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각 꿈의 모양은 달라도 꿈의 색깔들은 ‘녹색’

/경향신문, 2012. 3. 24

닻 올린 녹색당… 다른 세상을 가꾸는 사람들

한국 녹색당이 닻을 올렸다. 녹색당은 지난 1일 펴낸 <녹색당 선언>에서 “작지만 거대한 녹색 열망들이 모자이크처럼 엮여 녹색당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됐다”고 밝혔다. 먹을거리, 육아·교육, 탈핵, 청년, 풀뿌리정치, 생명·평화 등 제각기 꾸는 꿈의 모양은 다르지만 꿈의 색깔은 녹색으로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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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신생정당이지만 녹색당과 그 당원들에게서는 주춤거리는 빛을 찾기 어렵다. 주요 의제인 ‘탈핵’에 맞춰 벌써부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7~18일엔 전국 녹색당원 70여명이 신고리원전 송전탑 건설 반대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경남 밀양을 찾았다. ‘탈핵 희망버스’에서 만난 녹색당원들은 녹색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다.

얼굴이 하얀 회사원에서 살갗이 까맣게 탄 농민까지 저마다 다른 얼굴빛만큼 녹색당원들의 생각은 아주 다양했다. 동물보호, 환경운동, 교육운동 단체 등 여러 분야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기존 정당의 활동가뿐만 아니라 평범한 가정주부, 회사원, 대학생, 청년 백수 등 신분도 다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 정치나 그 비슷한 것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생애 첫 정당’으로 녹색당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 사는 회사원 정재호씨(30)는 탈핵 희망버스에 오른 것을 두고 “사회운동 모임에 온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때 운동권 근처에도 가본 적 없다”는 정씨가 녹색당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8개월 전 시작한 채식이다. 정씨는 “녹색당에 가입해 동물복지와 소수자 인권보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동안 의심없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아들였던 보수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대학생 김정원씨(24)는 “한 깃발 아래 모이라는 기존 진보정당의 구호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져 싫었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시의 한 당원(34)은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이라며 “다른 정당들은 특정 사안에 대해 시비를 따지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우리 녹색당은 그런 비판을 받더라도 옳고 그름의 문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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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원들이 당에 가입하고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정당과의 차별성이다.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김혜진씨(40)는 “생태에 관심이 많아서 당내에서 문화생태대책위원회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존 진보정당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을 우선시했다”며 “경쟁과 성공, 좋은 대학, 명품만 바라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고민은 녹색당에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군에서 농사를 짓는 박호율씨(36)도 “농민을 위한 정책을 진정성있게 할 수 있는 정당은 녹색당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것들이 자꾸 체결되면 기업형 농사꾼들만 살아남게 되고 나머지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며 “내가 사는 동네에도 벌써 녹색당원이 5~6명 있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시에 사는 반정환씨(27)는 “풀뿌리자치, 직접민주주의 같은 가치들과 녹색당이 부합하는 것 같아 가입했다”고 밝혔다. 스스로를 “시골에 산다”고 강조하는 반씨는 “마을에서 이장회의가 있으면 이장도 관변단체처럼 돼버려 주민들의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공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말했다. 녹색당을 통해 “주민들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마을자치를 하는 것”이 반씨의 꿈이다.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대표로 지역에서 환경운동을 해온 송숙씨(48)에겐 누구보다 녹색당의 존재가 절실했다. 송씨는 “어렵사리 지역 활동을 벌이던 중 녹색당을 만나게 됐고, 녹색당을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당연히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녹색당은 환경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환경정책을 구색 맞추기용으로 여기는 여타의 정당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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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서울시당 운영위원장을 맡은 정유진씨(26)는 당내 의사소통 과정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녹색당만의 장점으로 꼽는다. 정씨가 말하는 ‘풀뿌리 소통’은 “우리가 똑똑하고 잘 배운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소통하는 구조”이며 “이상한 소리를 해도 부끄럽지 않고 반대의견을 내도 감정적으로 우려되지 않는 소통방식”이다.

