 자연에 보다 "근접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적인 신체와 물적조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맑스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한다. 시각기관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특유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처럼 능력의 차이를 보이는 남성과 여성은 세계의 존재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또 그 활동을 통한 경험의 결과 세계의 존재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식은 신체의 잠재력을 통해 구체화되는 종류의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잠재력의 순수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을 포함한 신체활동은 언어와 언어에 배태된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과 주거와의 민감한 상호교환은 "자연과 남성을 매개하라고" 강제적으로 할당받은 역할에 의해 이차적 의미로 구체화된다. 역사적으로 남성적 합리성의 논리에 사로잡힌 여성의 감성적 즐거움과 환경과의 창조적 상호관계는 인공적이고 의무적으로 자연과 연합하게 되면서 퇴행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그와 같은 노동 속에서 여성은 축적과정에서 고통받는 자연과 같은 엔트로피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신체의 실체(substance)를 포기한다. 그들의 노동가치가 국가회계에 포함되지 않음에도 그들의 가치하락은 등록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국가는 자원재활용과 독성물질에 오염된 토양의 회복 같은 환경적 노력과 마찬가지인 정화프로그램을--일례로 매맞는 여성의 도피처나 중독상담--과도하게 제공한다.
성별에 따라 광범위하게 구성되는 노동에서 남성이 담당하는 채굴이나 공학은 또한 환경과 직접적으로 거래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은 상징격자에서 긍정적인 차원으로 대표되며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생산적이고 진보적인 남성적 정체성을 보증한다. 대조적으로 여성의 노동을--"재-생산"--대표하는 언어는 여성을 자연과 마찬가지로 강등시킨다.
이러한 가짜존재론(pseudoontology)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제도 전체를 통해 정당화된다: 교회와 국가, 시장과 노동조합, 기술과 과학. 결과적으로 여성이 "노동"이라는 남성적 특권을 공유하기 위해 현상유지상태에 도전할 때 여성들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여성의 적절한 지위로 "원상복귀"시키려는 괴롭힘과 거친 대접 등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역동성은 필연적인데 자본주의 하에서 "공식노동"은 여성과 그 아래의 자연을 번갈아가며 착취를 심화시킬 때만이 진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노동자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조건"으로 혹사당하지만 그것이 여성착취의 특수성을 소홀히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에코페미니즘의 요구는 근본적인 모순인 자연-여성-노동 연계의 인식에 기반해 자본이 강등시킨 "생산조건"에 대한 비판을 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분석에서 여성이 학대받게 된 것은 복합적인 여성 노동이 역사적으로 특권을 가진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왔기 때문이다. 지오반나 리코베리는 Giovanna Ricoveri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직 "차이"에 개방적인 존재만이

 

              다양한 정치적 요소를 단순 결합시킨 것이거나 문화의 표준화에 관련되지 않으며

              어떤 집단의 자유에도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자유로운 실험적 경험을 보장하지만,

              일정하게 헤겔적 "지양"을 통해 녹색, 적색, 페미니즘, 등등의 강력한 요소를 

              담아내는,그러면서도 특정한 경향을 확립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학의 창조에

              연계된 동맹--또는 동맹의 결성--의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주24)

 

그러나 성차별에 대한 정치학의 무지의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여성은 어떤 새로운 전체화에 대한 미성숙한 접근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방패가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 이 시점에 에코페미니즘의 목소리에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 전략적인 이유의 일부이다.

