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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21
    노무현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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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7/16
    돈에 대하여
    사람
  3. 2010/06/21
    아이의 선그라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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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6/21
    관계의 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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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두율이라는 질문-침묵과 망각의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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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2/27
    꿀꺽꿀꺽 술장수와 덥적덥적 술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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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한 변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김창호|이동걸|안병진|박능후|김성환|김용익|조기숙|고철환|윤승용 지음
오마이북 2010.06.24
 

 

 

 

#1.
죽은 자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군다나 노무현처럼 대규모의, 또한 열정적인 팬덤을 지닌, 일정 정도 시대 정신을 구현했던, 그리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보의 미래>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을 선물로 받아 읽은 적이 있다. 삼분의 일 정도를 읽다가 책을 덮었다. "당신, 왜 그랬어?" 하는 질문이 책을 읽는 동안 샘솟았다. 그럼에도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없음이 허전했고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에서 노무현은, 아니 그를 보좌했던 이들은 한미FTA를 추진하며 '한국인의 가능성'을 주목했다고 한다. 어차피 쇄국을 하지 않을 바에야, 주관적인, 근거없는 희망이 아니라 의지적 낙관에서 비롯된, 인민의 역량에 근거한 정책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미FTA 반대가 반드시 쇄국인가? 또 부질없는 질문들이 샘솟는다.)

한편 아버지 같은 정부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정부를 바람직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갸웃뚱해진다. 그렇다면 인민의 역량에 무게를 두고, 과정에서 약자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하리라는 믿음, 그런 추진력 대신 힘 없는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목소리에 더 귀기울이고 더 신중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2.
노무현이 읽었다는, 그래서 그를 기리는 마음에서 함께 읽었다는 10권의 책. 그리고 그 책들을 함께 읽은 강독회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전 지구적 시스템의 문제부터 한 사람의 머릿속의 생각의 흐름까지 다룬 책들을 읽고 이야기한 강독회를 따라가며 다시금 노무현의 부재가 안타깝다.  

책 속의 누구는 노무현을 정조와 비교하며 '공부하는 군주'라 했다고 하지만 어림없는 이야기다. 정조는 재위 기간이 24년, 박정희의 집권기와 비견될 시기다.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무려 60년.  

노무현에게 딱 15년만 주어졌더라면 그가 꿈꾸던 '진보의 미래'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제2의 박정희가 되지는 않았을까.  쉽게 장담할 수 없은 일이다.

 

#3.
노무현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나는 노무현이 가장 잘 한 일은 대통령이 된 것, 한나라당을 꺽고 당선된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일 잘 못 한 일은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게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일찍 자율을 선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정반대로 그가 가장 잘 못 한 일은 너무 일찍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가 가장 잘 한 일은 권력기관을 자기 수하에 두지 않은 일이지 않나 싶다.  

 

이 책의 필자들은 다들 노무현이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노무현과 함께한 집권세력이 준비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물론 한국사회 진보의 안타까운 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권력기관에게 자율을 줌으로써 어느 시기에도 누릴 수 없는 공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하게 했다. 현 정부는 그 반대급부, 그 저항에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한번 획득된 자유의 시계바늘은 쉽게 뒤로 가지 않는다.  

 

 

#4.
참여정부가 진보였는지, 진보란 과연 무엇인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회적 약자가, 힘없는 사람들이 품위 있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에게 노무현, 김대중,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파고들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 책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다 오랫동안 읽혔으면 좋겠다.  

 

제목을 위와 같이 달아놓으니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언뜻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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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하여

돈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누구는 그런다. "돈 우습게 보지 마라, 돈 100만원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며 어떻게 돈을 우습게 볼 수 있나. 오히려 살 수록 참 무서운 게 돈이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것 같지만 한편 다들 잘 모르는 게 돈인 것 같다. <녹색평론>은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도 돈과 은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통 돈이라고 생각하는 금속화폐나 지폐는 실제로 조폐창이라고 하는 연방정부기관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은행이 대출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한 대출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서류에 표시된 차금인(借金人)의 서명은 대출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금액을 나중에 은행에 갚거나,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혹은 담보물로 잡힌 자산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그런데 이 서명이 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행은 차금인의 계좌에 금액을 써놓는 행위만으로 마술처럼 그 액수의 돈을 생산한다.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중략) 

은행은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생각된다면, 이것은 어떠한가. 최근 몇십년 동안 은행들의 집요한 로비활동의 결과로 각국의 중앙은행에 예치금을 두어야 한다는 규칙은 몇몇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실제 준비율은 9:1보다 훨씬더 높아졌다. 계좌 유형에 따라 20:1 혹은 30:1이 흔한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출수수료를 이용함으로써 은행들은 이제 준비율이라는 제약을 완전히 우회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내 경우에는 얼마 전에 은행에 적금했던 돈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일이 있다. 연 이자 7%. 속이 쓰리다. 그래도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은행 영업시간이 지난 뒤에 돈을 인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수료를 내는 것도 참 아깝다. 어떤 은행은 1억원 이상인 계좌를 갖고 있으면 인출은 물론 이체 등 모든 수수료가 면제라고 하니 배알이 꼴리기도 한다.  
 

