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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교훈 얻기?
생태주의자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 '자연'이라는 것에서 교훈을 얻고 있다. 앤드루 돕슨이 지적하는 바대로 생태계의 다양성이 안정성을 가져온다는 생태학이라는 과학의 과학적 진술은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사회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직관적인 이유를 가져다주곤 한다. 또한 많은 이들은 자연이 가장 잘안다는 말을 중요한 원칙으로 받아들이며, '인위적'인 개입을 반대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직관과 원칙은 어떤 면에서는 옳지만 어떤 면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
일단, 나는 자연에서 - 생태계, 생물 군집을 관찰해 - 사회의 원리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유용한 시도가 아니라고 믿는다. 생명들이 정말 협동하는지, 공생하는지, 경쟁하는지, 약육강식인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일을 생물학적 관찰에 맡겨놓을 필요도, 그것에서 정당화를 할 근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인간의 윤리학은 그렇게도 취약한가.(그런데 난 윤리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해서 볼 때, 타인과 자신의 고통에 감수성을 가지고 소통하고 발언하는 것들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인간이 더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지 찾을 수 있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인간 외의 생물들의 행동에 대한 관찰이 아닌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우리의 일상에서의 반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생물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진화의 결정판이 아니라, 우연하게 나타난 생태계의 일부분이란 것, 인간은 결코 다른 모든 생물들의 -그리고 지구의 - '주인'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의식일 것이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생태계에 의존하고 밀접하게 살아가는지도.)
자연에서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어떤 원칙을 끌어낸다는 것은 "자연"을 절대적인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것과 같다. 자연은 절대적인 신의 위치를 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을 해석하는 렌즈 중 하나인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왜 같은 (야생의) 자연이 누구에는 경쟁이 우세한 곳으로 해석되고 누구에게는 협동이 우세한 곳으로 해석되는가.)과 자연에 대한 (역사특수적이고 주관적인) 사회적 이미지,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에서 어떤 원칙을 끌어낸다는 것이 결코 객관적인 권위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힌트이다.
많은 경우 '자연'에 근거해 호소하는 일은 약자에게 위협적인 일로 다가왔다. 자연에서 인간의 어떤 위치를 잡으려는 노력이 어떤 경우 반동적이고 우익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헛된 말이 아니다. 동성애가 자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가진다던지,(이런 생각을 가진 보수적 생태주의자를 두 눈으로 본 일도 있으니...) 출산과 양육은 자연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일이다라는 생각은 '자연'에 기댄 주장의 일면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이보다 더 체계적으로 사회 전체를 자연의 모습과 비교해 위치를 매겨놓기도 했다. 황제는 하늘이라는 식의, 혹은 사회의 위계구조를 우주관(그 중에서도 행성의 배치)을 통해 정당화하기도 했다. (우주관과 사회관은 대부분 통합되어 있었다.) 음양으로 표현되는 자연을 다스리는 법칙은 여/남에게 투사되기도 한다.
자연에 근거해 주장하기 보다는 어떤 것이 인간에게 덜 억압적인지 생각하는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닐까.
자연이 가장 잘 안다는 원칙도 제한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연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를 모두 인정하는 발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태계의 상호작용들 - 지하수의 거동, 어떤 군락이 사라지는 것이 전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화학적인 반응들 같은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부정의 원칙이다. 섣불리 과학기술로 생태계의 반응을 예측하고 개발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마치 천성산의 지하수 거동을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영향이 미미할거라고 판단되므로 터널을 뚫어도 된다는 주장에 우려를 표하는 것처럼) 자연을 관리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유구함의 관점도 그저 지금까지의 전통을 그대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특히 원주민, 과거의 생태적 지헤들을 인정하고 가져오려던 태도들이 보수적 경향들과 결합되어 전통이라 부르는 것 전체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물론 문화적 전통들은 생태적 지혜의 전통들과 결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긴 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비판적으로 (또한 생태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전통을 생태주의적으로 옹호할 수 있을 것인지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전통 옹호론이 막연한 자연주의적 관점(과거의 조상들은 자연에 잘 순응해 살아왔기에 그 삶이 생태적일거라는 아주 나이브한 가정들)과 민족주의적 관점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축제들과 공동체의 생활양식, 생산 방식을 옹호할 다양한 언어를 생산해야 한다. 거기에는 생태주의, 공동체주의,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성과들이 들어갈 틈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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