 

5. 무정체성(nonidentity)과 변증법

 

여성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자, 에코페미니즘은 구조주의적 의미에서 과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운동 이면에서 개별 행위자를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감수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는데, 깊이있는 유물론적 분석이 유용하다. 이 분석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가부장적 이분법을 극복하며, 심미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지지하며 또한 이를 넘어 신체적 에너지와 담론 사이에 내재하는 변증법까지 고려하는 체화된 유물론이다.
이는 신체적 상태가 지식 및 주체성을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결국 개념을 전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인가 신체인가? 모순되는 의미에 의해 abrased되면서 이 주체성이란 활발한 영역이 되었다. 자신이 기호분석(semanalysis)주4)이라 칭한 방법으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Julia Kristeva 특별한 불안상태를 스트레스 하에서 신체가 향하며, 신체의 관념들이 붕괴하고 재결합하는 곳에 위치시킨다. 이 불안모형--혹은 "코라(chora)주5)"--는 역사의식의 핵심이며 기표(signif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연결을 유지하는 정신집중(cathexes)의 다중화를 통해 계속 재생된다.주25)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모순적이고 생존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산관계 내/외부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매일 그들을 "자연에 더 가깝게"하는 모순으로 인해 부서진다. 여성도 인간이지만 여전히 사회체계에 의해 단순한 재생산의 장소나 다른 "자연자원"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고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 취급을 받는다. "부족한 노동"인 그들은 노동력으로서 금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교의적 이원론을 내포한 남성적 담론을 따라하여 자신들의 사소한 역할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여성이 이 이중의 결박을 벗고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사회변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나는 위기와 무정체성의 순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상황, 주어진 상황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잠재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감지하게 된다고 논의해왔다. 이러한 "부정변증법"은 본질과 외양 사이의 구분에 의존하는 데 명확한 인식--직접적 사실--이 일시적 표현에 불과하며 내재적인 실체 또는 본질의 왜곡이 규명되지 않을 경우 이용된다.주26)
성적학대는 가정폭력, 경제적·문화적 주변화--이러한 사안들은 여성의 정체성을 파괴하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착취하는 세계 내의 모순적 의미로 인해 유효성이 상실됨으로써 여성적 대상/주체는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와 여성들을 결합시켜주는 신체적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역사적으로 그녀에게 각인된 "타자성"에서 자유롭게 되어 형성 중인 주체(subject-in-process)로 서게 되면, 여성은 총체성과의 대안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말로 부연하면: 유약한 의식의 평형이 모순의 다양한 이질성에 의해 파괴될 때 신체는 차이, 비중(heavy), 방랑, 분리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단일성이라는 의미의 절멸 및 변질의 순간, 원초적인 괴로움과 혼란의 순간은 생산적 단일성을 포기할 수 있고, 형성 중인 적극적 의미(active signification-in-process)로서의 주체를 재확인한다. 여성이 그러한 내재적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에코페미니즘의 인식론이 근거하는 개인적 변화의 종류이다.
언제나 환경적 충격의 최전선에서 손상된 자연처럼 여성의 탈/정주는 결국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당연시한 인식을 마치 현상학적인 레이저인 양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에너지와 다중 의미를 지닌 자유로운 코라는 남성주의적 삭제를 다룰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바로 이 무정체성으로부터 에코페미니즘은 정체상태의 전체화에 맞서기 위해 일면적 질서 안에 문제되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과감하게 재구조화한다.주27) 몇몇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와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보여지는 변증법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아직 재건되지 못한 여성/자연 모순을 지적하며 에코페미니즘 사상을 "본질주의적"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자본의 과학적 헤게모니는 기표가 경쟁하는 두 의미 사이에 놓여 있을 때의 긴장의 순간인 반어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르주아 사실주의의 힘은 "본질"이라는 용어 자체를 실증주의에 포섭시켜 부정하며 폭로적인 기능을 상실케하는 데 있다.
실증주의의 자기만족적 확실성과는 반대로 부정변증법은 힘과 역사적 의식 간에 역(逆)관계를 확신한다. 그러나 비판적 인식에 접근할 특권을 지닌 자주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은 아니며 또한 여성과 자연을 한데 묶어 자본가 남성이나 노동자 남성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위치시키는 물질적 모순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계급의식의 이론도 아니다. 에코페미니즘의 통찰은 보통 "인간"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이들이 떠맡고 있는 심원한 "결핍"에 의해 추동된다. 아도르노의 Adorno 말을 빌면 무정체성은 "지식을 움직이게 하는 육체의 불안"으로 변증법의 책무는 이 "바보들의 진리"가 스스로의 논리를 달성하도록 돕는 것이다.주28)

 

6. 정치학과 지속가능성

 

변증법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정치담론에 대안적인 존재론을 도입했다. 이 존재론은 여성과 자연을 부정하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두려움에 빠진 이원론을 무효화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다음사항을 제안한다.