   
 

한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이자놀이(usury)라고 하였고, 그것은 엄한 처벌 ― 심지어 사형 ― 을 받았다. 모든 주요 종교는 이자놀이를 금지하였다. 이자놀이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돈의 유일한 정당한 목적은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돈으로 돈을 증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기생적인 행위 혹은 도둑질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라고 믿어온 것은, 실제로는, 교묘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형태의 경제적 독재체제이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통화공급 때문에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는 한, 은행가들은 누가 돈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위의 글에서

 
   

 

이 쯤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떠오른다. 요즘은 '더블 딥'이란 말도 많이 나온다. 한국은 부동산 거품이 없어지면서 일본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장기침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래는  얼마전 <르몽드디플로마크> 한국어 판에서 봤던 글이다.   

 

   
  1996년 봄, 첫 임기를 간신히 마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 유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커피를 한잔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의 잠재적 후원자들은 무리지어 백악관을 방문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미 행정부 관리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클린턴의 대변인이던 래니 데이비스는 이 만남에 대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직원이 해당 산업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그럴싸하게 해명했다.(2) 그 뒤 전세계 경제가 수조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치르고, 국가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노동자 수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은 이 ‘커피 타임’과 무관하지 않다.  

1996년 5월 13일, 미국의 주요 은행 대표들이 백악관에 초대돼 1시간30분간 미 행정부 주요 관리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는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 통화정책 담당 존 호크, 은행규제 담당 유진 루드위그가 참석했다. 민주당 자금 담당 마빈 로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유진 루드위그의 대변인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은행가들은 향후 입법 사안에 대해 토론했다. 그중에는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을 분리하는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이 포함됐다”. - '은행가에 의한, 은행가를 위한, 은행가의 정부' <르몽드 디플로마크> 6월호 

 
   

  
청와대는 7월 8일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은행장들과 대기업 총수들을 만난 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뷰스앤뉴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삼성경제연구소가 만들었다는 사실에서처럼 한국은 이 부문에서 미국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위의 기사는 모든 사람은 투표권 한 장을 가질 수 있지만 정치자금은 부자들만이 낼 수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에 눈치보는 정치권, 금융자본에 종속되는 정치를 거스리기는 힘들다고 진단하고 있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 그 폐해를 고스란히 서민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돈이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엇이든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매우 단순한 대안적 화폐개념이 있다. 이 모델은 과거에 영국과 미국에서 실제로 잘 기능하고 있었지만, 금세공사―은행가들과 부분준비제도 때문에 파괴된 시스템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항구적이고, 이자 없는 돈에 기초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바람직스럽기는, 그 돈은 도로, 철도, 교량, 항만, 공설시장 등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내구성을 가진 하부구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 돈은 부채로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의 사용처 ― 그게 무엇이든 ― 그 자체가 가진 가치로서 창조될 것이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녹색평론>은 대안화폐, 사회신용론을 제시하는 것 같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 삶과 생활에 기초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시급하다.   

 

   
 

화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이다. 화폐가 오래된 노예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즉 주인과 노예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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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선그라스

딸아이를 둔 입장에서 아동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아이를 낳기 전부터도 비관적인 나에게 세상은 결코 아이를 낳고 키울만한 곳이 아니었다. 유니가 태어나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을 거쳐 집에 왔을 때, 잠든 아이를 보며 '과연 이 아이가 자라나게 될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싶은 마음은 설레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자책 같은...

전자발찌, 사형, 무기징역,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 이런 말들이 난무한다. 모두 사건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일들이다. 그래서 (물론 나의 정치적 입장과도 배치되지만) 별다른 실효성 없는 립서비스로만 들릴 다름이다. 골목마다 CCTV를 설치한다고 하는 것도, 학교 출입을 엄격하게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보살핌이 파괴된 공동체인데 엉뚱한 해법만 난무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한 개인, 한 가정에게, 게다가 도시에서 그런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보살핌의 시스템을 고안하라고 하는 것 또한 무리한 요구다. 최근 TV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를 혼자 두지 마세요"라는 CF도 마찬가지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혼자 두고 싶어서 두나? 그런 광고를 할 돈이 있으면 차라리 보육시설을 늘리고, 그 시설을 무상으로 하고, 보육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유니가 햇빛이 눈부시다며 외출을 거부했다고 한다. 내가 가끔 쓰는 선그라스를 눈여겨 봤는지, 안경이 없으면 나갈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마눌님은 마트에 데려가 선그라스를 사준 모양이다(사실 여름 휴가에 맞춰 하나 장만해주려 했다). 이 장난감 같은 선그라스가 아이 눈을 얼마나 보호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선그라스가 아니라 선그라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함께 가서 사 줄 수 있는 엄마의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마눌님의 뱃속에는 7개월 된 벼리가 있다. 그 아이에게 마눌님도 나도 선그라스가 되어 줄 수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유니와 벼리의 선그라스를 유니, 벼리랑  같이 찾아나서야 겠다는 소박한 다짐만 되새길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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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힘

미술을 전공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엄마와 시를 전공했지만 전혀 시적으로 살지 않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유니.

