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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자본주의와 환경*

 

폴 M. 스위지(Paul M. Sweezy)

 

이 글은 유고슬라비아 Cavtat에서 1988년 10월 개최된 토론회 "세계 속의 사회주의(Socialism in the World)"를 위해 준비되었던 글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이 글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1989년 6월호에 처음 실렸었다.

 

인류가 장구한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했음은 분명하다. 핵전쟁은 인간의 모든 기획을 종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파국적인 종말을 피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도 알다시피 문명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본질적인 조건들이 계속 존속할지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역사상 영구적이고 무한히 사용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다루어 온 토지, 물, 공기로 조성된 물적 환경 안에서 살고 그로부터 생활해간다. 이것이 비파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자연적인 과정 혹은 인간에 의한 환경의 일부의 파괴가 이루어진 (예를 들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는) 여러 국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 파괴는 인간이 생존하기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고 이후로도 오랬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며 예측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이 현상에 특별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파괴의 경우에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역사상 환경의 일부에 대한 소규모의 파괴가 있어왔고 때로 그 규모는 (예를들면 사막화의 경우처럼) 매우 인상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과정조차도 전체 환경의 규모와 비교해서 소규모에 불과했다. 부족 혹은 그보다 복잡한 사회들조차도 전멸하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재난의 범위는 지역적인 것이었지 전지구에 걸친 재난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상--사실,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바로 지금까지도--하나의 사건으로 지역적인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소유한 수단들이 너무도 대단치 않아서 환경에 내재된 순전한 막대함과 회복력에 위협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숙고되지도, 명료화되지도 않은 믿음 때문일 것이다.
변화는 1944년 8월 첫번째 원자폭탄(A-bomb)이 투하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초 이 새로운 폭탄은 기존의 무기를 근본적으로 향상시킨 것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연관된 일련의 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사고를 급선회시켰다. 소비에트연방은 이 무기를 예상보다 훨씬 빨리 개발하는 바람에 새로운 무기가 일정하게 독점되고 통제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은 분쇄되었다. 그리고 보다 거대한 파괴의 잠재력을 동반한 수소폭탄(H-bomb)이 등장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많은 대화와 대체로 상징적인 협정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초강대국 사이의 무기개발경쟁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강대국이 그 상대방을 여러번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제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고,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핵전쟁의 결과에 대한 진행중인 연구는 파국이 교전국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더 널리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 있는 의구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영향은 지구 전체를 휩싸는 방사능오염, 핵겨울 같은 형태를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50년도 채 안되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단기간에 인류는 거주의 안정성에 대한 행복한 확신을 버리고 자신의 생존과 동시에 생활을 지탱해줄 자연환경의 수용력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핵무기 사용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전례없는 인간의 의식변화가 내포하는 온전한 의미는 시간이 한동안 흐르기 전에는 명확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인 핵무기의 압도적인 파괴력에서부터 대부분이 알려지고 연구된 지 불과 1세기 남짓에 불과하지만 핵시대의 개막 이래 점차 새로운 견해로 인식되고 있는 다양한 생태적 과정과 경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거주에 대한 위협에 대한 인식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하다.* 일단 인간이 지구를 인간의 거주에 적합하지 않게 변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되면 핵무기가 그러한 파국의 유일한 원천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진보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제는 지상에서의 생활유지에 대한 다가오는 위협의 일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식에 있어서 이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 일이 얼마나 급속하게 이루어졌는 가를 숙고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틀 내에도 물론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극단적인 입장의 한쪽에는 위험이 매우 과장된 것이라고--대체로 핵위험의 산물일, 비관주의적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무기경쟁을 이제 점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통제하에 두고, 환경저하는 종말의 날을 알리는 서곡이 아니라 인간이 유발한 일련의 문제로 그리고 일간이 유발한 일련의 문제들을 다루어 왔던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는 문제로서 그 진정한 중요성이 인식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극단에는 문제가 지난 50년 동안 발생한 것보다 훨씬 악화될 것이며 이제 가장 우울한 전조의 근거를 돌이키지 못할 지점에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찬반론을 제시하는 방식상 두 입장은 종종 양극단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허상이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현재의 경향이 지속될 경우 인간종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돌이킬 수 없도록 망쳐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와는 반대로 현재의 경향에 내포된 숙명적인 함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향 속에 숨은 과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너무 늦기 전에 이 과정을 돌이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환경저하의 과정

 

