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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1
    아이의 선그라스(1)
    사람
  2. 2010/06/21
    관계의 힘(3)
    사람

아이의 선그라스

딸아이를 둔 입장에서 아동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아이를 낳기 전부터도 비관적인 나에게 세상은 결코 아이를 낳고 키울만한 곳이 아니었다. 유니가 태어나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을 거쳐 집에 왔을 때, 잠든 아이를 보며 '과연 이 아이가 자라나게 될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싶은 마음은 설레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자책 같은...

전자발찌, 사형, 무기징역,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 이런 말들이 난무한다. 모두 사건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일들이다. 그래서 (물론 나의 정치적 입장과도 배치되지만) 별다른 실효성 없는 립서비스로만 들릴 다름이다. 골목마다 CCTV를 설치한다고 하는 것도, 학교 출입을 엄격하게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보살핌이 파괴된 공동체인데 엉뚱한 해법만 난무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한 개인, 한 가정에게, 게다가 도시에서 그런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보살핌의 시스템을 고안하라고 하는 것 또한 무리한 요구다. 최근 TV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를 혼자 두지 마세요"라는 CF도 마찬가지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혼자 두고 싶어서 두나? 그런 광고를 할 돈이 있으면 차라리 보육시설을 늘리고, 그 시설을 무상으로 하고, 보육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유니가 햇빛이 눈부시다며 외출을 거부했다고 한다. 내가 가끔 쓰는 선그라스를 눈여겨 봤는지, 안경이 없으면 나갈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마눌님은 마트에 데려가 선그라스를 사준 모양이다(사실 여름 휴가에 맞춰 하나 장만해주려 했다). 이 장난감 같은 선그라스가 아이 눈을 얼마나 보호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선그라스가 아니라 선그라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함께 가서 사 줄 수 있는 엄마의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마눌님의 뱃속에는 7개월 된 벼리가 있다. 그 아이에게 마눌님도 나도 선그라스가 되어 줄 수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유니와 벼리의 선그라스를 유니, 벼리랑  같이 찾아나서야 겠다는 소박한 다짐만 되새길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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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힘

미술을 전공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엄마와 시를 전공했지만 전혀 시적으로 살지 않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유니.

그래서 표현력이 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20개월을 전후로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 33개월이 된 요즘 "오늘은 너무 슬퍼서 우유를 한 잔 더 마셔야겠어~!"와 같는 말로 엄마 아빠를 깜짝 놀래키는 딸내미.

100일 무렵부터 마눌님이 일주일에 이틀 일을 시작했다. 누구 말대로 아이 등에 센서가 달려 있는 모양인지, 20층 아파트를 두세 번 오르락 내리락 해서 겨우 잠이 든 아이는 눕히기 무섭게 눈을 반짝 뜨고 울기 시작했고 200mm 우유의 3분의 1인 내 옷에, 3분의 1은 잠자리에 토하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아이를 키우며 베란다에서 던져버리고 싶었던 욕망을 억눌렀던 때가 하루이틀이 아니라고 자백하기도 했지만 소심한 나는 일주일에 이틀이었던 그 육아의 나날, 침대 메트리스 아무리 속이 상해도 10cm 높이에서 낙하시키는 걸로 분을 삭혀야 했다.  


아이도 힘들었지만 못지 않게 나도 힘들었던 그 2개월 정도의 나날이 지나자 둘 다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애기띠에서 고난이도의 포대기 업기를 성공했던 어느 한낮. '진주난봉가'를 자장가 삼아 들려주고, 아이를 배위에 올려놓고 네 시간 가까이 같이 낮잠을 자다 눈을 뜬 해거름. 스케줄에 맞춰 아이를 재우는데 성공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베란다에서 피웠던 담배 한 모금.  


작년 9월, 어린이집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이틀이 아닌 하루, 그것도 겨우 두세 시간 정도 아이를 내가 볼 따름이지만 육아는 아직도 서툴고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 석달 뒤에 다시 둘째가 태어나고... 


마눌님의 둘째 임신소식을 접하고 잠시 우울했다. 여성들이 출산의 고통을 잊듯이 나도 그 시절, 그 전쟁 같던 이틀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날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둘째 벼리가 나오면 이틀이 아니라 삼일을 내가 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계는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게 새삼 놀랍다. 그런데 그 변화는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지나고 나면...

 이랬던 아이가 30여 개월 만에... 

  
... 이렇게 되듯이...  또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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