대다수 녹색당원들의 공통된 희망은 ‘탈핵’이었다. 경기 안산시에 사는 회사원 김시권씨(48)는 “탈핵을 위해선 녹색당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전에는 원전이 핵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충격을 받았다”며 “물건을 튼튼하게 잘 만들기로 유명한 일본이 넘어갈 정도면 오죽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오는 6월5일 환경의 날에 맞춰 지역에서 탈핵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홍순성씨(47)도 “종전에는 인간은 언제나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핵발전의 안전을 신뢰하는 편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안전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현재로서는 탈핵을 이루는 게 가장 큰 꿈”이라고 말했다.

녹색당의 당면 목표는 다음달 총선에서 2% 이상의 정당 득표율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정당법에 따라 강제해산된다. 1980년대 말부터 줄곧 창당을 모색해 이제 가까스로 결실을 맺었는데 맥없이 해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당 안팎에서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오히려 녹색당원들의 의지를 북돋고 있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활동하는 김기언씨(47)는 “당이 잘될 거라곤 생각하지만 해산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당 해산이 두려워 아무나 어거지로 끌어다 붙였겠지만 지금은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시대”라는 것이다. 김정원씨도 “지금은 재정도 어렵고 진보신당도 2% 지지를 못 받아 허덕이고 있어 불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며 “장기적으로 크게 크게 나간다면 튼튼한 정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순성씨는 “선거에서 의석을 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며 “많은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것보단 나를 포함한 개개인의 변화를 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혜진씨도 “창당하자마자 선거 국면으로 돌입하는 바람에 녹색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 실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며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일단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본격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에 비하면 녹색당은 신생아나 마찬가지”라며 “우리의 활동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지만, 일반시민들은 당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녹색당 선언>에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독일 녹색당 창설에 기여한 철학자 루돌프 바로의 말을 빌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보다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이다”라고 적었다.

‘생애 첫 정당’으로 녹색당을 선택하고, 보다 다른 것을 꿈꾸며 녹색당에 모여든 녹색당원들의 표정에선 자그마한 설렘이 묻어났다. 정재호씨는 “해운회사를 다니는데 연료인 벙커유 가격이 상승해 요새 불황”이라며 “김종철 선생님이 쓴 ‘탈석유시대’를 준비하자는 글에 공감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탈석유, 탈원전이 당장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가발전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사회가 되면 원전 송전탑도 필요없을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렌다”며 웃었다.

박호율씨는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에서도 어린이, 중·고등학생, 대학생 등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회사원 허갑열씨(35)는 “단기간의 성장 강박에서 벗어나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나무들이 베어져나간 밀양 송전탑 부지에 녹색당원들은 영산홍 한 그루씩을 심었다. 또 언제 뿌리 뽑힐지 모르지만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녹색당의 녹색 기운이 이어진다면 따뜻한 봄, 꽃피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서화 기자 tingc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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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18:47 2012/03/25 18:47

‘반정당의 정당’ 기치… 탈핵·실질적 민주주의 중시
/경향신문, 2012. 3. 24


단 200여 명이 모였다. 지난해 10월30일 서울 선유도공원에서는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이들에겐 넉넉잡아 서너 달 안에 5000명을 모아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녹색당 창당 발기인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환경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굳이 정당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솔직히 12월까지는 전망이 잘 안 보였어요.” 하승수 녹색당 사무처장의 말대로 두 달이 지났지만 당원은 1000여 명에 머물러 있었다. 현행 정당법상 정당 등록을 하려면 5개 광역 시·도에서 각각 1000명 이상 5000명의 당원을 모집해야 했다. “그래도 두 달 동안 200명에서 1000명으로 5배 늘었으니까 남은 두 달 동안 또 5배가 늘면 5000명이 될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요.”