그래서 표현력이 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20개월을 전후로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 33개월이 된 요즘 "오늘은 너무 슬퍼서 우유를 한 잔 더 마셔야겠어~!"와 같는 말로 엄마 아빠를 깜짝 놀래키는 딸내미.

100일 무렵부터 마눌님이 일주일에 이틀 일을 시작했다. 누구 말대로 아이 등에 센서가 달려 있는 모양인지, 20층 아파트를 두세 번 오르락 내리락 해서 겨우 잠이 든 아이는 눕히기 무섭게 눈을 반짝 뜨고 울기 시작했고 200mm 우유의 3분의 1인 내 옷에, 3분의 1은 잠자리에 토하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아이를 키우며 베란다에서 던져버리고 싶었던 욕망을 억눌렀던 때가 하루이틀이 아니라고 자백하기도 했지만 소심한 나는 일주일에 이틀이었던 그 육아의 나날, 침대 메트리스 아무리 속이 상해도 10cm 높이에서 낙하시키는 걸로 분을 삭혀야 했다.  


아이도 힘들었지만 못지 않게 나도 힘들었던 그 2개월 정도의 나날이 지나자 둘 다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애기띠에서 고난이도의 포대기 업기를 성공했던 어느 한낮. '진주난봉가'를 자장가 삼아 들려주고, 아이를 배위에 올려놓고 네 시간 가까이 같이 낮잠을 자다 눈을 뜬 해거름. 스케줄에 맞춰 아이를 재우는데 성공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베란다에서 피웠던 담배 한 모금.  


작년 9월, 어린이집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이틀이 아닌 하루, 그것도 겨우 두세 시간 정도 아이를 내가 볼 따름이지만 육아는 아직도 서툴고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 석달 뒤에 다시 둘째가 태어나고... 


마눌님의 둘째 임신소식을 접하고 잠시 우울했다. 여성들이 출산의 고통을 잊듯이 나도 그 시절, 그 전쟁 같던 이틀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날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둘째 벼리가 나오면 이틀이 아니라 삼일을 내가 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계는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게 새삼 놀랍다. 그런데 그 변화는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지나고 나면...

 이랬던 아이가 30여 개월 만에... 

  
... 이렇게 되듯이...  또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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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다

한 때 '백기 들어!, 청기 들어!' 하는 게임이 유행한 적 있다.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 천안함 사건의 정부 발표를 70% 정도가 믿는다고 한다. 그럼 나는 30%에 속하는데 그나마 나 같은 사람이 30%나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치 청기백기 게임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아래는 한 블로그에 댓글로 적은 글이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해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은 MB정부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어떤 맹점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분야의 누구인지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며(아직 민군 조사단 명단도 발표가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단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전문가는 그 전문성으로 인해 전체에 대한 통찰,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더 쉽게 빠지는 반면, 일반인에게는 전문가들이 검증했으니... 라고 하는 거짓된 믿음을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일일수록 상식에서 출발해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는 뉴스도 있었다. 어차피 그네들의 잔치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뭐 대단한 것인 양 취급하는 풍토가 그리 보기 좋지만은 않다. 신화로 승격된 월드컵 4강, 박세리-박찬호-박태완-김연아로 이어지는 스포츠 '월드' 스타들의 행렬, '세계적인 국가 브렌드'로 떠받들여지는 삼성, 그리고 해마다 꼴불견이 연출되는 노벨문학상 유력 운운하는 헤프닝까지. 이 모두 지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분단되어 망망대해에 섬이 되어버린(섬나라를 비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후진국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넓지 않은 땅덩어리에 인구만 많은, 그 인구가 너무 많다고 호들갑, 줄어든다고 호들갑을 피우는 '대한민국'의 소아병 증상 같기만 하다.  

 

그래도, 그러하기에 최소한의 상식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상식이 조금씩, 더디지만 천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 나라 인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독재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상식,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 민주주의와 인권이 최소한 이 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는 상식.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영화진흥위원회 심사에서 0점을 받은 작품이란다. '대한민국' 영진위가 칸 심사위원들보다 더 엄격하고 예술적인 식견이 높다면 그보다 이놈의 '대한민국'이 더 자랑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영진위가 그간 해온 작태에 비춰보자면 이 또한 상식에 반한다.  

 

잠수함을 찾아내는 초계함이었던 천안함이 잠수정의 어뢰에 맞아 피격되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잡혀가는 세상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이미 미네르바가 있었고 정연주, PD수첩,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가 있었고 4대강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상식에 반하는 일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새로운 일이 되지 못한다. 아니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 일상이고 다반사다.  