 

■ 자연과 역사는 물질적 통일체이다.
■ 자연, 여성, 남성은 주체인 동시에 수동적 객체이다.
■ 여성-자연의 신진대사는 역사적 진보의 열쇠를 쥐고 있다.
■ 돌봄이 지배하는 재생산 노동은 지속가능성을 위해 가치로운 모델이다.

 

고통받음이라는 정치적 개념과 동기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여성이 경험하는 해체의 현상학의 결과는 물적 토대를 가진 "아래로부터의 인식론"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평등에 신경쓰는 에코페미니즘은 가장 의미심장한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적" 에코페미니즘이 이와 동일한 존재론적 가정을 반영한다고 기록할 수도 있다. 남성이 자연 자체를 자신의 욕구에 따른 종속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이 여성적 목소리는 생태학에 보다 시의적절하다는 점에서 기여한다. 지배당하고 권한을 부여받은(dominated and empowered) 여성은 "다른" 살아있는 것들을 위한 사례를 모아 접합시키기에 매우 적합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성이 일정하게 "자연에 근접"하다는--여성을 그 위치에 묶어놓으려는 의도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도 담긴 생각과 같은--단순한 본질주의적 방식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시적으로나마 여성이 탁월한 역사적 동인으로 위치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인정을 논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과제는 자연 안의 배태에 대한 남성의 인식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허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자연은 더 이상 고착되지 않으며, 인간과 분리된 외부의 대상으로서 상품화되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구체화되면 확정된 정체성과 지위를 가진 민주주의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르주아 권리"의 대상과 함께 시작되는 자본주의적 담론에 풍토병이 된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역시 역사적 동인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특징을 영속화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인간성", "계급", "여성", "자연" 같은 보편성, 본질성은 모순이 지배하는 가운데 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영속적인 추상일 뿐이다. 사회질서와의 격돌 속에서 영원히 자신을 형성하고 재구성하는 형성중인 의미로서의 종속이라는 에코페미니즘의 대안 개념은 부르주아 인식론의 한계를 무시하는 생명력 있고, 체화된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생략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관념에 대항해서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인식은 반사적으로 분산된다. 자본의 기본모순 주변을 배회하면서 여성활동가들은 (1) 정치적 목소리를 낼 여성의 권리를 구축하려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적 과업과 (2) 그들의 욕구와 남성적인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자연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동일한 유효성에 기초를 훼손하려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과업 그리고 (3) 여성--그리고 미래에는 남성 또한--이 자연과 더불어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에코페미니즘의 과업 사이에서 갈짓자로 흔들리는 변증법적 과정을 경험해야만 한다.주29)
단기간의 이익에 따라 추동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는 다르게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딛고 있는 여성의 삶은 보호와 돌봄의 맥락에 배태되어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초월하면서

 

                 만일 여성의 생생한 경험이...우리 문화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면 그 즉시

                 [급진적 남성이]주6) 추상적 윤리적 구성으로 정식화하려고 노력하는 대안적

                 의식을 위한 "살아있는" 사회적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주30)

 

자본과 그 모순 덕분에 지구의 다수를 이루는 보통 여성은 이미 재생산노동의 궤도 안에서 지속가능성의 모델을 만든다. 피에틸레가 묘사한 핀란드 주부들의 노동이나주31) 인도 여성농부들의 노동은 이를 실증한다. 여기에 적은 환경훼손과 비인간적인 화폐경제에 최소한도로 의존하면서 공동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제적인 방식이 존재한다. 자연의 "선물"을 존중하는 이들 여성 노동은 독립성, 존엄,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지속가능한 모델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바가 우리에게 환기시켜주고 있듯이

 

               문화적으로 인식되는 빈곤은 실제적인 물질적 빈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 스스로 부양하는 방식으로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생존경제는

               박탈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빈곤한 것이 아니다...영양학적 측면에서

               기장(millets)은 가공식품보다 월등하며 지방에서 나는 재료로 지어진 집은...

