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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졸렬해지자. 좀 더.

숨 막힐 것 같은 '공적'언어들에 대한 강제에 움츠러들지 말자.

졸렬해지자, 마음을 내뱉자.



<당신은>


 당신은, 새터 도중에 내가 누군가 챙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술 마시는 양을 조절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함께 있던 어떤 동기/후배/선배가 과반이 “모두” 모였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 눈치 챌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 사람이 혹시 어디선가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새터 장소를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동기/선배/후배에게 “힘들지 않냐”고 마음을 담아 물어보는 일을 했었습니까?

 당신은, 아래와 같은 일을 겪고 난 뒤 새터 이후에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들음으로써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고학번 서포터즈’에서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고 그것이 내 잘못도 아니었음에도 나는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해야 하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몸이 부딪쳐 튕겨나갔지만 그것은 몸이 약한 내 잘못인 것 같았고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최대한 크게 내도 뒤처지는 것 역시 다른 반 서포터즈들과 비교해 ‘약점’이 될 수 있는 내 잘못이 될 수 있었다. (중략..) 폭력적인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동기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앞섰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투명한, 사라진 존재로 만드는 분위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자신이 없어야 할 곳임을 느낄 때, 가슴까지 따끔한 가시밭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 <2006년 사회대 새터의 분위기 폭력을 ‘느끼고’, 비판하며>, 작년 새터 직후 한 학우의 글


  “남자애들은 이렇게 응원하고 여자애들은 뭐, 옆에서 박수치면 되겠다.” , “응원을 하려면 높은 목소리는 효과가 없어. 낮은 목소리가 있어야지.”라는 말에서, 그런 말뿐이 아니라 응원에 남자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힘찬 동작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분위기.. (중략) ‘저도 07,08,09 새터에까지 와서 선배들(대부분이 남자)처럼 멋진 고학번 서포터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다짐하는 학우도 있지만 화장실에서 겨우 조그맣게 ‘결국은 남자들만 남는 건가요’ 라고 묻는 학우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 (중략) 반의 열광적인 다른 반 쳐들어가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쉬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시는지.

 - 2006년 사회대 새맞이 기획단 문화팀 평가서 중

 

 

 겨울딛기 디딤이들은 보았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여러 비판의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응원들이 2006년에는 ‘언터쳐블(untouchable)'한 응원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점점 더 손쉽게 고민을 놓게 되는 상황들을. 그 속에서 고학번 서포터즈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심지어 응원을 주도하는 상황들을. 2006년 새터 이후에, 어떤 반에서는 반 이름의 사과자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반에서는 반대표의 사과문이 타 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사후(事後)에 그리 야단스레 사과할 일을, 어째서 그 당시에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내 의지가 아닌, 술의 탓입니까. 아니면, 새터는 ‘원래 그러고 놀려고 가는’ 곳이어서 저지르고 보는 것입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 기억들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기억이란 것이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고, 기억은 쉽게 추억이 되고 추억은 쉽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질 수 있습니다. 기억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제 생각해봅니다. 누구의 기억은 쉬이 인정받고, 누구의 기억은 조용히 은폐되는지를. 누군가의 기억이 ‘대다수의 기억’으로, 새터에 대한 ‘보편적 기억’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누군가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묻혀 개인의 고통으로만 남게 되고 어디로도 들리지 않게 된다면, 어떤가요. 인정받은 기억과 인정받지 못하는 기억은 단순한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즐거웠던’ 새터에서 ‘즐기지 못한’ 나는 사회대의 구성원이 아닙니까? ‘재미있었던’ 새터 이야기에 쉽게 끼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다른 이의 말을 듣고만 있는 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가요? 내년 내후년 새터에, 작년 재작년 새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른 일정을 핑계로 씁쓸하게 불참하는 고학번 선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 새터의 기억은 편협되게-모든 개인의 기억은 편협하겠지만, 자신의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편협함을 말하고자 해요-기억되고 비슷한 기억끼리 반복 재생산이 이어지기 쉽지 않을까요.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고, 나의 기억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내가 나와 유사한 여러 기억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없었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억과 우리의 기억이 알려짐으로써 당신과의 관계에 작게나마 ‘변화’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당신에게 2007년 새터에서는 내가, 우리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를, 당신이 우리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듯,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말하듯, 그리고 인정받기를 원하듯이 당신의 기억도 들려질 수 있기를 원해요. 재미있으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셨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언제든 더 활발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겨울딛기 프로젝트 커뮤니티로 방문해주세요. 들려주세요. 당신의 기억도. 

 

2007 사회대 겨울딛기 프로젝트 온라인 커뮤니티 주소 http://club.cyworld.com/stepo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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