 

바야흐로 선거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투표로 말하라"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거리 곳곳에 내걸리고 있는다. 나는 이 선관위 홍보물을 볼 때마다 "투표만 하고 그냥 닥치고 있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투표로 복수하자'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에는 투표는 그저 아주 작은 한 부분의 원상복구(그것도 잘 된다면)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투표로 말해야 하고, 그럴 것이지만 결코 투표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p.s 미국 독립혁명에 지대한 영항을 끼친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이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왜 세습 군주제를 반대하는가? 그 아버지가 왕이었다고 해서 그 아들이 국가를 더 잘 통치할 것이란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일가와 서울대 입학생에서 보듯 이미 이른바 '자유대한'에서 부와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이 책이 고전인 까닭은 도처에 상식에 반하는 일이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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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여다보기-사라져가는 동네 사진관

4년 전 일이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들렸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콩알만 한(의사가 ‘요 게’ 태아라고 알려준) 물체가 찍혀있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십 수 일 된 생명.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열 달 뒤에는 분만대기실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촬영대기중인 예비 아빠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흔한 똑딱이(소형 디지털카메라) 하나 챙기지 않았지만 분만실 어딘가에 있던 카메라를 통해 출산 직후 아이의 모습은 동영상 CD로 구워져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일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인증샷’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가족사진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한 가족, 그것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졸업앨범 비를 아까워했지만 어머니는 졸업장보다 졸업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손주와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자 너희 식구 끼리나 찍으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찍힐까봐 두려우셨던 걸까?

인천 동암역 ‘역전 사진관’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진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나마 오래된 사진관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좀 묘한 도시다. 닫혀 있던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그 문으로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항구. 한국전쟁의 또한 한국 현대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도시. 낡아서 인기가 높다는 ‘바이킹’의 월미도와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있는 차이나타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최초로 등장했던 조선 사람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고 하니 그 무대가 인천은 아닐까 하며, 인천 부평구 십전동 동암역 광장에 있는 참 오래된 동네 사진관 ‘역전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님은 반공포로였어요. 이승만 대통령 적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 남아라, 그랬는데 아버님은 이북 사상이 싫어서 여기(남한)에 남게 되었죠.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당시 인천에 있던 동일방직에 많이 들여보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어머니 막내 삼촌이 평화사진관이란 곳에 근무하셨는데 동일방직을 나와 거기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배워서 사진관을 연 거죠.”

1964년 그렇게 만석동에 문을 연 부흥사진관은 1974년 지금 동암역 근처로 옮겨와 동암사진관이 되었고 1980년 지금의 동암역 남부광장에 자리 잡으면서 역전사진관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최광남 씨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 도시락 심부름을 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는 사진관마다 외무원(외판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티켓(할인권)을 팔면서 사진관 홍보를 해주었는데 이 사진관 가면 설탕 준다, 저기 사진관을 가면 수건 준다, 자기들 멋대로 그러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와서 왜 설탕 안 주느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죠. 아버님은 그게 못마땅하셔서 우리 사진관은 조금 하다가 외무원을 아예 안 두게 됐죠.”

다들 어렵던 시절, 설탕을 주거나 말거나 양장점이나 제화점과 같이 사진관은 큰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무렵 최광남 씨가 기억하는 최고의 호황은 1968년이었다. 1968년 정부는 모든 성인남녀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것을 만들게 했고 거기에는 하나같이 증명사진을 붙여야 했으니 국가적 차원의 기념촬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베트남 파병도 사진관 매출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파병군인 손을 통해, 이후에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손목시계와 사진기가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그만큼 사진을 인화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시대적인 특수였다면 연례적인 호황도 있었다.

“3월 입학 시즌이 제일 바빴지. 중고등학교 학생증 때문에 2~300명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온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사진관 일에 달라붙어야 했어요. 한 사람당 여섯 장씩 뽑아줬거든.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노광(필름에 적당한 빛을 줘서 밝기를 조정하는 일, 노출이라고도 한다)을 줘서 밝기를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사진에 조금만 오래 주면 그것만 색이 달라져버려. 그럼 그거 한 장만 오려내고 다시 필름을 현상해야 돼요. (옆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던 부인 임경희 씨는 ‘다시’라는 말이 제일 징그럽다며 추임새를 놓는다.) 나중에 많이 하면 달인이 되어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기계적으로 됐지. 그런데 또 학생들이 대부분 까까머리에 옷도 똑같은 검은 색 교복을 입었잖아. 다 인화하고 나오면 요만한(손바닥 절반 크기의) 봉투에 풀칠을 해서 사진 한 장을 붙여가지고 커다란 베니어판에 봉투들을 쫙 붙여놔요. 어떻게 일일이 다 꺼내보고 확인하고 찾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럼 자기 얼굴 찾아서 떼어 가는 거지. 그런데 자기 것만 떼어 가면 문제가 없는데 꼭 친구 것도 같이 가져가서 안 전해주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 친구는 왜 자기 사진은 없느냐 그러고. 그럼 그것도 다 필름을 다시 확인해서, 어떨 때는 필름의 명찰까지 확대해서 그걸 보고 찾아서 다시 뽑아주고 그랬죠.”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2~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암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 사진반 서클룸의 암실은 몰래 담배피기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붉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풍겨 나오던 알싸한 화학약품 냄새.