이 주제를 다룬 문헌은 많이 있고 대부분 수준급의 글이지만 내가 이 주제를 소개하거나 요약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현재까지의 문제 대부분이 지난 삼사세기 동안 발전되고 작동해온 세계경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 이 기간은 물론 자본주의, 부르주아와 산업혁명, 석탄과 증기 및 철도, 철강과 전기 및 화학산업, 석유와 자동차, 기계화되고 화학화된 농업--그리고 인류의 처분에 맡겨진 생산력의 대량성장에 대한 반응인 세계인구의 급속한 팽창과 도시화의 등장 이후의 기간이다. 이 발전과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것은 새로운 방법과 신물질을 생산하고 사용하며 이를 인간, 집단, 사회를 재생산하고 확장하는 데 소모되고 남은 물질의 처리과정에 도입함으로써 지구의 자원에 부담을 증가시키는 상황과 관련된다. 아마도 다른 세대에는 인류를 비롯한 생명있는 존재들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고 대략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연적인 순환을 유념하여 이를 보존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을 계획하고 수행한 사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사례가 있었더라도 극소수라서 역사기록에서 추적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간 경제에 일어난 혁명에 결합된 새로운 발전은 항상 자신들을 위한 고유한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진 개인, 혹은 전체라는 개념에 대비되는 개념인 소규모집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환경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혹 그들이 환경에 대해 고려한다고 해도 그들의 활동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가 무엇이든 쉽게 흡수되거나 한정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복원력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문제시되는 과정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망상이었고 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환경에 피해를 입히는 활동이 소규모라면 상대적으로 무해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이 일반화되고 발생장소로부터 퍼져나가 전지구적 규모의 경제 전체에 번지면 문제는 극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확히 이차세계대전 뒤 반세기 동안 주로 발생한 일이며 바로 환경위기라고 인식되는 현상이 누적된 결과이다.
이 위기의 주요요소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정교화할 필요는 없다: 이산화탄소 흡수원인 열대우림 파괴의 가속과 더불어 화석연료의 대량연소로 인한 온실효과; 역시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호수와 삼림, 여러 초목을 파괴하는 산성비; 인간과 다른 생물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상층대기 중의 오존층 파괴; 약탈적 농법으로 인한 표토의 파괴와 사막의 확대; 산업폐기물과 화학비료 및 살충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토지와 표층수 오염; 한 때 모든 종류의 쓰레기를 무한히 적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가시적 환경위기 중 하나이자 다른 문제만큼이나 취약한 것으로 생각되는 대양오염 증가.
물론 이 목록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환경위기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광범위하고 종종 잘 드러나지 않는 상호연계에 대한 힌트 수준의 목록이다.* 그러나 위기의 일반적 본질이 근대지구경제에 의해 환경에 부과된 요구와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환경에 배태된 자연력의 수용력 사이의 극적(이며 점증하는) 분열이라고 언급하기에는 충분한 목록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환경에 주어진 부담에 대한 수용능력을 증가시킬 방법은 없기 때문에 조정은 평형의 다른 편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또한 비평형상태가 이미 위험수준이기 때문에 성공하려면 지난 몇세기 동안의 잠재적 경향의 감속이 아니라 상황의 반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향의 중심에 자리한 경제체계는 전체로서의 사회 혹은 자신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가지지 않은 채 자신의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존재들--개인, 동업자, 최근 100년간은 기업--의 에너지와 창의력에 의해 추동된다. 이미 한세기 반 전에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Communist Manifesto[국역--김태호 옮김, {공산주의 선언: 150주년 기념판}, 박종철출판사, 1998] 잊지못할 구절을 통해 이 젊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에너지와 성취에 대해 주목할만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부르주아는 백년도 안되는 지배기간동안 과거 세대들이 창조한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 자연력들의 정복,

               기계장치, 공업과 농경에 대한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대륙전체의 개간, 하천의 운하화,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인구. 이같은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전의