바람은 어느덧 현실이 됐다. 2월 중순쯤 기적처럼 5000명이 넘어섰다. 경기·서울 지역에서 시작된 녹색당 창당은 부산·대구·충남으로 이어졌다. 지난 4일에는 마침내 창당대회를 열어 당헌과 강령을 채택했다. 현재는 당원이 7000명에 육박했고 제주·인천·경북·경남에도 창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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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여성당원들이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홍대 앞 ‘카페 슬로비’에서 녹색당 이름이 새겨진 카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번번이 실패했던 녹색당 창당 시도를 떠올리면 감격스러울 만도 하다.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던 초록정치연대는 당원 부족으로 정당 등록을 못했고 무소속으로 나선 선거 결과도 좋지 못해 곧 해산됐다. 회원 일부는 ‘초록당사람들’로 남아 다시 녹색당 창당에 나섰다. 이번에는 달랐다. 무엇보다 지난해 3월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영향이 컸다. 하 처장은 “살아온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이때까지 환경·시민운동가들은 중립을 표방하며 정치 활동을 꺼렸다. 일정 정도 체념하며 지역에서 풀뿌리 공동체를 일구고 훗날을 기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을 바라보며 끓어올랐던 답답증은 후쿠시마 사고에서 터져 나왔다. 그간 정치와 거리를 뒀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녹색당 상임강사’를 자처하며 창당에 앞장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녹색평론 20주년 기념호에서 1983년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한 뒤 30년 만에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를 가결한 독일의 사례를 들었다. 그러면서 “현행 제도 내에서 최대한 민주주의의 공간을 넓혀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쿠시마 이후 핵발전에 제동을 건 나라들에는 모두 녹색당이 있었다. 세계 2위의 핵발전 밀집국인 벨기에, 핵발전이 전기의 75%를 차지하는 프랑스가 그랬다. 결국 핵발전 문제를 ‘정치’의 테이블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미 한국의 핵발전소는 21개가 가동 중이고 7개가 건설 중이며 6개가 계획 중이다. 더구나 최근 삼척·영덕에 8개를 더 짓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지금’ 녹색당이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한숨이 나왔다.

녹색당은 “2030년까지 핵발전을 중단하자”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특히 친환경농업이 발달한 충남 녹색당이 다섯 번째로 빨리 창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농업’을 중시한다. 근본적으로 화석연료에 의존한 ‘경제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지속가능한 문명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생태·환경분야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 녹색당이든 가치의 핵심은 실질적 민주주의다. 지난해 7월 녹색당이 창당 첫 제안이 나오기도 전에 개설한 것이 ‘페이스북’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당원 모두가 함께 취지문과 강령을 만들어나가려 했다는 것이다.

녹색당 강령에는 비폭력과 평화, 다양성 존중, 노동권 보장 등 폭넓은 보편적 가치가 담겨있다. 여성 당원이 절반을 넘는데다 상근 직원도 8명뿐인 전국당도 중앙집권적인 기성정당의 틀을 깨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추구한다. ‘반정당의 정당’이라는 녹색당의 기치는 기성 정당과 다른 철학과 실천을 추구하지만 현실 정치에서의 발언권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흔히 ‘환경보호는 배부른 소리’라며 녹색당이 ‘중산층 정당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녹색당을 괴롭히는 화두는 특별당비 모금이다. 선거운동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 처장은 “형편이 어려운 농민·청년·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1만~2만원의 후원금이 바로 녹색당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며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고스란히 내는 학생들을 보면 정말 본래 뜻을 잘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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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18:40 2012/03/25 18:40

원자력과 인간성 상실 /김종철
경향신문, 2012. 3. 22.


