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여유를 준다. 하나의 주도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양한 어떤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수동적인 지시에 익숙한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많은 상황이 오히려 힘들고 곤란할 수도 있다. 주어진 것만 하면 되는데 굳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피곤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문제적(problématique)”이라는 말은 전통적인 철학적 입장과 결별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전통 철학에서 문제는 언제나 해답에 종속되어 있고, 해답이 없는 문제는 문제로서 가치가 없다. 문제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답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가 말하는 "문제적"이라는 말은 어떻게 새로운 사유가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나다"라는 자기 동일적 주체를 확립한 것도, 나 바깥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물음도 모두 내가 이미 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정해진 답을 동어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던진다는 것은 정해진 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동일성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그 바깥을 보려는 시도다.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근본적이다. 누군가 "그래 문제가 뭐야?"라고 말하는 건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왜 쓸데없이 문제를 만드느냐는 추궁에 가깝다. 문제가 없고,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를 던지고, 의문을 갖지 않으면 새로운 뭔가를 찾을 수 없다.

해답에 종속되지 않은 문제는 해답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는가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다. 문제는 답을 찾아 가는 조건이다.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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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류는 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만을 제기한다."(Daher stellt sich die Menschheit immer nur Aufgaben, die sie lösen kann, ...) 

여기서 'Aufgaben'은 '문제'를 뜻하는 Frage나 Problem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Aufgaben을 문제로 번역한 글들은 사실 오역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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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2 22:41 2025/08/02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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