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의 증언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어랑군이다. … 내가 12살때인 1929년 8월 어느날 밤이였다. 칼을 차고 장총을 멘 일본경찰놈들이 구장놈을 앞세우고 불쑥 지주집마당에 들어섰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내가 자는 사랑채에 뛰여들었다. 놈들의 거센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나는 얼이 쑥 빠져나간채 대문밖으로 끌려나와 짐짝처럼 화물자동차에 실리였다. 불의에 당하는 일이여서 나는 소리도 치지 못했고 울지도 못하였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마을을 빠져 도망치는 자동차적재함우에서 허우적이던 나는 앞쪽에 무엇인가 서로 엉켜있는것을 가려볼수 있었다. 그것은 짐짝이 아니라 내또래의 처녀애들이였다. 그들 역시 랍치된 10대의 소녀들이였다.》(피해자 리경생)

《나는 어느날 구장놈을 앞세우고 마을에 나타난 칼을 차고 총을 멘 일본군대놈에게 다짜고짜로 끌리워 23명의 조선처녀들과 함께 부산까지 실려갔다. 거기에는 20살안팎의 조선녀성들이 수백명이나 모여있었다. 일본군장교놈들이 조선녀성들앞에 나서서 〈이제부터 일본군장교들에게 절대복종하라.〉고 을러메고 배에 오르라고 명령하였다. … 이렇게 되여 나는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였다.》(피해자 강길순)

《하루는 어깨에 별 2개를 달고 옆구리에 긴칼을 찬 왜놈순사가 찾아와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면서 무작정 나를 끌고갔다.

그때 옥경이라는 22살 난 처녀도 함께 끌려갔다. 순사에게 끌려 평양역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이미 20살안팎의 조선처녀들이 15명정도 모여있었다. 그들도 모두 나처럼 아무 내막도 모르고 속히워 끌려온 녀성들이였다.》(피해자 박영심)

《1945년 3월 어느날, 밤 10시가 넘었는데 경찰관주재소의 왜놈순사와 면서기가 우리 집에 나타나서 〈징병〉령장을 내보이면서 래일 오전에 〈군청〉으로 오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한 온 집안식구들이 통곡을 하는통에 우리 집은 초상난 집같이 되였다.

나는 도망치고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붙잡히는 날이면 죽음을 면할수 없게 될것이고 붙잡히지 않는다 해도 나때문에 온 가족이 왜놈들에게 탄압을 받게 될것이므로 그럴수도 없었다. 이튿날 〈군청〉에 가니 다른 5명의 청년들이 이미 끌려와있었다.

일본군소위의 인솔하에 안성역에서 기차를 탄 우리는 이틀만에 함경북도 라남에 있는 제19사단으로 끌려갔다.》(피해자 진태범)

《1944년 5월경 어느날 면서기의 지시를 받은 구장이 집에 들이닥쳐 〈징용〉에 나가라고 하였다. 구장은 나에게 〈네가 징용에 가지 않으면 가족을 모조리 멸살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2년동안 갔다오라고 하였다. 며칠후에 면에 신체검사하러 오라는 련락을 받고 가보니 그곳에는 400여명의 청장년들이 있었다.

그중 200명이 합격되였다. 놈들은 합격된 사람들가운데서 100명만 일본에 갈수 있다고 하면서 〈제비뽑기로 100명을 선출한다.〉고 하였다.

내가 뽑은 제비표가 117번이여서 나는 한시름을 놓고있었는데 그해 6월 어느날 나에게 갑자기 〈징용〉통지서가 도착하였다. 당시 결혼한 몸이였지만 집에 화가 미치는것이 두려워 일본에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였다.》(피해자 박용수)

본사기자
주체107(2018)년 7월 17일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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