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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스물아홉(1)

아직은 스물아홉(1)

 

 

대학과 함께 시작된 생활

1998년 봄이 채 오지 않았던 2월.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느낀 문화충격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고3 시절, 친구가 들고온 진보적인 시사잡지 [월간 말]을 보면서 느꼈던 그 설레임을 드디어 만끽하다니! 대학을 알기 위해 2월의 어느날 나는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 참가했다. 새터 하루 전날 연세대 생이 술을 과하게 먹고 죽어 집안에서 참가를 만류했지만, 좀처럼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했는데 이른 바 '민중가요'도 연습했는데 말이다.

 

새터 하루 전날, 이미 이사까지 마친 나는 새터 당일에 학교로 찾아갔다. 자그마한 교정에는 나같은 어리버리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도 즐비해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학과가 발표되는 날이라 게시판(대자보판)으로 향했다. 새내기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이 무슨 과가 되었는지 확인한다. 살펴보니 나는 국어교육과가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이름을 묻는다. '최고봉이요'라고 답했더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합격자 명단 제일 위쪽에 있었던 내 이름이 '홍길동'처럼 예인 줄 알았단다. 그럴만 했다. 사연은 이렇다. 나와 고등학교 동창 2명은 춘천교대에 원서를 냈다. 마침 강원대에 원서를 접수하러 가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원서를 직접 들고 가서 접수를 하기로 했는데, 춘천교대는 며칠 후부터 원서 접수란다. 그래서 학생처에 원서를 맡겨두고 갔는데, 하필이면 내가 1001번(남자는 1000번대, 여자는 2000번대)이었다. 그래서 내 이름이 합격자 발표에서 가장 위에 오게 되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과별로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과가 정해졌으니 선배들 얼굴도 봐야 하고, 동기들은 어떤 사람인가 살핀다. 간단한 행사를 하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버스에 오른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렸더니 새터 장소가 나온다. 새터 장소는 한록리조트인가 하는 한강변에 위치한 경치 좋은 곳이었다. 다만 강당이 간이 천막 형식으로 되어 있어 불편했다. 다 큰 사람들이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가운데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 어려웠다.

 

내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경기동부총련 노래단 천리마였다. "동만주를 내달리며..."로 시작되는 진군가 풍의 노래를 부르는데, '아 이런 것이 대학문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가 '혁명동지가'였다. 아마도 항일 빨치산의 경험을 노래로 만든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당시의 나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이 무척 풍부했던 것 같다.

 

대학입학시험 중 면접 시험에서 있었던 일이다. 면접 장소에는 세 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다. 접수번호가 가장 빠른 죄로 나는 가장 먼저 면접에 임해야 했다. 첫번째 질문은 고등학교의 좋은 점을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가 작지만 모두가 학업을 열심히 해서 분위기가 좋다'고 답했다. 그 다음 질문은 나쁜 점을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걸작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말해보란다. 그래서 나는 김구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는데,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다음 존경하는 사람을 말해보란다. 나는 손병희라고 말했다. 독립운동 지도자 33인 중 변절하지 않은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한 명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세월이 지나서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이 굉장히 풍부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새터 첫날밤인가, 둘째날 밤에 선배들은 내게 노래를 시켰다. 나는 준비했던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다. 사실 그때 나는 대학에서는 이런 노래를 많이 부르는 줄 알았다. 물론 그날 이후 나는 운동권 선배들에게 찍혔다. 새터를 다녀온 후부터 선배들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총학생회, 신문사, 교지편집위원회, 그리고 사회과학 동아리 [프로메테우스] 선배들까지. 그것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선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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