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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2/23
    인구과잉이 환경문제의 큰 원인?(1)
    달-1
  2. 2008/02/23
    자연에서 교훈 얻기?
    달-1
  3. 2008/02/23
    녹색정치사상을 읽다가 메모.
    달-1

인구과잉이 환경문제의 큰 원인?

***** 덧붙이기

인구 줄이기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이런 가정을 수용한 정책들은 아주 많은 인권 침해를 불러왔다. (이상한 건 인구를 줄이는 정책의 집행에 있어서 더 수월한 남성의 정관 수술보다는, 여성에 대한 수술이 더 많다는 것이다. 가정 내의 권력관계 등이 반영된건가? 누구의 육체가 통제의 대상이 되는겐가!) 여성들은 가난한 형편에, 돈을 받고서 산아제한을 위한 수술을 받는다. 간혹 이런 일들이 강제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3세계의 인구 과잉을 환경 문제의 원인으로 무겁게 올려놓는다. 기아, 빈곤, 환경 파괴는 모두 실패한 3세계의 인구 정책에서 비롯된다는 것처럼 말해진다. 여기에는 "유색인종"의 급격한 증가를 두려워하는 인종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도 문득 비친다.(비약일까?)

그러나 단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만으로도 이런 가정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3억도 안되는(즉, 전세계의 5%가 안되는) 인구를 가진 미국이 25%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인구수 = 환경부담이 아닌 것이다. 또한 3세계의 환경 파괴의 많은 부분이 인구 과잉 보다는 기업들의 진출, 개발 정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하다.

예컨대, 거대한 댐 공사는 많은 인구 때문에 - 즉, 그 사람들의 물과 전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산업을 만들고, 계속 성장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성장주의라는 종교는 유학 출신의 3세계 중앙 관료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다. 세계은행과 같은 개발 원조 기구, 1세계의 직접적인 원조는 산업의 발전을 위해 - 즉 경제 성장을 위해 - 댐의 건설을 '추천'한다. 댐에 의한 생겨난 용수와 전력은 산업에 1차적으로 쓰여지며, 그 와중에 제대로 전력을 쓰지도 못하는, 수몰민들의 이주와 정착 문제, 미기후의 변화로 고통받는 주변 지역민들, 수계 전체의 지역민들의 장기적 고통, 생태계의 파괴가 일어난다. 댐은 과잉 인구의 수요 때문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신화와 이윤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서 일어난다. 여기에 1세계의 기업들은 댐 건설에 참여하며 다시 이윤을 거둬간다. (때로는 원조금보다 이런 이윤이 더 큰 경우가 있다. 댐 건설은 중간에 건설비가 증가하는 걸로 유명한데, 그 증가분은 대부분 3세계 정부의 부담이 된다. 이렇게 원조가 착취로 둔갑한다.)

기아문제와 토지의 악화, 확대되는 경작지로 인한 생태교란, 숲과 정글의 지속적 개간도 과잉 인구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전세계의 식량은 모든 이들이 먹기에 풍부하다. UN의 공식 자료는 곡류만으로도 단순 계산을 했을 때(생산량/인구) 1인당 2000Kcal 정도의 열량이 섭취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런 점에서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GMO가 필요하다는 선전은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된다.) 농산물 수출국에서 계속해서 기아가 일어나는 어이없는 일도 발생한다. 이것은 소수에게 집중된 토지구조와 이와 연결된 수출지향적 농업 정책, 근대화에 뒤따르는 농산물 저가 정책, 여러 이유로 인한 (소농의) 농업의 포기와 도시의 슬럼으로 인구가 모이는 현상들이 겹쳐져서 일어나는 일이다. 집중된 토지구조로 인해 밀려난 농민들은 농업의 생태적 한계지로 몰리게 된다.

화전이 파괴적인 방식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화전은 국가의 비호를 받는 기업들의 대규모 산불보다는 빙산의 일각이다. 여러 기업들은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 농장을 만들기 위해, 목재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숲에 불을 질러왔다. 또한 3세계의 자원을 파내기 위해 만들어지는 (특히 노천) 광산은 거대한 면적의 숲을 파괴한다.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한 기업은 여의도의 수십배나 되는 열대림을 파헤치며 석탄을 캐고 있다.(이걸 수업 시간에 자랑이라고 듣고 있었다니...)

화전에 대한 비난 등 3세계의 과잉인구가 자연을 남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의해 등장하는 보존 정책들은 원주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숲의 부산물에 의존해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숲에 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의미와 같다. 버마, 케냐 등지에서 숲에 대한 보전 정책은 원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버마에서는 예상하다시피 군부에 의해 유혈진압되었다.) 과격한 보전주의적 생태주의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생태계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 오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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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교훈 얻기?


자연에서 교훈 얻기?

