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 평소처럼(그렇군. 나는 언제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늦게 일어나 혼자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매번 그렇듯이 TV를 켜고 채널을 24로 돌렸다. 방송3사 파업 이후 YTN의 뉴스는 무성의하고 재미 없고 시답잖은 것들을 내보내고 있다. 진행자조차 자신들의 무성의와 무의지를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40에서 다큐멘터리 환경스페셜을 방송하고 있기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지하 깊은 굴속에서 일꾼들이 긴 파이프를 동굴의 벽 속에 밀어넣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이윽고 미국 에너지자원부의 관리가 고준위방사성 폐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을 검토중이라는 발언과 함께 방사성 폐기물을 1만년 동안 격리시킬 저장소 어쩌구 저쩌구 하는 발언 도중 방사성 폐기물은 1만년이 지나야 99.9%의 방사능이 소멸되기 때문에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나는 잠시 한국의 관리들이라면 어떤 발언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랬더니 바로 2003년 부안 방폐장과 관련된 자료화면이 나온다. 방사성 폐기장을 부안에 설치하겠다는 
부안 군수의 기자회견에 이어 방폐장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대치중인 전경들, 그리고 바로 정부가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며 부안 군수에게 전화 통화를 하며 웃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화면에 나온다.


* 부안 방폐장 그 후의 이야기는 이렇다.
“부안 방폐장 사태 군민 아직도 고통…국가 대책 세워야”(경향신문)
「盧武鉉 386」등이 불러들인 迷信과 狂風이 부안의 꿈을 빼앗아갔다(월간조선)

그렇다.시나브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들이 잊혀진다. 물론 노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저렇게 했을 것이다. 단지 노무현이 꿈구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밥 맛이 없었다. 서둘러 밥상을 물리고 냉장고에 반찬통을 집어 넣으면서 나는 이제 분노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했다. 분노란 몸과 영혼을 갉아 먹을 뿐이다.

[우리마을 이야기]의 작가 오제 아키라는 한국어판에 부치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작품에 착수한 때는 1991년 가을이었다. 반대운동이 시작되고 어언 25년, 공황의 개항으로부터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산리즈카에서 '나리타공항문제 심포지엄'이 개최되기 직전이었다. 이 심포지엄은 운수성, 공항공단, 공항반대동맹의 삼자가 참가하여 약 1년에 걸쳐 월 1회 대화를 진행함으로써, 왜 반대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근원적인 검토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취재하면서 무엇보다도 강하게 느낀 것은 "때린 사람은 자기가 때렸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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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 15:31 2012/06/0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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