               어느 세기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실질적으로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던 1847년 당시의 부르주아의 지배는 지구 표면의 작은 일부에만 국한된 것이었고 자연력과 인간의 목적을 연결시켜주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이후로 자본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진정한 세계체계가 되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산업과 농업에의 적용은 백오십년 전에 꾸었던 가장 열정적인 꿈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모든 극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직 상호경쟁에 의해서만 견제되며 시장이 실패했을 경우 발생하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위기에 의해 단기적으로 통제되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한가지 목적만을 추구하는 개인과 소집단의 집중된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저거노트(juggernaut)[옮긴이--인도 신화에서 비슈누 신의 제8화신, 8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를 탄 저거노트가 지나가는 길에 신도들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고 한다]라는 체계의 본질은 탄생할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체계의 개념 자체에 내포된 의미는 결합되어 있고 막강한 추진력을 지닌 생산과 파괴이다. 긍정적인 측면인 창조적인 추진력은 인간이 자신의 소용을 위해서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인 파괴적인 추진력은 자연이 가진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를 자연에 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곧 두 추진력은 모순되고 불일치하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논의한대로 조정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자연의 수용능력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부과된 요구 편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 몇세기동안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체계가 자신의 파괴적 추진력을 바꿀 수 있고 동시에 창조적 추진력을 환경력에 적절한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우리가 신뢰할만한 증거를 보여주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그 해답은 불운하게도 그러한 믿음을 장려할만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투자의 목적은 언제나 이윤의 극대화였을 뿐, 사회적 목적에의 기여는 아니었다. 아담 스미스 이래의 주류경제이론은 자본가 (혹은 투자자)의 이윤을 직접적으로 극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들의 개별적인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가들이 모두 함께 상호경쟁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면서 공동체의 욕구를 생산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활동을 사회가 존속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식품, 의복, 주거, 기타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편의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단기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이윤 추구의 장에서 퇴출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는 자본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며 이것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자 전체 경제 체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주류경제이론에서 묘사된 내용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단순한 체계와 자본주의를 구분해주는 자본축적에의 강박이다. 그리고 자본 축적에 의해 추진되는 체계는 부동으로 존재할 수 없는, 영원히 변화하고, 생산 및 분배와 관련된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며,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고 사회를 약화시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도록 만들려는 목적에 지배되는 존재이다. 부단한 혁신과 확장 과정에 사로잡힌 채, 이 체계는 방해가 되거나 실패하면 자신의 봉신마저 거칠게 다룬다. 자연환경이 관련될 경우 자본주의는 자연환경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거나 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이윤추구와 더 나아가서 자본축적이라는 최상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내용은 현재의 환경위기를 유발한 경제체계의 본성적이고 근본적인 내적 추진력이다. 자본주의는 상대가 없으면 작동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과도함을 꺾으려는 노력은 자본주의의 희생자들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보다 현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항상 이루어져왔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국역--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I}, 비봉출판사, 1991] 19세기에 이루어졌던 공장법, 10시간 노동법 쟁취 운동에 대해 실감나게 기록하면서 10시간 노동법을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금세기동안 이루어진 보존운동은 지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동된 것이며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보다 파괴적인 약탈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체계 내에서 시작된 이러한 종류의 제약이 없었다면 지금쯤이면 자본주의가 벌써 환경과 스스로를 파괴했을 것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한 제약이 때로 개별 자본가들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체계 전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체계 전체가 위협당하기 훨씬 전에 자본주의 계급을 통제하는 국가를 포함한 자본주의 계급은 환경보호척도를 [옮긴이--자신들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반박하기 위한 방어물을 결집했다. 그래서 환경의식이나 운동이 지난 세기에 등장해 성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위기가 심화되는 것이다. 예상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 결론이 받아들여진다면--그리고 우리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결론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환경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또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본주의를 사적 이윤과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자본의 축적에 바쳐진 경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고 환경을 지속가능한 건강조건을 회복하도록 헌신하는 경제에 근거한 사회질서로 대체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것이 오늘날의 혁명적 변화의 의미이다. 더 낮은 개혁척도는 그 자체로 얼마나 바람직한 것이든 간에 기껏해야 이미 상당히 진행된 치명적인 쇠퇴와 몰락 과정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여기서 취한 입장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을 사실상 재작성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가 붙는다: 성취된 사회주의는 반드시 맑스와 엥겔스가 항상 생각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소득불평등의 심화, 대량실업, 주기적 불황, 금융공황 등의 자본주의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요소들을 제거한 사회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소외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과 자연을 취급하는 내재적 태도를 지닌 자본주의 그 자체를 뿌리뽑아 재배치해야만 한다. 생산의 기적을 수행하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은 결국 그 기적적인 힘을 자신과 거주지를 저하하거나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과 다음 천년을 살아갈 후손을 위해 이 세계를 보다 나른 곳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러한 혁명적인 목적을 지닌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확실히 누군가의 유토피아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그럴 경우 최소한 오랫동안 아마도 자본주의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관련해서 우리가 제기할 질문은 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와의 경쟁을 단호히 멈추고 스스로 올바른 목표를 정립하며 진정으로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력할 것인지의 여부이다. 만일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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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 M. Sweezy,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Monthly Review Vol.56, No. 5, October 2004.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1004pms3.htm

 

 



원주

 

* 너무 날카롭게 구분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환경적 변화는 자연적 과정과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결합되어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이 전혀 기여하지 않은 거대한 지질학적 변형도 있고 과도한 벌목으로 야기된 결과인 남벌처럼 인간의 탓으로만 생각되는 일도 있다.
* 환경적 관심사와 핵시대의 개막 사이의 연관성은 저서, {원은 닫혀야 한다}(The Closing Circle, 1971)[국역--송상용 옮김, 『원은 닫혀야 한다: 자연과 인간과 기술』, 전파과학사, 1980]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진정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던 창시자 중 한 명인 배리 커머너가 Barry Commoner 잘 표현했다: "나는 1953년 열린 미국원자력위원회(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로부터 환경에 대해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공기, 물, 토양, 기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어느 정도는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1946년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는 핵 및 원자력을 군사적, 과학적, 산업에 이용가능하도록 만들려는 미국의 대량개발프로그램을 담당하기 위하여 창설되었다. 1951년까지 미국 16개, 소련 13개의 폭파실험을 했고 다음해 영국은 실험대열에 합류했다."(pp. 49-50)
* 상호연관성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한 복잡한 분석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된 배리 커머너의 저작 {원은 닫혀야 한다}를 참고하라.
* 보다 이해하기 쉬운 분석은 "현존 사회주의(really existing socialism)"의 창조적/파괴적 추진력을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국가들은 보다 발전된 지도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겨루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이들을 따라잡으려는 노력 중에 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현존 사회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효과는 자본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다. 상이한 지구적 맥락에서--안정감을 느끼고 외부의 압력과 무관하게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사회주의 사회가 환경에 질적으로 다른 영향을 줄 것인지 여부는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이 논문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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