고리 원전 1호기의 냉각 시스템이 12분간 중단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달 뒤에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고됐다는 사실이다. 사고 낌새를 우연히 알아챘던 한 시의원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끝내 은폐됐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게 볼 때, 12분 후 전원이 회복되었다는 것도, 회복되었으니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원전이란 원래 가공할 위험성을 내포한 시설이지만, 고리 원전 1호기는 유별나게 사고가 빈번한 핵 시설로 이미 널리 알려져 왔다. 설계 수명대로 폐쇄해야 마땅한 노후시설을 무리하게 연장 가동함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지금까지 중대사고가 없었던 것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원전당국이나 정부는, 후쿠시마 이후에도, 고리 원전을 포함한 전국의 원전에 대한 확실한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증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유일한 조치는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옮긴 일이지만, 그 수장에 평생 원전업계와 함께 일해 온 인사를 임명함으로써 위원회의 존재이유를 정부 스스로 부정하는 몰상식을 드러냈다.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이 땅에서 중대한 원전 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정말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은 그래도 한국보다 훨씬 영토가 넓다. 만약 한국에서 사고가 난다면 어디로 도피할 수 있을까. 가령 서울은 직접적 방사능 피해지역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배후지를 잃은 서울이 과연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원자력은 완벽한 관리·통제가 불가결한 기술이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언제라도 방사능 대량 유출 사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 시설은 겹겹의 방호 설비를 갖추도록 설계되어 있고, 원전당국과 국가에는 가장 엄격한 안전관리 책무가 있다. 그러나 원전은 아무리 엄격히 안전조치를 강구한다 해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단지 사고 발생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뿐이다. 본래 생명과 상용 불가능한 게 방사능이기 때문에 방사능 방출 사고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낮은 확률’을 ‘절대적 안전성’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라는 지식인이 그렇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온갖 문제에 관해 발언을 하고, 많은 젊은이들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돼온 이 ‘지(知)의 거인’은 원자력에 관해서는 평생 일관된 옹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는 며칠 전 사망 직전에 가진 인터뷰에서도,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으로 인류가 쌓아온 “최첨단 과학기술의 성과”인 원자력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 다시 원숭이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얘기라며, 필요한 것은 방사능에 대한 ‘완벽한’ 방어책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간사에 과연 완벽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원래 실수를 하게 마련인 존재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인간은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철학자 하이데거가 원자력에 관해 강한 의문을 품었을 때, 근본적인 논거가 바로 그것이었다. ‘원자력 시대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강연(1963년)에서 하이데거는 말했다. “설령 원자 에너지를 관리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관리가 불가결하다는 것이야말로 (중략) 결국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근본적인 무능을 은밀히 폭로하는 것이다.”

원자력이라는 대책 없는 기술을 인간생활에 도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성에 내재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무시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자력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공허한 관념에 빠지기 쉬운 도시 지식인의 망상에 불과한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원자력 옹호자·추진론자 중에서도, 적절히 관리만 한다면 원전이 절대 안전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증거는 원전이 언제나 가난한 시골 벽지만을 골라서 건설되어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원전 부지를 고를 때 정부와 업계가 항상 고려하는 첫째 조건은 “인구가 적고 학력 수준이 낮고 서울에서 먼 곳”(영덕/영양/울진/봉화지역 국회의원 녹색당 후보 박혜령씨의 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원자력 체제의 치명적인 비윤리성이 있다. 원자력은 미래의 인간 후손과 이 세상의 숱한 생령들에 대한 배려 없이 오로지 현세대 인간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원천적인 부도덕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대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도 서슴없이 요구하는 폭력적 기술이다. 위험구역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장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전 지역 주민들도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동네에 원자력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기꺼이 반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시골 사람들이 결국 원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폐한 지역경제 때문에 달리 먹고 살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방의 피폐상황은 산업화 이래 농촌공동체의 희생을 강요하며 도시 중심의 번영을 추구해온 일관된 정책노선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 이 농어촌지역의 강요된 빈곤을 이용하여 원전을 받아들이게 하고, 또다시 그 자리에 원전을 증설하려는 게 권력 엘리트들의 습관적인 행태이다. 정부와 업계, 어용학자, 어용언론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흥청망청 전기를 소비하면서도 그 전기 속에 포함된 약자들의 피눈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도시민들의 죄도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원전을 새로 건설하려면 권력의 중심지인 서울의 세종로나 강남의 번화가에 세울 것을, 반어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안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어디에서도 세워서는 안 된다고 누구보다 서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절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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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4 20:56 2012/03/24 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