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탄(風樹之歎)

2011/12/26 10:31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22년에 나신 외할아버지가 90세에 이르도록 정정하시더니 지난 6월20일,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지셔서 중환자실로 입원하셨다.

외가는 전남 장흥인데, 이제 그곳에는 돌봐줄만한 사람이 없어서 큰딸인 우리 엄마가 계신 화순 병원으로 오셨다.

 

그때는 금방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자손들이 줄줄이 병원을 찾았다.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오가며 그렇게 여섯달을 더 계셨다.

그러다 12월22일 생을 마감하셨다.

1977년에 할머니, 1978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96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올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일모레 칠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이제 나는 완전히 고아가 돼버렸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렇게 나의 할아버지 세대도 마감해버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외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외갓댁에서 상을 성대히 치렀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 조문객을 맞고, 꽃상여를 꾸몄었다. 밤에는 상여를 띄우며 걸판진 놀이판도 벌어졌다.

발인한 뒤에 상여행렬이 동네를 두루 지나며 노제를 두 곳에서 지냈고, 개토하며, 하관하며 제사를 두어번 더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상여조차 없이 외갓댁 마을회관에서 노제를 지내고 바로 선산으로 가서 외할머니 곁에 15년 전에 마련해 두었던 가묘에 묻히셨다.

당신은 유림으로 한 평생 사시며 그 누구보다 장례절차에 대해 꼬장꼬장하셨지만, 정작 당신의 행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아니, 복잡하지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선명치 않다.

다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이제부터는 웃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기억만 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장례 과정을 거치면서는 생각도 많았고 기억도  또렷하다.

어쨌든, 생각을 다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흘려버리고싶지도 않다.

어른이 돼서도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나중에 곱씹기로 한다.

외할아버지 빈소에서, 나는 손발을 무척 바지란히 움직였다.

평소에 집안일에 보탬되는 일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왕 그곳에서 사나흘을 보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꾀부릴 여유도 주면서 여하튼 나는 한 시도 쉬지 않고 표 안나게 잡일을 했다. 오죽했으면 발인하는 날은 온 몸의 살들이 아파올 정도였다.

외할아버지 홀로 외롭게 외갓댁에 지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가끔씩 들러 봉투를 내미는 것 뿐이었는데도, 외갓댁 머나먼 친척들은 그런 나를 칭찬하곤 했다. 기실 그런 참한 일을 하는 외손주는 우리 삼남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장에서 쳐주는 축은 따로 있었다. 궂은 일을 하고 있는 나는 그저 궂은 일로 보시하는 '여식'일 뿐이었고, 출세해서 남보기에도 그럴싸한 행색으로 찾아와 두툼한 조의금봉투를 내밀고 바쁘다며 총총히 사라지는 자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내가 그나마 주목받은 것은, '외조부' 상가임에도 천리길을 마다않고 조문을 와준 동지들 덕이다.

서울에서 온 자손들이 다들 "멀어서 오지 말라했다"며 조문객 없음에 대해 그럴싸하고 실제 그러한 이유를 들먹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집안행사에서 별로 본 적도 없는 꾀재재한 외손녀를 찾아온 조문객들은 그들에게 놀라웠을 터다. 외손의 조문객은 큰딸인 우리 엄마의 자식들인 오빠와 나에게만 해당이었던 터라, 평소 막내딸 직업이 무엇이라 친척들에게 딱히 설명하지 못하던 엄마도 조금은 어깨가 펴진듯 했다.

 

체면치레 좋아하시던 외할아버지도 흡족하셨으리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만다.

마음만큼 중요한 것이 겉치레 아니던가. 하물며 그 결정판인 '상례(喪禮)'가 아니던가.

 

어쨌든 더웁고 선선하던 시절 병상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는 눈이 많이 내리고 춥디 추웠던 지난 12월24일에 외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평소 주변에서 많은 죽음을 보고 겪어왔던 터라, 이제는 더이상 '죽음'이 감정까지 건드리지는 않는듯 하다. 외할아버지 입관 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손이 나뿐임을 알고 조용히 입관실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실상, 외할아버지의 죽음보다는 섧게 우시는 어머니 때문에 가슴 아팠던 상(喪)이었다.

이제 부모님의 '죽음'이 성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늘 계시는 게 아닐 거라 알고 있을진대, 어이 부모를 대하는 자세는 후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인지.

나이 불혹 넘어서도, 그저 철없는 막내딸일 뿐인 내 처지가 새삼 한심스럽다.

마침 해가 바뀌는 대목이라, 다르게 살기를 모색해볼만한 적당한 때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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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0:31 2011/12/26 10:31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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