“그 당시에는 다 손으로 했어요. 암실에 들어가서 야광이라고, 붉은 다마(전구)에 필름을 비춰서…… 온도계도 없었지만 오래 하다 보면 새끼손가락 끝이 온도계야. 인화지에 노출을 준 다음 욕조에 약품을 타고 인화지를 담가서 희석을 시켜요. 처음에는 현상액, 그 다음에는 정지액, 정착액…… 약품들이 희석이 잘 안 되면 (사진에) 줄이 생기거든. 그럼 또 다시 해야지.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12시간 정도 담가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좀 오래되면 노랗게 돼. 사진 잘 보는 사람은 인화한 걸 보고 딱 그러지. 금방 변하겠네요. 그때는 그걸 다 손으로 하니까 손톱이 맨날 노래졌지. 또 건조를 해야 하는데 작은 탁자 크기의 건조기가 있어요. 스텐리스 판에 열장씩 얹어놓고 롤러 같은 걸로 물을 쫙 뺀 다음 약간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내는데 조금만 오래 두면 또 사진이 거기에 눌러 붙어. 그럼 또 다시 뽑아야 되고. 그게 다 기술이지. 암실에 있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 해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진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여긴 처음 올 적에는 총각 사장이더니 지금은 백발이 다 되었다며 농을 던지고는 딸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싶다며 가격을 묻고 가신다.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관을 하던 최광남 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뒤 신혼집을 겸한 사진관을 차려 독립한 것은 1980년. 그때만 해도 동암역 남부광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양계단지만 들어서 있어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최광남 씨는 낮에는 사진관을 부인에게 맡기고 인천항에 있는 선원조합에 취직을 했고 80년대 후반 경기가 좋아지고 형편이 좀 나아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사진관에 전념했다.

“88년 올림픽 앞두고 큰맘 먹고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해서 칼라사진 인화기를 샀어요. 5000만원이 넘었는데 당시 빌라 한 채 값이었죠. 그때 사람들이 참 사진을 많이 찍은 거 같아요. 사진기를 빌려주기도 했죠. 입학식이나 졸업식, 소풍이나 바캉스 같을 때. 제일 잘 나가던 게 올림푸스 팬이라고 24장짜리 필름 넣으면 48장 나오는 사진기인데 사람들은 같은 필름을 사도 여러 장 찍을 수 있으니까 좋고, 우리는 인화 많이 하니까 좋고. 그 기계(칼라사진 인화기)를 10년도 넘게 썼어요. 애지중지하며 썼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디카(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쓸 일이 없어지니까, 기계가 돌아가야 고장도 안 나는 법이잖아요. 그 안에 약이 들어가는데 헌 약이 빠지고 새 약이 다시 들어가고 그래야 되는데 약도 그대로 두니까 상하고. 그러면 쓰지도 않은 약 몇 개월에 한 번 갈아줘야 하고. 이래저래 적자만 계속 쌓여가니까 몇 해 전에 처분을 했죠. 여기 사진관 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큰 기계여서 내가 다 분해해서 고철상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13만원 고철 값 내주고 가져가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디지털인화서비스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 그 시기 대부분의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일명 DSLR이라고 하는 디지털카메라로 바꾸던 시기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디지털인화 시장은 2002년 12억 원 대였던 것이 2년 뒤 600억 원 대로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너나없이 사진기를 갖고 다니고 핸드폰에도 사진기가 장착되던 무렵, 사진기가 많아지니 더 많이 사진을 뽑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동네 사진관들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어. 디카가 들어오니까 나도 2000년인가 카메라 바디만 천 몇 백만 원짜리를 샀지. 그때는 1기가 메모리만도 60만원에 베터리 가격도 만만치 않아. 그때는 베터리가 TV리모컨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1기가에 얼마나 해? 4기가에 만원도 안 하잖아. 디카는 너무 빨리 바뀌고 다 수입에 의존하니까 부품도 금방 단종이 되어서 고장 나면 수리할 때도 없어. 그러니까 장비 구입하고 따라가기 바쁘지. 증명사진 전용 프린터기도 코닥 제품으로 600만 원짜리 샀는데 좀 있으니까 코닥이 생산을 안 한다는 거야. 사진관들 문 닫는 게 다 그런 이유야. 디카 나오기 몇 해 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증명사진 찍는 전용 폴라로이드가 있었어요. 25분, 17분, 5분, 3분…… 빨리 뽑아주는 게 경쟁이 될 때였으니까 그걸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98만원 주고 샀었는데 그것도 몇 해 지나서 무용지물이 됐지. 또 폴라로이드는 필름 값이 비싸잖아. 딱 찍고 1분 있으면 나오는데 보면 눈을 감았어. 그럼 다시 찍어줘. 또 눈을 감았어. 눈감은 사진 필름은 반품도 안 되는데, 속이 타지. 손님은 왜 자꾸 눈 감을 때 찍느냐고 그러고. 네 번까지 찍은 적도 있어. 그럼 뽑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그 필름이 여기 어디 있는데…… 마지막 쓴 게 2004년 9월이네. 디카가 들어오니까 그거야 좋지. 눈을 감든 말든.”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이가 이메일이니 포토샵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인 임경희 씨는 몇 해 전부터는 “머리 흰 소년(남편을 칭하는 애칭인 듯하다)이 젊은이들 결혼식에 사진 찍고 그러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출장사진도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사실 디지털화와는 별도로 행사사진촬영이 전문화, 기업화되면서 출장사진 주문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많이 했잖아. 그럼 나는 한 짐 싣고 다녔지. 오토바이에 병풍, 돌상에 올라갈 것들, 삼각대에 조명에, 나중에는 비디오카메라까지 메고. 그런데 가보면 집들이 다 좁아. 지금처럼 좋은 렌즈도 없으니까 방안에서는 돌상이 다 안 나오거든. 그러면 창문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서도 찍고 그랬어. 그런데 뷔페 문화가 들어오면서 싹없어졌지. 지금이야 다 그런데서 돌 사진, 결혼사진 그런 거 찍잖아. 또 아이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애들도 잘 안 낳지만 낳아도 이런 데서는 잘 찍으려고 안 하지. 또 영정사진 작업도 많이 했지. 사진이 서비스업이라고 나는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서비스 잘 했어. (웃음) 구겨지고 접히고 그런 사진 들고 와도 정성들여 복원해주고. 아마 저승에서도 다들 고마워하실 거야. 잘 모르겠는 거는 사진을 뽑아놨는데 안 찾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것만 다 찾아가도 내 형편이 많이 나아질 거야. (웃음) 신혼여행 사진도 어떻게 됐는지 안 찾아가. 신혼여행가서 갈라섰나? 전화해도 번호가 바뀌었어. 저기 밖에 걸어놓은 사진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보고 연락을 해줄까 싶어서 걸어놓은 결혼식 사진이야. 심지어 어머니 팔순잔치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사진은 찾으려면 목돈이 들어가니까 형제들 중에서 몇 십만 원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재고가 이렇게 많아.”