               지역의 기후에 보다 잘 적응한다.주32)

 

여성의 노동과는 다르게 시장경제는 일상적인 물질적 실체와 분리되어 있고 그 작동을 강제하는 것은 사람들의 욕구와는 무관하다; 그 외연적 "확장"궤도는 이미 우리가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파괴하고 있다. 전지구적 자본이 점점 정보의 흐름에 따른 초국적 기업에 의해 중심화될수록 국민국가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노동하는 남성은 기업판매와 하청(subconstracting)주7) 같은 활동으로 인해 파편화된 노동력에서 주변화될 것이다. "선진" 산업사회에서 주부로서의 여성의 상황은 자신의 생산수단이나 자신의 출산능력을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회귀할 것이다. 그들의 가내유지기능은 남성을 위해 "자연을 매개"하는 역할수행의 반복으로 이어지지만 이들 여성은 소비주의 속에서 기술과 자율성을 상실한다. 반면 소위 노동절감"생산품"의 제조는 회복불능으로 생명력있는 거주지를 파괴한다.
에코페미니스트는 "필요노동"이 기술을 통해 자연에게 부담이 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동시에 그들은 성장하지 않는 경제 속에서 노동조합운동과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는 전략도 거부한다. 마리아 미즈는 즐겁고 가치로운 일이라는 노동 개념을 요청한다.주33) 그리고 대다수의 에코페미니스트는 자기충족적이고 탈중심화된 생산관계를 기대하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즐겁게 일하고 외부자연과 상호호혜적 관계를 수립하며, 성별에 따른 노동분할과 국제적 축적으로 인한 소외와 손상이 없는 관계이다. 에코페미니즘은 가치의 재가치화(transvaluation of values)에 관한 것으로, 특히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노동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다르게 듣는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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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iel Salleh, "Nature, Woman, Labor, Capital: living the deepest contradiction", in Martin O'Connor ed., Is Capitalism Sustainable?: Political Economy and the Politics of Ecology, NY: Guilford Press, 1994., pp. 106-124.

** 아리엘 살레는 에코페미니즘 활동가이며 사회주의, 페미니즘, 생태학의 수렴과 모순에 대해 그녀가 쓴 책이 1995년 런던의 제드(Zed)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여성환경교육센터의 위원장이며 뉴욕대학의 환경보호교육프로그램의 비상임방문연구원이다.

[옮긴이주-1995년 출간될 예정이라던 책은 아마도 Ecofeminism As Politics : Nature, Marx and the Postmodern, Zed Books (December 15, 1997) 으로 추정된다]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 주 이다.



원주

1) 구체화되고 본질주의적인 구성물인 "자연", "여성", "노동"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도전받아 온 광범위한 구체성을 표현하면서 국제적으로 사용된다. 심지어는 보편화된 가부장적 용어인 "여성"과 그 경험적 형태인 "여성들" 역시 사회적 구성물이다. 몇몇 포스트모던 저자들은 "본질주의"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라는 범주 자체조차도 의문시한다. "계급"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맑스주의자들과 "인종"에 관한 저술을 하는 유색인들도 같은 위험을 부담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는 지배에 대한 구조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 글은 계급, 인종, 연령 등등의 사회계층화를 통해 여성을 차별화하지 않는데 자연-여성-노동 연계는 이러한 개념의 경계선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연계가 기본모순을 구성한다는 논지의 한 이유가 된다.