생태주의자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 '자연'이라는 것에서 교훈을 얻고 있다. 앤드루 돕슨이 지적하는 바대로 생태계의 다양성이 안정성을 가져온다는 생태학이라는 과학의 과학적 진술은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사회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직관적인 이유를 가져다주곤 한다. 또한 많은 이들은 자연이 가장 잘안다는 말을 중요한 원칙으로 받아들이며, '인위적'인 개입을 반대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직관과 원칙은 어떤 면에서는 옳지만 어떤 면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

일단, 나는 자연에서 - 생태계, 생물 군집을 관찰해 - 사회의 원리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유용한 시도가 아니라고 믿는다. 생명들이 정말 협동하는지, 공생하는지, 경쟁하는지, 약육강식인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일을 생물학적 관찰에 맡겨놓을 필요도, 그것에서 정당화를 할 근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인간의 윤리학은 그렇게도 취약한가.(그런데 난 윤리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해서 볼 때, 타인과 자신의 고통에 감수성을 가지고 소통하고 발언하는 것들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인간이 더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지 찾을 수 있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인간 외의 생물들의 행동에 대한 관찰이 아닌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우리의 일상에서의 반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생물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진화의 결정판이 아니라, 우연하게 나타난 생태계의 일부분이란 것, 인간은 결코 다른 모든 생물들의 -그리고 지구의 - '주인'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의식일 것이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생태계에 의존하고 밀접하게 살아가는지도.)

자연에서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어떤 원칙을 끌어낸다는 것은 "자연"을 절대적인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것과 같다. 자연은 절대적인 신의 위치를 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을 해석하는 렌즈 중 하나인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왜 같은 (야생의) 자연이 누구에는 경쟁이 우세한 곳으로 해석되고 누구에게는 협동이 우세한 곳으로 해석되는가.)과 자연에 대한 (역사특수적이고 주관적인) 사회적 이미지,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에서 어떤 원칙을 끌어낸다는 것이 결코 객관적인 권위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힌트이다.

많은 경우 '자연'에 근거해 호소하는 일은 약자에게 위협적인 일로 다가왔다. 자연에서 인간의 어떤 위치를 잡으려는 노력이 어떤 경우 반동적이고 우익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헛된 말이 아니다. 동성애가 자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가진다던지,(이런 생각을 가진 보수적 생태주의자를 두 눈으로 본 일도 있으니...) 출산과 양육은 자연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일이다라는 생각은 '자연'에 기댄 주장의 일면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이보다 더 체계적으로 사회 전체를 자연의 모습과 비교해 위치를 매겨놓기도 했다. 황제는 하늘이라는 식의, 혹은 사회의 위계구조를 우주관(그 중에서도 행성의 배치)을 통해 정당화하기도 했다. (우주관과 사회관은 대부분 통합되어 있었다.) 음양으로 표현되는 자연을 다스리는 법칙은 여/남에게 투사되기도 한다.

자연에 근거해 주장하기 보다는 어떤 것이 인간에게 덜 억압적인지 생각하는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닐까.

자연이 가장 잘 안다는 원칙도 제한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연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를 모두 인정하는 발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태계의 상호작용들 - 지하수의 거동, 어떤 군락이 사라지는 것이 전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화학적인 반응들 같은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부정의 원칙이다. 섣불리 과학기술로 생태계의 반응을 예측하고 개발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마치 천성산의 지하수 거동을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영향이 미미할거라고 판단되므로 터널을 뚫어도 된다는 주장에 우려를 표하는 것처럼) 자연을 관리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유구함의 관점도 그저 지금까지의 전통을 그대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특히 원주민, 과거의 생태적 지헤들을 인정하고 가져오려던 태도들이 보수적 경향들과 결합되어 전통이라 부르는 것 전체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물론 문화적 전통들은 생태적 지혜의 전통들과 결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긴 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비판적으로 (또한 생태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전통을 생태주의적으로 옹호할 수 있을 것인지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전통 옹호론이 막연한 자연주의적 관점(과거의 조상들은 자연에 잘 순응해 살아왔기에 그 삶이 생태적일거라는 아주 나이브한 가정들)과 민족주의적 관점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축제들과 공동체의 생활양식, 생산 방식을 옹호할 다양한 언어를 생산해야 한다. 거기에는 생태주의, 공동체주의,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성과들이 들어갈 틈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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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정치사상을 읽다가 메모.

밑에 모든 문장은 인용(** 은 제외)

-
(...) = 중략

-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

생태주의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이해되어야 할 점은 생태주의가 환경주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생태주의에서의 환경 보호는 그것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 환경주의는 환경문제에 대해 관리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여 현재의 생산 및 소비의 가치 또는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환경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런 맥락에서 고래를 구조하고 모피무역을 중지시키려는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녹색론적이 아니며, (...) 양질에 삶에 대한 녹색운동의 이념은 공장굴뚝에 이산화탄소 세정기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포함한다.