창고에서 그가 들고 나온 사진을 보니 테이블 한 가득이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많은 동네일수록 버려지는 앨범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에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버려진 사진은 버려진 사연이기도 할 텐데 실시간으로 찍고 버리기가 반복되는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걸까, 풍요로워진 걸까?

“필름은 정말 고심해서 찍잖아. 그래서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 마지막 필름 한 장, 마지막 한 방을 찍을 때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고 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래 쳐다보고 싶은 것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다. 사진관을 나서기 전 그는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와요.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더니 거동을 못하신데. 집에 가서 세팅을 하고 찍으려는데, 가족사진은 화목하게 나와야 하는데 다들 우울해. 얼굴 표정에 다 나타난다고. ‘미소 지으세요.’ ‘좀 웃으세요.’ 그래도 분위기가 침침해. 어떻게 하겠어. 그냥 찍어줬어. 그리고 배경도 다 합성해서 지저분한 거 없애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만들어줬는데 그 다음날인가 그분이 그만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집에 걸어놓기가 그렇다고 그냥 뽑지 말고 두라고 그러는데 세월이 지나서 마음 바뀌면 찾아가시라고 하고 뽑아서 보관해놓고 있었지. 그랬는데 2년인가 지나서 어머니가 찾아가시더라고. 안 버리기를 잘 했어요, 하시면서.”


- <삶이보이는 창> 5-6월호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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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프레시안 - 건투를 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별개로.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잔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한 질문이다.

<프레시안>이 '이미지 프레시안'(http://www.imagepressian.com/)이란 걸 만들었다.

왜 '포토 프레시안'이 아니라 '이미지 프레시안'인가?
같은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을 위해서 필요한 건 도대체 무엇일까?

사진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는 것, 이야기 하기 혹은 말걸기가 어느 만큼 가능할 것인가?

'이미지 프레시안'은 어떤 이해와 기억을 우리에게 전할 것인가?

아무쪼록 '이미지 프레시안'이 충실한 기록자인 동시에 현실에 관한 탁월한 해석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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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운동의 철학

 

여기 그림 하나가 있다.  