2) 비판적으로 체화된 유물론에 입각한 접근법은 아리엘 살레의 "표현적 실천의 변증법에 관하여 On the Dialectics of Signifying Practice," Thesis Eleven, 5-6, 1982, pp. 72-84에 소개되어 있다. 산드라 하딩 Sandra Harding, [페미니즘 내의 과학문제]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Ithaca, N. 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를 통해 인식론에 대한 다른 견해를 비교해 보라. 
3) Nancy White, Patricia Hill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Cambridge, Mass.: Unwin, 1990), p. 160.에서 재인용.
4) U.N.이 1980년 채택한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ILO) 통계. 본래 ILO가 산정한 임금 비율은 5%였다. 이후 U.N.의 보고서가 출판될 때 10%로 상향조정되었다.
5) 제임스 오코너가 James O'Connor 자신의 글 "Capitalism, Nature, Socialism: A Theoretical Introduction," CNS, 1(1), no. 1, Fall 1988[국역 이강원 옮김,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이론적 서설, [공간과 사회] 3호, 1993]에서 사용한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은 물리적 자원, 인간노동, 지역의 기간설비를 한데 묶어준다. 여기서 나는 이러한 범주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인 자연-여성-노동 연계에 대한 보다 차별화된 분석을 요한다고 주장한다.
6) 일례로 Carole Pateman, The Sexual Contract(Cambridge, U.K.: Polity Press, 1988).
7) Selma James, The Global Kitchen(London: Housewives in Dialogue Archive, 1985), p. 1.
8) Marilyn Waring, Counting for Nothing(Sydney, Australia: Allen and Unwin, 1988). [옮긴이주-각주의 위치가 이곳인지는 명확치 않다. 책에는 미주로 8번이 있지만 본문에는 8번이 표기되지 않고 7번과 9번만 표기되어 있다]
9) Mary Mellor, Breaking the Boundaries(London: Virago, 1992).
10) James, The Global Kitchen, op. cit., pp. 10-11.
11) James, The Global Kitchen, op. cit.; Waring, Counting for Nothing, op. cit.; Hilkka Pietila, "Woman as an Alternative Culture Here and Now," Development, 4, 1984; Australian Bureau of Statistics figures for 1990, National Women's Consultative Council Report, A Question of Balance(Canberra: Government Printer, 1992), Appendix F에서 재인용.
12) 일례로 Lydia Sargent, ed., Women and Revolution(Boston: Southend Press, 1981)을 보라.
13) Berit As, "A Five-Dimentional Model for Social Change," Women's Studies International Quarterly, 4, 1981.
14) Irene Dankelman and Joan Davidson eds., Women and Environment in the Third World(London: Earthscan, 1988); Lin Nelson, "Feminists Turn to Workplace, Environmental Health," Women and Global Corporations, 7, 1986; and Cynthia Enloe, Bananas, Bases and Beaches(London: Pandora, 1989).