- 성장의 한계 -

생태주의는 무한한 인구증가와 경제 성장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회 정치행태가 심대하게 변화할 필요가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 첫번째는 선진산업국가에서 개인들에 의한 물질적 재화의 소비는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오날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는 인간의 욕구가 극대로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기술에 대한 입장 -

기술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전략의 일부분일 수 있지만, 한정된 체계 내에서의 생산 및 소비에 대한 절대적인 한계에 물질적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현재의 소비수준을 무제한의 재순환과 연결하려는 공상은, 생태학적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테크노크라트적 세계관의 특징이다. 재순환 그 자체도 자원을 사용하고 에너지를 소비하며, 열공해를 발생시킨다. (...) 쓰레기의 재순환은 녹색론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녹색론이 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은 것이다. (...) 녹색론자들은 일반적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전적으로 기술적인 해결책을 의심하며 상대적으로 재순환을 조심스럽게 승인하는...


-  인구줄이기 -

소비를 감축시키자는 문제와 관련하여, 녹색정치학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는 인구수준을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녹색론자들은, 장기적인 지구의 지속가능성은 일차적으로 더 적은 사람들이 더 적게 소비할 것이라는 이유로 인구감소를 내포한다고 믿어왔다. (** 음, 나는 이렇게 말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뎁.)


- 자연에서 얻는 교훈 -

자연세계가 인간세계를 위한 일종의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정치 사회제도에 대한 생태주의의 많은 처방들이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관찰로부터 추론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정치생태주의자들이 수용해 온 자연에 대한 자연에 대한 다정한 느낌을 수반한다. 자연계 내에서는 상호의존이 경쟁보다 우위이며, 평등은 위게보다 우선한다.(** 고 정치생태주의자들은 믿는다고 말하는 부분) 자연계의 주요한 특질과 그 특질로부터 이글어 낼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결론 또는 처방은 다음과 같다 : 생물 종 다양성 - 관용, 안정 그리고 민주주의,    상호의존 - 평등,    유구함 - 전통      여성으로서의 자연 - 페미니즘에 대한 특별한 개념

첫째, 어떤 생태계 내의 안정성은 그 체계 내의 다양성이 갖는 한 기능이라는 생태적 원칙이다. (...) 더 다양할 수록 그 체계는 안정적이다. (...) 다양성은 또한 우리 자신들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완곡한 어구임에 틀림없다. 소수자의 선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질성, 과도한 집중, 권력 남용, 무관심한 사회로 흐르는 현재의 추세에 반대하고 (...) 녹색운동과 관련된 일종의 분권화된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관계는 생태적 관점에서 보자면 공생관계이고 이러한 관계가 평등의식을 고양시킨다. (...) 더욱이 직접 관찰이 가능한 평등원칙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된다는 면에서 더 강한 의미를 갖는다. 평등의식을 유발하기 위하여 추상화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 그렇지만 상호의존적 관계가 필연적으로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다.

생태주의자는 우리는 자연계를 거스르고 살기보다 공생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면 우리가 살게 되는 일종의 공동체의 맥락에서 중대한 반향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연계의 유구함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좌익과 우익

생태적인 비폭력적인 비착취적인 사회를 실현시키려는 데 있어 독일의 녹색주의자는 좌익에서 우익까지라는 단선적인 범위를 초월해야 한다. (...) 이런 주장의 근거는 녹색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유사점이 그 차이점보다 더 크다는 데 있다. : 양자는 산업성장에, 생산수단의 확장에,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최고의 수단으로서 유물론적 윤리에,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기술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 양자는 점증하는 중앙집권화와 대규모의 대규모의 관료제적 통제 및 조정에 의존한다. (...) 이런 생활양식에 일반적으로 붙여진 명칭은 산업주의인데, (...) 생산과 소비과정의 영속적인 확대를 통해서만이 인간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한 집착이라고 묘사한다.

인간을 자연질서 속의 적당한 장소에 삽입하고 자연질서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녹색주의의 열망은 확실히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익이다. (...) 조 웨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분명히 관경, 사회문제들에 관한 녹색주의의 분석은 우익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넓은 틀 안에 있다. 성취에 대한 자연적인 한계를 인간이 믿는다는 것, 계급론의 거부,  그리고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점은 모두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 부문들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를 초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좌익의 신념은 반대편의 주장을 의심한다. 좌익이 도출한 대체적인 결론은 생태주의는 사회변화 - 자본과 노동자의 관계 - 라는 실제 논점에서 관심을 벗어나게 해 자본주의 체제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생태주의는 산업주의라는 초이데올로기를 잠식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명해왔다. 녹색주의자들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유럽에서 저질러진 높은 수준의 환경악화를 지적하는 것은 용이한 것이었다. 만약 생산과정 그 자체가 성장의 한계라는 사상에 의해 그 발전이 방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면,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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