 

있는 것

없는 것

 

 

위에 있는 그림 중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있음과 없음>은 흔히 '존재와 무'라고 철학에서 일컬어지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존재론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을 읽고 3시간 가까운 강의를 들었지만, 감히 존재론에 대해, 윤구병의 존재론에 대해 입을 뻥긋하기도 벅차다. 어쩌면 철학에서 가장 머리 아픈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수학과 자연과학, 불교와 도교, 기독교 등 종교의 영역까지 맞닿아 있는 분야여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존재론은 윤구병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 엄밀성을 가져야 한다(그래서 논리학, 수학과 맞닿아 있다. 집합, 직선과 삼각형, 원주율, 적분과 미적분이 등장한다). 다시 그의 말에 따르면 존재론(그리고 철학)의 과제는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과 가장 작은 하나인 그 무엇을 양극단에 두고 이 두 끝, 한계 사이에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배열되는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겹쳐서 우주의 전체 구조와 그 구조에 따르는 기능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존재론의 과제는 종교와 철학에서 과학으로, 빅뱅이론에서 소립자까지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의 신앙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자연과학, 수학은 아직도 원주율(파이)의 어떤 규칙성도 질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직선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법칙을 곡선의 세계, 원에서 찾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구병은 농사짓는 철학자이다. 철학과를 나와 한국 잡지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지냈고, 어린이 책으로 유명한 보리출판사름 만들었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1995년 변산에서 공동체 학교를 열고 농사를 짓는 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론, 그리고 철학은 서양철학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편 불교, 도교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보다 있을 것과 없을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세상은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없는" 세상이며 그럴 때 존재론은 객관성이 아닌 당파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존재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가는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첫번째 질문,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답을 하자면 실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실선이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나가 되고, 실선이 없는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가면 좀 있는 것, 좀 더 있는 것, 조금 더 더 있는 것...오른 쪽으로 가며 조금 없는 것, 조금 더 없는 것, 조금 더 더 없는 것... 바로 실선, 경계에서 운동이 생겨난다. 실선이 없으면 다 있거나 다 없는 세상이 되고 말기에 실선, 경계야 말로 존재하는 세상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열쇠이며 운동의 출발점인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만이 아니다.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까지, 운동에서 관계맺음은 핵심이고 본성이다. 운동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본성에 대한 탐구, 경계에 대한 존재론, 존재에 대한 질문, 운동하는 존재의 철학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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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이라는 질문-침묵과 망각의 카르텔

#8.
지난해 어느 다큐 감독으로부터 '송두율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곧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계도시2>라고 했다. 솔직히 <경계도시1>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마치 금기의 언어인 것처럼 내 몸 어딘가를 찌릿하게 했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래는 <경계도시2> 공식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SYNOPSIS
2003 년,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37년만의 귀국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는 열흘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한국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친구들조차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DIRECTOR’S NOTE
Dynamic Korea, 한국사회는 여전히 숨 가쁘다. 그렇게 사건으로부터 6년이 흘렀고, 사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나버린 과거 사건일 뿐이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리 왔는가? 송두율 교수 사건을 통과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는지... 이 영화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이 되기를 희망한다.

[출처] [경계도시 2] 작품정보|작성자 bordercity2 


#7.
몇 해 전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적 있다. 나였는지, 그 자리에 다른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후마니타스에서 낸 책들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었인지 물었고 그 대답이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책은 2003년 여름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가 귀국했을 무렵,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중 '노동당 입당', '북한 정치국 위원'이란 말들이 언론에 등장했을 때, 한 강연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받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한 번 허탈했을 때, 그의 부인과 아들이 구명운동을 하고 다니는 것을 지켜봤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고백하자면 나또한 그와의 '비판적 거리두기'라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그저 광기를 피하고, 혹은 마녀사냥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6.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는 구속 이후 심경을 메모형식으로 담고 있는 '한 경계인의 비망록'이며, 그가 한국에 머물렀던 2003년 가을부터 2004년 여름까지 썼던 강연문(그러나 끝내 발표되지 못한 강연문도 포함되어 있다)과 편지글, 재판 과정에서의 최후진술 등을 담은 것이 2부다. 3부는 그가 독일에 돌아온 이후 사회와 철학,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고, 4부는 박상훈 대표와의 대담이다. 
 

#5.
그리고 부록으로 '사태 전개의 기록'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나는 '송두율 사건'의 이해를 위해 이 부록을 먼저 짧막하게 요약하고 싶다. 

- 송두율 교수는 2003년 9월1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국정원에 자진출두, 이후 네 차례의 조사를 받는다.  
- 9월30일 국회에서 정형근 의원이 송두율 교수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했다고,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이 사건이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 사건'이라고 언론에 공표했다. 
- 10월14일 송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노동당 탈당, 독일국적 포기 등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 10월22일 송 교수는 서울구치소에 입감되었고 2004년 1월까지 그의 스승이자 저명한 철학자 하버마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권터 그라스 등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 2004년 4월13일 국제엠네스티는 송 교수를 양심수로 지정했다.
- 7월21일 2심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며 광주 망월동과 그의 고향 제주를 방문한 뒤 8월5일 독일로 출국했다. 

