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천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3살이 되면 재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5살이 되면 기질이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아이의 기질을 살려주지 않으면 서서히 사라져서 결국 평범한 아이로 자란다고 하는데 부모가 이 시기에 아이의 기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는 특정 분야의 천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경우,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이의 천재로서의 기질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진흙구덩이에서 뒹구는 아이가 수학의 천재가 될 수 있을리 만무하고 부모가 양쪽 모두 일을 나가야 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자식이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이그렇게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인간의 천재성을 억압하는 가장 실제적인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과 소비에트 문화예술의 화려한 개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소개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의 부모가 누군인지 나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이 소년은 분명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그의 행운이 온전히 그의 몫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활동이 모든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성진이 신이라고 말하는 Radu Lupu의 연주를 유투브에서 찾아 보았다. 이 친구는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인데 6살에 처음 피아노를 연주했고 12살에 데뷔했다고 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고 배웠습니다. 겸손하게 피아노를 공부하겠습니다.” 12살짜리 ‘꼬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2006년 이화경향콩쿠르 피아노 부문 우승자. 결선이 끝나고 경향신문사를 찾았던 성남 신기초등학교 6학년 조성진 어린이는 또래들과 다른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이화경향콩쿠르에 이어 그는 2008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쇼팽콩쿠르 우승, 2009년 일본의 하마마쓰 콩쿠르 최연소 우승 등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프로페셔널 연주자로서 평가받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 출신의 숱한 콩쿠르 우승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 그랬던 조성진에게 평론가와 애호가들의 관심이 일거에 쏠린 것은 2009년 12월이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15살짜리가 어떻게 저런 연주를!’이라는 반응이었다.
이제 19세가 된 조성진이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뮌헨필하모닉과 협연한다. 프랑스 파리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그를 서울 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지난 11일 만났다. “파리로 언제 떠났느냐?”고 묻자 “여섯 달 됐어요”라며 배시시 웃는 모습은 7년 전과 똑같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7년 전에 느꼈던 경이로움을 또 한번 느끼게 했다.
-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독일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많이 가던데, 파리국립음악원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유럽으로 가야 했죠.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파리는 문화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도시인 것 같아요. 지난 6개월간 살 플레옐과 샹젤리제 극장을 드나들면서 정말 많은 연주회를 봤어요. 그리고리 소콜로프,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머레이 페라이어, 라두 루푸…. 아, 정말 원없이 보고 있어요. 그분들의 연주를 보면서 공부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한 명의 청중으로 즐기는 거죠.”
- 폴리니 선생은 워낙 연세도 많고 지금 병환 중인 것으로 아는데, 연주가 어땠나요.
“미스 터치가 많았죠. 그런데도 손가락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어요. 젊은 날의 연주가 그대로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았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했는데, ‘비창’ 2악장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죠. 소콜로프는 베토벤의 ‘함머 클라이버’를 연주했는데 미스 터치가 거의 없는 완벽한 연주였어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감동적이었죠. 뭐라고 말할까요, 칼날 같은 연주가 주는 감동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파리에서 만난 최고의 무대는 라두 루푸의 연주회였어요. 작년 10월 파리에서 그분 독주회가 있었죠. 피아니스트라면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에요. 연주회가 끝나고 정경화 선생님한테 부탁드렸죠. 루푸 선생 앞에서 연주해보고 싶다고요. 두 분이 친구잖아요. 정 선생님이 자리를 주선해주셔서 루푸 선생 앞에서 베토벤 협주곡 4번을 연주했어요. 물론 레슨도 받았죠. 꿈만 같았어요. 신(神)에게 레슨을 받는 기분이었죠.(웃음) 이번에 서울에서 바로 그 곡을 연주합니다.”
- 파리국립음악원의 미셸 베로프(64)가 지금의 스승인데, 그가 연주한 드뷔시의 피아노곡들은 한국에도 아주 팬이 많지요. 직접 겪어 보니까 어떤지. “백건우 선생님도 얘기하는 것처럼, 베로프 교수님은 아주 쿨한 성격을 가지셨어요. 손가락을 다친 이후에는 콘서트를 별로 안 하시죠. 하지만 수업 중에는 시범을 많이 보여주세요. 프로코피에프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안무적인 음악’에 강한 분이죠. 물론 드뷔시와 라벨 같은 프랑스 레퍼토리에도 능하시고요. 선생님이 특별히 강점을 보여주는 레퍼토리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게 지금 저의 숙제죠.”
- 이번에 서울에서 지휘자 로린 마젤과 협연하는데, 예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요.
“예, 2009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한식 알리기 행사가 열렸는데 마젤 선생이 거기 오셨더라고요. 그냥 식사하러 오신 거였어요. 그런데 그날 제가 20분 정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서가 있었거든요. 그걸 보시고는 두 달 뒤에 저를 ‘캐슬턴 페스티벌’에 초청하셨어요. 마젤 선생이 직접 만드신 음악페스티벌이죠. 거기서 마젤 선생의 부지휘자와 함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어요. 언젠가는 마젤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무대에서 협연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죠. 이번에 드디어 이뤄졌어요. 영광스럽죠.”
연주회는 4월21~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협연할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이다. 아직 약관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한 이 피아니스트가 혹시 다른 것에는 담을 쌓고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슬며시 일었다.
그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은 “대중음악도 듣느냐?”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튀어나왔다. “김광석 좋아해요. 2년 전에 유튜브에서 처음 듣고 완전히 반했어요. 기교도 거의 없이, 목소리 자체만으로 감동을 주는 가수예요. 특히 ‘서른 즈음에’, 그 노래 정말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