15) Vandana Shiva, Staying Alive: Women, Development and Ecology(London: Zed, 1989).[국역 강수영 옮김, [살아남기: 여성, 생태학, 개발, 솔, 1998]
16) Ibid., p. 45.
17) 일례로 E. A. Johnson, Predecessors of Adam Smith: The Growth of British Economic Thought(New York: Prentice-Hall, 1937), pp. 139-140를 보라.
18)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circa 1688), in Sir Ernest Barker, ed., THe Social Contract: Essays by Locke, Hume, Rousseau(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특히 5부의 25-51절을 보라, pp. 16-30. 인용은 p. 17과 p. 18에서 각각 따왔으며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다.
19) Naomi Scheman, "Individualism and the Objects of Psychology," in S. Harding and M. Hintikka, eds., Discovering Reality(Boston: Reidel, 1983), p. 234.
20) Maria Mies,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London: Zed, 1986).
21) 이러한 견지에서 "자기비판"의 필요성은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발렌티노 팔라토와 지오반나 리코베리가 Valentino Parlato and Giovanna Ricoveri 최근의 논문 "The Second Contradiction in the Italian Experience," CNS, 4(4), no. 16, December 1993에서 이미 주장했던 것이다.
22) Paul Eliard, "Sound Justice" (1951), in Gilbert Bowen, ed. and trans., Paul Eluard: Selected Poems(London: Calder, 1987), p. 145.
23) Ariel Salleh,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pistemology," Thesis Eleven, 8, 1984.
24) Giovana Ricoveri, "Culture of the Left and Green Culture: The Challenge of the Environmental Revolution in Italy," CNS, 4(3), no. 15, September 1993, p. 119.
25) Julia Kristeva, Polylogue(Paris: Editions du Seuil, 1978). Cathexis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신경에너지의 투입을 의미한다.
26) Ariel Salleh, "On the Dialectics of Signifying Practice," op. cit. 부정적(비단언적) "본질"을 수반하는 "부정변증법"의 이러한 이용은 Theo Adorno, Negative Dialectics, E. Ashton, trans.(London: Routledge, 1973)과 Minima Moralia, E. Jephcott, trans.(London: New Left Books, 1969)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국역 홍승용 옮김,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최운규 옮김, [한줌의 도덕], 솔, 1995]
27) 보다 합리적인 흐름 속에서 콜린스 Collins 또한 적극적 인식론적 격려로서 흑인여성의 경험 내/외부에 대한 글을 썼다. "흑인여성의 삶은 우리 내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으로 스스로 규정한 자기이미지를 객관화된 타자와 분리하려는 모순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교섭의 연속이다."; Black Feminist Thought, op. cit., p. 94. 국제적인 활동그룹인 Development Alternatives with Women for a New Era 역시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의 시각에 기초한 페미니즘 입장의 인식론을 옹호한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은 곧 출판될 나의 책에 담겨있다(London: Zed).
28) Adorno, Negative Dialectics, op. cit., p. 203; Minima Moralia, op. cit., p. 73.
29) Ariel Salleh, "The Ecofeminism/Deep Ecology Debate: A Reply to Patriarchal Reason," Environmental Ethics, 14, 1992에 보다 세부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30) Ariel Salleh, "Deeper than Deep Ecology," Environmental Ethics, 6, 1984, p. 340.
31) Pietila, "Women as an Alternative Culture," op. cit.
32) Shiva, Staying Alive, op. cit., p. 10.

33) Mies,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p. cit.

 

옮긴이 주

1) []는 저자

2) 원문에는 약자로만 되어 있는데 Parent Teacher Association의 약어가 아닐까 함. 한국에서는 학부모가 일일선생님을 하는게 예전에는 별로 없었다. 한국식으로 육성회로 하려했으나 요즘에는 육성회라는 말을 안쓰는 것 같아 학부모회로 해둠
3) 우주는 24가지의 원리 또는 요소로 되어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프라크리티(Prakriti), 즉 '창조성'이라 하였다. 이 프라크리티가 여성 에너지인데 반해 푸루샤(Purusha)는 남성 에너지이다. 푸루샤는 형태가 없고 색깔도 없으며 모든 속성을 초월해 있고 우주의 현현 과정에서 아무런 능동적 역할도 담당하지 않는다. 이 에너지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다. 
프라크리티는 형태와 색깔을 가지며 속성도 가진다. 그것은 분별하는 앎이며, 다수로 전개되려는 의지를 가진 유일자이다. 우주란 바로 이 프라크리티라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4) 일반적인 기호학에 정신분석을 도입한 방법
5) 가부장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이분법적인 배제의 논리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기호계의 발화(혹은 시적인 발화)는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을 받아들인다. 크리스테바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코라’개념에 기대어 기호계의 특별함을 설명한다. ‘티마이오스’에서 ‘코라’는 명명할 수 없는, 혼돈된 자궁과 같은 선험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크리스테바에 있어서, 코라는 욕망으로 경험되는, 어머니와 아이가 공유하던 육체의 공간이다. 코라는 시적 리듬의 흔적을 남겨놓기도 하지만, 언어적으로 발화되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특히 ‘모성적인 코라’는 의미화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6) []는 저자
7) subcontracting의 오기로 생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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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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