#4.
그는 국정원 조사를 각오하고 귀국했다고 했다. 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간단하고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지만 그러하더라도 이러한 조사를 거부하며 끝내 귀국을 거부했던 윤이상 선생에 비춰 국정원 조사를 받아들인 그에게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4부 대담을 보면 사실과 다르다.   
"조사에 응하려 했다면 그전에 벌써 한국에 갔겠지요. ... 국정원과 기념사업회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며 입국 시 공황에서 내게 요구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얼마나 그를 모시고 싶었는지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나는 그의 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어쨌든 결코 간단하지도 형식적이지도 않은 국정원의 조사 가운데 그는 1973년 북한 입국 시 노동당에 가입하는 서류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말이 보수 정치인과 언론을 통해 툭 튀어져 나왔다.
이 때부터 과연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그가 거짓말을 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젊은 날 북한에 입국하며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말을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것의 연장선 상에서 그를 못 믿을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송씨에게 실망... 국민에 보다 진솔해야" , "송씨 친북행위, 민주화운동 욕되게 해"... 보수 정치인의 말이 아니다. 김근태, 장기표의 발언이다. '좌파 지식인의 배신', '사상적 간통'... 물론 보수 언론의 경우 더욱 심했지만 국가보안법을 없애라고 요구해온 이른 바 개혁진영, 진보진영에서의 이같은 태도는 또한 놀라웠다. 이들이야 제도권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 황석영이 그를 찾아가 "공개적으로 전향할 뜻을 발표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고 영구 귀국 의사를 표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전향공작 전담반이 아니라 한국사회 존경받는 작가가 말이다.
국가보안법 체제,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속한 정치조직을 미리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는 사회였다. 형법 어디를 뒤져도 거짓말이 죄라고 써있지 않지만 적어도 북한과 관련되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죄값을 치뤄야 한다.
결국 재판에서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부분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독일국적을 가졌던 그가 북한에 들어간 것도 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단 한 가지, 북한을 좋게 이야기하고 남한을 헐뜯었다는 것. 그건 이미 그의 저술활동을 통해 이미 드러나있던 것이었다.  
 

#3. 
3부 '다시 경계의 공간을 열며'에서 그는 경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계선은 원래 전투적 개념이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선으로서 공격과 방어를 가르는 배타적 개념이다. ... 그러한 경계가 선이 아니라 면이나 공간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경계면이나 경계공간은 이미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제3의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배타적인 이쪽과 저쪽은 대체로 이러한 제3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들거나 아니면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0과 1 사이에는 무수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제3의 무엇을 인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불확실성이나 애매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그것도 당장에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거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헛소리거나 아니면 중간에서 미적거리는 기회주의자의 억지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경계인'이 때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2.
그는 이 책 서문 말미에 이렇게 썼다.
"야만과 광기가 무섭게 휘몰아쳤던, 너무나도 낯선 땅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남편과 아버지를 지켜냈던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1.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송두율 교수가 일상의 철학적 주제를 엮어 만든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고 그에 대한 긴 편지를 받았다.
" (2004년 독일로 돌아간 뒤) 지난 2년 반 동안 선생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송두율 사건'은 선생님의 출국과 더불어 사회적 공론의 의제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되어 버린 겁니다. .. 모든 논의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 결국 200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약 10개월, 그리고 그 안팎의 시기를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기록'을 다시 접하면서 과연 이 땅에서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여지가 얼마나 남았나 하는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권력의 핵심은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기억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는 그 평범한 진리조차 실천해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이번 책이 '침묵과 망각의 카르텔'이라 부를 만한 그간의 상황에 대해 뭔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0.
며칠 전 윤구병 선생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들었다. 거기서 철학하는 일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묻지 않으면 답할 수 없다고 했다. 혹시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대로 된 답만을 구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게 위해서 물어야 하고, 묻기 위해 제대로 된 물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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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꿀꺽 술장수와 덥적덥적 술장수

꿀꺽꿀꺽 술장수가 술을 팔러 갑니다.  
덥적덥적 술장수가 술을 팔러 갑니다.  
 

"덥적이, 잘 있었나?"
"꿀꺽이, 잘 있었나?"

"목이 마른데. 덥적이, 나 한테 술 한 잔 주게. 여기 한 닢 있소." 
꿀꺽 꿀꺽

"덥적이, 술 한 잔 더 주게, 여기 한 닢 있소."
꿀꺽 꿀꺽 

......


"꿀꺽이, 나도 술 한 잔만 더 주게, 여기 한 닢 있소."
덥적 덥적 


"덥적이,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주게. 여기 한 닢 있소."
꿀꺽 꿀꺽 


"꿀꺽이, 나도 마지막으로 한 닢 주게, 여기 한 닢 있소."
덥적 덥적

"햐, 술 다 팔았네"
"허허, 나도 다 팔았네" 


"우리 또 만나 술장사 합시다."
"좋소, 그럽시다.

꿀꺽꿀꺽 술장수와 덥적덥적 술장수는 껄껄껄 웃으며 비틀비틀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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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짜리 딸내미가 요즘 꽂혀서 늘상 읽어달라는 전래동화다.  

읽다보면 이야기가 범상치 않다.   

비극(혹은 희극)의 근원은 한 닢을 둘이서 주고 받은 데 있다.  

거의 알콜중독인 내가 ...  동시에 술을 팔기도 했던 모양이다. 

위험하다. 

비틀비틀 걸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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